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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산된 혼인식 (47/70)

무산된 혼인식

“으음…….”

“전하? 이제 정신이 드시옵니까?”

“헉! 여, 여긴…….”

워낙 충격적인 장면에 기절을 하였던 피어스는 전혀 익숙지 않은 낯선 방에서 정신을 차리다가 깜짝 놀랐다.

“안심하십시오, 전하.”

“그댄…….”

“타르탄 성의 성주인 게이트 후작이옵니다, 전하.”

“아! 게, 게이트 후작이었군요. 한데 내가 어떻게…….”

“만찬장에서 있었던 일로 큰 충격을 받으셨기에 이렇게 방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으…….”

그의 말에 기절을 하느라 잊고 있었던 그 공포스러운 일이 떠오르며 온몸에 소름과 오한이 들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황궁에서만 자라 온 그에게 만찬장에서 보았던 그러한 장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몸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많은 피가 사람의 몸 안에 있는지 그는 지난 만찬장에서 비로소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끔찍하고도 공포스러운 장면에 얼치기 가학성 인격을 가지고 있는 피어스는 마치 듀라한이라도 본 것처럼 온몸을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그런 피어스의 모습을 보면서 게이트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리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왜…….’

처음부터 알았다면 진즉에 말렸을 것이다. 하나 한편으로는 피어스가 이번에 겪은 일이 약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황자라는 지위를 이용한 그의 비밀스러운 행동들은 이미 비밀 아닌 비밀이 되어 있을 정도였다.

황제로부터도 황태자로부터도 몇 차례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정상적인 행각은 계속 이어져 오고 있었고, 그만큼 그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궁을 넘어 밖으로 밖으로 전해졌다.

“전하께서 진정하실 수 있도록 약을 드리도록 하게.”

“예, 후작님.”

피어스를 돌보는 전속 마법사가 무엇인가에 놀라 이처럼 발작에 가까운 반응을 보일 때면 늘 지어 주던 약을 조제하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전하의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은 것 같군. 어떻게 해야 하지? 진정을 하실 수 있도록 그 약을 좀 더 사용해야 하나? 하지만 그건 중독성이 워낙 강한 약인지라…….’

지금도 여전히 몸을 부들부들 떨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는 피어스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전속 마법사인 미하일은 이전과는 달리 좀 더 많은 양의 진정제를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지를 갈등하였다.

어려서부터 무엇인가에 놀라면 몇 날 며칠을 지금처럼 벌벌 떨며 식은땀을 흘리는 것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피어스였기에 그의 곁에는 늘 마법사가 따라다니면서 그의 상태를 돌봐 주고 있었다.

문제는 미하일이 피어스에게 그동안 이러한 일이 있을 때마다 투여한 진정제였다. 어릴 때부터 피어스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늘 효과가 있었던 약들도 곧잘 부작용을 일으킬 때가 많았다.

너무나도 민감한 체질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약을 쓰는 데 있어서도 상당히 조심을 해야 할 때가 많았던 것이다.

한데 지금처럼 무엇인가에 크게 놀랐을 때에 쓴 진정제는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아니 악의적으로 상대의 이지를 흐트러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마약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경기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하여 피어스가 어릴 때부터 이래서는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를 진정시켜야 할 일이 생기면 지금처럼 마약을 계속하여 사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런 약은 처음부터 중독성이 너무 강한 약이었고, 사용하는 빈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양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이미 그 사용하는 양이 너무 많아져 자칫 약의 부작용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을 정도가 되어 조마조마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뭐 하는가? 어서 전하를 편안하게 해 드리지 않고?”

“예? 예…… 후작님. 고, 곧 됩니다.”

고민을 하던 미하일은 엉겁결에 대답을 하고 실수로 그동안 간신히 유지되어 오던 양을 넘긴 것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서둘러 약을 피어스에게 먹였다.

“하…….”

“무슨 약인데 전하의 표정이 저러시는 것인가?”

“아, 이 약의 효과는 원래 이렇습니다, 후작님. 조만간 다시금 맑은 정신을 차리실 것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눈에 초점까지 잃어버린 채 무엇인가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신음 소리와 함께 입가에도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까지 지어 보이는 모습이 영 이상하게만 보였다.

하나 게이트는 이러한 것에는 전혀 문외한이었기에 단지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여도 마법사가 알아서 하였겠지 싶었다.

“그런가? 알겠네. 하면 자넨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게.”

“예? 예. 그럼 소인은 이만…….”

미하일이 황급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무래도 제국 제일의 기사인 게이트와 한 공간에, 그것도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였으니 찔리는 마음에 서둘러 그를 피한 것이었다.

“으음…… 후작?”

“이제 좀 진정이 되시옵니까?”

“후작께서 무슨 일로……?”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으십니까?”

“그게…….”

“전하, 왜 그러셨습니까? 그는 이제 곧 제 나라로 돌아갈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듣기로 공주와 그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란 것을 이미 몇 차례나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으음…….”

“결국 그로 인해 모랄레스 성의 성주인 선즈 자작이 죽었습니다. 그가 비록 망나니 같은 자라 하더라도 그는 제국의 뛰어난 기사. 그러한 선즈 자작을 이런 일로 잃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손실인지 전하께서는 모르십니까?”

“그것이…… 마, 맞아요. 난 그냥 단지 이스턴 백작 그자에게 조금 창피를 주는 정도로…… 저, 정말입니다! 정말 그 정도만 하라고 했을 뿐입니다. 믿어 주세요, 후작!”

“…….”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비록 황태자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지만, 이처럼 비겁하고 자기변명에만 급급한 피어스의 모습을 보니 속에서 울컥 치미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게이트의 말투와 표정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차갑게,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 버렸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폐하께 별도의 보고는 드리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저, 정말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내 후작에게 반드시 보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보답은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다만 이스턴 백작의 일에 대해서도 전하께서는 일절 함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제 더 이상 그를 위해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또다시 이와 같은 일이 있다면 그때는 소관 또한 모든 사실을 낱낱이 폐하께 보고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흥! 왜 그를 감싸는 것이지요? 그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말입니다!”

발작하듯 소리치는 피어스의 모습에 게이트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금 굳은 어조로 분명히 말하였다.

“모르십니까? 선즈 자작은 처음부터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음을?”

“하면…….”

“전하께서는 그가 단지 종이라는 것을 황실에 바쳤다고 해서 황제 폐하께서 그에게 성과 작위 그리고 영지를 내리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아니란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것이 이유의 전부였다면 그에게 단승 작위나 내리지 그런 식으로 성과 영지까지 내리진 않으셨을 것입니다.”

“으음…….”

“폐하께서는 그가 포넬과의 전쟁에서 세운 전공은 물론, 왕국의 왕도인 소렌토에서 한 일까지 모두 알아보신 후에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

“그라면 충분히 블랙 대공, 아니 용맹한영혼이란 자를 견제하여 최대한 시간을 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단 말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이 한 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그 한 명으로 인해 큰 흐름이 바뀔 수는 있는 일이었다.

제국에서는 게르혼족이 더 강해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아 보기 위해 로엔 왕국 전체의 힘도 필요했지만 이처럼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자 또한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종이라는 것을 판매하게 되면 그만큼 많은 재물을 취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더 많은 군세를 만들고 유지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키운 군세로 용맹한영혼을 억제하는 것이 바로 제국이 원하는 것이었다.

“아시겠습니까? 하니 이러한 일이 두 번 다시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소관과의 이러한 약속을 어기신다면 소관 또한 어쩔 수 없이 만찬장에서 있었던 일을 황제 폐하께 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으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숨이 턱턱 막혀 오는 피어스였다.

공포. 피어스는 자신의 부친인 황제에 대해 심각할 정도의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황제는 단 한 번도 그를 따뜻하게 대해 준 적이 없었다. 무엇을 하든 그는 늘 아비인 황제의 눈에 들었던 적이 없던 피어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황제의 차가운 비난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채 점점 비뚤어져만 갔던 것이다.

‘후…… 어찌 이리도 꼬여 있단 말인가.’

“전하, 소관은 전하가 폐하께 꾸지람을 듣길 원치 않사옵니다. 또한 전하께서도 그에게 이제 더 이상 관심을 가지실 이유도 없을 것이옵니다. 어차피 그는 제국의 안녕을 위해 쓰이다 버려질 그런 존재일 뿐이옵니다.”

상심하는 피어스를 달래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제국에 있어서 로엔이나 알마리온은 그저 자신들을 위한 또 다른 창이나 방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나라들이었다.

다만 그것을 좀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해 로엔에는 피어스와의 혼인을, 그리고 알마리온에게는 작위와 상징적인 영지를 내린 것뿐이었다.

“…….”

하나 그런 그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피어스는 좀처럼 헐떡거리는 숨을 진정시키지 못하였다.

“전하? 전하!”

“헉! 헉! 야…… 약! 약을…… 어서!”

“마법사! 마법사 밖에 있는가! 밖에 있으면 어서 들라! 어서!”

게이트의 다급한 호출에 혹시나 싶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미하일이 황급히 뛰어 들어왔고, 상태를 보아하니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하나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피어스의 상태를 진정시키는 일. 결국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더 많은 약을 그에게 복용시키고서야 그를 진정시킬 수가 있었다.

하나 이미 사람의 몸이 견딜 수 있는 양을 훨씬 넘은 양을 복용시킨 때문에 피어스의 몸은 아주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져 버릴 수 있는 유리잔처럼 변해 버렸다.

어쨌든 일단 피어스가 다시금 안정을 되찾자 게이트는 차분한, 하지만 아까와 같은 질책 같은 것은 전혀 담기지 않은 말투로 그를 설득하였고, 알마리온에 관해서 더 이상 그를 괴롭히거나 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만찬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친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자네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것인가!”

“…….”

“아무리 자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였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제국의 귀족을 상대로 그런…… 그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어제 만찬장에서 있었던 일로 알마리온에 대한 프리모의 추궁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그따위 야만족 계집…….”

순간 알마리온의 눈빛이 차갑게 변하자 프리모는 저도 모르게 말을 꿀꺽 삼키며 순간적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화를 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해서는 안 될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바로 지금의 프리모 또한 그러했다.

어제 만찬장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그 또한 크게 놀란 상태였고, 그런 일을 벌인 이가 다름 아닌 알마리온이었기에 더더욱 화가 났던 것이다.

처음부터 알마리온과 관계된 일에 있어서는 무엇인지 딱히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의도했던 일들과는 전혀 다른 결과나 의도한 대로 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처음에는 그 존재조차 알 필요도 없던 노예 출신 병사에서 왕국의 일곱 번째 익스퍼트가 되어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더니, 자신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혁혁한 공을 세워 승승장구하다가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다소 안도하게 만들더니 다시금 종이라는 것을 만들어 재물을 쓸어 담게 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왕국 최고의 작위인 후작은 물론, 자신도 받지 못한 제국의 백작이라는 작위와 성까지.

하여 이제는 그의 이름만 들어도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프리모였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가슴에 쌓여 왔던 그에 대한 감정이 그가 어제 벌여 놓은 일로 인해 한꺼번에 폭발하듯 솟구쳐 나와 해서는 안 될 말실수를 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 또한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지금의 그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프리모가 맞나 싶을 정도로 평소의 그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하나 그의 말실수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왕국 최고의 귀족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흠! 흠! 어, 어쨌든. 그는 제국의 귀족. 자, 자네의 행동은…….”

“공작, 그가 왕국의 후작이긴 하지만, 그 또한 제국의 황제로부터 백작이란 작위를 받은 정식 귀족임을 잊으신 것이오?”

곁에 있던 도르첸이 끼어들었다. 그런 도르첸의 행동이 다시 마음에 들지 않아 흘겨본 프리모가 다시 크게 헛기침을 하며 알마리온을 계속 나무랐다.

“어쨌든 그의 일도 그러했지만, 자네로 인해 황자 전하마저도 크게 위험한 상황이었네. 만약 그때 게이트 후작이 나서지 않았다면 어찌 될 뻔하였는지 자네도 잘 알겠지?”

“그 점은 소관의 실수였습니다. 너무 격분한 나머지 힘을 조절하지 못하였습니다.”

“실수? 그 일이 단지 실수라는 말로 무마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

“관대하시고 또 은혜로우신 황자 전하께서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네를 용서하시겠다고 하는 것인지 내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황자 전하께오서 자네가 어제 벌인 모든 일을 불문에 부치라 하셨네. 하니 자네 또한 바다와 같은 자비심을 가지고 계신 황자 전하의 은혜로움에 대한 보답을 하여야 할 것이네!”

피어스가 어제의 일을 불문에 부치겠다고 한 것은 게이트 의 경고 때문이었음을 프리모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어제 있었던 일들이 모두 피어스의 흉계로 빚어지게 된 일이고 알마리온은 그런 피어스의 흉계를 응징하기 위해 사고를 가장하여 피어스를 공격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은 흉계를 꾸미고 그러한 흉계를 역으로 이용한 두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게이트가 유일하였으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내 말 알겠는가?”

“예, 전하.”

“그만 나가 보게.”

“…….”

그만 나가 보란 말에 알마리온은 목례를 한 후 방을 나왔다.

“뭐라고 하십니까?”

그나이제나우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훗! 달리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냥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겠다고만 하더군요.”

“하긴 그 이상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요. 어쨌든 그자가 주군을 모욕한 것만은 분명한 일이니 말입니다.”

“…….”

“하온데…….”

“무슨 일입니까?”

“아무래도 공주님의 용태가 좋지 않습니다.”

“으음…….”

하긴 그 여린 심성의 카산느가 눈앞에서 그런 끔찍한 광경을 보았으니 탈이 날 만도 할 것이다.

“공주님을 돌보는 치료사는 만나 보았습니까?”

“별다른 이상은 없지만 워낙 큰 충격을 받으신 때문에 당분간 심신을 절대안정시켜야 한다는 말밖에는 없었습니다.”

“공주님의 곁에는 지금 누가 있습니까?”

“공주님의 수행원들이 공주님을 돌보고 있긴 하지만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내가 후작 각하께 말씀드리고 황자 전하를 돌보는 마법사님을 청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주군.”

그나이제나우와 헤어진 알마리온이 성주인 게이트의 방으로 그를 찾아갔다.

“내게 부탁할 것이 있다 하였나?”

“예, 후작 각하.”

“일단 앉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뭐라도 한잔하겠나?”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술을 권하였지만 알마리온이 이를 거절하자 알마리온이 앉은 맞은편 자리에 게이트가 앉았다. 하나 두 사람 사이에는 이렇다 할 대화가 없이 잠시 침묵과 함께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래, 내게 부탁할 것이 무엇인가?”

“공주님의 용태가 좋지 않습니다. 하여 황자 전하를 돌보는 그 마법사님을 청하고 싶습니다.”

“공주께서 말인가?”

“그렇습니다.”

“알겠네. 곧 마법사를 보내 공주님을 돌보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각하. 하면 소관은 이만 일어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한 알마리온이 막 방을 나가려 할 때였다.

“자네…….”

“…….”

“꼭 그의 양녀를 아내로 맞이했어야 하는가?”

언젠가 누구라도 이런 말들을 물어 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긴장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상황이 도저히 용맹한영혼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상세한 내용을 모르는 이들은 충분히 왜 그랬는지 추궁할 수 있는 문제임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말을 하였다.

“그와 소관이 개인적으로 어떤 관계이든 정국에는 전혀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소관이 그의 양녀를 아내로 받아들인 조건이었습니다.”

“으음…….”

알마리온의 말뜻을 못 알아들을 게이트가 아니었다.

“그럼 소관은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피어스와 카산느 두 사람 모두 심한 충격을 받은 때문에 결국 일정은 또다시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훗! 모두 널 마치 듀라한 보듯 하는데?”

“형님도 참…… 그렇게 할 일이 없으시면 좀 주무시죠?”

“잠을 왜 자? 너도 생각해 보라고. 내가 언제 또 제국에 올 일이 있겠어? 하니 기회가 있을 때 충분히 놀아 줘야 하지 않겠냐?”

“훗!”

아마도 어느새 어느 가문의 참한 레이디와 눈이 맞은 모양이었다.

‘형님이 점점 조급해하시는구나.’

전혀 내색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알마리온은 리처드가 포넬의 일로 인해 점점 조급한 마음이 되어 감을 느낄 수 있었다.

로엔과의 전쟁이 끝나고, 정적들은 물론, 언젠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도 모를 자들을 대부분 전쟁을 통해 세를 확실하게 줄여 놓거나 제거해 버리는 데 성공한 고메즈 대공은 조만간 포넬의 국왕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때문이었다.

그렇게 고메즈가 포넬의 국왕이 돼 버리면 자신의 복수는 더더욱 어려워지는 것이었기에 리처드는 저절로 마음이 조급해졌고, 그러한 조급함을 어떻게라도 풀기 위해 이처럼 자신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리처드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상대는 너무 강했고, 자신들은 아직 그에 대적할 정도가 아니었다.

‘레드로는 물론, 그들 모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모를까.’

그가 생각하는 그들이란 바로 ‘정령의꿈’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마스터이자 바로 자신의…….

‘어차피 더 많은 힘을 필요로 했는데 왕국에서도, 제국 측에서도, 그리고 그분도 내게 더 많은 힘을 키우라 하니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가 폰티악 후작에게 굳이 해상을 장악하라 부추긴 이유도 따지고 보면 모두 리처드의 일 때문이었다. 어쨌든 포넬을 가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지 않으면 안 될 일이기 때문이었다.

굳이 그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리처드는 알마리온이 그렇게 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에 울컥울컥 치미는 분노와 울화, 그리고 어쩌면 끝내 복수를 하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삭이기 위해 지금처럼 부질없는 애정 행각을 벌였다.

“그럼 나 외출하고 돌아오마.”

“그렇게 하십시오.”

리처드가 성을 나가 버린 후 알마리온은 잠시 성 밖에 머물고 있는 병사들을 살피기 위해 야영지를 다녀왔다.

“그대가 어쩐 일이오?”

자신의 방 안에 들어선 알마리온은 그곳에서 들에핀꽃을 보게 될 줄은 예상치 못하였기에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물었다.

하나 그의 그런 물음이 그녀를 상심케 하였는지 부지불식간에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왜요? 난 이곳에 오면 안 되는 것인가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딜 다녀오는 것이죠?”

“아! 성 밖에 머물고 있는 병사들을 잠시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소.”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왜 날 안 찾는 거죠?”

“…….”

워낙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기에 알마리온은 순간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난 당신의…… 당신의 부인인가요?”

“으음…….”

갑자기 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인지 알마리온은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억지로이긴 하였지만 그녀와 혼인을 하던 날. 그녀는 분명히 자신에게 경고하였다. 두 사람의 사이는 명목상의 부부일 뿐이라고.

서로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 간섭하지 말자고 말이다. 그리고 불과 며칠 사이였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모른 체하며 지내 오고 있었다.

바로 어제 만찬장에서 벌어진 그 일이 있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비록 그런 일이 있기는 하였지만 알마리온은 그 뒤에도 그녀를 찾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게다가 알마리온은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기 이전에 그녀가 그에게 보였던 경멸의 눈빛을.

물론 그것이 자신이 즉각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을 담은 경멸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러한 그녀의 눈빛은 가뜩이나 분명하게 선을 그어 버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더욱 멀게 하였던 이유가 되어 버렸다.

한데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자신을 찾아와 갑작스럽게 자신이 아직도 그의 아내인지를 묻자 더욱 당황한 알마리온이었다.

“…….”

“…….”

두 사람 사이에 다시 한 번 깊은 침묵의 강이 흘렀다. 하나 어느 쪽도 서로를 바라보지도, 그리고 말문을 열지 못하였다.

그 침묵이 끝내 견디기 힘들었는지 들에핀꽃이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방을 나가 버렸다.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알마리온은 미처 보지 못하였다. 그녀의 커다랗고 서글서글한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황자 일행이 황도인 카빌란을 향해 떠난 것은 로엔의 병사들이 모두 돌아간 이후, 그러니까 타르탄 성에 머문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하나 이들이 나흘 동안 머물던 타르탄 성을 서둘러 황급히 떠난 것은 그만큼 시간을 지체하여서가 아니라 황자인 피어스의 건강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경기를 하는 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장기간 복용시킨 중독성이 강한 마약 성분의 진정제를 처방받은 피어스는 오랜 여행과 용맹한영혼에게서 받은 정신적 충격, 그리고 알마리온을 욕보이기 위해 벌였던 일에서 오히려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음을 게이트에게서 들은 것도 모자라 다시 한 번 그런 흉계를 꾸미면 황제께 고할 수밖에 없다는 협박에 그만 그동안 간신히 유지되어 오던 균형이 완전히 깨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한번 깨어진 균형은 그를 이내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가뜩이나 중독성이 강한 아주 위험한 약을 너무 오랫동안 투약해 온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고, 그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약을 더 많이 사용하였던 것이 그의 몸을 아예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뒤늦게 피어스의 건강을 관리하는 마법사인 미하일로부터 그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게이트는 크게 분노하며 단칼에 미하일을 죽여 버린 후, 피어스를 서둘러 황도로 옮기도록 하였다. 제국 최고의 마법사인 베르그 공작이라면 피어스 황자의 상태를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무슨!”

피어스를 태운 마차가 서둘러 황도로 이동하는 동안, 이미 전령은 황도에 도착을 하여 그간의 사정을 모두 알리고 베르그 공작으로 하여금 마중을 나오게 하였기에 카빌란으로 향하는 도중에 합류할 수 있었다.

하나 피어스 황자의 상태를 살펴본, 아니 굳이 살펴볼 것도 없이 단지 그를 본 것만으로도 이미 피어스의 상태가 도저히 회복 불능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전하? 황자 전하께서 회복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아…… 어찌 이렇게 될 때까지 방치하였단 말인가! 어찌…….”

게이트의 물음을 듣지 못하였는지 베르그 공작은 안타까운 표정에 장탄식을 하며 마치 죽은 이처럼 창백한 안색을 한 채 식은땀을 비 오듯 쏟아 내고 있는 피어스의 몸만 어루만질 뿐이었다.

“으음……. 마법으로도, 마법으로도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하신 것입니까?”

부질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게이트 또한 모르지 않았다.

마법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따지고 본다면 마법만큼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분명한 것도 없었다.

마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임의적으로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반대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대마법사라도 절대 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써 가능한 것은…… 황자를 황궁까지 살아 있는 상태로 모시고 가는 것 정도일 뿐이네.”

“……!”

단지 당장 숨이 끊어지는 것을 얼마 동안 연장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말에 게이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자신의 책임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실제로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것은 어느 정도 그의 책임도 있었다.

특히 그가 더 이상 알마리온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경고를 하면서 피어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인 황제를 거론하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그의 생명은 몇 년 정도는 더 유지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모든 것이 제 책임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무엇을 어쩌겠단 말인가?”

“그건…….”

“황자가 이리된 것은 자네 탓이 아니네.”

“하지만…….”

“내 말 듣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자세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황자가 이리된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네. 단지 그것이 조금, 아주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게이트 후작은 제국 최고의 기사였고, 날로 가중되는 게르혼족의 압박에서 제국을 지켜 줄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이미 예견된 불행한 일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한다면 그것만큼 제국은 더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번 일로 인해 자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을 묻게 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이 될 것이네. 하니 그 정도로 넘어가도록 하게. 그래야 하네. 알겠나?”

베르그가 제국을 이끄는 재상으로서 전체적인 제국 운영의 틀을 짜는 인물이라면, 게이트 후작은 제국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키는 칼이자 방패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지금처럼 사방의 적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라는 존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의 지위는 흔들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나 베르그가 알고 있는 게이트의 성격은 너무나도 강직하고 곧은 인물이었다.

설사 이번 일로 인해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다 해도 그의 성격이라면 본인이 스스로를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게 스스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되면 그는 분명 자신을 심하게 질책하게 될 것이다. 과거에도 이미 이와 비슷한 일이 한차례 있었기에 베르그는 그러한 일이 또다시 벌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도의적인 책임은 져야 할 것이네. 하나 그것만이네. 그 이상 자네가 스스로를 자책하여 일을 벌인다면 제국은 끝장나는 것일세. 자네는 제국의 검이자 방패가 되겠다고 황제 폐하께 맹세하였음을 잊었는가?”

“으음…….”

“제국을 위한 일이네. 제국을 위해서는 나도, 그리고 자네도 모든 것을 희생하여야 함을 잊지 말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제국이 존재하기에 의미가 있음을 말이네. 알겠는가?”

제국이 존재하여야만 자신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베르그의 말에 게이트는 결국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고맙네. 자네가 받아들여 줘서.”

“아닙니다, 전하. 전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소관은 또다시 어리석은 짓을 하였을 것입니다.”

“되었네. 자네가 그렇게 이해해 주면 그것으로 된 것이네.”

게이트가 마음을 바꾼 것을 확인하자 베르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나 시체처럼 누워 있는 피어스를 보자 그의 마음은 다시금 답답해졌다.

카빌란에 도착한 지 이틀 후 피어스는 결국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영면에 들었다.

피어스의 장례식은 황실 직계가족들의 장례 절차에 따라 열흘 동안 진행되었다.

피어스의 장례식이 끝난 후 황태자인 프랑크와 재상인 베르그, 그리고 게이트. 이렇게 세 사람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란 말입니까?”

황태자인 프랑크는 게이트가 결코 거짓을 말하거나 무엇인가를 과장해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그가 한 말은 쉽게 믿기지 않는 일이었기에 다시 한 번 반문하였던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처음부터 선즈 자작은 이스턴 백작, 그자의 적수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작정을 하였다면 선즈 자작은 검 한번 제대로 놀려 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소관도 이스턴 백작을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알마리온에 대한 말을 하면서 게이트는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꾹 움켜쥐자 손바닥에서 약간이긴 하여도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당시 다급한 마음에 피어스에게 쏟아지는 마나 소드를 막긴 하였지만 그때의 충격으로 지금도 검을 쥐는 오른손의 손바닥에 통증이 생겼기 때문이다.

“제국 최고의 기사이신 후작이 그리 말씀하시니 믿긴 하겠지만 솔직히 당황스럽습니다. 그의 나이는 이제 불과 20대 초반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황자 전하, 검의 길은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황자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솔직히 놀랍기도 하지만 질투가 나기도 하였다. 자신보다 열 살 정도나 어린 이가 제국 최고의 기사인 게이트 후작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어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하나 그가 그런 존재라 해서 꼭 이렇게까지 하여야 합니까? 이미 그는 황제 폐하로부터 충분한 대우를 받은 것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황태자께서도 게르혼족이 며칠 전 물란족의 영토를 공략해 들어갔고, 단 한 번의 전투로 6개 부족이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접하셨을 것입니다.”

용맹한영혼은 그동안 계속된 부족 통합 전쟁으로 피로가 쌓인 전사들에게 꿀과 같은 휴식을 취하게 하는 한편, 부족한 전쟁 물자를 끌어모으며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그러다 피어스 황자 일행이 떠난 직후부터 북방의 또 다른 민족인 물란족을 공략해 들어갔다.

이들 물란족 또한 한때 세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기마민족으로 그 당시에는 힘이 약하고 흩어져 있던 게르혼족이 이들 물란족의 지배를 받았던 때도 있었다.

하나 이번에는 반대로 용맹한영혼이라는 구심점이 생기면서 부족들이 통합되어 가자 그 힘을 바탕으로 물란족을 공략해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제국이 피어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안, 용맹한영혼의 명령을 받은 초원의 전사들은 물란족 영역을 공략해 들어갔고, 그들과의 첫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6개 부족을 복속시켰다.

게르혼족 하나만으로도 제국의 안위가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용맹한영혼이 물란족까지 통합해 들어가자 제국은 그야말로 비상이 걸린 것이다.

“단 한 번의 전투로 6개 부족, 그것도 부족의 규모가 제법 큰 6개 부족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들을 복속시켰습니다. 이런 속도라면 물란족 전체를 통합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으음…….”

“우리가 그러했듯이 용맹한영혼 또한 그의 뛰어남을 이내 알아보고 한때 혼담이 오가던 자신의 양녀를 그에게 강제로라도 떠넘겼음을 감안한다면…….”

“하나 그는 우리 제국과 로엔의 기사. 또한 그동안 철저하게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는 절대 신의를 배신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단지 종이 제조법을 황실에 전해 줬다 해서 백작이란 작위와 성을 내려 주고, 형식적인 것이긴 해도 봉지까지 해 준 것이 아니었다.

단지 종이라는 것을 통해 언제일지는 몰라도 게르혼족과의 국운을 건 일전을 준비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려 하였다면 단지 단승 작위 정도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면서도 야만족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사용하였던 상투적인 수법인 국외 지역의 땅을 봉지로 정해 준 것은 알마리온이 포넬과의 전쟁에서 보여 주었던 영웅적인 공적을 이들은 철저하게 조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파악한 이스턴 백작이라면 분명 그럴 것입니다. 하나 그에게 좀 더 빨리, 그리고 좀 더 강력한 힘을 키워 줄 수 있게 하지 않다가는 애초의 우리의 의도는 성공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게르혼족을 통제하기 위한 한 축으로 끌어들인 로엔 왕국이었다.

하지만 로엔은 수년 동안 포넬과의 전쟁을 한 상태로 피폐해진 상태. 그만큼 힘을 키우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무한정 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다시금 준동하기 시작한 게르혼족이 물란족을 절반 정도만 통합하게 되어도 제국은 도저히 그들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 이전에 게르혼족을 자극하는 움직임이 로엔 왕국 쪽에서 나와야만 하였다. 그사이 제국에서는 흩어진 채 저항하고 있는 물란족을 자극하여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세 방향에서 게르혼족을 압박하는 것만이 날로 강성해지는 게르혼족을 상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면서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제국의 황자와 로엔의 공주 사이의 혼사가 이루어졌지만 결국 피어스 황자와 카산느 공주는 약혼만 한 상태로 피어스 황자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됨으로써 이들의 계획은 모두 무산된 셈이었다.

약혼을 하였지만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 않았으니 실상 두 사람의 관계는 그것이 전부였다. 즉, 피어스와 카산느는 약혼식을 올리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그뿐이었다.

아니, 그것이 관례에 맞는 일이었다. 만약 이때 게이트에 의해 알마리온의 실력이 제국 제일의 기사인 그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없었다면 제국 측에서도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거 제국의 힘이 주변의 모든 나라와 민족 들을 억누를 수 있었을 때라면 선즈 자작 같은 이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벌써 제거되었거나, 아니면 어디 궁벽한 지방에 처박아 두었을 것이다.

하나 나라가 기울어지고 인재가 부족해지니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자까지 중용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유일하게 그가 두려워하는 게이트의 곁에 그를 둔 것이었다.

이렇듯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제국 제일의 기사인 게이트와 비등한 실력을 가진 알마리온이라는 존재는 반드시 제국에 끌어들여야 하는 그러한 인물이었다.

하여 이들은 관례와 규범을 무시한 채 그리고 어차피 로엔 측에서도 제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카산느 공주를 희생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바로 로엔에서 거행된 피어스와 카산느의 약혼식을 혼인식으로 인정하고 그를 정식으로 제국 황실의 며느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카산느는 피어스 황자가 가진 것들과, 받기로 하였던 모든 것을 미망인의 자격으로 상속받게 된다.

로엔이나 포넬과 같은 작은 나라는 그러지 못하였지만, 카빌란 제국은 광대한, 말을 타고 하루 종일 달려도 반년을 달려야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너른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카빌란 제국을 건국한 패트릭 폰 카빌란 대제는 여덟 명의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신의 여러 아들들을 각 지역으로 보냈고, 그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그러한 것이 관례가 되어 황실에서는 황자들이 분가를 할 때마다 제국 각지의 곳곳을 떼어 주었다.

실상 제국 귀족의 3분지 1은 이들 황가의 혈통을 이은 자들이었다.

피어스 황자 또한 발락이라는 성과 공작이라는 작위, 그리고 황도인 카빌란 인근 지역에 로엔의 왕궁과 거의 비슷한 정도의 대저택이, 아울러 발락이라는, 황도에서도 그리 멀지 않고 언제든 왕국을 배편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해안 지역에 위치한 상당히 큰 규모의 영지가 주어질 예정이었다.

이 모든 것을 카산느가 피어스의 미망인의 자격으로 물려받게 되는 것이었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발락이라는 영지와 기타 그녀가 미망인 자격으로 물려받는 모든 것을 어떤 형태로도 로엔의 왕실에 건네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1브론즈의 동전 하나조차도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관리를 제국 측에서 신뢰할 수 있는 인물, 즉 제국 측이 정하는 인물에 의해 대신 관리케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제국에서는 그곳의 관리인으로 누구를 정할 것인지 처음부터 정한 상태였다. 바로 공주와 한때 염문설이 있는 알마리온이 그 책임자였다.

제국은 발락의 관리 책임자인 알마리온이 그곳의 자원과 종이 제작과 판매를 통해 얻은 수익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육성해 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 군사력을 이용하여 그들이 원하는 의도대로 게르혼족의 통합 움직임을 최대한 늦추게 만들어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 게르혼족이 타르탄 성을 넘어 진격해 올 때, 그가 육성한 군대와 그로 하여금 제국을 방비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제국 측의 입장에서는 약간의 땅을 내주는 대가로 제국의 안위를 지킬 수 있는, 손실보다는 이익이 훨씬 큰 그러한 거래였다.

“그러다가 자칫 그 염문설대로 되어 버리면 어찌하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프랑크는 언짢은 표정으로 물었다.

미망인이 재혼을 하는 것은 언제나 본인의 선택인 일이었으니 아예 신경 쓸 이유조차 없었다. 과거에도 이런 일이 있었고, 그러한 황가의 미망인들이 재혼을 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으니 구태여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그러한 재혼의 상대도 제국인이 아닌 경우도 몇 차례 있었으니 더더욱 그러했지만 왠지 모르게 부아가 치미는 프랑크였다.

솔직히 프랑크는 상복을 입은 카산느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의 청초하고도 순백해 보이는 아름다움에 그만 넋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 프랑크의 시선은 언제나 그녀에게 향해 있었고,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면 저도 모르게 그녀가 보고 싶어졌고 또한 불안해졌다.

그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아내와 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세 명의 아들과 딸들이 있었지만 카산느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 두근거림은 자신이 지키고 보호해야 할 가정이 있다는 것조차 망각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 염문설은 모두 말 만들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만든 거짓이라는 것을 황태자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또 비록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제국의 입장에서는 이스턴 백작을 더욱 확실하게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니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흥!”

프랑크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는 베르그의 말에 프랑크는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황태자께서는 무슨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 것이오?”

“아, 아닙니다. 잠시 콧속이 간지러워서 그만 실례를 하고 말았습니다. 알겠습니다. 그것이 제국의 안위에 도움이 된다면 그리하도록 하십시오.”

자신이 한 행동으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카산느라는 동생의 미망인이 되어 버린 한 여인에게 빠져드는 자신의 감정을 들키기라도 하였을까 두려워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베르그 등이 원하는 것을 실행하라는 말만 남긴 채 황급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런 프랑크의 모습을 보면서 남아 있는 베르그와 게이트는 그저 영문을 모를 뿐이었다.

“그렇다면 제국과 왕국 사이의 계약은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까, 형님?”

“그렇네.”

베르그의 말에 프리모는 내심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전란으로 모든 것이 피폐해진 왕국에는 무엇보다도 제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것이다.

한데 그러한 도움이 피어스 황자가 혼인을 하기 전에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더 이상 바랄 수 없게 되자 프리모는 애가 새카맣게 타 버린 것이다.

“감사합니다, 형님! 형님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핏줄이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조만간 공주를 황자의 미망인으로 인정한다는 공식 발표가 있을 것이네. 그리고 황자에게 부여되어 있던 모든 권리와, 황자에게 주어졌던 모든 것들이 미망인에게 그대로 상속될 것이네.”

이 말이면 충분했다. 제국이 공주를 황자의 미망인으로 인정하고 그의 모든 것을 상속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발표가 있게 된다면 제국과 왕국이 체결한 모든 약속도 그대로 지켜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자네도 알아야 할 것이 있네.”

“무엇입니까?”

“미망인에게 전해지는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미망인에게만 국한될 것이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나?”

로엔 왕실에서 공주와의 혈연관계를 내세워 미망인인 공주에게 전해질 모든 것들을 마치 제 것인 양 착각하지 말라는 주의였다.

“물론입니다. 그것은 이 아우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제국의 황자에게 주어지는 그 많은 특전과 너른 영지라면 당장이라도 왕실의 재건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이었고 그것은 당연히 프리모에게는 불편한 상황이었다.

“한데…… 이스턴 백작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왜 찾으시는 것입니까?”

“어쨌든 그에게도 사태가 이렇게까지 된 것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어쨌든 피어스의 갑작스러운 사망의 원인에는 알마리온 또한 분명히 원인을 제공하였으니 그에 대한 문책이 있을 것이란 말에 프리모는 내심 기쁜 마음이 배가되었다.

하나 프리모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제국에서 알마리온에게 내릴 문책의 내용에 대해서 말이다.

며칠 후 황제의 명의로 카산느 공주는 피어스 황자의 미망인으로 인정한다는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다.

따라서 이제 그녀는 카산느 폰 발락 공작 부인으로 제국 황실의 일원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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