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국 입성 (46/70)

제국 입성

“큭큭큭!”

평소와 다름없이 수련을 위해 새벽에 잠에서 깨어 가볍게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오니 어둠 속에서 리처드가 그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그를 보자마자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크크! 재미 좋았냐?”

“형님…….”

“왜? 그래, 첫날밤을 보낸 기분이 어때?”

“참…… 형님도. 새벽부터 실없는 농담을 다 하십니다.”

어젯밤 알마리온은 용맹한영혼에 의해 원치 않는 혼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황자의 건강이 원인 불명으로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이유로 일행이 제국으로 서둘러 출발하기로 결정되자 용맹한영혼은 알마리온에게 자신의 양녀인 들에핀꽃을 맡기기로 서로 합의하였다.

알마리온의 계획은 황자 일행을 무사히 제국에 도착하게 하고, 황자와 공주의 혼례식에 참석을 한 후, 왕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를 데리고 왕국으로 복귀할 예정이었다.

하나 그런 그의 생각은 당장 그날 밤에 있은 만찬에서 용맹한영혼이 갑작스럽게 벌인 일로 인해 완전히 어그러져 버렸다.

주빈인 피어스 황자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서둘러 제국으로 복귀를 하려는 이들 일행이었지만 그래도 귀빈으로 맞이한 이들이 떠나는데 아무런 행사가 없을 수는 없었다.

하여 조촐하게 만찬이라도 하자는 제안에 몸이 불편한 황자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만찬에 참석하였는데, 그 만찬이 그만 알마리온과 들에핀꽃의 혼인식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정작 혼인식의 두 당사자 중 들에핀꽃은 만찬, 아니 자신의 혼인식이 있기 직전에 이를 통보받아 부랴부랴 준비를 하여야만 했고, 또 다른 당사자인 알마리온은 만찬장에서 그와 같은 통보를 받아 아무런 준비조차 하지 못한 채 엉겁결에 혼인식을 올려야만 했다.

알마리온이 아무리 이유, 심지어는 자신은 이미 마음을 주고 있는 여인이 있어 그 여인과 혼인을 할 계획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스스로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용맹한영혼은 어차피 첫 번째 부인으로 데려가라고 한 것도 아니니 상관없다면서 막무가내로 두 사람의 혼인식을 치러 버린 것이다.

“농담이라니? 지금 네 상태를 보라고. 다른 때보다 훨씬 힘이 없어 보이잖아? 크크큭!”

“훗! 형님이 상상하시는 일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응? 무슨 말이냐? 내가 상상하는 일 같은 것이 없었다니? 내가 뭘 상상하고 있는데?”

능글맞은 표정으로 장난을 치는 리처드를 보면서 알마리온은 난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게…… 그녀가 밤에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버렸단 말입니다.”

“돌아가? 왜? 네가 하도 숙맥이라 뭘 잘못한 것 아니냐?”

“형님도 참……. 그것이 아니라 비록 그분의 강압에 혼인식을 올리기는 하였지만 아직 날 남편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인정하기 전까지는 날 남편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뭐? 그게 무슨 말이냐?”

엉겁결에 혼인을 하게 되어 버린 두 남녀는 어찌어찌하다 보니 합방까지 하게 되었다. 하나 알마리온이 전통적인 게르혼족의 남자들이면 모두 행하는 혼인식 뒤풀이까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마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오니 그곳에는 이미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채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들에핀꽃이 다짜고짜 그에게 한 말은 ‘두고 보겠다.’였다.

비록 양부의 명이라 어쩔 수 없이 식을 올리기는 하였지만 자신은 절대 이런 혼인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뭐야. 네가 자신의 배필로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결국 널 죽이고 부족에 복귀하겠다는 것이냐?”

“하하. 그렇게 말하더군요.”

“와! 그 아가씨 보기와는 아주 딴판이네. 어제 처음 본 것이지만 무척이나 아름답던 여인이 그런 말을 다 하다니 말이야.”

“훗! 이곳 사람들이 그녀를 뭐라 부르는지 아십니까?”

“뭐라 부르는데?”

“초원의 암호랑이라고 하더군요. 여인의 몸이면서 전사들을 지휘하는, 그러니까 우리 식대로 하면 군단장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뭐? 그게 정말이냐?”

“예. 그렇다고 하더군요.”

“호! 대단한 여인이었군. 하긴 한눈에 봐도 평범해 보이진 않더라. 한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좀 그렇군.”

“하하…….”

“그건 그렇고, 그 여인은 또 누구냐?”

“어떤 여인 말입니까?”

“하하. 발뺌하려고? 내 너를 모를까? 아무리 위기를 넘기겠다는 생각이었다 하더라도 네가 없는 거짓말을 하는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것 같아?”

“아…… 그, 그것 말씀이십니까?”

용맹한영혼이 예정에도 없는 일을 갑자기 벌이는 바람에 일단 시간이라도 늦춰 볼 요량으로 자신에게 혼인하려는 여인이 있다고 한 말을 묻는 것이었다.

“왕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네 녀석이 청혼을 하였다가 설사 거절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다음 날 소렌토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을 것이니 아직 청혼까지 한 것은 아닐 것이고…… 누구냐?”

그가 처음 정식 귀족이 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의 출신 성분으로 인해 그는 따돌림을 받았었다.

하나 종이라는 것을 만들게 됨으로써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부는 물론, 그것으로 인해 제국에서 백작의 작위를, 그리고 왕국에서 여섯 번째 후작의 작위를 받게 되자 그는 갑자기 최고의 신랑감으로 변해 버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 버렸다.

“그건…….”

“너 혹시……? 폰티악 후작 각하의 영애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

가늘게 눈을 뜨며 혹시나 싶어 묻는 리처드의 말에 알마리온은 자신의 속내를 들킨 것이 부끄러웠는지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

“호! 네 취향도 참 독특하구나?”

알마리온의 측근이자 평소 알마리온이 친형님처럼 모시는 인물이라고 알려진 때문에 리처드 또한 소렌토의 사교계에서 나름, 아니 그의 수려한 외모와 세련되고도 박력 있는, 거기에 해학적이기까지 한 행동에 오히려 왕국의 젊은 레이디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관심의 대상인 리처드였기에 어느새 사교계의 추한 소문들까지도 꿰차고 있는 그였다.

그런 그가 알고 있는 폰티악 후작의 영애, 그러니까 일레인 폰 폰티악 후작 영애는 한마디로 부친이 왕국 최고의 명장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내세울 것이 단 한 가지도 없는 촌뜨기라는 것이었다.

“훗! 형님이 레이디 폰티악을 보신 적이 없어서 그렇지 참 따뜻하고 소박한 여인입니다.”

“그래? 뭐, 하긴 남들 평가야 아무렴 어떻겠어. 자기 자신이 그렇다는데. 한데 아직 청혼은 하지 않았겠지?”

“예…….”

“잘해라. 이미 두 번째 부인부터 챙긴 녀석이라 잘될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크크큭!”

응원을 해 주는 것인지 아니면 놀리려는 것인지 애매모호한 말을 하는 리처드를 보며 알마리온은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황자가 제국을 떠날 때 호위하였던 인원과, 로엔에서 축하 사절로 추가된 인원, 거기에 용맹한영혼이 황자와 공주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제국에 파견하는 인원까지 더해지면서 일행의 규모는 어느덧 1천3백여 명이나 되는 대규모로 변하였다.

거기에 서로 각기 다른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에 함께 이동하는 동안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알마리온을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것은 이제는 자신의 아내가 되어 버린 들에핀꽃이 끝까지 우겨서 대열에 합류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지금은 황자 일행과 사절단 일행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호송단의 책임자로서의 책무를 하여야 하는 때에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도 그랬지만, 그런 그녀를 함께 데리고 다니는 것도 옳지 않다는 생각에 일단 임무를 마치고 왕국으로 복귀를 하겠다고 하였지만 막무가내로 처음부터 동행을 하겠다는 그녀의 고집을 결국 꺾지 못한 것이었다.

한데 이들 일행이 차이센 성을 떠난 지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정말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니까…… 그게 꾀병이었단 말이오?”

“흠! 흠! 그것이…… 그렇습니다.”

“허……. 어찌 꾀병을 그렇게 진짜처럼 앓을 수 있단 말인지…….”

도르첸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으며 프리모는 고개를 돌려 창밖에 시선을 둔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황자인 피어스가 그동안 꾀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밝힌 가드너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마음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이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어쨌든 전하께서는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 그렇습니다. 이스턴 백작의 말처럼 어쨌든 황자께서 건강하신 것이니 다행한 일 아니겠습니까?”

“흠! 그건 그렇군. 이스턴 백작의 말이 맞는 말이지.”

“허허. 그건 그렇군요. 어쨌든 황자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고, 일행이 무사히 제국으로 향하고 있다니 말이오. 하면 난 그만 일어나도록 하겠소.”

“나도 그만 일어나 봐야 할 것 같네.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먼 여행이 힘에 좀 부치는군,”

도르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프리모가 자리를 떠났다.

“본인도 이만 돌아가 경호 상태를 점검하도록 하겠습니다.”

“흠! 그렇게 하시오, 이스턴 백작.”

“그러니까 뭐냐? 그 한심한 놈이 하루라도 빨리 그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꾀병을 앓았다는 것이냐?”

정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묻는 리처드는 알마리온의 표정에서 그 말이 사실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하하하하! 크크크! 하하하하! 크큭! 콜록! 콜록! 콜록!”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그만 숨이 다 막혀 사레들린 기침까지 하느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는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평소 말이 거의 없는 그나이제나우까지도 이번 일에는 몇 차례나 크게 웃음을 터트릴 정도였다.

“공주도 참 그렇겠다. 그런 허접스러운 놈을 평생 믿고 살아야 하니 말이야. 안 그러냐?”

“…….”

공주의 이야기가 나오자 알마리온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는 황자 피어스의 어두운 기운을 느낀 그였기에 공주의 장래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꾀병을 부려 떠나고 싶어 할 정도로 그가 대단한 인물이긴 했어.”

“그건 그렇습니다. 저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무척이나 놀랐으니 말입니다. 그자와 같은 또 다른 의미의 강자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충격적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들인 리처드나 그나이제나우 또한 용맹한영혼을 처음 대하였을 때 온몸의 신경이란 신경은 모두 곤두설 정도로 전율을 느꼈었다.

“훗!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나 또한 다시 그자 앞에 서면 그에게 나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말 것 같아.”

리처드의 자조적인 고백에 그나이제나우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검의 주인이었던 그였지만 용맹한영혼이란 자에 대한 그의 느낌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강함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뭐랄까…… 실력으로만 본다면 그렇게 두려움까지 느껴질 정도는 절대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무엇인가 사람을 압도하는 그런 것이 있는 것 같더군.”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나이제나우 경도 그랬지? 하긴 우리가 이랬을 정도이니 그 밥맛없는 프리모 공작이란 작자나, 음흉한 구석이 있는 도르첸 공작 같은 이들도 그자 앞에서는 꽁지를 돌돌 말아 버렸겠지. 뭐, 황자 같은 약골은 아예 말할 가치도 없고 말이야.”

“훗!”

“…….”

리처드의 말에 그나이제나우가 피식 웃음을 짓다 슬쩍 알마리온의 눈치를 살폈다.

‘저것이 변한 것인가?’

전 같으면 리처드의 이러한 원색적인 비판을 말리거나 꾸짖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불편한 표정을 자주 짓던 알마리온이었지만 이제는 그저 웃음 띤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나이제나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며칠 전 새벽녘에 알마리온에게 분명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때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그에게서 이렇다 할 변화 같은 것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있었기에 그는 내심 자신이 잘못 알았던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참 알다가도 모르겠군. 분명 그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깨달음을 얻긴 얻으신 것 같은데 별다른 변화가 눈에 띄지 않으니…… 내가 잘못 안 것인가?’

“어쨌든 그 일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가드너 백작의 생각입니다.”

“후후. 창피한 것은 아나 보군? 왜? 아예 제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꾀병을 앓고 있지. 흐흐흐!”

“하하하!”

다시 한 번 막사 안에 피어스 황자의 어이없는 행동에 대한 조롱 섞인 웃음이 가득했다.

이러한 피어스 황자의 해프닝은 쉬쉬하면서도 행렬 모두에게 급속히 퍼짐으로써 결국 피어스 황자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졌고, 그에 반해 뒤늦게 대열에 합류한 용맹한영혼이 파견한 축하 사절들은 황자를 그렇게 만든 용맹한영혼의 위대함에 목과 어깨에 잔뜩 힘을 주며 돌아다녔다.

제국의 동북 국경을 방비하는, 제국과 초원을 가르는 거대한 성인 타르탄 성에 이들 일행이 도착을 한 것은 차이센 성을 떠난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타르탄 성의 성주이자 제국의 동북 지역을 방비하기 위한 10만 병력으로 구성된 제7군의 사령관인 구스타프 폰 게이트 후작과 지휘관들이 직접 황자 일행을 마중 나와 있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게이트 후작.”

“일단 성안으로 드시지요.”

“그러지요.”

타르탄 성, 달리 타르탄 대성이라고도 하는 성은 일견하기에도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일단 건물로 기부터 죽이자 이건가?”

타르탄 성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 엄청난 위용에 기가 질려 버리는 일이 많았는데 리처드는 오히려 비릿한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쓸모없는 성을 지었군요.”

그나이제나우 또한 타르탄 성을 일견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형태의 성은 아무리 잘 지어도 충분한 병력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가 없거늘…….”

성이라는 것은 적을 방비하기 위한 시설이지 남에게 내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서 본다면 타르탄 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만들기는 하였지만 군사적으로 보면 그다지 쓸모 있는 것이 아닌, 기다란 띠 형태의 성이었다.

이러한 성은 각 지역을 충분히 방비할 수 있는 병력을 갖추지 못할 경우 오히려 방어력을 떨어뜨리는 그러한 형태였고, 실제로 타르탄 성은 이미 초원의 전사들에 의해 수십 차례 침범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제국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게르혼족이 용맹한영혼에 의해 빠르게 통합되어 가자 그에게 대공이라는 작위를 주고 그가 차지한 영역을 그의 영지로 인정하는 등, 발 빠른 대책을 실행해 나가는 것이었다.

황자 일행은 타르탄 성에서 하룻밤만 묵는 것이었기에 게이트 후작이 주최한 연회가 공식적인 행사의 끝이었다.

“칸 남작에겐 미안하군요.”

“하하. 아닙니다. 이곳 일은 걱정 마시고 나머지 임무를 무사히 마치시길 바랍니다.”

제국의 재상인 베르그 대공의 장자인 하인리히 폰 베르그 백작의 실종 사건 이후 육지를 통해 이동하는 황자와 공주 일행의 안전을 위해 동원된 병사들의 임무가 이들 일행이 무사히 제국의 영역에 도착함으로써 완료되었고, 쉰 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왕국으로 복귀하여야 했다.

그 책임을 맡은 이가 바로 칸 남작이었다. 황자와 공주 일행은 이미 일정이 늦은 때문에 내일 오전에 이곳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지만 칸 남작과 그가 지휘할 병사들은 이곳 타르탄 성에서 사흘 동안 휴식을 취한 후 병력을 인솔하여 왕국으로 복귀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을 한 병사들을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해 놓았습니다.”

이곳에 오는 동안 고생을 한 병사들을 그대로 돌려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린 알마리온은 사비를 들여 사전에 병사들을 위한 몇 가지 조치를 취해 놓았다.

“그리고 이것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무엇입니까?”

“공주님께서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고 이것은 내가 병사들에게 주는 것이니 공평하게 나눠 지급하도록 하십시오.”

비록 제국과 초원의 관문인 타르탄 성이긴 하여도 이곳의 풍물은 왕국과는 많이 다르고, 왕국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희귀한 물건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때문에 일이 있어 제국을 오가는 자들은 왕국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을 구해다 이를 왕국에서 판매를 함으로써 적지 않은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그리고 이곳 성주이신 게이트 후작께서도 병사들이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행동에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그리고 병사들을 통제한 후 성으로 오도록 하십시오. 성에서 만찬이 있을 것이니 함께하도록 하지요.”

“예, 각하.”

알마리온이 마지막으로 그동안 함께하였던 병사들을 이처럼 꼼꼼히 살피고 있을 때였다.

만찬에 초대를 받은 공주나 들에핀꽃은 함께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굳이 함께할 이유는 없었지만 카산느 공주가 그녀를 청하여 이처럼 함께 몸단장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군요?”

“예?”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들에핀꽃의 갈색 짙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카산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공주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아닌가요?”

“…….”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우물쭈물하는 카산느의 여린 모습에 들에핀꽃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성숙한 여성의 완숙한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소녀 특유의 청순한 아름다움을 가진, 거기에 사내들로부터 보호 본능을 강하게 느끼게 만드는 무엇인가를 느끼게 만드는, 한마디로 말해서 여성스럽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 만드는 이 여인이 들에핀꽃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르혼족 전사들 중에는 일부러라도 이러한 여성스러움을 향유하기 위해 제국이나 왕국에서 여성 노예를 사 오는 일도 있었지만 들에핀꽃에게 있어서 여성스럽다는 말은 단지 여자를 노리개 정도로만 여기는, 여성을 비하하기 위한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그런 전형적인 여성스러움의 극치에 가까운 카산느의 모습과 행동을 그녀가 좋게 보아줄 리가 없었다.

“뭐죠, 내게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

“흥! 한때 그대와 그가 연인 사이였다는 것은 그냥 오해였을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요?”

“……!”

들에핀꽃의 말을 듣는 순간 카산느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가셔 버렸다.

사실 카산느가 만찬을 위한 준비를 함께하자고 그녀를 청한 것은 거의 충동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카산느의 마음에는 알마리온이 담겨 있었다.

아니, 한번 그렇게 담긴 마음은 시련을 당할수록 더욱 뜨겁고 강렬하게 변하여 가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 얼마 후면 피어스 황자와 혼례를 치러야 하는 처지였기에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부정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눈과 귀는 언제나 알마리온에게 쏠려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알마리온의 눈길이 자신에게 머물러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늘 가지고 있었고,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갈 수 있다고 수없이 스스로 되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한편으로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더 이상 그에게 미련을 두거나 집착을 하게 되면 그 본인 자신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불행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행동을 조심하였다.

심지어 이동 중에는 절대로 마차에서 내리지도 않았으며, 이동 중간에나, 아니면 이동을 마치고 숙영을 해야 할 때에도 그녀는 자신에게 지급된 천막 안에서 결코 나오지 않았다.

또한 식사 때에도 그녀는 의도적으로 알마리온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때문인지 그녀는 식사 후에는 먹은 것이 체해 늘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견뎌 내고 있는 그녀에게 알마리온의 혼인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제국과 왕국이 공동으로 견제를 하기로 하였던, 자신의 혼인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블랙 대공의 양녀였으니 그 충격은 더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수행하고 있는 하녀들을 통해 블랙 대공의 양녀, 그리고 사모하는 알마리온의 아내가 되어 버린 들에핀꽃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카산느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듣기로는 게르혼족들 사이에서도 여전사로 유명한 여인이라 하였는데 그녀는 여전사라는 말 자체가 도무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심 알마리온과 혼인하게 된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너무나도 커진 그녀는 결국 용기를 내어 들에핀꽃을 초대하여 함께 만찬에 나갈 준비를 하자고 한 것이었다.

들에핀꽃을 처음 대하였을 때의 느낌은 꽤나 큰 충격이었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큰 키에 사내들이나 입는 바지에 헐렁한 셔츠, 그리고 질끈 묶은 검은 머리에, 장식이라고는 아무것도 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허리에는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장검과 단검이 각각 하나씩 벨트에 걸려 있었다.

게다가 무엇이 불만인지 차갑게 굳어 있는 표정과 눈빛은 카산느처럼 궁중에서 모두의 떠받듦을 받고 자라 온 여인에게는 마주하기에 너무나도 강렬한 것이었다.

그런 들에핀꽃을 본 카산느가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도 경솔했음을 깨닫는 데는 단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하나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 눈조차 거의 마주치는 일 없이 그저 수행하는 여인네들이 해 주는 대로 몸단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들에핀꽃의 차가운 눈빛과 비릿한 조소가 창백해진 모습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카산느에게 다시 한 번 일격을 가했다.

“알고는 있나요? 제국의 병사들이 당신을 두고 뭐라 말하는지?”

“…….”

카산느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제국의 병사들이 자신을 두고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쉬쉬하고 있지만 제국의 병사들은 카산느 공주에 대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험악한 말들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들에핀꽃이 그러한 말을 하자 카산느는 결국 그 충격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며 쓰러졌다.

“공주님!”

“마마!”

몸단장을 돕던 수행원들이 그녀가 쓰러지자 놀라 황급히 그녀를 부축하며 그녀의 상태를 살피느라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들에핀꽃은 더욱 차가운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흥!”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냇가의돌과 들에핀꽃을 수행하는 수행원들이 우왕좌왕하며 뒤를 따라 나갔다.

“왜 그랬니?”

들에핀꽃이 부족의 지도자인 용맹한영혼의 양녀로 입양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와 냇가의돌은 가장 친한 친구였다. 때문에 평소에는 존대를 하였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거나 아니면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에는 지금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뭘?”

짐짓 냇가의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행동하였지만 들에핀꽃의 표정 또한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후회의 빛이 깃들어 있음을 오랜 친구인 냇가의돌은 이내 알아보았다.

“거봐. 너도 마음이 불편하잖아. 한데 뭐하러 그랬어?”

“흥!”

“그녀가 밉니?”

“무슨 말이지?”

“그녀가 밉냐고.”

“내가 왜 그녀를 미워해야 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그럴 이유도 없는데 구태여 그녀를 그렇게 공격할 필요가 있었을까?”

사실 냇가의돌 또한 들에핀꽃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처음 보았기에 내심 무척이나 놀란 상태였다.

게르혼족의 여인들은 제국이나 왕국의 여인들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성이 여인인 이네들이라 해서 여성들만의 특성 같은 것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아니, 이네들 또한 여느 여인네들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그 표현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하나 들에핀꽃은 그런 보통의 여인네들과는 많이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여인이라는 것을 늘 스스로 아쉬워하였기에 여인네들이 가지고 있는 여인들만의 특성을 내보이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아니, 그 정도가 조금 심각해 여성스러운 면에 대한 거부감은 가지고 있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기에 오랜 시간을 함께하였던 그녀 또한 이해가 되지 않고 있었다.

‘설마 이 아이가 질투를? 하지만…….’

문득 친구인 들에핀꽃이 로엔 왕국의 카산느 공주에게서 질투를 느꼈기에 그런 돌발 행동을 한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설마. 이 아인 갑작스러운 그 혼인에 대해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게다가 늘 자신의 부군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혼인하고 첫날밤도 보내지 않은 채 두고 보겠다며 잔뜩 성질을 부린 채 뛰쳐나온 친구였다. 이후 그녀는 알마리온의 모든 것을 고깝게 여기며 흉을 보았다.

‘호호! 그렇단 말이지? 결국 너도 어쩔 수 없는 여자란 것인가? 호호호.’

“왜 웃어?”

“응? 내가 뭘?”

“너 지금 날 보면서 이상하게 웃었잖아?”

“내가? 언제? 네가 뭘 잘못 본 거겠지.”

“…….”

“뭐 해? 어서 가자. 어쨌든 그분과 함께 만찬장에 가려면 서둘러야 하지 않겠어?”

“흥!”

알마리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금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려 버리는 들에핀꽃이었다.

황자와 공주를 환영하기 위한 만찬이었기에 그 화려함은 극에 달할 정도였다. 음식은 물론, 불려 온 음유시인들이나 악사들 그리고 광대들까지 무엇 하나 최고가 아닌 것들이 없었다. 그렇게 한창 만찬장이 한껏 흥겨움을 더해 가고 있을 때였다.

“훗! 이보시오, 이스턴 백작.”

“말씀하십시오, 선즈 자작.”

광대들이 나와 온갖 기괴한 재주를 부리고 있을 때였다. 황금으로 만든 술잔 가득 피처럼 붉은 포도주를 연거푸 들이켜던, 이웃하고 있는 모랄레스 성의 성주가 알마리온을, 아니 정확히는 알마리온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들에핀꽃을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걸어왔다.

알마리온이 황제로부터 직접 이스턴이라는 성과 함께 백작이라는 작위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제국의 귀족들은 그것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알마리온은 자신들과 같은 귀족이 아닌, 재물을 주고 귀족의 작위를 산 상인 나부랭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에 대한 존중 같은 것은 애초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눈에는 그에 대한 경멸 같은 것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후후. 그래, 그대도 알지 모르겠군. 지금 그대 곁에 있는 여인이 한때 전하의 여인이 될 뻔하였음을 말이야.”

“…….”

순간 광대들의 연기와 이를 보조하기 위해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소리, 그리고 광대들의 연기가 이어질 때마다 환호와 탄성을 내지르며 박수를 쳐 대는 소음에도 불구하고 선즈 자작의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눈길을 돌려 이들 두 사람, 아니 알마리온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들에핀꽃까지 세 사람을, 광대들의 기괴한 장기 자랑보다 더욱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잔뜩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그런 여인을 품에 품어 보니 어떻던가? 응?”

쾅!

선즈 자작의 말에 들에핀꽃이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는 식탁을 손바닥으로 힘껏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처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을 정도로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였던 것이다.

“감히!”

순간 만찬장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로 인해 모든 것이 멈춰진 채 만찬장에 초대받은 모두가 무슨 일인가 싶어 웅성거리며 소란의 진원지를 의문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후후, 이봐, 야만족 계집. 아쉽지 않았나? 잘만 했으면 전하의 여인이 되어 거드름 꽤나 피우고 다녔을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한낱 장사치의 아내로 전락해 버렸으니 말이야. 응?”

아무리 술에 취해 있다고는 하여도 분명 이성을 잃을 정도로 취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술에 취해 있다고는 해도 황족과 관련된 일을 이러한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입에 담는다는 것은 절대 금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즈 자작이 이러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 알마리온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었기에 그는 슬쩍 피어스 황자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런 것인가?’

피어스의 입가에 걸려 있는 묘한 비웃음을 본 알마리온은 순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일이 왜 벌어지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선즈 자작은 제국에서도 꽤나 지명도 있는 익스퍼트였다. 하나 그의 성격은 한마디로 표현을 한다면 개차반이었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미친개’일까.

그런 선즈였지만 그도 절대 하지 않는 행동이 있었다. 바로 황가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나 행동이었다. 황가에 대해 모욕적인 언행을 한다는 것은 곧 반역이나 다름없는 행동.

죽고 싶지 않다면 그러한 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황자가 동석해 있는 자리에서 황자가 관련된 일을 이렇게 발언한다는 것은 피어스의 허락 내지는 조장이 없이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피어스 황자의 입가에 걸려 있는 비릿한 조소는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의 배후에 그가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잘되었군.’

순식간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어째서 벌어지게 된 것인지를 파악한 알마리온은 오히려 지금의 이 상황이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피어스 황자는 수시로 알마리온과 공주를 한자리에 부르는 일이 많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알마리온과 공주 모두를 교묘한 말투로 자극하여 왔다.

그럴 때마다 피어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공주와 알마리온의 반응을 관찰하면서 자신이 의도한 대로의 반응이 나오면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하나 그의 즐거움은 언제나 충족되지 않았다. 공주의 반응은 늘 그를 만족스럽게 하였지만 자신이 목표로 한 알마리온의 경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담담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그를 더욱 자극했고, 때마침 국경을 수비하는 자들 중에 선즈 자작이라는 제국의 골칫거리들 중 한 사람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라면 충분히 자신이 의도하는 상황을 만들어 줄 것이고, 그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는 자신이 상상한 짜릿한 쾌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였다.

결국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은 처음부터 피어스의 의도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얼굴만 반지르르한 녀석이라면…… 후후후! 하긴 계집들은 하나같이 이놈처럼 얼굴만 반지르르한 녀석들을 좋아하지. 안 그렇소? 크크크!”

“하하하!”

대충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을 한 제국 측의 인사들이 선즈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상황에 들에핀꽃과 그나이제나우가 동시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섰다.

“감히! 네놈 따위가 나 초원의 딸을 희롱하다니!”

“감히! 주군을 능멸하다니!”

챙!

“나오라! 감히 주군과 부인을 욕보인 그대를 결코 용서할 수 없음이니!”

“후후. 한낱 기사 나부랭이가 감히 제국의 익스퍼트인 나 안드레이 폰 선즈를 상대로 검을 뽑다니 우습군. 게다가 정작 당사자는 가만히 앉아 있는데 말이야. 안 그런가?”

선즈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알마리온에게 집중되었다. 하나 알마리온의 표정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시종일관 아무런 변화가 없이 담담한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비겁자에게 날 보내시다니…….’

그런 알마리온의 모습에 들에핀꽃은 입술을 꽉 깨물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원치 않은 혼인이었어도 자신의 아내가 이런 치욕을 당하고 있는데 그저 앉아만 있다니 그녀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알마리온에게 억지로 자신을 떠넘겨 버린 의부인 용맹한영혼의 처사에 그녀는 다시 한 번 실망을 하며 분해했다.

만약 자신에게 검이라도 있었다면 당장 자신을 욕보이는 행동을 하는 선즈라는 작자를 죽여 버리고 알마리온의 뺀질뺀질한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 준 후 초원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지금 그녀에게는 검이 없었다.

한데 그때였다.

“쯧쯧! 어리석은…….”

리처드가 혀를 차며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슬쩍 피어스 황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흥분한 채 검을 뽑아 들고 씩씩대는 그나이제나우에게 말하였다.

“그만 들어오지그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자는 지금…….”

“그러니까 그만 들어오라는 것이야. 그댄 알, 저 녀석의 기사이면서도 저 녀석의 저런 표정이 무얼 뜻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나?”

일견하기에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화가 없는 담담한 모습이었다. 하나 선즈라는 작자가 처음부터 알마리온에게 시비를 걸려고 할 때부터 알마리온을 지켜보고 있던 리처드는 그가 지금 어떠한 상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게 무슨…….”

“그대가 아직 알, 저 녀석을 따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르나 보군. 내가 한 가지 알려 줄까? 저 녀석이 저런 표정일 때는 절대 저 녀석 앞에 나서지 말라는 것이야. 왜냐고? 저런 표정일 때의 알, 저 녀석은 무엇인가 결심을 굳힌 상태임을 뜻하거든.”

“…….”

‘맞아. 그때도 그랬다. 주군께서 날 당신의 내면으로 끌어들였을 때도. 그리고 날 당신의 내면세계에 봉인하였을 때에도 분명 저런 표정과 저런 눈빛이었어. 그리고 빈민가에서 그들을 처단할 때에도.’

리처드의 말에 문득 알마리온과의 옛일들이 떠오른 그나이제나우는 그제야 그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훗! 형님도 참…….”

모두가 리처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알마리온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으시오.”

“……!”

여전히 담담하기만 한 말투였지만 들에핀꽃은 그의 목소리에 감히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음을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자가 어떻게…….’

양부인 용맹한영혼에게서 처음 느꼈던 그 항거할 수 없는 패기를 느낀 들에핀꽃은 너무 놀란 마음에 그저 물끄러미 알마리온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훗! 이건 내가 할 일이니 그댄 앉아서 잠시 진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어 몇 차례 토닥거린 후 살짝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히는 그의 행동에 그녀의 가슴이 절로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하였다.

‘아…….’

멍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인 알마리온이 몸을 돌려 문제를 일으킨 선즈를 바라볼 때에는 이미 표정이 다시 변해 있었다.

“안드레이 폰 선즈. 그댄 나 알마리온 헤이그 폰 이스턴의 명예와 나의 아내의 명예를 모욕했다. 이에 결투를 신청한다.”

그가 혼테르라는 성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 또한 제국의 황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정식 귀족임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국 귀족들 간에 벌어진 일이지 왕국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서 일부러 혼테르라는 성이 아닌 이스턴이라는 성을 사용한 것이다.

“후후. 결투라? 좋지! 하하하! 참으로 오랜만이군. 나 안드레이 폰 선즈에게 감히 결투를 신청하는 작자가 있다니 말이야. 크크크크!”

성격에 큰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선즈는 제국 내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그 실력이 있었기에 그가 그동안 벌인 수많은 사고에도 불구하고 타르탄 성과 함께 제국의 국경 방비에 있어서 중요한 거점인 모랄레스 성의 성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는 젊은 시절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는 일이 있으면 상대가 누구건 상관하지 않고 결투를 신청하거나, 결투를 신청하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그는 ‘살인귀’라는 또 다른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아무리 그가 시비를 걸어도 그를 이길 자신이 없는 이들은 그를 피해 버렸다. 그렇게 사람들이 그를 피하기 시작한 것이 거의 7∼8년 전의 일이었다.

“…….”

비릿한 조소를 지어 보이는 선즈를 잠시 바라본 알마리온이 먼저 성큼성큼 자리를 옮겨 광대들이 차지하고 있던 만찬장 앞으로 걸어 나갔다.

“후후. 듣자 하니 네놈 나라에서는 네가 익스퍼트라고 설치고 다녔다고 들었다. 어디 그런 네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볼까?”

제국인들은 로엔 왕국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아니, 비단 로엔 왕국뿐만 아니라 제국인이 아닌 다른 모든 나라의 사람들이나 민족들을 얕잡아 보고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이 무시한 자들에 의해 제국이 수백 년 동안 점령당했다 하더라도 그들을 무시하는 것은 여전했다.

특히 이들은 자신들에게 굴종하면 할수록 더욱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지금의 로엔 왕국처럼 제국이라면 일단 무조건 양보를 하는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더욱이 제국인들이 가장 비천하게 여기고 있는 포넬 왕국에 몇 년 동안이나 유린을 당하다가 제국의 개입으로 전쟁이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로엔 왕국인을 무시하는 이들의 선입견은 최고조에 달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마리온은 그가 나서자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선즈 또한 검을 뽑아 들었다.

챙! 챙!

“후후. 네놈이 죽으면 네놈의 아내인 저 계집은 내가 잘 돌봐 주도록 하지. 크크크크!”

“…….”

끝까지 알마리온을 격분시키는 망언을 서슴지 않던 선즈였지만 막상 알마리온이 검을 겨누자 일순 표정이 급격하게 변하였다. 막상 검을 겨눈 그 순간 선즈는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곧바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같은 익스퍼트라 해도 그 실력은 천차만별이었다. 지금 선즈의 능력은 확실히 뛰어난 것이어서 리처드와 거의 비슷한 정도의 실력이지만 그 정도는 알마리온에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이…… 이 상태로는 도저히…….’

그저 검을 겨눈 채 시종일관 담담한 자세로 자신을 겨누고 있는 알마리온에게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중압감을 느낀 선즈는 이 상태로 가다가는 알마리온에게서 느껴지는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채 제풀에 나가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먼저 그를 공격해 들어갔다.

깡! 챙! 채챙! 치이익! 챙! 챙!

마치 광풍이 몰아치듯 이어지는 선즈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의 움직임은 단 한순간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치 만찬장에 불려 온 광대들이 나무로 만든 장난감 검으로 처음부터 짜고 하던 움직임처럼 정확하게 들어맞는 공방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알마리온이 한 번씩 역습을 가했고, 그럴 때마다 선즈는 무척이나 당황하며 몸을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이제는 일방적인 알마리온의 공격을 선즈는 온 힘을 다해 막기에도 벅차했다.

‘지금!’

삐유웅!

무엇인가가 엄청난 속도로 공기를 가르며 날아갈 때 나는 소음이 만찬장을 울리는가 싶었다.

“……!”

팡!

“으악!”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어 그저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어느새 피어스 황자 앞에는 타르탄 성의 성주이자 제국 제일의 기사인 게이트 후작이 검을 뽑아 든 채 냉막한 시선으로 알마리온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역시.’

그리고 그 뒤에는 여전히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피어스 황자가 어리둥절해 있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다음 순간 만찬장이 갑자기 여인네들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꺄아아악!”

“헉!”

“으악!”

거리를 두고 알미리온과 마주 서 있던 경직되어 있던 몸이 어느 순간 오른쪽 허리께부터 왼쪽 어깨 있는 부분까지 절단된 채 그 윗부분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우욱!”

“욱!”

“우웩!”

전장을 누비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몸이 두 동강이가 난 채 그 안에 담겨 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역겨운 피 냄새를 맡게 되면 순간 구토를 참지 못하게 된다.

하물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장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런 이들이 바로 코앞에서 사람의 몸이 잘려 나가는 모습과 그 안에 담겨 있던 장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와 함께 상상조차 하지 못할 엄청난 양의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보았으니 어찌 되었겠는가.

“지나친 것 아니었나?”

너무나도 공포스러운 모습에 이미 기절해 있는 피어스 황자를 힐끗 돌아본 게이트 후작이 냉막한 표정으로 알마리온에게 말하였다.

선즈의 몸을 두 동강 낸 마나 소드는 그대로 이번 일을 꾸민 피어스 황자를 목표로 나아갔다. 한데 그것을 가로막아 선 이가 바로 게이트 후작이었다.

과연 제국 최고의 기사답게 게이트 후작의 능력은 상급 정령술사인 알마리온으로서도 감히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실력자였다.

한때 검의 주인이라는 마스터의 경지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알마리온은 어쩌면 게이트 후작이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 있거나 아니면 가장 근접해 있는 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런 게이트 후작이 나서지 않았다면 설사 알마리온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피어스 황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더라도 선즈와 똑같은 모습의 시신만 하나 더 늘어났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알마리온은 게이트 후작이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이와 같은 일을 벌였던 것이다.

알마리온과 선즈가 결투를 벌일 때부터 게이트 후작은 이미 선즈가 알마리온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알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피어스 황자의 흉계를 알았다면 아예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손을 썼겠지만 그는 피어스 황자의 흉계를 알지 못하였다.

하긴 워낙 강직한 성격의 게이트 후작에게 피어스 황자는 자신이 꾸민 흉계를 말할 입장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이미 도중에 말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기에 게이트는 내심 두 사람의 결투가 별 탈 없이 승부를 가르는 정도에서 끝나 주길 바랐다.

하나 결투가 진행되면서 일격에 선즈를 패퇴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알마리온이 결정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자 게이트 후작은 알마리온에게 다른 의도가 있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즈의 몸이 피어스 황자와 일직선상에 놓이게 되자 알마리온은 마나 소드를 이용하여 선즈와 피어스 황자를 한꺼번에 제거하려 하였던 것이다.

게이트 후작이 지나친 것 아니냐고 물은 것. 그것은 선즈를 잔인하게 죽인 것 때문이 아닌, 알마리온이 처음부터 피어스 황자를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질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국의 황자가 아니라 황제라 하더라도 이유 없이 귀족에게 모욕을 주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스 황자는 제국의 황제로부터 백작이라는 작위를 받은 정식 귀족인 알마리온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던 것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선즈의 이러한 행동이 피어스에 의해 꾸며진 일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두 당사자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여 알마리온 또한 결투를 빌미로 똑같은 방법, 그러니까 결투 도중 우연하게 벌어진 사고처럼 보이게 하여 피어스에게 경고를 하였던 것이다.

“으음…….”

“한창 무르익었던 만찬을 망치게 되어서 후작 각하께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검을 집어넣으며 알마리온은 자세를 바로 하고 게이트 후작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였다. 그런 알마리온의 행동을 보면서 게이트 후작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그대들 두 사람은 공주 전하를 부축하여 방으로 모시도록 하시오.”

“예? 예…….”

여느 여인네들과는 달리 전장을 누비고 다녔던 들에핀꽃과 냇가의돌은 놀라기는 하였어도 다른 여인들처럼 기절하거나, 아니면 마치 학질에 걸린 이처럼 넋이 빠진 모습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지는 않았다. 하나 이 두 여인 또한 순식간에 벌어진 일과 지금까지 보아 왔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알마리온의 모습에 반쯤 정신이 빠져 있었다.

“아, 아가씨…… 어, 어서…….”

“응? 응…….”

피어스 황자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공포스러운 선즈의 주검을 본 후 그대로 기절해 버린 카산느의 축 늘어진 몸을 양옆에서 부축하여 황급히 만찬장을 떠나는 두 여인을 잠시 바라본 알마리온은 칸을 비롯한 로엔 왕국의 기사들에게 역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프리모와 도르첸 두 사람을 그들의 방으로 모시도록 지시하고는 다시 한 번 게이트 후작에게 사과한 후 만찬장을 천천히 떠나갔다.

“소란을 일으켜 만찬을 망친 것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그럼 소관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

알마리온이 만찬장을 떠나자 그 뒤를 리처드와 그나이제나우 또한 게이트 후작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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