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제안
“나왔는가?”
벌써 말 위에 올라 있던 블랙 대공, 아니 용맹한영혼이 알마리온을 보자 먼저 알은체하였다.
“제가 좀 늦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쯧! 어제 약속하지 않았나? 너무 그렇게 격식 차리지 않기로 말이네.”
“훗!”
지난밤 연회에서 밤늦은 시간까지 술을 대작하였던 알마리온과 용맹한영혼이었지만 두 사람은 이제 막 아침이 밝아 오는, 아직 초원 너머로 해가 미처 떠오르기도 전인 이른 시각부터 승마를 하기 위해 만났다.
“자! 가지. 이랴!”
“이랴!”
알마리온이 말에 오르자마자 이내 말을 몰아가는 용맹한영혼의 뒤를 따라 알마리온도 말에 오르자마자 그 뒤를 따라갔다.
푸르르륵!
푸륵! 프르륵!
“…….”
성을 빠져나온 후부터 말을 달리기 시작한 두 사람은 말이 지쳐 갈 무렵 드넓은 초원 저 동편에서부터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처음 사내로서 뜨거운 마음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 열한 살 때였지. 그때도 저 태양은 저곳에서 저렇게 떠올랐다네. 난 저 태양을 보면서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내 어린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네. 그리고 나 또한 저 태양처럼 온몸을 불사르는 삶을 살아가고자 했지.”
“…….”
“어떤가? 정말 멋있지 않은가?”
용맹한영혼의 말처럼 그 끝을 알 수 없는 초원 저 너머에서 붉게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은 그 무엇으로도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렇습니다. 초원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늘 제게도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뜨거움을 전해 주더군요.”
황자와 공주 일행을 제국까지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왕국을 떠나 초원에 들어선 이후, 알마리온은 날이 궂어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초원의 일출과 일몰이 빚어내는 그 신비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하하하! 그렇지? 역시 자네도 사내로군. 진정한 사내만이 저 초원 너머에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지.”
“…….”
“난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침이면 저렇게 대지를 불태우며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내 영혼을 불태워 오고 있다네.”
용맹한영혼의 웅지가 그대로 느껴지는 말이었다. 열한 살의 나이 때부터 저렇게 초원을 불태우며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을 바라보며, 그 자신의 삶 또한 단 한 점의 후회도 미련도 남김없이 모두 태워 버리는 삶을 꿈꾸어 온 그의 삶에 문득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자, 이만 돌아가도록 하세. 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영혼을 충만하게 했으니 이제는 든든한 아침 식사로 몸을 든든하게 해야 하지 않겠나? 하하하.”
“하하, 맞는 말씀이십니다.”
5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니 대초원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인 그에게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의외였기에 알마리온 또한 아무 거리낌 없이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아 성으로 복귀하였다.
“황자님의 용태가 좋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아마도 어제 일로 인해 충격을 받으신 듯하네.”
처음부터 용맹한영혼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황자였다. 특히 제국에서 먼저 피어스 황자와 용맹한영혼의 여식과 혼사를 추진하였다가 제국에서 일방적으로 이를 취소하였기에 더더욱 부담을 가지고 있던 상태에서 그의 강렬한 인상에 그만 심약한 황자가 큰 충격을 받아 병을 얻고 만 것이다.
“일단 마법사가 전하의 용태를 살펴보기는 하였지만 지금으로써는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하니 어쩔 수가 없군.”
프리모와 도르첸의 설명에 알마리온은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공주의 호위 문제를 고민하였다.
“하니 후작이 공주님의 호위 문제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쓰도록 하게.”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언제까지인지 모르지만 일단 황자의 건강 문제로 당분간 차이센 성에서 머물러야 하였기에 필요한 조치들을 논의하기 위해 칸과 머리를 맞대었다.
“하니 남작께서는 병사들을 3개 조로 나누어 교대로 항시 1개 조는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취해 주도록 하십시오.”
“예, 각하. 하면 공주님에 대한 근접 경호는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건 남작과 리처드 경 그리고 그나이제나우 경이 돌아가면서 공주님을 호위하도록 하세요.”
“그리하겠습니다.”
실상 이들이 굳이 호위를 하지 않아도 알마리온은 정령을 이용하여 공주를 보살피고 있었다. 그것은 정령술사인 칸 또한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두 분이 말씀은 안 하셔도 어찌 그리 하는 행동들이 비슷한지 모르겠군. 마스터께서도 정령을 소환하여 하루 종일 국왕 폐하의 안위를 확인하고 계시듯 후작께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공주님의 안위를 확인하고 계시니 말이야.’
전부터 알마리온이 로엔달의 친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칸은 자연스럽게 두 부자의 행동을 눈여겨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두 부자가 참으로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비록 외모로는 두 사람이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판이했지만, 성격이나 하는 행동들을 가만 지켜보면 두 사람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훗! 그래서 피는 못 속인다는 말도 있는 것이겠지.’
잠시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던 칸이 지시 사항을 모두 전달받자 이를 수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쳇! 약골 같은 녀석 같으니라고. 겨우 그 정도에 놀라서 병이 나는 놈을 어디에다 써먹을꼬?”
피어스가 탈이 났다는 보고를 무거운돌로부터 받은 용맹한영혼은 어이가 없었다. 단지 살짝 겁을 준 것뿐인데 그것도 견뎌 내지 못하고 탈이 났으니 말이다.
“후훗! 대족장께서 너무 그를 심하게 대하신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마치 조금은 나이 많은 손위 형을 대하는 듯 적당히 격식을 갖추면서도 예의보다는 편안함이 느껴지는 정도로 용맹한영혼을 대하는 무거운돌의 이러한 행동은 제국이나 왕국과 같았다면 결코 용납되지 않는 그러한 무례한 행동이었다.
게르혼족의 풍속은 제국이나 로엔 왕국처럼 예법이 철저하지 않았다. 제국과 왕국에서 이들을 두고 야만인이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러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녀석에게 들에핀꽃을 주지 않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야. 안 그런가?”
들에핀꽃은 피어스 황자와 혼담이 오갔던 용맹한영혼의 여식이었다. 원래 그녀는 용맹한영혼의 친딸은 아니었는데 그와 의형제였던 두꺼운팔이 부족을 통합해 나가는 전쟁 도중 전사를 하게 되자 그의 딸인 들에핀꽃을 양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건 그렇습니다.”
“후훗! 하긴 뭐 어지간한 사내라면 그 아이의 그 괄괄한 성격을 제대로 견뎌 내지도 못하였을 것인데 그 황자란 녀석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그것이 더 잘된 것인지도 모르겠군.”
단지 이름만 들으면 무척이나 여성스럽게 느껴지는 이름이었지만 용맹한영혼의 양녀인 들에핀꽃은 소문난 왈패였다.
아니, 왈패라고 하기보다는 남자답다고 해야 더 어울렸다.
게르혼족은 초원을 떠도는 민족들이었다. 그만큼 거칠고 투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었기에 여인네들 또한 그러한 환경에 맞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때문인지 게르혼족 여인네들은 강인했다. 이들은 자신을 꾸미는 일보다는 한 사람 몫의 일을 해야 하는, 아니 몇 사람 몫의 일을 해야 하는 일꾼으로서의 역할을 더 강조하였기에 이들에게 있어서 여성스럽다는 것은 칭찬이 아닌 욕에 가까운 말이었다.
하나 그중에서도 들에핀꽃은 유별나다 싶을 정도였다.
그녀의 외모는 모두가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상당히 아름다웠다. 아무리 풍속이 다른 제국 사람들이나 왕국 사람들의 눈에도 그녀의 외모가 아름답다는 것에 일말의 반대도 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지만, 그녀는 여인의 길이 아닌 전사의 길을 걷고 있었다.
실제로 그동안 있어 왔던 수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적지 않은 공도 세운 그녀를 두고 모두는 그녀가 사내로 태어났어야 한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고 있었다.
“하하하.”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니라네. 먼저 간 그 친구에게 내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녀석에게 보내 주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였다는 것을 자네도 알지 않는가?”
“하하. 그러게 누가 그런 약속을 하시라 하였습니까?”
“흥! 그거야 그 친구가 죽기 전에 그렇게 부탁했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닌가.”
“하하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런 지키기 힘든 약속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지요.”
“허…… 이젠 아주 날 가지고 놀려고 하는군? 어때? 오랜만에 한바탕 몸이라도 풀고 싶어지는가?”
“이거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전 전사가 아니라 현자입니다? 벌써 그걸 잊으실 정도로 노망이라도 드신 것입니까?”
“쳇! 하여간 뚫린 입이라고 말은 참 잘해요……. 한데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그 아이를 보낼 적당한 녀석이 어디 없을까?”
“하나 생기지 않았습니까?”
“생기다니? 갑자기 무슨…… 아! 그래. 그렇군! 바로 그 녀석이 있었지!”
무거운돌의 말에 무엇인가 떠오른 용맹한영혼이었다.
“하하하! 맞아!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 아이의 배필이 되고 남을 것이야!”
용맹한영혼이 자신의 양녀인 들에핀꽃의 배필로 떠올린 사람. 그는 바로 알마리온이었다.
“한데 그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묻고 싶은 것이 있네.”
“연회에서 그가 보였던 그 목걸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것이 무엇인데 그리 놀랐던 것인가?”
“혹 대족장께서는 메코이족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메코이족? 아! 들은 기억이 나는군. 예전에 할아버님이 해 주셨던 말이 기억나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메코이족은 신의 선택을 받은 부족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린 시절 부족장이었던 조부로부터 들은 여러 이야기들 중에 어렴풋이 기억나는 한 부족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태초에 이 세상이 만들어지고 그분의 가장 너른 품에 신의 의지에 따라 많은 인간들이 탄생하였다.
신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들이었지만 이들의 삶이 너무 힘들어 보이자 신은 자신의 의지로 만들었던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에 순응하며 자신을 숭배하는 법을 인간들에게 알려 주었고, 그때부터 인간들은 더 이상 나약한 존재가 아닌 세상의 주역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한데 이러한 신의 의지와, 신을 숭배하는 법을 신으로부터 전해 받은 이가 있으니 그를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라는 뜻을 가진 ‘메코이’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그가 이룬 부족이 바로 메코이족이었다.
이제는 거의 모든 게르혼족들이 잊어버린, 그 당사자들조차도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된 일이었지만, 아직도 몇몇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게르혼족만의 전설이었다.
“하면 그가 어제 내보인 그 목걸이가 그 메코이족의 대족장임을 알려 주는 신물이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것은 분명 ‘신의 선택을 받은 자의 신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으음…….”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은 비록 그러한 전설을 기억하는 이조차 거의 없었지만, 어쨌든 한때 모든 게르혼족을 이끌어 갔던 전설의 주인공이 제국 측에서 자신의 대항마로 내놓은 자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설마 제국 측에서 그와 같은 전설을 알고? 아니, 그건 아니다. 우리 게르혼족들조차도, 아니 메코이족 자체도 이미 그러한 전설을 잊은 지 오래인데 제국 측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그를 나의 대항마로 내놓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무엇이든 기록해 놓는 것을 좋아하는 제국인들이라 하더라도 자신들조차 이미 잊은 지 오래인 전설을 그들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나 단지 우연이라고만 받아들이기에는 숙명처럼 느껴지는 이 인연에 용맹한영혼은 잠시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훗! 어차피 운명으로 정해진 인연이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도리겠지. 안 그런가?”
“후훗! 맞습니다, 대족장. 주어진 운명이라면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하나 이겨 낼 수는 있는 일이지요.”
“하하하. 맞는 말이네. 그리고 난 그러한 운명을 이겨 낼 것이고 말이야.”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나중에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난 그가 마음에 든다네.”
“하면 공주를 그에게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갑자기 나온 말이었지만 알마리온이라면 용맹한영혼이 전장에서 죽어 가면서 자신의 딸을 부탁하던 친구의 유언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란 생각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랬으면 해. 그라면 두꺼운팔에게 한 나의 약속을 지킨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군.”
“대족장께서 그토록 확신하신다면 그리 행하십시오.”
“좋아! 그럼 그렇게 일을 추진해 보도록 하지.”
“뭐라고? 그러니까 양부께서 날 그자에게 보내려 하신다고?”
“그렇습니다, 공주님.”
용맹한영혼이 자신을 알마리온에게 보내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들에핀꽃의 건강한 아름다움이 한껏 느껴지는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양부님도 참…… 지난번에는 제국의 그 3황자인가 뭔가 하는 자에게 보내려 하시더니 이번에는 그 황자와 혼인할 로엔의 공주를 수행하여 온 자에게 보내려 하시네.”
“며칠 전에 대족장님께서 그들 일행을 위해 연회를 베푸셨을 때 보았던 시녀들의 말로는 대단한 미남이라고 하였습니다.”
들에핀꽃은 알마리온 일행이 차이센 성에 도착하기 얼마 전에 성을 떠나 사냥을 다녀온 그녀는 아직 알마리온을 보지 못한 상태였다.
“흥! 얼굴만 번지르르하게 생긴 녀석이란 말이지?”
“단지 그뿐만이 아니랍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싫은 내색을 하면서도 시비이자 단짝 친구이자 양부인 용맹한영혼의 최측근이자 현자인 무거운돌의 딸이기도 한, 냇가의돌이 하는 말에 들에핀꽃은 관심을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냇가의돌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놀렸다.
“호호! 싫은 척하면서도 관심이 있으신가 봐요?”
“놀리지 말라고. 난 단지 양부가 이번에는 또 어떤 놈에게 날 팔아넘기려고 하는 것인지 알고 싶을 뿐이라고. 알겠어?”
“호호호. 어련하시겠어요?”
“그만하고. 또 무슨 일이 있었지?”
들에핀꽃이 관심을 보이자 냇가의돌은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아니 좀 더 각색을 해서 그녀에게 전해 주었다.
“그래? 그럼 그자가 양부의 기운을 받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았단 말이지?”
“그렇다니까요. 공주님도 아시죠? 대족장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허리를 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말이에요.”
“…….”
냇가의돌의 말처럼 그녀의 양부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가 정색을 한다면, 아니 굳이 정색을 하지 않아도 단지 그에게서 느껴지는 느낌만으로도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는 이가 바로 그녀의 양부였다.
한데 그런 양부가 정색을 하게 되면 그 누구도 감히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허리를 굽히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암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그녀 자신도 양부가 정색을 하게 되면 순한 고양이로 변할 정도로 그녀의 양부인 용맹한영혼은 모두를 압도하는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그런 양부가 정색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양부를 대했다는 말을 듣게 되자 그녀는 알마리온에 대해 큰 관심이 생겼다.
‘훗! 역시 아버님이셔. 공주님을 제대로 다루려면 공주님의 호승심을 자극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딱 그대로 되었네. 호호호.’
양부와 양녀란 사이였고, 또한 여인의 몸이었지만 들에핀꽃은 용맹한영혼을 자신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를 극복하여 대초원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보다 더욱더 뛰어난 영웅이 되어 모든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겠다는 것이 목표인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는 그가 자신을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고 양녀로 받아들인 이후부터 생긴 목표였는데, 그녀는 기꺼이 용맹한영혼의 여러 아내들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그가 친구의 딸을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고 양녀로 받아들이자 이러한 목표를 가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 이후 들에핀꽃은 모든 기준을 자신의 목표인 용맹한영혼에 맞추었고 그보다 못한 부분이 하나라도 있으면, 설사 그것이 제국의 황자가 아니라 황제라 하더라도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이러니 그녀가 누군들 눈에 차서 혼인을 하고 싶어 하겠는가. 그런 사정을 잘 아는 무거운돌은 들에핀꽃의 시비이자 단짝인 자신의 딸에게 그녀의 이러한 호승심을 자극하면 그녀가 알마리온에게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 귀띔을 해 주었던 것이고, 그의 이러한 계책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그대로 적중하였다.
‘어쨌든 공주가 그분에게 가면 나도 따라가야 하는데…… 그분 곁에 제대로 된 사내가 있는지 모르겠네. 듣기로는 그분 곁에 꽤 괜찮은 사내들이 있다고 하던데 말이야. 호호호.’
들에핀꽃이 ‘초원의 암호랑이’라고 소문나 있다면 누가 그 시비이자 친구가 아니랄까 봐 냇가의돌 또한 ‘초원의 살쾡이’로 소문이 나 있는 여인이었고, 그녀 역시 이미 혼기를 놓친 상태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주군.”
“이제 그 육체에 많이 익숙해지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주군 덕분입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이른 새벽. 알마리온은 그나이제나우와 함께 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하였다.
그동안 많은 노력을 해서인지 그나이제나우의 사념체와 사념체가 깃들여 있는 육체는 큰 부작용 없이 서로 잘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하나 아직 멀었습니다. 이제 겨우 이 육체를 통제하는 데 익숙해진 것뿐입니다, 주군.”
마음 같아서는 단지 몸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옛 실력 모두를 되찾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군신 관계를 떠나 강자인 알마리온에게 다시 한 번 정식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그였다. 과거 그의 주군이었던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에게 도전했던 그 당시처럼 말이다.
한데 그런 그나이제나우의 심정을 알기라도 한 것인지 알마리온은 조용히 미소 지어 보이며 그에게 한마디 충고를 하였다.
“너무 그렇게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난 언제나 그나이제나우 님 앞에 있으니 말입니다.”
“…….”
알마리온의 말에 그나이제나우의 푸른 눈동자가 그에게 고정되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 또한 그나이제나우 님이 과거의 모든 능력을 하루라도 빨리 되찾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전설로만 전해진 ‘검의 주인’이라는 경지가 어떤 것인지 직접 겪어 보고 싶으니 말입니다.”
알마리온 또한 전설로만 전해지는 마스터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 직접 경험해 보고 싶긴 마찬가지였다. 하나 그런 것은 서두른다고 해서 서둘러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그리고 그대도 욕심을 부리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욕심은 언제나 큰 화를 부르는 원인이니까 말입니다.”
사념체로 존재할 때에는 사념체가 만들어진 목적을 이룰 때까지 영원토록 존재할 수 있지만, 사념체가 일단 육체에 깃들여 육체와 동화된 이후에는 그 육체가 생을 마감할 때 사념체 또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알마리온은 혹여 그나이제나우가 하루라도 빨리 과거의 힘을 되찾고자 과욕을 부려 스스로 몸을 망치거나 아니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주군. 하나 탐욕은 파멸의 지름길이지만, 의욕은 성장의 원동력이지 않겠습니까?”
탐욕貪慾은 파멸의 지름길이지만, 의욕意慾은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그나이제나우의 말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말이었다.
알마리온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 말이 지금 이 순간 유난히 그의 심상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너무나 쉽게 눈에 띄는 것들이었기에 등한시 여기던 것들,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을 그저 평범하게 여기고 쉽게 받아들이지만 그러한 것들이야말로 진리 아닌 것이 없었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늘 접하는 것이었기에 그 위대함을 미처 느끼지 못하던 많은 것들을 위대하게 볼 수 있는 바른 눈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아닐까?
“주군?”
마치 넋을 잃은 사람처럼 초점 없는 시선을 저 먼 곳에 둔 알마리온을 보자 그나이제나우는 그가 지금 중요한 순간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
수련을 마치고 넣어 두었던 검을 다시금 뽑아 든 그나이제나우는 알마리온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를 위해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으음…….”
알마리온은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도 빨리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주군?”
“아! 감사합니다, 그나이제나우 님.”
“감축드립니다.”
과거의 경험상 그나이제나우는 알마리온에게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한데 그의 경험에 비춰 보았을 때 알마리온의 깨달음은 너무나도 순식간에 끝나 버린 것은 물론,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그에게서 거의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아 무엇인가 이상하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데…….”
“하하, 내가 너무 일찍 깨달음에서 벗어난 것도 그렇고 또 별다른 변화도 느낄 수 없어서 그러시는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주군. 혹시 …….”
혹시 자신이 주변에 있어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는지 그나이제나우의 표정이 잔뜩 굳어져 물었다.
“이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나이제나우가 혹여 자신이 방해가 되어 제대로 된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어 죄스러워하자 알마리온은 그런 것이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비록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나이제나우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훗! 진리는 언제나 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
여전히 영문을 모르는 그나이제나우의 모습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그저 빙긋 웃음 지었다.
때로는 백 마디, 천 마디 설명을 해 주어도 직접 경험을 하고 몸으로 느끼기 전까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었다.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시간이 꽤 지났으니 말입니다.”
“예, 주군.”
“이상합니다. 황자 전하의 용태가 더욱 위중해져만 가니 말입니다.”
가드너 백작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피어스 황자의 상태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점차 악화되어만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도 황자 전하의 용태가 왜 점점 나빠지는 것인지 그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가드너 못지않게 피어스의 용태를 걱정하는 프리모가 물었다.
“전혀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다만…… 그날 전하께서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은 때문에 심신이 허약해져 있는 것은 알겠는데 지금의 상태는 아무리 그런 것을 감안해도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말밖에는…….”
“혹시 놈들이 독이라도 사용한 것은 아닌가?”
“저도 그 점이 의심이 되어 마법사로 하여금 독의 사용 여부를 알아보라 하였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하였습니다.”
“으음…… 아무래도 안 되겠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하루속히 제국으로 향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네.”
“아무래도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황성으로 돌아가면 제국 최고의 마법사들이 황자 전하를 돌보게 될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세. 그러는 것이 좋겠네.”
두 사람은 피어스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점차 건강이 나빠지자 마음이 다급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황자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지 못하겠다, 이것인가?”
그래도 로엔 왕국의 세습 귀족 중 유일한 공작인 프리모를 마치 수하 다루듯 하는 용맹한영혼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대공.”
용맹한영혼에게 제대로 기가 꺾여 버린 프리모가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렇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군. 하면 언제 떠날 생각인가?”
“가급적 빨리…….”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지만 일단 손님으로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이었으니 주인의 허락 또한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가? 하지만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 날이 밝으면 떠나도록 하게.”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말이네. 혹시 모르는 일이니 이쪽에서도 사람을 붙이도록 하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후후. 너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내 잘 알고 있지.”
용맹한영혼의 눈빛이 더욱 날카롭게 변하자 프리모는 내심 뜨끔해졌다.
“만약 그 허약한 놈이 가는 도중 잘못되거나 아니면 황성에 도착한 후에라도 무엇인가 잘못되면 결국 너희는 그 모든 책임을 내게 뒤집어씌우려고 할 것 아닌가? 내 말이 틀렸나?”
“으으…….”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아들의 죽음에 대로할 황제의 분노를 감당할 만한 능력도, 배짱도 없는 프리모와 가드너였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질 황제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용맹한영혼을 핑계 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겠지. 안 그런가?”
“어, 어이 그런 말씀을…….”
“왜? 내가 괜한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것이 아니오라…….”
“어쨌든 난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원망을 듣거나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네. 또한 조만간 황자가 혼인을 하는데 어차피 축하 사절을 보내야 하지 않겠나?”
확실히 황자가 혼인을 하는데 비록 허울뿐인 작위이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제국으로부터 대공이라는 작위를 받은 그가 축하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들 일행이 떠날 때 축하 사절을 함께 딸려 보낼 생각이었기에 이미 준비 또한 대충 다 해 놓은 상태였다.
“뭐, 대충 예물은 다 준비해 뒀으니 내일 함께 떠나도록 하라. 그리고 오늘 밤에는 먼 길을 떠나는 그대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연회를 열 것이니 필히! 필히! 참석토록 하라. 알겠나?”
프리모나 가드너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용맹한영혼이 일방적으로 통보한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내일 출발하게 될 것이란 통보를 받고 출발을 위한 준비를 감독하던 알마리온은 용맹한영혼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그를 찾아갔다가 그로부터 놀라운 제안을 받게 된다.
“왜? 내 양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 비록 양녀이긴 하여도 그 아인 엄연히 나의 딸이네.”
용맹한영혼이 알마리온에게 한 제안은 바로 한때 피어스 황자와 혼담이 오가던 그의 양녀인 들에핀꽃을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풍속이 서로 많이 다르다 하더라도 여식을 다른 이에게 맡긴다는 것은 그녀의 일생을 책임져 달라는 의미만큼은 이들 게르혼족이나 제국이나 왕국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어린 여아의 경우에는 혼기가 되면 좋은 혼처를 잡아 혼인을 시켜 주는 것으로 책임을 지게 된 의무를 다하는 것이지만 이미 혼기에 있는 여인을 데려가라는 것은 혼인을 하라는 의미였다.
하니 이런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은 그가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것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님을 대공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면 무엇 때문에 그리 놀라는가? 어차피 자넨 가정도 꾸리지 않았는데 말이야. 아니, 설사 가정을 꾸렸다 해도 상관없지. 자네 나라도 부인을 여럿 둘 수 있으니까 말이야.”
“…….”
너무 어이가 없으면 사람이 할 말을 잃는다고 하더니 지금이 딱 그런 상태였다. 하나 얼마 후 그는 낯빛을 굳힌 채 용맹한영혼을 직시하며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제국에서 제게 왜 작위를 주었는지, 그리고 작위를 주면서 그들이 제게 준 봉지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언젠가 그와 자신이 적이 될 것임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하나 용맹한영혼은 그런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그게 중요한가?”
“그렇습니다.”
“후훗! 역시 자네는 아직 젊군. 그리고 지나치게 순수해. 그런 것을 따지다니 말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지? 제국이 무엇을 바라고 그대에게 작위를 주었는지, 그리고 그 작위와 함께 내준 땅이 어디인지 말이야. 왜? 자네와 내가 적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아이가 불행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란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그렇습니다.”
“자네가 보기에 지금 내가 힘이 없어서 나머지 초원을 통일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가? 그리고 힘이 모자라 제국을 침략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가?”
“…….”
“그렇게 보았다면 실망이군.”
용맹한영혼은 힘이 부족해서 나머지 초원을 통일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힘이 모자라서 제국을 침공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초원의 통일도, 그리고 제국의 침략도 하지 않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난 나를 상대할 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네. 나의 이 뜨거운 피를 더욱 뜨겁게 달구어 줄 그러한 자가 나타나거나, 나의 이 뜨거운 피를 차갑게 식혀 줄 그런 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네.”
“으음…….”
만약 다른 누군가가 이러한 말을 하였다면 알마리온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여기고 그를 불쌍히 여기거나, 아니면 아예 그를 상대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이 말을 한 이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용맹한영혼이었다. 그러했기에 알마리온은 그의 이러한 말이 진심에서 나오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느꼈듯이 그대 또한 느꼈을 것이다. 그대와 내가 숙명으로 얽힌 적이라는 것을.”
그가 어떻게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 그도 이미 자신과 숙명으로 얽힌 인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크게 놀랍지만은 않았다.
“언젠가 그대가 나의 적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난 기꺼이 그런 그대를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난 그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
“하나 그대가 만약 사사로운 인연이나 정으로 나를 대함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난 무척이나 슬플 것이다.”
“으음…….”
‘역시 영웅이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알마리온은 용맹한영혼이 영웅이라는 것을 애써 부정하려 하였다.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훗날 숙명적으로 서로에게 검을 겨누어야 하는 그를 제대로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나 이제 더 이상 그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를 있는 그대로의 그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게 있은 작은 깨달음도 이 때문이었는가?’
문득 오늘 새벽에 얻은 작지만 큰 깨달음이 떠올랐다. 알면서도 또한 알지 못하였던 것, 그것은 바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였기에 벌어지는 일임을 깨달은 그는 드디어 마음속으로 거부하였던 모든 굴레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만약 그러한 깨달음이 없었다면 알마리온은 다시 한 번 용맹한영혼이 영웅임을 절감한다 하였어도 애써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와 얽힌 숙명을 피하려고만 하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 이제 더 이상 그는 피하지 않았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는 당당함을 보이기로 한 것이다.
‘역시…….’
그런 알마리온의 변화를 읽었음인지 용맹한영혼의 입가에는 찰나의 순간처럼 짧게 미소가 어렸다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그 아이는 날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이네. 만약 그 아이가 내 친구의 딸이 아니었다면 나 또한 그 아이의 사랑을 받아들였을 것이네.”
“…….”
“그런 그 아이를 자네에게 보내고자 하는 것은, 자네가 그 아이의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네. 또한 그것이 내가 친구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네. 뭐, 덕분에 나도 골칫거리 하날 덜어 낼 수도 있으니 자네도 좋고 나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안 그런가?”
한껏 무게를 잡아 가며 이야기하던 용맹한영혼이 갑자기 능청스레 농담을 건네자 알마리온 또한 따라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하하. 역시 그런 뜻이었군요? 하면 대공의 골칫거리를 덜어 주었으니 그 대가로 제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흠…… 이미 가질 것은 다 가지고 있어 보이는데 뭘 또 바라는 것이지? 게다가 비록 골칫덩어리기는 하여도 그 아이가 얼마나 아름다운 아인지 자네도 곧 보면 알 것이네.”
“그건 그것이지요. 어쨌든 제게 골칫덩어리를 맡기셨으니 그에 대한 대가도 지불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벽녘에 있었던 깨달음 덕분인지 그동안 스스로를 옭아맸던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진 알마리온의 행동이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흥! 이제 보니 아주 욕심쟁이였군? 좋아. 주지! 준다고. 까짓것 주지 뭐.”
“그럼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시간. 시간을 주지.”
“…….”
들에핀꽃을 맡긴 대가로 시간을 주겠다는 용맹한영혼의 말에 알마리온이 눈을 빛냈다.
“하나 오랜 시간을 주진 못하네.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은 싫거든. 1년? 아니, 3년을 주지. 그 안에 자네가 날 상대할 힘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땐 나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것이네.”
“3년이라…… 알겠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일 수도 있는,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에핀꽃을 맡기는 대가로 주겠다는 용맹한영혼의 말에 알마리온은 싱긋 웃으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하! 좋아! 한데 이거 앞으로 몸 좀 만들어야겠군. 이렇게 뱃살이 많이 나와서야 어디 한창 젊은 자네를 상대나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그렇다고 너무 열심히 하진 마십시오. 그러다 허리라도 다치시면 싱겁게 끝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음? 하하하! 그건 안 될 일이지. 암! 하하하!”
“하하하!”
적을 앞에 두고서도 이처럼 흉금 없이 웃을 수 있는 이 두 사람 모두 결코 평범한 이들은 아님이 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