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첫 대면 (44/70)

첫 대면

워낙 그동안 쌓인 피로가 많았음인지 메르타니온 국왕의 병이 오래가자 예정되었던 피어스 황자와 카산느 공주의 약혼식은 뒤로 연기되었다.

그사이 알마리온은 북동군의 해체 문제와 국경을 방비할 직영지의 영지군 구성을 위한 일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나 알마리온은 시작부터 커다란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북동군에 속하는 7, 8, 10군의 군단장들은 물론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알마리온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사임을 하여 버렸다.

이들 또한 국왕을 따르는 자들이었지만 이들은 갑작스럽게 벼락출세를 한 알마리온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대부분은 평생을 메르타니온 국왕에게 충성을 바쳐 온, 그러면서도 오지에서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렇다 할 대우를 받지 못한 반면 노예 출신인 그가 익스퍼트가 된 이후 몇 차례 공을 세웠다 해서 평생을 봉사해 온 자신들이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그러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런 알마리온을 자신들의 상관으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자존심상 쉽게 허락되는 일이 아니었다.

이렇듯 기존의 7, 8, 10군 군단장은 물론 지휘부들 대부분이 사임을 하자 알마리온은 당장 이들을 어떻게 수습을 해야 좋을지 난감해졌다.

“후작님이 어려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슬쩍 눈치를 보며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알마리온의 상황을 로엔달에게 전하는 칸이었다.

“그 아이가 말인가?”

“예, 마스터.”

“무엇 때문이지?”

“후작님이 맡게 된 북동 지역의 영지군 구성에 대한 문제 때문인 것 같습니다.”

“…….”

“기존의 7, 8, 10군단 사령관들과 지휘부 거의 대부분이 사임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예, 마스터.”

“그런 일은 구태여 내게 이야기할 것 없네. 자네가 알아서 하도록 하게.”

여전히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지만 오랫동안 그와 함께한 칸은 느낄 수 있었다. 로엔달의 말투에 알마리온을 걱정하는 깊은 정이 담겨 있음을.

“알겠습니다, 마스터.”

마음 같아서는 비밀결사인 정령의꿈에 속한 자들을 소개해 주고 싶었지만 그곳은 오직 국왕만을 위한 조직이었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군에 몸담고 있었기에 칸은 실력과 능력은 있지만 출신 성분으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제법 많이 알고 있었고 이들을 알마리온에게 소개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도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한창 군 지휘부 구성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알마리온에게 있어서 칸이 소개해 준 이들은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후작 각하.”

“아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더 많은 도움을 드리지 못한 것이 오히려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실상 칸이 소개해 준 사람들도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군을 지휘할 자들과, 군을 관리할 행정관들의 수는 많이 부족하였다.

“좀 더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칸 남작.”

“하면 소관은 이만 근무시간이 되어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십시오.”

칸이 막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였다.

“아! 그리고…… 그분께도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훗!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그럼 이만.”

내내 로엔달에 대한 이야기는 묻지도 하지도 않아 내심 불편하였던 것이 마지막 말로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칸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사람을 구하긴 하였지만 여전히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기에 알마리온은 그나마 가장 친분이 두터운 폰티악을 찾아갔다.

“자네가 고생이 많군.”

“하여 후작님께 도움을 청하러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알겠네. 내 아는 이들이 좀 있으니 그들을 자네에게 보내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후작님.”

“허허. 오히려 내가 감사하지. 비록 내 밑에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모두 함께하기엔 버거웠는데 말이네.”

해군은 비단 바다 위에서만 싸우는 부대가 아니었다. 이들은 육전 또한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했고, 실제로 이들은 전선을 타고 바다에서 적의 해군을 상대로 전투를 할 때보다는 육지에 머물면서 해적들이 마을을 침입하였을 때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전투에 동원될 때가 더욱 많았다.

따라서 그의 휘하에는 해전보다는 육전에 더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이들이 많았다.

문제는 원수부의 해체에 따라 해군 또한 해체가 되었는데 갑작스럽게 해군이 해체가 되면서 해군 지휘관들이었던 이들 대부분이 갑자기 할 일이 없게 되어 버린 상태였다.

폰티악은 그동안 이들을 자신의 밑에 두고 있었지만 이들 모두를 끝까지 책임질 수는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처럼 알마리온이 이들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오히려 더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 받으십시오.”

“이게 무엇인가?”

“배를 건조하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그 착수금입니다.”

원해를 나가는 튼튼한 배를 건조하기 위해서는 1척에 10만 골드 이상이 들게 된다. 물론 이는 최소한의 비용이 그렇다는 것이고, 조금 쓸 만하다 싶은 배는 척당 15만 골드 정도가 들었으며 좋은 배는 20만 골드라는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

이것은 순수한 건조 비용이었고 여기에 필요한 장비까지 구비할 경우에는 이보다 2∼3만 골드 정도가 더 필요했다.

그것을 알기에 알마리온은 착수금조로 물경 100만 골드에 해당하는 보석을 그에게 건네준 것이었다.

“조만간 해군에서 보유하고 있던 배들을 처분할 것이네. 하니 일단 그 배들을 구입하면 큰 부담은 되지 않을 것이네.”

해군이 해체되면서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장비 또한 함께 처분하기로 결정되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어쨌든 기존의 배를 매입한다 하더라도 많은 비용이 필요하실 것입니다. 하니 그것을 쓰도록 하십시오.”

“자네도 많은 자금이 필요할 텐데 정말 그 일을 계속 추진할 텐가?”

“그렇습니다. 그 길이 왕국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게을리할 수 있겠습니까?”

“젊음이란 것이 참으로 부럽군.”

“훗…….”

“어쨌든 잘 알겠네. 그건 그렇고 이번에 제국에 가게 되면 반드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해도들을 꼭 필사筆寫해 와야 하네. 알겠지?”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제게 생각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럼 전 이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그렇게 폰티악과의 만남을 끝내고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에 올라탄 그의 눈에 석양을 맞이하며 어머니와 함께 텃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일레인을 볼 수 있었다.

마치 한 폭의 목가적인 풍경을 보는 것처럼 묘한 감동을 주는 그녀의 모습에 한동안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함멜 자작.”

“후작 각하를 뵈옵니다.”

“한데 이분은 누구십니까?”

“인사드리거라.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후작 각하시다. 이쪽은 제 차남인 게오르그라고 합니다, 후작 각하.”

게오르그는 현재 준남작이라는 작위로 궁내부의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후작 각하. 게오르그 함멜이라고 합니다.”

“아! 아드님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라고 합니다.”

“이 아이는 소관 밑에서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후작 각하께서 맡으실 북방 7개 지역의 직영지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파악하실 수 있도록 후작 각하의 곁에서 돕게 될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북동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이 왕실 직영지였지만 북동군은 왕국이 재정을 투입하여 운영하는 상비군이었기에 직영지 행정에는 관여할 수 없었고, 반대로 직영지의 성주 또한 북동군에 대해서는 일절 간섭을 할 수가 없었다.

즉, 알마리온이 맡게 된 7개 직영지의 행정은 궁내부에서 관리, 감독하고 있었고, 북동군에 대해서는 원수부에서 관리, 감독하고 있었다.

때문에 궁내부와 원수부에서 별도로 7개 직영지와 북동군에 관련된 서류들을 모두 넘겨받아야만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문제는 왕궁이 파괴되면서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관련 자료 또한 함께 소실되어 버렸기에 알마리온이 맡아야 할 일곱 곳의 직영지에 대한 서류와 북동군에 대한 서류가 왕도에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알마리온은 궁내부 장관인 함멜 자작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어차피 궁내부에서도 소실된 자료를 복구하기 위해서 각 직영지에 보관하고 있던 서류들을 조사하여야 했기에 알마리온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다.

하나 장기간 외유를 해야만 하는 자신을 대리하여 일곱 곳의 직영지를 통치하면서 해체될 북동군에 관련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북쪽의 국경을 지킬 영지군을 조직하고 자신이 복귀할 때까지 이들을 훈련시키며 국경을 방비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 나갈 만한 적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도르첸 공작이 몇 사람 추천을 해 주긴 하였지만 솔직히 그들 모두 썩 달갑지 않았는데,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이들을 추천한 도르첸 공작이나 그의 추천을 받은 자들이나 모두 의도가 불순해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익스퍼트라는 것을 공인하는 자리에 함께 있었던 당시 6군단장이었던 갈리 백작을 찾아가 그에게 부탁도 하여 봤지만 그 또한 당장 자신의 영지를 복구하는 일에 전념을 해야 한다며 이를 고사해 버렸다.

이러한 그의 고민이 해결된 것은 그의 부름을 받고 리처드와 하인리히가 도착한 날이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냐? 아님 신이 널 너무 편애하는 것 아니냐?”

알마리온의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리처드와 하인리히였다. 그가 이들 두 사람을 소환한 것은 체임버스에게 건네주기로 한 마법 아이템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피어스와 카산느를 호위하는 일을 위해서였다.

원래 황자와 공주는 왕국에 왔을 때처럼 배를 타고 제국으로 갈 계획이었지만 난생처음 배를 탄 피어스 황자가 오는 동안 지독한 뱃멀미를 한 탓에 두 번 다시 배를 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워 결국 육로로 이동을 하기로 결정된 상태였다.

게다가 원래는 프리모 공작과 더글러스 후작이 이들 일행을 호위하여 제국으로 간 후 그곳에서 치러질 두 사람의 혼례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피어스 황자가 더글러스 후작 대신 알마리온으로 하여금 호위를 책임져 달라고 요청을 하였기에 결국 그가 호위대를 책임지게 되었기에 이들의 안전을 위해 익스퍼트인 두 사람을 급히 소환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소환을 받아 왕도에 모습을 나타낸 두 사람은 처음으로 알마리온이 제국으로부터 백작이라는 작위를 받았고, 관례에 따라 왕국에서도 그에게 후작이라는 작위를 수여하였고, 아울러 북동군이 주둔하던 동북 지역 7개 성의 성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어이없어했다.

특히 리처드의 경우는 잔뜩 비틀린 표정으로 그사이 알마리온에게 벌어진 일을 두고 그를 비꼬았다.

“하하. 전자이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군.”

“고맙습니다, 그나이제나우 경.”

“쳇! 하여간 어지간히 운이 좋은 놈이라니까. 어쨌든 나도 축하한다.”

“하하. 감사합니다, 형님.”

“하면 우린 널 따라 제국에 다녀오면 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럼 네 영지와 네가 맡게 될 성들과 영지군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제국에 한번 다녀오면 최소한 반년에서 1년 정도는 걸릴 것인데 말이다.”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

“막스에게 사람 좀 달라고 해 보지?”

“그분도 북서군을 맡으셨기 때문에 여유가 없으십니다.”

“그 깐깐한 양반은?”

“로엔달 백작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분께서도 이미 도움을 주실 만큼 주셨지만 저를 대신하여 당분간 일곱 곳을 맡을 만한 인재는…….”

똑똑.

“들어와요.”

“말씀 도중 죄송합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예, 영주님. 폰티악 자작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폰티악 자작이라면 바로 폰티악 후작의 외아들인 알버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아! 그래요? 하면 이곳으로 모시도록 하세요.”

“예, 영주님.”

잠시 후 아담의 안내를 받은 알버트가 집무실로 들어섰다. 한데 알버트 혼자인 줄 알았는데 그에게는 또 다른 일행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폰티악 후작과 연합하여 해상무역을 하기로 결정한 이후, 잦은 만남을 갖다 보니 많이 친해졌고, 역시 젊은 나이인 두 사람은 이내 꿍짝이 맞아 형, 동생 하기로 하였다.

“손님들이 계셨군.”

“저와 함께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쪽은 개인적으로 절 도와주고 계시는, 제가 형님으로 모시는 분이신 리처드 레오폴트란 분이십니다.”

“리처드 레오폴트라고 하오.”

“알버트 폰 폰티악 자작이라 하오.”

상대는 왕국의 6개 후작 가문 중 한 곳인 폰티악 후작 가문을 이어 나갈 자였고 자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소개받아 인사를 건넨 리처드나 그를 소개받은 알버트나 서로 동등한 자격을 가진 사람들처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쪽은 저의 기사인 하인리히 그나이제나우 경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개받은 하인리히 그나이제나우입니다.”

“반갑소, 그나이제나우 경. 그럼 이제 이분을 소개해야겠군요. 이분은 앤서니 폰 멕테일러 자작님이시네. 아버님이 가장 신임하시는 분이시고 내겐 숙부님이나 다름없는 분이시네. 아버님께서 자네가 호송단 부책임자가 된 것을 아시고는 자네를 도우라는 뜻으로 급히 영지에 계신 숙부님을 오라 하신 것이네.”

“아! 그러시군요. 이렇게 감사한 일이.”

“인사드리겠습니다, 후작 각하. 앤서니 폰 멕테일러 자작입니다.”

“알마리온 폰 혼테르입니다.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인사들 나누시지요.”

“리처드 레오폴트요.”

“하인리히 그나이제나우입니다.”

“앤서니 폰 멕테일러 자작이네.”

“자! 그럼 자리에들 앉으시지요.”

자리에 앉자 알버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한데 여전히 널 대리할 사람을 찾지 못한 것이냐?”

“후! 그게 좀처럼 결정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도르첸 공작 전하나 몇몇 다른 분들이 소개도 해 주셨고 또 갈리 백작께 부탁도 드려 봤지만 추천받은 이들은 썩 내키지가 않고, 갈리 백작께서는 끝내 고사를 하시니 말입니다.”

“잘되었구나. 하면 이분은 어떻겠느냐? 내가 아는 한 최고의 행정가시다. 숙부님은 아버님과 함께 왕국 해군을 재건하시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우셨던 분이란다.”

“아! 그렇습니까?”

비록 세상에 드러난 사람은 아니지만 앤서니 폰 멕테일러 자작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최고의 행정가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능력은 뛰어났다.

실상 세상에는 폰티악 후작이 왕국 해군을 재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폰티악에게 멕테일러 같은 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처럼 단기간 내에 왕국 해군을 재건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몇몇 관계자들을 제외하고 전혀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서이기도 하였지만, 그 또한 출신 성분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앤서니 폰 멕테일러 또한 알마리온과 같은 노예 출신이었다. 그것도 폰티악 후작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노예였다.

지금은 왕국의 당당한 후작 가문이지만 폰티악 가문은 원래 고래잡이를 하는 어부의 집안이었다. 고래잡이라는 것이 워낙 위험하고 고된 노동인지라 이러한 일에는 많은 수의 노예들이 필요했고 앤서니의 부친은 폰티악 가문에서 이러한 고래잡이를 위해 사들인 노예였다.

그런 앤서니 또한 노예로서 평생을 고래잡이배에서 중노동을 하다 생을 마칠 운명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폰티악 후작의 눈에 띄어 말동무가 되면서부터 그의 운명 또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 두 사람 사이에는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었는데 자신의 말동무인 앤서니가 노예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어린 폰티악 후작은 부친인 시몬스에게 그를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한 일이 있었다.

외아들의 이러한 간청을 받은 시몬스는 어차피 자신의 뒤를 이어 고래잡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르쳐야 했던 데다가 무슨 일이든 세상에 공짜라는 것은 있지 않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그에게 고래잡이배의 말단 선원이 되어 1년 동안 일한다면 아들의 청을 받아들여 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즉, 앤서니의 노예 증명서를 직접 벌어서 사라는 것이었다. 이때 폰티악의 나이는 불과 열 살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 나이 때의 아이들이라면 열이면 열, 모두 겁을 내거나 아니면 힘든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싫어 머뭇거리거나 거절하는 것이 보통이었겠지만 어린 폰티악의 생각은 또래의 아이들과는 전혀 달랐다.

어려서 사물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가장 먼저 본 것이 바로 바다였고, 자라 오면서 그를 가장 즐겁게 해 준 것도 바로 바다였다. 그에게 있어서 바다는 가장 친숙한 곳이었으며, 또한 끝없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에게 바다에 나가 몇 달씩 생활해야 하는 고래잡이배에서 일하라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었던 것이다.

어린 폰티악은 아버지의 제안을 단번에 받아들였고, 그렇게 고래잡이배에 오른 폰티악은 말단 선원으로서 해야 하는 고된 일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 동안 고래잡이배에서 말단 선원으로 고생을 하며 모은 품삯을 대신하여 시몬스로부터 앤서니의 노예 증명서를 건네받았고, 폰티악은 그 자리에서 그 노예 증명서를 불태워 버림으로써 앤서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고래잡이배에 승선하여 필요한 것들을 배워 나갔고 그 인연을 지금까지 끈끈하게 이어 오고 있었다.

지금도 앤서니는 폰티악 후작의 대리인으로 그의 영지인 쿠덴베르를 관리하고 있었으며 알마리온의 제안으로 시작된 원양 선단의 조직 또한 사실상 그가 주도하고 있었다.

알마리온은 앤서니에게서 풍겨 나오는 담담한 기운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어라? 아무리 아버님이 추천하신 것이지만 그냥 이대로 결정하는 것이냐?”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왕국 제일의 무장이신 후작님께서 추천하신 분이신데 어련하시려고요.”

“아무리 그래도…….”

일견 경솔해 보이는 결정이라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폰티악 후작의 추천을 받은 앤서니조차도 단번에 결정을 내리는 알마리온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오랜 친구이자 주군인 폰티악 후작에게 이러한 절대적인 신뢰감을 내보이는 그가 좋게 보이기도 하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중차대한 결정을 아무런 검증 절차도 없이 덜컥 결정해 버리는 그가 경솔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겠지만 때로는 보이는 것만이 유일한 진실일 때도 있지요.”

모두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상 또한 직관하여야 한다는 교훈의 뜻이었다.

그만큼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에는 신중하여야 한다는 뜻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최고의 선善, 즉 진실일 때도 있는 법이었다.

특히 알마리온처럼 남다른 직관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주술사로서의 그의 직관력은 때로는 자신이 생각해도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로 정확하였는데 이러한 직관력은 바로 ‘진실의 눈’이라는 주술에 의한 것이었다.

이렇듯 알다가도 모를 아리송한 말 한마디로 자신의 판단에 대한 설명을 마친 알마리온은 곧바로 앤서니에게 앞으로 해 주어야 할 일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작께서 해 주셔야 할 일은 나를 대신하여 내게 위임된 일곱 곳의 성들을 통치를 하는 것과, 북동군의 해체 작업, 그리고 각 성에 편입되는 영지군을 편성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국경 방비에 필요한 조치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실행하는 것입니다.”

“…….”

“일단 감비노에 가시면 그곳에 궁내부에서 파견된 관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궁내부 사무관인 게오르그 함멜이란 분이 일곱 성들의 제반 사안들에 대한 서류를 정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북동군 사령부에서도 관련 서류들을 넘겨줄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하온데 기존의 성주들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일단은 유임을 시키시되 부정행위가 있었던 자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십시오.”

관리들에 의해 벌어지는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처벌을 하는 알마리온이었다. 관리 한 사람이 저지르는 부정행위는 그로 인해 영지 내의 모든 백성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일이었기에 이에 대한 온정이란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의 통치 철학이었던 것이다.

또한 당장 각 성의 성주들을 교체하지 말라는 것은 일단은 북동군의 해체와 영지군의 편성에 주력을 하라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하온데 소관이 알고 있기로 북부군은 그 지역 출신 병사들보다 타 지역 출신 병사들이 월등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 병력의 규모가 크게 줄어들 것인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상비군이었을 때에는 병력을 전국에서 모집할 수 있었지만 영지군일 때에는 해당 지역에서만 병력을 구할 수가 있었다.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최대한 병사들의 가족들을 이주를 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러자면 그들이 이주를 결심할 무엇인가 대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었다. 상비군에 속한 자들이 끝까지 군에 남아 있는 것은 군에서 나오는 보수 때문이지 이들에게 특별한 충성심이 존재해서가 아니었다.

이들은 단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한, 생계의 수단으로 군을 선택한 가장들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붙잡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그들에게 가족들을 이주시키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원하는 것과, 앞으로 3년 동안 일체의 세금을 징수하지 않겠다고 하십시오. 아울러 이주를 결정한 병사들에게는 그들 가족들이 거주할 주택을 무상으로 지어 주겠다는 조건을 다십시오.”

이 정도면 실로 파격적인 조건이었지만 당장 국영지에 살아가는 백성들만으로는 도저히 제대로 된 전력을 갖출 수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곳 출신 병사들이 반발하지 않을까?”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하여 그들에게는 5년 동안 모든 세금을 면제해 줄 것입니다, 리처드 형님.”

“그렇게 되면 병사들 중 상당수는 그대로 끌어들일 수 있긴 하겠지만 그렇게 세금을 면제해 주면 무엇으로 군을 유지할 생각이지?”

계급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말단 병사가 한 달에 받는 돈은 1실버였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보수였고, 출동 횟수에 따라 여기에 추가로 수당이 붙는다.

어쨌든 대략적으로 병사들이 1년에 벌 수 있는 수입은 2골드 정도였는데 이중 절반인 1골드를 세금으로 다시 내놓아야 했다.

또한 병사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군복과 무구와 무기를 모두 자신의 돈으로 마련해야만 하니 결과적으로 1년에 1골드도 안 되는 돈으로 가족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따라서 세금만 징수하지 않아도 병사들의 삶은 순식간에 월등히 개선될 수 있게 되지만, 반대로 군을 유지해야 하는 비용을 다른 곳에서 마련하지 않으면 당장 많은 수의 병력을 유지한다 해도 이내 재정적으로 큰 문제를 안게 된다. 알버트는 바로 이러한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국왕 폐하께서 5년 동안 이들 성들에 대한 세금 징수를 유예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종이를 생산하게 될 것입니다.”

“종이를 말인가? 하나 그것은…….”

직영지에서도 종이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은 왕실에도 종이 제작법을 무상으로 알려 주겠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모두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종이의 수요는 제 영지에서 만들어지는 것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몇 차례 종이를 내다 팔았지만 그때마다 종이는 나오기가 무섭게 동이 나 버렸을 정도다.

게다가 지금이야 희소가치가 있어 종이가 같은 무게의 황금으로 거래되지만 지속적으로 종이가 생산이 되면 결국 종이의 가격은 양피지의 가격보다 훨씬 떨어지게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알마리온이었다.

“하나 제국 황실에서도 종이를 대량으로 생산할 텐데, 그렇게 되면 너무 많은 양의 종이가 만들어지는 것 아니냐?”

“아무리 제국 황실에서 종이를 만든다 하더라도 당분간은 종이의 수요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일 것입니다.”

당분간이라고 표현하기는 하였지만 적어도 수십 년 동안은 종이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아니, 더 많은 종이가 생산되어 지금보다 가치가 훨씬 떨어져 양피지보다 가격이 떨어진다 해도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가격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종이를 찾게 될 것이고 그렇게 수요가 또다시 늘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제국 황실에 종이 제작법을 건네줄 때 하나의 전제 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전제 조건?”

“그렇습니다. 제가 만든 종이를 황실이 운영하는 상단에 납품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아! 그래?”

제국이 연간 소비하는 양피지의 양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오죽하면 이를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힘들어 로엔 왕국을 비롯하여 게르혼족이나 주변의 다른 이민족들이 만드는 양피지가 만들어지는 족족 제국 상인들에 의해 제국에서 판매되고 있었음에도 늘 양피지가 부족한 나라가 바로 제국이었다.

이렇다 보니 설사 혼테르에서 생산되는 종이를 구태여 제국 황실에서 운영하는 상단에 판매한다는 전제 조건을 붙이지 않아도 충분히 제국의 다른 상단들을 통해 판매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독점권을 통해 황실에서 제국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얻으려 한 것이었기에 이러한 단서 조항을 붙이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단지 직영지에서 종이를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직영지 내에서는 수익의 3할을 세금으로 내기만 하면 누구든지 자유로이 사업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종이를 직영지 내에서 생산한다고 해서 종이 제조법을 왕실에 넘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직영지 내에서 종이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사업을 하는 것이니 이에 따른 수익의 3할만을 세금으로 내면 그만인 일이었다.

여기에 종이 제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나무를 벌목할 수 있는 권리를 판매하면서, 그리고 벌목과 종이 제작 등에 많은 수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였는데 당연히 이들에게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게 되면 직영지에서는 이들에게서 다시 세금을 징수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구태여 왕실이 종이 제작 방법을 탐내지 않아도 가만히 앉아서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데 굳이 알마리온으로부터 종이 제작 방법을 구걸하거나 빼앗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물론 왕실에서는 이러한 것까지 생각하진 못하였다. 국왕과 도르첸 공작 그리고 블리스 왕세자는 단지 종이를 만들면서 막대한 부를 챙기게 된 알마리온에게 그의 부를 이용하여 국경 방비에 필요한 병력을 유지시켜 달라는 의미로 동북 지역 7개 성의 성주 자리까지 내준 것이었다.

“허…… 어떻게 그런 생각을……?”

이러한 세세한 설명이 끝나자 모두가 놀란 눈빛과 표정으로 알마리온을 바라보았다. 이들 또한 지금까지 이런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였기 때문이다.

‘대단하구나. 원양 선단을 구성하자는 생각도 이 젊은 후작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도 그 기발한 착상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이런 계획까지 가지고 있었다니…… 주군께서 장래 왕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마리온의 빠른 성공에 대해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를 하고 있었다. 하나 알마리온을 잘 아는 몇몇 사람들은 그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경직된, 신분의 구분이 뚜렷한 세상이라 하더라도 본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 발전과 쇠퇴는 늘 있어 온 일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끝내 발전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고, 또한 능력이 뛰어나도 쇠락의 길을 걷는 자들도 나오지만 그런 현상이 나오는 것은 결국 그 본인들이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걸림돌을 넘기 위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무엇인가를 보여 주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고비를 넘지 못하고 쓰러지는 것이었다.

알마리온의 경우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확실한 능력을 보여 주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성공에 대해 불평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였지만 결국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훗! 이 나이에도 이렇게 가슴이 뛸 수 있다니……. 솔직히 주군께서 추진하시는 원양 상단을 조직하는 일을 처음 들었을 때에도 이만큼 가슴이 뛰지 않았거늘…….’

폰티악 후작이 처음 원양 상단 조직을 위한 계획을 밝혔을 때에도 앤서니는 그다지 흥분되지 않았다. 그는 왕국 해군의 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는 바다를 끔찍이도 두려워하는 그러한 자였다.

때문인지 원양 상단을 조직하는 일도 주군이 그토록 원하는 일이었기에 묵묵히 그 일에 동참할 뿐이었지 그다지 큰 감흥을 느끼게 하진 못하였다.

반면 오늘 처음 만난 알마리온으로부터 그의 구상과 계획들을 단지 대략적으로나마 설명을 들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앤서니는 마치 아내를 처음 만나던 그날 느꼈던 그 두근거림처럼 심장이 크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고는 홀로 당혹스러워했다.

“확실히 그렇게 하면 군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원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주군.”

“하여간 잔머리 하고는……. 어쨌든 그나이제나우 경의 말처럼 확실히 그런 방법이라면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네.”

“그리고 군을 재조직하게 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몬스터 토벌입니다.”

몬스터 토벌은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지만 종이 제작을 위해서는 나무가 꼭 필요했기에 벌목을 하기 위해서는 벌목공들의 안전 또한 반드시 확보되어야 할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또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테일러 상단에 요청하도록 하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자! 그럼 일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지요. 마침 식사 시간도 다 되었으니 식사를 함께하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그럼 출발하도록 하시오, 이스턴 백작.”

“예, 프리모 공작 전하.”

메르타니온 국왕의 건강이 회복되자 예정되어 있었던 피어스 황자와 카산느 공주의 약혼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약혼식이 끝난 사흘 후, 이들 예비부부와 결혼 축하 사절 행렬이 왕실 가족과 왕국의 귀족들 그리고 백성들의 환송을 받으며 왕도인 소렌토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절단의 단장으로는 재상인 프리모 공작이, 부단장으로는 도르첸 공작이, 그리고 이들 일행의 안전을 위한 책임자로는 알마리온이, 근위군 부사령관인 칸 남작이 호위대의 부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근위군 소속 기사 스무 명과 기병 서른 명 그리고 북서군에 소속된 병사 5백 명이 이번 호위 임무에 투입되었다.

제국 측에서도 황자의 안전을 위해 5백 명의 병력과 서른 명의 기사들이 투입되었고, 이들 중 세 명이 익스퍼트였다.

하나 이것이 행렬의 전부는 아니었다. 여기에 애초에 황자와 함께 그를 호종하였던 제국 측 귀족들과 공주와 함께 생이 다하는 날까지 제국에서 지내야만 하는 공주의 시종들과 하녀들, 그리고 축하 사절단에 속한 왕국의 귀족들을 호종하기 위해 따라붙은 자들까지 모두 합친다면 행렬의 규모는 물경 1천8백 명에 달했다.

여기에 이들이 타고, 먹고, 입고, 마시고 할 것들과 선물을 실은 마차와 수레 들의 수 또한 엄청났기에 이들 행렬이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들이 통과할 때까지 최소 2시간 정도는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다 보니 이들 일행의 이동속도는 매우 느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왕국의 영토 내에서는 이들의 안전에 대해서 전혀 걱정할 것이 없었지만 왕국의 영토를 벗어나면서부터 알마리온은 행렬의 안전을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럼 동생을 잘 부탁하겠네.”

국경 너머 반나절 정도의 거리까지 병력을 이끌고 배웅을 한 막스밀리언과 나르담 후작, 그리고 레드로는 배웅을 마치고 복귀하기 전에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

“행복하게 살거라.”

“예…… 오라버니…… 흑!”

“녀석, 또 우는구나.”

“흑흑흑!”

“진정하렴. 매제가 널 행복하게 해 준다 하지 않더냐? 하니 부디 아들딸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흑흑!”

이제 이렇게 떠나면 두 번 다시 사랑하는 가족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카산느의 울음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결국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하녀들이 그녀를 마차에 태운 후에야 상황이 정리되었다.

“매제와 동생을 잘 부탁한다.”

“예, 형님.”

“잘 다녀오게. 그리고 올 때 선물 사 오는 것 잊지 말고 말이야. 알겠지?”

“하하. 그렇게 하겠네.”

마지막 작별 인사를 마친 후, 이들 일행은 그야말로 황량하게까지 느껴지는 텅 빈 초원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 제국으로 향하였다.

어떤 날은 일행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만나지 못한 날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초원을 이동하는 게르혼족들과 만나 그들로부터 환대를 받은 날도 있었다.

초원을 떠돌며 말이나 양 같은 가축을 키우는 이들 게르혼족은 투박한 모습만큼이나 투박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게르혼족들은 제국 사람들이나 왕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야만적이지도, 폭력적이지도 않았다.

알마리온이나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게르혼족들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거리낌이 없이 그들을 대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이 손님들을 위해 내놓은 거친 음식과 음식에서 풍겨 나오는 익숙지 않은 냄새에 기겁을 하였다.

이처럼 초원을 가로질러 근 한 달 동안을 이동한 후에야 이들 일행은 초원 최대의 도시이자 블랙 대공의 근거지인 ‘태양의 땅’이란 뜻을 가진 차이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공께서 황자 전하 일행을 초대하셨사옵니다.”

“기꺼이 응하겠소.”

원래는 피어스 황자와 블랙 대공의 여식과 혼담이, 그것도 제국 측에서 더욱 강력하게 요청하였던 혼담이었다가 갑자기 제국 측에서 입장을 바꿔 로엔 왕국과 혼약을 하였기에 모두가 불편한 입장이 되어 있었기에 이러한 초대 또한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하나 이처럼 정식으로 초대를 받은 상태에서 이를 거절한다는 것도 적절치 않은 일이었기에 피어스 황자는 기꺼이 블랙 대공의 초대에 응하였다.

“병사들은 성 밖에서 머물게 하시옵소서.”

“있을 수 없는 일이오! 황자 전하와 약혼녀이신 공주 전하의 안전을 위해 그럴 수는 없는 일이오.”

가장 먼저 반대를 한 이는 제국과 왕국의 혼사를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가드너였다. 그리고 이어서 프리모 또한 병사들을 성 밖에 머물게 하라는 대공 측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렇소. 두 분 전하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러한 일을 따를 수는 없소.”

“훗! 설마 대공께서 두 분 전하의 안전을 위협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씀들 하시는군요?”

블랙 대공의 최측근이면서 또한 초원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현자라고 알려진 무거운돌의 말에 주변은 삽시간에 깊은 침묵에 빠졌다.

“대공께서는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두 분 전하의 안전은 절대적으로 보장을 하신다고 말입니다.”

“으음…….”

이러한 약속까지 받은 마당에 이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체면은 물론 초대를 한 블랙 대공의 체면까지도 무시하는 처사였기에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결국 피어스 황자는 이들의 요청대로 군을 성 밖에 머물게 하였다.

“잠시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대는……?”

“로엔의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후작입니다. 공주 전하와 축하 사절단의 호위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대가 바로 그 혼테르 후작이시군요?”

말하는 투로 보아서는 이들 또한 알마리온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이들이 어떻게 날 알고 있는 것이지? 알 수가 없구나.’

내심 이들이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였지만 이런 자리에서 그것을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데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외람된 요청이지만 두 분 전하의 숙소 주변에 귀측의 병사들은 배치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흠! 그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두 분 전하의 숙소를 성의 서쪽 문에서 가까운 곳에 마련해 주시고, 병사들 또한 서문 밖에 머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십시오.”

알마리온이 서문 쪽에 황자와 공주의 숙소를 내어 달라고 한 것은 단지 그쪽이 제국과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운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이센 성의 서문은 하나의 길을 제외하고는 주변이 온통 늪지대였다. 이는 제국으로부터 침략을 받는 것에 대비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처럼 늪지대를 곁에 두고 성을 세운 것이었다.

따라서 일단 서문을 벗어나게 되면 그 이후부터는 다른 곳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은 자연스럽게 차단할 수가 있었기에 알마리온은 황자와 공주의 숙소를 서쪽으로 잡아 달라고 한 것이었고, 서문 밖에 병사를 주둔시킬 수 있게 해 달라 한 것이었다.

이런 알마리온의 의도를 간파한 무거운돌의 눈빛이 순간 번쩍였지만 이내 눈빛을 감추었다.

“후작께서는 혹 이곳에 와 보신 적이 있으신 것입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다만 이곳을 몇 번 다녀갔던 이가 알려 주었을 뿐입니다.”

“하하.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후작의 요청대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 그럼 궁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 전하.”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칸 남작.”

“예, 후작 각하.”

“남작께서 병력을 인솔하십시오. 그리고…….”

알마리온은 남들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칸에게 한 가지 당부를 더 하였다.

“만약을 대비하여 언제든 두 분 전하를 모실 수 있도록 준비하여 놓으십시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잘 알겠습니다, 후작 각하.”

제1의용군에서 함께 군을 지휘하며 호흡을 맞췄던 일이 있었기에 칸은 알마리온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이내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형님과 그나이제나우 경은 절대 공주 전하의 곁에서 떠나지 말도록 하십시오.”

“그러지.”

“예, 주군.”

초대를 받은 귀빈들이 무거운돌의 안내를 받으며 성안으로 이동을 하자 칸은 남은 병사들과 하인들을 이끌고 블랙 대공의 가신을 따라 주둔지인 서문으로 향했다.

“마차들과 수레들은 성문 곁에 두도록 한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기병대, 보병대 순으로 막사를 준비한다. 알겠나?”

마차와 축하 선물들이 바리바리 실려 있는 수레 들을 굳이 성문 곁에 두게 한 것은 이것들이 그만큼 비싼 물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발생하여 황자와 공주 일행이 성문을 빠져나온 이후 곧바로 이 마차나 수레를 이용하여 성문을 막아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예, 남작님.”

“그리고 유트겐 경.”

“예, 남작님.”

“유트겐 경은 최고로 좋은 말들을 언제든 탈 수 있도록 준비하게. 그리고 식량과 약간의 재물들도 함께 말이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성벽 위의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하게. 만약 조금이라도 이상한 움직임이 보인다면…….”

“곧바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동원된 근위군 소속 기사와 기병 들은 보통의 평범한 기사들이나 기병들이 아닌 모두가 정령의꿈에 속해 있는 정령술사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수가 비록 쉰 명에 불과하였지만 이들 개개인의 능력은 하나같이 능히 일당백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럼 수고하도록 하게.”

“예, 남작님.”

“호! 그러니까 그 혼테르란 자가 자네 눈에 보이기에도 확실히 뛰어난 인물이라 이것인가?”

“그렇습니다, 대족장.”

블랙 대공이라는 제국식 이름과 작위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나 사용할 뿐, 이들만 있을 때에는 평소 자신들만이 사용하는 이름과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니, 제가 보기에는 그 또한 대족장처럼 운명을 점지받은 자같이 보였습니다.”

무거운돌의 말에 블랙 대공, 아니 용맹한영혼의 눈빛이 번뜩거렸다.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일 때에는 필생의 적을 만났을 때나 보이는 모습이었다.

“후후, 그렇단 말이지?”

알마리온에 대한 무거운돌의 평가를 들은 용맹한영혼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려 옴을 느낄 수 있었다.

내심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자신의 원대한 꿈을 위해 당분간 제국의 심사를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제국 측이 요청하는 혼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제국의 3황자와 혼인시킬 여식은 자신의 친딸이 아니고 양녀로 입양한 여식이었으니 아쉬울 것도 전혀 없었던 그다.

한데 그렇게 제국과의 혼담이 오고 가던 중에 갑자기 제국에서 그동안 오갔던 혼담을 없었던 일로 하자는 통보가 왔을 때 그는 하도 어이가 없어 제국이 왜 갑자기 그토록 목을 매던 혼담을 번복하게 되었는지 그 내막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제국 측에서 자신들을 압박하기 위해 로엔 왕국을 끌어들였고, 그러한 동맹 관계를 보다 확실히 하기 위해 애초에 혼담이 오가던 3황자와 로엔의 공주와 혼인을 하기로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대목에서 용맹한영혼과 무거운돌은 이미 기울어져 가는 태양인 제국과, 포넬로부터 간신히 나라를 구한 로엔이 무슨 힘이 남아 서로 연합을 하게 되었느냐는 것이었다.

아닌 말로 지금의 이들이라면 제국은 몰라도 로엔 왕국 정도는 단숨에 짓밟아 버릴 수 있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국의 이러한 행보나 그에 발맞춘 로엔 왕국의 이러한 결정은 오히려 자신들을 자극하기만 할 뿐, 아무런 효과도 없는 무모한 행동일 뿐이라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번 혼사에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한 것이 바로 양피지를 대신할 수 있는 종이라는 것을 만든 한 젊은 귀족이 존재했기에 가능하였음을 이들은 알아냈던 것이다.

말과 양은 모든 게르혼족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재산이었다. 이들이 이처럼 말과 양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이것들이 그만큼 많은 재물을 벌어다 주기 때문이었는데, 제국에서 사용되는 말과 양피지 중 상당 부분이 이들 게르혼족들이 내다 판 것들이었다.

제국의 북동쪽 국경에서 불과 며칠 거리에 있는 이곳 차이센 성이 누대에 걸쳐 이처럼 성세를 누릴 수 있는 것도, 이곳을 통해 게르혼족들이 생산한 말과 양피지, 그리고 그 밖의 여러 물건들이 제국으로 흘러들어 갔고, 반대로 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을 이곳을 통해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센 성을 장악하고 있는 자만이 초원을 장악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 것도 괜히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 이처럼 대륙과 초원을 연결해 주는 통로이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었다.

어쨌든 종이라는 것이 비록 그 값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다 하더라도 사치를 좋아하는 제국인들이라면 너도나도 종이란 것을 사려 할 것이고, 그것은 곧 게르혼족의 최대 수입원인 양피지의 판매가 줄어듦을 의미하는 것임을 이들은 깨달은 것이었다.

즉, 제국은 로엔과의 연합을 통해 당장 제국을 압박하는 이들 게르혼족의 관심을 로엔에 돌리게 하는 한편, 종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게르혼족의 자금줄을 죄어 나가 약화시키고 자신들은 그 틈을 이용하여 군을 재정비하겠다는 계략이 이번 혼사에 깔려 있음을 파악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알마리온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하게 되었고, 제국의 황제가 자신에게 하였던 것처럼 제국으로부터 백작이란 작위와 이스턴이라는 성을, 그리고 초원의 동쪽 땅을 영지로 내주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실상 이들이 구태여 황자 일행을 초대한 것은 황자 일행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닌, 이들 일행에 속해 있는 알마리온에 대한 관심에서였던 것이다.

“후후후. 기대되는군. 앞으로 그와의 일들이 말이야. 후후후! 그를 맞이할 준비는 다 하였겠지?”

“그렇사옵니다, 대족장.”

“좋아. 그럼 가 보도록 하지. 그를 만나러 말이야.”

블랙 대공이 머물고 있는 태양의 궁 서쪽에 위치한 별궁은 피어스 황자와 카산느 공주, 그리고 이들을 수행하고 있는 수행원들을 위해 통째로 내주었다.

“모시러 왔사옵니다.”

이미 사전에 대전에서 이들 일행을 위한 축하연이 있을 것이란 통보를 받았기에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던 황자와 공주, 그리고 수행원들은 무거운돌의 안내를 받으며 연회가 벌어질 대전으로 향하였다.

“하하! 어서 오시오, 황자.”

게르혼족의 전통적인 의상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거구의 용맹한영혼의 모습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로 하여금 허리를 굽히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용맹한영혼의 모습에 가뜩이나 유약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피어스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리며 간신히 인사를 건넸는데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 앞에 고양이처럼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었다.

“브, 브, 블랙 대공을 뵈옵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용맹한영혼의 모습에 더럭 겁을 집어먹은 피어스는 저도 모르게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용맹한영혼은 더욱 큰 소리로, 대전 밖에 서 있는 자들에게도 모두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이런! 이런! 어이하여 식은땀을? 혹 원행에 몸이라도 상한 것이 아니오?”

“아, 아, 아니옵니다, 대공 전하.”

여전히 쩔쩔매는 피어스의 모습에 황자의 일행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고, 반대로 용맹한영혼을 따르는 자들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어렸다. 게다가 용맹한영혼의 말투는 어느새 하대를 하고 있었고, 피어스의 말투는 마치 존장을 대하기라도 하는 듯 그에게 공대를 하고 있었다.

“아니긴. 내 보아하니 황자의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내게 뛰어난 마법사가 있으니 연회가 끝나면 그를 보내도록 하겠네.”

“그, 그러지 않으셔도…….”

“아닐세. 내 비록 혼담이 무산되긴 하였어도 어쩌면 자네의 장인이 될 사람이었지 않은가? 사위가 될 뻔한 자네가 이처럼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어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안 그런가?”

이러한 용맹한영혼의 발언은 제국과 로엔 왕국을 동시에 비난하는 말이었다. 이에 프리모 공작이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서며 그러한 용맹한영혼을 비난하였다.

“말씀이 지나치시옵니다!”

“그댄 누구인가? 누구인데 감히 나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인가!”

“나, 난…….”

“난? 허허…… 참으로 어이없군! 복장을 보아하니 로엔 왕국의 사람인 것 같은데. 맞는가?”

“그, 그렇소! 난 로엔 왕국의 재상인 마이클 폰 프리모 공작…….”

“네 이놈! 감히 로엔의 공작인 주제에 감히 제국의 대공인 나에게 그따위 행동을 하느냐!”

왕국 내에서는 재상이자 유일한 세습 공작인 그였지만 제국으로부터 대공의 지위를 인정받은 용맹한영혼과 비교하면 한 단계 아래라 할 수 있었다.

“으음…….”

갑작스러운 용맹한영혼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대전 안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또한 무장을 하고 있는 자들의 손은 어느새 검에 가 있었는데 만약 이 상태로 누군가 허튼 움직임을 보인다면 그대로 대전 안은 피바다로 변할 다급한 분위기였다.

“대공 전하, 외람되오나 소관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사옵니까?”

“그대는 또 누구인가?”

용맹한영혼의 몸에서 더욱 강렬한 기운이 솟구쳤다. 사실 용맹한영혼은 처음부터 알마리온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른 체하며 물었다.

그런 용맹한영혼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분명히 알 수가 있었다.

‘확실히 날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구나. 저들이 어떻게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더 이상 나로 인해 험한 분위기를 만들 필요는 없겠지.’

“소관은 제국으로부터 백작의 작위에 있으며, 아울러 로엔 왕국의 후작이기도 한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라고 합니다.”

“호! 제국의 백작이자 왕국의 후작이라?”

“그렇사옵니다, 대공 전하.”

“좋아.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소관이 알기로 게르혼족은 손님을 초대해 놓고 손님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최대의 금기라고 알고 있사옵니다.”

“호! 그대는 우리 게르혼족의 관습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군?”

“소관 또한 게르혼족과 전혀 무관하지 않기에 잘 알고 있사옵니다.”

“우리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무슨 뜻인가?”

알마리온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의 곁에 메코이족과 얄란족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들도 알마리온이 메코이족의 대족장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혹 이것을 알아보실 수 있겠사옵니까?”

“아니! 그것은……!”

알마리온이 꺼내 보인 것은 바로 메코이족의 대족장의 신물인 선택받은 자의 신물이었고, 그것을 알아본 이는 처음 이들 일행을 마중 나왔던 무거운돌이었다.

현자라는 추앙을 받고 있는 그였기에 초원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거의 모든 게르혼 부족들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그는 알마리온이 꺼내 보인 것이 바로 메코이족의 대족장을 나타내는 신물이라는 것을 이내 알아본 것이었다.

“저것이 무엇인데 그리 놀라는가?”

“그것이…… 그건 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사옵니다, 대공 전하. 하오나 혼테르 후작의 말씀처럼 후작은 우리 게르혼족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인 것만은 확실하옵니다.”

당장 이유를 밝히지 않는 것이 더욱 궁금해졌지만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며 일단 넘어갔다.

“어쨌든 알았네. 어쨌든 그대 말처럼 우리 게르혼족들은 손님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가장 금기시하고 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행동이 과하였던 것 같으니 사과하겠네.”

“대공 전하의 사과를 받아들이도록 하겠사옵니다.”

“하하하! 역시! 좋아! 아주 마음에 드는군. 하하하! 뭣들 하는가! 어서 연회를 시작하지 않고! 술과 음식을 내오라!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무희들을 불러 춤을 추게 하라!”

“예, 전하!”

자신의 사과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알마리온의 행동에 오히려 호탕하게 웃으며 연회를 시작하라는 용맹한영혼의 모습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안타깝구나. 처음으로 만나는 위대한 영웅이거늘…….’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용맹한영혼과 자신이 숙명적으로 얽혀 있는 인연이라는 것을.

훗날 나이를 떠나 서로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운명적으로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아니 끝내 적이 되어야만 했던 두 영웅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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