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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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된 로엔달의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솔직히 불과 1년여 만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져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지금의 로엔달의 모습은 그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마치 중병이라도 앓았던 듯 지금의 그의 모습에서는 이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처럼 무방비 상태라니…….’

무엇보다도 이전의 그였다면 이처럼 무방비로 침입을 허용했다는 것이 가장 큰 충격이었다.

왕국의 익스퍼트 중에서 더글러스 후작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실력자인 그가 이처럼 무방비 상태로 누군가의 침입을 허용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지금도 정적政敵들을 암살하는 일은 예전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일이었고, 메르타니온 국왕의 최측근인 그는 정적들이 많은 인물이었다.

특히 타협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먼 때문인지 그는 같은 국왕 파벌에 속한 인물들에게도 경원을 당할 때가 많은 인물이었기에 더욱더 이런 식으로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것은 어쨌든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많이 변하셨군요?”

“누구!”

갑자기 어둠 속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깜짝 놀란 로엔달이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던지듯 버리며 곁에 두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 행동이 어찌나 빨랐던지 마치 처음부터 병째 술을 마시고 있지 않고 손에 검을 쥐고 있었던 것처럼 빨랐다.

하지만 능력이 뛰어난 암살자였다면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로엔달을 공격하여 위기에 빠뜨릴 수 있었다.

“음…… 그대가 어떻게……?”

“그건…….”

칸으로부터 로엔달이 자신의 생부라는 것을 들어 알게 된 이후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마치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로엔달을 찾아왔지만 막상 무슨 말을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몰랐다.

“그대와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으니 그만 돌아가 주었으면 하네.”

“진심으로 제가 돌아가길 바라십니까?”

“그건…….”

정색을 하며 묻는 알마리온의 말에 로엔달은 머뭇거렸다. 언제나 맺고 끊음이 분명한 그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는 것 또한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잠시 앉겠습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나타낸 알마리온이 주인인 로엔달의 허락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 로엔달과 마주한 자리에 앉았다.

“…….”

“…….”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죽음보다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한 침묵을 깬 이는 알마리온이었다.

“제게 좋은 술이 있습니다.”

“…….”

로엔달이 반응을 보이든 말든, 알마리온은 품에서 몇 병의 술병을 꺼냈다. 그리고 그중 하나를 따서 로엔달에게 건네주고는 자신 또한 술병 하나의 마개를 따서는 먼저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으음…….”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알마리온이었기에 독한 술을 한 모금 마시자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알마리온의 모습에 로엔달의 입에서 짧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비록 지금은 거의 매일 술에 취해 지냈지만 자신 또한 술을 잘하지 못하였고 술을 마시게 되면 지금 알마리온이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보였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웃게 된 것이다.

“훗!”

“왜 웃으시는 것입니까?”

“…….”

“이런 제 모습이 누군가와 닮았기 때문입니까?”

“으음…….”

알마리온의 말에 이번에는 로엔달의 입에서 깊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지?”

“말은 제가 아니라 백작 각하께서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뜻이지?”

“제게 하실 말씀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

다시 한 번 놀란 표정이 된 로엔달이 뚫어지게 알마리온을 바라보았고, 알마리온 또한 지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칸 남작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모두 들었습니다.”

“으음…….”

모든 사실을 들었다는 말에 로엔달은 다시 한 번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한데 이상한 것은 알마리온의 표정이었다.

로엔달이 자신의 친부이고 어떻게 자신이 태어난 것인지 모든 사정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의 표정이나 행동은 믿기 힘들 정도로 담담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미 마음을 다스리는 수준이라는 것인가?’

수준이 높아진다는 것. 그것이 어떤 분야이든 수준이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통제력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특히 타인에 대한 통제력보다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이 그만큼 높아지게 되어 있는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만이 더 높은 경지에, 그리고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상급 정령술사가 된 이후 알마리온은 감정의 기복이라는 것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칸으로부터 로엔달이 자신의 생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잠시 전혀 상상하지도 못하였던 일로 인해 잠시 놀라기는 하였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것 또한 그러했다.

‘어느새 나를 뛰어넘은 것이구나.’

1년 전 처음으로 알마리온이 상급 정령술사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알마리온은 비록 같은 상급 정령술사라고 하더라도 자신에 못 미치는 정도였건만 1년 만에 다시 확인해 보니 자신보다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는 알마리온의 모습에 로엔달은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

“언제까지 말씀하시지 않을 생각이셨습니까?”

“그건…….”

쉽게 대답하지 못하였지만 알마리온은 그가 대답을 할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다. 결국 그런 끈질김에 로엔달이 다시금 말문을 열기 시작하였다.

“끝까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역시 그렇군요.”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이는 그가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성격이거나, 아니면 책임을 회피하거나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끝까지 알마리온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려 한 것은 전적으로 왕실을 위해서였다.

알마리온의 탄생은 오직 목적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비인간적인 행위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목적이 아무리 숭고한 것이고 정당한 것이라 하여도 이는 절대 그 누구로부터도 인정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메르타니온이 계획하였고, 자신과 전대 체임버스 남작이 함께하였던 그 계획은 세상을 구하거나 하는 숭고한 목적 같은 것이 아닌, 단지 귀족들에게 억눌려 있던 왕실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당사자인 알마리온이 이러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국왕인 메르타니온에게 실망하고,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탈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 아니 최악의 경우 이러한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최악의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는 이 일을 절대 알마리온이 알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정작 본인은 알마리온에 대한 죄책감으로 빠르게 스스로를 망쳐 가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건 오히려 제가 해야 할 질문 아닙니까?”

“그 말은……?”

“걱정하시는 일 같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 또한 주군이신 국왕 폐하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 기사이니까 말입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역시 나의 핏줄이란 말인가?’

몰랐을 때는 몰랐지만, 하나씩 둘씩 알아 가면서 알마리온의 여러 부분이 자신과 참으로 많이 닮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같은 경우도 그러했다. 이러한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면 누구나 방황을 하거나 반발을 할 수도 있는 일이건만 알마리온은 너무나도 덤덤하게, 그리고 신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 개인의 일 같은 것은 그대로 묻어 버리려 하는 행동이 자신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었다.

한데 이러한 알마리온의 모습에 로엔달은 한편으로는 안심을 하면서도, 지금까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알마리온에게서 자신과 닮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핏줄이라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이렇게 자신과 같거나 비슷한 그의 모습에 더욱 가슴이 저미는 느낌만 커졌다.

“고맙구나.”

“…….”

“내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지?”

“그렇습니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래, 난 이제 와서 널 다르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역시 예상하였던 대답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로엔달의 대답에 알마리온은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만약 당신이 이제 와서 과거의 행위를 후회한다고 하거나 아니면 나를 아들로 받아들이고 그동안 못 해 줬던 것들을 해 주겠다고 달려들었다면 오히려 난 더 실망을 하였을 것입니다.’

“하면 저 또한 지금과 다르지 않게 행동하면 되겠군요.”

이 말을 듣자 다시 한 번 가슴이 메어 왔다.

“그래…….”

“그럼. 그만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알마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막 밖으로 나가려 하는 찰나였다.

“잠깐! 잠깐만. 네게…… 네게 줄 것이 하나 있다.”

자신에게 줄 것이 있다는 로엔달의 말에 알마리온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받아라.”

“……?”

로엔달이 건네준 것은 은으로 섬세하게 세공된 아주 아름다운 목걸이였다.

“그건…… 네 어머니가, 그래, 네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다.”

“으음…….”

어머니가 가지고 있었던 물건이라는 로엔달의 설명에 알마리온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그가 건네준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눈은 뜨고 있었지만 마치 인형과도 같았다. 살아 있는 인형. 우리는…… 아니, 난 그런 그녀를 엘가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이름은…… 또한 네 할머니의 이름이기도 하다.”

“…….”

“…….”

한참을 목걸이를 들여다보던 알마리온이 그것을 주머니 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끝내 두 사람 모두 아버지란 말을 하거나 아들이란 말을 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자신들이 세상에 홀로가 아니라는 것을.

“……!”

제국에서 자신에게 작위를 내릴 것이란 이야긴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설마 그 작위가 백작이라는 대귀족의 작위일 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기에 알마리온은 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놀라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나 남작이 제국에 전한 종이 제조법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흥! 그럼 뭐합니까, 형님. 저들이 그런 얕은 수작을 부린 것을 말입니다.”

블리스의 말에 막스밀리언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가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은 제국에서 알마리온에게 정하여 준 봉지 때문이었다.

“혼테르 이북의 땅을 영지로 주다니요? 거긴 제국의 영토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모두 제국에서 게르혼족들이 강해지니까 아국을 끌어들이기 위한 술수를 부리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막내가 제국의 황자와 혼인하기로 한 이상, 제국과 아국의 연합은 기정사실인 일이지 않으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게르혼족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왕국은 이제 막 전쟁을 끝낸 상태란 말입니다.”

“그러하기에 제국의 도움이 더 필요한 것이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젠장! 빌어먹을 제국 놈들!”

막스밀리언의 저속한 행동에 살짝 낯을 찌푸리는 블리스였지만 그것을 나무라진 않았다.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내심 그 또한 동생인 막스밀리언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럴 것이면 아예 후작 정도의 작위를 내려 주든지. 치사한 놈들이 백작이 뭐야, 백작이…….”

백작이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말하는 막스밀리언이었지만 실상 백작이란 작위는 귀족 중의 꽃이라 불릴 정도로 모든 귀족들 중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위치였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국가의 중요 직책을 담당하는 실무 최고 책임자들로, 국경을 방비하는 일 또한 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저들 또한 나름대로 고민하고 결정한 일일 수도 있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들은 게르혼족이 통합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때문에 아국을 끌어들인 것이지. 제국에서 남작에게 백작이란 작위를 내리고 영지를 지금의 영지 이북의 땅이라 한 것은 남작으로 하여금 그 블랙 대공이란 자에 대항할 대항마를 두려는 것이지.”

블랙 대공이란 자는 제국의 동북 지역과 로엔 왕국의 서북 국경 지역 일대에서 세를 쌓아 가고 있었다. 하나 왕국의 동북 지역은 여전히 주도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구태여 알마리온의 영지를 혼테르 이북 지역으로 정한 것도 이 지역 일대의 게르혼족을 통합하여 블랙 대공이란 자를 견제하라는 의미였다.

“문제는 그런 대항마가 절대 서둘러서 만들어져선 안 된다는 것이지.”

위협적이긴 하지만 블랙 대공이란 자는 아직 제국을 공격할 의도도 없었으며, 힘도 충분치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로엔 왕국이 급작스럽게 움직인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자를 자극하는 일이 되는 것이니 최대한 피해야 할 일이었다.

즉, 견제 세력을 만들되, 자극하진 말아야 하는 아주 복잡한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남작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겠소?”

알마리온이 앞으로 해야 할 일. 그것은 바로 북쪽으로 진출을 하여 흩어진 게르혼족들을 서서히 통합하여 나가라는 것이었다. 단 블랙 대공이란 자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예, 왕세자 전하.”

“또 하나. 막스, 너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단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

“무엇입니까?”

“폐하께서 조만간 널 북서군 사령관에 임명하실 것이다.”

“북서군 사령관으로 말입니까?”

“그래.”

통칭 북부군이라 하지만 북부군은 2개의 군단으로 나뉘어 있는데 오라클 오브 오딘 산을 중심으로 서쪽은 북서군, 그리고 동쪽은 북동군으로 나뉘어 있다.

“정말이십니까?”

블리스의 말에 막스밀리언이 놀라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실 가족에게는 이러한 직책을 내리지 못하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조만간 원수부를 해체하실 계획이시다.”

“원수부를 말씀이십니까?”

원수부는 왕국의 모든 상비군을 지휘하는 최고 지휘부였다. 한데 그러한 원수부를 해체한다는 것은 더 이상 상비군을 두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막스밀리언이나 알마리온 모두 크게 놀랐다.

“그래.”

“하면……?”

“남작의 생각처럼 상비군 또한 이제 곧 해체될 것이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전란으로 인해 왕국 전체가 심각하게 피폐해진 상황이라는 것은 너도 잘 알 것이다. 이로 인해 세입稅入이 크게 줄어들어 더 이상 군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고 상비군을 해체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들이 존재하고 있기에 왕국의 북쪽 국경이 지켜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면 앞으로는 어떻게 북쪽 국경을 지키겠다는 것입니까?”

군을 유지할 돈이 없어 군을 해체하는 일은 과거에도 몇 차례 있었던 일이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군을 해체한다는 것, 그것도 왕국의 최정예 부대를 해체한다는 것은 확실히 옳은 결정은 아니었다.

“북부군은 해체되지만 상비군은 그대로 직영지의 병사로 흡수될 것이다. 다만…… 북동군의 경우에는 경이 맡아 주었으면 하오.”

“예? 소관이 말씀이시옵니까?”

“그렇소. 막스 너도 그렇지만 남작 또한 조만간 북서군과 북동군이 관할하는 지역의 모든 직영지에 설치되어 있는 성들의 성주로 임명될 것이오.”

상비군이 해체될 경우, 국경 지역의 방비는 당연히 국경 지역의 직영지에서 병사들을 차출하여 맡아야 했다. 그리고 이들을 지휘하는 이는 바로 각 직영지의 행정권과 사법권, 그리고 군의 지휘권을 위임받은 성주가 행하게 되어 있었다.

“해체될 북서군의 경우 어떻게 하든 왕실에서 최대한 자금을 마련하여 유지할 수 있겠지만…….”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블리스를 보며 왕실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왕국에서 가장 자금이 풍부한 이를 꼽으라면 단연 알마리온이었다. 아니, 당장은 아니라 해도 앞으로 가장 풍부한 자금력을 가진 이는 왕국 내에서 그를 따라올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임이 분명하였다.

그런 그에게 성주라는 직책을 내리는 대신 그의 재력으로 국경을 방비하는 데 힘써 달라는 뜻이었다.

“형님, 하면…….”

“후…… 솔직히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나…… 그래. 지금으로써는 이 방법 말고는 왕국의 국경을 방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어찌하겠느냐.”

“으음…….”

“소관에게 그러한 중책을 맡겨 주신다니 참으로 영광이옵니다, 전하.”

“하면 맡아 주겠단 말이오?”

알마리온이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히자 블리스의 표정이 이내 밝아졌다.

“참으로 고맙소. 하면 난 이 소식을 곧바로 폐하께 보고해야 하니 이만 일어나 보도록 하겠소.”

알마리온이 국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히자 블리스는 이내 이 일을 보고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쯧!”

왕실이 지나치게 알마리온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리는지 막스밀리언의 표정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너무 그러시지 마십시오, 형님.”

“어째 널 보고 있으면 로엔달 백작을 보는 것 같은지……. 그도 아버님 말씀이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거절하는 법이 없는 분이신데 너도 가만 보면 로엔달 백작과 너무 닮은 것이 많은 것 같구나.”

내심 뜨끔해지는 알마리온이었다.

“결국 이번에 내가 북서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도, 네가 나누어 준 종이 판매권으로 얻은 수익을 보태란 것이겠지.”

단지 능력만을 인정했기에 자신에게 북서군 사령관 자리를 임명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알마리온에게 북동군 사령관 자리를 주면서 그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훗! 억울하십니까?”

“억울할 게 뭐 있겠어? 어차피 이곳에 있어 봐야 하루 종일 아무 할 일도 없는데 잘되었지 뭐. 최소한 거기에 가면 신 나게 병정놀이라도 할 수 있으니 오히려 나야 더 좋지.”

“하하. 그러면 되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게 만족하며 살아야지. 어쨌든 나야 그렇지만 네겐 또다시 왕실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네.”

“형님도 참 별말씀을…… 전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기사입니다. 그리고 제가 가진 모든 것이 폐하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저야말로 아쉬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정말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어찌 그렇게 로엔달 백작과 똑같을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뜨끔해지는 알마리온이었다.

“어쨌든 나도 이것저것 준비를 하려면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다. 상황을 보아하니 조만간 코텐 성으로 가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예, 형님.”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에 대한 기쁨으로 인해 막스밀리언은 웃음 짓고 있었다.

원래 오늘은 제국과 왕국에서 수여하는 작위 수여식이 계획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하루 전날 밤에 전면 취소가 되었다. 아니, 완전히 취소된 것은 아니었고, 애초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여 약식으로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유는 국왕인 메르타니온의 건강이 우려될 정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수년 동안 전쟁과 전후 복구를 위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일들을 꾸준히 수행해 온 메르타니온은 얼마 전부터 차츰 건강이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왔고, 끝내 며칠 전부터 심하게 앓기 시작하였기에 모든 공식적인 행사를 주관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작위 수여식이 끝나면 왕궁에서 열릴 연회는 취소가 되었고, 작위 수여식 자체도 약식으로 치러지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축하드립니다, 혼테르 후작.”

“황공하옵니다, 전하.”

피어스 황자가 제국 황제를 대리하여 알마리온에게 백작의 작위와 함께 이스턴이라는 성, 그리고 혼테르 이북의 땅을 영지로 한다는 증서를 건네는 것으로 알마리온에 대한 작위 수여식이 끝나자 곧바로 병중인 메르타니온 국왕을 대리하여 블리스 왕세자가 관례에 따라 제국에서 수여한 작위보다 한 단계 높은 작위인 후작의 작위를 알마리온에게 수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서 그에게는 곧 해체될 북동군 사령관의 직책 또한 함께 임명되었으며, 북동군이 해체된 이후에는 국경 지역의 모든 직영지의 성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을 또한 함께 받았다.

이로써 로엔 왕국에는 여섯 번째 후작 가문이 탄생하게 되었지만 이를 진정으로 기뻐하는 이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권력과 금력, 거기에 무력까지 갖추게 될 노예 출신 귀족에 대한 경계심만 더욱 높아졌을 뿐이다.

“폐하의 건강만 좋으셨다면 왕국의 여섯 번째 후작 가문이 탄생한 것을 대대적으로 축하하였을 것인데 그러지 못해 죄송하군요.”

“어이 그런 말씀을. 그보다는 하루속히 폐하께서 건강을 되찾으셔 굳건한 모습을 보이셔야 할 것입니다.”

전에도 하위 귀족이라 하여 그를 무시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왕국의 여섯 번째 후작이 된 알마리온을 대하는 블리스 왕세자의 언행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래야지요. 어쨌든 왕궁에서의 연회는 취소되었지만 후작의 저택에서 열릴 연회에는 나 또한 참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하옵니다, 전하.”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하지요.”

“예, 전하.”

왕세자 부부와 피어스 황자, 그리고 곧 약혼식을 올릴 카산느 공주 등이 밖으로 나가자 수여식에 참석하였던 자들이 그에게 다가와 축하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축하하오, 혼테르 후작.”

“감사하옵니다, 도르첸 공작 전하.”

“앞으로도 국왕 폐하를 위해 많은 일을 해 주시오.”

“예, 공작 전하.”

“축하하오, 이스턴 백작.”

“감사하옵니다, 프리모 공작 전하.”

재미난 것은 국왕 파벌에 속한 귀족들은 그를 후작이라 칭하였고, 귀족 파벌에 속한 이들은 그를 제국에서 수여한 성과 작위로 부르고 있었다.

“축하하네. 하하. 이젠 같은 후작이 되었군?”

“폰티악 후작님과 견주려면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자네라면 충분히 잘 해낼 것이네.”

“감사합니다, 후작님.”

“그럼 오늘 밤 자네 저택에서 보도록 하지.”

“예, 폰티악 후작님.”

폰티악 후작에 이어 레드로가 다가와 축하 인사를 해 주었다.

“훗! 이젠 후작 각하라 불러야겠네?”

“훗! 그렇게 불렀다가는 나와 인연을 끊겠다는 것으로 여기겠네.”

“하하. 그렇다면 나야 편하지.”

“고맙네.”

“뭐가?”

“이렇게 축하해 주어서 말이네.”

“당연하지. 친구가 이렇게 승승장구하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나?”

“아! 자네도 형님과 함께 북서군에 간다고 들었네.”

“맞아. 나르담 후작 각하와 함께 북서군 지휘부에 가게 되었다네.”

전쟁 때에 함께 호흡을 맞췄던 나르담 후작과 레드로는 막스밀리언 왕자의 요청을 받고 해체될 북서군을 재구성하고, 이들을 지휘할 지휘부를 구성하기 위해 조만간 코텐 성으로 부임할 예정이었다.

“축하하네.”

“고맙네. 그럼 연회 때 보도록 하세나.”

“그러지.”

그렇게 작위 수여식에 참석한 자들로부터 진심 어린, 또는 질투 섞인 축하 인사를 받던 알마리온은 마지막으로 로엔달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았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로엔달 백작님.”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너무나도 간단하고 짧은 인사였지만 이제는 부자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여서 그런지 이들 두 사람은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묘한 친밀감까지 느껴졌다.

작위 수여식에 이은 연회는 취소되어 아쉬움들이 남았던 것인지, 아니면 왕국의 여섯 번째 후작 가문의 출현, 그것도 무력과 재력, 권력을 동시에 갖게 된 오늘의 주인공인 알마리온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눈도장이라도 찍으려 함인지 왕국의 거의 모든 귀족들은 물론 상인들까지, 소위 지도층에 있는 자들이라면 모두가 모여들어 그의 저택에서 열린 연회에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손님들이 많았다.

“아니!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자작님.”

그 자리에서 알마리온은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이가 있었다. 한때 자신의 주인이었던 로뎀 자작과 그의 아들이자 알마리온에게는 큰 상처를 주었던 지크가 함께 그의 저택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허허. 오랜만입니다, 혼테르 후작 각하.”

6년 만에 다시 보게 된 로뎀 자작의 모습은 이전의 모습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건강해 보이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자작님.”

“감사합니다. 뭐 하느냐? 후작 각하께 인사드리지 않고.”

로뎀 자작 곁에 서 있긴 하였지만 싫은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지크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한 것이 한때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후 주변 사람들로부터 알마리온과 비교를 당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심성이 비뚤어지기 시작한 지크였다.

이후 지크는 계속하여 아버지인 로뎀 자작을 실망시켜 왔고, 알마리온은 노예 병사로 입대를 한 후 승승장구하여 로엔 왕국이 개국한 이래 처음으로 가장 짧은 시간 만에 최하층이었던 그가 후작이라는 대귀족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 자리가 결코 편할 리가 없었다.

실상 알마리온이 과거 로뎀 자작가에서 노예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 엉뚱하게도 지크는 비교의 대상이 아닌, 놀림감이 되어 귀족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마리온은 오랜만에 만난 지크를 진심으로 반갑게 대해 줬지만 지크는 여전히 그런 그를 외면하였다.

“오랜만입니다.”

“…….”

알마리온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그와 대면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는지 지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자리를 떠 버렸다.

“쯧! 한심한…….”

“너무 그러시지 마십시오, 자작님.”

“쯧! 저 녀석이 네…… 아니, 후작 각하의 반만이라도 따라갔다면…… 쯧쯧!”

잠시 예전에 알마리온을 대하던 습관대로 말하던 로뎀 자작이 깜짝 놀라며 다시 말투를 바꾸었다.

“지크 도련님은 자작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분입니다. 다만…….”

지크가 어느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자라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알마리온이다.

알마리온이 알고 있는 지크는 본시 무척이나 심약한 아이였다. 그런 지크에 대한 로뎀 자작의 기대가 너무 컸던 데다가 워낙 엄한 교육을 일찍부터 시작한 때문인지 지크는 늘 주눅 들어 있었고, 그것이 결국은 문제가 된 것이었다.

“좀 더 도련님을 편하게 만들어 주신다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휴…… 정녕 그랬으면 좋으련만……. 내 솔직히 오늘 이렇게 후작 각하를 찾아오게 된 것은 각하께 저 녀석을 부탁하고 싶어서랍니다.”

“도련님을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알겠습니다. 도련님과 말씀을 나눠 보신 후, 제 밑이라도 좋으시다면 절 찾아오라고 하십시오. 만약 그것이 싫으시다면 알리안 공작 전하께 청을 드려 성주직을 맡을 수 있도록 청해 보겠습니다.”

“아! 정말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예, 자작님. 하니 먼저 도련님과 잘 상의해 보십시오.”

“허허,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별말씀을. 그럼 연회를 즐기도록 하십시오.”

그에게 눈도장이라도 찍기 위해 밀려드는 손님들을 일일이 맞이하는 것도 중노동에 가까운 일이었다. 결국 이에 단단히 기가 질려 버린 알마리온이 슬쩍 연회장을 빠져나왔다가 홀로 정원을 거닐고 있는 일레인을 볼 수 있었다.

“음? 레이디 폰티악?”

“아! 남작…… 아니, 후작님…….”

알마리온이 다가오자 일레인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왜 이곳에 홀로 계십니까?”

“저, 그게…….”

“사람들이 너무 많다 보니 조금 답답하지요?”

“예? 예…….”

원래는 혹시라도 알마리온과 마주치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 연회장을 떠나 있었던 일레인이다. 한데 오히려 이렇게 단둘이서만 있게 되자 그녀는 지금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저, 전 이만…….”

“괜찮으시다면 함께 산책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예? 하, 하지만…….”

함께 산책을 하자는 알마리온의 제안에 일레인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제가 무례한 청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레이디 폰티악.”

“아니에요! 그런 것이 아니라…….”

선뜻 응하지 않는 일레인을 보며 자신이 무례한 부탁을 한 것인 줄 알고 사과를 하자 깜짝 놀란 일레인이 더욱 허둥거렸다.

“그럼 좀 걸으실까요?”

“예…….”

알마리온이 손을 내밀어 그녀가 팔짱을 낄 수 있도록 하였지만 일레인은 계속 멈칫거렸다. 아무래도 자신의 못난 손을 내보이기가 싫었던 것이다.

하나 계속해서 알마리온이 손을 내밀고 있자 더 이상 그를 무안하게 만들 수도 없는 일이었는지라 머뭇거리며 그의 팔에 손을 끼었다.

“오늘 연회에 참석하시지 않으신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지난번 귀댁에서의 아침 식사 때에도 갑자기 보이시지 않아 제가 혹 레이디께 무엇인가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아, 아니에요, 후작님. 그날은 단지…… 그러니까…….”

귀족 가문의 영애답지 못하게 궂은일을 하느라 투박하기만 한 자신의 손을 내보인 것이 창피하여 도저히 식사에 참석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서…… 예,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전 혹시라도 제가 실수를 한 것이 있는가 싶었습니다. 하면 이제는 괜찮으십니까?”

“예…….”

한동안 두 사람은 더 이상의 대화 없이 그저 묵묵히 산책을 하였다. 아담이 알마리온을 찾으러 왔을 때까지.

“황자 전하께오서 궁으로 돌아가신다 하옵니다.”

“아! 알았어요. 곧 돌아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폰티악.”

“아니에요. 어서 돌아가 보세요.”

“아담, 그대가 레이디 폰티악을 모시도록 하시오.”

“예, 영주님.”

이날의 연회는 다음 날 새벽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고 끝까지 초대한, 그리고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을 모두 접대한 알마리온 또한 이틀 동안이나 병든 사람처럼 무기력하게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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