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진실
제국의 3황자인 피어스와 카산느 공주와의 약혼식을 위해 황자의 일행이 로엔에 도착을 한 것은 8월이 끝나 갈 무렵이었다.
그리고 이들 일행이 도착한 후 이틀 후에 알마리온은 요들과 함께 1년여 만에 소렌토에 입성하였다.
제국의 3황자와 공주와의 약혼식 전에 알마리온에게 작위 수여식이 계획되어 있었기에 부득불 알마리온이 다시금 왕도에 오게 된 것이었다.
한데 정작 소환을 당한 알마리온은 자신들이 무슨 일 때문에 소환을 당한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야, 어째 좀 이상한 것 같지 않냐?”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면 모를까 단둘이서만 있었기에 알마리온과 요들은 오랜만에 편하게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
“어째 다들 널 대하는 것이 좀…….”
자신들을 대하는 근위군 소속 병사나 서전트 들의 행동을 보면서 요들은 솔직히 이것들이 단체로 무엇을 잘못 먹은 것이 아닌지 싶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알마리온을 대하는 근위군 병사들의 행동은 극도의 존경심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 근위군 병사들에게 있어서 알마리온은 최고의 영웅이었다. 근위군 지휘부는 몰라도 병사들이나 서전트들은 대부분 평범한 가문 출신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있어서 알마리온은 단지 왕국의 익스퍼트들 중 한 사람이 아닌 꿈과 희망을 갖게 해 준 대상이었고, 1년 전 그가 소렌토에서 행한 일은 말로만 들었던 익스퍼트의 위대함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일이었기에 그에 대한 존경심이 극에 달해 있었다.
하니 그를 대하는 근위군 병사들이나 서전트들의 행동이 다른 귀족들을 대하는 것과는 눈에 띄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혼테르 남작님. 소관은 근위군 소속 서전트 길버트 호른이라고 합니다. 소관에게 남작님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원래 작위를 가지고 있는 자가 왕도에 입성을 하였을 경우에는 근위군 서전트와 병사가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을 앞세우며 영주와 그 일행을 안내하여 목적지까지 호위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는 귀족의 권위를 세우는 한편, 혹시라도 귀족에게 저도 모르게 불경을 저질러 애꿎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처사였다.
이를 위해 왕도로 입성하는 모든 성문에는 각 귀족 가문을 상징하는 기旗가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요식행위는 전란이다 뭐다 해서 사라졌다가 전란이 끝나자 다시금 부활하였던 것이다.
“부탁하겠네.”
“영광입니다, 남작님. 그럼 모시겠습니다.”
근위군의 호위를 받으며 일단 저택에 도착한 알마리온과 요들은 저택의 총관인 아담과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쿠엔토와 알빈의 환대를 받았다.
한데 요들은 소렌토의 저택에 도착을 하자마자 무엇이 그리도 급한 것인지 이내 외출을 해 버렸다.
워낙 외지에, 그것도 영지에 도착한 이후 줄곧 병사를 훈련시키고, 또 몬스터 토벌을 위한 작전에 투입되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하였기에 모처럼 소렌토에 나온 김에 그동안 쌓였던 긴장들을 풀기 위해 작정을 하고 따라나선 그였다.
“1년 만인데도 많이 변하였더군요.”
“그렇습니다, 주군. 아무래도 왕도이다 보니 다른 곳에 비해 재건의 속도가 빠르기에 그럴 것입니다.”
“왕궁의 재건은 어떻던가요?”
“그것이…… 귀족 가문들의 저택이 재건되는 속도에 비하면 확실히 더딘 편입니다.”
“여전히 재원 부족이 문제입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문제는 국왕 폐하의 세를 꺾어 놓기 위해 귀족 파벌에 속한 귀족들의 교묘한 농간도 왕궁의 재건을 최대한 늦추고 있는 한 원인입니다.”
쿠엔토의 말처럼 전란이 끝나자 전란 중에 국왕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이 또다시 귀족 파벌들에 의해 도전을 받고 있었는데, 귀족 파벌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돈줄을 죄는 일이었다.
거기에 왕국의 상징이기도 한 왕궁의 재건을 최대한 늦춤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 이들은 왕궁 재건에 필요한 건축 재료들의 확보에도 훼방을 놓고 있었다.
“더욱이 귀족 파벌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상단을 이용하여 왕궁 재건에 필요한 재료들을 최대한 통제하고 있어 실상 자금을 가지고 있어도 재료를 구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쿠엔토의 설명에 알마리온은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하면 왕실에서 비밀리에 소유하고 있는 상단들을 동원해서라도 필요한 재료를 구하면 되지 않습니까?”
“비밀이라고는 하지만 단지 서로 모른 체하는 것일 뿐입니다, 주군.”
“결국 과거 테일러 상단과 같은 상단들에는 물건을 아예 팔지 않는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흠! 해결책은 없는 것입니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인지라…….”
“있긴 한 것입니까?”
“한 가지 있긴 합니다. 하나 아마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그 누구도 찬성하진 않을 것입니다.”
말을 하는 쿠엔토의 표정이 난색을 표했다.
“무엇인가요?”
“포넬과의 교역입니다.”
확실히 쿠엔토가 난색을 표할 만도 하였다.
“확실히 파격적인 해결책이긴 하군요.”
이제 막 전쟁이 끝난 상태에서 이내 다시금 포넬과 교역을 재개한다는 것은 정서상 실현되기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굳이 포넬하고만 교역을 할 이유는 없는 것 아닌가? 예전에 자작님의 서재에서 보았던 책들을 보면 왕국 이전에 이 땅에 있었던 왕국들 중에는 바다 건너의 여러 나라들과의 교역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쿠엔토의 말에서 좋은 생각이 떠오른 알마리온이었다.
“한데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아주 실현 불가능한 해결책도 아닌 것 같군요.”
“……?”
“외국이 꼭 포넬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다를 건너 다른 왕국과의 교역을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알마리온의 말에 쿠엔토가 또다시 난색을 표시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해 보십시오.”
“우선 주군의 생각을 실행하려면 거친 바다에서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하고도 큰 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항해를 하기 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자들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망망대해에서 가야 할 곳을 분명히 갈 수 있는 데 필요한 해도海圖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없이 바다에 나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주군.”
쿠엔토의 지적에 확실히 자신이 너무 가볍고, 즉흥적으로 생각을 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 그렇다 해서 도전해 보지도 않고 이대로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만 하면 되는 일. 쿠엔토의 지적을 통해 무엇을 해결해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 알마리온은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 노력하면 될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가 이처럼 적극적인 생각을 하는 것에는 게르혼족과의 국경무역이 가져다주는 이익의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최근 들어 분명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순간 알마리온의 머리가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배를 제작하는 기술은 이미 충분히 있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폰티악 후작은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배를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동원하여 해전에 필요한 배를 건조하였고, 이렇게 건조한 몇 안 되는 배로 포넬을 상대하여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 말은 또한 기본적으로 배를 조작하는 데 필요한 항해술 또한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배를 움직인다는 것이,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에서 안전하게 배를 조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험을 해 보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적을 상대로 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문제는 해도라는 것인데…….’
가장 어려운 난제는 바로 어떻게 해도라는 것을 구할 수 있는가였다. 한데 궁하면 통한다는 옛말은 이런 때에도 역시 통하는 법이었다.
‘맞아! 포넬은 예부터 해적으로 악명을 떨쳤던 곳이지 않은가.’
지금은 확실히 덜해졌지만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로엔의 모든 해안가는 포넬 출신 해적들에 의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오죽하면 해적들에 의한 피해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이를 막을 병력이 없다는 이유로 섬들을 통째로 비워 버렸겠는가.
이러한 상황은 비단 로엔 왕국의 일만이 아니었다. 카빌란 제국도 포넬 출신 해적들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한 번은 제국의 황도에까지 포넬 출신 해적들이 진출을 하여 제국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 일도 있었다.
‘물론 포넬의 모든 포로들이 배를 조종할 수 있는 자들은 아니라 해도 그들 중에는 분명 배를 조종하는 기술은 물론, 망망대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고 있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알마리온에게는 해도를 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도가 있음을 생각해 냈다.
과거 카빌란 제국 초창기에 제국에서는 대규모 선단을 조직하여 해양으로의 진출을 꾀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 무슨 이유에서 제국이 선단을 해체하였는지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그 당시 제작한 해도라는 것이 분명 어딘가에는 보관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왕국에 남아 있는 옛 기록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전 왕조에서 그러한 일을 하였던 가문들이나 상단들의 경우에는 언제든 다시금 옛 기록들을 쓸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그때의 자료들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문득 이 일을 가능케 하고 싶어졌다.
“과거에도 그러한 일들을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이라고 해서 못할 것은 없지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이 해 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주군.”
“경은 전 왕조에서 외국과 무역을 하였던 모든 가문에 대해서 조사를 해 주십시오.”
“전 왕조에서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그 가문들을 면밀히 조사해서 보고해 주십시오.”
“예, 주군.”
이미 수백 년이 지난 일이지만 조사를 하자면 못 할 것도 없는 일이었기에 그러마 하고 대답은 하였지만 이 어린 주군이 이번에는 또 무엇으로 자신을 즐겁게 해 줄 것인지 사뭇 기대가 되었다.
왕실의 어용 상단들 중 하나로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던 테일러 상단이다. 그런 상단이 지금은 왕국 내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하였으며, 아울러 최고의 상단으로 발돋움해 나가고 있었다.
어용 상단으로 머물던 시절 쿠엔토는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주는 것은 없이 받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왕실과 그러한 왕실을 등에 업은 관리들의 뒷돈 요구와 이런저런 부정을 막는 것만으로도 허리가 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알마리온에게 상단의 소유권이 넘어간 이후에도 그는 마찬가지로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는 과거의 어려움과는 전혀 다른, 비로소 상인으로서의 자신의 자질을 마음껏 뽐낼 수 있게 되었기에 비록 쉬는 날 없이 일에 매달려 있었지만 지금은 하루하루가 즐거움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나이 어린 주군이 무엇인가를 제안할 때마다 그것이 크게 성공을 하였으니 당연히 이번에도 무엇인가를 크게 터뜨려 줄 것이란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 그리고 폰티악 후작 각하께서도 왕도에 계신가요?”
“예, 주군. 그분께서도 곧 있을 2공주님의 약혼식 연회에 참석하시기 위해 어제 왕도에 입성을 하셨습니다.”
“잘되었군요. 하면 나가시는 길에 총관에게 일러 후작 각하를 뵙고 싶으니 언제가 좋은지 약속을 잡도록 하라고 전해 주십시오.”
“예, 주군.”
폰티악 후작과의 만남은 그날 밤, 조금은 늦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후작 각하.”
“하하. 이렇게 자넬 다시 보게 되니 반갑네.”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그리고 이쪽은 내 안사람이네.”
비앙카 폰 폰티악 후작 부인은 40대 후반의 후덕한 인상과 몸집을 지닌 여인으로, 사람을 편케 만들어 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후작 부인.”
“어서 와요. 바깥분을 통해 남작에 대해 이야기 많이 들었답니다. 이렇게 직접 만나 보게 되니 정말 반갑군요.”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그리고 이건 처음 방문한 데 대한 조그만 선물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같은 귀족들의 경우 처음으로 초대를 받거나 방문을 하였을 경우에는 예물을 건네는 것이 상례였다.
“호호, 뭘 이런 것을……. 다음부터는 이런 격식은 차리지 않아도 좋으니 자주 들르도록 하세요.”
비앙카는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이 젊은 귀족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지 잘 알기에 더욱 그를 편하게 대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그리고 이쪽은 내 아들이라네.”
“알버트 폰 폰티악이오. 그대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이 들었소.”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남작입니다, 자작님. 후작 각하와 함께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셨음을 소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폰티악 후작의 아들인 알버트 또한 아버지와 함께 해군을 지휘하여 포넬의 침략을 막는 데 한 축을 담당한 자였다.
“이쪽은 내 여식인 일레인이라고 하네.”
“일레인이라고 합니다, 남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아쉽군. 조금 더 일찍 연락이 되었으면 함께 저녁 식사라도 했을 것을 말이네.”
“다음에 소관이 정식으로 초대를 하겠습니다, 후작 각하.”
“하하, 기대하지. 한데 급히 연락을 준 것을 보니 내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나 보군?”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알겠네. 하면 내 집무실로 가도록 하지. 알버트, 너도 함께 가자꾸나.”
“예, 아버님.”
“그리고 집무실로 간단한 술을 좀 내다 주겠소?”
“예, 그렇게 할게요.”
“그럼 가세나.”
“예.”
후작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레인이 직접 포도주병과 술잔을 들고 들어왔다.
“그래, 날 갑자기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실은 의논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 이렇게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의논?”
“예, 후작 각하.”
“어디. 들어 보도록 하지.”
“실은…….”
알마리온은 쿠엔토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그에 대한 자신 나름대로의 해결책에 대해 폰티악에게 말하기 시작하였다.
“흠…….”
“확실히…… 확실히 혼테르 남작의 생각대로만 된다면 충분히 왕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폰티악 후작은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에 빠졌고, 알버트는 알마리온의 계획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확실히 자네 이야기는 가능성이 높긴 하네.”
일단 폰티악 후작 또한 자신의 계획이 가능성이 높은 일이라는 것에 동의를 하자 알마리온은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그렇습니다, 아버님. 일단은 이미 해로를 알고 있는 제국과 교역을 먼저 시작하고 혼테르 남작의 말처럼 옛 자료들을 찾아 더 먼 나라들과도 교역을 시작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지. 문제는 선단을 조직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는가 하는 일이네.”
선단을 꾸린다는 것은 왕실에서조차도 쉽게 실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폰티악 후작은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인물답게 카빌란 제국이 건국 초기에 대규모 선단을 꾸렸다가 엄청나게 드는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선단을 해체해 버리고 말았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럴 정도로 선단을 꾸리는 일은 막대한 자금이 든다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알마리온이나 알버트는 이번 일이 생각만큼 쉽게 진행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나 그럴수록 알마리온은 더욱더 이번 일에 도전해 보고 싶어졌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그런 일에 얼마나 많은 재원이 필요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바다 또한 중요하다는 것은 이번 전쟁을 통해 후작 각하를 통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
“그리고 이왕이면 후작 각하께서 모든 바다를 로엔의 것으로 만들어 주시면 어떨까 생각하였습니다.”
“으음…….”
누군가 자신을 알아봐 준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그것도 장래 왕국의 한 축을 이끌어 나갈, 자신도 인정하는 후배에게 그러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기에 더욱 가슴이 뿌듯해졌다.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그였기에 바다에 대한 애착이 그 누구보다 강했다.
심지어는 아내와 혼인을 한 바로 다음 날에도 포넬 출신 해적들이 침입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열 명의 병사를 이끌고 쪽배나 다름없는 배를 타고 해적을 막기 위해 출병을 한 이후, 지금 이 날까지 바다 위에서 살았고, 신이 허락한 삶이 다할 때까지 바다 위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은 그였다.
때로는 어머니의 품처럼 잔잔하고 풍요로운 모습으로, 때로는 자신의 잘못을 질타하는 화난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리고 어떤 때에는 절로 신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모습처럼.
천千의, 아니 천만千萬 가지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바다 위에서 장렬하게 생을 마감하길 진정으로 바라는 바다 사나이였지만 그에게 있어 늘 한 가지 아쉬움이 남아 있다면 바다의 끝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쉬움으로 남던 것이 이제 더 이상 아쉬움으로만 남지 않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에 더욱더 가슴이 뛰었다.
“정말…… 정말 하려 하는가?”
“예. 후작 각하께서 반대만 하시지 않는다면 반드시 해 보고 싶습니다.”
“후후…… 하하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통쾌하였다. 늘 마음은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꿈을 이룰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된 것에 그동안 늘 마음 한구석을 꽉 막고 있던 것이 뻥 뚫린 듯 그에게서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날 밤 알마리온은 결국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느라 온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한데 그 모습이 마치 어린 사내아이들이 자신들만의 비밀 아지트를 만들 때의 모습처럼 천진난만하기까지 하였다.
밤을 꼴딱 새운 것이 피곤하였는지 폰티악과 알버트는 잠자리에 들었지만 알마리온은 생명의 기운이 대기를 충만하게 채우고 있는 신선한 기운을 만끽하기 위해 후작가에서 내준 잠자리에 드는 대신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다른 대귀족들, 아니 귀족들의 저택이라면 주로 왕궁의 주변에 집중되어 있지만 이번에 새로이 귀족의 반열에 올랐거나, 아니면 폰티악 후작이나 로엔달 백작처럼 단승 귀족들이었던 자들은 대부분 재정적으로 문제가 있어 상대적으로 왕도 외곽 지역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기에 건물의 크기보다는 부속된 대지가 훨씬 넓은 경우가 많았다.
폰티악 후작의 저택 또한 건물은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 한 동이 전부였지만 부속된 대지는 상당히 넓었다. 한데 재미난 것은 저택에 속한 너른 대지에는 후작 부인이 가꾼 채소밭이 정원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채소밭에는 후작 부인인 비앙카와 딸인 일레인이 하인들과 함께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밭일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알마리온에게도 제법 큰 충격이었다.
단승 귀족이긴 하였지만 귀족 가문의 안주인과 그 여식이 이처럼 직접 이러한 이른 시간에 밭을 일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어머?”
한창 하인들과 함께 밭을 가꾸던 두 여인 중 일레인이 먼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알마리온을 발견하고는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딸아이의 모습을 보며 비앙카는 무슨 일인가 싶어 물었다.
“왜 그러니, 일레인?”
“저기…….”
“음? 아! 혼테르 남작?”
알마리온에게 일을 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들킨 것에 대해 처음에는 다소 당황하였던 두 모녀는 함께 일을 하던 하인들에게 일을 계속하라 지시하고는 오늘 수확한 야채와 채소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는 그에게로 다가왔다.
후작이라는 대귀족의 안주인과 그 여식이 이처럼 이른 시간에 직접 텃밭에 나와 일을 하는 모습을 남에게 들켰다는 것이 창피하게 여길 만도 할 일이었지만 비앙카나 일레인의 표정에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기색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호호. 놀랐지요?”
“확실히 의외의 모습이었습니다, 후작 부인.”
“워낙 오랫동안 해 온 일인지라 좀처럼 손에서 놓을 수가 없네요.”
폰티악 후작 또한 입지전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해군에 종사해 온 그러한 가문이었지만 그 직책은 서전트에 불과하였다.
그런 그가 승승장구하게 된 것은 포넬 출신 해적들이 기승을 부리면서부터였다. 하나 그가 능력을 인정받았다 해서 모든 것이 단번에 달라지진 않았다.
공을 인정받아 기사가 되고, 또 남작이 되고 자작이 되고 백작으로까지 승작되었지만 영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그는 연금만으로 생활을 하여야 했다.
물론 연금 자체는 부족하지 않았다. 단승 귀족 또한 귀족은 귀족이었고 귀족으로서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정도의 연금이 지급되었다.
하나 폰티악 후작은 그렇게 받은 연금을 거의 모두 해군 전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하였다.
이러한 일 또한 왕실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해군을 정비한다는 것은 막대한 재정이 드는 일이었고, 왕실은 이를 위한 여러 조치들을 충분히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로엔의 해군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져만 갔다.
이런 일이 벌어진 단 하나의 이유는 해군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의 부정 때문이었다.
폰티악 후작이 이러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1개 함대를 온전히 지휘할 수 있게 된 때부터였다.
이때까지 폰티악의 아내인 비앙카는 해군에 미쳐 있는 남편을 대신하여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하였고 그러다 보니 다른 귀족 가문의 안주인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러한 일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보기 흉하지요?”
“훗!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부인.”
“호호. 그렇게 말해 주시니 고마워요. 한데 잠자리가 불편했나요?”
거의 온밤을 지새워 이야기들을 나눴음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그를 다시 보게 되자 혹시라도 잠자리가 불편하였는지부터 살피는 비앙카였다.
“하하. 아닙니다, 부인. 다만 몇 시간 후에 다른 일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1년 전. 그가 왕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였을 때만 하더라도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몇 명과 국경무역을 함께하기로 한 영지의 상단들 말고는 그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나 그가 종이를 다시금 세상에 선보인 이후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그의 영지에는 왕국의 거의 모든 귀족 가문 사람들이 방문을 하였다.
이들이 알마리온을 찾아 벽지僻地 중의 벽지인 혼테르까지 사람을 보낸 이유는 바로 보다 많은 종이를 확보하기 위해서이거나 합작을 제안하기 위해서였고, 그중 일부는 미혼인 그와의 혼담을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알마리온은 결국 몬스터 토벌 작전을 직접 지휘하는 것마저도 포기한 채, 성에서 밀려드는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오히려 더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럴 정도였으니 1년 만에 왕도에 모습을 나타낸 그가 소화해야 할 일정은 잠시의 틈도 없을 정도였다.
실상 도착 첫날인 어제 또한 몇 가지의 일정이 있었지만 폰티악 후작과의 이야기가 길어지게 되면서 미리 약속되었던 일정들이 뒤로 미루어져 있었다.
“그러면 아침 식사를 조금 일찍 준비를 해야겠군요.”
“아닙니다. 부인. 괜히 저로 인해 불편을 끼쳐 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호호. 전혀 그렇지 않답니다. 어차피 얼마 후면 우리 가족들도 아침 식사를 해야 하니 말이에요. 호호. 다른 것은 몰라도 식사는 꼭 제때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바깥분의 철칙이랍니다.”
“그래도…….”
“바깥분이 깨어나셨을 때 남작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아마 무척이나 서운해하실 것이에요.”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십시오. 제가 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까요?”
아침에 수확한 야채와 채소가 든 바구니를 든 알마리온이 두 여인과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그럼 일레인, 네가 남작께 차를 내 드리도록 하려무나.”
“예, 어머니.”
어제도 느낀 것이었지만 후작가의 저택에는 하인들과 하녀들은 많아도 이들을 부리기보다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직접 몸을 움직여 하는 것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차를 내오기 전까지 알마리온은 응접실에 비치된 서가書架 앞에서 책을 꺼내 읽어 내려갔다.
전통적으로 로엔 왕국은 학문을 우대하였기에 모든 귀족 가문의 저택에는 서재를 제외하고도 이처럼 응접실같이 외부에 드러나는 곳에 서가를 마련하고 책을 진열하여 놓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응접실에 들이치는 아침 햇살을 등진 채 책을 읽고 있는 알마리온의 모습은 젊은 여인의 방심을 단번에 흔들어 놓기에 충분하였다.
‘아…….’
찻잔을 받쳐 들고 응접실로 들어서던 일레인은 그런 알마리온의 뒷모습을 보게 되자 숨이 막혀 왔다.
이러한 일은 비단 일레인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를 본 귀족 가문의 여식들은, 아니 설사 그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모에 대한 소문을 접한 모든 귀족 가문의 여식들은 그를 앙모仰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저…….”
잠시 넋을 놓고 알마리온을 바라보던 일레인이 어렵게 정신을 차리고는 알마리온에게 말을 걸었다.
“아! 레이디 폰티악이시군요.”
“차, 차를…….”
“저로 인해 불편함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레이디 폰티악.”
“아, 아니에요, 혼테르 남작님.”
어젯밤에 인사를 나누긴 하였지만 실상 두 사람이 대화를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일레인의 심장은 요동을 치다 못해 그대로 멈춰 버릴 것만 같았다. 얼마나 긴장하였는지 손이 떨려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자신이 긴장하고 있음이 그대로 드러나자 일레인의 표정이 마치 당장이라도 울 것같이 변하였다.
한데 그 순간 알마리온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귀족 가문의 여식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투박한 손을. 뿐만 아니라 찻잔을 쥔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거친 일을 한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굳은살까지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이 또한 알마리온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는 한 부분이었다. 일레인 또한 알마리온의 눈길이 농부의 아낙과 같은 자신의 손에 잠시 머무른 것을 알고는 내심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폰티악.”
“…….”
겨우 알마리온에게 차를 내준 일레인에게 알마리온이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지만 일레인은 그런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한 채 허겁지겁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차는 잘 내갔니?”
달리듯 빠른 걸음으로 주방으로 들어가자 그곳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비앙카가 일레인에게 물었다.
“흑! 어떻게 해요, 어머니…….”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인 딸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비앙카는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물었다.
“왜 그러니? 혹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이니?”
“그게 아니라…… 흑! 흑!”
“왜? 왜 우는 것이니?”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리는 딸아이의 모습에 비앙카는 깜짝 놀라며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하나 일레인은 더욱 큰 소리를 내며 울기만 할 뿐이었다.
“흑흑흑!”
“일레인? 자! 이 어미에게 말해 보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이야. 네가 혼테르 남작에게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이니?”
“흑…… 아, 아니에요.”
“하면 그가 네게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이니?”
“흑흑! 그런 것이 아니에요, 어머니.”
“하면 왜 이렇게 슬퍼하는 것이지?”
“그분이…… 그분이…… 흑흑흑!”
“…….”
“그분이 제 손을 보았단 말이에요. 흑흑! 그분이…… 흑흑흑!”
딸아이의 말에 비앙카는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단지 알마리온이 자신의 손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서럽게 울다니 어찌 기가 막히지 않겠는가.
하나 그녀 또한 어미이기 이전에 한 명의 여인. 같은 여인으로서 지금의 딸아이의 심정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올해 열여섯 살인 일레인이었다. 다른 귀족 가문의 영애들 같았다면 이 나이면 이미 사교계에 나가 자신을 꾸미거나 아니면 과시하는 일에 더욱 열성일 나이였지만, 일레인은 그러한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다른 의미에서의 여인이 갖춰야 할 소양을 쌓는 일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가사를 돌보는 일이나, 지식을 쌓는 일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하나 아무리 외모를 가꾸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단 한 가지의 경우에는 달랐다. 바로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는 이성의 앞에서만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고 가장 현명한 여인이 되고 싶어 하기 마련이었고, 이는 일레인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하여 찻물이 끓는 동안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텃밭에서 일할 때 입었던 허름한 옷이 아닌, 수수하긴 하여도 깨끗하고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옷으로 서둘러 갈아입고 잔뜩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차 시중을 들었건만 그에게 그만 자신이 가장 내보이기 싫은 부분을 내보였다는 것이 이처럼 그녀를 슬픔에 빠지게 한 것이다.
‘어느새 이 아이도 여인이 될 때가 되었구나.’
“이제 너도 어엿한 여인이 될 때가 다 되었구나.”
“어떻게 해요, 어머니…… 흑흑. 그분이…… 그분이 날 경멸하기라도 한다면 전…… 흑흑흑!”
“훗! 일레인, 넌 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잊었니? 네 아버지는 절대 그런 사람에게 저처럼 허물없이 대하진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하지만…….”
“걱정 말거라. 혼테르 남작은 절대 널 경멸하거나 얕잡아 보지 않을 사람이니까 말이야. 그보다 이렇게 계속 울게 되면 눈이 많이 부을 텐데, 그 사람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니?”
“아, 아뇨…….”
“자, 그럼 다시 씻고 오렴, 아침 준비는 이 어미 혼자 해도 되니까 말이야.”
“예…….”
하나 끝내 아침 식사 자리에 일레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폰티악 후작에게서 아침까지 대접을 받고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온 알마리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빡빡하게 짜인 일정뿐만이 아니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 말인가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손님이 와 있음을 알려 주는 아담이었다.
“예, 영주님. 체임버스 남작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체임버스 남작님이 말인가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응접실에 계십니다.”
응접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쿤테르를 만나기 위해 알마리온은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로 향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쿤테르 님.”
“하하.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내게 잘못이 있는 것이지.”
“일단 앉으시지요.”
“그러세.”
두 사람이 잠시 1년 만의 재회를 반가워하며 담소를 나누는 동안 총관인 아담이 하녀와 함께 나타나 차와 케이크를 내왔다.
“오늘 이렇게 미리 약속도 잡지 않은 채 자넬 찾아온 것은 부탁할 것이 있어서네.”
“말씀하십시오, 쿤테르 님.”
말을 꺼내는 쿤테르의 표정이 무척이나 난처해 보이는 것이 결코 쉬운 부탁을 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자네…… 혹 아직도 마법 아이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는가?”
알마리온이 왕실에 헌납한 10개의 마법 아이템을 가지고 마법 아이템 제작을 위한 연구를 해 오던 쿤테르였다. 하나 이후 마법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드워프인 단단한머리가 확보된 이후 쿤테르의 마법 아이템 연구는 한때 중단되었다.
그런 마법 아이템 연구가 다시금 시작된 것은 마법 아이템에 대한 정보를 프리모 공작으로부터 전해 들은 제국의 베르그 공작이 전쟁에 대한 지원을 명분으로 단단한머리를 제국으로 데려간 다음부터였다.
단단한머리를 데리고 제국으로 향하던 하인리히 폰 베르그 백작 일행이 로엔달이 지휘하는 왕실의 비밀결사인 ‘정령의꿈’이란 비밀결사와 게르혼족의 일부 부족에 의해 전멸하였고, 단단한머리는 로엔달과 함께 다시금 왕국의 모처로 옮겨져 왕실을 위해 마법 아이템을 제작하고 있었다.
하나 이 모든 일은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고, 지금도 이 일의 전모를 알고 있는 자는 단 세 명에 불과했다.
공식적으로는 하인리히 폰 베르그 백작 일행은 아직도 게르혼족 영역에서 실종된 상태였고 따라서 그 일행에 속해 있던 단단한머리 또한 실종됨으로써 마법 아이템의 제조 방법을 알고 있는 곳은 포넬이 유일하게 되었다.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드러난 모습이었고 비공식적으로 왕실에서는 비밀결사인 정령의꿈이란 조직에서 보호하고 있는 단단한머리를 통해 이미 마법 아이템을 제작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만들어진 마법 아이템은 사용할 수 없는 것들로 만들어지는 족족 보관될 뿐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단점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마법 아이템 제작의 능력을 자체적으로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진 것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마법 아이템은 왕실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지만, 왕국을 위해서도,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나 자신을 위해서도 이번 일을 꼭 성공하고 싶다네.”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었던 마법 물품 정도는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마법 아이템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고 싶은 것이 마법사로서의 그의 꿈이었다.
“포넬에서 이미 만든 것이긴 하지만 포로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들도 마법 아이템을 무기로만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군. 한데 이런 마법 아이템을 기록 속에만 남아 있는 마법 물품처럼 만들 수만 있다면 세상은 과거처럼 더 풍요롭게 될 수 있을 것이네.”
쿤테르는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 자신도 메르타니온 국왕이 단지 이미 확보한 마법 아이템을 활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도 없었고,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그는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을 마법을 수련하고 그렇게 수련한 마법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기만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런 쿤테르의 진심이 알마리온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제게 5개의 마법 아이템이 있습니다. 그것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보다 훨씬 많은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전부 내놓지 않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마법 아이템을 내놓을 경우 괜한 오해와 의심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야. 자네에게 남은 것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네. 만약 자네에게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면 이대로 연구가 중단될 위기 상황이었는데 말이야.”
쿤테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알마리온 또한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자네가 가지고 있는 마법 아이템에 대한 보상은 왕실에서 하게 될 것이네. 아마도 처음 자네가 그것을 왕실에 넘겼을 때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네.”
처음 마법 아이템을 로엔달을 통해 왕실에 넘겼을 때, 왕실은 알마리온에게 테일러 상단의 소유권과 게르혼족과 교역할 수 있는 교역권을 주었다.
한데 이보다 더한 대가를 왕실에서 지불하겠다고 약속하는 쿤테르였지만 알마리온은 그러한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한데 그것을 넘겨 드리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마법 아이템을 영지에 보관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영지에? 흠…… 뭐, 그 정도야 기다려야겠지. 어쩌겠나. 하나 가능하면 좀 서둘러 주었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곧 사람을 영지로 보내 그것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하면 난 이 사실을 도르첸 공작 전하께 보고토록 하겠네.”
아마도 도르첸 공작이 마법 아이템에 관련된 일을 주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한데 자네 이번에 크게 한턱을 내야 할 것 같더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제국과 우리 왕국의 협력을 위해 제공하기로 한 종이 제조법을 두고 제국 측에서 자네에게 작위를 내릴 것이라 하더군.”
오랜 동안 교류를 해 오던 카빌란 제국과 로엔 왕국이었기에 로엔 왕국의 귀족들 중에 일부는 제국 황실로부터 작위를 받은 이들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제국의 작위는 단승 작위로 1대代에 한하는 작위로 상징적인 의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아…… 그렇습니까?”
“훗! 이번에 자네에게 내려질 제국의 작위는 단승 작위가 아니라고 하더군.”
제국에서 작위를 내린다는 말에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이자 그에게 내려질 작위 또한 과거의 예처럼 상징적인 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승 작위라서 그러한 것인 줄 알고 웃으면서 알마리온에게 내려질 작위가 그러한 단승 작위가 아님을 넌지시 알려 주었다.
하나 이러한 쿤테르의 짐작은 틀린 것이었다. 알마리온이 종이 제작 방법을 넘겨주기로 한 것은 순전히 왕국의 안녕安寧을 위해서였다.
이제 막 전란이 끝난 상황에서 게르혼족이 통합되고 있다는 것은 로엔 왕국의 입장에서도 매우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점이 그로 하여금 종이 제조 방법을 내놓게 만들었던 것이지 무엇인가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다른 이에게 있어서 제국에서 하사하는 작위는 명예를 상징하는 것일지 몰라도 최소한 알마리온에게 있어서 제국의 작위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니 이를 오해할 만도 하였다.
“……?”
“훗! 나도 아는 것은 이 정도뿐이네.”
알마리온이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쿤테르가 더 이상은 자신도 모른다는 듯이 딱 잡아떼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또다시 자네를 이렇게 편히 대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비록 단승 작위라 하더라도 제국에서 작위를 받게 되면 왕국에서는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작위를 내리는 것이 관행이라네.”
똑같은 작위라 하더라도 제국과 왕국의 작위는 나라의 규모처럼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가령 제국의 남작은 왕국의 남작보다 한 단계 우위에 있다는 것이 그동안의 외교적인 관례였다.
이러한 관례에 따라 제국에서 작위를 받게 되면 왕국에서는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왕국의 작위를 내렸다.
따라서 알마리온이 제국으로부터 남작이란 작위를 받아도 왕국의 작위로는 자작의 작위를 받게 되는 것이니 작위의 서열상 1년 전처럼 또다시 자신보다 높은 작위를 갖게 될 것임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물론 이러한 그의 말은 농담일 뿐이었다. 1년 전 벌어진 일로 인해 강등되기 전에도 알마리온은 자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고 그 당시에도 쿤테르는 알마리온을 마치 조카처럼 대하고 있었다.
“자! 그럼 자네도 바쁠 테니 난 이만 일어나 보겠네.”
“그대군요?”
여인처럼 뽀얀 피부에 단아한 인상을 지닌 것이 여장을 하여 놓아도 어울릴 것 같아 보이는 피어스 3황자였다.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에 학자풍의 인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알마리온은 피어스 폰 오스릭 황자에게서 느껴지는 어두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자…….’
특히 그의 눈빛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가학적인 기운은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까지도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게 하는, 그러한 파괴적인 기운이었다.
피어스 황자에게서 파멸의 기운을 느낀 알마리온의 눈길이 절로 그의 곁에 힘겹게 서 있는 카산느 공주에게로 향했다.
인형. 지금의 그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형이었다. 그런 카산느의 모습을 보게 되자 연민이 절로 느껴졌다.
“이렇게 만나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이미 들으셨겠지만 황제 폐하께서는 경이 제국에 보여 준 충성에 대해 감명하였고, 경의 그러한 충성에 대한 응당應當의 보상을 하기로 결정하였답니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입궁을 하게 되자 그를 맞이해 준 이는 재상인 프리모 공작이었다. 그로부터 알마리온은 제국 황실에서 작위를 내릴 것과, 작위와 함께 영지도 봉지할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이틀 후 이곳에서 제국 황제 폐하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경에게 작위 수여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자! 그럼 오찬을 하러 가도록 하지요.”
오늘의 만남은 오찬까지 함께하는 약속이었는데 이 자리에는 황자와 이제 곧 약혼식을 올리게 될 카산느 공주 그리고 황자를 수행해 온 수행원들만의 자리로 이를테면 제국의 귀족들만을 위한 자리였다.
로엔 왕국의 왕궁에서, 그것도 왕국의 다른 왕실 가족들조차도 초대받지 못한, 제국의 귀족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이러한 자리가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왕국의 자존심을 상케 하는 일이라는 비난을 하였지만, 동시에 그러한 자리에 끼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알마리온은 예상 밖의 제안, 그것도 카산느 공주에게는 최악이 될 수도 있는 그러한 제안을 받게 된다.
“어떻습니까? 이번에 공주를 호위하는 호위 책임자를 경이 해 주었으면 하는데 말입니다.”
“…….”
피어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곁에 앉아 있던 카산느는 순간 너무 놀라 쥐고 있던 포크를 바닥에 떨어뜨릴 정도였다.
“이런…… 뭣들 하는가? 어서 공주께 새로운 포크를 내 드리지 않고?”
부드럽게 말하고 있지만 피어스의 입가는 살짝 비틀려져 있었다.
알마리온과 공주 사이에 있었던 염문을 들어 알고 있는 피어스가 두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갑작스럽게 한 제안이었건만 어린 카산느 공주는 이와 같은 아주 간단한 자극에도 그녀가 분명하게 반응을 하자 피어스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가학성이 더욱 강하게 일어났다.
‘후훗! 재미난 장난감이 생겼군. 앞으로 이 계집을 가지고 놀면 한동안 심심하지 않겠군. 후후후.’
이러한 피어스의 내심을 알마리온은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하나 그의 이러한 즐거움은 알마리온의 반응으로 인해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담담한, 아니 담담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중책을 맡겨 준 것에 대해 감사함만이 보이는 알마리온의 반응 때문이었다.
“소관에게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겨 주신다니 참으로 황공하옵니다, 황자 전하.”
이처럼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알마리온의 반응에 흥이 반감한 피어스는 더 이상 이런 자리를 이끌어 가고 싶은 생각마저 싹 가셔 버렸는지 짜증 섞인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 일정이 있어서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 같군요.”
물론 제국의 황자가 이처럼 직접 왕국을 방문한 경우가 처음이었기에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하기는 하였지만 최소한 지금 이 시간만큼은 그러한 일정이 잡혀 있지 않았다.
그렇게 예정보다 일찍 오찬이 끝난 후 알마리온을 찾는 이가 있었다.
“하하. 칸 남작,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혼테르 남작님.”
제1의용군에서 군단장과 부군단장으로 호흡을 맞췄던 두 사람의 친분은 각별했다. 그동안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기념할 만한 일들이 있으면 서로 선물도 전하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되시겠습니까?”
왕국 내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된 알마리온이었기에 사전에 미리 약속을 잡지 않으면 좀처럼 만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칸 남작이라면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지요.”
“하하. 감사합니다, 혼테르 남작님. 그럼 가시지요. 제게 좋은 차가 좀 들어온 것이 있으니 그것을 대접하겠습니다.”
술을 잘 마시지 않고, 차를 주로 마시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칸이 최근 아주 어렵게 구한 차를 대접하겠다며 그를 유혹하였다.
“하하. 그것 좋지요.”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남작님께서는 남작님의 부모님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갑작스러운 칸의 말에 알마리온은 순간 온몸이 굳어져 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목소리나 눈빛 또한 단번에 굳어져 버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쯤 남작님께서도 자신이 하프 휴먼이라는 것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으음…….”
칸의 말처럼 알마리온도 자신이 하프 휴먼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체적으로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보다 더 희고 깨끗한 피부라든지, 아니면 쉽게 볼 수 없는 가늘면서도 더욱 색이 분명한 은발銀髮.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능력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확연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신체에 대한 비밀 또한 자신이 순수한 인간이 아닌, 인간과 엘프의 혼혈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해 주었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 중 상급 정령술사가 된 이후, 그리고 상급 주술사가 된 이후 확연하게 알 수 있게 된 것 하나가 있었다.
바로 육체의 노화가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느려졌다는 것이다.
모든 형태의 인류 중 가장 오래 사는 종족은 엘프들이었다. 엘프들의 평균수명은 인간에 비하면 최소 여섯 배, 최대 일곱 배나 된다.
이처럼 긴 수명을 가지고 있는 엘프는 그만큼 노화가 느리게 진행되는데, 하프 엘프나 하프 휴먼이나 이러한 엘프의 특성을 일정 부분 공유하게 된다.
우리가 보통 하프 엘프나 하프 휴먼이라 구분하는 것은 외형적인 특성에 따른 분류였다.
순수 엘프보다는 훨씬 인간에 가까운 외형이지만 엘프의 특징인 뾰족하고 긴 귀나 은발, 가는 골격 같은 것은 인간보다 엘프에 가까웠기에 이들을 하프 엘프라 부르고, 외형적으로는 엘프의 특성이 거의 보이지 않는, 하지만 엘프의 유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하프 휴먼이라 구분하게 된다.
“그것을 어떻게 남작이 알고 있는 것인지 내게 설명을 해 주어야 할 것 같군요.”
단지 보이는 정도만으로 구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약 그의 외형만으로 그러한 짐작을 하였다면 처음부터 얼굴도, 이름도 전혀 모르는 부모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씀드리자면 남작님께서는 하프 휴먼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
“남작님의 모계는 분명 순수 엘프가 맞지만, 남작님의 부계는 누대를 거치면서 순수성이 많이 떨어지긴 하였어도 이미 엘프의 피를 이어 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칸의 말에 알마리온은 다시 한 번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이전에 받은 충격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그, 그대가 어떻게! 말해 보시오! 그대가 어떻게 나도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지! 만약 그대가 어떻게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내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면…… 설사 그대가 아무리 내게 귀한 존재라 하더라도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오!”
“으음…….”
흥분한 알마리온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칸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이 정도일 줄이야…… 이 정도면 이미 마스터의 능력을 상회하시는 수준이다!’
단지 온몸으로 느껴지는 기운일 뿐이었지만 칸은 알마리온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그가 이미 로엔달 백작의 능력을 상회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알마리온의 상상을 초월하는 성장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불가사의함 그 자체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하급 정령술사에서 중급 정령술사로 넘어가는 것도 평생 노력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관문을 뚫고 중급 정령술사가 되었다 하더라도 다시 상급 정령술사가 된다는 것은 신의 선택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경지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중급 정령사가 된 지 불과 얼마 후 다시금 상급 정령술사로 성장한 알마리온은 확실히 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라 해도 좋았다.
아니, 남들의 눈에 보이기에는 그러할지 몰라도 알마리온은 매 단계를 거칠 때마다 죽음의 기로에 서 있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고, 그러한 절박함 속에서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한 단계, 그리고 또 한 단계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푸른하늘로부터 선택을 받음으로써 그에게 전해진 선택받은 자의 신물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주술의 힘과, 그 안에 녹아 있는 역대 주술사들의 지혜. 로엔달로부터 받게 된 정령의 고향이라는 것에 봉인되어 있는 최상급 정령들과 그 기운을 활용할 수 있는 마나 수련법을 가장한 주술, 여기에 그의 곁에 있는 리처드나 하인리히와 같은 능력자들과의 실전보다 더 실전 같은 대련이 그로 하여금 이처럼 빠른 성장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원동력들 중 한 부분이었다.
“말해 보시오! 그대가 어떻게 나도 전혀 모르는 그러한 일들을 알고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숨쉬기조차 힘들어하는 칸의 모습을 보며 흥분을 가라앉히자 그제야 잠시 막혔던 숨을 크게 내쉬는 칸이었다.
“22년 전 전대 체임버스 남작께서 한 명의 엘프 여인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칸은 그동안 자신이 조사했던 내용에 대해 알마리온에게 사실대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전대 체임버스 남작께서는 그 엘프 여인을 지금의 국왕 폐하께 진상하였고, 당시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은밀히 노력해 오시던 폐하께서는 자신의 친구이자 최측근이셨던…… 그러니까…….”
아무리 작심을 하고 알마리온에게 그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하였지만 자신의 행동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고민되었는지 잠시 말을 더듬으며 알마리온의 눈치를 살폈다.
하나 그의 이러한 고민을 헛되게 만드는 말이 알마리온에게서 나왔다.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이가 혹 로엔달 백작 각하이시오?”
“그렇습니다.”
“역시…….”
“역시라고 하셨습니까? 하면 남작님께서는 이미 그분이 남작님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까?”
“처음 이것들을 내게 건네주셨을 때, 그분은 내게 정령술사라는 존재는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소. 당시로써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얼마 후부터 그분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확인한 이후부터 그분의 말씀처럼 조심을 하였소. 하나…….”
하나 그는 로엔달의 말을 온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큼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애초에 왜 그분이 내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느냐 하는 것이오. 그분과 그대, 그리고 지금의 근위군 지휘부는 물론, 서전트나 병사 들 중 일부가 정령술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하나 그들 중 그 누구도 그분에게 내가 받았던 것과 같은 호의를 받진 못하였을 것이오.”
“으음…….”
“나 또한 그대나, 다른 정령술사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내게 지나친 호의를 베푼 것에는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니 당연히 늘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오.”
“그러셨군요.”
“그럼 이제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분이…….”
이미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은 분명하게 확인받고 싶어 했다. 마치 그래야만 진실로 로엔달과 자신의 관계가 공식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바로 남작님의 친부가 되십니다.”
“으음…… 하면 그분도……?”
“알고 계십니다. 아니, 마스터께서는 남작님을 처음 보았던 그때부터 남작님께서 당신의 혈육임을 알아보셨습니다.”
“어떻게……?”
“그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남작님께서는 모친 되시는 분을 그대로 닮으셨다고 말입니다.”
“으음…….”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 오는 한마디. 그것은 바로 ‘어머니’라는 말이었다.
알마리온 또한 그러했다. 아니, 오히려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자란 그였기에 어머니란 단어는 더욱 남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말이었다.
“혹시……?”
“아쉽지만 백작 부인에 대한 소식은…….”
알마리온이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그동안 백방으로 알아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시 이름조차 알 수 없었던 엘프 여인은 그 행방이 묘연했다.
“하면 이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말해 주셔야 할 차례인 것 같군요.”
“그건…… 마스터께서 더 이상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
알마리온이 자신의 아들임을 확인한 이후, 로엔달은 하루도, 아니 잠시도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추질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의 대부분은 후회와 미안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남작님께서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마스터께서는 남작님이 당신의 아들임을 아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약해지고 계십니다.”
“으음…….”
‘그래서였던가?’
왕도에 입성할 때마다 그래도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준 인물이었기에 로엔달과 약속을 잡으려 하였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면서 자신을 피하였던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전에는 드시지 않던 술까지 폭음을 하실 정도입니다. 그로 인해 마스터께서는 직무까지 제대로 살피지 못하시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어 폐하를 모심에 있어서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실수를 하시기도 합니다.”
메르타니온 국왕에게 있어서 근위군 사령관인 로엔달은 단순히 무엇이든 터놓고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이거나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충신이란 의미 이상의 존재였다.
그는 왕권 강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존재로 그가 흔들린다는 것은 곧 왕권 강화를 추구하는 메르타니온의 계획 자체가 흔들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이러한 이유가 로엔달의 거듭된 경고와 명령,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동안 쌓아 온 신뢰까지 잃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에게 그의 출생의 비밀을 말하게 된 이유는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비롯한 모든 정령의꿈에 속한 이들의 정신적 지주인 로엔달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이었다.
“…….”
할 말을 다 했음인지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얼마 후 칸은 자리를 비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