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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를 위한 거래 (41/70)

거래를 위한 거래

“지금 그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

“그러니까 백작의 말은 혼테르 남작이 만든 종이의 제조법을 공유하자는 것입니까, 가드너 백작?”

“그렇사옵니다. 왕세자 전하.”

참으로 어이없고도 뻔뻔한 요구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제국군은 모두 제국으로 귀환하기 위한 장도에 올라 있었지만 이후 몇 가지 처리할 일이 있었기에 제국군 사령관인 에그먼트 폰 가드너 백작은 여전히 로엔에 남아 있었다.

그렇게 왕국에 남아 있던 가드너는 얼마 전 테일러 상단이 세상에 내놓은 종이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또한 종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가드너는 여러 경로를 이용하여 종이 제작의 비법을 알아내려 하였다. 아니,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종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아는 모든 이들이 은밀히 종이 제작의 비법을 알아내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그 누구도 이를 알아내는 데 성공을 한 이들이 없었다.

알마리온은 특별히 종이 제작법을 비밀에 부친 일이 없었다. 이미 그의 영지 내에는 국경무역을 위해 여러 상단들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왕국의 거의 모든 영지와 상단에서 파견된 자들이 영지를 휘젓고 다니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비법을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처럼 특별히 경계를 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이 비법을 발설하지 않은 것은 북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특성에 기인하였다.

북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행동이나 말투가 무척이나 거칠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들이 나누는 평범한 인사조차도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본다면 마치 말다툼을 하거나 몸싸움을 하는 사람들로 보일 정도였다.

아울러 이들은 친해지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자들이었는데 워낙 척박한 환경에서 곤궁하게 살다 보니 자칫 호의를 베풀었다가 큰일을 당하는 일들이 많았다.

지금은 로엔의 영토가 되었지만 한때 로엔의 중북부와 동북부 지역은 주인 없는 땅으로 오랫동안 방치되었고, 이 지역들은 그야말로 무법천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남을 해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고, 이러한 시간이 오랫동안 지속되자 자연 사람들의 성품이 이처럼 타인을 잘 믿지 않게 변해 버린 것이다.

하나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이처럼 좋지 않은 면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누군가에게 경계를 풀고 마음의 문을 연 이후에는 그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설사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든 이가 자신을 해하거나 속이려 했다 해도 이들은 끝까지 자신이 준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절대적인 신뢰. 그것만큼은 이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따를 자가 없었다.

알마리온이 영주가 되어 혼테르에 부임한 이후, 이들은 자신들에게 그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해 준, 진심으로 자신들을 위해 주는 영주를 위해 마음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알마리온이 특별히 종이 제조의 방법을 비밀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모든 방법, 심지어는 종이를 제작하는 일을 하고 있는 자를 납치하여 온갖 고문을 가해도 보았지만 그 방법을 발설한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던 이유 또한 바로 이러한 북방 지역 사람 특유의 성격 때문이었다.

이처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종이의 제조 방법을 알려 하였지만 실패하자 이를 탐내는 이들은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이들은 합작을 제안하였고, 어떤 이들은 지금 가드너가 하고 있는 것처럼 부당한 압력을 넣어 알마리온으로 하여금 종이 제조의 방법을 털어놓게 만들려고 하였다.

‘그는 참으로 여러 번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구나.’

왕국의 일곱 번째 익스퍼트로 인정받았을 때부터 알마리온은 본인이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익스퍼트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데 그는 노예 출신이었기에 더더욱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전장에서 로엔의 승리를 이끌어 내는 데 기인한 몇몇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일약 영웅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공주와의 염문도 그렇고, 또한 지난해에 소렌토의 빈민가에서 그가 벌인 일로 작위를 강등당한 일도 세인들의 이목을 또 한 번 그에게 집중시켰다.

거기에 제국과의 혼담을 위해 그를 극도로 꺼리는 왕비와 이에 동조한 자신에 의해 왕실에서 주관하는 모든 공식 행사에 초대받지 못하는 인사가 된 것 또한 그러했고, 이번에는 종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서는 다시 한 번 세상이 모두 그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한데 이처럼 알마리온이 세상의 주목을 받을 때마다 왕실은 그로 인해 어려운 선택을 내려야만 하였다.

“그건 본인에게 이야기할 내용은 아님을 백작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국왕이라 하더라도 귀족의 소유물이나 권리를 정당한 이유 없이 침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찌 그것을 모르겠사옵니까, 전하.”

“하면 그런 말을 본인에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소관은 제국의 베르그 공작 가문의 사람이기 이전에 제국 황실의 사람이기도 하옵니다.”

제국군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제국의 베르그 공작 가문의 영지군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베르그 공작 가문의 영지군을 지휘하였던 가드너 백작은 바로 베르그 공작의 사위이기도 하였지만 그 이전에 제국의 현 황제의 6촌 조카였다.

“…….”

“소관 또한 전하의 막냇동생분과 제국의 황자 전하의 혼담이 성사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사옵니다.”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가드너는 거래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국 황실에서는 귀국과의 혼담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제국 황실이 이처럼 로엔과의 혼담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은 최근 게르혼족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통합 움직임 때문이었다.

게르혼족이나, 제국 북쪽의 대초원에 살아가고 있는 물란족은 제국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들이었다.

이들이 통합되었을 때, 제국은 이들에 의해 침략을 당했고, 결국 이들이 세운 새로운 제국의 일부가 되어야만 했다.

제국은 지금 그러한 위험에 점차 직면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게르혼족을 통합해 나가고 있는 검은발 부족의 대족장인 용맹한영혼이란 자로 인해서였다.

지금의 제국은 저물어 가는 해나 다름없었다. 그런 제국의 입장에서 국경 지역에서 강력한 적이 만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여 제국에서는 빠르게 세력을 넓혀 가고 있는 용맹한영혼에게 제로니모 폰 블랙이라는 제국식 이름과 대공이라는 작위를 내려 그로 하여금 제국 동북방의 군주로 삼았다.

물론 이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제국에서는 블랙 대공의 딸과 로엔 왕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황자와의 혼담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기에 로엔이 추진하고 있는 혼담이 달갑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이 귀국이 추진하고 있는 혼담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소관의 장인어른, 그러니까 베르그 공작께서 반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르그 공작께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장인어른께서 귀국의 프리모 공작과 친척 관계여서 그런지 귀국과의 관계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음은 전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장인어른께서는 설사 황실과 블랙 대공의 딸이 혼인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들을 믿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계십니다.”

“결국 제국에는 아국이 도움이 될 것이란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비록 지금은 전란을 겪은 뒤라 큰 힘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들 또한 지금 당장 제국을 넘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시간은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흠…….”

“그리고 게르혼족이 통합되면 그건 비단 본 제국의 위협만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가드너의 말처럼 게르혼족이 통합되면 이는 비단 제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관의 입장에서 이러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부끄럽긴 하지만 황실은 지금 재정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 있고 게르혼족을 막을 정도의 힘을 키우고 유지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하나…….”

“물론 귀족의 권리는 아무리 왕실이라 하여도 함부로 침해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전하께 종이 제작법을 공유하자고 하는 것은 그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남작이란 자가 귀국의 국왕 폐하의 사람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

“또한 공주 전하와의 염문 또한 단지 남들 이야기를 하기를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 부풀려지고 또 부풀려진 것임을 소관 또한 잘 알고 있사옵니다. 더욱이 그자가 부당한…….”

“…….”

가드너의 말에 살짝 표정이 굳어지는 블리스였다. 그도 가드너 백작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러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소관은 그저…….”

“아닙니다. 혼테르 남작에게 그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어쨌든 본인이 한 일이니 말입니다.”

“흠…….”

“괜찮으니 계속 말씀하십시오.”

“예, 전하.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혼테르 남작이란 자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귀국의 국왕 폐하에 대한 충성심 때문일 것이옵니다.”

“아마도……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충분히 반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자신의 영지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그가 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 추측들이 난무했지만 가장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그가 주군인 국왕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에 불명예를 감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모든 일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군요.”

블리스는 가드너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제국에서는 최근 주변의 다른 게르혼족들을 통합하며 거대한 세를 쌓아 가고 있는 용맹한영혼이란 자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에게 제로니모 폰 블랙이라는 이름과 함께 대공이라는 작위를 내렸다.

그도 모자라 제국의 황자와 대공의 여식의 혼사를 추진함으로써 제국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제국의 안전을 위한 임시방편은 되어도 장기적인 대책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지속적인 대비책으로 로엔을 끌어들이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방법으로는 제국의 황실과 로엔 왕실의 결합만큼 좋은 방법은 없었다.

하나 이 혼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이후 제국과 로엔 왕국이 게르혼족을 상대하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필요했다. 종이는 바로 이러한 모든 것을 가능케 해 주는 궁극의 해결책인 셈이었다.

“그가 동의만 한다면 소관은 당장 제국으로 달려가 황제 폐하께 황자 전하와 공주와의 혼담은 물론, 그에게도 충분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도록 상신할 것이옵니다.”

‘확실히 백작의 제안은 모두에게 최선일 수 있긴 하지만…….’

문제는, 알마리온이 이에 동의를 하지 않으면 성사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 확답을 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을 백작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아무래도 서두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황실이 대공과의 혼사를 결정하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으니 말이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여 네가 혼테르 남작에게 좀 다녀와야 할 것 같구나.”

블리스의 말에 막스밀리언은 내심 이번 처사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사사로운 감정을 받아 줄 때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아우의 권리를 공짜로, 아니 아주 공짜는 아니군요. 몬스터들만 우글거리는, 그 누구도 살 수 없는 몬스터 랜드와 그가 대족장인 메코이족 그리고 얄란족을 그의 영지민으로 주고 종이 제작의 비법을 달라 이것이군요? 그렇습니까, 형님? 아! 한 가지 더 있군요. 이번 일이 잘 성사되면 제국에서도 그에게 작위 하나 정도는 던져 줄 것이고, 그러면 왕국에서도 그에게 적당한 작위를 더해 주는 것. 그것도 있군요.”

말을 하다 보니 더욱 화가 치미는지 잔뜩 언성이 높아진 막스밀리언이었다.

“그렇단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우리 왕실에서 아우에게 한 행동이 어떤 것인지 모르십니까? 게다가 아바마마, 아니 폐하께서는 또 어떠셨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그가 가진 것마저 빼앗으려 하시는 것입니까?”

“말이 심하구나.”

“하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

동생인 막스밀리언의 질책에 블리스는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 막스, 나도 내가 어떤 실수를 하였는지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기도 하단 것을 너 또한 잘 알지 않느냐?”

비록 화를 내고 있기는 하지만 막스밀리언 또한 블리스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정합니다.”

“너 또한 그렇게 인정을 해 주니 고맙구나.”

“인정은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

동생인 막스밀리언과 알마리온이 얼마나 친한 사이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만큼 왕실이 그를 불명예스럽게 하였을 때 가장 분노했던 이 또한 바로 막스밀리언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 아바마마와 나 모두 그에게 큰 빚을 졌음을 인정하고 있단다.”

“진심이십니까?”

“물론이다.”

현재의 국왕과 다음 대의 국왕이 빚을 졌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앞으로 알마리온과 관계된 일이 생겼을 때 그에게 유리한 조치가 취해질 것임을 뜻하였다.

“알겠습니다. 정히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나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그리고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그에게 전하고 싶은 내 솔직한 심정을 담은 서신이다. 이것 또한 그에게 전해 주면 고맙겠구나.”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오랜만이구나.”

영지군과 메코이족 전사들을 이끌고 몬스터 토벌에 한창이던 알마리온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통보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막스밀리언과 레드로의 모습에 알마리온은 꽤나 놀랐다.

“아니? 두 분이 어떻게 여기까지…….”

“좋은 시절은 너 혼자 보내고 있었군?”

“하하…….”

“전장을 누비는 것만으로도 모자랐냐?”

“훗! 레드, 네 이야긴 많이 들었다.”

알마리온과 레드로는 이번 전쟁에서 왕국이 거둔 최대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왕국의 일곱, 여덟 번째 익스퍼트인 이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대조되는 입장이었다.

하나 이들 두 사람이 극명하게 대조되는 부분은 알마리온이 약자와 빈자貧者 들에게 가능성과 희망을 전해 준 그러한 존재였다면 레드로는 미래를 꿈꾸는 젊은 귀족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었다.

“나도 네 이야기 들었다. 또 엄청난 짓을 벌였더구나?”

“하하…….”

알마리온이 빈민촌에서 한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일단 들어가시지요.”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막사로 두 사람을 안내한 알마리온이 직접 두 사람을 접대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막스밀리언이 혀를 찼다.

“쯧! 여전하구나.”

귀족이라면 전장에 나아갈 때에도 시중을 들 시종들을 함께 대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나 태생이 그러했기에 알마리온은 이처럼 다른 이가 자신의 시중을 드는 것을 무척이나 불편해했기에 성에서도 자신이 직접 할 수 있는 일들은 시중을 드는 아렌이나 노만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하였다.

“원 형님도……. 한데 정말로 두 분 모두 바쁘실 텐데 예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왜? 우리가 와서 불편한가?”

“하하. 너무 반가워서 그러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그런지 알마리온의 얼굴에도 오랜만에 편한 웃음이 지어졌다.

“한데 다른 사람들은?”

“아, 다들 몬스터 토벌을 위해 흩어져서 병력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쳇! 그럼 모처럼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긴 글렀군.”

“그러게 말입니다.”

“술이라면 저와 함께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고지식한 너와 무슨 맛으로? 모처럼 아내와 아이들에게서 벗어났는데, 쩝…….”

“제게 좋은 포도주병이 있습니다.”

“정말인가?”

“하하. 그렇다네.”

마법사들은 대부분 독특한 것을 수집하는 데 집착하는 수집벽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알마리온이 대결하였던 필립 또한 그러했는데 그는 평소에도 유난히 술을 즐기는 자였기에 자신의 부와 지위를 이용하여 세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술들을 꽤나 많이 수집하였다.

그렇게 어렵게 수집한 술들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너무나 아까워 맛조차 제대로 보지 않고 보관하였던 것들이 이제는 알마리온에게 전해졌다.

평소에 그다지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닌지라 특별히 기념할 일이 아니라면 필립이 평생 공을 들여 수집하였던 술들을 꺼내 마시는 일이 없었기에 대부분 그대로 가지고만 다닐 뿐이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막사의 반을 가르고 있는 커튼을 젖히고 들어간 알마리온이 마법 공간에서 카빌란 제국에서도 최고의 맛과 품질을 자랑하는 포도주 명산지인 에비탄산産 중에서도 최고의 포도주로 알려진 대룩력 3511년 산 에비탄 포도주 두 병과 잔을 꺼내 내왔다.

“아니! 이것은…….”

“호! 이런 귀한 것을 어떻게 자네가?”

두 사람 모두 왕국 최고의 귀족들이었으니 알마리온이 꺼내 온 두 병의 포도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이내 알아보고는 크게 놀랐다.

실상 알마리온이 꺼내 온 대륙력 3511년 산 에비탄 포도주는 구하고 싶다고 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모든 에비탄산 포도주 중에서도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한 병에 무려 500골드가 넘는 귀한 것이었다.

한데 그런 귀한 것을 한 병도 아니고 한꺼번에 두 병이나 내왔으니 아무리 왕국 최고의 귀족인 막스밀리언이나 레드로라 하여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실상 막스밀리언의 경우에도 3511년 산 에비탄 포도주는 지금까지 단 한 번 맛볼 수 있었을 뿐이고 레드로의 경우에는 단지 그 소문만 익히 들었을 뿐, 아직까지 그 맛을 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귀한 술이었다.

그런 귀한 포도주를 필립은 무려 열 병이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 또한 이를 구하기 위해 가문 대대로 내려온 마법서 다섯 권을 필사해 주었다는 사실을 알마리온이 알고 있었다면 이처럼 아무 생각 없이 내놓지는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하다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지금 믿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쳇! 나도 폐하께 말씀드려서 북쪽에 영지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돌아가실 때 한 병씩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뭐라고? 하면 이 귀한 술이 또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안 되겠군. 이번에 돌아가면 정말로 폐하께 간청을 드려 봐야겠어.”

“하하하.”

“자! 자! 일단 한 잔 따라 보라고. 어서! 어서!”

“예, 형님.”

뽕!

단지 병마개를 열었을 뿐인데도 향긋하면서도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향기가 막사 안에 은은히 퍼져 나갔고 그 향기에 막스밀리언과 레드로는 절로 탄성을 내질렀다.

“아! 역시…….”

“오오!”

“드시지요.”

“그러지.”

건배를 하는 것조차 잊어버린 두 사람은 서둘러, 하지만 조심스럽게 잔을 가져가더니 다시 한 번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잔을 입에 가져갔다.

“아!”

“음…….”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그렇게 첫 잔을 모두 비울 때까지 향과 맛을 음미하며 감탄하는 것을 반복하던 두 사람의 잔이 비워지고 알마리온이 다시금 이들의 잔에 술을 따라 줄 때까지 이들 세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날은 그렇게 밤이 늦도록 알마리온이 꺼낸 술을 음미하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막스밀리언과 레드로가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듣게 된 것은 다음 날이었다.

“네게는 정말 미안하구나.”

막스밀리언은 진심으로 알마리온에게 미안해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다시 한 번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닙니다, 형님. 그 정도는 제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네겐 그저 미안하고 또 고맙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구나.”

“형님께서 절 이렇게 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전 이미 충분히 보상받고 있는 것입니다.”

진심이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출신 성분으로 인해 알마리온은 많은 이들이 자신을 경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형님께서도, 그리고 레드 자네도 종이 제작을 함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뭐라고? 자네 지금 뭐라 했나?”

알마리온의 말에 막스밀리언이나 레드로 모두 크게 놀랐다. 하긴 그럴 만도 한 것이 종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두 사람 모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 놀라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비정상일 것이다.

“난 싫다.”

“형님?”

“훗! 나도 됐네.”

“자네까지…….”

왕실에서 매년 품위 유지를 위해 지급되는 연금 이외의 수입이 없는 막스밀리언도, 그리고 그보다는 상황이 좋긴 하여도 역시 가난한 영지를 가지고 있어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레드로도 알마리온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두 사람도 사람인지라 알마리온의 제안을 받고는 순간 욕심이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 두 사람 모두 이내 똑같은 생각을 하였다. 호의는 호의로만 받아들일 때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정히 그러시다면 이렇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자신의 호의를 극구 사양하는 두 사람에게 알마리온은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형님과 자네가 상단을 만들면 그 상단에 종이를 공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왕실에서 지급되는 연금만으로 생활하는 막스밀리언이나, 가난한 영지를 가지고 있는 레드로 모두 상단같이 많은 자금을 필요로 하는 일은 엄두조차 못 내고 있었다.

막스밀리언의 경우에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유일한 재산이었던 저택이 전란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는데 이를 다시 재건하는 데 필요한 자금조차 마련할 길이 없어 여전히 궁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막스밀리언의 둘째 아들인 피요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알마리온이 값비싼 보석을 선물했겠는가.

레드로 또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그의 영지는 왕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영지에 속하였기에 애초에 기대할 것도 없었고, 분가를 하면서도 아버지인 더글러스 후작과는 완전히 인연을 끊은 때문에 그로부터 동화銅貨 한 닢 지원받지 못한 채, 외가로부터 근근이 필요한 돈을 가져다 쓰고 있지만 그의 외가도 재물과는 담을 쌓은 가문이었으니 그의 생활도 궁핍하기는 거기서 거기였다.

“하지만 자네가 소유한 상단도 있지 않은가?”

“그렇긴 하지. 하지만 모든 것을 너무 혼자 독점하면 오히려 탈이 생길 것이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들로 하여금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하는 말임을.

“게다가 테일러 상단은 워낙 바빠서 말이야.”

어깨를 으쓱거리며 건방을 떠는 알마리온의 모습에 잠시 어이없어하던 막스밀리언과 레드로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흥! 그렇단 말이지?”

“쩝! 리처드 형님이랑 붙어 다니더니 이 친구가 그 형님의 못된 것만 배우나 봅니다.”

“하하하.”

“하하하하.”

“고맙구나. 지난번에도 큰 도움을 받았는데 또다시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어서 말이다.”

“그런 말씀 하시면 제가 오히려 서운합니다, 형님.”

“나도 고맙네. 한데 역시 부자 친구를 두니 좋긴 좋군. 이렇게 덕도 보고 말이야.”

“하하하. 도움이 된다니 나야말로 고마운 일이지.”

“한데 이왕 신세지는 것 말이야, 또 다른 술은 없나?”

“왜 없겠나. 잠시 기다리게. 곧 내올 테니 말이야.”

“하하. 좋았어! 형님, 오늘도 코가 삐뚤어지게 한번 마셔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하하. 좋지! 아주 좋아! 하하하!”

피만큼이나 짙은 우정이 깊어 가고 있었다.

“하면 그동안 자네가 알아본 바로는 그 아이의 실종과 로엔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인가?”

제국으로 서둘러 귀환한 가드너는 자신의 장인이자 제국 최고의 권력자인 베르그 공작과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장인어른. 그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알아보았지만 로엔의 왕실이 개입하였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드너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로엔에 남아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어느덧 실종된 지 1년이 넘은 처남인 하인리히 폰 베르그 백작의 행방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베르그 공작은 아들의 실종에 로엔의 왕실이 개입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처럼 로엔 왕실을 의심하게 된 것은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가치 때문이었다.

마법 아이템의 가치라는 것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고, 로엔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마법 아이템만 가지고 있으면 당장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물론 세상을 호령할 수도 있는, 말 그대로 마법과도 같은 일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개입으로 인해 이러한 꿈이 무산되어 버렸으니 충분히 아들인 하인리히를 해코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하나 지금까지 그 어떤 의심스러운 점도 찾을 수가 없었다.

“흐음…… 한데 자네가 이처럼 황급히 귀국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장인어른.”

가드너는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베르그 공작에게 건네주었다.

“이, 이것은!”

“그렇습니다. 장인어른께서 생각하시는 바로 그것, 종이라는 것입니다.”

“역시 로엔 놈들이!”

가드너가 건네준 종이를 건네받은 베르그 공작이 역시 아들인 하인리히의 실종에 로엔이 개입한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라도 잡았다는 듯이 흥분하였다.

“잠시 진정하시고 제 이야길 들어 주십시오, 장인어른.”

“진정?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는가!”

“장인어른, 저 또한 장인어른과 같은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처남이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로엔 국왕의 측근들은 모두 전장에 있었음을 몇 번이고 확인하였습니다. 특히 그 종이를 만든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남작의 경우에는 당시 최전선에서 군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인어른께서 처남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하고 계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처남이 장차 제국과 공작가를 훌륭히 이끌어 나갈 뛰어난 인재였기에 작금의 상황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지만 처남의 실종에 로엔이 개입하였다는 증거는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로엔이 개입을 하였다면 이런 식으로 허술하게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으음…….”

“그리고 그 종이라는 것을 확인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어떤 마법의 흔적이 없습니다.”

마법을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면 반드시 그 흔적이 남게 마련이었다. 하나 가드너가 수차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종이에는 그 어떠한 마법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후…… 하면 도대체 어떤 놈들이 그 아이를…….”

“처남은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은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 몰라도 분명 다시금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장인어른.”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좋으련만…….”

‘처남의 일로 인해 그토록 강인하시던 장인어른께서도 많이 나약해지셨구나.’

제국을 두 손에 쥐고 흔들던 베르그 공작이었지만 아들의 실종 이후 그는 빠르게 나약해져 갔다.

‘장인어른마저 이 상태라면 장차 제국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이란 말인가.’

제국 황실은 이미 제국을 통제하는 일에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다. 한데 그런 제국을 이끌어 가던 베르그 공작마저도 아들의 실종 이후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나약해져 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자 가드너는 제국의 장래가 심히 걱정이 되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일을 성공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그나마 제국이 좀 더 오래 제국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베르그 공작의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하며 가드너는 제국의 운명이 이번 계획의 성사에 달려 있다는 자신의 생각에 더욱더 강한 확신을 하였다.

“장인어른.”

“무엇인가?”

“장인어른께서도 작금의 제국의 실정을 잘 아실 것입니다.”

“…….”

가드너의 말에도 베르그 공작은 그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드너는 자신의 계획을 계속하여 설명해 나갔다.

하나 베르그 공작은 여전히 그의 이야기를 흘려듣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런 베르그 공작의 모습에 가드너는 결국 흥분을 하여 크게 언성을 높였다.

“장인어른! 정녕 언제까지 이렇게 계실 것입니까? 장인어른께서 그토록 아끼던 처남이 실종 상태라 크게 낙담하고 계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장인어른은 제국의 공작이십니다. 그리고 제국의 하루하루가 바로 장인어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처남의 일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면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바로 장인어른일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보십시오, 지금의 장인어른의 모습을!”

“으음…….”

“호시탐탐 제국을 노리는 자들에게 있어서 지금의 장인어른의 모습이 어떤 의미로 비춰질 것인지 장인어른께서는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장인인 베르그 공작은 아들인 하인리히의 실종에 로엔이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가드너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그는 처남의 실종 사건은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블랙 대공이 벌인 짓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면……?”

“그렇습니다. 이 모든 짓은 블랙 대공, 바로 그자가 벌인 일이옵니다! 보십시오, 지금의 장인어른의 모습을! 그는 제국을 침범하기 위해 가장 큰 걸림돌인 장인어른을 흔들어 놓기 위해 그와 같은 일을 벌인 것임을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으음…….”

“언제까지 그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실 것입니까? 장인어른께서는 이대로 제국이 무너지길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까?”

“…….”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장인의 모습에 가드너는 이제 제국의 운명도 그 끝을 보이고 있음에 절망하고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죄송합니다. 먼 여행에 피곤하여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실망한 가드너가 막 집무실을 나가려던 찰나였다.

“잠시만 기다리게.”

“…….”

“아직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았지 않은가? 마저 이야기하도록 하게나.”

“장인어른?”

“마저 하도록 하게나.”

“장인어른!”

“미안하네. 자네 말처럼 그동안 하인리히의 일로 인해 내가 너무 내 위치를 망각하고 있었네. 자네에게는 정말 볼 면목이 없네.”

“어이 그런 말씀을…….”

“되었네. 그보다 하려 했던 말을 마저 해 보도록 하게나.”

“예, 장인어른.”

어쨌든 다시금 제국의 기둥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장인의 모습에 희망을 찾은 가드너는 자신의 계획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확실히 자네의 계획은 뛰어나네. 알겠네. 하면 내가 황제 폐하께 자네의 계획을 상신하고 허락을 받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감사는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해야겠지. 자! 그럼 난 곧바로 황궁으로 들어가 보겠네.”

“예, 장인어른.”

황제인 카를로스 황제의 허락이 있은 것은 베르그 공작이 가드너의 계획을 상신한 지 열흘 정도 후였다.

이에 대한 논란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베르그 공작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카를로스 황제의 결정으로 인해 제국의 3황자인 피어스 폰 오스릭과 로엔 왕국의 카산느 폰 로엔 공주와의 혼담이 결정되었다.

아울러 과거 마도 시대가 시작될 무렵 잠깐 세상에 나왔던 종이의 제조 방법을 황실에 바친 알마리온에 대해서도 제국은 백작이란 작위를 내렸다.

단지 종이의 제조 방법을 황실에 바쳤다 해서 변방국의 최하위 작위인 남작에게 제국의 백작이라는 작위를 내린다는 것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파격, 아니 충격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종이라는 것은 대단한 물건이었다.

같은 무게의 황금과 거래되었던 종이다. 게다가 알고 보니 그 제작 방법은 너무나도 간단하였다.

아니, 실제로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 약간의 손재주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동안 모두가 생각했던 무슨 대단한 마법을 이용하여 만드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어쨌든 그런 종이의 제조 방법을 알려 줌으로써 황실은 앞으로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재원을 갖게 되었으니 마음이 너그러워졌고, 백작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제국이 그에게 내린 영지였다. 제국 황제는 그에게 ‘혼테르 이북의 땅’을 봉지封地로 하사했다는 것이다.

‘이스턴eastern’이라 이름 붙인, 카빌란 제국이 알마리온의 영지로 하사한 이곳은 제국의 영토도, 로엔의 영토도 아닌 게르혼족의 땅이다.

그런 곳을 알마리온의 영지로 한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카빌란 제국 이전에 존재했던 제국들이나 왕국들이 자주 사용해 오던 방법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힘이 약해졌을 때,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종종 이러한 방법을 이용했고, 이러한 방법은 의외로 그 결과가 좋았었다.

특히 지금처럼 제국을 위협하는 블랙 대공, 아니 용맹한영혼이란 자의 세력이 완전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식으로 견제 세력을 키우는 것은 이들이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고, 그만큼 효과도 좋았다.

제국이 알마리온으로 하여금 용맹한영혼이란 자를 견제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제국의 입장에서는 만약에 벌어질 수도 있는 훗날의 일을 위해 가능한 많은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으려 했고, 이 또한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제국의 3황자인 피어스 폰 오스릭과 카산느 공주와의 혼담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가장 반긴 것은 당연히 공주의 혼인을 추진했던 헬레나 왕비였다.

“잘되었구나. 참으로 잘되었어.”

“…….”

혼담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헬레나 왕비가 단걸음에 둘째 딸인 카산느를 찾아와 혼담이 성사되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알려 주었다.

“왜 그런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냐?”

“아, 아니에요, 어마마마.”

“후…… 카산느. 내 사랑스러운 막내딸. 이리 오렴.”

“…….”

“앉거라.”

카산느의 손을 잡아 자신의 옆에 앉힌 헬레나는 잠시 막내딸의 희고 작은 손을 부드럽게 자신의 손으로 쓰다듬더니 이번에는 카산느의 뺨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 어미가 네 마음을 모른다고 생각하진 말거라.”

“무슨…….”

“네가 혼테르 남작이란 자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는 이 어미도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얘야…….”

“…….”

“언젠가 너도 이 어미가 왜 그랬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란다.”

‘그럴까요? 정말로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하나 전 그런 날이 오지 않았으면 한답니다, 어머니…….’

차마 입으로 말하지는 못하였지만 카산느는 차라리 그런 일을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언젠가 이러한 일이 이해가 된다면 자신 또한 미래의 자신의 아이들에게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태생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 어미 또한 그를 반대하거나 그를 모욕하는 일까진 하지 않았을 것이란다.”

“…….”

카산느의 작고 귀여운 입술이 살짝 깨물어졌다. 다른 일은 몰라도 알마리온을 불명예스럽게 만든 일만큼은 지금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다.

“그런 극단적인 결정을 하였던 것 모두 널 위해서였단다.”

‘그러시겠지요. 어마마마께서는 언제나 모든 일이 다 저희를 위해서라 말씀하시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어머니께서 원하시는 것임을 어머니는 아직도 모르시는군요.’

부모는 자식들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 주었고, 그 모든 일들이 전부 자식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세대世代가 이어지는 한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이러한 일의 정답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

정답일 수도, 오답일 수도 있는 문제임을 차치하고도 이러한 일로 인해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네 혼담이 이루어져 참으로 다행이구나. 하니 혼인식이 있기 전까지 늘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있어야 한다. 알겠지?”

“예…….”

주변의 모든 이들이 축하를 하여 주었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마음은 공허해져만 갔다.

소식을 듣고 입궁을 한 엘리자베스는 동생인 카산느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후…….”

자신 또한 왕실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조치로 지금의 남편인 북부 귀족 파벌의 수장인 제거 백작의 장자인 아약스와 혼인이 결정되었을 때, 그녀 또한 모두의 앞에서는 당당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날 밤 그녀가 혼자 되었을 때, 엘리자베스 또한 원치 않는 혼인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막연한 슬픔으로 밤새 눈이 퉁퉁 불 정도로 울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면 아마도 난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겠지.’

엘리자베스는 동생인 카산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의 카산느가 누군가를 사모하게 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기 갈등을 느꼈을지 말이다.

자신이 방 안에 들어온 것조차 느끼지 못한 채 넋이 나간 사람처럼 텅 빈 시선으로 창밖의 풍경만을 바라보고 있는 동생에게 다가간 엘리자베스가 동생의 작고 가녀린 몸을 안아 주었다.

“언니…… 언니…… 흑! 흑! 흑!”

“그래…… 울어. 마음껏 울어. 그리고 잊는 거야. 그렇게 모든 것을 흘려 버리고 새롭게 가는 거야.”

“언니……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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