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을 위한 첫걸음
“이제 얼마 후부터 가을이 시작될 것인데 걱정이오.”
흰꼬리 부족의 족장인 푸른점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이제는 공식적으로도 부족의 족장이 되어 있는 어두운밤의 눈치를 보며 말하였다.
지난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은 이들 흰꼬리 부족에게는 혹독함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도 대부족에서 이탈함으로써 이들은 부족한 식량은 물론,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몬스터의 공격에도 자신들만의 힘으로 이를 대처하여야 했다.
특히 지난여름부터 혼테르에서 시작된 대대적인 몬스터 토벌 작전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몬스터들이 서쪽으로 밀려나면서, 메코이족에서 이탈한 흰꼬리 부족과 빨리달리는말 부족, 점박이말 부족의 삶의 근거지는 아예 지난가을부터 바깥출입을 거의 삼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몬스터가 기성을 부렸다.
오죽했으면 워낙 눈이 많이 와 몬스터들조차도 아예 움직일 수 없게 된 상황이 그저 반갑기만 하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족장도 둥근달의 이야긴 들으셨을 거요.”
늘 남들이 자신에게 사용했던 호칭인 족장이라는 말을 자신이 다른 이에게 사용한 지 1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족장’이란 단어를 써야 한다는 것이 어색하기만 하였다.
“…….”
둥근달의 외가는 이제는 교류를 끊은 칸 부족이었다. 게다가 지난봄에 둥근달에게는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더 많은 것들이 필요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필요한 것은 바로 식량이었다.
이를 위해 둥근달은 홀로 위험을 무릅쓰고 칸 부족의 영역까지 식량을 빌리기 위해 다녀왔다.
한데 그곳에서 둥근달은 놀라운 모습을 보아야 했다. 여전히 자신들처럼 고생하며 살 줄 알았던 칸 부족의 아이들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마을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고, 아낙들의 표정에는 근심이나 걱정 대신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또한 부족의 사내들은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종이라는 것을 만들고 있었고, 전사들 중 일부는 집단으로 훈련을 받고 있었으며, 일부는 몬스터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자가 그들 마을 주변에 몬스터의 침입을 미리 알려 주는 결계를 만들어 주었다고 하였소. 또한 6개 부족의 전사들과 그자 영지의 병사들을 동원하여 지난여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하여 몬스터를 토벌하고 있다고 하오.”
덕분에 그들은 몬스터의 공격에서 안전해질 수 있게 되었지만,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서쪽으로 밀려난 몬스터들은 고스란히 이들이 감당하여야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종이라는 것을 만들게 됨으로써 이제 더 이상 먹을 것을 걱정하는 일 따위는 없어지게 되었다고 하오.”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이오? 음?”
푸른점은 단지 하소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어두운밤에게는 푸른점의 하소연 같은 것을 들어 줄 마음의 여유가 단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허릴 숙이고 그자를 찾아가서 다시 받아 달라고 사정이라도 하란 말이오? 아님 우리와 함께하지 않은 부족들을 공격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오기라도 하란 말이오?”
“……!”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어두운밤의 행동으로 인해 게르 안에 모여 있던 부족의 대전사들의 표정 또한 급격하게 굳어졌다.
“다들 나가시오! 홀로 생각할 것이 있으니 말이오!”
모두를 게르에서 내쫓은 어두운밤은 신경질적으로 게르 안의 기물들을 때려 부수기 시작하였다.
“젠장! 젠장! 젠장! 으아아악!”
그는 언제나 부족의 존경받는 대전사였고, 부족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였다.
하나 그는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자는 아니었다.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조언을 할 수는 있었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조금 전 자신에게 하소연을 한 푸른점의 몫이었다.
때문에 그는 보다 자유롭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었고, 자유롭게 만들어진 결과에 대한 비판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족장의 무능함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무능한 족장이야말로 부족의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메코이족 전체가 수년 전에 삶의 터전을 다른 부족에게 빼앗긴 채 떠돌이 신세가 된 이후, 국경을 넘어 로엔에 구걸을 할 때에도 이미 충분히 확인한 바가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때부터 어두운밤은 더 이상 무능한, 그리고 나약한 족장이 부족의 운명을 결정하게 방치하여서는 안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대전사들과 부족민들을 회유하기 시작하였고, 대족장인 푸른하늘이 죽고 이민족인 알마리온에게 대족장의 지위를 물려주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그것을 기회로 자신이 흰꼬리 부족의 족장이 된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이지? 무엇이?”
자신이 부족을 지휘하면 최소한 푸른점보다는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자신도 있었다.
하나 그것이 자신만의 생각이었음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젠장…….”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은 전혀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싫다고 뛰쳐나온 집에 돌아간다는 것도 자존심상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젠장!”
결국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후회밖에는 없었다.
“이제 곧 족장을 선출하는 새로운 절차를 밟게 될 것입니다.”
알마리온의 말에 다섯 명의 소부족장들의 표정은 묘하게 바뀌었다. 각 부족의 족장은 대대로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으음…….”
“정말 대족장님의 결정이 최선이라 확신하시는 것입니까?”
붉은이리 부족의 조용한울음이 여전히 갈등이 담긴 눈빛으로 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최선이라 여기진 않습니다.”
알마리온 또한 지금의 족장이 만들어지는 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리고 저들의 주장이 반드시 옳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면 왜 지금 족장의 선출 방식을 바꾸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건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원한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따뜻한봄바람 님 말씀처럼 많은 이들이 원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님은 본인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혼란스럽습니다. 대족장님께서는 그럼 지금 어느 쪽에도 확신을 가지지 않으시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족장을 선출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왜입니까? 왜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의문이었다.
“처음 부족의 주술사들이 기존의 방식을 대신하여 족장이 되었을 때는 어떠하였을 것 같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그때도 부족의 많은 이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족장을 선출하는 것이 부족을 위해서도 최선의 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
알마리온의 말에 다섯 명의 소부족장들은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처럼 지금의 방식으로 족장을 선출하기 이전에는 이들 또한 같은 이유로 족장 선출 방식의 개선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결론은 그렇습니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없다면 더 많은 이들이 원하는 방식이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훗날 더 좋은 방법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만약 다섯 분들 중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하면 그 방법으로 족장을 선출할 것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알마리온이나 이들이나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방법 이외의 방법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1년이란 시간을 드린 것으로, 그리고 그동안 여러분께서 게을리하였던 수련의 기회를 드린 것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해 줄 수 있는 일들을 모두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년간 이들은 알마리온에 의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해 보지 않았던 수련을 하였다.
실상 신의 선택이라는 방법으로 다음 대의 족장을 선출하게 되면서 족장들은 스스로 강해지거나 현명해지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해진 것이었다.
“여러분이 충분히 강하다면, 그리고 충분히 현명하다면 여러분은 지금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언제든 나의 자리를 가져가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 여러분이 약하거나 현명하지 못하다면 여러분은 지금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의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하얀구름이 가장 먼저 대답을 하였다. 그 또한 더 이상 나태한 방식으로 족장이 선출되어 부족이 점차 약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알마리온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였기 때문이다. 하나 그것만이 알마리온의 의견에 가장 먼저 동의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지난 1년 동안 이들과 함께하면서 난 알 수 있었다. 이들 중에는 거짓으로 선택된 자가 있음을.’
전대 족장이 단지 신의 선택이라는 명분으로 그것이 누가 되었든 다음 대의 족장으로 만들 수 있었기에 매번 새로운 족장이 선출되고 나면 그의 능력이 인정받기 전까지는 늘 그가 진정으로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인지 의심을 받곤 하였다.
신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자라면 더 나은 사람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현상 유지는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그조차도 못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동안 늘 있어 왔던 이러한 의심을 하얀구름은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끔 족장의 선출 방식을 바꾸려 하는 알마리온의 의견에 적극 동조를 하는 것이었다.
“능력이 되지 않는 자가 부족을 이끌어 가는 것은 분명 문제 있는 일입니다. 저 또한 동의합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동의를 하였지만 유독 검은매 부족의 족장인 큰날개만큼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활이 무척이나 힘든 것 같습니다, 대족장님.”
며칠 전 부족으로 식량을 얻으러 온 둥근달의 일을 알마리온에게 보고를 하는 꿈꾸는달이었다.
“훗! 잘난 체하더니 꼴좋군.”
꿈꾸는달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미 알고 지낸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런 식으로 빈정거리는 데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쪽에서 몬스터를 서쪽으로 몰아내고 있기에 그들이 사는 지역에 더 많은 몬스터들이 몰리게 된 것이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둥근달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제는 아예 농사를 짓는 일조차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몬스터가 출몰하여 식량 사정이 최악의 상황이라고 하였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치를 취하다니 뭘? 이쪽에서 그들에게 손을 내밀게 되면 결국 그들은 영원히 부족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그대도 모르지 않을 것이야.”
“그건 리처드 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또한 이쪽에서 손을 내밀게 되면 저쪽은 자존심에도 큰 타격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저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 이러다가는 자칫 저들이 다른 부족들을 약탈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대족장님.”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 부족을 이탈한 세 소부족들 또한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가진 자로부터 부족한 것을 빼앗는 것뿐이었다.
“그것만은 피해야 합니다.”
꿈꾸는달의 말처럼 그러한 상황만큼은 피해야 했다. 게다가 알마리온은 메코이족의 대족장으로서 부족민 전체를 돌봐야 하는 입장이었고, 부족이 이처럼 분열된 데에도 그 책임이 있었다.
결국 꿈꾸는달은 알마리온에게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에 대한 책임 추궁을 완곡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에게 분열된 부족을 다시금 회복시켜 놓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알마리온에게 책임 추궁을 하겠다는 것인가?”
“대족장님이 부족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 주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그들 또한 부족의 일부. 대족장님께서는 당연히 그들의 일에도 책임을 지셔야 하는 입장입니다.”
“정말 잘났군. 그런 말을 하려면 1년 전쯤에 해야 하지 않았나? 응? 한데 그땐 왜 가만히 있었지? 아! 혹시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어차피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부족을 이탈한 그 세 곳의 소부족들이 알아서 나가 준다 하니 옳다구나 했겠지. 안 그런가? 그들이 없어지면 그만큼 그대가 돌봐야 하는 칸 부족에 돌아가는 몫도 커질 것이니 말이야.”
“뭐라고! 네깟 놈이 무엇을 안다고 감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는군. 안 그래?”
“이익!”
누군가를 열 받게 하는 데에는 리처드는 단연 으뜸이었다. 하나 그는 단지 남을 열 받게 하기 위한 빈정거림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판단력은 늘 날카롭고 또한 냉정하였다.
단지 그가 자라 온 환경이 그러했기에 그는 상당히 비뚤어진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상대를 위한 배려보다는 상대에 대한 공격성이 더 강하였다.
그가 유일하게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 인물은 알마리온뿐이었다. 그를 제외하면 그것이 누가 되었든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여 늘 분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니, 최근에는 그녀와 샘에게도 그러하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형님께서 마법에도 상당한 일가견이 있다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니까.’
샘이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높다는 것을 알고 샘에게 체임버스 남작을 소개하고 그의 제자로 들어가게 하려 하였지만 누나인 씨씨와 떨어지는 것을 둘 모두 원치 않았기에 결국 무산되었다.
내심 샘이 자신의 능력을 모두 개발해 나갈 수 있기를, 그렇게 해서 더 이상 도망자나 타인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본인이 극도로 이를 꺼리니 어쩔 수가 없이 포기를 하였었다.
이때 샘에게 마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나선 이가 바로 리처드였다. 당연히 처음에는 리처드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지 의심해야만 했다.
물론 리처드는 마법사가 아니었지만 마법에 빠져 살았던 적이 있었고, 왕실 가족들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왕실에 속해 있던 마법사로부터 마법을 공부할 수 있었다.
즉, 실제로 마법사는 아니었지만 그는 마법에 대한 이론만큼은 3서클 마법사와 견주어도 결코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결국 누나인 씨씨와 헤어지기 싫어한 샘은 리처드에게 마법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다만 가르치는 리처드나 이를 지켜보고 있는 알마리온이나 이론뿐인 이러한 가르침이 어느 정도나 효과가 있을지는 아직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그가 이처럼 딴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리처드와 꿈꾸는달 사이의 언쟁은 계속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둘의 상황은 위험수위에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만! 두 분 다 그만하고 진정하도록 하세요.”
리처드와 꿈꾸는달이 충돌을 하자 알마리온이 이를 제지하기 위해 나섰다.
“모르겠냐? 저들은 단지 널 이용하고 있을 뿐임을? 저들이…….”
“말을 삼가라!”
“아니란 말은 못 하는군? 그렇지?”
“이 작자가…….”
“그 검에 손이 닿는 순간 네놈 목은 땅에 떨어져 있을 것이야.”
리처드의 빈정거림에 흥분한 꿈꾸는달이 분을 참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검에 손을 가져갔다. 하나 그는 리처드의 상대가 될 수 없는 자였다.
단지 안색을 굳히고 경고를 하는 것만으로도 꿈꾸는달은 더 이상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두 분 모두 그만하시라 하였습니다.”
“흥!”
“으음…….”
“꿈꾸는달 님 말씀 중 최소한 한 가지 말씀은 맞습니다. 메코이족 대족장으로서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온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
“꿈꾸는달 님이 해 주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사흘 안으로 부족의 결정권을 가진 이들을 소집하도록 하십시오. 남아 있는 모든 부족들 전부에게 말입니다.”
“결정권을 가진 모두를 말씀이십니까?”
알마리온의 말에 꿈꾸는달이 놀란 듯 말하였다. 부족의 결정권을 가진 모두를 소집하라는 것은 메코이 부족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부족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일이 벌어질 경우 부족은 성년이 된 남자들 모두의 의견을 묻게 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된다.
사흘 후. 메코이족의 일원으로 남은 6개 부족의 모든 성인 남자들이 칸 부족의 영역에 모여들었다.
“오늘 이렇게 모두를 모이게 한 것은 메코이족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사안이 있기 때문이오.”
6개 부족의 모든 성인 남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알마리온은 충격적인 발표를 하였다.
“따라서 앞으로 소부족장은 물론 대족장의 경우에도 같은 방식으로 결정하게 될 것이오. 이는 나를 비롯한 5개 소부족장들이 모두 동의를 한 것이오.”
그의 말에 모든 메코이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커다란 소란이 일었지만 알마리온은 그들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리는 목소리로 소부족장과 대족장의 선출을 위한 방법을 전달했다.
그가 구상한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부족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갖춘 인물인지, 그리고 또 하나는 부족민들을 앞에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있는 자인지를 평가하는 방법이었다.
“그대들 중 누구라도 스스로 족장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라면 누구라도 족장이 되는 시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오.”
충격적인 일인 만큼 모두가 혼란스러웠지만 의외로 이 일은 싱겁게 끝났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직접 부족을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족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가 보다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것이었고, 그러한 지도자가 자신들이 인정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선출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알마리온이 제시를 하였고 그 새로운 방식으로 선출된 족장은 이들 대부분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큰 충돌 없이 새로운 족장들이 가려졌다.
재미난 것은 단 한 명의 소족장을 제외하고 다른 네 명의 족장들은 그대로 유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에 교체된 단 한 명의 소족장은 검은매 부족의 족장인 큰날개로 그는 스스로 족장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를 대신하여 부족의 대전사인 날카로운부리가 새로이 족장이 되었다.
“그들을 이대로 방치하실 생각이십니까?”
부족을 이탈한 세 소부족들의 문제를 놓고 1년 만에 다시금 논의를 하고 있었다.
“쯧! 알, 너의 시험이 제대로 된 것인지 의심되는구나.”
갑작스러운 리처드의 말에 다른 모든 이들은 살짝 눈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알마리온만큼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마리온이 제시한 새로운 족장의 선출을 위한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강함을 판단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현명함을 판단하는 것이었다.
강함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후보자들 간의 대결 방식을 취한다. 그리고 현명함을 판단하기 위해서 알마리온은 선택받은 자의 신물에 담긴 선대 대족장들이 남긴 지식을 이용하여 문제를 내놓았다.
“형님도 참…… 이번에는 그 어떤 시험도 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기존의 족장들에게 불만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불만은 족장을 선출하는 방식에 대한 불만이었다. 결국 알마리온이 족장 선출의 방식에 일대 변화를 줌으로써 부족민들 전체의 불만은 사라졌기에 스스로 족장의 자리를 내놓고 물러난 검은매 부족을 제외한 다른 부족들 모두는 그대로 지금의 족장들을 인정하여 그대로 유임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문제에 집중하다 보면 또 다른 문제를 놓칠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바로 지금처럼 말인가?”
“예, 형님. 바로 지금처럼 말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한 족장들이 궁금함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훗! 이 정도로 말을 해 줬으면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이거늘. 아직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가 보군. 쯧!”
“…….”
“그들이 부족을 뛰쳐나간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그거야…….”
“아!”
그제야 이들은 알마리온과 리처드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알마리온은 이미 부족을 뛰쳐나간 세 소부족들이 다시금 부족의 품에 돌아올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이처럼 뒤늦게 깨닫게 되자 모두 부끄러운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부끄럽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다른 당면한 문제에 집중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 여러분은 적게는 2백여 명을, 그리고 많게는 8∼9백 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위치에 계시는 분들입니다.”
“…….”
“하니 무엇을 생각하시든, 무슨 행동을 하시든 보다 신중하게, 그리고 넓고 깊게 생각하시고 행동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새로운 족장 선출 방식이 왜 필요로 하였단 것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단지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여전히 담담한 표정에, 차분한 질타였지만 이들 6개 부족의 족장들과 대전사들은 알마리온의 말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분노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분노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차분하면서도 담담한 분노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지금의 알마리온의 행동처럼.
이러한 분노 아닌 분노에 6개 소부족의 족장들과 대전사들은 그런 알마리온의 분노에 더욱 깊이 자신들의 생각 없는 행동을 반성하였다.
“죄송합니다, 대족장님.”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화끈하게 한판 하는 것인가?”
짓궂은 농담이었다. 실상 리처드의 이 말은 다른 의미로 한 말이었다.
한데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이가, 아니 이들이 있었다. 바로 6개 소부족의 족장들과 대전사들이었다.
이들은 리처드가 이탈한 세 소부족을 무력으로 제압하자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중 가장 연장자인 차분한심장이 이들 게르혼족의 주술사들이 사용하던 말로 오래된 격언을 말하였다.
“Versuch keinen verzweifelten Menschen.”
“무슨 뜻이지?”
“게르혼족의 오래된 격언입니다. ‘절박한 사람을 시험하지 마라.’라는 뜻이지요.”
“쯧! 이봐, 힘으로 그들을 막으려 했다면 1년 전 그날, 그렇게 했을 거야.”
알마리온이 처음 메코이족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이들은 알마리온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와 함께하고 있는 리처드의 능력 또한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이들 두 사람만으로도 당시 부족의 품을 떠난 세 부족의 족장들이나 대전사들을 처리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쯧! 조금 전 네가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그새 잊어버렸나 보네. 앞으로 네가 무척이나 힘들겠다.”
“원 형님도 참…….”
실상 리처드가 신 나게 한판 벌이자고 한 것은 이탈한 소부족들을 상대로 말한 것이 아니라 몬스터를 상대로 한판 벌이자는 뜻이었다.
몬스터 토벌 작전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단 영지와 메코이족 영역에서 몬스터를 몰아내는 것이 1, 2단계 작전이었다면 마지막 3단계 작전은 몬스터 랜드와 인간들의 영역을 차단하는 저지선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3단계 작전이 끝나고 이탈하지 않은 부족들이 번영을 누리는 모습을 본다면 이탈한 세 소부족들 또한 결국은 다시금 부족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알마리온은 판단하고 있었다.
이런 알마리온의 설명을 모두 들은 여섯 부족의 족장들과 대전사들의 고개는 다시 한 번 숙여졌다.
이후 알마리온은 영지군 중 한센이 지휘하는 제1대와 도일의 치안대 병력만을 영지에 남겨 놓은 채, 직접 나머지 영지군 병력과 메코이족 전사들 1천6백 명을 이끌고 3단계 몬스터 토벌 작전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