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살기 좋은 곳 (39/70)

살기 좋은 곳

“그대는……?”

성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던 리처드는 알마리온과 함께 성에 온 씨씨와 샘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는 분이십니까, 형님?”

“어? 그, 그게 말이지…….”

확실히 의외였다. 이처럼 당황하는 리처드의 모습을 보는 것은 말이다.

‘훗! 형님을 그렇게 만든 것이 모두 이 여인 때문이었군.’

비트윈 숲을 개척하기 위해 몬스터 토벌을 하던 영지군을 지휘하던 인물이 바로 리처드였다. 아마도 그때 리처드는 이 다크엘프 여인을 처음 만났던 것 같았다.

‘하긴 저 여인의 외모라면 그 누구라도 단번에 혼을 빼어 놓을 수 있겠군.’

오랜 도피 생활로 인해 제대로 먹지도, 그리고 씻지도 못하여 형편없는 몰골이었지만 씨씨의 외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들 모두를 놀라게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아니, 이들 두 남매를 보고 놀라는 것은 비단 씨씨의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들 두 남매의 피부가 자신들과는 달리 검은빛을 띠고 있다는 것도, 그러면서도 씨씨의 경우에는 엘프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엘프를 직접 보진 못했어도 엘프의 특징이 어떻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나 특별히 인류학에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는 다크엘프란 존재가 있음을 알진 못하였다.

이런 두 가지 이유로 씨씨의 출현은 모두를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형님의 정신을 저렇게 확실하게 빼어 놓다니. 형님에게 저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정말 예상 밖이군.’

완전히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리처드의 모습을 보면서 다소 의외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알마리온은 두 사람이 서로 상처를 받는 일이 없기만을 빌었다.

“요하네스 경.”

“예, 주군.”

“이쪽은…….”

그리고 보니 이름조차 묻지 않았기에 이름이 무엇인지를 묻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씨씨. 씨씨입니다, 영주님. 그리고 이쪽은 제 동생인 샘입니다.”

“씨씨와 샘이라고 하는군요. 씨씨는 앞으로 내 전속 요리사입니다. 하니 이 두 남매를 위한 것들을 준비해 주도록 하세요.”

“예, 영주님. 하면 토렌트는 어찌하시겠습니까?”

토렌트는 의용군 시절부터 알마리온의 식사를 담당해 오던 병사였다.

“전에 얼핏 들으니 토렌트가 펍pub을 운영하고 싶어 하더군요.”

펍이란 술과 음식을 파는, 거기에 숙박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예전 같으면 혼테르 같은 궁벽한 곳에 펍을 차린다는 것은 망하기 위해서 용을 쓰는 일이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알마리온에게 부여된 게르혼족과의 교역권을 함께 이용하기 위해 이곳 혼테르에는 몇몇 상단의 지점이 들어설 예정이었고, 아울러 광산에서 노예로 잡혀 있던 자들과, 제1의용군 병사들 중 가족이 없던 자들까지 갑자기 늘어나면서 잘만 운용한다면 성공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니 적당한 장소를 내주도록 하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원해 주도록 하세요.”

“예, 주군.”

“아! 그리고 샘은 별도로 일을 시키진 않을 것이니 그리 알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군.”

“자! 그럼 난 서재에 있을 것이니 그쪽으로 차를 좀 가져오도록 하세요.”

“예. 아렌에게 차를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씨씨와 샘을 요하네스에게 맡기고 알마리온이 서재로 가 버리자 홀에는 잠시 서먹한 침묵이 감돌았다.

딸랑! 딸랑! 딸랑!

요하네스가 주머니에서 작은 종을 꺼내 흔들자 이내 두 명의 여인이 홀에 모습을 나타냈다.

“아렌.”

“예, 총관님.”

“영주님께서 차를 내오시라고 하는구나.”

“예, 총관님.”

“영주님은 서재에 계실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총관님.”

연방 씨씨와 샘을 힐끗거리던 아렌이 대답을 하고는 냉큼 차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젤다.”

아렌이 영주인 알마리온에 전속된 하녀라면, 젤다라는 이름의 40대 중반 정도의 퉁퉁한 몸집을 지닌 편안한 느낌을 느끼게 하는 금발의 여인은 실질적으로 영주성에서 일하는 하녀들의 장이었다.

“먼저 인사들 나누는 것이 좋겠군요. 이분은 다이앤 젤다 부인. 하녀장으로 실질적으로 성의 안살림을 맡고 계신 분이시오. 이쪽은 씨씨고, 이쪽은 샘이라고 하는군요. 앞으로 영주님의 전속 요리사로 일할 것입니다.”

“영주님의 전속 요리사로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하면 토렌트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영주님께서 토렌트의 소원인 펍을 여는 데 도움을 주라 하시더군요.”

“오! 정말 은혜로우신 처사이시네요. 우리 영주님 같은 분은 아마 이 세상에 또 없으실 것이에요.”

알마리온이 토렌트의 소원인 펍을 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라는 명을 내렸다는 말에 젤다는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듯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하면 이 두…….”

젤다가 씨씨와 샘을 어떻게 지칭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였다. 샘의 경우에는 피부색이 전혀 다르긴 해도 분명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었기에 ‘사람’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할 수 있겠지만 씨씨의 경우에는 인간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였기에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였다.

한낱 궁벽한 영지의 성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여인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려서 교육을 받은 여인이었기에 의외로 이러한 면에 철저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요하네스 또한 씨씨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외견으로만 본다면 분명 엘프였지만 요하네스도 검은 피부를 가진 엘프가 있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했으니 젤다와 똑같은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이들을 구원해 준 이가 있었다. 지금까지 곁에서 어슬렁거리며 서성대던 리처드였다.

“엘프야. 다크엘프.”

“다크엘프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이곳에서 몇 년을 서쪽으로 이동을 하면 1년 내내 타는 듯 뜨거운 대지가 존재하는데 그곳은 워낙 태양이 뜨거워 인간도 엘프도 모두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리처드의 설명에 요하네스나 젤다는 물론 씨씨와 샘 또한 놀랐다. 이들 남매도 자신들의 신상에 대해 아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남매라면 저 아이는 아마도 하프 휴먼일 것이야.”

“…….”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그냥 ‘사람’이라고 불러. 그냥 서로 알아듣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어. 안 그런가, 두 사람?”

“하긴…….”

“그건 그러네요.”

하긴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굳이 그런 것을 따져 서로 불편해할 필요는 없는 일이라는 데 공감을 한 젤다가 씨씨와 샘을 방으로 안내했다.

“자, 그럼 두 사람은 날 따라오도록 해요.”

“예? 예…….”

결심을 하고 따라오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다시금 인간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두 남매는 눈치를 보며 시녀장인 젤다를 따라갔다.

“이 방은 씨씨가 쓰도록 해요. 그리고 이쪽 방은…… 샘이라고 했지요?”

“예? 예…….”

“이 방이 샘의 방이에요. 그리고 일단 두 사람 모두 목욕을 해야 할 것 같군요. 곧 목욕물을 준비해 주도록 할게요. 그리고 입을 만한 옷도 찾아보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부인.”

하녀들을 시켜 목욕물과, 이들 남매가 입을 만한 옷가지와 기타 물품들을 챙겨 주기 위해 돌아가고 두 남매만 남게 되자 각자에게 배정된 방들을 둘러보았다.

“와! 누나! 이 침대 봐! 정말 푹신하다!”

“…….”

너무나도 좋아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면서 씨씨는 제발 이곳에서는 평온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정말이지…….”

젤다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목욕을 마치고 젤다가 하녀를 시켜 내준 옷으로 갈아입은 씨씨와 샘의 모습은 한마디로 눈이 부셨다.

순혈의 엘프와, 비록 순혈은 아니라 하더라도 엘프의 피가 섞인 하프 휴먼인 씨씨와 샘의 미모는 인간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신비로움은 물론, 검은 피부라는 이국적인 아름다움까지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을 빼 놓기에 충분했다.

“저…….”

반쯤 넋이 빠져서는 자신들을 바라보는 젤다의 모습에 씨씨가 부끄러운 듯 말을 건넸다.

“아! 내 정신 좀 봐……. 영주님께서 두 사람을 서재로 오라 했어요.”

“저…… 말씀을 편히 하셔도…….”

씨씨는 지금까지 누군가에게서 존대를 받은 적도, 존중을 받은 적도 없이 살아왔기에 지금처럼 상대가 자신을 존중해 주는 것이 오히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불편하기만 할 뿐이었다.

“호호, 그럴 수야 없지요. 비록 성에서 일하는 하녀들을 관리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대는 나와 동격이니 말이에요.”

“예?”

“씨씨는 영주님의 개인 요리사예요. 즉, 성의 모든 요리사들을 감독하는 위치인 것이죠.”

개인 요리사라고는 하지만 영주의 요리사는 곧 성안에서 요리를 하는 모든 요리사들의 책임자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성의 일을 각각 담당하는 여러 책임자들 중 한 사람이라는 뜻이랍니다.”

성에는 여러 분야의 일을 담당하는 이들이 있었다. 젤다의 경우에는 성에서 일을 하는 하녀들을 관리하는 관리자였고, 공방을 책임지는 자, 마구간을 책임지는 자 등 여러 가지 일들을 담당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씨씨는 그중에서 요리를 책임지는 자였으니 따지고 본다면 젤다와 씨씨는 같은 관리자의 위치였다.

“하니 서로를 존중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자! 어쨌든 영주님께서 두 사람을 찾으시니 어서 가도록 하지요.”

“예…….”

깨끗이 씻고, 수수하지만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씨씨와 샘의 모습에 이들 두 남매를 본 사람들은 숨이 막힐 것처럼 극치의 아름다움에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한 채 멍한 눈빛으로 두 남매를 지켜보았다.

“그쪽으로 앉도록 해요.”

“예.”

“내가 두 사람을 보자고 한 것은 몇 가지 할 말이 있어서입니다.”

“…….”

“첫째. 씨씨 그대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정령을 소환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인간 세상에서 정령술사들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 정도만 말하겠소. 어쨌든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하지만 그대가 정령을 소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정령술사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도록 주의를 하여야 할 것이오. 그것이 그대나, 그대가 지키고자 하는 동생의 안전을 지키는 일일 것이오.”

“알겠습니다.”

알마리온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어쨌든 그것이 동생인 샘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하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생인 샘은 그대와는 떨어져서 살아야 할 것 같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샘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니 말이에요?”

샘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말에 씨씨는 물론 샘도 크게 놀라며 동요했다.

“걱정 말아요. 동생을 어쩌겠다는 뜻이 아니니 말이에요. 그대가 알지 모르겠지만 그대의 동생인 샘 또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소.”

“예? 샘은 저처럼 정령을 소환할 수는…….”

“정령에 대한 친화력은 없지만 대신 마나에 대한 친화력은 상당히 뛰어난 것 같소. 하여 내가 아는 분 중에 마법사가 한 분 계신데 그분에게 정식으로 샘을 소개하고 그분의 제자로 받아 주실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 하오.”

“마법사 말씀이신가요?”

알마리온이 이들 남매를 뒤따라갔을 때, 실상 더 큰 관심이 갔던 이는 씨씨가 아니라 샘이었다.

알마리온은 지금까지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적으로 몇몇 마법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에서 하프 휴먼인 샘만큼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뛰어난 존재를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그가 접한 최고의 마법사인 4서클 마법사 필립 폰 아르몬에게서조차도 샘에게서 느낄 수 있는 정도의 마나에 대한 친화력은 느낄 수 없었을 정도다.

하여 알마리온은 샘을 체임버스 남작에게 보내 그의 문하에서 마법을 배우도록 배려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소. 물론 그대나 샘이 동의를 한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두 사람이 원치 않는다면 아쉽지만 샘의 재능은 묻혀 버리거나,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훗날 지금의 결정을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를 것 같군요.”

아마도 마법서라거나 다른 마법에 관한 물품이라면 필립을 상대한 후 그로부터 챙긴 전리품으로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가지고 있었지만 알마리온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재능을 개발하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훨씬 유리한 일이었다.

“누나…….”

하지만 어린 샘은 누나를 떠나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은 영지와 외부를 연결하는 길이 쌓여 있는 눈으로 모두 막힌 상태이니 당분간 생각할 시간은 충분할 것이오.”

알마리온과의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씨씨는 알마리온이 한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해명해 보라.”

“으음…….”

메르타니온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이제 보름 정도 후면 개최될 전승 기념행사에 초대될 초청자들에게 보내질 초청장이었다.

‘저것이 어떻게 아버님 손에…….’

겉봉에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남작 친전이라는 분명한 글씨가 쓰여 있는 초대장을 본 블리스의 표정이 일순 곤혹스러워졌다.

“내가 알기로는 이것은 이미 열흘 전쯤에 모두 발송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느냐?”

“그렇사옵니다, 폐하.”

“하면 어째서 이것이 아직도 네 서재에 있는 것이냐?”

“아마도 시종이 실수를…….”

시종의 실수로 알마리온에게 보내져야 할 초대장이 보내지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하려 하였지만 그런 어설픈 거짓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쾅!

“정녕 네가 날 기만하려 드는 것이냐!”

“…….”

“네 어미가 시킨 일이더냐?”

“…….”

“아무래도 내가 널 잘못 본 것 같구나.”

“아바마마, 잠시 고정하시고 소자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

“듣기 싫으니 썩 나가거라!”

“아바마마! 제발 고정하시고 소자의 변명을 들어 주십시오! 아바마마의 판단처럼 혼테르 남작에게 보내야 할 초대장을 보내지 않은 것은 어마마마의 부탁도 있어서였지만 소자의 판단으로도 그가 더 이상 막내의 곁에 가까이 있는 것은 모두를 위해 좋지 않다고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옵니다.”

블리스는 자신이 고의적으로 알마리온에게 전해져야 할 초대장을 빼놓은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였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그는 왕국의 일곱 번째 익스퍼트임과 동시에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들 중 하나임을 모른단 말이냐?”

“어찌 모를 수 있겠사옵니까? 하오나 아바마마, 처음부터 제국과의 혼담이 없었다면 모를까 제국과의 혼담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불미스러운 소문이 만들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하여 그의 능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 쫓아내듯 떠나보내지 않았더냐! 모르겠느냐?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혼테르 남작에게는 불명예스러운 일임을?”

전장에 있어야 할 자를 전쟁과는 관련이 없는 일로 전장에서 쫓아내듯 물러나게 했다는 것 자체로도 이미 알마리온의 명예는 크게 손상된 셈이었다.

한데 거기에다 대고 왕실에서 주관하는 공식 행사에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죽은 자를 다시 한 번 죽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한 사람의 명예보다는 왕실의 명예가 더욱 중요합니다, 아바마마!”

“어리석구나. 참으로 어리석구나. 때로는 모든 것을 버리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어야 함을 너는 모른단 말이더냐.”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전달할 초대장을 일부러 빠뜨린 것이었사옵니다.”

왕실의 명예가 일개인의 명예보다는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한 블리스의 행동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아니, 당연한 결정처럼 보였다. 하나 메르타니온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아직도 멀었구나. 아직도 멀었어.”

블리스의 말에 메르타니온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왕국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임을 잊었더냐? 왕국의 백성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벌써 잊었더냐?”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란 이름은 단순히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운 뛰어난 장수로서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그런 존재였다면 그보다 몇 배나 더 큰 공을 세웠으며, 실질적으로 왕국을 위기에서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폰티악 후작만 한 인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백성들이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라는 이름에 열광을 하는 것은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노예의 신분에서 왕국의 일곱 번째 익스퍼트가 되었으며, 또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 된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라는 존재 하나로 인해 왕국의 많은 젊고 재능 있는 이들이 능력을 가진 자를 알아보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아낌없이 내주는 국왕과 왕실에 발탁되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피나는 노력을 하게 만든 표상表象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알겠느냐? 너와 네 어미는 단지 왕실의 명예를 위해 앞으로 너와 함께 이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들을 버렸다는 것을! 알겠느냐? 너와 네 어미가 한 행동이 왕실 또한 언제든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내는 귀족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음을 보여 주었다는 것을?”

“…….”

“너는 지금이라도 그것을 발송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메르타니온의 말처럼 뒤늦게 자신이 한 행동이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를 알게 된 블리스는 지금이라도 최대한 빨리 초대장을 전달하면 늦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전승 기념식은 아직도 보름이나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하나 이어지는 메르타니온의 말에 블리스는 그런 자신의 생각 또한 부질없는 짓임을 알 수 있었다.

“너는 내가 어떻게 이 일을 알았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그랬다. 이미 왕궁 내에서는 블리스가 고의적으로 알마리온에게 전해져야 할 초대장을 발송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은밀히, 하지만 마치 잘 마른 건초 더미에 불을 지른 것처럼 빠르게 퍼져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면…….”

“끝까지 날 실망시키는구나.”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면, 그때라도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블리스는 결코 잘못한 것이 없어 보였다. 하나 메르타니온은 그런 블리스에게 다시 한 번 실망하였다.

“너와 네 어미가 벌인 이번 일로 인해 이젠 있지도 않은 카산느와 그와의 염분설이 공식화되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제국에도 그대로 전해질 것이다.”

로엔에는 아직도 이제 막 끝난 전쟁을 돕겠다며 온 제국군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메르타니온의 생각처럼 이 일은 제국군 사령관인 에그먼트 폰 가드너 백작의 귀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이번 전쟁으로 많은 것을 얻게 된 왕실을 질투하고 있던 프리모 공작에 의해서 말이다.

“으음…….”

“이제 알겠느냐? 이미 카산느의 순결성까지도 의심받게 되었음을? 그런 상황에서 그를 다시 불러들인다고 하였느냐?”

“소, 소자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아바마마.”

“너는 나의 뒤를 이어 이 왕국을 이끌어 나갈 국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는 아무리 작은 실수라 하더라도 그 이후에 벌어질 모든 일들의 결과가 바뀔 수 있는 그러한 자리이다.”

“…….”

“넌 그동안 신중한 모습을 보였고, 난 그런 네가 믿음직스러웠다. 하나…… 하나 이제 보니 넌 아직도 멀었구나.”

“소, 송구하옵니다, 아바마마.”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최선은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나 많은 경우 이러한 차선의 선택은 최악의 선택이 될 수도 있음을 간혹 잊곤 한다.

“죄송합니다, 주군.”

“그대가 죄송할 일이 아닙니다.”

분명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주군인 알마리온에게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저 송구할 뿐이었다.

3월 중순이 되어 완연하게 날이 풀리면서 겨우내 쌓였던 눈이 빠르게 녹기 시작하였고, 무려 5개월 만에 외부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온 첫 손님은 다름 아닌, 테일러 상단의 쿠엔토와 막스밀리언이 추천해 준 사람들, 그리고 혼테르에 지점을 내기 위한 몇몇 국왕파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상단의 관계자들, 그리고 엄청난 양의 물자를 실은 마차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혼테르가 고립된 채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바깥세상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소식 또한 전해 주었다.

이들이 가져온 소식 중 가장 반가운 소식은 바로 5년여를 끌어오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알마리온 등은 다른 이들보다 반년이나 먼저 전쟁을 끝낸 상태였으니 다른 이들에 비해 그 감흥이 훨씬 덜하였지만 어찌 되었든 전쟁이 끝났다는 것만큼은 기꺼이 환영할 만 한 일이었다.

하나 알마리온에게 전해진 또 하나의 소식은 함께 소식을 들은 모두를 공분公憤케 하기에 충분했다.

“아니, 어떻게 주군께 그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주군은 왕국의 일곱 번째 익스퍼트입니다. 게다가 주군이 이번 전쟁에서 세운 공은 폰티악 후작 각하나 주군의 친구분이신 이그나티우스 남작님 정도일 것입니다! 한데 그런 주군에게 이런 식으로 모욕을 주다니요! 게다가 주군께서는 공주에게는 전혀 관심조차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지 않습니까!”

왕실에서 알마리온을 모든 공식 행사에서 초대되는 명단에서 제외하였다는 말을 전해 들은 요들이 흥분하여 언성을 높였다.

“쯧! 미운털이 박혀도 단단히 박힌 것 같군.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식의 처사는 귀족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인데 말이야.”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주군.”

이야기의 전모를 들은 하인리히 또한 이런 어이없는, 그리고 과격한 왕실의 처사에 항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거보십시오! 그나이제나우 경까지도 똑같은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이건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게, 웹 경.”

“어떻게 진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면? 그럼 웹 경은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길 바라는 것이지? 왕실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법정이라도 열어야 한다는 것인가? 아님 군대를 일으켜 내전이라도 벌여야 한다는 것인가?”

“그만! 다들 흥분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는 것 같군요.”

“…….”

“이번 일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 없습니다. 차라리 난 잘되었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잘되었다니요?”

“그런 자리를 내가 얼마나 불편해하는지는 잘 알지 않습니까? 차라리 이번 일을 기회로 두 번 다시 그런 불편한 자리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니 나로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지요.”

“쯧! 그새 또 그 병이 도진 것이냐?”

알마리온의 자조적인 말에 정색을 하는 리처드였다.

“병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겠지? 너의 그 나약한 성격을 두고 하는 말이다. 넌 아직도 너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

“그래. 너야 그런 자리가 싫으면 안 나가면 그만이겠지. 하면 이들은? 넌 이들 모두의 군주임을 잊은 것이냐? 너의 명예가 더럽혀진다는 것은 저들의 명예 또한 더렵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넌 아직 모르는 것이냐?”

군주가 명예를 잃는다는 것은 그에 속한 모두가 명예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비단 알마리온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알마리온의 가신이 된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알마리온이 이러한 불명예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아니 설사 벗어난다 하더라도 상당 기간을 구설수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다는 녀석이 이런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명예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겠다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왜 주군과 우리가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으음…… 알 것 같습니다.”

“알겠다니 무엇을 말이오, 그나이제나우 경?”

모두의 시선이 하인리히에게 집중되었다.

“주군께서 이런 부당한 일을 기꺼이 감수하려 하시는 이유를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란 말이오?”

“주군은 기사이십니다. 그리고 주군께서는 주군의 주군이신 국왕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신 분입니다.”

누군가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게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주군을 지켜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주군은 주군이 충성을 맹세하신 국왕 폐하의 명예까지도 지켜 드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으음…….”

하인리히의 말처럼 알마리온이 이러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이에 대하여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자신이 이번 일로 항의하거나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왕실의 명예는 실추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모두 내가 왜 이런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였는지 아실 것이니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도록 하십시오. 아시겠습니까?”

“…….”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이 남아 있었기에 다들 선뜻 알마리온의 명령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이번 경우에도 그렇듯이 겨우내 굶주렸던 몬스터들의 활동이 더욱 거칠어졌습니다. 하여 2단계 토벌 작전에 곧바로 돌입하도록 하겠습니다.”

더 이상 초대받지 못하는 자가 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모두 아시겠지만 이번 2단계 작전이 계획한 대로 성과를 거둘 수 있다면 앞으로 이곳 혼테르는 더욱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하니 모두 2단계 몬스터 토벌 작전에 최선을 다해 주도록 하십시오.”

“예, 주군.”

“훗! 다들 적당히 화풀이를 할 대상을 찾은 것 같지 않나?”

“하하. 그런 것 같습니다, 리처드 님.”

“정말 그렇군요. 하하하.”

다들 리처드의 말에 킥킥거리며 조금은 과장된 행동들을 하였다.

수긍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부당한 일을 일방적으로 감내해야 한다는 것에 분노를 느끼는 이들에게 몬스터 토벌은 확실히 그 분풀이를 할 수 있는 좋은 대상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2단계 몬스터 토벌 작전에 돌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주군.”

리처드의 지휘로 영지군이 몬스터 토벌을 위한 2단계 토벌 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알마리온은 영지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한 계획들을 진행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가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주변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목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주군께서 알려 주신 방법으로 만든 종이라는 것입니다.”

종이를 건네주는 요하네스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손까지 흥분으로 인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상단에서 자라 온 그였기에 종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이란 것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마도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한데 이러한 종이는 마도 시대의 시작과 함께 그 제조 방법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즉, 종이라는 것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30여 년 정도였고,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종이란 것이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종이라는 것을 개발한 대마법사 알프레드 도프만이 마도 시대의 시작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종이라는 대단한 물건을 만든 그가 어떤 이유로 반역자가 되어 처형을 당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였기에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단 30년 동안만 세상에 존재하였던 종이라는 것이 당시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곳곳에서 발견되었기에 종이란 것의 가치가 어느 정도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이제나우 경 때문에 이런 귀중한 것을 만들 수 있게 되다니.’

단 30년간 세상에 존재하였다가 사라진 종이의 제조법을 알마리온에게 알려 준 이는 바로 하인리히 그나이제나우가 남겨 놓은 사념체였다.

‘훗, 누가 알았겠는가. 종이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알프레드 도프만이란 자가 그나이제나우 경의 동생의 남편이었음을 말이야.’

하인리히 그나이제나우와 알프레드 도프만이 서로 처남, 매제지간으로 사라진 종이의 제조 방법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하인리히는 그것을 영지의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있던 알마리온에게 알려 주었고, 그가 알려 준 방법으로 종이라는 것을 만들 수 있었다.

“제작 과정은 어렵지 않던가요?”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단한 비법이 아니라서 소신 또한 그렇고 제작에 참여한 장인들도 어리둥절해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종이를 만들 수 있었는데 그동안 어떻게 다른 사람이 생각해 내지 못하였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그건 마법사가 만들어 낸 물건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말처럼 종이를 만든 이가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그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하였을 것이고 언젠가는 그 제조법을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종이를 만든 알프레드 도프만은 마법사였고, 다들 그가 어떤 특별한 마법으로 종이를 만든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처형되기 이전 종이의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문을 가하였지만 끝내 그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고, 이후 많은 마법사들이 그 제조법만 알아내면 일확천금을 누릴 수 있는 종이의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실험에 실험을 더하였지만 결국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종이에 대한 존재감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어쨌든 이곳 혼테르는 종이를 생산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이니 더욱더 잘된 일입니다, 주군.”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재료인 나무와, 풍부한 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혼테르는 이 두 가지 모두가 풍부했다.

“하나 가급적 조용히, 그리고 충분히 좋은 종이를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철저하게 비밀이 유지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종이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종이의 가격은 같은 무게의 황금과 거래되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종이는 귀한 것이었기에 이를 탐내는 자들이 많았다.

“일단은 비트윈 숲에 종이 공방을 만들도록 하고 주변을 병사들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세요. 그리고 아직은 비트윈 숲 전체가 완전히 안전한 것은 아니니 그것을 감안하여 공방을 세우도록 하세요. 아시겠습니까?”

“예, 주군.”

종이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게 되면 그동안 궁핍하게 살아온 영지민들은 물론, 힘들기는 마찬가지인 메코이족들 또한 그동안의 어려움을 단번에 씻어 버릴 수 있었다.

얄란족이야 영지에서 발견된 광산에서 채굴한 철을 가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족민들 모두가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메코이족이었다.

메코이족 또한 철을 다룰 줄을 알았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였다. 농사를 짓기 위해 필요한 농기구를 만드는 데는 이들 또한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들 부족 전체를 먹여 살리기에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농사를 짓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한데 종이를 만들게 되면 그들 또한 충분히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다녀왔소.”

“이제 오세요?”

“와! 아빠! 아빠!”

“어이쿠! 우리 딸! 하하. 그래, 엄마 말 잘 들었지?”

“예!”

탈봇은 원래 영지에 속한 노예였다. 그가 몸을 가누고 사물을 인식하기 시작하였을 때부터 그는 노예였고, 그의 아내인 안느 또한 전혀 다르지 않았고, 딸인 제니 또한 불과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하나 1년 전 새로운 영주가 온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죽을 때까지 몬스터는 물론 굶주림과 자신들의 주인으로부터의 학대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말 그대로 연명을 하며 살아온 두 젊은 부부에게 있어서 희망이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신임 영주가 부임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제 자신들은 물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제니도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아도 되었고, 이들 가족이 살아갈 아담한 집도 지을 수 있었다.

종이라는 것을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대가를 받을 수 있었으니 일이 고되어도 힘들지는 않았다.

“시장하죠? 저녁 차렸으니 어서 오세요.”

“알겠어. 엄마 말 들었지, 제니? 자! 엄마가 차려 준 맛있는 저녁 먹으러 갈까?”

“예!”

식탁에 차려진 저녁은 풍성하였다. 아니, 사실 풍성하지는 않았다. 닭고기 수프와 호밀로 만든 빵, 그리고 소시지와 직접 텃밭에서 가꾼 신선한 야채와 우유가 전부였다.

하나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사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의 식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풍성한 식탁이었다.

“자! 그럼 프레이르 님께 기도하자.”

식사 전에 풍요의 여신인 프레이르에게 기도를 하는 것은 로엔의 사람들이라면 보편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프레이르 님께 영광과 축복이 있으시길. 그리고 우리에게 이러한 평온함과 풍요로움을 주신, 오늘도 우리 가족 모두가 평안할 수 있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주신 영주님께 프레이르 님의 무한한 축복을 내려 주시길 기도합니다. 자! 그럼 이제 식사할까?”

“예!”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은 지옥 그 자체였다. 한데 1년이 지난 지금. 혼테르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더 이상 이곳을 지옥이라 여기는 이들은 없었다. 혼테르는 이들에게 있어서 살기 좋은 곳, 바로 낙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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