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떠돌이 엘프 남매 (38/70)

떠돌이 엘프 남매

“이 상태라면 설사 눈이 녹는다 해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추위도 추위였지만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이었다. 그것도 다른 남쪽에서는 이미 봄이 시작될 무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추위와 쌓인 눈이 제대로 녹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지난 이틀 동안 눈이 내려 인간이든 몬스터든 동물이든, 모두가 고립된 채 갇혀 있었다.

“덕분에 게르혼족들의 약탈은 면할 수 있었고, 지속적인 몬스터의 공격도 없어서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날이 풀려 눈이 녹을 때쯤이면 눈으로 인해 고립된 굶주린 몬스터로 인해 오히려 봄이 더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주군.”

“흠. 식량 사정은 어떻습니까?”

한센의 보고가 끝나자 총관이자 집사인 요하네스에게 영지의 식량 사정에 대해 물었다.

“겨울나기를 위한 준비와 왕국의 법에 따라 모든 영지마다 비축해 두어야 하는 식량 비축분이 충분하여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이 상태로 고립이 한 달 정도 더 진행되면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주군.”

왕국의 모든 영지, 특히 혼테르와 같이 국경 지역에 있거나 국경에서 가까운 영지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일정량의 식량을 비축하게 되어 있었다.

하나 아무도 그러한 것을 감사하지 않으니 유명무실한 법률이 되고 말았지만 알마리온은 이미 사문화되어 버린 왕국의 법에 따라 만약을 대비한 식량을 규정대로 확보해 놓고 있었다.

“메코이족과 얄란족에 대한 식량 지원을 계속하여도 버틸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부터 양을 조절하고 있었기에 크게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주군.”

영주인 알마리온 또한 요새에서 몬스터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기에 영지의 살림은 전적으로 요하네스에 의해 꾸려졌다.

“젠더 경이 이 지역 출신이지요?”

“예, 주군.”

“하면 이런 날씨가 언제쯤이면 풀릴 것 같습니까?”

“이처럼 눈이 많이 내리고 추운 겨울이 오래가는 때는 신의 경험으로도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제 아버님께서 예전에 해 주신 말씀에 따르면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고 겨울이 긴 경우 대략 3월 말이나 4월 초는 되어야 눈이 녹기 시작한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대략 앞으로 한 달이나 한 달 반 정도는 있어야 고립된 상황이 풀린다는 뜻이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드란 경의 말처럼 이런 해에는 봄철이 가장 위험하다 하셨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굶주린 몬스터만큼 위험한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영지군이 해야 할 일이 많겠군요.”

“그렇습니다, 주군. 무엇보다도 두 게르혼 부족과 연결되는 길도 그렇고, 다른 영지와 통하는 길 또한 안전을 확보해야 합니다.”

길은 생명선이었다. 길이 안전하지 못하게 되면 외부와 고립된 혼테르로서는 필요한 것들을 들여오지 못하게 된다.

특히 영지에 필요한 식량 대부분을 외부에서 들여와야 하는 혼테르로서는 외부와 통하는 길은 그야말로 생명줄과도 같았다.

“형님.”

“…….”

“형님?”

“어? 왜?”

“형님,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아, 아니다. 문제는 무슨…… 한데 왜 날 부른 것이지?”

겨울이 되기 전부터 지금처럼 멍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알마리온은 리처드가 왜 그런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것인지 어느 정도 감을 잡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알은체하지는 않았다.

하나 이러한 모습을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보인다는 것이 알마리온으로 하여금 그를 걱정하게 만들고 있었다.

“형님께서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 뭔데?”

“눈이 녹기 시작하면 영지와 외부와 연결하는 통로인 하란 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해 주십시오. 두렌 요새에서 기병 1개 대를 차출하여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지 뭐.”

혼테르 영지에는 영지의 안전과 직결된 3개의 요새가 존재했다.

한 곳은 알마리온이 직접 지휘하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요새 티모르로 이곳은 이곳 영지민들이 몬스터 랜드라고 부르는 오라클 오브 오딘 산맥까지 이어진 거대한 숲과 연결되는 티모르 산과 인접해 있는 곳이었다.

이곳이 중요한 이유는 티모르 요새가 위치한 곳이 몬스터 랜드와 영지가 연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티모르 요새를 지나면 지난해 새로 건설한 3개의 마을과 광산도 존재했으며, 무엇보다도 영지에 속한 땅이면서도 몬스터들의 활동에 의해 그동안 버려져 있던 글로리 강 북부 지역에 위치한, 두렌 강과 글로리 강 사이에 끼어 있는 숲이라 하여 비트윈between 숲이라고 하는 숲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도 요새 티모르는 무척이나 중요했다.

비트윈 숲은 제법 규모가 큰 숲이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기존의 6개 마을이 들어서 있는 분지 지역에 비하면 세 배에 가까운 크기였다. 때문에 알마리온은 가장 먼저 이 비트윈 숲을 개척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이 지역에 대한 몬스터 토벌을 착수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비트윈 숲 너머, 두렌 강변에 위치한, 영지 내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한 요새인 두렌이었다.

규정상 국경 지역의 모든 요새는 항시 병력을 주둔시켜야 했지만 알마리온이 도착하기 전까지 이곳 요새는 버려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곳을 재정비하여 국경 방비를 위한 요새로 제 역할을 하도록 만들고, 기병대로 이루어진 영지군 제1대를 주둔시켜 놓고 있었다. 이들은 영지를 몬스터가 아닌 게르혼족의 약탈로부터 지키는 핵심적인 요새였다.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 요새 하란이었다. 이곳은 혼테르와 다른 곳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통로로 영지의 생명선인 곳이었다.

“겨울 내내 성에 처박혀 있었더니 몸이 찌뿌듯했는데 잘되었네.”

원래는 리처드에게 요새 티모르를 맡길 생각이었는데 지금도 그렇듯 뭔가에 넋이 빠져 있어 요새를 맡길 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아 보였고, 또한 적막한초원이란 자에 대해 관찰을 해 보기 위해 그를 성에 남겨 놓고 자신이 직접 티모르 요새에 갔던 것이다.

“그럼 오늘 회합은 이만 끝내도록 하지요.”

“예, 주군.”

“추워…… 그리고 배고파, 누나…… 흑흑!”

“이리 와, 샘. 누나가 안아 줄게.”

추위와 배고픔에 울음을 터뜨리는 동생인 샘을 품에 끌어안아 언 몸을 녹여 주려 하였지만 배고픔만은 씨씨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추운 겨울에도 이들 두 남매가 입고 있는 것이라고는 얇은 홑겹의 옷뿐이었다. 아무리 이들 남매가 인간이 아닌 엘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혹독한 추위를 홑겹의 옷만으로 견디고 있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한데 이들 남매의 모습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보통의 엘프와는 그 모습이 사뭇 달랐는데,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바로 이들 두 엘프 남매의 피부색이었다.

보통의 엘프라면 피부색이 눈처럼 흰 색이었지만, 이들 두 남매의 피부색은 다른 엘프들과는 달리 검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랬다. 이들 남매는 엘프들 중에서도 존재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이를 직접 확인한 엘프들이 거의 없다는 다크엘프들이었다.

원래 다크엘프의 피부는 흑요석처럼 빛이 나지만 이들 남매는 겨울 내내 추위와 배고픔에 노출되면서 건강 상태가 극도로 나빠진 상태였기에 마치 오랫동안 씻지 않은 사람의 몸에 잔뜩 때가 낀 것처럼 보였다.

한데 이상한 것은 누나인 씨씨는 한눈에 보아도 다크엘프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엘프로서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지만 동생인 샘은 엘프로서의 특징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둘은 분명 친남매였지만 이처럼 모습이 다른 것은 이들 남매의 어머니가 두 명의 남편을 가졌기 때문이다.

씨씨의 아버지는 같은 다크엘프였지만 샘의 아버지는 인간이었는데 씨씨도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이들 남매의 어머니는 샘이 막 젖을 떼었을 때 갑자기 사라졌고, 이후 씨씨는 동생인 샘을 돌봐 오고 있었다.

누나의 품에 안기자 살을 에는 추위는 덜 느낄 수 있었지만 문제는 배고픔이었다.

마지막으로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두 남매는 굶주려 있었다.

그나마 동생인 샘은 이레 전 힘들게 잡아 온 토끼 1마리를 대부분 먹었기에 조금이나마 기력이 남아 있었지만 씨씨는 고기 한 점 먹은 것을 제외하고는 이미 보름 가까이 허리까지 쌓인 눈을 녹인 물로 허기를 달래고 있었기에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굶주림에서 오는 현기증으로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추워…… 배가 너무 고파, 누나……”

추위와 허기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품을 파고들던 샘이 지쳐 잠든 상태에서도 잠꼬대로 추위와 배고픔을 호소하는 동생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씨씨는 모종의 결심을 하였다.

“샘, 내 말 잘 들어.”

잠들었던 동생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얼마 후 잠에서 깨어나자 씨씨는 결의에 찬 눈빛으로 동생인 샘에게 말하였다.

“누나가 먹을 것을 구해 올게.”

“정말?”

먹을 것을 구해 오겠다는 누나의 말에 샘은 반색을 하였다.

“응. 한데 누나가 올 때까지 너 혼자 있어야 해.”

“얼마 동안?”

“모르겠어. 어쩌면 금방 돌아올 수도, 또 어쩌면 며칠이 걸릴 수도 있어.”

“그렇게 오래?”

“응.”

“싫어! 그럼 나도 같이 가!”

며칠이 걸릴 수도 있다는 말에 샘이 함께 가겠다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건 안 돼! 위험하단 말이야!”

“싫어! 싫어! 나도 같이 가, 누나. 응? 누나도 날 버리려 하는 거지? 그렇지?”

옛 기억이 떠올랐는지 샘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무작정 씨씨의 품을 파고들었다.

“아냐! 아니라고! 난 절대 널 버리지 않아!”

“그럼 같이 가. 응? 나 말 잘 들을게. 그러니까 같이 가, 누나. 흑흑!”

“말했잖아. 그건 너무 위험하다고 말이야. 누나가 최대한 빨리 먹을 것을 구해 올게. 그러니 누나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응?”

“싫어! 싫단 말이야! 으아앙!”

“너 정말 누나 말 안 들을 거야?”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고 며칠을 굶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강한 힘으로 자신을 꼭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샘의 모습을 보면서 씨씨는 결국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여야만 하였다.

“알았어. 그럼 같이 가자. 대신 무조건 누나 말을 들어야 해. 알았지?”

“정말? 정말 같이 갈 거지?”

“그래.”

“알았어. 누나가 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할게.”

“정말이지?”

“응!”

“정말로 누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야 한다?”

“정말이라니까!”

“후…… 이런 떼쟁이.”

“헤헤…….”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뭐가 난다고?”

“흥! 아냐! 난 똥꼬에 털 나지 않을 거야!”

“왜? 지금도 울다가 웃었잖아? 우리 샘은 분명 똥꼬에 털이 났을 거야. 어디? 지금 확인해 볼까?”

“뭐, 뭐야! 싫어! 싫다고!”

씨씨가 자신의 바지춤을 내리려 하자 기겁을 하며 반항하는 샘이었다.

“호호호. 에고, 힘들다. 조금 쉬었다 먹을 것을 구하러 가자.”

“응. 한데 누나.”

“왜?”

“어디로 갈 거야?”

“인간들 마을에.”

“인간들 사는 곳에? 하지만…….”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인간들이 사는 마을로 갈 것이라는 말에 샘이 잔뜩 겁먹은 눈빛으로 씨씨의 눈치를 살폈다.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어. 지금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그곳밖에는 없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 아저씨들에게 붙잡히면……. 가지 말자, 누나야. 응? 그냥 내가 참을게. 그러니까 가지 말자! 응?”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같이 데려가 달라며 울며불며 메달리던 샘이 인간들 사는 곳으로 가서 먹을 것을 찾아볼 것이라는 말에 이번에는 하얗게 질린 채 가지 말자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이들 두 남매가 이러한 추위에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비트윈 숲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참아 가며 어려운 겨울나기를 하고 있는 이유 또한 인간들에 의해서였다.

원래 이들 두 남매는 집시들과 함께 세상을 떠돌며 기예를 팔던 엘프 남매였다. 하나 그런 두 남매가 무리와 떨어지게 된 것은 씨씨가 1차 성장을 하게 되면서 성숙한 여인의 몸이 되면서부터였다.

갑작스럽게 성숙한 여인의 몸이 되면서 엘프 특유의 아름다움을 갖게 된 씨씨는 그녀를 본 사람들은 모두가 그녀의 아름다움과 그녀의 몸을 탐냈다.

결국 그녀가 속한 집시 무리의 우두머리는 그녀의 미모를 보고 반한 차트란 부족의 족장이 2백 골드라는 엄청난 돈을 제시하고 그녀를 사들였고 강제로 차트란 부족의 족장에게 순결을 빼앗기려는 순간 정령 마법을 이용하여 자신을 산 차트란족의 족장을 죽이고, 동생인 샘과 함께 도망을 친 것이었다.

이후 이들 남매는 차트란족의 끈질긴 추격을 받게 되었는데 하루하루가 고난의 길이 아닌 때가 없었다.

“조심하면 돼. 너도 누나 알지? 누나가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것 말이야.”

씨씨가 정령으로 무엇인가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안 것도 원치 않는 행위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 두려워 무의식중에 자신을 지키고자 정령의 도움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이후 이들 남매가 족장을 죽이고 탈출한 이들 남매를 추적하는 차트란족의 추적을 피해 이곳까지 도망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정령술사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괜찮아.”

“하지만…….”

샘은 무서웠다. 이곳까지 도망치는 동안 몇 차례 위험한 상황에 처했었고, 그때마다 누나인 씨씨가 정령 마법과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그때마다 누나인 씨씨의 손에 피가 묻어야만 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고 또한 싫었던 샘이었다.

“인간들 가까이 가지 않아도 될 거야. 단지 근처까지만 가서 정령을 이용하여 먹을 것만 슬쩍하면 되는 거야.”

“정말이지?”

“그렇다니까. 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알겠지?”

“응.”

“그래. 그럼 같이 가자.”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것이…….”

요하네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마을의 식량 창고에서 식량을 훔쳐 내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주군.”

이상한 일이었다.

비록 배불리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이곳 영지민들은 굶는 일에는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올해처럼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비록 배가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굶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겨울나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식량이라면 충분하진 않지만 그래도 부족함 없이 나누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주군.”

“게다가 마을의 식량 창고는 촌장만이 출입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 하여 소신이 조사를 하여 봤지만 도무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흠…… 식량을 도둑맞은 마을이 토른햄과 모일란이라고 하였습니까?”

“예, 주군.”

“알겠습니다. 일단 내가 살펴보도록 하지요. 적막한초원, 그대는 내가 없는 동안 티모르 요새의 병력을 지휘하도록 하십시오.”

“…….”

알마리온이 그동안 자신을 시험해 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알마리온이 왜 그러한 시험을 하는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방적인 시험과 의도가 썩 내키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불만인 것 같군요?”

“솔직히 대답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솔직히 그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대라니! 이분은…….”

“그만. 요하네스 경은 그만 나가 보도록 하세요.”

“하지만 주군! 이자는 겨우 일개 백인대 대장일 뿐입니다! 그런 자가 감히 주군께 그대라니요! 이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훗! 그건 그대들이 일방적으로 내게 부여한 지위일 뿐이지.”

적막한초원의 말처럼 그에게 백인대 대장이란 직책을 부여한 것은 그가 원해서가 아니었다. 따지고 본다면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이 일방적으로 부여한 직책일 뿐이었다.

“뭐라고? 이 작자가!”

“요하네스 경, 경에게 내린 명령은 이 방에서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주군!”

“명령입니다.”

“알겠습니다, 주군.”

방에서 나가라는 명령에 따르긴 하였지만 요하네스는 사나운 눈빛으로 적막한초원을 한번 째려본 후에야 방을 나갔다.

그렇게 요하네스가 나간 후 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 마주쳤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내 궁금하던 것이었다. 알마리온이 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맡기는 것인지 말이다.

“그대가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이오.”

“단지 그것뿐입니까?”

“그것 말고 다른 무엇이 필요하단 것이지요?”

“보기와는 달리 욕심이 많으신 분이군요.”

“그런가요?”

“내가 거절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댄 자유의 몸이오.”

“그 말씀은 내가 떠나고 싶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도 된다는 뜻입니까?”

“물론이오.”

“알 수가 없군요.”

“무엇이 말이오?”

“내가 볼 때, 그댄 야망을 가진 자가 아닙니다.”

“훗!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이오?”

“눈. 그대의 눈은 야망을 가진 자의 눈이 아니기 때문이오.”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자의 눈빛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강한 집념을 담고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런 자의 눈빛은 언제나 단호하고 또한 강렬하였으며, 눈빛만으로도 타인을 압도하는 강한 힘을 담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알마리온의 눈빛은 지나치게 담담했다. 오히려 너무나 담담하여 마치 신전의 신관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은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쳐 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야망이라…….”

“그렇소. 그대의 눈빛에는 야망이 없소.”

“잘 보았소. 확실히 내겐 그대가 생각하는 것 같은 야망은 없소.”

알마리온은 이 세상을 구하는 구원자가 된다거나, 아니면 이 세상을 자신의 발아래 두겠다는 정복자로서의 야망 같은 것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

단지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자신이 돌봐야 할 영지민들이 아무런 걱정 없이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게 영지를 이끌어 나가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하면 왜 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이미 그대의 곁에는 나보다 뛰어난 자들이 곁에 있는데 말이오.”

“그렇다 해서 그대가 필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라오.”

“훗! 내가 필요하다? 어디에 말입니까? 몬스터를 사냥하는 데? 그런 정도의 일이라면 내 쪽에서 사양하겠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라면 나 또한 구태여 그대와 같은 능력을 갖춘 자를 곁에 두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

“하나 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대와 같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필요하단 것이오.”

하인리히가 자신의 가신이 되겠다고 찾아왔을 때, 알마리온이 굳이 강하게 거절하지 않았던 이유도 리처드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능력자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까?”

“그렇소.”

‘약속이라…….’

문득 적막한초원 또한 예전에 자신을 따르던 이들에게 하였던 약속이 떠올랐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득 떠오른 옛 기억에 적막한초원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군요. 하나 그렇다 해도 내가 그대 곁에 있을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이오. 아까도 말했지만 그댄 자유의 몸. 그대가 어떤 결정을 내린다 해도 그 결정은 존중받을 것이오.”

고깝게 받아들인다면 남고 싶으면 남고,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는 말처럼 들을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럴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대의 지금 말은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를 무시하는 발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시오?”

사내들은, 그것도 운명에 도전을 하는 사내들에게 있어서 강함은 그가 추구하는 최종적인 목표이거나, 아니면 최종적인 목표를 달성하게 만들어 주는 궁극의 수단이었다.

그 강함이 육체적인 것이든,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또한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아니면 이미 충분히 강한 자에게 더욱 큰 호감을 느끼는 것도 사내들이 본능적으로 강함을 추구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강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주변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강력한 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알마리온은 충분히 강하지만, 또한 약한 자였다.

“…….”

“그대는 주변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변을 통제하려 들지 않고 있소. 그건 강자의 미덕이라 볼 수는 없는 것.”

“……”

“강자의 미덕은 그 강함으로 그를 따르는 모두에게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오. 설사 그것이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이라 하더라도 그를 따르는 모두에게 분명한 길을 제시함으로써 흔들림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강자의 미덕이오!”

‘이자, 분노하고 있다. 그것도 스스로에게.’

적막한초원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노였다. 한데 그러한 분노의 대상이 타인이 아닌 그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댄 강자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나약한 자이거나 비겁자일 뿐이오. 그런 그대가 다른 누군가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가 필요하다? 솔직히 난 그대의 그 말에 대한 진실성 자체가 의심되오.”

분노가 담긴 눈빛으로 알마리온을 노려보던 적막한초원이 방을 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알마리온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바로 오라클 오브 오딘 산의 정상에.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이것은…….’

식량을 훔치는 자에 대한 조사를 위해 토른햄 마을에 도착을 한 알마리온은 대기 중에 은은하게 퍼져 있는 한 가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정령술사가 도둑질을?’

대기 중에 흩어져 있는 미약한 기운, 그것은 바로 정령의 향기였고, 당연히 정령의 향기는 누군가에 의해 정령이 소환되었을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비록 하급 정령이지만 정령의 향기가 이렇게 짙다는 것은 소환자의 친화력이 상당하다는 것인데…….’

마법에도 등급을 구분하는 서클과 같은 서클 내에서도 각각의 성취도를 나타내기 위해 비기너beginner, 유저user, 마스터master라는 구분이 있듯, 정령술사에게도 나름의 구분이 존재했다.

다만 정령술사의 경우에는 마법처럼 뚜렷한 구분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고, 소환할 수 있는 정령의 종류에 따른 구분과 정령을 소환하였을 때 남는 정령의 향기만으로 그가 어느 정도의 능력자인지를 판별하는데 정령의 향기는 소환자의 친화력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하였다.

향기가 짙으면 짙을수록 소환하는 정령과의 친화력이 높다는 것을 뜻하였고, 그만큼 발휘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알마리온이 느낀 정령의 향기는 그 순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마법과 비교하자면 마스터의 수준에 들어 있는 정령술사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대지의 정령술사였군.’

단지 도둑맞은 곳에 와 본 것만으로 알마리온은 상대가 어떤 정령술사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있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실프, 이 주변에 네 친구들을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봐 줘.’

실프가 정령술사를 찾아낸 것은 얼마 오래지 않아서였다. 마을의 식량 창고에서 조금씩 식량을 훔쳐 낸 정령술사는 비트윈 숲 외곽, 그러니까 식량을 도둑맞은 토른햄과 모일란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은신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식량만을 훔쳐 냈다면 조만간 또 나타나겠군.’

사실 식량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도 운이 좋았기에 가능했을 정도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만큼만 훔쳤다면 조만간 또다시 식량을 훔치러 올 것이 분명했다.

“일단 그대들은 모두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예, 주군.”

정령술사라는 존재는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알마리온은 식량을 도둑질한 정령술사에 대한 조사를 홀로 할 생각이었다.

정령을 이용하여 식량을 도둑질한 범인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생각처럼 눈에 띄지 않게 식량을 훔쳐 내느라 그리 많은 양을 훔칠 수 없었던 범인은 이미 여러 차례 성공을 한 때문인지 그다지 조심하지도 않은 채 또다시 정령을 이용하여 창고에서 식량을 훔쳐 냈다.

“됐어, 누나?”

“응. 어서 가자.”

“히힛! 응!”

비록 배를 불릴 정도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굶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어린 샘으로서는 지금의 상황도 충분히 견뎌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름 행복을 느끼게 해 주기까지 하였다.

먹을 것이 생겼다는 행복감에 도취되어 냉큼 식량이 담긴 자루를 받아 들고는 저만치 앞서 달려가는 샘의 모습을 보면서 씨씨 또한 나름 행복감을 느꼈다.

‘그래. 저 아이가 행복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야.’

그렇게 잠시 동생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 씨씨가 정령에게 부탁하여 자신들의 흔적을 모두 지우며 동생의 뒤를 따라갔다.

하나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누군가가 모두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저 여인이었군. 한데 놀랍구나. 예전에 자작님 댁에서 훔쳐본 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다크엘프를 이처럼 직접 보게 되다니 말이야. 그래서 그처럼 대기에 남아 있는 정령의 향기가 순수하고 강할 수 있었던 것이었어.’

범인의 정체를 파악한 알마리온은 그 범인이 단지 기록 속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다크엘프라는 사실이 그저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다.

‘그리고 저 아이는 아무래도 하프 엘프이거나 하프 휴먼인 것 같군. 게다가 복장으로 보아 저 둘은 엘프들과 함께하였던 것이 아니라 분명 인간들과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두 명의 도둑을 보면서 알마리온의 추리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대략적이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순수한 다크엘프인 여인과, 하프 엘프인지 하프 휴먼인지 알 수 없는 어린 소년이 이런 추위에 이런 곳에서 왜 식량을 훔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누, 누구……!”

훔쳐 온 식량으로 막 샘을 위한 요리를 하고 있던 씨씨는 갑자기 온몸을 엄습해 온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몸이 떨려 왔다.

“누나? 누나 왜 그래?”

“……!”

“누나, 뭔데 그래? 왜 그래? 응?”

만약 지금 막 씨씨를 처음 본 사람이었다면 원래부터 그녀의 피부색이 하얗다고 여길 정도로 창백해진 안색으로 마치 학질?疾이라도 걸린 것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씨씨의 모습에 샘 또한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그대들을 해칠 생각은 없으니 얌전히 그곳에서 나오는 것이 좋을 것이오.”

“헉! 누, 누, 누나…….”

밖에서 갑자기 들려온 말소리에 샘은 기겁을 하며 누나인 씨씨의 등 뒤로 숨어들었다.

“조금 전에도 말하였듯이 그대들을 해칠 생각은 없소. 단지 이야기만을 하고 싶은 것이니 밖으로 나와 주었으면 하오.”

“누, 누구시죠? 왜, 왜 우리와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죠?”

동생인 샘을 보호하기 위해 온몸을 짓누르는 공포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용기를 짜냈다.

“내 이름은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이곳 혼테르의 영주요.”

“아…….”

알마리온이 자신의 소개를 하자 그 말을 들은 씨씨는 깊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이곳의 영주라는 자가 어떻게 자신들을 찾아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영주라는 위치가 자신과 같은 자들에게는 얼마나 절대적인 자라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저, 저, 저희는…… 저희는…….”

무엇인가 변명을 하려 하였지만 두려움이 너무 큰 때문에 씨씨는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도둑질한 것이 들통이 난 이상 자신은 물론 동생의 생명까지도 위험한 상황에 빠졌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도 말하였지만 난 그대들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소.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대가 정령술사라는 것이니 말이오.”

“…….”

“그대가 나의 존재를 느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왜 그대를 보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오. 하니 어리석은 생각이나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씨씨가 알마리온의 존재를 먼저 알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알마리온이 씨씨가 소환한 대지의 하급 정령인 놈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수 있는 대지의 상급 정령을 소환하였기 때문이다.

“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죠? 저, 저희는…….”

“지금 그대들에게 원하는 것은 단지 그곳에서 나와 달라는 것뿐이오. 그리고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겠지만 난 그대들을 결코 해칠 생각은 없소.”

“…….”

“누나…….”

두려움에 빠져 있는 두 남매가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생각을 바꾼 알마리온이 걸음을 옮겨 두 남매가 은신해 있는 동굴 속으로 들어왔다.

“아…….”

“누나…….”

“보아하니 이곳은 몬스터가 살던 곳이군요.”

두 남매가 자신의 출현으로 인해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은 마치 친구 집에 처음 놀러 온 사람처럼 동굴 내부를 살펴보았다.

“냄새가 좋군요. 이왕이면 나도 좀 나눠 주지 않겠소? 추운 날 밖에서 오랫동안 서 있었더니 출출하기도 하고 몸도 얼었는데 말이오.”

별 볼일 없는 재료로 만든 평범한 수프였지만 냄새만큼은 정말이지 기가 막힐 정도로 좋았기에 충분히 저녁을 든든히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기가 돌았다.

“예?”

“…….”

“흠! 그러다가 수프가 눌어붙을 것 같은데…….”

“…….”

갑작스러운 출현에 이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알마리온을 두려움에 찬 눈으로 힐끗거리면서 씨씨가 그릇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나무로 깎아 만든 거친 그릇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수프를 따라 건네주었다.

스푼도 없어 그릇을 든 채로 후후 불면서 맛을 본 수프의 맛은 냄새를 맡았을 때의 느낌 그대로 기가 막힐 정도로 좋았기에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오!”

“…….”

“네 누나의 음식 솜씨가 정말 대단하구나!”

“…….”

씨씨와 샘은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지만 알마리온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말이지 맛있게 수프만을 마셨다.

“후! 정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인 것 같네.”

노예였던 시절이나, 익스퍼트라고 인정받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알마리온도 이런 거친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어 왔지만, 이후 정식으로 작위를 받은 다음부터는 최고의 재료로, 최고의 요리사가 만든 음식도 먹어 보았지만 어딘지 그러한 음식은 입에 잘 맞지 않았다.

때문인지 지금도 영주성의 요리사는 의용군 시절 그의 식사를 담당했던 요리사가 전담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두고 리처드는 궁상을 떤다며 놀리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기름진 고기들과 부드러운 빵은 도통 입에 맞지 않았다.

“어떻소?”

“예?”

“내 전속 요리사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오.”

“요, 요리사를 말씀이신가요?”

“그렇소.”

“하, 하지만 저희는…….”

“뭐 문제 되는 것이 있소? 그대들 남매…… 남매가 맞소?”

“예? 예…….”

“그대들 남매가 여행을 계속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곳에 남아서 내 전속 요리사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데. 어떻소?”

“그, 그건…….”

“그렇게 해 준다면 그대들의 행동은 불문에 부치겠소.”

“저, 정말이신가요?”

“물론이오.”

알마리온의 말에 씨씨와 샘의 눈이 마주쳤다. 실상 두 남매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자신들은 사람을 죽이고 도망을 치는 도망자였다. 사람을 죽인 것까지는 몰랐다 해도 자신들의 차림새만 보아도 도망자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들은 식량까지 훔친 도둑이었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엄한 벌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신의 전속 요리사가 되어 달라는 말만 하고 있으니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알마리온의 눈빛에는 1차 성장을 한 이후,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들의 눈빛 속에 담겨 있는 욕정 같은 것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그저 깊은 호수처럼 담담한 눈빛이라는 것을.

“정말 저희를 이곳에 머물게 해 주신다는 것인가요?”

“그대들이 원할 때까지.”

“하겠습니다.”

“누나…….”

“괜찮아. 이 누날 믿지?”

“하지만…….”

“괜찮아. 이젠 정말 괜찮아질 거야…….”

인간의 나이로는 18, 19세 정도 되어 보이지만 실상 씨씨는 실상 60년을 살아온 순수 다크엘프였다.

그런 그녀의 육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걱정하는 일 같은 것은 벌어지지 않을 것임을.

“좋소. 그럼 나와 함께 가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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