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의 끝이었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이 끝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환호할 일이었다.
“아쉽습니다. 조금만 더 밀어붙였으면 지금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인데 말입니다.”
도르첸 공작이 한껏 아쉽다는 표정을 하며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이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숙부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쉬워하는 도르첸을 보며 블리스가 그를 달랬다. 왕실의 사람들이라면 지난 수백 년을 귀족들에게 짓눌려 살아왔던 상황을 단번에 반전을 꾀할 수 있었으니 당연히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 지금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한 일이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말처럼 한꺼번에 너무 귀족들을 궁지에 몰아붙이다가 자칫 서로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상대의 입지를 서서히 조여 가면서 그들을 길들이는 것이 좋은 일이었다. 어쨌든 그들도 왕국의 핵심적인 귀족들이었고 모두를 없애는 것보다는 적당히 그들을 옥죄는 것이 왕국을 위해서도, 왕실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도 최상의 결과였다.
제국에서 파견한 지원군 사령관인 에그먼트 폰 가드너 백작이 포넬과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조속히 끝내자는 제안을 수차례나 계속해 왔을 때부터 메르타니온 국왕과 블리스 왕세자 그리고 도르첸 공작은 어떤 상황이 최선인지를 고민하였고 그때 내린 결론이 제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종전 협상을 통해 이번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어찌 모르겠느냐. 다만…… 알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구나.”
“숙부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저들은 이번 상황이 자신들에게 결코 최선이 아니란 것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겠지. 그리고 그것을 알아챘을 때면 이미 저들은 스스로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벌였는지 알게 되겠지.”
또 다른 무엇인가를 의도하고 있는 세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이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일단은 전쟁이 끝났으니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이네.”
“프리모 공작이 조만간 공과功過가 있는 자들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게 될 것이옵니다, 폐하.”
“그리고 그 위원회에 왕실의 대표로 소자가 참석하게 될 것이옵니다, 폐하.”
어떤 형태로 전쟁이 종결되었든 로엔 왕국이 건국된 이후 처음으로 침략을 받았던 전쟁은 끝이 났다.
그리고 이제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그리고 과가 있는 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는 절차가 남아 있었다.
“그 일을 맡는 동안 왕세자 넌 저들에 의해 많은 시험에 들게 될 것이다.”
공훈功勳 처리를 위한 위원회 그 자체가 치열한 각축장이 될 것이다. 공을 세운다는 것, 설사 그것이 큰 공적이 아닌 것이라도 공으로 인정받게 된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 또는 후대에게 득이 되는 일이었다.
반대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특히 로엔 왕국은 건국된 지 수백 년 동안 단 한차례도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은 상태였고, 당분간 또 다른 외적의 침입을 받을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이번 전쟁에서 공이나 과를 인정받게 되면 상당 기간 그로 인한 영향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아니,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변화가 적은 귀족 사회에서 이러한 중대한 일은 큰 파장을 일으키는 일이었으니 다들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있던 일은 더욱 부풀려서, 그리고 없던 일까지 만들어 내려 들 것이 분명했다.
하나 이러한 것보다 더욱 중요한 건, 이러한 일에는 고도의 정치력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벌어진 일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그에 대한 공정한 포상은 없이 어느 쪽의 정치력이 더 강한가에 따라 공도 과도 인정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잘 알고 있사옵니다, 폐하.”
“지난번처럼 네가 잘해 주어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한데 그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생각인 것이냐?”
“누구 말씀…… 아! 혼테르 남작 말씀이시옵니까, 폐하?”
“…….”
블리스나 도르첸은 메르타니온이 이 대목에서 왜 갑자기 알마리온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인지 이내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로엔달 백작은 알마리온의 후견인처럼 행동하고 있었고 그러한 로엔달 백작은 메르타니온이 가장 신임하는 충신이자 그가 믿고 의지하며 자신의 속내를 편하게 털어놓는 유일한 친구였다.
“혼테르 남작은 이미 받아야 할 것을 모두 받았사옵니다, 폐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도르첸의 목소리가 한껏 굳어져 있었다. 비록 같은 편에 서 있다고는 하여도 그는 로엔달을 경쟁자로 여겼다.
구태여 이 자리에서 언급할 이유가 전혀 없는 알마리온의 일에 대해 메르타니온이 직접 언급한 것은 로엔달이 그에게 알마리온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는 부탁을 개인적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왕도에서 알마리온이 벌인 일로 인해 작위가 강등당한 일을 놓고 로엔달은 정작 본인은 이를 수긍하고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의를 제기한 상태였다.
메르타니온은 그러한 로엔달의 이의 제기에 대해 공훈위원회에 자신을 대신하여 참여하게 될 블리스에게 지난 일의 과를 상쇄시킴은 물론 이전의 작위를 되돌려줄 수 있도록 알마리온의 공을 최대한 부풀리라는 압력을 가하였던 것이다.
“폐하, 아니 아바마마, 숙부님의 말씀처럼 혼테르 남작의 일은 더 이상 거론하시지 않는 것이 최선일 것 같사옵니다.”
“…….”
“게다가 어마마마께서 막내의 일로 인해 그자를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지 잘 아시지 않사옵니까? 만약 그자가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면 어마마마께서는 더 많은 일들을 하실 수도 있사옵니다. 하오니…….”
“흠.”
“소자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사옵니다. 하오니 아바마마께서는 그의 일에는 나서시지 않는 것이 옳을 듯하옵니다.”
“알겠다. 그 일은 전적으로 네게 맡기기로 하였으니 그리하도록 하거라.”
아무리 유일한 친구의 부탁이라 하더라도 들어줄 수 있는 일이 있고 들어줄 수 없는 일이 있었기에 메르타니온은 결국 로엔달의 부탁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 것이네. 돌이켜 보면 자네가 내게 한 첫 부탁인데 들어주지 못하여 미안하네.”
메르타니온과 로엔달이 독대를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메르타니온은 유일한 친구인 로엔달이 난생처음 한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아니옵니다, 폐하. 오히려 폐하께 개인적인 이유로 그러한 청을 드린 소신의 불찰이 크옵니다.”
“미안하게 되었네. 한데 말이네.”
“…….”
“내게 알려 줄 수는 없는 것인가?”
메르타니온은 로엔달이 왜 이토록 알마리온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알마리온이 익스퍼트로 인정받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는 알마리온의 뒤를 은밀히 봐주고 있었다. 그에게 모두가 예상한 것 이상의 대가가 주어진 것 또한 로엔달이 알마리온을 적극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메르타니온은 지금까지 로엔달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를 이처럼 적극적으로 돌봐 주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그 이유가 더욱 궁금했다.
하나 로엔달은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메르타니온이 더 많은 힘을 갖기 위해 벌인 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로엔달은 자신의 일을 다른 이에게 털어놓는 성격이 아니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훗! 내 자네의 성격을 잘 알면서도 괜한 것을 물었군.”
“…….”
“다만 블리스 그 아이가 어쨌든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하였으니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도록 하세나.”
“감축感祝드리옵니다, 대공 전하.”
“훗! 우리는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네.”
에인세의 말에 고메즈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오나 전하께오서는 원하시는 것을 다 얻지 않으셨사옵니까?”
“…….”
에인세의 말에 고메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모습에 에인세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였다.
로엔과의 전쟁에서 가장 많은 것을 얻은 이는 바로 고메즈였다.
그는 자신의 정적들이나, 잠재적으로 자신의 정적이 될 만한 이들을 로엔과의 전쟁에 내몰았고,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계획대로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리고 설사 살아 돌아왔다 하더라도 그들 모두 정치적으로는 상당한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권력의 중심에서 한번 밀려나기 시작하면 두 번 다시 원상 복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이번 전쟁으로 인해 고메즈의 측근들 중에서도 희생자가 나오긴 하였지만 그들을 대신할 자들은 얼마든지 남아 있었다.
또한 이번 전쟁 중에 벌어진 왕실의 부정한 사건으로 인해 포넬 왕가의 계승자는 자신의 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결국 이번 전쟁은 고메즈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졌고, 그를 제외한 모두는 패자에 불과할 뿐이었다.
포넬의 귀족들 중 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알고만 있어야 하는 일일 뿐, 절대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소, 송구하옵니다, 대공 전하! 소관이 그만 주제가 넘었습니다.”
“…….”
차갑게 가라앉은 고메즈의 냉정한 눈빛이 잔뜩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에인세의 뒤통수에 고정되었다.
“그만하게.”
“망극하옵니다, 전하.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겠사옵니다.”
“훗!”
한쪽 입꼬리만 살짝 비틀려 올라간 것이 여전히 그의 심기가 좋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확실히 자신의 실수였다. 고메즈는 결코 자비로운 자가 아니었다. 또한 어떤 때에는 아주 단순한 실수를 저지른 자에게도 참혹한 벌을 내릴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심한 자이기도 하였다.
그런 고메즈를 상대로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였다는 것은 분명 명백한 실수였다.
“그러는 것이 좋을 것이네.”
“소신의 크나큰 실책을 이처럼 자비롭게 용서해 주시니 감읍! 또 감읍하옵니다!”
지금까지 에인세는 고메즈에게 소관小官이라고 자신을 지칭하긴 하였어도 소신小臣이라고 자신을 지칭하지는 않았다.
그 또한 한 지방을 통치하는 대영주로서 명목상이긴 하여도 국왕을 제외한 다른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을 신하로 칭할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니었다.
한데 그런 그가 고메즈에게 자신을 스스로 신하라고 칭하는 것은 자신의 실수를 면하기 위해 적당히 무마하는 행위치고는 확실히 과한 행동이었다.
“쯧! 에인세 후작. 아무래도 오늘 자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네. 그대 또한 왕국의 대귀족이거늘 어찌 같은 귀족인 나에게 신하임을 자청하는 것인가?”
“어찌 전하와 소신을 감히 비교할 수 있겠사옵니까? 대공 전하는 이 나라 포넬의 유일한 태양이신 분이시옵니다. 그런 전하에 비하면 소신은 한낱 반딧불에 불과할 것이옵니다.”
“하하하! 하하하하!”
아부. 그것도 지독한 아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메즈는 기분이 좋아졌다.
아부를 들어서 기분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아부를 한 이가 에인세였기에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에인세는 자신에 이어 포넬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런 에인세가 이처럼 아주 작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고개를 숙인 것도 모자라 이러한 아부까지 하여야 할 정도로 작금의 상황이 자신에게 일방적이라는 것 자체가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든 것이었다.
“아부가 지나치군. 하지만 자네에게 그러한 말을 들으니 더욱 기분이 흡족하군.”
“……!”
말로써 사람을 죽인다는 말이 있다. 지금의 경우가 그러했다. 고메즈는 이미 자신에게 항복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에인세에게 말로써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에인세의 자존심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말 한마디로.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에인세의 뒤통수를 고메즈의 차가운 시선이 여전히 주시하고 있었다.
“후작, 자네가 해 주어야 할 일이 있다네.”
“하명하시옵소서, 주군.”
상대가 아부로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한번 신하임을 자청한 지금에 와서 또다시 말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번 전쟁에 공이 있는 자들과 과가 있는 자들을 분별하도록 하게.”
공훈을 조사하라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이번 전쟁에서 획득한 모든 전리품들에 대한 분배의 기준 또한 세우라는 명령이었다.
보통 이러한 일은 최고 권력자가 직접 주관하거나, 아니면 그의 최측근인 자가 맡게 된다. 고메즈는 그 일을 에인세에게 맡기려 하고 있었다.
“소신에게 그러한 중임을 맡기려 하시다니…… 주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부탁하겠네.”
“예, 주군.”
에인세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고메즈의 시선이 그의 등 뒤에 박혀 있었다.
“저자는 믿을 수 없어.”
에인세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장식장이 움직이며 그 안에서 산발한 머리에 양쪽 눈 모두 하얗게 백태가 잔뜩 낀 장님 노파 한 명이 나타났다.
“알고 있어, 이 시끄러운 노파야.”
노파의 말에도 고메즈는 별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눈치를 보였다.
“클클클. 저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언젠가 네놈의 자식들을 잡아먹을 것임을 알려 주고 있다고.”
“그런가?”
“내 경고를 무시하는군. 그렇지?”
“후후. 할망구 말을 내가 무시할 리가 없지.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데에는 할망구의 조언이 절대적이었으니 말이야.”
“그런데?”
“한데 말이야 할망구, 난 지금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란 말이지. 그게 뭘 뜻하는지 알겠어?”
“…….”
“이제 더 이상 내가 원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무슨 짓을 해도 되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지. 내 말 알겠어?”
“흥! 언제부터 네놈이 그런 것을 신경 썼다고?”
“하하, 할망구도 조심해야 될 것이야. 계속 그런 식으로 날 무시하다간 언제라도 날 따르는 자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하는 수가 있다고. 알겠어?”
“큭큭큭! 미친놈. 네놈이 이렇게 클 수 있었던 것이 누구 덕분인지 잊은 것이냐? 네놈이 그 마법사 놈에게 시달림을 당하였을 때 네게 기회를 준 것이 바로 나였음을!”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을 만들어 냄으로써 일약 포넬의 권력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고메즈 대공이었지만, 그에게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을 만들 수 있게 해 준 이는 바로 이 노파였다.
노파가 어떻게 마법 아이템의 제작 기법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부분이 궁금하여 나름 조사를 해 보기도 하였지만 그에 대해서만큼은 그 무엇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어쨌든 노파에 의해 선택받은 고메즈는 마법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이용하여 지금은 포넬 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잘 알고 있지. 그러니까 지금도 할망구가 살아서 내 곁에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그것도 할망구만의 세상까지 만들어 주면서 말이야.”
“큭큭! 그건 거래의 조건이었을 뿐이지.”
“맞아. 그리고 난 할망구와의 거래를 충실히 지켜 왔고, 앞으로도 지킬 것이야. 하니 더 이상 내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알겠나. 응?”
고메즈의 목소리가 한껏 비틀려 있었다. 자신의 일에 간섭을 하려 드는 노파의 행동에 잔뜩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크크크! 그러지. 하지만 언젠가 네놈은 내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크크크큭!”
“…….”
노파가 벽장을 통해 다시금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한참 동안 고메즈는 차가운 눈빛으로 비밀 문인 벽장을 바라보았다.
“가급적 이번 일을 빠르게 처리하자는 재상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왕세자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공훈위원회에는 블리스 왕세자와 도르첸 공작 그리고 프리모 공작과 더글러스 후작, 로보 후작, 사뮤엘 후작, 제거 백작이 각 파벌을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종전이 되고 처음 열린 공훈위원회에서 위원장이 된 블리스는 프리모 공작이 제안한 빠른 일 처리에 동의하였다.
실상 이미 한차례 공이 있는 자들에 대한 포상을 한 일이 있었기에 구태여 시간을 오래 끌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이들이 서둘러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몇 가지 더 있었는데 이번 전쟁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영주들 중 몇몇 영지의 경우에는 주인이 정해졌지만 그 나머지 영지에 대한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어 있는 영지의 주인을 조속히 정하지 않으면 그 지역의 재건에 그만큼 시간이 더 걸릴 것이기에 서둘러 영지의 주인을 정할 필요성이 있었다.
또 하나 전쟁으로 인해 흩어진 민심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도 무엇인가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들일 눈에 띄는 행사를 빠른 시간 내에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그동안 보고된 모든 보고서들을 검토해 보도록 할까요?”
“그런 일이라면 굳이 왕세자께서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하, 하긴 그렇지요. 이런 일을 하기 위해 관리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 그들에게도 제 역할을 하도록 해 주어야겠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자! 그럼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일들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자신들의 위치에 맞는 일이라는 것은 바로 공훈자들에 대한 포상, 정확히는 몇몇 비어 있는 영지들의 주인을 정하는 일들이었다.
공훈위원회의 활동은 서로의 공조로 인해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울러 블리스와 도르첸은 양보할 것은 양보한다는 방침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의외로 이 문제에 대한 정치적인 대결이나 대립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공훈위원회는 1개월 정도의 활동만으로 모두가 공감하는 보고서를 채택할 수 있었고 이렇게 채택된 보고서는 1월 말일 날 메르타니온 국왕에게 전달되었다.
“흠…….”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는 메르타니온의 표정은 대체적으로 만족함을 표하고 있었다. 하나 보고서를 모두 읽을 때까지 알마리온에 대한 어떠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는 살짝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것이 최선이었느냐?”
“그렇사옵니다, 폐하.”
“정녕 이것이 최선이었다는 것이냐?”
“그렇사옵니다, 폐하.”
보고서를 가져온 블리스에게 보고서의 내용이 최선이었는지를 재차 물었지만 그에게서 나온 답은 처음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폐하, 혼테르 남작의 일에 대해서는 소신 또한 최선을 다하였지만 그들에게서 양보를 얻어 내려면 너무 많은 것을 내주어야만 했사옵니다.”
“으음……. 말해 보거라. 도르첸이 개입한 것이겠지?”
“…….”
“쯧! 하긴…… 그 친구는 다 좋은데 독점욕이 좀 강하다는 것이 늘 문제였지. 알겠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으마. 하면 언제 기념식을 거행하는 것이 좋다고 보느냐?”
“3월경에 했으면 하옵니다.”
“그때쯤이면 적당하겠구나. 하면 나머지 문제도 네가 잘 알아서 처리토록 하거라.”
“예,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어마마마?”
“내 말을 모르겠느냐? 난 그자가 다시금 왕도에 나타나는 것이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왕비인 헬레나는 전승 기념회를 주관하기로 된 아들 블리스를 찾아와 알마리온에게 전달될 초대장을 발송하지 말라는 부탁을 하였다.
“하오나 어마마마, 아무리 그와 막내가…….”
“그만! 감히 그따위 천한 잡종과 네 동생을 연관 지으려 하려는 것이냐!”
“그게 아니옵니다, 어마마마. 하오나 그 일은 단지 말을 만들기 좋아하는…….”
“한심하구나! 그런 소문이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나 치명적일 수 있는지를 정녕 모른단 말이냐? 게다가! 내 차마 이런 말을 하긴 그렇다만 그 아이는 아직도 그 천한 잡종 놈을 잊지 못하고 있단 말이다!”
“으음…….”
동생인 카산느가 여전히 알마리온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헬레나의 말에 블리스도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알겠느냐? 내가 괜히 이런 부탁을 네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겠사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마마마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사옵니다.”
“고맙구나.”
어머니인 헬레나가 나가자 블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냇동생인 카산느를 찾아갔다.
“어쩐 일이세요, 큰오라버니?”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구나.”
“제게요?”
“그래.”
한창 바쁠 블리스가 할 말이 있다며 자신을 찾아온 것도 그렇지만 그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다는 것이 카산느를 불안케 하였다.
“일단 앉자꾸나.”
“예…….”
“다들 밖으로 좀 나가도록 하시오.”
시녀들까지 모두 밖으로 내보내자 카산느의 불안감은 정도를 더했다.
“막내야.”
“예…….”
“너도 어머니께서 제국의 황자와 너와의 혼인을 추진하고 있음을 잘 알 것이다.”
블리스의 말에 카산느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
“후…… 나 또한 같은 일을 겪었으니 네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단다. 하나 네가 계속해서 그를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 너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흑…….”
블리스의 추궁에 카산느는 결국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런 동생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주어 품에 안았다.
“잊으려고 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흑흑!”
카산느 또한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동안 누려 왔던 것들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노력했어요. 한데 지난번에 그분을 뵈었을 때…….”
알마리온이 왕도에서 벌어진 일로 귀족 회의에서 그 문제를 논의하던 날 우연히 복도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 저도 모르게 그를 피한 것에 심적으로 큰 부담감을 느끼면서 그동안 꾹 눌러 왔던 알마리온에 대한 그리움이 폭발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 그래서 그분께 사과를 하기 위해 편지를 썼는데 그만…….”
“그랬었구나.”
“큰오라버니, 설마 이번 일로 그분께 무슨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예? 제발 그렇다고 대답해 주세요. 제발…….”
“특별히 다른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 그는 앞으로 많은 일에 초대받지 못하게 될 것 같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어머니께서 내게 직접 요청하셨단다. 그를 왕도에 오지 못하게 해 달라고 말이다.”
“예? 그게 무슨…….”
“이번 전승 기념식뿐만 아니라 앞으로 많은 공식적인 행사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란 뜻이다. 네가 혼인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어찌 되었든 그분은 왕국의 정식 귀족인 분이세요.”
왕국의 귀족이 왕국에서 벌어지는 공식 행사에 정식으로 초대받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다.
공식적으로 큰 죄를 짓지 않은 경우에 귀족들은 특별한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비공식적인 처벌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중 하나가 왕국에서 행하는 모든 공식적인 행사에 초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대단한 불명예로, 한번 이렇게 왕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되면 그것이 누가 되었든 모든 귀족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되었고, 설사 후에 이러한 처벌이 풀린다 하더라도 그러한 오명은 가문이 존재하는 한 계속하여 회자되게 된다.
귀족에게 있어서 명예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으로 때로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상당한 피해를 감수한다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한 일들도 서슴지 않고 벌이는 이들이 바로 귀족들이었다.
“어떻게……. 큰오라버니, 제발 그것만은 막아 주세요. 예? 그건 그분께 너무 큰 모욕이에요! 그분은…… 그분은 저에 대한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것을 오라버니도 아시잖아요? 그냥 저 혼자 그분을 마음에 담은 것뿐이었어요! 하니 제발…….”
“카산느, 그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단다.”
“그분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중요치 않다니요?”
“어머니께서 네가 그를 생각하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문제란다. 그리고 아버님 또한 그러하고. 그 문제에 있어서는 나 또한 두 분과 같은 생각이란다.”
“설사 그렇다 해도 그분께 그런 불명예는…….”
“그렇지. 가뜩이나 그의 출신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그를 경원시하는 상황에서 그러한 조치는 그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너는 네 행동에 더욱 조심을 했어야 한다.”
“흑흑! 그럼 어떻게 해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것을요! 흑흑흑!”
“후…….”
첫사랑이라는 것은, 카산느처럼 어린 소녀에게는 각인刻印이 되어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게 된다.
그런 첫사랑이 이루어지게 되어 해피엔드로 끝나면 좋겠지만 역설적으로 대부분의 소녀들은 그러한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랄 때도 많았다.
순애보라는 것은 해피엔드로 끝나기보다는 비극적인 이별일 때 더욱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녀들은 자신이 그러한 순애보의 여주인공이 되기를 꿈꾸곤 하였다.
막냇동생인 카사느가 그저 그러한 순애보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알마리온을 사모하게 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를 사모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와 같이 무모한 행동을 이 아이가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한때 왕궁에서 일하던 시녀를 사랑했던 경험이 있었고, 당시 블리스는 그 시녀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일 때문에 어머님께서 더욱더 카산느에게 신경을 쓰고 계시니. 어쩌면 어머님께서 이처럼 정도 이상으로 그를 경계하시는 것도 모두 전례가 있기에 그러시는 것이니…….’
다음 대의 로엔 왕국을 이끌어 나갈 왕세자가 애정 행각을 위해 몰래 왕궁을 빠져나갔다는 것이 밝혀지자 한때 왕국 전체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헬레나는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카산느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애꿎은 막내만 고생을 하는군,’
또다시 왕실이 망신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카산느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있던 헬레나는 카산느가 알마리온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치를 떨며 블리스를 찾아가 알마리온에게 공식적으로 왕국에서 행하는 모든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 것이었다.
“미안하구나. 지금으로써는 이것이 너에게, 그리고 왕실에 최선인 것 같구나.”
“큰오라버니. 제발…….”
“막내야, 너 또한 내가 벌였던 어리석은 행동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나와 함께하였던 그 여인의 최후가 어찌 되었는지도 말이다.”
“오라버니…….”
“그녀와 네가 사모하는 혼테르 남작의 차이점은 그녀에게는 그녀를 지켜 줄 배경이 없었기에 결국은 불경죄와 왕실모독죄로 처형을 당했다는 것이지. 하지만 말이다. 네가 계속 그에게 마음을 주고 또한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면 아무리 그가 왕국의 일곱 번째 익스퍼트라 하더라도, 그리고 왕국의 귀족이라 하더라도 그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으음…….”
“그에게는 적이 많고, 적들은 아무리 작은 허점이라도 얼마든지 그것을 최대한 활용할 것이니 말이다.”
“흑흑흑!”
“자중하거라. 그것만이 네가 사모하는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
“흑흑!”
방을 나서는 블리스의 등 뒤로 카산느의 서러운 흐느낌 소리가 그림자처럼 뒤를 따랐다.
“이것이 이번에 초대될 자들의 명단입니다.”
집사장관인 제거 백작에게 기념식에 초대할 왕실 명의의 명단을 넘기는 블리스였다.
“하온데 한 장이 빠진 것 같사옵니다, 전하.”
“아! 이것 말인가요? 이것은 본인이 직접 보내도록 할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알겠사옵니다. 하면 이 명단대로 초대장을 발부하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렇게 하세요.”
제거 백작이 나가자 왕세자인 블리스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떠났다.
한데 그의 책상 위에 남겨진 초대장에는 한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남작’이라는 이름이 멋들어진 필체로 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