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수고하셨습니다, 주군.”
영지로 돌아오자 알마리온을 가장 먼저 반겨 준 이는 한센이었다. 이미 사전에 전령을 보냈기에 한센이 일부 병력을 이끌고 영지의 경계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다.
“하하, 드란 경을 보니 집에 온 느낌이 드는군요.”
“안녕하세요, 총관 아저씨?”
“하하, 그래. 여우 너도 그동안 잘 지냈느냐?”
“예! 총관 아저씨.”
“한데…… 이쪽 분은…….”
“아! 일단 약식으로 인사를 나누도록 하세요. 앞으로 날 도와줄 하인리히 그나이제나우 경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내가 가장 많이 의지하는 분이자 영지의 총관이신 한센 드란 경입니다.”
앞으로 자신을 많이 도와줄 것이란 말은 가신을 뜻하는 말이었다.
“반갑소. 한센 드란이라고 하오.”
“반갑습니다. 하인리히 그나이제나우라고 합니다. 오는 동안 주군께 드란 경에 대한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나 또한 잘 부탁하겠소.”
하인리히에 대한 첫인상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에는 절도와 정중함이 담겨 있었기에 의외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였다.
“그동안 영지에서는 별일 없었습니까?”
“큰일은 없었습니다, 주군. 영주님께서 왕도로 향하신 이후부터 지금까지 교대로 몬스터 토벌 작전을 계속해서 수행 중에 있습니다.”
“피해 정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열다섯 명이 전사하고 서른일곱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흠…….”
“죄송합니다, 주군.”
“전사자와 부상자 들에 대한 처우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일단 전사자들 중 가족들이 있는 자들은 시신을 가족에게 넘기고 장례식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규정에 따라 가족들에게 보상을 하였습니다.”
의용군 시절부터 알마리온은 전사자에 대한 보상 규정을 두고 있었다. 당시에는 부족한 재정으로 인해 충분한 보상을 하지 못하였지만 영지에 온 이후에는 재정 상태가 충분해지자 전사자의 가족들이 곤궁하게 살지 않을 정도의 보상은 물론, 세금을 유예해 주는 혜택을 주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잘하셨습니다.”
“부상자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치료를 하였고, 불구가 된 병사들을 제외한 병사들은 이미 모두 부상을 회복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입니다.”
“불구가 된 병사들은 어느 정도입니까?”
“열한 명이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모두 보상 규정에 따라 보상을 하였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 주군. 영지 내에 전사한 병사들이나 부상병들에게 보상을 해 주는 규정이 있는 것입니까?”
보상 규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곁에서 듣고 있던 하인리히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그러한 규정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아! 그런 규정은 주군께서 만드신 것이라오.”
“주군께서 말씀이십니까?”
“그렇다오. 주군께서는 얼마 전까지 제1의용군 사령관이셨는데…….”
한센이 전사자나 부상병 들에 대한 규정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하였다. 그러한 것을 설명하면서 한센은 하인리히에게 알마리온이 얼마나 뛰어나고 자비심 많은 주군인지를 확실하게 알려 주려 하였던 모양이다.
“하하. 그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드란 경. 그나이제나우 경도 이미 충분히 알아들으셨으니 말입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주군.”
“어쨌든 고생들이 많군요. 하면 지금은 어느 분이 영지에 남아 있습니까?”
“레오폴트 경께서 이틀 전 작전을 마치시고 교대하여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형님께서 영지에 계시군요.”
리처드가 영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말에 잘되었다 싶었다. 영지에 도착하면 조직을 개편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게르혼족 출신 병사들 중 눈에 띄는 자가 있는지는 살펴보았습니까?”
“눈에 띄는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경험이 풍부한 한센의 눈에 띌 정도라면 그 또한 보통의 인물은 아닐 가능성이 높았기에 기대감이 들었다.
“어떤 사람입니까?”
“본인 스스로는 대초원을 떠돌다가 사냥꾼들에게 잡히는 바람에 노예로 팔렸다고는 하는데 하는 행동을 보아서는 아무래도 꽤나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가요?”
“예, 주군. 한데 속하가 그자를 눈여겨 살펴본 결과 그는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지 않고 있는 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모집한 게르혼족 출신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이 필요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감추려 해도 감출 수가 없을 때가 있었다.
알마리온은 소렌토로 떠나기 전, 5백 명이나 되는 게르혼족 출신 영지병 신병들에 대한 훈련, 그것도 강도 높은 훈련을 지시했다.
아무래도 1천 명이 넘는 영지병 전부를 리처드와 요들에게만 맡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전장에서 함께하던 백인대 대장들 중 단승 작위를 주어 지휘관에 임명하기 위해서였는데, 그중 한 명 정도를 게르혼족 출신에게 배려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드란 경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정도라면 분명 대단한 인물이겠군요.”
“주군께서 눈여겨보셔도 좋으실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성에 도착하자 리처드와 요하네스가 그를 반겨 주었고 이들에게도 하인리히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러니까 조직을 재편하겠다는 것이지?”
“예. 아무래도 그러는 것이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거야 영주인 네 마음이지, 뭐.”
“형님도 참……. 어쨌든 내년 봄에는 2왕자 전하께서 추천해 주신 몇몇 분들이 영지로 이주해 올 것입니다.”
“그래?”
알마리온의 상세한 설명에도 리처드는 그저 심드렁해 있었다.
‘형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상대방의 감정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무슨 생각까지 하는지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설사 상대방의 생각까지 읽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알마리온은 결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분들이 오시게 되는 것입니까?”
“행정 경험을 가지고 계신 분들과 교육을 담당하실 분이십니다.”
“교육을 담당하실 분이라 하셨습니까?”
교육을 담당할 이가 영지로 올 것이란 말에 한센은 흠칫 몸을 떨었다. 기사 작위를 받은 후에 한센과 요들은 교육의 교 자만 들어도 혈압이 올라가 버릴 정도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하, 교육을 담당하실 분이 오신다니 이상한가요?”
“흠! 흠! 그것이…….”
자신의 말에 당황해하는 한센을 보며 알마리온은 웃음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하, 그렇게 걱정하시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일단 그분은 앞으로 영지에 정착할 분들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함께 오시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본 그분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성분이셨습니다.”
“여성이라고 하셨습니까?”
“호! 여자라고 하니 금방 관심을 보이시는군요?”
“예? 아! 그, 그것이…….”
“공작 부인의 먼 친척분이 되시는 분이신데 이름이 마리아 노엔이라고 하시더군요. 혼인하신 후 얼마 안 지나서 전쟁이 나는 바람이 미망인이 되신 분이라고 하시더군요.”
“아…… 예.”
구태여 이렇게까지 설명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한센이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자 좀 더 그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상세히 설명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모두 다섯 분과 그 가족들이 이곳 영지로 오시게 될 것이니 그에 대한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주군.”
“아니, 그 일은 드란 경이 아니라 요하네스 경이 맡아 주도록 하십시오.”
“예? 하지만 그러한 일은 총관인 드란 경이 맡아야 할 일이지 않습니까?”
“드란 경은 이제 곧 다시 군에 복귀하실 것입니다. 하니 요하네스 경께서 드란 경을 대신하여 총관 업무와 집사 업무를 맡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주군.”
말이 나온 김에 알마리온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말하였다.
“형님.”
“…….”
무엇인가에 넋이 빠져 있던 리처드는 알마리온이 부르는 것조차 모른 채 멍한 눈빛으로 창밖의 먼 산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
“…….”
“형님!”
“어? 왜? 무슨 일 있어?”
“아닙니다, 형님. 아무래도 좀 피곤해 보이시는 것 같은데 이만 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그럼 그러지 뭐. 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하겠네.”
“예. 그러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형님.”
리처드가 집무실을 떠나자 알마리온의 시선이 한센을 향했다. 리처드가 왜 저러는 것인지를 아느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하나 한센 또한 리처드가 성으로 귀환한 이후부터 줄곧 같은 증상을 보이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왜 그런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고개를 살짝 가로저어 보였다.
“일단 하던 이야길 마저 해야겠군요. 형님께서 이곳에 계신 것으로 보아 백인대장인 카일 또한 영지에 돌아와 있겠군요?”
“예. 그렇습니다, 주군.”
“일단 그를 소환하여 주십시오.”
“예, 주군.”
얼마 후 휴식을 취하고 있던 카일이 집무실에 나타났다.
“충!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어서 와요.”
아무런 사전 언질도 없이 갑작스러운 소환을 받은 카일은 내심 무슨 일인가 싶기도 하였지만 내심 불안하기도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렇게 갑자기 영주의 호출을 받을 정도로 잘못한 일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의 호출을 받게 되면 하급자의 입장에서는 가슴이 조마조마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카일.”
“예? 예…….”
“오늘 이렇게 그댈 호출한 것은 그대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소식이라면…….”
“카일, 그대를 나의 기사로 받아들이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예? 그게 무슨…….”
카일이 놀란 만큼 다른 사람들의 놀라움도 컸다. 기사를 두는 것은 어디까지나 귀족의 특권이었다. 따라서 능력만 된다면 얼마든지 기사를 둘 수 있었다.
“하하, 카일! 축하하네. 이제 자네도 어엿한 기사가 되는군. 하하하!”
여전히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멍청한 표정으로 알마리온을 바라보고 서 있는 카일에게 한센이 다가가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축하해 주었다.
한센과 카일 그리고 도일은 북부군에서 함께 10여 년 가까이 근무를 하면서 친해진 동료들이었다. 그런 만큼 자신은 알마리온과의 인연 덕분에 승승장구하여 그의 기사가 되어 승승장구하는 것에 대한 심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뭐 하는가? 어서 주군께 감사와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어? 어…… 가, 감사합니다, 주군. 부족한 소인을…….”
여전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얼떨떨하기만 한 카일은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간 상태에서 한센이 이끄는 대로 알마리온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였다.
“카일, 그대에게 젠더라는 성을 내리겠소. 앞으로도 나를 위해 그리고 영지를 위해, 영지민을 위해 충성과 봉사 그리고 희생을 다해 주길 바라겠소.”
“충!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주군!”
“요하네스 경.”
“예, 주군.”
“얄란족의 하얀이리 족장님께 얄란족 최고의 장인을 보내 주십사 요청하도록 하세요.”
“예, 주군.”
드워프의 혈통을 이은 얄란족이 쇠와 가죽을 다루는 기술은 실로 대단하였다. 이들이 만든 무구는 최상의 상품으로 테일러 상단을 통해 전국에 팔려 나가고 있었다.
알마리온을 비롯하여 리처드, 한센, 요들 또한 이들 얄란족의 장인이 제작한 무구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영지의 병사들이 사용하는 무구들도 모두 얄란족이 제작을 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젠더 경은 개편되는 영지군의 제4대 대장으로 임명하겠습니다.”
“충!”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지 카일의 목소리에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리고 드란 경.”
“예, 주군.”
“드란 경을 영지군 부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아울러 제1대 대장직도 함께 맡아 주도록 하십시오.”
“충!”
“그나이제나우 경.”
“예, 주군.”
“경은 제3대를 맡아 주십시오.”
“충!”
알마리온은 영지군의 규모를 1천 명으로 제한하였다. 이러한 영지군은 모두 5개의 대隊로 구성되며 각각의 대는 2백 명이 된다.
영지군 사령관에는 리처드를, 기병대로 구성할 제1대는 한센을, 제2대는 요들에게, 3대는 하인리히에게, 4대는 막 기사로 서임하고 가신으로 받아들인 카일에게 각각 맡길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제5대는 당분간 내가 직접 지휘하겠습니다. 드란 경은 그자를 5대로 배속시켜 놓으십시오. 아울러 부상당해 이곳에 남겨진 병사들 중 활동에 지장이 없는 병사들을 치안대로 소속을 옮기도록 하십시오.”
“하오면 치안대의 규모는 어느 정도이고 누구에게 맡기실 것입니까?”
“치안대의 규모는 1백 명 정도가 적당하겠군요. 그리고 치안대 대장으로는 도일을 임명할 것입니다.”
“도일이라면…….”
“그렇습니다. 도일 또한 이번에 기사 서임을 할 계획입니다.”
“아!”
친구인 도일 또한 기사로 서임될 것이란 말에 한센과 카일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곧 군이 퇴각을 하겠군요?”
“그렇습니다, 주군.”
로엔 왕국 최북단에 위치한 알마리온의 영지였다. 따라서 다른 지역에 비해 겨울이 빨리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가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조만간 이 지역에서 살아가는 몬스터는 겨울나기를 위해 닥치는 대로 먹잇감을 찾아 배회하게 될 것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몬스터들의 활동이 극에 달하게 되면, 특히 무리를 지어 겨울나기를 위한 사냥을 하는 오크들의 경우에는 아무리 수백 명으로 구성된 부대라 해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인간의 군대가 몬스터, 특히 겨울나기를 위해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오크와 같은 몬스터에게 당한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산이 많고 숲이 우거져 있는 북방 지역에서는 국경을 방비하기 위해 주둔해 있는 군마저 몬스터의 습격을 받아 피해를 입는 일도 곧잘 벌어졌다.
북부군에서는 매년 이런 식으로 겨울나기를 위해 무리 지어 떠돌아다니는 몬스터들에 의해 2∼3백 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잃곤 하였다.
북부군에서 복무하면서 한센과 도일, 카일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세 사람은 하나같이 몬스터를 효과적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단지 겨울이 되기 전에 미친 듯 몰려다니는 몬스터를 상대하기보다는 겨울이 끝난 봄부터 가을까지 몬스터의 개체 수를 확실히 줄여 두는 것만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의 이러한 조언을 받아들인 알마리온은 전쟁을 막 끝내고 휴식을 취해야 할 병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병사들을 몬스터 토벌 작전에 투입하게 된 것이었다.
예상 밖으로 왕도에 오래 머물 수밖에 없었던 알마리온이 테일러 상단의 물품 수송대와 함께 최대한 서둘러 영지로 돌아오게 된 것도, 조만간 이 일대 전 지역이 이러한 몬스터들로 인해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몬스터들의 활동은 눈이 내려 활동이 힘들게 될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고, 이듬해 봄이 될 때까지는 이들 몬스터고 인간이고 모두 눈에 갇혀 옴짝달싹도 못하는 고립된 생활을 하여야만 했다.
즉, 이 지역은 앞으로 두 계절 동안, 그러니까 최소 4개월에서 최대 5개월 동안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겨울철이 되어 강물이 얼게 되면 게르혼족들 또한 약탈을 위해 무리를 지어 국경을 넘어 부락들을 찾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약탈을 하고 있었으니 이들 지역은 그야말로 사람들이 살아감에 있어서 최악의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방어 거점에 대한 준비도 완료되었겠지요?”
“예, 주군.”
몬스터는 물론 게르혼족의 약탈에도 대비하기 위해 이들은 모두 다섯 곳의 방어 거점, 즉 요새를 건설하였다.
“또한 겨울나기를 위해 필요한 물품 또한 모두 비치해 놓았습니다.”
“새로이 만든 마을들 또한 자체적인 방어 시설은 완성되었겠지요?”
“물론입니다, 주군.”
알마리온의 영지에서는 기존의 6개 마을 말고도 광산에서 일하던 게르혼족 출신 노예들과 영지 내의 노예들 1천8백여 명을 새로이 조성한 4개의 마을에 나누어 이주시켰다.
이 4개의 마을 중 3개는 광산 근처에 건설하였고, 나머지 1개 마을은 영지의 동쪽, 그러니까 얄란족의 지역과 경계인 곳에 건설되었다.
다만 일단 다른 마을들처럼 몬스터 공격이나 게르혼족의 약탈을 막기 위해 주로 방어 시설을 먼저 건설하느라 아직 부족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처럼 4개의 새로운 마을과 기존의 두 곳의 요새를 포함한 다섯 곳의 요새, 그리고 이들을 서로 연결하는 길까지 단기간 내에 건설하거나 보수할 수 있었던 것은 7천여 영지민을 효과적으로 투입을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기도 하였지만, 새로이 조성된 4개의 마을은 로엔 사람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곳들이었다.
새로이 조성된 4개의 마을은 마을을 둘러싼 방책은 튼튼하게 만들어졌지만 그 안의 집들은 목재나 석재를 이용하여 지은 집들이 아닌 게르혼족 특유의 이동식 주택인 게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 마을들과 요새들을 연결하는 통로 또한 최대한 정비를 하였습니다.”
“수고하셨군요.”
“…….”
알마리온이 칭찬을 하자 다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거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몬스터 토벌을 위해 투입되었던 병력이 일단 모두 철수한 것은 알마리온이 영지에 도착한 지 닷새 후였다.
영지 병력 모두가 귀환하자 알마리온은 영지군을 재편하는 작업과 몇몇 직책의 변경 그리고 새로이 기사로 맞이한 하인리히와 카일 그리고 도일에 대한 기사 서임 의식을 거행하였다.
남쪽은 아직 한창 가을의 정취를 느낄 때이지만 북쪽에 위치한 알마리온의 영지는 이미 가을을 지나 겨울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땡! 땡! 땡! 땡! 땡!
요새 티모르에 갑작스러운 종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보고드립니다! 51번 포인트에서 몬스터 침입이 감지되었습니다!”
“51번 포인트인가?”
“예! 영주님!”
요새 티모르는 광산 서북쪽에 위치한 티모르 산의 이름을 딴 곳으로 영지 내에서 가장 몬스터의 활동이 많은 곳이었다. 때문에 이곳 요새 티모르에는 알마리온이 직접 2백 명의 병력을 이끌고 주둔해 있었다.
영지 주변에 설치된 결계는 여러모로 이들에게는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는데 이를 통해서 결계를 넘어오는 몬스터들의 존재를 빠르고 정확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규모는?”
“대략 50마리 정도입니다.”
“하면 적막한초원, 그대가 제2백인대를 지휘하여 그것들을 처리하도록 하게.”
또다시 자신을 지명하며 백인대 하나를 지휘하여 영지의 경계를 넘어온 몬스터 떼를 처리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자 유심한 눈빛으로 알마리온을 잠시 바라보았다.
‘혹시 이자가 나의 정체를?’
문득 의심이 들었지만 적막한초원은 이내 그것은 지나친 억지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이곳 혼테르까지는 말을 달려 2개월을 이동하여야만 했다. 그런 이곳에서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알 수 있는 자를 만난다는 것은 마른하늘에서 내리치는 번개에 맞아 죽는 경우보다 적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자는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동안 자신의 능력을 감추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던 적막한초원이다. 이미 하늘이 부여한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한차례 큰 곤욕을 치른 후, 쫓겨나듯 부족과 가족들로부터 도망쳐 나온 그였기에 더더욱 자신의 능력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것을 꺼렸다.
그런 적막한초원이 영지군에 편입된 것은 전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한, 다른 이들은 모두 자원하여 영지군에 편입되었지만 그만큼은 단지 건강하게 보인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훈련 중에도 가급적 눈에 띄지 않게 하였건만.’
영지군에 편입된 이후에도 그는 절대 눈에 띄지 않게 행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훈련이 끝났을 때쯤에는 이미 한센과 요들의 눈에 띄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백인대 대장이 되어 알마리온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고 있었다.
“알겠나?”
“예, 영주님.”
알마리온이 지도를 보며 필요한 작전과 주의 사항 등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을 대충 흘려들으며 딴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적막한초원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럼 수고하게.”
“예, 영주님.”
자신이 지휘하는 백인대를 이끌고 몬스터가 나타난 지점으로 이동을 한 적막한초원은 겨울나기를 위한 사냥을 하고 있는 오크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몬스터는 오우거나 미노타우로스와 같은 거대한 몬스터가 아닌, 바로 오크였다.
워낙 힘이 강력하여 훈련받은 병사들도 홀로 오크를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고 2 대 1로 오크를 상대한다 하더라도 부상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나 이들에게는 이러한 오크를 상대할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었다.
몬스터인 오크지만 유난히 후각이 떨어져 이들은 모든 것을 시각에 의존하였다. 때문에 다른 몬스터들을 사냥할 때와는 달리 접근 자체가 용이한 편이라는 것이 오크를 상대할 때 가장 유리한 점이었다.
“불 창을 준비토록 하시오.”
백인대에 속한 병사들이 오크 무리를 포위하자 적막한초원은 곧바로 불 창이라는 것을 준비토록 명령하였다.
불 창이라는 것은 무슨 특별한 신무기나 마법 무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기다란 장대처럼 만든 횃대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이를 불 창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이들이 몬스터를 상대하는 작전이라는 것은 알고 보면 무척이나 간단한 것들이었다.
인간이나 유사 인종들을 제외한 모든 동물들과 몬스터들은 공통적으로 불을 두려워하고 있었기에 불 창을 든 병사들은 이것을 사용하여 사냥감인 몬스터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활을 든 병사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최대한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만약을 위해 불 창과 활을 든 병사들은 검을 든 병사들이 지키는 방식이었다.
“예, 대장.”
적막한초원의 명령이 있자 준비하고 있던 병사들이 불 창에 불을 붙이고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한창 사냥에 열중하고 있던 오크들 무리에 일단의 소란이 벌어졌다.
크악! 큭! 크아악!
“공격!”
핑! 피융! 핑! 핑!
갑자기 나타난 많은 수의 인간들로 인해 당황하게 된 오크 무리가 혼란스러워할 때 화살들이 이들 오크들을 향해 쏟아졌다.
이에 성난 오크들 몇 마리가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리고 막 군에 들어온 신병들이라면 이런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며 잔뜩 겁을 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그동안 충분한 경험을 쌓은 노련한 병사들이었다.
게다가 이들 모두는 게르혼족들 출신이었고, 게르혼족들의 사내들 중 전사가 아닌 자들이 없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게르혼족 출신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상황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도, 경험도 풍부한 자들이었기에 오크들의 이러한 행동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는커녕 무모함만을 느끼게 하였다.
크악!
컥!
50여 마리의 오크들이 전멸당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피 냄새가 퍼지기 전에 서둘러 오크들의 가죽을 벗겨 내도록.”
“예!”
“그리고 나머지 병력은 주변에 덫을 만들도록 하시오.”
“예, 대장.”
오크들의 가죽은 잘만 손질하면 꽤나 고급의 아머armour를 만들 수 있는 고급 재료였다. 따라서 이렇게 사냥한 오크들의 가죽을 버리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부 병력으로 하여금 주변을 경계하게 한 적막한초원은 다른 병사들에게는 오크의 가죽을 벗겨 내도록 지시하였다.
다행히 이들이 50여 마리의 오크들의 가죽을 벗겨 내는 동안 또 다른 몬스터들이 나타나지 않았고, 그사이 버려진 오크의 사체들을 찾아오는 또 다른 몬스터들을 사냥하기 위한 덫까지 설치하는 작업까지 끝낼 수 있었다.
“그럼 모두 요새로 복귀하지.”
“예.”
오늘도 한 건 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병사들의 표정은 희희낙락 그 자체였다.
몬스터를 사냥하고 얻는 부산물은 병사들에게 있어서도 짭짤한 부수입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영지의 병사들은 매달 일정한 급료를 지급받았지만 이러한 부수입은 영주의 몫으로 일정 부분을 떼고는 모두 병사들이 공평하게 나누어 갖게 되어 있으니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들은 첫눈이 온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다가, 모든 생명체들이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충분한 눈이 쌓이면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렇다 해서 몬스터의 침입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처럼 중소형 몬스터들의 활동이 뜸해질 때면 대형 몬스터가 나타날 확률이 더욱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인간이나 중소형 몬스터들은 허벅지 높이까지 쌓인 눈으로 인해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지만 최소한 3미터가 넘는 대형 몬스터의 경우에는 그 정도 높이는 단지 발목에 닿을 정도이거나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정도일 뿐이었기에 이동을 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오히려 중소형 몬스터나 짐승들이 눈에 의해 꼼짝 못하게 되는 이러한 때가 대형 몬스터들이 가장 반가운 때였다.
땡! 땡! 땡! 땡! 땡!
“큰일 났습니다, 영주님.”
결계와 연결된 장치를 지켜보고 있던 병사가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알마리온이 머무는 방에 달려 들어왔다.
“모, 몬스터입니다. 그것도 대형 몬스터가 한꺼번에 2마리입니다.”
“그렇다면 트롤이겠군.”
대형 몬스터에 속하는 몬스터 중 홀로 다니지 않는 몬스터는 트롤밖에 없었다.
“일단은 내가 먼저 현장으로 이동하지. 적막한초원은 최소 인력만 이곳에 남겨 놓은 후 나머지 병력을 인솔하여 현장으로 오도록 하시오.”
적막한초원의 눈빛이 놀란 듯 알마리온을 바라보았다.
영지병이나 영지민 들 모두 알마리온이 익스퍼트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대형 몬스터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위한 특별한 함정이나 익스퍼트의 도움이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것도 알 만한 사람들이면 모두 알고 있었다. 하나 지금처럼 이동 자체가 힘들 정도로 눈이 쌓인 상황에서 알마리온 혼자 2마리의 트롤을 상대하러 나가겠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위험합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그놈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자칫 블랙스톤 마을이 위험해질 수 있소.”
“그렇지만…….”
“더 이상 옥신각신할 시간이 없으니 먼저 가도록 하겠소.”
그의 말처럼 옥신각신할 시간이 없었다. 눈이 많이 쌓여 있어 인간들의 발걸음으로는 오랜 시간 이동을 해야 하지만 트롤과 같은 대형 몬스터의 걸음으로는 1시간 정도면 충분히 블랙스톤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영주님!”
적막한초원이 도망치듯 달려 나가는 알마리온을 제지하려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제길! 다들 출동 준비! 요새에는 쉰 명만 남겨 둔다.”
“예!”
한편 홀로 요새를 벗어난 알마리온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제시간에 블랙스톤 마을로 향하는 2마리의 트롤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비상수단을 쓰기 시작했다.
‘실라이론!’
-불렀어?
‘부탁 좀 들어주십시오. 제 몸무게를 줄여 주십시오.’
-쳇! 또 같잖은 일만 시키네. 좀 제대로 된 일을 시키면 안 되나?
“…….”
바람의 정령과 불의 정령은 유난히 불만이 많았기에 이제는 이러한 불만을 듣는 것도 이력이 붙어 버렸다.
바람을 타자 알마리온의 몸은 거의 나는 듯 눈 위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40여 분 정도를 달려가자 앞서가는 2마리의 트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이군. 늦지 않게 도착을 했으니 말이야.”
산등성이 하나만 넘으면 블랙스톤이었고 그곳에는 백성들과 만약을 위한 경비대 스무 명 정도가 전부였기에 트롤을 상대할 만한 전력이 없었다.
물론 결계는 물론 만약을 대비하여 봉화대烽火臺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이 쌓여 있는 상황에는 그런 준비는 사실상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잠시 숨을 고른 알마리온은 2마리의 트롤을 상대하기 위해 검을 꺼내 들었다.
정령술사인 그였기에 굳이 무기를 들 필요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이 그렇게 들었기에 이처럼 무력을 사용할 일이 있을 때에는 무의식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실라이론, 저 두 놈을 넘어뜨린 후 꼼짝 못하게 붙잡아 주십시오.”
-꼭 그런 허접스러운 일을 꼭 내게 시켜야 하겠어?
“하하…….”
불평을 하긴 하였지만 실라이론은 알마리온의 부탁을 들어주어 2마리의 트롤을 넘어뜨린 후 트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온몸을 꼭 붙잡아 주었다.
쿵! 쿵!
마치 밀가루 위에 반죽 덩어리를 던졌을 때 사방으로 밀가루가 퍼져 나가듯 쌓여 있던 눈들이 거대한 덩치의 트롤이 넘어지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쿠아앙! 쿠앙! 크아악!
크아아악!
뭐, 몬스터라 하더라도 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일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럴 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꼼짝을 할 수 없게 되자 발버둥을 치려 하였다.
하나 그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2마리의 트롤은 괴성을 질러 대기 시작하였다.
크르르르! 크앙! 크아아앙!
-시끄럽네. 너 어차피 이놈들 죽일 것이지?
“예. 한데 왜……?”
실라이론이 왜 갑자기 트롤을 죽일 것인지 묻는 이유를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뭔가 큰 충격을 받은 듯 트롤의 몸이 한차례 크게 꿈틀거리더니 이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완전히 죽지는 않았어. 됐지? 그리고 말이야, 제발 부탁인데 이런 허접스러운 일에는 날 부르지 말라고. 알았어?
한차례 짜증을 부린 실라이론이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
“훗!”
짜증을 부리며 정령계로 돌아가는 실라이론을 보면서 알마리온이 웃는 것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2마리의 트롤을 완전하게 죽지 않게 만들어 놓은 것 때문이었다.
트롤의 피는 포션을 만드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다. 때문에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데 피의 신선도에 따라서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에서 피를 채취하게 되면 최상품의 포션 재료를 얻게 되는 것이고 1마리도 아니고 2마리의 피라면 단번에 수백 골드를 벌어들일 수 있었다.
결국 실라이론이 짜증을 부리긴 하였어도 자신의 소환자인 알마리온을 위해 이런 수고를 해 주고 떠나 버린 것이었다.
“훗!”
다른 병사들은 신선한 트롤의 피를 잔뜩 얻을 수 있게 되었기에 좋아들 하였지만 적막한초원의 표정은 잔뜩 굳어져 있는 것을 보며 알마리온은 홀로 웃음을 지었다.
다른 병사들은 익스퍼트인 알마리온이었기에 2마리나 되는 트롤을 상처도 없이 사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만큼은 어떻게 알마리온이 2마리나 되는 트롤을 상처도 없이 잡을 수 있었는지를 놓고 의문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저자는 익스퍼트의 능력으로는 이런 일을 벌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추측할 수 있는 정도로 익스퍼트의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군.’
적막한초원이란 자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의문점이 드는 부분이 많았다.
그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으면 그는 게르혼족 출신답지 않게 상당한 교육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게르혼족의 교육은 로엔이나 제국과 같은 교육과는 다른 전사가 되기 위한 교육이었지만 일반 전사들과는 달리 족장의 자제들 중에는 로엔인이나 제국인들을 특별히 초빙하여 교육을 받는 자들도 있었다.
‘또한 저자는 사람들을 통솔하는 일에 있어서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그러한 일을 오래전부터 해 온 것처럼 말이야.’
사람을 부린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마리온 또한 군을 처음 지휘하게 되었을 때 참으로 난감했던 부분이 바로 수천이나 되는 병력을 지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 한 명, 한 명이 자신의 명령에 따라 삶과 죽음이 갈리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었기에 그에 대한 심적 부담감은 그로 하여금 단 하루도, 아니 단 한순간도 그를 긴장시키지 않은 때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에게 있어서 가장 무거운 짐은 바로 영지민들의 안전과 병사들의 안전이었다.
이처럼 겉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사들을, 그리고 영지민들을 지휘하고 통치하였지만 실상 그는 지금도 이러한 상황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하나 적막한초원이란 자는 비록 자신을 숨기려 하고 있어도 그에게는 사람들을 지휘하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심적 부담감이 전혀 없음을 알마리온은 느낄 수 있었다.
‘궁금하군.’
은밀히 적막한초원이란 자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지만 영지에 남게 된 게르혼족들 중에는 그에 대해 아는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단지 그가 언제부터 노예 상인에 의해 영지로 들어오게 된 것인지만 알 수 있었을 뿐이다.
“챙길 것은 모두 챙긴 것 같군요.”
“아?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영주님.”
“하면 트롤의 시체를 분해하여 요새로 돌아가도록 하지요.”
트롤의 시체를 분해하여 요새로 돌아가라는 것은 요새 근처에 트롤의 시체를 놓아두고 피 냄새를 맡은 다른 몬스터가 오기를 기다렸다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예, 영주님.”
이렇게 알마리온의 영지는 외부와 차단되어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격리된 채 하루하루가 위험한 겨울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제 적들을 완전하게 전멸시킬 수 있게 되었는데 저들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다니요!”
더글러스는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포넬군은 이제 최후를 앞둔 패잔병들일 뿐이었다.
한데 갑자기 전투를 중지하라는 명령과 함께 소렌토에서 프리모 공작이 직접 전장인 쿠덴베르까지 행차하여 연합군인 제국군 사령관 에그먼트 폰 가드너 백작과 함께 포넬군 부사령관인 카마인 폰 하퍼 백작과 협상을 벌여 오고 있었다.
“후작, 이것은 그렇게 감정적으로 처리할 일이 아님을 후작 또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전하! 이제 단 며칠만 더 몰아붙이면 되는 일입니다!”
“후…….”
포넬의 갑작스러운 침략으로 인해 로엔은 상상하기조차 싫을 정도의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런 엄청난 피해를 준 포넬군을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은 상태에서 갑자기 군을 물리고 적들에게 무사히 제 나라로 돌아가게 하라니 그런 상황에서 열 받지 않을 군 지휘관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네들은 모두 나가 있도록 하게.”
“예? 예…….”
다른 지휘관들과 부관들 모두를 밖으로 내보낸 후 프리모 공작은 더글러스 후작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진정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잘 듣게. 자네 말대로 왕국은 지난 수년 동안 저놈들 덕분에 파탄 지경에 이르렀네. 게다가 이번 전쟁으로 인해 우리 가문의 선조들이 수백 년에 걸쳐서 이룩해 놓았던 것들 대부분의 것들이 또한 사라졌지. 그런 상황에서 난들 좋아서 이런 짓을 하는 줄 아는가? 엉?”
“…….”
“하지만 생각해 보게. 이 상태로 전쟁이 끝나게 되면 누가 가장 좋겠는가? 음?”
“그건…….”
“맞네. 이대로 전쟁이 왕국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면 그 모든 영광이 국왕에게로 돌아가게 된다네. 그렇게 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음…….”
“게다가 나와 자네가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에 왕도에 남은 그 멍청한 놈들은 국왕도 아닌 왕세자에게 휘둘려 스스로 발에 족쇄까지 달아 버렸네.”
“…….”
“이제 자네 또한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우리에게 불리한지 잘 알고 있겠지?”
“후…….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하면 앞으로의 상황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제국 측에서는 우리에게 약속했던 것들을 최대한 빠르게 제공을 할 것이네. 아울러 포넬 측에서도 배상금을 준비하기로 하였다네.”
“그것만으로 충분하겠습니까?”
“지금으로써는. 어쨌든 지금으로써는 국왕에게 승전의 월계관까지 줄 수는 없다네. 그랬다가는…… 자네도 알겠지?”
전쟁 초반 귀족들의 불협화음으로 제대로 된 반격조차 취하지 못한 채 전열이 무너졌고, 이후 이를 다시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렀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러다 전황이 로엔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간 것은 국왕이 전면에 나선 이후부터였고, 결국 승기를 잡고 포넬군을 궁지에까지 몰아넣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모든 영광은 여지없이 국왕에게 집중될 것이고, 전쟁 중에 세를 불린 국왕은 이후 그동안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귀족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당한 것만으로도 이들은 충분히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지요. 절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요.”
“자네도 이제 이해해 주니 다행이군.”
군사령관인 더글러스 후작 또한 프리모 공작의 의견에 동의를 하자 포넬군과의 협상은 급물살을 탔고, 종전을 위한 협상이 타결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그렇게 끝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로엔 왕국을 황폐하게 만들고 얼마나 되는 이들이 전쟁 중에 죽거나 실종되었는지 그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한 이 전쟁은 이렇게 제대로 된 끝마무리조차 보지 못한 채 대륙력 3,841년 12월 27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