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논란 (35/70)

논란

소렌토를 강타한 하나의 충격적인 소문이 있었다. 일명 ‘열흘간의 혈투’ 또는 ‘1인 군단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이 사건은 순식간에 퍼져서 소렌토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근위군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테일러 상단의 쿠엔토, 총관인 아담 그리고 당돌한여우가 두 명의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알마리온이 나오자 이내 다가가서 반갑게 그를 맞이해 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주군.”

“고생하셨습니다, 영주님.”

“대족장님!”

사흘 동안 근위군 사령부에서 빈민촌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경위서를 작성하고, 근위군 사령관인 로엔달 백작, 국왕파와 각 파벌의 귀족들이 포함된 귀족 조사단, 대법관장인 제임스 폰 파트월 백작, 그리고 소렌토에 존재하는 12신전의 대사제들로 구성된 심문관들의 심문을 받은 알마리온은 일단 귀가 조치를 명령받고 근위군 건물을 나섰다.

“나 때문에 걱정들 많았겠군요.”

“많이 야위어 보이십니다, 주군.”

빈민촌에서의 열흘 동안의 1인 전쟁과 그 전쟁을 벌이며 수도 없이 했던 심적, 영적 흔들림. 거기에 지난 사흘 동안 합동 조사단의 혹독한 조사를 받은 알마리온의 상태는 한눈에도 그간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음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많이 힘들어 보이세요, 대족장님.”

알마리온을 보자마자 그의 품에 뛰어든 당돌한여우는 슬픈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걱정이 된다는 듯 위로의 말을 해 주었다. 이처럼 순수하게 자신을 위로해 주는 당돌한여우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흑주단같이 짙은 검은색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좀 그렇구나.”

“마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곧 저택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아닌 게 아니라 지난 13일 동안 있은 일로 인해 알마리온은 거의 탈진해 있는 상태였기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정의를 위한,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행한 일이라 하더라도 홀로 2천여 명에 가까운 인명을 살상하였다는 것은 그를 가장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알마리온은 간단하게 몸을 씻은 후 하루 반나절이나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모두가 잠들어 있는 깊은 새벽 시간이었다.

“…….”

-후회하냐?

‘실레스틴 님.’

-네가 한 일에 대해 후회하느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후회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다만?

‘내게 그들을 단죄할 자격이 있었는지 그것이 지금도 판단이 되질 않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극악무도한 악행을 저질렀다 해도 그들을 그렇게 처단할 정당한 권리가 자신에게 있었는가에 대해서 알마리온은 지금도 자신할 수가 없었다.

이는 사제들과 동료 귀족들, 법관들이 행한 조사와 심문에서도 가장 자주, 그리고 많이 거론된 문제였다.

만약 알마리온이 이번 일로 처벌을 받게 된다면 그의 죄목은 정당한 권리 없이 2천 명에 달하는 인간을 살해했다는 살인 죄목으로 중형을 받게 될 것이다.

-정당한 권리? 웃기는군. 누가 있어 그런 권리를 남에게 부여할 수 있는 것이지?

‘그건…….’

-너희 인간들이 만든 법과 제도란 것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러한 것이 있기에 세상은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질서이지? 결국에는 그 또한 신이 아닌 너희 인간들이 만든 허울일 뿐이야.

‘그렇게만 말씀하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한 법과 제도가 없었다면 인간 세상은 더 많은 자들이 고통 받고 신음했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건 또 다른 인간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설사 네가 그렇게 충성하는 국왕이란 자가, 그리고 신을 모신다는 사제들이 네게 그런 명령을 내렸다 해서 그것이 과연 신이 부여한 정당한 권리일까?

‘그건……,’

실레스틴의 말처럼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정당하고도 온전한 권리를 지닌 신이 아닌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부여된 권리라는 것도 결국은 온전한 권리는 아니긴 마찬가지였다.

-정말 너희 인간들이 웃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

-그건 말이야. 군을 동원해서, 그리고 사제들이 그들을 공격하였을 때에는 그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말하고 칭송한다는 것이야.

“으음…….”

실레스틴의 지적처럼 똑같은 일을 행했다 하더라도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한 행위는 칭송을 받지만, 그러한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 자에게는 정반대로 비난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네가 진정으로 그들로 인해 더 많은 고통을 받는 나약한 자들을 위해 그러한 일을 행한 것이라면, 넌 인간들의 심판들을 두려워할 이유도, 그리고 신의 심판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을 것이야.

아무리 사명감을 가지고 행한 일이라 하더라도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러한 사명감 같은 것은 단지 허울 좋은 명분일 뿐이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또한 모두가 옳은 일이라 하여 당대에는 칭송을 받던 이도 시간이 지나고 또 다른 가치관이 생겨나면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인간들에게 있어서 옳고 그름이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그리고 가지고 있는 생각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었다.

결국 인간사에 있어서 영원불멸한 것은 타인에 의한 판단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른 정당함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늘 양심의 가책을 여길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특히 자신의 영달을 위해 행한 일이 아니라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이 받을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행한 일이라면.

설사 그 행위로 인해 모두로부터 지탄을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죄를 받고 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당한 행위라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실레스틴 님.’

-흥! 입에 발린 소리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실레스틴의 노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알마리온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 어떤 위로의 말을 들어도, 그리고 자신의 행위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평가를 들어도 그는 결코 지난 열흘 동안 자신의 손으로 행한 일들을 스스로 용서할 수는 없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타인에게도 용서를 구할 생각조차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는 스스로를 살인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엔다이론, 내 몸을 씻겨 줘.’

실레스틴과의 대화를 끝낸 알마리온은 물의 상급 정령인 엔다이론을 소환하여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정성을 들여 제단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손에 의해 죽은 자들을 위한 망자를 위한 의식을 위해서였다.

“설사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의 손에 의해 죽은 자의 수가 무려 2천에 달합니다! 2천! 이는 아무리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지나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소관은 그가 악마에 의해 영혼이 물든 악인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들은 그를 전쟁 영웅이라 말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얼마나 잔인하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라면 모두 아실 것입니다.”

“흥! 그거야 적을 죽인 것 아니오? 하면 전장에서 어떻게 적을 죽여야 한다는 것이오? ‘아이고! 제가 당신을 죽여야만 하는데 잠시 가만히 계셔 주시겠습니까? 가급적 아프지 않게 단번에 죽여 드리겠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한단 말이오?”

“하하하!”

“하하하하!”

연회장으로 쓰이던 곳은 연회를 위해서가 아닌, 알마리온이 벌인 일들에 대한 논의를 위해 소렌토에 남아 있는 귀족들 전원이 연회장에 모여들었다.

최근 소렌토에 사는 이들이라면 신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두 사람만 모여도 알마리온이 벌여 놓은 엄청난, 믿기 힘든 일을 놓고 떠들어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일을 놓고 사람들은 알마리온의 행동이 정의를 위해 한 일이라고 옹호하며 그의 행동을 칭송하는 사람들과, 그가 어떤 생각에서 그러한 행동을 하였든 2천 명에 달하는 인명을 살상한 것은 분명 같은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행동이며 따라서 그 또한 단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견은 연회장에 모인 귀족들이라 해서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이들 또한 알마리온이 행한 일을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연회장에 모인 귀족들은 알마리온의 행위만을 놓고 논쟁을 벌인다는 것이 아닌, 거기에 각자의 이해에 따른 정치적인 문제까지 끼어들어 더욱 복잡하고 또한 원색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도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처형한 것도 모자라 그 가족들을 모두 노예로 팔아 버린 자요! 그런 자에게 정의란 것이 과연 있기나 할까요? 그는 단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신의 뜻에 반하는 자라면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따르는 법이라는 훌륭한 제도를 이용하는 자일 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오!”

“캠 남작이 말한 그들이란 영지를 관리해 오던 관리들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입니다. 그들은 누대에 걸쳐 충성을 다해 왕실 직영지를 관리해 오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과, 그들의 일가 모두를 법을 이용하여 처단하고 노예로 팔아 버린 후 그들의 재산을 모두 빼앗은 것이 과연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옳소!”

짝짝짝짝!

“그거야 그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그곳 백성들을 착취하였기 때문 아닙니까? 무엇보다도 직영지였던 곳에서 양질의 광산이 발견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궁내부에 전혀 알리지도 않은 채,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것을 캐내어 착복하였소. 만약 남작의 영지에서 남작 몰래 그러한 일이 벌어졌다면 남작은 그런 자들을 용서할 수 있겠소?”

“그건…….”

“이번 일도 그렇습니다. 그곳은 정규군을 동원해서라도 철저하게 손을 보려 했던 곳입니다. 한데 혼테르 자작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인해 구태여 그렇게 할 필요성이 없게 되어 버렸을 뿐입니다. 그것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혼테르 자작의 행동은 마땅히 영웅적인 행동으로 모두의 치하를 받아야 마땅한 행동이었습니다!”

“옳소!”

짝짝짝!

“우!”

한쪽에서는 환호성과 박수가, 또 다른 한쪽에서는 야유가 일었다. 이러한 일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만! 그만들 하세요.”

몇 시간째 이러한 모습이 계속되자 국왕을 대신하여 이날의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블리스 왕세자가 모두를 조용히 시켰다.

“대법관장.”

“예, 왕세자 전하.”

블리스 왕세자의 호명에 처음 알마리온을 심문할 때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대법관장인 파트월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관들의 판단은 어떻습니까?”

블리스 왕세자의 질문에 파트월 백작은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도 이번 문제를 놓고 수차례 격론을 벌였지만 지금 모습처럼 평행선만 그린 채 서로에 대한 감정만 상하는 상황만 벌어지고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관들 또한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입니까?”

“송구하오나 그렇습니다, 왕세자 전하.”

“흠…….”

법관들 사이에서도 똑같은 상황만 반복될 뿐 아무런 결론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에 블리스 또한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법리적으로 판단하였을 때, 혼테르 자작의 행위는 어떠합니까?”

“법리적으로만 따진다면…… 혼테르 자작에게 그 누구도 그러한 일을 행하라는 정당한 권리를 부여한 일이 없으니 당연히 그의 그러한 행위는 불법적인 일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전하.”

“하면 그는 죄인이겠군요?”

“왕세자 전하!”

블리스가 알마리온을 죄인으로 몰아가자 그를 지지하는 국왕파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본인은 지금 대법관장에게 법에 대한 것을 묻고 있습니다.”

메르타니온 국왕이 냉정하고도 계산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 준다면 블리스 왕세자는 차분하고 조용한, 자신의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조용히 좌중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의 무서운 점은 내 편이라 해서 모든 것을 옳다 두둔하지 않고, 적이라 해서 잘한 행동을 폄하하거나 평가절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론의 기회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드리게 될 것입니다. 하니 그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세요.”

“…….”

블리스의 말에 모두가 흥분을 가라앉힌 채 자리에 앉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블리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면 왜 그에 대한 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이…… 단지 그러한 법만으로 혼테르 자작을 처벌할 수는 없기 때문이옵니다.”

“무슨 뜻인가요?”

블리스 왕세자는 학자풍의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왕국의 모든 법전에 대해 정통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묻는 것은 법관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논쟁에 대해 몰라서가 아니라 이번 문제가 앞으로 벌어질 유사한 일에 대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귀족들이 함부로 백성들을 처벌하는 행위를 없애야 한다.’

그동안 귀족들에게는 즉결 처분권이라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 권리에 따르면 귀족들은 자신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침해하는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백성들을 즉결 처분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어 있었다.

블리스는 이러한 권리야말로 로엔을 약화시키는 악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왕실을 비롯한 귀족들 모두는 필요한 때에만 법을 거론하고 있었다. 즉, 자신들의 권리와 권위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발생하면 이들은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 온갖 법을 들먹거리지만, 정작 자신이 법에 의해 통제를 받게 될 경우에는 법이 아닌, 자신이 가진 힘의 크기로 마음대로 법을 무시하거나 왜곡시킨다.

블리스 왕세자는 이러한 관행을 이번 기회에 조금이라도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국왕인 메르타니온에게 청원하여 이번 일을 자신이 처리할 수 있도록 위임을 받았던 것이다.

“귀족우대법에 따르면 혼테르 자작은 자신에게 부여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옵니다.”

“왕세자 전하, 소관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출납원장이자, 동부 귀족 파벌의 수장인 루이스 폰 로보 후작이 고위 귀족으로서는 처음으로 발언권을 요청하였다.

“말씀하십시오, 로보 후작.”

“혼테르 자작에 의해 죽은 국왕 폐하의 백성의 수가 무려 2천 명에 달하고 있사옵니다. 따라서 귀족우대법에 의거한다 하더라도 이는 지나치게 법규를 확대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왕세자 전하, 소관 또한 발언권을 요청하옵니다.”

“말씀하세요, 공작.”

로보 후작에 이어 발언권을 요청한 이는 다름 아닌 도르첸 공작이었다. 같은 공작의 반열이라 하더라도 다음 대의 로엔의 국왕이 될 블리스와는 같을 수가 없었다.

“귀족우대법이란 귀족들이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그 권위를 침해받았을 경우 이를 바로잡기 위한 취지에서 만들어진 법입니다. 따라서 한 명의 어리석은 백성이 귀족에게 죄를 지었든, 수천, 아니 수만의 백성들이 귀족에게 죄를 지었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즉, 그러한 법이 만들어지게 된 취지는 어디까지나 귀족이라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고귀함을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흥! 그자는 처음부터 귀족의 혈통을 이은 자가 아님을 모르십니까? 그런 자를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 전통과 유서 깊은 가문의 후인들과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까?”

“후! 로보 후작, 아직 본인의 말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서는 것은 전통과 유서 깊은 가문의 후예인 그대가 할 행동이라고 보는 것인가?”

“그 무슨…….”

“또한! 그대의 로보 후작 가문이 언제부터 후작 가문이었지? 내 비록! 도르첸이란 성을 쓰고 있으나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 또한 대로엔이란 성을 사용했던 사람! 그대의 로보 가문이 감히! 로엔이란 성보다 높고, 유서 깊은 가문이라고 생각하는가!”

“……!”

로엔 왕국에 있어서 그 어떠한 성도 로엔이라는 성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귀족일 수 있는 이유, 그들이 남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로엔이란 성과 그 성을 따른 로엔이라는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전통을 따진다 해도 현존하는 로엔의 모든 귀족 가문은 로엔 왕가보다 유서 깊은 가문이 없었다. 로엔 왕가는 로엔 왕국 이전에 존재하였던 헤르겔 왕국 시절에도 당당히 후작 가문으로 성세를 구가하던 그러한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만 되었습니다. 공작께서도, 그리고 후작께서도 더 이상 본 사안과 관련이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거론치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송구하옵니다, 왕세자 전하.”

블리스의 말에 먼저 수긍한 것은 도르첸 공작이었다.

“로보 후작?”

“송구하옵니다, 왕세자 전하.”

“그럼 되었습니다. 그럼 도르첸 공작께서는 하시던 말씀이 아직 남아 있습니까?”

“예, 왕세자 전하.”

“알겠습니다. 하면 하시고자 했던 말씀을 마저 하시도록 하세요.”

“감사하옵니다, 왕세자 전하. 흠! 흠! 어쨌든 그러한 귀족우대법에는 경우에 해당하는 문구만 존재할 뿐, 그 수까지 정확히 규정한 것은 아니옵니다. 따라서 이러한 법규가 분명하게 그 한계를 표시하지 않는 이상 혼테르 자작은 법의 규정에 따라 죄를 물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도르첸의 말이 끝나자 또다시 국왕을 따르는 귀족들과 귀족 파벌에 속하는 귀족들이 귀족우대법을 놓고 서로 설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역시 숙부님이시구나. 순식간에 분위기를 혼테르 자작의 문제에서 귀족우대법의 개정 문제로 변질시켜 버리시다니 말이야.’

단 몇 마디의 말로 이제 더 이상 알마리온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는 이 없이, 모두가 귀족우대법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게 만든 도르첸을 보면서 블리스는 그의 뛰어난 언변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탕! 탕! 탕!

“그만! 그만들 하세요!”

설전이 격화되어 가자 블리스는 의사봉으로 바닥을 치면서 더 이상의 논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결국 귀족우대법이 개정되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까, 도르첸 공작?”

“그러하옵니다, 왕세자 전하.”

“로보 후작도 결국 같은 의견이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건…….”

지금까지 귀족우대법의 범위와 한계를 놓고 설전을 벌이면서 도르첸 공작의 주장에 반박하던 로보 후작의 주장은 결국 귀족우대법에서 그 한계를 분명히 설정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곧 귀족우대법의 개정을 거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귀족 파벌에 속한 귀족들 거의 모두가 국왕 파벌에 속한 귀족들의 의견에 무조건적인 반대를 하다 보니 결국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셈이었다.

‘어리석은 자들. 재상이 이 자리에 없다고 이렇듯 어리석은 행동을 하다니.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프리모 공작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구나.’

“하면 지금까지 후직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한 주장들은 단지 반박을 위한 반대였다는 것입니까?”

“아, 아니옵니다, 왕세자 전하! 다만…….”

“다만? 하면 또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까?”

“흠! 흠! 그것이…….”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 것이었으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는군요. 하면 마침 귀족우대법 개정에 필요한 정족수 또한 충분하고도 넘치니 곧바로 이 문제에 대해 거수를 통해 결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이의 없습니까?”

“…….”

“로보 후작, 이의 있으신 것입니까?”

“어, 없사옵니다, 왕세자 전하.”

“사뮤엘 후작께서는 어떠십니까?”

자문회 의장인 사뮤엘 후작 또한 로보 후작처럼 지금까지 도르첸 공작과 벌인 설전도 있는 상황에서 이제 와 발뺌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깨달았는지 결국 블리스의 말에 찬성을 표하였다.

결국 알마리온에 대한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열린 회의는 엉뚱하게도 귀족우대법의 개정에 대한 문제를 먼저 처리하게 되었다.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영주님.”

“그런가요? 그럼 가도록 하지요.”

“예. 그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담과 함께 들어온 이는 한때 제1의용군 부군단장으로 복무하였던 칸이었다.

국왕인 메르타니온의 명령에 따라 알마리온은 자신의 저택에서 지난 20일 동안 연금 상태로 보내야 했다. 따라서 그의 저택은 근위군 병력에 의해 철저하게 봉쇄되었고, 그동안 알마리온은 일체의 외부 출입이 금지된 것은 물론 외부의 인사와도 일절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다.

다만 그가 벌인 일에 대한 조사를 위해 법관과 일부 귀족들, 그리고 마법사와 사제단으로 구성된 조사 위원회만이 그의 저택을 출입하면서 강도 높은 조사만을 진행해 왔다.

그리고 오늘, 그에 대한 최종 결론을 내리기 위해 행궁에서 열리는 귀족 회의에 출두하기 위해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근위군에서 제공한 마차에 오르자 마차 주위를 열 명의 근위군 소속 기사들이 철통같이 호위하여 왕궁으로 향했다.

“아마도 별다른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작님.”

이미 사전에 오늘 있을 일에 대해 어떤 언질을 받았음인지 칸이 별다른 일은 없을 것이라는 언질을 주었다.

“…….”

하나 그런 칸의 말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은 일체의 변화 없이 조용히 마차의 창으로 보이는 풍경에만 시선을 줄 뿐이었다.

알마리온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자 칸 또한 자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왕궁에 도착을 한 이후 귀족 회의가 열리는 연회장 바로 옆에 위치한 휴게실로 안내되어 가던 중이었다.

“많이 수척해졌구나.”

막스밀리언이 알마리온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일로 신경을 쓰시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2왕자전하.”

“알긴 아는 것이냐?”

“…….”

“어쭈? 웃어? 쳇! 정작 사고 친 본인은 태평한데 괜히 나만 백방으로 쫓아다닌 것이 억울해지는군.”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형님.”

“하여간 넌 어째 사고를 치면 제대로 한 방 치는 것 같구나?”

“그런가요?”

“칸 남작이 언질을 주었겠지만 네겐 아무런 일도 없을 것이다. 형님께서 직접 이 일을 맡으셨으니 말이다.”

“왕세자 전하께오서 말씀이십니까?”

“그래.”

블리스 왕세자가 직접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는 말에 알마리온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께서 이번 일을 계기로 다른 문제까지 해결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더라.”

“아…….”

“나중에 형님께 찾아가 뵙도록 하거라. 네게도 많은 도움이 되실 분이시니 말이야.”

“예, 형님.”

“그건 그렇고 이번 일로 사람들이 널 뭐라 부르는지 알고는 있냐?”

“하하. 들었습니다, 형님. 제 곁에는 조잘대기 좋아하는 예쁜 새가 1마리 있어서 말입니다.”

알마리온이 벌여 놓은 일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열흘간의 혈투’ 또는 ‘1인 군단의 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당돌한여우가 전해 주어 이미 알고 있었다.

“하하! 네 제자라는 그 게르혼족 여자아이를 말하는 것이냐?”

“예, 형님.”

“언제 한번 그 아이도 함께 데려오도록 해라.”

“그러겠습니다. 하면 전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막스밀리언과 헤어진 알마리온이 다시금 근위군 소속 기사들과 이동할 때였다. 이들 일행은 우연히 엘리자베스 공주와 카산느 공주 일행과 마주치게 되었다.

한데 알마리온을 보자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엘리자베스와는 달리 알마리온과 눈이 마주친 카산느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언니인 엘리자베스의 몸 뒤로 숨어 버렸다.

“너 왜 그래? 저분이 누군지 몰라?”

“그, 그게 아니라…….”

그제야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게 된 카산느가 얼굴을 붉힌 채 엘리자베스와 알마리온의 눈치를 보며 무엇이라 변명을 하려 하였지만 알마리온이 먼저 행동하는 바람에 자신의 행동을 해명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두 분 공주 전하를 뵈옵니다.”

“그래요. 참으로 오랜만에 뵙게 되네요. 그때 연회에서 뵌 것이 마지막이었죠?”

“그렇사옵니다, 공주 전하. 그리고 공주 전하께 좋은 소식이 있음을 알고 있사옵니다. 참으로 감축드리옵니다.”

“호호! 고마워요. 한데 그렇게 말로만 끝내실 것은 아니겠지요?”

“…….”

당돌하리만치 격의 없게 행동하는 엘리자베스의 행동에 알마리온은 빙긋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 전 이만……. 그럼 먼저 가 볼게요, 언니.”

“어? 얘!”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지만 수천 명이나 인명을 살상한 알마리온을 대하자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몸을 숨긴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꼈음인지 카산느는 도망을 치듯 자리를 떠나 버렸다.

“죄송해요. 저 아이도 본심은…….”

“아니옵니다, 공주 전하.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었사옵니다. 그리고 소관은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비록 이유가 있는 살인이었지만 물경 2천 명이나 되는 인명을 살상한 알마리온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이는 비단 카산느뿐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저택 내에서도 그를 대하는 행동이 그 일이 있기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는데, 언제나 자상하기만 하던 주인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수천 명이나 되는 인명을 살상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의 앞에서는 늘 불안한 마음으로 조금의 실수라도 저지르지 않기 위해 행동들을 조심하였다.

게다가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얼른 고개를 숙여 눈을 피하는 것이, 비록 잠깐 마주친 눈이긴 하여도 그들의 눈빛에서 알마리온은 자신에 대한 한없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 왕궁에 도착을 하였을 때에도 이들이 지나는 길에 마주친 많은 시종과 시녀 들이 그를 대하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이내 황급히 자리를 피해 버리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었다.

당장 지금도 엘리자베스 공주의 뒤에 서 있는 시녀들 또한 불안한 마음으로 힐끔힐끔 알마리온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하오면 소관은 귀족 회의에 출두를 해야 하기에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러세요.”

그가 예를 올리고 근위군 기사들과 함께 멀어져 가자 엘리자베스 공주를 따르던 시녀 중 하나가 엘리자베스에게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알마리온을 대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공주님께서는 저자가 무섭지도 않으세요?”

“무서워? 뭐가?”

“저자는…….”

차마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생각이 드는지 대충 말끝을 얼버무렸다.

“호호! 저분은 왕국의 영웅이신 분이잖아?”

“하지만 그건 적군을 상대로 한 것이잖아요?”

“그들도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고 들었어. 너도 근위군이 두 차례나 그곳을 정리하려다 실패한 것을 잘 알잖아? 그 일을 대신 하였을 뿐이야. 그것도 홀로 말이야. 내가 아는 혼테르 자작은 함부로 살인을 하실 분이 절대 아니니 너희도 자작을 대할 때 그렇게 두려워할 것 없어.”

“하지만…….”

“자! 그만 돌아가자. 곧 그 사람이 온다고 했으니 기다려 줘야지. 안 그랬다가는 지난번처럼 또 삐쳐서 가 버릴지도 몰라.”

약혼자인 아약스 폰 제거 남작을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공주님, 그래도 앞으로 평생을 함께하실 분이신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흥! 그러니까 이 정도로 참는 것이라고. 만약…… 아니, 아니다. 그만 가자꾸나.”

비록 필요에 의해 하는 혼인이긴 하여도 엘리자베스는 약혼자인 아약스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후! 그분이 내 혼인 상대자였다면…….’

문득 레드로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하나 이내 그녀는 그러한 그리움을 애써 지워 버렸다. 어차피 이어질 수 없는 인연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럼 귀족우대법 개정에 대한 논의는 이것으로 마무리 짓고 애초의 목적이었던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자작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왕세자 전하, 소관이 한 말씀 하여도 되겠사옵니까?”

블리스 왕세자의 의도는 성공하였다. 결국 귀족우대법에서 귀족들에게 부여된 즉결 처분에 관한 권리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표를 얻어 법문을 개정, 전장에서 명령을 수행하지 않은 자에 대한 즉결 처분에 관한 권리만을 남겨 놓은 채, 그 이외의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즉결 처분을 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한 문제는 법관의 판단에 따라 처결한다는 내용으로 개정되어 버렸다.

이로써 백성들의 국왕에 대한 충성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블리스 왕세자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귀족우대법에 대한 문제를 매듭지은 블리스가 오늘의 회의의 본 취지인 알마리온에 대한 문제를 매듭짓기 위한 논의를 하라는 말을 하자 곧바로 쿤테르가 발언권을 요청하였다.

“체임버스 남작, 하실 말씀을 하도록 하세요.”

“감사하옵니다, 왕세자 전하.”

자리에서 일어난 쿤테르는 잠시 두어 차례 기침을 한 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 시작하였다.

“소관의 생각으로는 우리 모두는 지금, 이번 사건의 본질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고 봅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왕세자 전하, 혼테르 자작이 이번에 행한 일의 본질은 단순하게 빈민촌에 살아가고 있던 자들이 자작에게 불경한 행동을 하여 벌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옵니다. 이미 그동안 계속된 조사에서 혼테르 자작이 이러한 일을 벌인 것의 원인이 그곳에서 금지되었던 마법과 주술을 행한 자와, 그에 의해 의지가 제압된 채 인간으로서는 행하지 말아야 할 만행들을 서슴지 않고 행한 자들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옵니다.”

“하나 아무도 그에게 그러한 일을 행하라 명한 적이 없었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하옵니다, 왕세자 전하. 하오나 이미 두 차례나 근위군을 동원하였어도 해결하지 못하였던 일이옵니다. 그러한 일을 혼테르 자작 홀로 한 것이옵니다. 따라서 비록 그에게 그러한 일을 명령하지 않았지만 그는 나라의 근심거리를 해결한 영웅이옵니다.”

“영웅이라니! 당치 않소!”

“그렇습니다! 그는 영웅이 아닌 단지 살인마일 뿐이오!”

쿤테르의 말에 귀족 파벌에 속한 귀족들이 또다시 들고일어났다.

이들은 블리스와 도르첸 공작의 농간에 의해 뜻하지 않게 자신들의 권리를 일부 포기하는 데 찬성을 하여서 그러한지 더욱 언성을 높이며 쿤테르의 말에 반발하였다.

“왕세자 전하, 전장에 나간 장수들은 사안에 따라 먼저 일을 처리하고 후에 이를 보고하는 권한이 있사옵니다. 비록! 혼테르 자작이 군을 지휘한 것은 아니오나 그는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오늘날의 지위에까지 오른 자이옵니다. 그런 그에게 당시의 일은 시급히 먼저 조치를 취해야 할 일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사옵니다.”

“아! 나중에 반대 의견을 말씀하실 기회를 드릴 것이니 일단 체임버스 남작의 의견을 모두 듣도록 하세요.”

또다시 쿤테르의 말에 반발하려는 자들이 있자 이를 먼저 만류한 블리스가 계속하여 발언을 하도록 쿤테르를 재촉하였다.

“또한 군을 동원하였다면 앞선 두 번의 경우처럼 많은 인명 피해를 보고서도 아무런 성과도 없었을 수도 있었사옵니다.”

“확실히 그건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래서요?”

“그리고 사건 이후 조사를 위해 빈민촌의 백성들을 상대로 심문을 하여 본 결과, 혼테르 자작에 의해 살해된 자들은 모두 흑마법에 의해 의지를 상실한 자들이거나 그들을 따르던 악한들이었사옵니다. 그 이외에는 그 일로 인해 단 한 명의 애꿎은 희생자도 없었음이 밝혀졌사옵니다.”

“근위군과 신전 그리고 법관들의 보고서를 읽어 보아서 알고 있는 일입니다. 결국 체임버스 남작은 오히려 그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러하옵니다, 왕세자 전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권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일을 벌였사옵니다. 이는 왕국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도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그러한 일이옵니다! 이 점 유념하여 주시옵소서!”

또다시 양쪽으로 패가 갈려 격론이 벌어졌다. 하나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자 블리스는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들만으로 구성된 자문회를 소집하였고, 이곳에서의 논의를 통해 이번 일에 대해서 알마리온의 작위를 자작에서 남작으로 강등시키는 정도로 이 문제를 종결짓기로 합의를 보았다.

“하면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자작을 부르도록 하세요.”

“예, 왕세자 전하.”

휴게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알마리온이 귀족 회의를 통해 자신에 대한 문제가 매듭지어졌다는 말을 듣고 귀족 회의가 열리고 있는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 안으로 알마리온이 들어오자 한쪽에서는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시선이,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를 껄끄러워하는 마음이 담긴 불편한 시선이 그를 향하였다.

하나 그러한 서로 다른 시선들 중에서도 이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한 가지 감정이 있었는데, 왕국의 최연소 익스퍼트로서, 전장에서는 혁혁한 공을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로 익스퍼트의 무서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준 인물이 바로 그라는 것이었다.

익스퍼트란 초인의 경지에 든 자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느낌은 다소 막연한, 구체적이지도 실체적이지도 않은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이는 마법사들을 접해 보지 못한 자들이라 하더라도 마법사란 두려운 힘을 가진 존재라는 식으로 그저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하였다.

하나 이번 일로 인해 일반 백성들은 물론, 귀족들 사이에서도 익스퍼트란 존재가 얼마나 가공할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 분명하게 인식되기 시작했고, 그러한 능력을 보여 준 알마리온에 대해, 아니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왕국의 모든 익스퍼트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기다림을 가져야 할 것 같아 아예 입궁 자체를 늦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꽤 긴 시간을 기다리셔야 했을 것입니다.”

알마리온이 나타나자 블리스 왕세자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니옵니다, 전하. 전하의 따뜻한 배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군요. 경도 오늘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모인 이유는 잘 아실 것입니다.”

“예, 전하.”

“원래대로 하자면 최종 결정이 나기 전에 경이 스스로를 변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소관이 하고 싶은 말들은 이미 조사 위원회에서 충분히 하였다 생각하옵니다, 전하.”

“그래요. 그래서 경의 최종 변론은 생략하였습니다.”

“…….”

“하면 오늘 귀족 회의를 통해 경의 신변에 대해 결정된 사안을 발표토록 하겠습니다.”

“…….”

“오늘 우리는 지난달에 빈민촌에서 벌어진 일에 대하여 그 사건의 책임자인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자작에 대한 처리 문제를 놓고 장시간 논의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자작이 행한 일은 비록 정의를 구현하고 아울러 더 큰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라는 점은 인정되나, 그 누구로부터 그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 또한 인정된다. 따라서 본 귀족 회의는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자작의 작위를 자작에서 남작으로 한 단계 강등하는 것으로 이번 사건에 대해 최종 결정토록 한다. 이러한 결정으로 이후 이에 대한 더 이상의 논란은 인정치 않는다!”

“…….”

“혼테르 남작.”

“예, 전하.”

“이러한 귀족 회의의 결정에 이의가 있으십니까?”

“없사옵니다, 전하.”

“하면 이 결정을 받아들이시는 것입니까?”

“그러하옵니다, 전하.”

전혀 아무런 이의가 없으며 순순히 귀족 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이겠다는 말에 모두에게 조금은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귀족에게 있어서 작위를 강등당한다는 것은 대단히 큰 불명예이기 때문이었다. 하나 단 한 사람, 로엔달만큼은 이러한 작위가 알마리온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훗! 왕세자 전하께서 당황하시겠군. 원래의 계획은 이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아니다 다를까, 알마리온이 너무나도 순순히 귀족 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회의를 주재한 블리스 왕세자였다.

그는 알마리온이 이의를 제기하고 반발하여 재심을 요청하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만 소수로 구성된 자문회에서 또다시 이 문제를 거론하여 그의 공을 인정받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이 애초의 그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흠! 흠! 만약 이의가 있을 경우, 경이 어떤 절차에 따라 재심을 요청할 수 있는 것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예.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소관은 이번 결정에 대해 아무런 이의가 없사옵니다.”

다시 한 번 알마리온이 이번 결정에 순응하겠다고 분명히 자신의 의사를 밝히자 블리스 왕세자 또한 어쩔 수 없었다.

“하면…… 이번 사건에 대한 모든 논의를 종결짓도록 하겠습니다.”

탕! 탕! 탕!

블리스 왕세자가 의사봉으로 바닥을 세 번 두드렸다. 이로써 사건이 벌어진 이후 한 달 가까이 끌었던 알마리온의 신변에 대한 모든 논의가 공식적으로 결론이 났다.

“칫!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해요!”

곁에서 말을 타고 함께 이동 중이던 당돌한여우가 볼을 잔뜩 부풀린 채 말하였다.

알마리온과 당돌한여우, 그리고 필요한 많은 물자들을 가득 실은 테일러 상단 소속의 마차들이 함께 길을 떠난 것은 알마리온의 신변에 대한 귀족 회의의 결정이 있은 후 한 달 정도가 지나서였다.

“훗! 아직도 그 생각인 것이냐?”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미 한 달 전에 벌어진 일을 두고 아직도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는 당돌한여우의 모습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작위가 자작에서 남작으로 강등된 것을 두고 많은 이들이 이러한 결정 자체가 옳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그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특히 그러한 결정이 있던 날, 그 일에 대한 또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던 블리스 왕세자나 막스밀리언 2왕자의 경우에는 알마리온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을 두고 그를 크게 질책하였다. 아니,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후에 그를 접견한 메르타니온 국왕과 그 자리에 함께 배석하였던 도르첸 공작 그리고 로엔달 백작까지도 알마리온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을 두고 크게 질책을 하였다.

“그럼요! 다른 것은 몰라도 대족장님이 하신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자들이 감히 대족장님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단 말이에요!”

당돌한여우로 하여금 가장 화가 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때문인지 누군가 뒤에서 알마리온을 비난하는 수군거림을 들을 때마다 정령과 요정 그리고 주술을 이용하여 심술을 부려 댔다.

“하하…….”

“주군, 아무래도 오늘은 이 근처에서 야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덧 하루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기에 야영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알빈의 말에 알마리온은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렇게 하시오.”

“예, 주군. 하면 곧 야영을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마침 얼마지 않아 야영을 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한 이들 일행이 천막을 치고 저녁 식사 준비로 한창 바쁠 때였다.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야영지 주변을 경계하던 용병들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한 인물을 저지하였다.

“날 그대들의 주인에게 데려다 주시오.”

20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별다른 특징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모습과 평범한 옷차림의 한 청년이 알마리온을 만나기를 청하였다.

“건방진! 감히 너 따위가 함부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하니 썩 물러가라!”

“날 그대들의 주군에게 데려가면 그분께서 날 만나실지 거절하실 것인지 결정하실 것이오.”

“이놈! 감히 어디서 수작질이냐!”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스러운가?”

호위를 맡고 있는 상단 소속 용병대의 대장인 케일이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다른 곳을 점검하다 말고 이들에게 다가왔다.

“이자가…….”

낯선 청년을 발견한 용병이 막 사정 이야기를 하려 할 때였다. 당돌한여우가 나타나 낯선 자를 데려오라는 알마리온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아저씨, 대족장님께서 저 사람을 데려오라 하셨어요.”

“주군께서 말씀이십니까, 아가씨?”

“예. 저분을 모시고 오라 하셨어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대는 날 따르도록 하라.”

“…….”

케일과 당돌한여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청년이 알마리온의 천막에 도착하자 그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자신을 만나겠다고 찾아온 청년만을 천막 안으로 불러들였다.

“왜 돌아오신 것입니까?”

그랬다. 알마리온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청년은 다름 아닌 그나이제나우가 만든 사념체가 깃들여 있는 육신이었다.

“갈 곳이 없어 돌아왔네.”

실상 그에게는 갈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할 바를 모르는 것이라 해야 맞았다.

“복수는 단념하신 것입니까?”

“알지 않는가,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

“해서 이렇게 그댈 찾아온 것이네. 이 육체의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대에게 날 의탁할까 해서 말이네.”

“제게 말입니까?”

“그렇네. 아마도 저분들께서도 그대 곁에 계속 머무르고 계신 이유도 나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군.”

그나이제나우의 사념체가 깃들인 육체가 힐끗 알마리온의 양쪽 손목에 차여져 있는 정령의 고향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되겠지?”

“언제든 환영입니다.”

“그럼 그 기념으로 내게 이름을 하나 지어 주게나.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데 마땅한 이름도 없이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갑자기 이름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알마리온은 잠시 당황하였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말하였다.

“이미 이름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군.”

하인리히 그나이제나우. 인간 최초이자 최후로 검의 지배자인 소드 마스터가 되었던 그 이름. 알마리온은 그가 남긴 사념체에게 그것만큼 어울리는 이름은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데 다음 순간 그나이제나우의 사념체가 깃들인 육체가 한 행동에 알마리온은 기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 하인리히 그나이제나우, 주군을 뵈옵니다!”

“그 무슨……. 이러지 마십시오. 전 그대의 주군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아니옵니다. 주군만이 오직 이 세상에서 저의 주인이 되실 수 있는 분이옵니다. 하오니 저의 청을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받아들여. 진심이니까 말이야.

‘실레스틴 님.’

-만약 네가 저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 아인 기꺼이 이 자리에서 스스로를 소멸시켜 버릴걸.

‘으음…….’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나이제나우의 사념이 깃들여 있는 육체가 짓고 있는 결연한 표정으로 보아서는 실레스틴의 말처럼 될 확률이 백이면 백이었다.

“후…… 참으로 절 곤란하게 만드시는군요.”

“…….”

“알겠습니다. 그대를 나의 수하로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충! 감사합니다, 주군! 주군의 영명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사념체가 깃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문에 사념체와 그것이 깃들여 있는 육체는 완전히 합치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직은 그 육체와 완전한 합치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니 너무 무리하지 말도록 하세요. 이것이 그대에게 내리는 첫 번째 명령입니다.”

무리를 할 경우 자칫 육체가 붕괴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이를 주의를 주는 알마리온이었다. 하나 그도 알고 있었다. 그나이제나우가 그러한 자신의 명령에 그다지 따르지 않을 것임을.

“자! 그럼 모두에게 그대를 소개시키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만 나가도록 하지요.”

“예, 주군.”

훗날 혼테르가의 수호신이라는 위대한 한 전사의 탄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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