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리 제리코의 소멸
“내가 신호하면 무조건 이곳을 벗어나도록 하시오.”
“예? 그게 무슨…….”
“그리고 이곳을 빠져나간 후에 곧바로 근위군 사령관이신 로뎀 폰 로엔달 백작 각하를 찾아가 빈민촌 외곽을 포위하라 전하시오. 또한 포위 후에는 반드시 체임버스 남작을 반드시 대동하여 포위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전하시오.”
“공격이 아니라 포위만 하라는 것입니까?”
“그분이라면 그 정도만 전하면 충분히 아실 것이오.”
“하지만…….”
“그냥 그렇게만 하시오.”
그 말을 끝으로 알마리온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듯 제크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니,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몸은 어느새 의지를 제압당한 소년의 앞에 서 있었다.
“어? 어어…….”
퍽!
“크헉!”
마치 바람처럼 눈앞에 나타난 알마리온의 상상을 초월하는 빠른 몸놀림에 소년이 당황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이미 알마리온의 거친 주먹이 소년의 배를 가격하자 소년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그 모습에 이들을 포위하고 있던 다른 소년들은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 것인지 상황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멀뚱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가시오!”
“예? 예…….”
잠시 허둥거리던 제크 또한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황급히 빈민촌을 벗어나기 위해 허둥거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두, 두목?”
“어? 어?”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는지 소년들은 뒤뚱거리며 커다란 몸집으로 죽어라 내달리고 있는 제크와 자신들의 두목을 한 방에 때려눕힌 알마리온을 번갈아 보면서 당황해했다.
“무기를 버리면 살려 주겠다. 하나 계속해서 반항한다면…….”
“으으…….”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소년들은 당황하였다. 자신들에게는 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절대적인 힘을 지닌 두목이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른 채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자 두려움이 너무나도 컸던 것이다.
“거기 너.”
“예? 저, 저…… 저…….”
알마리온에게 지목당한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어떻게 할지 몰라 당황한 표정으로 알마리온과 주변의 동료들을 연방 번갈아 보았다.
“이리로 오라.”
“왜…….”
“앞장서라.”
“예? 어, 어디를…….”
“조금 전 이 아이가 말하였던 그곳으로 간다.”
“그, 그곳이라니요?”
“말코이란 자가 있는 곳.”
“헉! 그, 그곳에 가면 저, 전…….”
포주 노릇은 물론 아이들에게 구걸을 해 오도록 시키는 자인 말코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는 말에 아이는 사색이 된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 아이들에게 있어서 알마리온이 말한 말코이란 자가 있는 곳은 성역과도 같은 곳으로 허락 없이 그곳에 갔다가는 크게 혼이 나는데, 하물며 좋은 의도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자를 길 안내까지 해서 갔다가는 나중에 무슨 일을 당할지 뻔한 일이었기에 아이는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아이의 표정이 하얗다는 말도 모자라 아예 탈색이 된 것처럼 창백해져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보자 차마 더 이상 강요할 수도 없어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튀어!”
누군가가 도망가라 고함치자 그 말을 듣자마자 아이들 모두가 부리나케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굳이 찾아갈 필요도 없는 것인가?”
어차피 도망간 아이들이 누군가를 부르러 갈 것이라고 판단한 알마리온은 자신에게 맞아 기절한 소년을 한쪽에 옮겨 놓고는 누군가가 나타나기 전에 정령들을 풀어 빈민가 전체에 거대한 결계를 만들어 가기 시작하였다.
상급 정령술사가 된 알마리온은 자신이 일일이 설치하여야 할 결계를 정령들로 하여금 대신 설치할 수 있는 편법을 생각해 냈다.
그나이제나우가 만든 사념체와의 대결에서 심한 내상을 입은 때문에 한동안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게 된 알마리온은 정령을 상급 정령을 소환하여 다양한 실험을 해 보기 시작하였고, 이때 정령을 이용하여 결계를 설치하는 작업도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상급 정령을 소환하여 접신의 형태로 받아들인 후, 의념을 통해 필요한 결계를 정령에게 전달하면 하급 정령들이나 중급 정령들이 이를 곧바로 나누어 실행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아무리 거대한 결계라 하더라도 순식간에 결계를 만들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결계의 정교함 또한 자신이 직접 만들었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작동하였다.
지금도 그러한 방식으로 알마리온은 빈민촌 전체 지역에 미리 설정해 놓은 목표를 추격하고, 설사 그 목표가 결계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끝까지 추적할 수 있도록 흔적을 남기게 하는 결계를 순식간에 설치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것도 모자라 곳곳에 하급 정령들을 풀어 빈민가 전체의 상황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다.
주문을 외워 결계를 작동시키자 알마리온의 머릿속에는 사전에 미리 결계에 설정한 대로 빈민촌 전체에 대한 지도가 연상되었고, 그 위에 의지를 제압당한 자들의 위치가, 아울러 마법사나 주술사의 위치가 그대로 표시되었다.
‘의지를 제압당한 자가 이렇게나 많이 존재하다니.’
그렇게 나타난 영상에 따르면 흑마법사에 의해 의지를 제압당한 자의 숫자가 대략 2백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빈민촌 전역에 골고루 퍼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데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에 의하면 마법사 또는 주술사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빈민촌의 가장 중심인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의지를 제압당한 자들은 그자를 중심으로 빈민촌 전체를 물샐틈없이 호위하고 있어 외부로부터 어떠한 공격을 받는다 하여도 그가 위치한 곳까지 도달하기 전에 충분히 이에 대비하거나 도주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거기에 용의주도하게 지형지물과 지하에 파 놓은 도주로까지? 이자 누구인지 몰라도 보통인 자가 아니다.’
마법사들은 마법 연구와 수련만으로도 할 일이 너무 많은 자들이었다. 따라서 다른 문제에 있어서는 거의 문외한인 경우가 많았다.
이 세상에서 사기꾼들이 가장 사기 치기 쉬운 상대로 꼽을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을 한 가지씩만 꼽으라고 하면 아마도 십중팔구는 마법사를 꼽을 정도로 마법사들은 마법 이외의 다른 분야에 있어서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런 자가 의지를 제압한 자들을 거대한 빈민촌 곳곳에 배치하고, 그것도 모자라 탈출로까지 철저하게 만들어 놓았을 정도로 용의주도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야 몰려오기 시작하는군.’
곳곳에 숨겨 놓은 정령들의 눈을 통해 자신을 피해 달아난 아이들이 자신들의 두목의 두목인 말코이라는 자의 패거리를 이끌고 달려오는 모습을 지켜본 알마리온은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저기 저놈이에요! 저 새끼가 대장을 한 방에 보내 버렸어요!”
“저 새끼 맞아?”
“예! 그렇다니까요! 보세요. 저 새끼 앞에 대장이 아직도 쓰러져 있잖아요! 아마 분명 죽었을 거예요!”
“뭐 해! 이 새끼들아! 어서 저 새끼를 포위하지 않고!”
한눈에 보기에도 험악한 인생을 살아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청년들이 저마다 손에 흉험한 무기들을 꼬나 쥐고는 우르르 몰려들어서는 알마리온을 포위했다.
“이봐, 형씨. 형씨가 저 새끼를 저렇게 만들었다고?”
“그렇다면 어떻게 할 텐가?”
“어라? 이 새끼 봐라? 너 어느 파의 누구야? 아니, 너 같이 생긴 놈이 있다는 소린 들어 보지 못했으니 어디 딴 데서 굴러먹던 놈인 것 같은데, 어디서 놀던 놈인데 감히 남의 영역에 와서 지랄을 떠는 거야?”
“북쪽에서 왔다고만 알려 주지.”
영지가 북쪽에 있으니 틀린 말은 확실히 아니었다.
“북쪽? 이 새끼가 장난을 치나…… 너 뭐 하는 놈이야? 엉?”
“여길 접수하고 싶어서 말이야.”
이곳에 둥지를 틀고 이런 건달들을 수하로 만들어 자신만의 왕국을 만든 그런 자를 끌어내려면 아무래도 같은 부류처럼 행동하였다.
“아주 생지랄을 떠네. 네놈 혼자서 뭐라고? 이게 우리를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정도로밖에 안 보이나.”
“글쎄. 그 정도만 되어도 잘 보아주는 것 같군.”
“뭐라고?”
“길가의 돌멩이도 때에 따라 쓰임새가 있지만 너희 놈들은 전혀 쓸모가 없는 놈들이니 그보다 못한 것이 맞지 않나?”
“이 새끼! 뭐 해! 다들 저놈을 조져 버려!”
“예!”
“죽어! 이 새끼!”
생존을 위해 치열한 삶들을 살아온 자들이었기에 전장에 나간 병사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흉험한 살기가 느껴졌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알마리온에게는 더욱 익숙한 환경이었다.
“그래서 주군을 그렇게 홀로 그곳에 계시게 하고 자네 혼자 죽어라 도망쳐 왔단 것인가!”
쿠엔토의 역정에 제크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주군 곁에 있어 봐야……’
평생을 좋아하는 고기를 써는 칼이나 과일 깎는 칼 이상의 칼을 손에 쥐어 본 적이 없는 비대한 몸집을 가진 제크였다.
그런 그가 알마리온 곁에 있어 봐야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물만 될 것이란 그의 판단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쿠엔토 또한 그러한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군을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런 곳에 모시고 간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보단 어서 근위군 사령관이신 로엔달 백작님께 주군의 전언을 전하는 것이…….”
제크가 곧바로 로엔달을 찾아가지 못한 것은 그의 신분으로는 왕궁에 있는 그를 만나려면 적어도 며칠은 시간이 필요하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그를 만나 보지도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가세.”
“예, 단주님.”
여전히 임시로 왕궁으로 사용되고 있는 도르첸 공작의 저택에 도착을 한 두 사람은 왕궁을 경비하는 근위군 사관에게 로엔달과의 면담을 신청하였고 두 사람이 통사정을 한 끝에 그를 만난 것은 1시간 정도나 흘러서였다.
“혼테르 자작께서 빈민촌에? 그것도 홀로 말인가?”
제1의용군 부군단장이었던 제임스 칸은 단승 작위이긴 해도 남작이란 작위로 근위군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근위군 지휘부는 로엔달 백작을 비롯하여 국왕인 메르타니온의 명령에 의해 로엔달이 조직한 비밀결사에 속한 자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렇습니다, 남작님.”
“그가 빈민촌 주위만 포위해 달라고 하였다고 했는가?”
“예, 백작 각하. 하오나…….”
알마리온이 빈민촌에 홀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칸이 당황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로엔달의 표정이나 목소리는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 없었다.
“알았으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게.”
“예?”
아무런 조치도 취해 주지 않은 채 돌아가라는 말을 듣자 쿠엔토와 제크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백작 각하의 말씀을 못 들었나? 이만 돌아가라 하시지 않았는가.”
“하지만…….”
“알았으니 이만 돌아가도록 하라. 각하께서 곧 조치를 취하실 것이다.”
“…….”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말을 듣기는 하였지만 어째 별로 미덥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대들 주군을 살리고 싶다면 별도로 병력을 동원한다든지 하지 마라. 그것이 오히려 그대들 주군을 위험케 할 수도 있으니. 알겠는가?”
“하지만…….”
“백작 각하께서 묻지 않으시는가!”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소인들의 주군 되시는 분이십니다. 어찌 수하 되는 자로서 주군 되시는 분의 위험을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자가! 감히!”
“그런가? 그렇다면 근위군은 동원할 필요가 없겠군. 그리고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그렇게 되면 자네들 주인인 자작은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
근위군조차도 몇 차례 빈민촌을 정리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끝내 적지 않은 피해만 입은 채 패퇴한 곳이 빈민촌이었다.
그런 근위군이었지만 이들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저택을 지키는 병사들이나 상단의 용병 수십으로 빈민촌에 진입하였다가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저…… 단주님, 주군께서도 근위군에게 단지 빈민촌을 포위만 하라는…… 헙!”
별도로 병력을 동원하면 근위군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로엔달의 말에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쿠엔토에게 제크가 알마리온이 자신에게 한 명령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자 죽일 듯이 제크를 째려보았다.
“알겠습니다. 하면 최대한 빨리 조치를 취해 주시겠다는 약속만이라도 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설사 저희 모두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빈민촌 전체를 불태워 버리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저희가 나설 것입니다.”
“이런 건방진!”
“설사 나중에 국법에 따라 처벌받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주군을 위함은 그 수하 된 자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
조금 전의 허둥거리던 모습과는 달리 침착함을 되찾은 쿠엔토의 모습은 확실히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왕실이 은밀히 만든 어용 상단이었지만 그래도 상단을 운영한다는 것은 평범한 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또한 왕실의 일방적인 결정에 따라 알마리온에게 넘겨지긴 하였지만 이후 자신을 신뢰하여 주고 또한 더 많은 기회를 주었던 알마리온에 대한 쿠엔토와 그의 두 아들인 알빈과 알베르토의 충성심은 절대적이었다.
여인은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하지만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다. 비록 남들 눈에는 탐욕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상인이었지만 쿠엔토 또한 자신을 알아봐 준 알마리온에 대한 충성심은 그를 주군으로 하고 있는 다른 그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더함이 있으면 있었지 결코 모자람이 있지 않았다.
제법 한다하는 사람들이라도 로엔달 백작의 투명한 눈빛을 마주하는 것은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한데도 불구하고 그와 눈이 마주친 쿠엔토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로엔달의 눈빛을 마주하였고, 결국 먼저 눈을 돌린 것은 로엔달이었다.
“알았으니 그만 나가 보라. 그댄 폐하께 내가 독대를 청한다고 전하게.”
“예, 사령관님.”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
“이제 볼일이 끝났으니 그만 돌아가 좋은 소식을 기다리도록 하라.”
“예, 남작님. 하오면 소인들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쿠엔토와 제크가 방을 나서자 칸 또한 로엔달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이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뭐라고요? 그가 빈민촌에 홀로 남아 있다고 하였습니까?”
“예, 2왕자님. 하여 곧바로 근위군이 출동한다 하옵니다.”
원래대로 하자면 이미 성혼을 한 2왕자는 왕궁 밖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의 저택 또한 포넬군이 퇴각하면서 파괴를 하였기에 지금은 행궁行宮인 도르첸 공작의 저택 한 귀퉁이에 가족들과 함께 들어와 살고 있었다.
“지금 즉시 내 메일을 가져오도록 하시오.”
“여보?”
“작은오라버니?”
몇 달 전 태어난 둘째 조카를 보기 위해 방문하여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두 공주인 엘리자베스와 카산느도 그렇지만 막스밀리언의 아내인 엘리노아 또한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 하고 있는 것이오? 속히 내 메일을 가져오지 않고!”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이 일은 근위군이 알아서 할 것이옵니다.”
“그래요, 여보. 당신이 직접 나서신다면 아무래도 근위군 사령관인 백작도 부담스러워할 것이에요. 하니…….”
“비록 피로 이어진 형제는 아니지만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아우이오. 그건 당신도 잘 알지 않소? 게다가 그는 아이반과 피요르의 대부요. 그런 그가 그런 곳에 홀로 남아 있다는데 어떻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아이반과 피요르는 막스밀리언 2왕자의 두 아들로 막스밀리언은 알마리온과 인연을 맺은 이후 그를 자신의 두 아들들의 대부로 만들어 놓았다.
“맞아요, 작은오라버니. 친구가 어려운 일에 처했는데 이를 모른 체하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일이에요.”
“아가씨!”
“언니…….”
여인답지 않게 의리를 무척이나 존중하는 여인이 엘리자베스 공주였다. 그녀 또한 내심 레드로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부왕父王이 자신의 혼처를 북부 귀족 파벌의 수장인 베론 폰 제거 백작의 장자인 아약스 폰 제거 남작으로 결정한 일이 대국적인 면에서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미련 없이 레드로에 대한 마음을 접어 버린 것도 부왕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설사 자신이 마음에 담은 레드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일개 남작에게 시집가는 것을 이처럼 순순히 받아들이진 않았을 것이다.
곁에 있던 카산느 또한 내심으로는 막스밀리언이 근위군과 함께 알마리온을 구해 내 주길 원하고 있었지만 이미 근위군도 몇 차례 시도하였지만 실패한 일이 있는 곳에 작은오빠가 간다는 것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반응을 하는 새언니를 보자 차마 그래 주십사 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무엇 하시오! 속히 내 메일을 내오라 하지 않았소!”
“전하…….”
“그 명령에 따를 필요 없습니다, 세르게이 남작.”
“어머니?”
“왕비마마를 뵈옵니다.”
“어머니.”
갑작스러운 헬레나 왕비의 출현에 모두 깜짝 놀라 그녀를 향해 분분히 예를 올렸다.
“내 네가 이럴 줄 알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번 일은 근위군이 알아서 할 것이니 넌 절대 궁 밖으로 나가선 아니 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머님.”
“그럴 수가 없다니! 네가 감히 이 어미의 명을 무시하겠다는 것이냐!”
“어머님, 어머님께서 카산느의 일로 인해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 아바마마의 충실하면서도 중요한 신하입니다. 아울러 소자와는 의형제를 맺은 자이고, 제 두 아이들에게는 대부가 되는 그입니다. 그런 그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한데 어찌 이를 알고 두고 볼 수만 있겠습니까?”
“흥! 왕국의 익스퍼트라고 모두 치켜세운 자가 아니더냐?”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중과부적인 상황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하더라도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것이냐! 그러기에 천한 출신이 감히 어딜 넘보라 하였더냐!”
“어머니!”
“어머니…….”
메르타니온 국왕이 알마리온을 무리하게 자작까지 승작시킨 것도 그라는 상징적인 존재를 통해 왕국의 힘으로 상징되는 기사 계급과 준남작들, 즉 정식 귀족 작위는 아니지만 실제로는 왕국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부유한 상인들과 지식인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그를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었던 것이다.
하나 헬레나 왕비는 자신의 둘째 딸인 카산느 공주를 제국의 황자와 혼인시키기 위해 은밀한 작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자칫 카산느 공주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그동안 들인 공이 모두 물거품이 될 뿐 아니라 제국의 도움을 받아 왕실의 기반을,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더욱 튼튼히 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이를 실행하던 중이었다.
심지어는 메르타니온 국왕 앞에서 극언까지 서슴지 않으며 알마리온을 내치라고 주장하여 결국 그로 하여금 전장을 떠나 영지로 돌아가게 만들었을 때, 그녀는 친정과 그들을 따르는 외척들까지 거론하면서 그들이 국왕을 이탈하여 귀족 파벌로 가도록 할 수도 있다는 극언까지 하였었다.
이처럼 극도로 알마리온을 경계하는 헬레나의 행동은 비단 알마리온의 출신 성분이 노예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실상 알마리온은 2공주인 카산느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아니, 지금 그에게 있어서 여인은 설사 그것이 공주라 하더라도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알마리온에게 연심을 가진 것도, 그리고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막스밀리언을 통해 서신을 전한 것도 모두 카산느가 먼저 한 행동이었다.
물론 이러한 자세한 사정은 헬레나 왕비에게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비천한 알마리온이란 존재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만 중요할 뿐이었다.
“그 일은 이미 끝난 일 아닙니까? 게다가 그는 아버님의 충직한 신하임을 잊지 마십시오! 남작은 무엇 하는가! 속히 메일을 내오지 않고!”
“예…… 전하.”
워낙 강경한 태도로 명하자 세르게이 남작 또한 헬레나 왕비의 눈치를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너…….”
아들의 이러한 격한 반응에 헬레나 왕비는 큰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는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그런 헬레나 왕비를 데리고 나간 것은 엘리자베스 공주였다.
“어머니, 이제 그만하세요. 어머니는 제가 모시겠어요. 카산느, 너도 함께 가자.”
“예, 언니…….”
엘리자베스와 카산느가 어머니인 헬레나 왕비를 데려 나가자 엘리노아가 막스밀리언에게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신도 너무하셨다는 것은 잘 알지요?”
“…….”
“다녀오신 후에 어머님을 찾아뵙고 사과드리도록 하세요.”
“후……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그래요. 그럼 무사히 다녀오도록 하세요.”
“알겠소.”
세르게이 남작이 시종들을 시켜 내온 메일을 모두 착용한 막스밀리언은 호위 기사들과 함께 근위군 사령부로 향했다.
“2왕자 전하를 뵈옵니다.”
막스밀리언 2왕자가 출전 준비를 마치고 근위군 사령부에 나타나자 근위군 소속 기사와 병사 들이 황급히 그에게 예를 올렸다.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본인도 함께 갔으면 합니다, 백작.”
“…….”
알 만한 사람은 모두 막스밀리언 왕자와 알마리온이 사적으로 친분이 매우 두텁다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저희는 단지 빈민촌을 포위만 할 것입니다, 전하.”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면 혼테르 자작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까?”
빈민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외곽만 포위하는 것이 이번 임무라는 로엔달의 말에 막스밀리언은 무슨 말도 되지 않는 말이냐는 식으로 반발을 하려 하였다.
“그것이 혼테르 자작의 바람입니다.”
“무슨…….”
“그곳을 정리하는 것은 혼테르 자작 홀로 하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이보십시오, 로엔달 백작!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몇 차례나 그곳을 공략한 경험이 있는 백작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한데 그런 곳을 혼테르 자작 혼자 정리하게 하다니요!”
근위군 지휘부와 기사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기에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마치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사나운 기세로 로엔달의 말에 반박하였다.
실상 근위군이 몇 차례나 빈민촌을 통제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실패를 한 것은 근위군 전체적인 위신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근위군이 메르타니온 국왕이 로엔달에게 지시하여 조직한 비밀결사들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근위군 내부에는 귀족 파벌에 속한 지휘관들과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본인의 능력이 아닌, 연줄과 뇌물을 통해 국왕과 왕실 가족들 그리고 왕궁을 호위하는 근위군에 배치되었고, 무능한 이들이,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면 가혹할 정도의 보복을 통해 빈민가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철저하게 통제를 하는 수만의 빈민촌 사람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특히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복잡한 지형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대여섯 살 어린아이부터 살아서 움직이는 것조차 신기해 보일 정도의 노인은 물론 하다못해 납치되어 실종된 병사들의 시신을 참혹하게 고문하고 죽인 후 이러한 시신을 모두의 눈에 띄는 곳에 놓아두어 공포를 심어 주는 것도 모자라 그러한 시신을 함정으로 이용하여 또 다른 이차적인 피해를 강요하자 군 지휘부는 물론, 병사들을 지휘하는 기사들, 그리고 병사들 모두 공포심에 정신이상을 일으키는 병사들이 늘어나는 삼차 피해까지 늘어나자 결국 빈민촌을 정리하는 것을 포기해 버리게 된 것이었다.
“그라면 가능합니다. 그 혼자라면 말입니다.”
광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왕도에 온 알마리온과 다시 만나게 된 로엔달은 그가 자신과 같은 경지인 상급 정령술사가 되었음을 이내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단시간 내에 또 하나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인지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내심 그토록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는 그에 대한 대견함으로 마음이 흡족해져 그와 함께 취하도록 술까지 마시는 이례적인 행동까지 하였었다.
또한 그날 처음으로 두 사람은 서로 간에 느끼던 마음의 벽을 많이 허물 수 있게 되었다.
로엔달의 확신에 찬 말과 표정에도 막스밀리언은 알마리온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금할 수가 없었다.
“혼테르 자작은 어리석은 자도, 공명을 탐하는 자도 아니라는 것은 전하께오서도 익히 아실 것입니다.”
“으음…….”
“그를 믿으신다면 그가 바라는 것을 주도록 하십시오.”
“후! 알겠습니다. 백작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일단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본인도 근위군과 함께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마저 말리진 말아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옵소서, 전하.”
퍽!
“컥!”
퍼억! 쿠당탕! 쿠당!
“제,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발…… 무,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크악!”
우당탕탕! 콰당!
“…….”
알마리온의 발길질에 저만치 굴러떨어진 말코이가 다시금 후닥닥 몸을 일으키더니 알마리온 앞으로 달려와서는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아 대며 빌었다.
“제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 달라고 했겠지?”
“예?”
“저 여인들도 네게 그렇게 무릎 꿇고 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는 그렇게 빌고 또 빌었겠지?”
“그, 그건…….”
“그때 넌 저 여인들에게 무어라 했고? 저 여인들을 어떻게 했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서 이런 만행들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마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바로 이곳과 같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음에 알마리온은 더 이상 이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말해 보라. 그때 넌 저 여인들에게 어떻게 했지?”
“으으…….”
분노한 알마리온에게서 느껴지는 절대적인 힘은 말코이 같은 건달이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 힘을 견디지 못하였는지 말코이는 그대로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제, 제발…… 제발…….”
‘설사 이자들이 약에 취해 있고 의지를 제압당했다 하더라도 차마 인간으로서 같은 인간에게 할 수 없는 이러한 만행을 하였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마약에 취해 있고, 의지를 제압당해 어느 정도는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더 잔인하게 행동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들이 그간 행해 온 일들은 차마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행동들이었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
“……!”
툭! 데구르르르르.
털썩!
많은 여인들을 납치하거나, 있지도 않은 빚을 지게 만들어 차마 여인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만들었고, 그도 모자라 조금이라도 제 눈에 벗어나면 참혹한 고문 끝에 죽여 버리는, 심지어는 그렇게 죽은 시체의 인육까지 다른 이들에게 먹게 만들어 인성을 파괴하는 악마와도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아 왔던 말코이란 자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그를 따르던 자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들을 위해 울어 주는 이들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알마리온이 그동안 자신들을 감금하고 인간으로서는 차마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해 왔던 자들을 모두 처단한 것을 두고 환호하는 이들도 아무도 없었다.
이미 이들은 단지 살아 있으니 살아갈 뿐,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빈껍데기나 다름없는 그런 상태였다.
‘네가 누구인지 알진 못하지만 흑주술의 제물로 사용한 네놈만큼은 결코 용서치 않겠다. 절대로!’
처음에는 이들에게 흑마법의 마법 중 하나인 의지를 제압하는 마법을 사용하여 자신만의 왕국을 만드는 자에게 법의 심판을 받게 하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 하수인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알마리온은 이들이 흑주술의 제물로 사용되기 위해 얼마나 참혹한 짓들을 벌여 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알마리온은 더 이상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거나, 이들을 법의 심판대에 올리는 일을 포기하였다.
이미 이들은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다시금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다리라! 네 목이 조금씩 조여 오는 공포를 느끼면서 날 기다리라!’
창녀촌을 운영하는 말코이란 자와 그 일당을 처단한 알마리온은 잠시 눈을 감아 또 다른 무리가 있는 곳을 확인한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뭐라고? 이번에는 야신과 그 수하들이 당했다는 것이냐?”
“예, 주인님.”
“대체! 대체 그 한 놈을 제거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
가장 하부 조직에 속하는 말코이란 녀석과 그 일당이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여드레 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였기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어차피 누가 되었든 자신은 그들을 통해 희생의 주술로 인해 손상받은 힘을 되찾을 제물들을 공급받고 덤으로 재물과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여 자신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그에게 복수할 힘을 키워 나갈 수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동원해!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그놈을 잡아서 내 앞에 끌고 오란 말이다! 알겠어!”
“예, 주인님!”
수하들이 모두 나가고 홀로 남게 된 젊은 청년은 갑자기 오한이 들듯 온몸을 파고드는 불안감에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날도 그랬다. 그 한 놈으로 인해 지난 3백 년 동안 어렵게 쌓아 왔던 모든 것을 잃었던 그날도 바로 지금처럼 갑자기 오한이 들듯이 온몸에 불안감이 엄습해 왔고 결국 그동안의 공든 탑이 모두 허물어진 채 간신히 소멸되는 것만을 피한 채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던 그날도 이랬다.
‘으득!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자작! 네놈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감히 날! 나 위대한 흑주술사 헤리 제리코를 이런 시궁창까지 흘러들게 만든 네놈만큼은!’
그랬다. 빈민촌을 장악하고 이들에게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며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던 자는 바로 1년여 전, 알마리온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하나 그로 하여금 진정으로 주술사의 길을 걷게 만들기도 하였던 포넬에서 건너온 흑마법사 겸 흑주술사인 헤리 제리코란 자였다.
알마리온을 공격하다 오히려 최후를 각오하고 펼친 희생을 통한 정화의 주술에 당해 그의 영혼이 깃들여 있던 육체가 소멸된 것은 물론 그동안 어렵게 쌓아 온 힘 또한 대부분 잃어버린 채 알마리온이 혼절한 상태를 틈타 간신히 도망을 갔던 바로 그였다.
영혼의 상태로 도망을 쳤던 제리코는 간신히 영혼이 소멸되기 직전에 자신의 영혼이 깃들일 수 있는 육체를 지닌 자를 찾아낼 수 있었고, 그 육체를 빼앗아 떠돌며 조금씩 힘을 키워 오다 소렌토에 대규모 빈민촌이 생겨나자 이곳에 스며들었다.
빈민촌은 그에게 있어서 잃었던 힘은 물론, 복수까지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제 대략 천여 명의 원혼들만 더 흡수하면 예전의 힘을 되찾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본격적으로 복수를 위해 행동을 개시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자에게 그동안 힘들게 쌓아 온 모든 것을 또다시 잃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된 제리코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그동안 구축해 온 모든 힘을 총동원하였지만 오히려 그동안 숨겨 놓았던 힘까지도 대부분 소진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제압하지 못하자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설마 또다시? 아무래도 안 되겠어. 탈출로를 준비해 놔야겠다. 아직 예전의 힘을 되찾지 못한 상태에서 또다시 지금의 육체가 손상을 입게 되면 또 다른 육체를 찾지 못하게 된다.’
알마리온에게 크게 당했던 그날 느꼈던 불안감을 또다시 느끼게 된 제리코는 만약을 대비하여 언제든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로를 재확인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다시 한 번 비슷한 일을 당하게 되면 그에게는 또 다른 기회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컥!”
이제 더 이상 알마리온을 가로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빈민촌에 들어선 지 오늘로 정확히 열흘째.
알마리온은 빈민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의지를 제압당한 이들은 물론 그들에게 동조하여 서슴지 않고 악행을 저질러 온 자들 모두를 정의란 이름으로 처단하였다.
지난 열흘 동안 그에 의해 정의란 이름으로 처단된 자들의 수는 무려 2천여 명에 가까웠다.
아무리 정의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는 하지만 2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것은 보통의 정신으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그러한 잔인한 일이었다.
아니, 이런 일은 설사 세상의 모든 악을 멸하겠다는 특별한 사명감을 가진 이라 하더라도 결코 행할 수 없는 그러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러한 일을 행하라 명령하지도, 그리고 사명감을 부여하지도 않은 일이었기에 가뜩이나 여린 영혼의 소유자인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갈등하고 혼란스러웠으며, 또한 살인귀처럼 되어 버린 스스로에 대해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마음을 하늘도 알았음인가? 잔뜩 드리워진 먹구름에서 굵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마른 대지를 흠뻑 적셔 나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하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저벅! 저벅!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저벅! 저벅!
이들을 이렇게 만든, 영문도 모른 채 누군가를 위한 제물이 되어야 했던 많은 원혼들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서라도.
저벅! 저벅!
앞으로 발생할 더 큰 불행을 막기 위해서라도.
저벅! 저벅!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저벅! 저벅!
설사 이런 일을 행한 자신을 신이 영원히 용서하지 않고 그 죗값을 묻는다 하더라도 알마리온은 이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벅! 저벅!
끼이이익!
“으으…… 네, 네놈이…… 네놈이 끝내…….”
헤리 제리코의 영혼이 깃들인 자가 두려움을 넘어 공포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알마리온을 바라보았다.
자신만의 왕국을 침입한 정체불명의 인물이 알마리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하루 전의 일이었다.
멈추지 않고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결국 참지 못하고 침입자를 살펴보기 위해 나갔던 그는 그곳에서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그 인물, 바로 자신으로 하여금 이토록 치욕스럽게 삶을 연장하게 만든 장본인인 알마리온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원수인 알마리온이라는 것을 확인한 그는 곧바로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그 순간 정령에 의해 모든 탈출로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결계가 주변에 쳐지면서 결국 헤리 제리코가 깃들인 육신도, 그리고 그의 영혼도 모두 꼼짝없이 갇혀 버린 상태가 되었다.
“역시 그대였군.”
“나, 날 알아보는 것이냐?”
“물론. 용케 그날 그곳을 빠져나갔던 모양이군.”
“으으…….”
“하지만 그날 그곳을 빠져나간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서, 설마!”
알마리온의 말에 무엇인가를 기억해 낸 제리코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참회懺悔의 술術을?”
“잘 알고 있군.”
“으으……. 네, 네놈이 어떻게 그런 최고의 주술을!”
참회의 술이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자의 영혼을 참회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주술로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세상을 정화시키는 희생의 주술과 더불어 최고 수준의 주술이었다.
다만 희생의 주술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희생시킴으로써 세상을 정화시키는 그러한 주술이었기에 주술의 자체의 난이도에 의해 최고의 주술이라 평가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참회의 술은 그 난이도 자체도 최고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는 최정상의 주술사가 아니면 함부로 행할 수 없는 그러한 주술이었다.
이러한 참회의 술은 악에 찌든 영혼이 진심으로 자신의 악행을 뉘우칠 때까지 계속해서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가득 찬 형벌을 받는 것으로, 설사 자신이 벌인 악행을 진심으로 모두 뉘우친다 하더라도 술법이 풀려 그 영혼이 망자의 고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소멸되어 버리는 가장 가혹한 형벌을 가하는 그러한 술법이었다.
뚜벅!
“오, 오지 마! 다가오지 말란 말이다!”
뚜벅!
“네, 네놈도 나와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결국 네놈 손에 죽은 저들 또한 아무것도 모른 채 네놈 손에 죽은 것 아니더냐!”
제리코의 말에 잠시 멈칫거리던 알마리온의 발걸음이 다시 옮겨졌다.
어차피 이 일로 신의 심판을 받게 된다면 그 어떠한 형벌이라도 기꺼이 받을 결심을 한 알마리온이었다.
뚜벅!
“사, 살려 다오! 아, 아니, 차라리 단번에 나의 영혼을 소멸시켜 다오! 제발 내게 자비를 베풀어 다오! 제발!”
자신이 지은 모든 죄를 진심으로 뉘우칠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을 당하다 죄를 뉘우친 이후에야 소멸되는 무서운 형벌만큼은 피하고 싶은 제리코였기에 차라리 자신의 영혼을 소멸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제리코였다.
“…….”
뚜벅!
“으으…… 으아악! 죽어!”
과도한 공포심을 끝내 이기지 못한 제리코의 영혼이 깃들인 육체가 막무가내식으로 알마리온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런 움직임에 당할 알마리온이 아니었다.
“어리석은!”
“컥!”
어느새 그는 정령들을 소환하여 제리코의 영혼이 깃들인 육체를 꼼짝하지 못하도록 결박하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정성 들여 참회의 술을 행하기 위한 결계를 그려 나가기 시작하였다.
“크크큭! 네놈을 저주할 것이다! 내 영혼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네놈에게 저주가 내려지도록 네놈을 저주할 것이다! 크하하하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은 물론, 생전 들어 보지도 못한 욕까지 실컷 퍼붓던 그가 이번에는 광기에 찬 저주를 퍼붓기 시작하였다.
“흑흑흑! 제발 자비를! 나 또한 단지 흑마법을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까지 모두 처형당하는 모습을 봐야만 했었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내가!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 가족들이 단지 흑마법을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마법사들에게 사냥당하였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단 말이다! 그런 내가 어떻게 그냥 죽을 수 있었겠는가!”
욕설과 원망 그리고 저주를 퍼붓던 그는 이번에는 작전을 바꿨는지 알마리온의 동정심에 구걸을 하였다.
잠시 알마리온의 손길이 멈칫거렸지만 이내 다시 결계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설사 그런 원한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너무 많은 이들이 고통에 신음하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것도 모자라 영혼마저도 안식을 취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크큭! 좋아. 이제 더 이상 네놈에게 구걸 따윈 하지 않겠다! 네놈 또한 내 아내 그리고 아이들을 내 눈앞에서 무참히 죽인 그놈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놈일 뿐이니 말이야, 크크크! 너희 놈들은 정의란 터무니없는 가면을 뒤집어쓴 또 다른 악마일 뿐임을 내 잠시 잊었구나! 크하하하하! 하나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너나 그때 그놈들 또한 결국 나와 똑같은 것들임을!”
이 말을 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였는지 제리코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뚫어지게 알마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결계를 완성시킨 알마리온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난 채 잠시 헤리 제리코의 영혼이 깃들여 있는 육체와 눈을 마주쳤다.
“후후. 결국 이렇게 끝이군. 참으로 오랜 세월이었다. 네놈 눈에는 내가 그저 악에 찌든 영혼처럼 보이겠지만 난 지난 3백 년 동안 내가 해 온 일에 대해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
“왜냐고? 그건 날 이렇게까지 만든 그놈들 모두에게 철저하게 복수를 하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세상은 약한 것들은 강한 것들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히는 그러한 세상. 나 또한 그 당시 그놈들에게 내 아내와 아이들을 잃었을 때 단지 내가 그놈들보다 약했기 때문에 당했듯이, 나에게 당한 것들 또한 약자이기에 당연히 당해야 했던 것이니까.”
“궤변이군.”
“궤변이라고? 웃기지 마! 네놈 손에 의해 죽은 저놈들도! 그리고 나도! 단지 네놈보다 약하기 때문에 죽었을 뿐이다! 정의? 웃기지 마라! 누가 그런 정의를 만들었고, 누가 그런 정의를 행하라 네게 의무를 부여했더냐! 그것은 단지 네놈만의 정의이고, 네놈만의 사명감일 뿐이다!”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알마리온을 저지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깨달은 제리코는 알마리온으로 하여금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들게 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를 흔들어 놓고 싶을 만큼 제리코의 마음에는 그에 대한 원한이 가득했던 것이다.
“지금 이 육체를 나에게 빼앗긴 자는 그럼 뭐지? 이 육체의 주인이 어떤 자인지 아는가? 하긴 네놈 같은 놈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겠지! 네놈 같은 놈들은 그저 자신이 목적한 일을 위해서는 수천이 아니라 수만 명이라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죽일 그런 놈들이니까 말이야! 후후후! 그러면서, 뭐? 정의? 사명감?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무, 무슨 수작이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냐!”
“수작? 네가 그러지 않았는가? 너에게 육신을 빼앗긴 자는 아무런 죄도 없었다고 말이야.”
“……?”
“그런 죄 없는 자를 해칠 수는 없는 일이겠지.”
“무슨?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글쎄.”
“크크크! 아마도 이 육체의 영혼을 찾고 싶은 모양이군? 하지만 어쩌나? 이미 이 육체는 물론 제물이 된 것들의 영혼 또한 이미 완전히 내게 흡수되어 남아 있지 않은데 말이야. 크하하하하!”
알마리온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한 제리코가 통쾌해하며 소리쳤다.
이미 육체에서 빠져나간 영혼을 다시금 원래의 육체에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주술 중에는 한 가지 매우 특이한 주술이 있었다. 이름 하여 죽은 자의 영혼을 잠시 원래의 육체에 깃들이게 하여 먼 곳을 이동함에도 시신이 상하지 않게 하는 그러한 주술이었다.
이러한 주술은 Necromancy라는 마법의 한 형태로까지 발전하였는데, 이는 죽은 자의 몸에 영혼을 깃들이게 함으로써 일정한 시간 동안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는 마법이었다.
귀족들의 경우 이러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을 통해 가족들의 시신을 회수하여 성대한 장례를 치러 주는 일이 많았는데, 이로 인해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의례히 이러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이 전장에 버려진 시신들 중 귀족 가문에 속한 자들이나 돈 많은 부유한 상인들의 자제들을 찾아내어 시신을 건네주고 많은 보상금을 받곤 하였다.
제리코는 아마도 알마리온이 그러한 주술을 사용하여 시신을 원래의 가족들에게 전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모양이었다.
하나 알마리온의 의도는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후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지.”
“내가 모르는 것?”
“그렇다. 네가 구태여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나로 하여금 평생토록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려는 것이겠지?”
“……!”
“후후. 굳이 네가 그토록 노력하지 않아도 난 이미 충분히 이번에 내가 벌인 일들을 후회하고 있다. 하나 난 이미 내가 한 일에 대해 언젠가 내가 죽게 되어 신의 심판을 받을 때, 신이 오늘의 일을 내 잘못이라 판단하신다면 기꺼이 그분이 내리는 어떠한 형벌이라도 달게 받을 생각이다.”
“으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오늘 일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겠지. 한데 말이야, 그러면 그럴수록 결코 네놈 또한 쉽게 보내 주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이런 지독한 놈!”
“맞아. 난 지독한 놈이다. 그게 네 탓일 수도, 아니면 나 자신도 몰랐지만 처음부터 이런 지독한 놈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어쨌든 그래서 난 네가 차지하고 있는 육체가 원래부터 신께서 부여한 삶을 모두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뭐, 뭐라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가?”
“맞아. 원래는 신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한 가지 편법이 존재하긴 하지.”
“편법?”
“그래. 바로 네놈처럼 그 육신 안에 또 다른 영혼을 깃들이게 하면 되는 일이지.”
“뭐, 뭐라고!”
“마침 내 몸 안에는 너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훌륭한 분이 만든 사념체가 봉인되어 있거든.”
“사, 사념체!”
“맞아. 해서 난 그 사념체를 네놈이 차지하고 있는 육체 안에 깃들이게 할 것이다. 그런다면 이 육체 또한 신이 부여한 원래의 삶을 살아가겠지. 안 그런가? 후후후!”
“이, 이 악독한!”
“맞아. 난 말이야, 최소한 네놈에게만큼은 철저하게 악독해지려고 해. 그게 너에게 희생된 많은 이들을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이니까 말이야. 후후후!”
“으으…….”
철저하게 자신의 마지막 바람까지도 무참히 깨어 버린 알마리온에 대해 제리코의 영혼은 무한한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자! 그럼 소멸되는 그날까지 철저하게 자신이 지은 죄를 반성하라! 참회의 술!”
“으, 으, 으악! 으아아악! 으아악!”
제리코의 영혼과 육신이 강제로 분리되면서 듣기에도 섬뜩한 처참한 비명 소리가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으음…….”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육체와 영혼이 강제로 분리되면서 듣기에도 섬뜩한 비명을 질러 대던 영혼을 빼앗긴 육체가 마치 잠에서 깨어난 자처럼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왜지?”
헤리 제리코 대신 그나이제나우가 만든 사념체가 깃들인 육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왜 날 봉인에서 풀어 준 것이지?”
“그것이 중요합니까?”
“몰라서 묻는 건가?”
“복수를 하실 생각이시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설사 그로 인해 세상에 큰 혼란이 온다 해도 저는 더 이상 그 일에 상관하지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무슨 뜻인가?”
“당신을 창조한 하인리히 폰 그나이제나우 대공이었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
알마리온의 말에 그나이제나우가 만든 사념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분명 이 세상 어딘가에는 친구이자 주군을 배신했던 가론 폰 로드에릭 대제의 핏줄을 이은 후예이거나, 아니면 그의 능력을 이은 후예들이 존재할 것이다.
하나 설사 그렇다 해도 이미 그들에게 복수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그나이제나우의 사념체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저곳을 통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 하루가 지난 후에 나가도록 하십시오. 지금 나갔다가는 이곳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근위군에 의해 체포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극형을 면키 어려울 것이니 말입니다.”
“자유를 주겠다는 것인가?”
“처음부터 제겐 그대의 자유를 속박할 아무런 자격도 없었습니다. 하니 자유를 되돌려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
“그럼 전 이만.”
더 이상 할 말이 없음인지 알마리온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걸음을 옮겨 건물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