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소굴
“어쩌지? 이럴 때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거리고 있는 당돌한여우였다. 기절해 있다 깨어나니 곁에는 자신의 주인이자 스승이기도 한 알마리온이 의식을 행하는 자세를 취한 채 앉아 있었다.
망자의 영혼을 그들이 가야 할 곳인 망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의식에 열중하던 중에 갑자기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면서 부작용이 일어났다는 것까진 기억나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해서 자신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의식을 차리고 깨어나 보니 곁에 있던 알마리온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에 그녀는 크게 놀라 무엇인가 하려 하였지만 이러한 때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기에 이처럼 애만 태우며 발만 동동거리는 것이었다.
“크헉! 쿨럭!”
“악! 주, 주인님! 주인님!”
의식을 행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몸을 건드려서는 안 되었기에 또다시 한 바가지나 되는 검붉은 피를 토해 내는 알마리온의 모습을 보면서도 당돌한여우는 그저 애만 태울 뿐이었다.
“대체 얼마나 강한 놈이기에…….”
얼마나 애가 타는지 입술이 바짝바짝 타는 것은 물론 꽉 움켜쥔 그녀의 작은 주먹은 핏줄마저 툭툭 불거져 나올 정도였다.
‘차라리 죽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리 작정을 하고 벌인 일이었지만 이제는 인내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은 고통에 알마리온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채, 빠르게 정신이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후후! 겨우 그 정도밖에는 안 되는 것인가? 실망이군. 그 정도 장난도 받아 내질 못하다니 말이야.
‘으으…….’
소드 마스터인 하인리히 폰 그나이제나우 대공에 의해 탄생한 사념체는 철저하게 알마리온을 농락하고 있었다.
상급 정령술사도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는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중급 정령술사이자 중급 주술사인 알마리온은 애초부터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
게다가 창조주의 복수를 위해 존재하는 사념체는 손쉽게 알마리온을 상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호랑이가 고양이를 가지고 놀듯 알마리온으로 하여금 치욕을 느끼다 못해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그를 철저히 파괴해 나갔다.
‘어, 어서…… 어서 날 소멸시켜 주시오. 제발! 제발 이제 날 더 이상 농락하지 말고 소멸시켜 달란 말이오!’
-내가 왜 원수의 후예인 네놈에게 그런 선의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지?
‘이미, 이미 말하지 않았습니까! 난 그대가 찾던 그 목표가 아니라고 말이오!’
-후후.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은가? 아니, 설사 그런 너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요망한 물건을 지니고 있는 넌 그자의 후예. 그자의 후예인 널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처단하라는 것이 날 창조하신 창조주가 내게 부여한 절대적인 명령!
‘아직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오? 아직도?’
-물론.
‘대, 대체 언제까지…… 언제까지 날 치욕스럽게 만들겠단 것이오!’
-치욕? 아직도 그따위 말이 나오는군?
‘이, 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토록 누군가를 원망하고 두려워해 본 적이 없던 알마리온이다.
주인이었던 지크가 자신을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때에도 그는 지금처럼 강한 원망과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하나 그 무엇보다도 지금 그를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절망감이었다. 처음의 그 굳은 의지와 결심도 계속되는 가혹한 고통 속에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자신을 충분히 소멸시켜 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장난감처럼 다루는 사념체에 대해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오기와 악으로 버티기도 하였지만 지금의 그는 오로지 한 가지 바람뿐이었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고!’
-후후. 그런가? 역시 아직도 멀었군.
‘으아악!’
사념체의 반응에 악이 받친 알마리온이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며 공격해 나갔다.
‘대단한 자질이다. 만약 이 아이가 그자의 후예만 아니었어도…….’
그나이제나우의 사념체는 내심 알마리온에 대해 감탄하고 있었다. 비록 원수의 후예이긴 하여도 지금까지 겪어 본 알마리온은 여러 면에서 그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능력으로는 절대 자신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정정당당하게 지닌 바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여 정면 승부를 걸어왔다.
솔직히 그때의 그러한 당당한 모습은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인 그나이제나우의 기억 속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만약 이 아이의 이름이 창조주께서 충성을 다하였던 주군의 이름과 같지만 않았어도 이런 식으로 이 아일 괴롭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투에 앞서 자신의 이름을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라고 밝힌 것이 오히려 자신을 더욱 자극하여 진작 끝났을 일을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끌어오게 만들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군. 좋아! 그렇게 네 한계를 뛰어넘어라. 그것이 내가 네게 주는 마지막 선물일 것이니. 그리고 그 순간이 네가 그토록 바라는 소멸의 때가 될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알마리온의 공세는 점점 더 위력이 강해져 가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정령 마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홀로 이루어 나가야만 하였다.
이후 필립이라는 4서클 마법사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하면서 그가 지닌 모든 것을 얻게 되었을 때, 알마리온은 그가 남긴 마법서를 통해 이를 참조하면서 다양한 정령 마법을 익혀 나갔다.
거기에 푸른하늘로 인해 주술사의 능력까지 갖게 되고, 리처드와 수시로 대련을 하면서 그의 실력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하나 그 모든 것이 유일무이한 소드 마스터였던 그나이제나우에 의해 만들어진 사념체 앞에서는 한낱 어린아이 장난일 뿐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소드 마스터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념체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에 좌절도 하였고, 원망도 하였고, 악에 받쳐 무모한 몸부림을 치기도 하였지만 결과는 참담함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한 알마리온은 무의식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조차도 모른 채 그저 몸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 나갔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었다.
‘제발! 제발! 제발 깨지란 말이다! 제발!’
무엇인가 알 수는 없지만 타는 듯한 갈증을 느껴 오던 알마리온은 바로 눈앞에 갈증을 깨끗이 날려 줄 오아시스를 발견하고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오아시스를 향해 달려갔다.
하나 알마리온은 더 이상 오아시스로 다가갈 수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그와 오아시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오아시스가 보이지 않았다면 부질없는 희망도, 그리고 절망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을. 눈에 보이지만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현실에 그는 깊은 좌절감을 느껴야만 했다.
‘깨져!’
찌직!
‘깨져! 깨지라고!’
찌지직!
‘깨지란 말이다! 우아아아악!’
쩡!
‘아…….’
오아시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깨어지면서 알마리온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황홀감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후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그대는…….’
-축하해야 한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아쉽군.
‘…….’
-이제 그대의 영혼을 소멸시켜야 할 때가 되었으니 말이야.
‘으음……. 구태여 지금까지 기다린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까?’
-이유? 물론이네. 자네가 또 하나의 벽을 깰 때까지 기다렸던 이유가 있었지.
‘무엇입니까. 그 이유라는 것이?’
-좋아. 그대가 벽을 깬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알려 주도록 하지. 자네가 벽을 깰 때까지 구태여 기다린 이유는 그것이 내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네.
그나이제나우가 만든 사념체가 알마리온으로 하여금 벽을 깨고 한 단계 더 높은 상급 정령술사가 될 때까지 기다렸던 이유는 물론 그를 존재케 한 그나이제나우가 그에게 내린 절대적인 명령, 그러니까 가론 폰 로드에릭 대제의 후예들에게 가장 비참한 죽음을 내리라는 명령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거기에 더해 자신이 차지할 알마리온의 육체가 더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것이 그의 일에도 도움이 많이 되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대가 검의 길을 걷는 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궁극적으로는 서로 통하는 법. 중급 정령술사인 그대의 몸보다는 상급 정령술사인 그대의 몸이 내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빨리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었네.
‘역시 나 같은 것은 여전히 안중에도 없구나.’
또 하나의 벽을 뛰어넘어 상급 정령술사가 된 자신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념체는 그런 자신을 언제든지 소멸시켜 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자 알마리온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알마리온 자신도 상급 정령술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나이제나우가 만든 사념체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가 되었군.
‘그래야겠죠. 세상에 끝나지 않는 파티는 없으니 말입니다.’
-후후. 그렇지. 그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청명한 푸르른 빛을 띤 검들이 빼곡히 들어찬 모습을 본 알마리온의 눈빛은 암울하게 가라앉았다.
‘…….’
벽을 뛰어넘은 상태에서도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은 더욱 큰 자괴감을 느끼게 하였지만 이 깨달음과 약간의 시간이 알마리온에게 준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크고 거대한 벽이었기에, 심한 좌절감을 느끼며 자신이 준비한 마지막 안배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렸던 그에게 이 한 번의 깨달음과 약간의 여유는 잊고 있었던 최후의 안배를 떠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잘 가게.
‘지금! 노에스!’
사념체의 마지막 공격이 가해지는 바로 그 순간. 알마리온은 처음으로 대지의 상급 정령인 노에스를 소환하여 대지의 힘으로 방패를 만든 후 차력의 수를 이용하여 자신의 몸을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인 미스릴처럼 만들었다.
거기에 그도 모자라다 생각하였는지 그는 공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술법인 ‘공간의 술’이란 술법을 펼쳤다.
‘공간의 술!’
-훗! 최후의 발악인가?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나의 공격을 막진 못할 것이다!
확실히 소드 마스터인 사념체의 능력이라면 이제 막 상급 정령술사가 된 알마리온 정도는 다소 곤란함을 느낄 수는 있어도 결국에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다. 하나 그는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최후의 승자를 가를 결정적인 원인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
그나이제나우에 의해 탄생한 사념체가 잠시 깜빡하고 잊은 한 가지. 그것은 바로 이들이 대결하는 곳이 알마리온의 의식 속이라는 것이었다.
‘봉인의 술!’
현실의 세계였다면 하나의 술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주문을 모두 완성하는 데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하나 의식의 세계에서는 그보다는 훨씬 짧은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술법을 펼칠 수 있었다. 의식의 세계란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의식 세계에 들어와 있는 사념체 또한 거의 대동소이한 조건이었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의식 세계라는 점이 사념체보다는 알마리온에게 조금 더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상급 정령술사가 되면서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에 대한 통제력이 이전에 비해 월등히 높아졌다는 것이 또한 알마리온에게는 최대의 장점이었다.
-무, 무슨!
‘크헉! 악! 크악!’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크게 당황한 사념체가 터뜨린 다급성과 알마리온의 비명성이 거의 동시에 울렸다.
대지의 상급 정령인 노에스에 의한 대지의 방패와 차력의 술은 물론, 공간을 왜곡시키는 공간의 술까지 3중의 방어막을 쳤지만 사념체의 장담처럼 그 모든 것이 부질없이 뚫린 채 사념체가 만들어 낸 마나의 검들이 그의 온몸을 꿰뚫고 지나가 버린 것이다.
하나 알마리온은 결코 혼자서만 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펼친 마지막 술법인 봉인의 술은 사념체를 자신의 무의식 속에 만든 결계 안에 가두어 버린 것이었다.
‘됐어…… 이젠 된 것이…….’
-지, 지독한 놈.
의식을 잃어 가는 알마리온의 입가에 어린 안도의 미소를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정령의 고향에 봉인되어 있던 네 최상급 정령들이었다. 이들 네 정령들은 알마리온의 의식의 세계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마지막 순간에 그런 일을 벌이다니.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홰홰 내젓는 실레스틴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그동안 빌빌거리던 놈이 이번엔 제법 괜찮은 모습을 보였어.
셀레아나 또한 알마리온이 마지막에 보인 모습에 나름 감동을 받았는지 늘 알마리온의 나약함에 대해 툴툴거리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조금만 손을 늦게 썼어도 우리 넷 모두 또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에 들었어야 했을지도 모르는데 엘레스트라 덕분에 그러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군.
노에아넨의 말에 실레스틴은 아니꼽다는 눈빛으로 엘레스트라를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팽 하니 돌려 버리긴 하였지만 인정해야 할 일을 인정하지 않거나 하진 않았다.
노에아넨의 말처럼 사념체가 펼친 최후의 일격이 막 알마리온의 몸을 관통할 바로 그 순간 엘레스트라는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알마리온의 몸을 보호하였다.
만약 그 최후의 순간에 엘레스트라가 알마리온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알마리온이 마지막에 펼친 봉인의 술법에 의해 그나이제나우가 만든 사념체가 봉인됨과 동시에 알마리온의 영혼 또한 소멸되었을 것이다.
결국 영혼이 소멸된 알마리온의 몸은 싸늘한 주검이 되었을 것이고, 당돌한여우가 알마리온의 유품을 수습한다 하더라도 단지 평범한 팔찌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정령의 고향을 알아보는 자가 나타날 때까지 이들 네 정령들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든 엘레스트라 네가 이 녀석을 마지막 순간에 구해 줬으니 네가 끝까지 책임지라고. 쳇!
그 말을 끝으로 실레스틴은 알마리온의 의식 세계에서 사라져 버렸다. 또한 셀레아나와 노에아넨도 그 뒤를 따라 모습을 감추었다.
“으음…….”
“주, 주인님? 주인님! 정신이 드세요? 예?”
알마리온이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하며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 닷새 만에 의식을 차리려는 듯 반응을 보이자 호들갑을 떠는 당돌한여우였다.
“으…… 무, 물……. 물 좀…….”
눈조차 뜨지 못한 상태에서도 심한 갈증을 느끼는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 닷새 만에 가장 먼저 물을 찾았다. 하긴 사념체와의 격전 중에 여러 차례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 냈으니 갈증을 느낄 만도 한 일이었다.
“물? 알겠어요. 운디네! 어, 어서 주인님께 물을!”
“꿀꺽! 꿀꺽! 꿀꺽! 쿨럭! 쿨럭! 쿨럭! 으음…….”
타는 듯한 갈증에 급하게 물을 넘기다 보니 사레가 들린 알마리온이 격한 기침을 하며 상체를 잠시 일으켰지만 이내 또다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주인님! 주인님!”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인가?’
의식을 잃었다 찾았다 하기를 반복하던 그가 완전하게 의식을 되찾은 것은 처음 잠시 동안 의식이 되돌아왔던 날로부터 또다시 나흘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였다.
듬성듬성 뚫려 있는 지붕을 통해서 밤하늘의 별빛이 보이는 모습을 보아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알마리온은 어떻게 자신이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엘레스트라에게 고맙다고 해. 네놈이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엘레스트라 덕분이니 말이야.
‘엘레스트라 님께서 절 구하셨단 말입니까, 셀레아나 님?’
-맞아. 엘레스트라가 아니었다면 넌 이미 죽었을 거야.
‘감사합니다, 엘레스트라 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그대가 위험에 빠진 것이 우리 때문이었으니 제게 감사할 일이 아니랍니다.
‘그렇지만…….’
-흥! 또 잘난 체하네.
‘실레스틴 님…….’
-왜? 흥! 내가 널 그 사념체와 한판 붙도록 꼬드긴 것이 억울해서 그러냐?
‘아닙니다, 실레스틴 님.’
-한데 왜 불러? 그것도 감히 네까짓 것이 그런 같잖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면서 말이야.
‘…….’
오히려 짜증을 부리는 실레스틴의 행동에 알마리온은 미소를 지었다. 실레스틴이 지금 자신에게 얼마나 미안해하는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흥! 웃기지 말라고. 내가 왜 네놈에게 미안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응? 감히 너 따위에게 말이야.
실레스틴이 짜증을 부리면 부릴수록 알마리온의 미소 또한 더욱 짙어졌다.
-쯧쯧! 그냥 간단하게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무슨 똥고집을 부리는 것인지, 원. 그러면 네 체면이 설 것 같으냐?
-뭐라고! 이 불덩어리가 뭐 잘났다고! 그리고 왜 나만 미안해야 하는데? 결국 너희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이었잖아? 안 그래?
-뭐, 그거야…….
그래도 자신을 충동질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알마리온은 더 이상 이들에 대해 가졌던 서운함을 완전히 없앨 수 있었다.
게다가 이들이 왜 그러한 일을 벌였는지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이들에 대한 서운함이나 원망 같은 것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그나마 남아 있는 감정의 찌꺼기마저도 확실하게 날려 버릴 수 있었다.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이것을 깨트려 드리겠습니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지?
‘원하신다면 네 분을 봉인하고 있는 봉인체인 이 정령의 고향을 파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들 네 정령들이 자신들을 속박하고 있는 정령의 고향을 파괴하여 주겠다는 말에 얼마나 격동하고 있는지 느낄 수는 있었다.
-됐어.
‘예?’
-됐다고. 이젠 그런 것에 별 흥미 없으니 됐다고.
-나도 그래. 뭐, 어차피 정령계로 돌아가도 심심하기는 마찬가지니 그냥 여기 죽치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허허. 그냥 이 아이가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는지 관심이 생겼다고 하면 될 것을 뭘 그렇게 돌려 말하는 것이지?
-그래. 너 잘났다, 이 흙덩어리야.
-당연히 잘났지. 안 그런가? 넌 형체도 없지만 우리는 뚜렷한 형체가 있으니 말이야. 허허허.
사대 원소 중 유일하게 형체조차 없는 바람이었고, 그것은 이들 정령들에게는 꽤나 큰 놀림감이었다.
-뭐라고! 이 노인네 흉내나 내는 흙덩어리 녀석이 정말!
-크크큭! 뭐, 틀린 말도 아닌데 그렇게 열을 내나 몰라.
-이것들이! 정말!
“으윽!”
가뜩이나 눈동자만 움직여도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알마리온이었기에 손목에 차고 있는 정령의 고향에서 느껴지는 파동에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그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만들 하세요. 아직 알마리온 님의 몸 상태는 최악이니 말이에요.
-또 잘난 체하네.
좌충우돌. 말끝마다 충돌하는 실레스틴이었지만 엘레스트라의 말에 더 이상 알마리온을 힘들게 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때마침 당돌한여우가 잠결임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의 신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기에 이들 또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주인님? 주인님! 이제 정신이 완전히 드신 것인가요?”
“훗! 또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냐?”
“흑! 주인님! 제가 얼마나…….”
“으윽! 그, 그만…….”
알마리온이 완전히 의식을 차린 것이 기뻤는지 덥석 안겨드는 당돌한여우로 인해 알마리온은 온몸이 부서져 나가는 것만 같은 고통에 다시 한 번 신음을 터뜨렸다.
“죄, 죄송합니다. 주…… 아니, 대족장님.”
“후! 이젠 괜찮구나. 한데 내가 얼마 만에 의식을 되찾은 것이지?”
“저도 확실히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의식을 되찾은 지 이틀 동안 주인님은 의식을 이어 가셨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엄청나게 피를 토하시고는 그대로 의식을 잃으셨는데, 처음 의식을 잠깐이라도 찾으신 것이 나흘 전이었어요.”
“그랬구나. 한데 이곳은 어디지?”
“근처에 버려진 집이 있었어요.”
“네가 고생이 많았겠구나.”
“예. 제가 그동안 얼마나 무서웠는지 대족장님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하하. 무서웠다는 녀석의 표정치고는 너무 자부심이 느껴지는 표정이구나?”
“헤헤.”
“어쨌든 수고했다. 그리고 고맙구나.”
“…….”
“지금은 내 몸 상태가 움직이기 힘든 상태이니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도록 하자.”
“예, 대족장님.”
알마리온이 몸을 거의 회복하게 된 것은 열흘이란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그 시간 동안 알마리온은 당돌한여우에게 주술을 가르치는 한편, 자신의 무의식 속에 봉인되어 있는 그나이제나우가 만든 사념체와 꾸준히 대화를 나누었다.
순간적인 방심으로 알마리온의 무의식 속에 봉인되어 버린 사념체는 원수의 후예라고 생각하고 있는 알마리온의 꼼수에 당해 버린 자신을 자책하느라 그의 대화 시도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그런 사념체가 생각을 바꾼 것은 알마리온이 자신의 의식 세계를 보여 준 이후부터였다. 알마리온의 의식 세계 전부를 본 사념체는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알마리온이 존재 목적인 원수의 후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은 물론, 이미 그가 존재해야 할 목적인 원수의 후예들은 그 자신들조차도 자신이 가론 폰 로드에릭의 후예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였을 뿐이다.
하긴 로드에릭 대제가 세웠던 마도 제국이 같은 마법사들에 의해 무너지게 되면서, 로드에릭이란 성을 가졌거나 아니면 그 성에서 파생되었던 모든 성을 가졌던 자들 대부분이 인간 사냥을 당하였다.
아니, 그 혼란 중에도 살아남은 자가 있긴 하였지만 모두 성을 버린 채 아예 성이 없는 자로 살아갔거나, 아니면 또 다른 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이 로드에릭 대제의 후예라는 것을 철저하게 숨긴 채 후손들에게는 아예 그러한 사실조차도 전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그들을 로드에릭 대제의 후예라고 볼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아울러 로드에릭 대제가 세운 마법 학파 또한 철저하게 공중분해 된 상태였기에 마도 시대가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그 또한 사라져 버렸으니 더 이상 그의 능력을 이은 자 또한 없다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령의 고향에 봉인되어 있던 네 정령들이 해 준 말로, 그나이제나우가 만든 사념체도 그들의 말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란 존재가 소멸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건 의미가 없어졌을 뿐, 실재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겠지.
-그게 무슨…….
-생각해 보라고. 그놈의 후예들이 비록 자신의 뿌리가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모른다고 해서 그 핏줄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어?
-그렇다면…….
-미친놈. 이놈도 정말 황당한 놈이네. 그놈이 세운 나라가 없어진 것이 벌써 1천5백 년 전이야. 그때 당시에 얼마나 되는 그놈의 후예들이 살아남았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할뿐더러 설사 안다고 해도 아마 그놈의 피를 조금이라도 물려받은 것들을 죄다 찾아내 죽인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들 중 3분지 1 정도는 죽여 놔야 할걸.
실레스틴의 말이 억지에 가깝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나이제나우의 사념체의 생각처럼 아직 복수가 끝난 것은 아니라는 생각 또한 지나친 억지일 뿐이었다.
-널 만든 그가 과연 그런 것을 바랐을까?
-…….
-너란 존재의 존재 목적은 분명 아직 끝난 것은 아니기에 네가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사실상 네 존재 목적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지. 하니 저 녀석의 말처럼 잘 생각해 보고 네 진로를 결정하라고.
‘실레스틴 님의 말씀처럼 진로를 결정하신 후에 제게 알려 주십시오.’
-…….
“나쁜 놈들이네요.”
소렌토에 입성하자 도시 전체가 파괴되어 있는 모습을 본 당돌한여우가 한 첫마디였다.
“그래도 몇 달 전에 비하면 빠르게 복구되고 있구나.”
이제는 거의 종결된 전쟁이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폰티악 후작의 영지인 쿠덴베르의 일부 지역은 포넬군이 장악한 가운데 로엔과 카빌란 제국 연합군을 상대로 끝까지 저항을 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한 협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다른 지역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도시와 버려진 채 황폐하게 된 농지를 재건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하나 로엔의 왕도로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던 소렌토의 경우에는 워낙 철저하게 파괴되었기에 복구를 위해 백성들을 총동원하고 있긴 하였지만 언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왕궁의 경우는 가장 철저하게 파괴되었기에 일단 무너진 잔해부터 정리하는 작업이 벌써 몇 개월째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저기구나.”
알마리온이 작위를 받게 되면서 하사받은 저택 또한 전란 중에 소실되었던 것을, 소렌토를 수복한 이후 테일러 상단에서 최대한 인력과 물자, 자금을 동원하여 소실된 건물을 모두 헐어 내고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고 있지만 겨우 단층짜리 건물 1개 동만 완성하여 알마리온이 소렌토에 오면 머물 수 있는 공간 정도만을 확보한 상태였다.
“멈추시오! 이곳은…… 충! 영주님을 뵈옵니다!”
저택의 정문에서 경비를 서던 서전트Sergeant 계급의 중년의 병사가 알마리온을 알아보고는 황급히 군례를 올렸다.
저택의 주인인 알마리온이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하였을 것이다.
“수고하네.”
“감사하옵니다, 영주님. 곧 안으로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괜찮네.”
“하오나…….”
“그럼 계속 수고하도록 하게.”
“예? 예. 충!”
조용하기만 하던 저택은 그 주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일순 활기를 되찾았다.
“영주님을 뵈옵니다.”
소렌토의 저택을 관리하는 총관인 아담 요하네스가 정중하면서도 절도 있는 몸동작으로 알마리온에게 예를 올렸다.
영지인 혼테르의 성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집사인 알베르토 요하네스의 사촌인 아담은 소렌토에서도 제법 명성이 높은 집사로 알마리온이 테일러 상단의 주인이 되자 그동안 봉사해 오던 가베일 자작가의 총관 자리를 내던지고 기꺼이 알마리온의 저택의 총관을 맡아 준 인물이었다.
“그간 잘 지냈습니까, 요하네스 총관?”
“영주님의 은혜로움으로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흠! 흠! 아! 그리고 이 아인 내 제자인 당돌한여우라는 아이입니다. 하니 잘 돌봐 주도록 하세요.”
로엔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야만인이라고 천시하는 게르혼족의 여자아이를 제자라고 소개를 하자 잠시 놀라는 표정으로 알마리온과 당돌한여우를 번갈아 보던 아담이 이내 표정을 관리하며 당돌한여우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놀란 것은 당돌한여우 또한 다르지 않아서, 부족의 관례에 따라 자신은 알마리온의 노예일 뿐이었지만 그런 자신을 제자라고 소개를 하였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소관은 아담 요하네스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당돌한여우예요.”
당돌한여우가 예법에 맞게 자신을 대하자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아담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정중하게 그녀를 대했다.
“앤.”
“예, 총관님.”
“네가 아가씨를 전담하여 모시도록 하거라.”
“예, 총관님.”
“아가씨, 앞으로 이 아이가 아가씨를 모시도록 할 것입니다.”
“고마워요, 총관.”
“그럼 이 아이에게 동쪽의 전망이 좋은 방을 내주도록 하고. 그리고 총관은 나와 함께 집무실로 가도록 하지요.”
“예, 영주님.”
당돌한여우에게 방을 배정해 준 알마리온은 아담과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전황에 대한 소식은 들은 것이 있습니까?”
“예, 영주님. 테일러 상단을 통해 전황에 대해 수시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곧 그 자료를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대략적으로 설명을 해 보세요.”
“그동안 테일러 상단을 통해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쿠덴베르 일부 지역을 장악한 채 끝까지 버티고 있는 포넬군을 상대로 로엔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여 끝장을 보자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고 있는 반면 뒤늦게 전쟁에 발을 들여놓은 카빌란 제국군 총사령관인 에그먼트 폰 가드너 백작은 굳이 끝난 전쟁에 병사들의 피를 더 흘릴 이유가 있느냐면서 협상을 통해 포넬군으로 하여금 스스로 물러나게 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었고, 이러한 지휘부의 의견 차이로 인해 쉽게 끝날 것 같은 전쟁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상인 프리모 공작이 전장에까지 나간 상태였다.
“어쨌든 곧 전쟁이 끝날 것 같군요.”
“예, 영주님.”
“그 밖에 내가 알아 두어야 할 다른 사안들이 있습니까?”
“조만간 1공주님의 혼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엘리자베스 공주님의 혼례가 말인가요?”
조금은 의외의 소식이었다. 물론 혼기가 찬 나이이긴 하여도 아직 전란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공주의 혼례가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은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 영주님. 때가 때이니만큼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고 있진 않지만 전란이 끝나면 조만간 발표될 것으로 보입니다.”
각 귀족 가문의 저택의 살림들을 관리하는 총관이나 집사 들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는가도 평가의 대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아담 요하네스는 상당히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으며, 여기에 테일러 상단의 눈과 귀까지 더해지면서 아담의 정보 수집 능력과 분석 능력은 더욱더 뛰어나졌다.
“1공주님의 배우자는 북부 귀족 파벌의 수장인 베론 폰 제거 백작의 장자인 아약스 폰 제거 남작으로 정해졌습니다.”
“제거 남작?”
“예, 영주님. 아무래도 국왕 폐하께오서 귀족 파벌 중 가장 세가 약한 북부 귀족 파벌을 끌어안으시려는 시도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중부나 서부, 그리고 남부 귀족 파벌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가 열세인 북부 귀족 파벌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늘 같은 귀족 파벌들 속에서도 찬밥 신세일 때가 많았고 이러한 비세非勢를 만회하기 위해 이들은 사안별로 국왕 파벌과 연합을 할 때도 많아 양측 모두로부터 박쥐 또는 철새라는 혹평과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국왕 폐하를 따르는 세력만으로는 전후의 국정을 장악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판단하신 모양이구나.’
이번 전쟁은 국왕에게는 그동안 귀족들의 손에 휘둘리던 국정 운영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전쟁이기도 하였다.
하나 전쟁이 끝나게 되면 아무래도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국왕파가 지금처럼 국정을 장악하긴 어려울 것이기에 본격적으로 세를 불리는 작업을 시작하였고, 그 포섭의 대상이 바로 북부 귀족 파벌이었다.
실상 왕국의 공주를 후에 백작 가문의 계승자이긴 하더라도 남작인 자와 혼인을 시키는 경우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로 그런 이유가 아니면 성사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친구가 1공주를 마음에 들어 했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엘리자베스 1공주의 혼인 이야기를 들은 알마리온은 레드로가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내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레드로 그 친구에 대한 소식은 들은 것이 있습니까?”
“이그나티우스 남작님은 여전히 승승장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하. 하긴 그 친구라면 어디에 있어도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는 그러한 친구지요.”
친구가 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알마리온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국왕 폐하께서도 이그나티우스 남작님에 대한 기대가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전후에 있을 논공행상에서도 그간 세운 공들을 크게 인정받을 것이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따지고 본다면 이전 전쟁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알마리온 그 자신이었다.
노예 병사로 군에 들어가 공을 세우고, 익스퍼트로 인정(?)을 받으면서 남작이란 작위와 영지를 받게 되었고, 또다시 공을 세운 것도 있지만 공주와의 연분설에 기분이 상한 왕비와 도르첸 공작이 로엔달 백작을 견제하기 위한 합작품으로 자작이라는 작위로 승작까지 하게 되었으니 실상 로엔 왕국 역사상 이처럼 가장 비천한 신분에서 이토록 신분이 급상승한 이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내일 입궁을 할 것입니다.”
“내일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궁내부와 협의를 할 일이 생겼습니다. 하니 궁내부 장관이신 함멜 자작에게 미리 통보하고 적절한 시간을 협의토록 하세요.”
“어떤 일을 논의하실 것인지 알려 주시면 약속을 잡는 데 더 편리할 것입니다.”
모든 광산은 왕실의 재산에 속해 있었기에 왕실의 재산을 담당하는 부서인 궁내부와 협의를 거쳐 왕실을 대신하여 광산을 운영하여 벌어들인 수익을 분배하는 협의를 반드시 거쳐야만 하였다.
“감축드립니다, 영주님.”
영지에서 광산이 발견됐다는 것은 어쨌든 그만큼 영지의 수입이 많아지는 것이었기에 충분히 축하받을 일이었다.
“고맙군요. 어쨌든 그 문제를 협의해야 하니 최대한 빨리 약속을 잡아 주도록 하세요. 그리고 도르첸 공작 전하와 근위군 사령관이신 로엔달 백작 각하, 체임버스 남작에게도 방문할 것이니 편한 때가 언제인지 알아보도록 해요.”
“예, 영주님.”
“그리고 상단에 연락하여 요하네스 경을 부르도록 하시고요.”
“예. 곧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여기 적은 사람을 좀 찾아보도록 하세요.”
그가 적어 준 메모에는 당돌한여우가 처음으로 주술사로서 처음 행한 일인 망자들의 영혼을 그들이 가야 할 곳인 망자의 고향으로 보내는 의식을 하였을 때, 가장 먼저 그 대상이 되었던 칼이란 이름을 가졌던 영혼의 가족들의 이름과 그들이 사는 곳의 거리 이름이었다.
영지에서 발견된 광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궁내부 장관인 함멜 자작과 면담을 마치고 나온 알마리온은 2왕자인 막스밀리언과 그 가족들이 머무는 곳을 향했다.
“하하하! 어서 오거라!”
“하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형님.”
반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었지만 마치 10년 만에 다시 만나는 사람처럼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두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공작 부인.”
“호호. 저이에게는 형님이라고 하시면서 제겐 언제쯤 호칭을 편히 하실 것입니까?”
막스밀리언 2왕자의 공식적인 작위는 공작이었다. 막스밀리언 폰 알리안 공작. 이것이 막스밀리언 2왕자의 공식적인 호칭이었다. 따라서 2왕자의 아내인 엘리노아도 왕자비가 아닌 엘리노아 폰 알리안 공작 부인이었다.
“어쨌든 잘 오셨어요. 저이도 자작님을 무척이나 그리워하셨답니다.”
“…….”
따뜻하고 소탈하게 자신을 기꺼이 반겨 주는 두 부부를 보면서 알마리온은 모처럼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뭐 하니, 아이반? 네 대부님께 인사드리지 않고?”
뽀얀 유백색 피부에 볼이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는, 아비인 막스밀리언을 닮아 또래에 비해 조금 덩치가 큰 씩씩한 아이가 바로 막스밀리언의 큰아들인 아이반 폰 알리안이었다.
알마리온은 막스밀리언의 부탁을 받아들여 아이반의 대부代父이자 후견인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예. 안녕하세요, 대부님?”
“하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예! 대부님.”
“그것을 가져오도록 하세요.”
“예, 영주님.”
함께 온 총관인 아담에게 이들에게 건네줄 선물을 가져오도록 지시하자 아담이 곧 시종에게 맡겨 두었던 것들을 가져왔다.
“이것은 형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둘째 도련님을 보신 것 축하드립니다.”
2개월 전 막스밀리언과 엘리노아 사이에는 둘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름이 피요르였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알마리온은 선물을 가져왔다.
“검입니다. 겉보기에는 투박하지만 제련이 잘된 아주 뛰어난 검입니다.”
“하하. 고맙다.”
“그리고 이것은 공작 부인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착용하고 계시면 몸을 보호하는 옛 마도 시대의 마법 물품입니다.”
“이런 귀한 것을 어찌…….”
마도 시대의 마법 물품은 무척이나 귀한 것이었다. 아무리 기능이 단순한 것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5백 골드 이상 나가는 것이었는데 알마리온이 건네준 목걸이 형태의 보석 장식이 되어 있는 마법 물품은 장식품으로서의 가치 또한 높은 것으로 한눈에도 그것이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실상 오늘 알마리온이 선물로 가져온 물건들은 모두 필립이라는 마법사를 처치하고 전리품으로 얻은 로브 안에 담겨 있던 것들 중 일부였다. 그렇지 않고서 그가 이런 물건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아우의 손이 부끄럽겠소. 하니 일단 받도록 해요.”
“하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귀한 것을 선물로 주시다니 말이에요.”
“…….”
엘리노아가 진정으로 감사해하자 알마리온 또한 기분이 좋아졌다.
“이건 도련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이것은 지혜를 뜻하는 보석인 자수정으로 만든 팔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용기를 상징하는 아쿠아마린이란 보석으로 만든 팔찌입니다. 지혜와 용기는 남을 이끌어 가는 자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 도련님께서도 훗날 이 보석들처럼 빛나는 지혜와 용기를 가지셨으면 합니다.”
“와! 감사합니다, 대부님!”
실상 아이반에게 건네준 2개의 팔찌 또한 마도 시대 때 만들어진 마법 물품이었지만 알마리온은 이들 부부가 크게 부담스러워할 것을 알기에 굳이 그러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 태어나신 도련님을 위한 것이옵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는 요정석으로 만든 것입니다.”
요정석은 보석은 아니었지만 그것만큼 가치가 있는 것으로, 원래는 요정의 눈물이 굳어진 돌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진짜 요정석은 세상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 알마리온이 건네준 요정석으로 된 목걸이는 진짜 요정의 눈물로 만들어진 것으로 그 가치는 앞서 알마리온이 선물로 건네준 것들과 비교해도 전혀 처지지 않는, 오히려 그러한 것들보다 더 높은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이렇게 신경을 써 주니 참으로 고맙다.”
“하하. 동생이 형을 위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이렇듯 세심한 배려를 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해요.”
“기쁘시다니 다행입니다, 공작 부인.”
“자! 이렇게 귀한 선물까지 받았는데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지. 자! 마침 식사 때이니 함께 식사를 하자꾸나.”
“예, 그래요. 곧 준비토록 할 것이니 그동안 새로 태어난 피요르도 보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소관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막스밀리언 왕자와 즐거운 오후 시간을 보낸 알마리온은 미리 약속했던 로엔달 백작과 체임버스 남작과도 유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더욱이 함께 제1의용군에 근무하였던, 이제는 비록 단승이긴 하여도 남작이란 작위를 받고 근위군 지휘관이 된 칸 남작까지 오랜만에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어 더욱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하게.”
“그럼 편히 쉬십시오, 백작 각하.”
“잘 가도록 하게.”
평소 두 사람 사이에는 서먹함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번 만남에서는 그러한 서먹함이 많이 가신 것은 물론, 지금까지 그 누구와도 이처럼 친숙하게, 그리고 만취할 정도로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눠 본 일이 없던 로엔달이 처음으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알마리온을 대해 함께 자리하였던 이들 모두 적지 않게 놀라워했을 정도로 오늘의 모임은 한마디로 유쾌함 그 자체였다.
“그럼 소관 또한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게, 체임버스 남작.”
모두가 돌아가고 로엔달과 칸만이 남았다.
“자작님께서 나날이 발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던가?”
“예, 마스터.”
둘만이 있을 때에는 칸은 로엔달을 그의 작위를 호칭으로 부르거나 사령관이라는 그의 직책으로 칭하는 대신, 마스터라는 이들이 속한 비밀결사에서 사용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잘 보았군. 그걸 곧바로 알아본 자네 또한 많이 발전하였군.”
최근 칸 또한 비약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였는데 그 원인이 다분하게 알마리온에게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한데 언제 자작님께 진실을 말씀드리실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단 몇 사람만이 알고 있는 사실. 로엔달에게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그 사실에 대해 거론하는 칸이었다.
“으음…….”
칸의 말에 로엔달의 입에서는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주제넘은 말인지는 몰라도 이제는 그분도 진실을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
“지금의 자작님이라면 얼마든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네. 하니 자네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거론하지 말도록 하게.”
“하오나 마스터, 그러한 일은 뒤로 미룰수록 더 밝히기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만약 자작님이 마스터의…….”
“그만! 그만하라 했네!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용납지 않을 것이라 했음을 모르는가!”
“마스터, 최소한 그러한 사실을 국왕 폐하께만이라도 알려야 했다는 것이 소관의 생각입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자작님께서 그 일로 인해 그런 식으로 전장을 떠나지 않으셔도 됐을 것이며 전쟁은 벌써 끝을 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
‘그래, 어쩌면 칸의 말처럼 그 일에 대해 국왕 폐하께서 알고만 계셨어도 알마리온과 카산느 공주와의 인연이 맺어졌을지도 모를 것이다. 아니, 설사 그렇게 된다 하지 않아도 최소한 알마리온, 나의 아들이 그런 식으로 불명예스럽게 전장을 떠나야 하지 않았을지도…….’
그랬다. 이 세상에 단 몇 명만이 알고 있는 진실. 그것은 바로 알마리온이 로엔달 백작의 친자라는 것이었다.
사정은 이러했다.
21년 전, 로엔달은 전대 체임버스 남작으로부터 하나의 실험을 제안받았다. 실로 우연한 기회에 전대 체임버스 남작은 여성 하이엘프 한 명을 포획하게 되었다.
전대 체임버스 남작은 이 여성 엘프가 숲에서 무엇인가에 의해 크게 부상을 당해 있는 것을 발견하여 은밀히 자신의 거처로 옮긴 것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여성 엘프는 그 이전의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은밀하게 힘을 키워 나가던 젊은 메르타니온 국왕에게 보고되었다.
당시 체임버스 남작이 포획하게 된 여성 하이엘프는 체임버스 남작의 판단에 따르면 비록 모든 기억을 상실하였지만 상급 정령술사라는 막강한 힘을 소유한 여인으로, 단 한 번도 출산의 경험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메르타니온 국왕은 한 가지 해서는 안 될 계획을 구상하고 실행하게 된다.
당시 로엔달이 정령술사라는 것을 아는 이는 본인과 메르타니온 국왕 그리고 전대 체임버스 남작 단 셋뿐이었다. 만약 그가 정령술사라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면 모든 마법사들에 의해 그는 인간 사냥을 당한 후 실험의 대상으로 쓰였을 것이었기에 이에 대한 비밀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힘인 정령술사라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로엔달을 통해 직접 확인한 메르타니온은 전대 체임버스 남작이 포획한 여성 엘프와 로엔달을 합방시켜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정령술사로 키워 낸다는 것이었다.
수십 년이 걸리는 이 계획은 일견 무모해 보이기도 하였고 또한 이러한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모두로부터 지탄을 받게 됨은 물론 자칫 인간과 엘프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메르타니온은 이러한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고 로엔달은 그러한 메르타니온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였다.
한데 문제는 첫 번째 아이가 태어날 무렵 벌어졌다. 큰 충격을 받아 기억을 잃었던 엘프가 어찌 된 영문인지 뒤늦게 자신이 잃었던 모든 기억을 되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배 속에 비록 엘프의 피가 섞여 있다고는 하더라도 인간의 아이가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성 엘프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인간들을 저주하며 탈출을 감행하였다.
지금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묻혀 갔지만 20년 전 소렌토에서 정체불명의 미친 마법사에 의해 소렌토의 3분지 1이 파괴되었던, 그리고 끝내 그 미친 마법사가 누구인지 정체조차 밝히지 못하였던 대사건을 벌인 주인공이 바로 로엔달의 아이를 밴 여성 엘프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끝내 그 여성 엘프는 인간의 손을 벗어나 탈출하였지만 실상 그리 멀리 도망가지는 못하였는데 갑작스럽게 격렬한 움직임과 힘을 사용한 때문에 배 속의 아이가 예정보다 훨씬 이르게 태어날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알마리온은 바로 그렇게 태어난 아이였다. 알마리온을 낳은 엘프는 알마리온에게 단 한 번의 젖도 물리지 않은 채, 아니 그 아이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않은 채 그 아이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인가에 갖다 버렸는데 하필이면 그 집이 노예들을 거래하는 자의 집이었고, 한눈에 보아도 갓 태어난 알마리온의 모습이 인간 세상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에 큰돈을 받고 팔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잠시 그를 키우다 로뎀 자작에게 그 아이를 많은 돈을 받고 팔아 버렸던 것이다.
훗날 장성한 알마리온을 처음 보았을 때, 로엔달은 그의 모습에서 한때 자신과는 부부의 인연을 맺었던 그 여성 엘프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었고, 혹시나 싶어 알마리온의 과거를 철저하게 조사한 결과 알마리온을 로뎀 자작에게 팔았던 노예 상인으로부터 그를 얻게 된 경위를 들은 후, 그 일대를 관장하는 대지의 상급 정령을 소환하여 ‘대지의 기억’이라는 정령 마법을 통해 그 당시의 알마리온이 출생하는 모습과 부정한 아이인 그를 여성 엘프가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사실을 장본인인 혼테르 자작님에게 솔직히 말씀하시고 그분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모든 사실을 확인한 이후에도 로엔달이 알마리온에게 솔직하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 못 하고 있는 것은 혹시라도 자신의 아들인 알마리온이 자신을 부정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그였지만 알마리온과 관계 된 일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혼자 있고 싶군.”
“마스터.”
“그만 나가 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하면 소관 또한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칸마저 나가고 홀로 남게 된 로엔달은 신경질적으로 술병을 집어 들고는 단숨에 술병을 모두 비워 버렸다. 하나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져만 갔을 뿐이다.
칼이 그토록 염려하였던 가족들을 찾는 일은 의외로 꽤나 힘든 작업이었다. 전란을 피해 피난을 떠난 백성들 중 상당수는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으며, 또한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백성들 중 일부는 포넬군에 의해 노예로 잡혀갔거나 강제로 노역에 동원되었다가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포넬군이 퇴각하면서 벌인 만행으로 인해 거리나 집 안 곳곳에는 그들에 의해 살해당한 백성들의 시신이 넘쳐 흘러났을 정도였다.
그나마 포넬군이 물러나고 이후 전쟁이 마무리되어 가면서 피난을 떠났던 백성들 중 일부가 돌아오고,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그리고 노예와 농노의 신분을 버리기 위해 전란 중에 도망쳤던 자들이 소렌토로 몰려들면서 원래부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을 찾는 일이 힘들어졌기에 알마리온이 왕도에서 볼일을 모두 끝낸 후에도 칼의 가족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간신히 칼의 가족들 중 이미 병든 어머니는 1년 전에 죽은 상태이고 두 동생만이 어렵게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그들을 만나 저택으로 데려가기 위해 찾아가는 길이었다.
아담으로부터 칼의 두 동생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들은 알마리온은 그러한 사실을 당돌한여우에게는 비밀로 한 채 길을 안내할 자만을 대동한 채 칼의 두 동생이 살아가고 있는 빈민가로 향하고 있었다.
빈민가에 들어서자 도저히 참기 힘든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였지만 알마리온은 어린 시절 이보다 더한 노예들의 거처에서 살아온 경험이 있었기에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지독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잠깐.”
“예? 무슨 일이십니까, 나리?”
코를 마비시킬 정도의 지독한 악취에 손수건을 꺼내 코를 움켜쥔 채 종종걸음으로 앞서 걸어가던 자가 알마리온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으음! 저건…….”
알마리온의 눈길이 향한 곳. 그곳에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저, 나리…… 이곳에서는 저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요. 하니 신경 쓰지 마시고…….”
제크의 말처럼 이곳 빈민가에서는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는 이들, 그리고 빈민가의 패권을 갖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다툼을 벌이는 조직들 간의 전쟁 등으로 인해 죽은 자들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일들이 많았다.
특히 지금처럼 전란을 틈타 거주이전의자유가 없는 신분에 속하는 자들이 자유민 신분을 얻기 위해서, 그리고 이미 황폐해진 농지를 버린 자들이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무작정 대도시로 모여들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통제할 공권력이 부족한 때문에 방치된 이곳 빈민촌들은 그야말로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더러움과 온갖 사악한 악행들이 백주 대낮에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나마도 누군가에 의해서 벗겨졌는지 실오라기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앙상하게 뼈만 남은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의 주검에는 도대체 죽기 전까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온몸에 멍과 상처 자국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
아직 세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에 이처럼 싸늘한 주검이 된 것도 서러울 일이거늘, 그 누구도 이 어린 주검을 거두어 주지도 않은 채 버려두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노예 생활을 한 그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나, 나리!”
말없이 버려진 주검을 지켜보던 알마리온이 성큼성큼 걸어가 버려진 채 방치되고 있는 주검을 손수 수습하려 하자 길 안내를 맡았던 제크가 당황하며 그를 만류하려 했다.
“어이! 누가 네 멋대로 손대라고 했어?”
조금 전까지도 보이지 않던 열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마치 족제비처럼 생긴 인상을 지닌 소년이 건들거리며 나타나서는 아이의 시체를 수습하려는 알마리온에게 시비를 걸었다.
“놈! 감히 이분이 누구인 줄 알고!”
테일러 상단에 속한 제크였기에 알마리온의 신분을 모를 수가 없었다. 하나 그의 이러한 말은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안 좋게 만들었다.
“웃기고 있네. 어이, 돼지. 그런 말을 한다고 내가 겁먹을 것 같아? 응? 호! 지금 보니 꽤나 반반하게 생겼는데?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그 정도 얼굴이라면 꽤 비싸게 팔릴 것 같은걸.”
“이, 이놈! 감히!”
“이봐, 돼지 새끼야. 네놈의 그 푸짐하고 야들야들한 몸뚱이로 저기 저 개 새끼들 배를 채워 주기 전에 가만있어라.”
“으으…….”
번들거리는 눈빛과 한껏 비틀린 비웃음을 지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협박하는, 거기에 어느새 꺼내 들었는지 한눈에 보아도 섬뜩함이 느껴지는 날이 퍼렇게 선 단검을 꺼내 장난질 치고 있는 소년의 말에 제크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크크!”
그 모습에 잔뜩 비틀린 웃음을 지어 보이던 소년은 이내 다시금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어린아이의 시체를 가만 놓아두라고 하였건만 알마리온은 그 말을 들은 체도 안 하고 싸늘하게 죽은 아이의 시신을 상대로 망자의 안식을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새끼가 참 말 안 듣네. 꼴에 검을 차고 있다고 지가 뭐 대단한 놈이라도 되는지 아나 보네. 크크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간혹 이곳 빈민촌에 겁도 없이 들어오는 자들 중에는 검을 찬 기사들이나 죄인을 잡기 위해 병사들이 들어오는 일이 있었지만, 이들 중 대부분은 두 번 다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 채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발견되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일이 종종 있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빈민촌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현재 왕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근위군의 병력만으로는 대략 추정하기로 5만에 달하는 이들 빈민촌에 살아가는 빈민들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곳을 정리하기 위해 근위군 병력을 총동원한 일이 있었지만 무려 15일 동안이나 치열한 공방을 벌인 끝에 끝내 더 이상 병사들의 희생을 감당하지 못한 근위군이 물러난 일까지 있었을 정도다.
가뜩이나 아직은 전쟁 중에 있었고 소렌토를 옛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값싼 노동력이 필요하단 이유로 이후 이 지역에 대해서는 아예 모두가 손을 놓아 버렸고, 그 결과 이곳은 완전히 또 다른 왕국처럼 치외법권 지역이 되어 버린 상태였다.
“어이, 잘생긴 형! 얼굴 믿고 까부나 본데, 그러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가 버리는 수가 있다고. 알았어? 하니까 좋은 말 할 때 내버려 두라고!”
유난히 아이의 시신에 손을 대는 것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그 아이가 바로 이 소년이 우두머리로 있는 조직의 아이였고, 구걸해 온 음식을 몰래 먹다 걸린 것에 대한 처벌을 한 때문이었다.
“에이, 씨팔! 이 새끼가 정말 사람 성질 돋우네! 좋아! 일단 좀 맛을 봐 달라 이거지! 야! 준비해!”
검을 찬 외부인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 이들은 만약을 대비하여 석궁 등을 준비한 채 몸을 숨기고 있던 중에 자신들의 두목이 명령을 하자 몸을 드러내 알마리온과 제크를 포위했다.
“헉! 나, 나리…….”
제크의 덩치 큰 몸이 부들부들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단에서 입수하는 정보를 책임지고 있는 그였다. 이번 일도 굳이 그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지만 알마리온이 직접 명령한 일이고 또 그가 직접 이곳을 찾아간다고 해서 싫은 것을 억지로 따라오게 된 것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이런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그토록 용병들이라도 데려가자고 한 것이거늘…….’
제크는 물론 이곳 빈민촌을 직접 가겠다는 말에 그렇다면 상단의 용병이나 저택을 지키는 병사들이라도 대동하라고 모두가 권유했지만 알마리온은 그런 충고를 결국 뿌리치고 홀로 이곳에 들어왔고, 아니나 다를까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지자 제크는 끝까지 고집을 부린 알마리온을 내심 원망하였다.
‘자기가 전쟁 영웅이면 다야? 익스퍼트? 개뿔! 익스퍼트인 지야 살아 나가겠지만 난? 난 어쩌라고! 젠장!’
알마리온에 대한 원망이 절로 나오는 제크였다.
“왜 이 아이의 주검에 그렇게 신경 쓰는 거지?”
“뭐?”
“왜 이 아이의 시신에 손을 대는 것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냐 물었다.”
“아! 이 새끼가 정말 사람 열 받게 만드네. 그러든 말든! 네가 뭔데 지랄인데? 네가 이 새끼를 싸질러 놓은 아비라도 돼? 오호! 그런 거야? 그렇다면 잘됐네. 저 애새끼가 말이야, 내게 진 빚이 제법 되거든. 그러니 그걸 네가 대신 갚아 줘야겠어. 그럼 저 애새끼 시체를 넘겨주도록 하지. 크크크. 어때?”
“얼마면 되지?”
“호! 좋아! 아주 좋아! 크크크. 이왕 찾아올 것 하루만 먼저 오지 그랬어. 그랬다면 살아 있는 네 아들놈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크크크크. 한데 저 새끼에게 이렇게 잘난 아비가 있었다니 몰랐어. 야! 저 애새끼 엄마가 창녀라고 하지 않았냐?”
“차, 창녀 맞습니다, 두목. 지난달에 말코이 형님이 운영하시는 창녀촌에서 죽은 창녀의 아들입니다. 그년이 진 빚 대신 말코이 영역에서 우리에게 넘긴 놈입니다.”
“그래. 그랬지? 후훗! 이 새끼도 엄청나게 밝히는 놈인가 보네. 보아하니 나보다 겨우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새끼가 어린 나이 때부터 싸지르고 다녔네. 크크크. 그런 쌍판대기라면 몸 파는 년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계집들의 치마를 벗길 수 있을 텐데. 참 취미도 독특한가 봐? 크크크.”
“하하하!”
소년의 말에 알마리온과 제크를 포위하고 있는 다른 아이들 또한 크게 따라 웃었다.
“그게 중요한가?”
“음? 크크크! 하긴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얼마를 내면 이 아이를 데려갈 수 있지?”
“뭐? 아! 그렇지. 그 새끼가 진 빚을 갚기로 했지. 한데 저 새끼와 그 어미란 년이 진 빚이 좀 많아서 말이야. 괜찮겠지? 그래도 네놈 씨를 받아서 저렇게 아들까지 낳아 준 년의 빚이니 말이야. 안 그래?”
“그러지.”
“하하하! 좋았어! 역시 사내라면 그 정도 책임감은 있어야지. 안 그러냐, 애들아?”
“하하. 맞습니다, 형님.”
“씨팔! 나도 저런 아비 있었음 지금쯤 팔자 편하게 살고 있을 텐데 말이야.”
“지랄을 떤다. 너 같은 놈이 무슨 재수로? 나라면 또 모를까. 키킥킥!”
“염병! 지랄하네.”
소년들과 아이들이 하는 양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알마리온의 표정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이미 이 아이들은 인성을 대부분 잃어 가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동안 전쟁 중에 있었고 이들을 통제할 여력이 왕국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처럼 무방비 상태로 아이들을, 백성들을 방치함으로써 이처럼 인성까지 잃게 만든 것을 보며 알마리온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었다.
“금화 세 닢. 그것이 그 새끼와 그 어미 년이 우리에게 진 빚이야. 어때? 그 정도면 별것 아니지?”
금화 세 닢이라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평생을 뼈가 빠지게 일을 해도 절대 볼 수 없는 거금이었다.
그런 거금을 아무렇지도 않게 요구하는 것은 알마리온에게 그 돈을 받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없어? 없으면 다른 것으로 지불해도 되는데 말이야. 이를테면 네놈 몸뚱이로 말이야. 그것도 좋지 않겠어? 응? 네놈 정도면 돈 많은 귀부인들이 너도나도 사려고 할 것이야. 크크크.”
“맞습니다, 형님. 저 정도 얼굴이라면 꽤나 비싸게 팔릴 것입니다.”
“그렇지? 어떻게 할래? 빚을 갚을래, 아님 얌전히 팔려 갈래?”
“금화 세 닢이라고 했나? 건네주게.”
“나리, 저놈들은…….”
돈을 건네라는 알마리온의 말에 제크는 이 문제가 단지 돈을 건넨다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말하려 하였다.
정보를 담당하는 제크였기에 비록 이들을 직접 경험해 보진 않았어도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으니 건네주도록 하게.”
“나리…….”
마지막으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충고하려 하였지만 알마리온의 차분하다 못해 냉정하게 보이는 눈빛을 접하자 그에게 무엇인가 생각이 있음을 알고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돈을 꺼내 던졌다.
땡그랑! 땡! 땡그랑!
“이제 이 아이의 시신을 가져가도 되겠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금화를 보자 소년과 다른 아이들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
“그만 가도록 하지.”
“예? 예, 나리!”
자신들을 협박하던 소년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금화 3개를 멍청한 눈빛으로 바라보느라 뭐라 대답이 없자 알마리온은 아이의 시신을 안은 채 제크를 앞세워 빈민촌을 떠나려 하였다.
“잠깐! 누가 네놈들 맘대로 가도 좋다고 했지?”
“너희가 원하는 것을 이미 주었을 텐데?”
“내가 원하는 것? 이봐, 너희가 낸 것은 겨우 그 애새끼와 그 어미란 년이 진 빚일 뿐이야. 알겠어?”
“그럼 또 뭐가 남았다는 것이지?”
“뭐가 남았냐고? 당연히 네놈과 그 돼지 새끼의 몸값이 남았지.”
“욕심이 과하군.”
“그래서?”
“지금이라도 물러선다면 나 또한 그대로 물러나지. 하지만…….”
“크큭! 여기 또 지랄 떠는 놈이 하나 나타났네. 잘 들어 두라고, 이 새끼야. 네가 뭐 하던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너 같은 놈들 한두 번 본 것이 아니거든. 한데 그놈들 모두 어떻게 됐는지 아나? 응?”
“…….”
굳이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의감에 불타서, 아니면 누군가를 찾기 위해, 심지어는 실종된 여사제를 찾기 위해 또 다른 사제와 성기사까지 동원된 일이 있었지만 결국 그 누구도 이곳을 살아서 나가지 못하였다.
“전부 네놈이 안고 있는 그 애새끼처럼 죽어 나갔다고. 알겠어?”
흥분을 했는지 소년의 미간 사이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런 것이 생겨났는지조차도 모를 정도로 작고 흐릿한 흔적이 생겨났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이 아이, 누군가에 의해 의지가 제압당해 있는 상태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영혼을 제압하는 주술에 당하면 살아 있는 인형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의지 또한 상실하여 단지 살아만 있을 뿐 감정이나 이성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인형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
하나 의지를 제압당하게 되면 모든 것이 평상시와 똑같지만 의지를 제압한 자에게만큼은 그것이 어떤 명령이라 하더라도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게 되어 실상 살아 있는 인형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바로 의식을 제압당한 자들이었다.
‘대체 어떤 자가 이런 금지된 의식을 행하였단 말인가?’
의지를 제압하는 의식, 아니 정확히는 마법은 흑마법사들 중에서도 이단자들만이 행하는 극악한 마법으로 분류되어 이제는 세상에서 그 자취가 감추어진 것으로 알려진 마법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그자는 분명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이곳에 모습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찾아야 한다. 이 상태로 이들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훗날 큰 화가 닥칠 것이다. 하지만…….’
군을 동원하면 이곳에 숨어 있는 흑마법사의 정체를 찾고 그를 제거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저항을 하다 안 되겠다 싶으면 숨어들 가능성이 더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숨어들면 두 번 다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의지를 제압하는 극악한 마법을 사용한 흑마법사의 정체를 영원히 밝혀낼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나 혼자 한다. 자신들이 수적으로나 힘으로나 우세하다고 판단하면 분명 그자는 날 잡기 위해 직접 나서게 될 것. 그때 그자를 잡는다.’
이렇게 하여 알마리온만의 거대한 전쟁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