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폰 그나이제나우
“대족장님, 저들을 위해 의식을 행하면 안 될까요?”
당돌한여우가 가리키는 곳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나무와 잡초만이 우거진 곳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이 일대에서 죽은 인간들의 원혼들이 안식을 취하지 못한 채 지박령에 의해 꼼짝없이 잡혀 있는 모습들이 눈에 훤히 보이고 있었다.
지난 수년 동안 전 국토의 대부분이 전란에 휩싸이게 되면서 이들이 지나가는 곳곳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영혼들이 사후에도 안식을 취하지 못한 채 원혼이 되어 떠돌거나, 스스로 지박령이 되기도, 아니면 기존에 있던 지박령들에 의해 흡수당하는 등 좋지 않은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옛날부터 큰 전란이 있거나 돌림병이 있어 한꺼번에 많은 이들이 생목숨을 잃게 되면 원혼들을 보았다고 하는 이들이 유난히 자주 나타나거나 아니면 특정 지역에서 비명횡사하는 이들이 많이 나타나곤 하는데, 그 모든 것이 이처럼 억울한 죽음을 당한 존재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요충지인 타론 성을 되찾기 위해 벌어진 전투에서 죽은, 많은 주검들의 영혼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지박령에 의해 흡수당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원혼들을 흡수한 지박령은 강한 주술의 힘을 갖게 되고 이것이 어느 수준을 넘어가면 스스로 움직이면서 사람들을 해치게 되는 요괴가 된다.
이렇게 요괴로 성장하게 되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한곳에 머물 수도, 그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게 되는데, 어떤 경우이든 요괴라는 것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인간들에게는 커다란 재앙 바로 그 자체였다.
알마리온을 만나게 되면서 주술사로서, 그리고 정령술사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당돌한여우 또한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망자들의 영혼이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을 위한 의식을 행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다만 당돌한여우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면, 망자의 영혼을 흡수하고 있는 것이 지박령이 아닌 사념체이며, 요괴가 되기 위해 망자의 영혼을 흡수하는 것이 아닌, 영체를 갖기 위해 그러는 것임을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구나.”
이미 당돌한여우를 희생시켜 사념체가 영체를 갖기 전에 소멸시키기로 작정을 한 알마리온의 표정도, 그리고 목소리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알마리온의 모습을 보면서 당돌한여우는 단지 그가 망자의 영혼을 흡수하며 힘을 키우고 있는 사악한 지박령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며 반드시, 기필코 망자들의 영혼을 흡수하는 지박령을 퇴치하는 데 일조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대족장님, 저도 돕고 싶어요.”
자신도 돕겠다며 나서는 당돌한여우의 말에 잠시 눈빛이 흔들렸지만 그는 이내 다시금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당돌한여우의 청을 거절하였다.
아니, 거절하는 척을 하였다. 그렇게 할수록 당돌한여우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너도 해야겠지만 지금은 아니구나.”
“핏! 나도 죽은 자들을 위한 의식에 사용하는 주문 정도는 모두 기억한단 말이에요.”
마치 물을 빨아들이는 솜처럼 당돌한여우는 알마리온이 가르쳐 주는 모든 것을 이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그녀를 가르치는 알마리온이 매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나 안다고 해서 모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엄청난 속도로 알마리온이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지만 당돌한여우가 주술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이제 불과 한 달이란 시간밖에는 흐르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수만 명이나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로 가득하여 지역 일대의 생기마저 숨을 죽일 정도로 짓눌려 있는 이러한 곳의 원혼들을 달랜다고 섣부르게 의식을 행하였다가는 오히려 원혼들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원혼들에게 정신이 파괴되어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건 나 또한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이곳은 너무 많은 영혼들이 방황하고 있어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네 영혼이 파괴될 수도 있단다.”
“하지만 아무리 대족장님이라 하셔도 이 많은 영혼들을 모두 망자의 고향에 돌려보내시진 못해요. 안 그런가요?”
당돌한여우의 말처럼 아무리 중급 주술사인 그라 하여도 수만이나 되는 영혼들을 망자의 고향에 돌려보내는 의식을 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술의 힘이라는 것도 결국 한계가 있는 힘이고, 지금의 알마리온이라면 희생의 의식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이 많은 영혼들을 망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한 일은 최상급 주술사가 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저도 돕게 해 주세요.”
그 이름처럼 당돌한 눈빛으로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당돌한여우의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알마리온은 그녀 몰래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일단 의식을 준비하는 일을 도와주렴.”
“하면 저도 의식을 할 수 있는 것인가요?”
“왜 그렇게 조급하게 행동하는 것이지?”
“안식을 취하지 못한 채 지박령에게 흡수당하는 저들 영혼들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그리고 저도 이젠 주술사란 말이에요. 주술사는 늘 약하고 힘들어하는 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대족장님이 내게 말하시지 않았나요?”
천부적인 주술사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인 당돌한여우에게 주술을 가르치면서 알마리온은 그녀가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는 한편, 그녀에게 주술사로서, 아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자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심성까지 함께 가르치고 있었다.
신이 어떤 이에게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그 힘으로 남을 짓밟고 억압하고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보호하고 이들이 편안하게 자신들의 삶을 영유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였던 것이 바로 알마리온 그 자신이었다.
“그래. 주술사라면 당연히 약하고 힘들어하는 자들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바를 하도록 허락해 주세요.”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다. 여전히 자신의 굳은 의지를 담고 있는 당돌한여우의 타는 듯 강렬한 눈빛과 이미 결심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그녀에 대한 미안함을 담고 있는 알마리온의 경직된 눈빛이었다.
결국 고개를 먼저 돌린 것은 알마리온이었고 그런 알마리온의 모습을 보면서 당돌한여우는 내심 환호성을 내질렀다.
“알겠다. 하지만 의식은 내가 먼저 행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힘들어지게 되면 그 이후에 네가 맡도록 하렴.”
“예!”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 알마리온은 당돌한여우의 도움을 받으며 망자의 영혼이나 사념체가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결계를 먼저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네가 운디네를 소환해 주겠니?”
“예!”
원혼이 된 영혼들을 정화시키고 그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물이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물이 필요했다. 이왕이면 성스러운 물, 그러니까 성수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성수를 구하기 위해서는 신전을 통해서 구하거나, 아니면 별도로 성령이 깃들인 곳에서 구해야 했다.
물론 선택받은 자의 신물 속에는 상당량의 성수가 보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알마리온은 이것을 다른 곳에 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급적이면 이를 아끼고 있었다.
그리고 의식을 행하는 데 필요한 성수 대신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물, 그러니까 물의 정령이 만들어 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물을 이용하여 의식을 치렀다.
“대족장님? 대족장님!”
“음?”
“뭘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어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알마리온은 과연 자신의 선택이 제대로 된 선택이었는지를 고민하느라 의식을 위한 준비가 끝날 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다.
“아! 미안하구나. 그럼 시작하자꾸나.”
“예.”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한 의식은 결국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죽은 자들의 영혼을 소혼召魂하여 이들의 억울함을 들어 준 후 이들의 마음을 풀어 주는 것 말고는 없었다.
수만이나 되는 영혼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시간도 시간이었지만 심력心力 또한 많이 소모되는, 주술사에게는 참으로 고된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영혼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그들의 맺혀 있는 마음을 풀어 주고 그들로 하여금 존재하지 말아야 할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안식을 취할 수 있게 망자의 고향으로 보내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열흘 동안 알마리온이 망자들의 영혼을 망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낸 수는 무려 3천. 하나 아직도 이곳에는 너무나 많은 영혼들이 남아 있었다.
“여우야.”
“예?”
지난 열흘 동안 전혀 음식을 취하지 않은 채 망자들의 영혼이 하소연하며 털어놓는 이야기들을 듣고 그들의 맺힌 부분을 풀어 주어 망자들의 고향으로 보내는 의식을 계속하여 온 알마리온은 체력적으로도 심신의 상태로도 이미 너무 많이 지쳐 있었다.
“이제부터 나를 대신하여 네가 의식을 행하도록 하렴.”
“예!”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너로서는 이 일이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말이다.”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도 잘할 수 있으니까 말이에요.”
겁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인지 당돌한여우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특히 경험이 전혀 없는 너로서는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했던 일이기에 큰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쳇! 알았다고요. 툭하면 잔소리나 하고, 칫!”
“이 녀석!”
“아! 알았다니까요. 조심할게요. 하지만 제가 위험해지면 대족장님께서 구해 주실 거잖아요?”
“그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언제라도 자신이 구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당돌한여우였다.
“그래.”
“헤헷! 그럼 이젠 시작해도 되겠죠?”
“…….”
자신을 믿어 의심치 않는 당돌한여우의 모습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마리온의 고개가 살짝 끄덕거렸다.
“예!”
힘차게 대답을 한 당돌한여우가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 그동안 알마리온이 의식을 진행하던 소혼진召魂陣 안에 걸어 들어가서는 의식을 시작하기 위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그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안녕? 난 당돌한여우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그리고 어디서 왔어?’
-…….
그녀가 가장 먼저 선택하여 소혼한 영혼은 알마리온이 남겨 놓은 영혼들 중 가장 약해 보이는 영혼이었다.
소혼에 성공을 하고 자신의 몸에 빙의된 영혼에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말을 걸어 보았지만 그 영혼은 자신에게 말을 거는 당돌한여우를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넌 이름이 없어?’
-…….
‘칫! 사내 녀석이 겁이 많구나?’
-…….
여전히 자신이 소혼한 영혼이 겁에 질린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당돌한여우는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잠시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더니 무엇을 결심하였는지 당돌한여우가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헤헷! 실은 말이야, 나도 이렇게 말해도 무척 겁이 많단다.’
-…….
‘특히 천둥과 번개가 치는 날이면 너무 무서워서 잠도 자지 못한 채, 천둥과 번개가 그만 칠 때까지 잠자리에서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어쓴 채 떨곤 했다.’
-…….
소혼한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풀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지만 상대는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이제 자신의 친구가 된 드리아데스나 운디네에게조차도 말하지 않은 자신의 모든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빠들이나 언니들 모두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지만 난 알고 있다. 엄마와 아빠가 내 진짜 엄마와 아빠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
지금껏 그저 무표정하게 당돌한여우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영혼에게서 처음으로 반응이 나타났다. 하지만 당돌한여우는 자신의 이야기에 빠진 나머지 그러한 영혼의 변화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아빠와 엄마라고 부르는 분들은 실상 내 진짜 아빠와 엄마를 죽인 원수라는 것을 난 알고 있어.’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 일곱 살 때의 일이었다. 그날도 큰 사고를 한번 치고는 큰오빠인 꿈꾸는달에게 한바탕 큰 꾸중을 들은 후였다.
워낙 큰일을 벌인 때문에 그를 보상하기 위해 꿈꾸는달은 1마리의 소와 10마리의 돼지, 그리고 50마리의 닭을 물어 줘야만 했다.
아무리 꿈꾸는달이 부족의 대전사이고 그 지위에 어울리는 부를 지닌 자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소와 돼지 그리고 닭을 배상한다는 것은 상당한 손해였다.
꿈꾸는달에게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혼이 난 당돌한여우는 그날 밤 꿈꾸는달의 아내, 그러니까 새언니가 하는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처음 알게 되었어. 내가 아빠와 엄마라고 여겼던 분들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너도 많이 힘들었겠구나?
‘어? 내 이야길 듣고 있었어?’
-응.
‘그랬구나. 한데 너 너무해.’
-……?
‘숙녀인 나의 이야기는 모두 들어 놓고 아직도 네 이름도 말해 주지 않았잖아?’
짐짓 삐친 듯 말하는 당돌한여우의 모습에 소년의 영혼은 얼굴을 붉히며 조그만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칼…….
‘뭐?’
-칼이야.
‘칼이었구나. 반가워.’
-응…….
이렇게 시작된 당돌한여우와 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소년의 영혼은 서먹한 가운데서도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의식이 행해지는 동안 당돌한여우에게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영혼의 이야기가 진행될 동안 영혼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은 당돌한여우는 연방 흐느끼듯 울어 댔다.
‘위험하다!’
의식을 행하는 자는 결코 영혼의 감정에 몰입해서는 안 되었다. 이는 매우 위험천만한 일로, 자칫 잘못하다가는 영혼의 감정에 빠져 두 영혼이 서로 뒤섞여 버리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접신, 즉 다른 영혼이나 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당돌한여우가 칼이란 이름을 지녔던 소년의 영혼에 지나치게 몰입하면서 자아를 잃어 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알마리온은 주문을 외워 당돌한여우에게 기운을 불어 넣어 주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자아를 잃어 가던 당돌한여우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다시금 이성을 차렸다.
“아…….”
-나 저 아저씨가 무서워.
‘무서워? 왜?’
-계속 저 아저씨를 지켜보고 있었어. 저 아저씨는 내가 아는 아저씨들과 형들을 어디론가 보내 버렸어.
‘보내 버려? 아! 그건 원래부터 그들이 가야 할 곳에 가게 한 것이야.’
-원래부터 가야 할 곳? 그곳이 어딘데?
‘망자의 고향이란 곳이야.’
-망자의 고향?
‘죽은 자들의 영혼이 가야 하는 곳. 그곳에서는 모두가 평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어.’
-휴식을 취한다고? 저기 계신 저분이 우리에게 약속한 그 휴식을?
‘저기 계신 분? 약속?’
-응. 저기 계신 분이 그랬어. 우리가 영원한 안식을 취하려면 반드시 한 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이야.
‘임무?’
-그래.
‘어떤 임무를 수행해야 안식을 취할 수 있다고 했지?’
임무를 수행해야만 안식을 취할 수 있다는 말에 당돌한여우의 눈빛도, 표정도, 목소리도 차갑게 굳어졌다.
-왜……?
갑자기 변한 당돌한여우의 말투와 표정에 칼은 몸을 움츠리며 그녀가 왜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흥! 그런 식으로 너와 다른 망자의 영혼을 속였단 말이지?’
-속여?
‘그래.’
-…….
‘망자의 영혼에게 주어진 임무라는 것은 없어. 있다면 단 하나, 신의 섭리에 따라 망자의 영혼들은 망자의 고향에 들어 안식을 취하다가 신의 섭리에 따라 환생하는 것이 유일한 임무라고.’
-하지만…….
‘그러니까 널 속였다는 거야. 나쁜! 억울하게 죽은 너나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속이다니!’
분개하는 당돌한여우의 모습에 칼은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가 분명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맞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망자의 고향이라는 곳에 가야 하는 것이야?
‘응. 그래야만 다시금 신의 선택을 받고 환생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했어.’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지?
‘그렇다니까.’
-하면 저분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안식이란 무엇이지?
‘그건…….’
당돌한여우는 말을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생각하더니 더 이상 지박령에게 속는 영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칼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소년의 영혼에게 솔직히 이야기해 주었다.
‘소멸이야.’
-소멸이라는 것이 무엇인데?
‘영원히 없어져 버리는 것이지. 네 영혼이 말이야.’
-그, 그럼…….
‘맞아. 일단 지박령에게 흡수된 영혼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되돌릴 수가 없어. 지박령이 소멸할 때 같이 소멸되는 수밖에는.’
-거, 거짓말! 거짓말이야! 저분은 그런 나쁜 분이 아니라고! 기꺼이 저분과 함께한 다른 아저씨들이나 형들이 얼마나 기뻐하였는데!
‘흥! 달리 속임수라는 것이 아니야. 그런 모습을 보여 주면서 또 다른 영혼을 꾀어내기 위한 것이지.’
-그렇다면 그 약속도 모두 거짓이란 거야?
‘또 다른 약속을 했단 말이야?’
-그래. 저분이 분명 그랬어. 자신에게 힘을 실어 준 영혼들에게 그 가족들을 돌봐 줄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거봐. 그렇게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잖아? 생각해 보라고. 그동안 저 지박령에게 흡수된 영혼이 어느 정도이고, 지금 남아 있는 영혼이 또 얼마인지를. 그 많은 영혼들의 가족들을 모두 돌봐 주겠다는 약속이 지켜질 수 있는 약속이라고 생각해?’
-…….
‘더욱이 영혼들 중에는 로엔 사람이 아닌, 포넬 사람들의 영혼도 있는데? 너도 포넬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는 알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바로 자신을 죽게 만든 장본인들을.
-그, 그럼 어,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자신이 완전히 속았다고 생각한 칼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런 말을 해서 정말 미안하지만 칼 너는 이미 망자야. 망자에게는 망자가 가야 할 길이 있는 법.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말고 네가 가야 할 길을 가야만 해.’
-하지만…….
병든 어머니와 나이 어린 두 동생들은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와 두 동생을 두고 자신만 안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칼이었다.
‘네 어머니와 두 동생을 생각하는 너의 갸륵한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네 가족들도 네 영혼이 안식을 취하지 못한 채 저런 지박령 따위에게 이용만 당하다 소멸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야.’
-흑흑! 어머니……. 제니, 로이. 흑흑흑! 엉! 엉! 엉!
가족들에 대한 염려와 지박령에 의해 속았다는 억울함에 감정이 북받쳤음인지 칼의 영혼이 슬피 울기 시작하자 당돌한여우는 그를 위한 마지막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나 당돌한여우, 여기 신이 만들어 주신 영혼의 안식처에 들지 못하고 방황하는 어린 영혼이 있어 길을 안내하오니, 이 어린 영혼을 따뜻하게 받아 주시어 더 이상 방황함이 없이 안식을 취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소년의 영혼이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한순간 완전히 그 모습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당돌한여우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하나 그 가운데서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지박령에 의해 안식을 취하지 못하는 영혼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성공했구나.’
주술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행한 주술이 망자의 영혼을 그들이 가야 할 곳인 망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지금의 그녀의 수준에서는 분명 버거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일을 끝냈음을 느낀 알마리온은 그녀의 성공을 축하하면서도 이처럼 뛰어난 자질을 지닌 그녀를 그녀 자신도 모르게 희생양으로 삼기로 결정한 것이 과연 올바른 판단이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차라리 이 아이에게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면?’
솔직히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하더라도 그가 아는 당돌한여우였다면 어쩌면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기꺼이 내놓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때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
또 하나의 영혼이 주술사에 의해서 안식을 취하기 위해 망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잔뜩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존재가 있었다.
강력한 주술의 기운을 처음 느꼈을 때에는 이미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에는 늦은 상태였다. 영리하게도 주술사는 주변 지역 일대에 결계를 만들어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보이지 않는 그물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후회하고 또 후회하였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지금 세상에 저 정도의 주술사가 존재하다니.’
솔직히 의외의 일이기도 하였다. 자신을 만들어 낸 창조주가 생존하던 시절만 하더라도 주술사는 매우 강력한 존재였다. 하나 세월이 흐르면서 마법사들과 신을 모시는 사제들이 주술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서 주술의 힘은 빠르게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주술사란 존재는 눈을 씻고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수준 높은 주술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주술사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마법사나 신전의 사제 들은 자신이란 존재를 아예 알아보지도 못하였다.
마법사나 신전의 사제 들이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란 존재가 악령이 아닌 사념체였기 때문이다.
영이나 정, 혼과는 달리 사념체는 사념思念에 의해 탄생된 존재로 존재감 자체가 없는 그러한 존재였기에 마법사나 사제들로서는 사념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었다.
‘훗! 내가 이렇게 방심을 하다니. 한데 그 방심이 오히려 내 존재 목적을 이루게 해 주다니. 이것 또한 신의 섭리란 말인가?’
사념체의 투명한 눈은 알마리온의 손목에 차여져 있는 정령의 고향에 고정된 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 신의 섭리인 것 같았다.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인 그가 자신에게 부여한 목표는 단 하나. 원수의 후예를 찾아 그를 제거함으로써 주군을 배신한 대가를 자신을 대신하여 확실하게 알려 주라는 것이었다.
하나 영체를 완성하고 창조주가 자신에게 부여한 존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여정을 떠나기 직전,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그 존재의 목적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는 최대의 위기의 순간에 처했다.
그러나 신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여 존재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소멸될 수도 있거나, 설사 소멸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 누군가 또 다른 주술사에 의해 결계가 깨지지 않는 한 지금 이 자리를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위기의 상황에 처하게 만들더니 그 결계를 만든 이가 바로 창조주가 부여했던 존재의 목적인 배신자의 후예였다니.
‘신께서는 아마도 나로 하여금 세상을 혼란케 하는 것을 바라시지 않은 것인지도. 그러하기에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주셨겠지. 어쨌든 창조주께서 내게 부여하신 존재의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하지만…….’
어차피 존재의 목적을 이루게 되면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사념체였다. 하니 이러한 상황이라 해서 아쉬울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
하나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원수의 후예가 자신을 소멸시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역시 배신자의 후예답게 이런 비열한 방법을 선택하다니…….’
과연 오랜 친구이자 주군을 배신하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차지하기 위해 비열한 수단까지 사용했던 자의 후예답게 원수의 후예가 자신을 소멸시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참으로 비열했다.
원수의 후예는 본인의 능력만으로는 자신을 상대할 수 없음을 깨닫고는 비열하게도 제자인 듯 보이는 어린 소녀 주술사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후! 하지만 그대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다. 그대가 희생양으로 삼은 그대의 제자 또한 어차피 내게는 제거해야 할 목표일 뿐이니 말이야. 후후후.’
딴에는 제자까지 희생시켜 가면서 자신을 소멸시키려 하였지만 어차피 그에게 있어서는 원수의 후예는 물론 그의 제자까지도 제거의 대상일 뿐, 동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니, 설사 동정의 대상이라 하여도 어차피 원수의 후예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는 수많은 영혼들을 희생시켜 가며 지금까지 성장을 해 온 상태. 거기에 한 명의 영혼을 더 추가한다 해서 달라질 것이 전혀 없었다.
‘차라리 그댄 제자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대가 직접 날 상대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차라리 제자의 목숨은 구할 수 있었을 가능성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어차피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는 일. 마지막 결전을 준비해야겠군.’
‘위험하다!’
“으으으…… 으악! 아아악!”
당돌한여우에게 닥친 위기를 감지한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몸은 마치 간질병 환자에게서나 볼 수 있는 발작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으윽! 컥! 컥!”
“이런!”
의식을 행하는 당돌한여우에게는 이미 여러 차례의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알마리온은 애타는 마음으로 그녀의 상태를 지켜보며 마음 졸이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위험한 가운데서도 강한 의지를 발휘해 위기의 순간을 잘 넘겨 왔기에 마음 졸이며 이를 지켜보았지만 이번에 닥친 위기는 이를 지켜만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역공을 취하다니……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인가?’
확실히 의외의 일격이었다. 그가 당돌한여우를 희생양으로 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된 이유는 상대해야 할 사념체에게서 광명정대한 성품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성품을 지녔다면 설사 그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그 함정에 빠져들 것이라고 판단하였지만 오히려 그러한 함정을 역으로 이용하여 자신으로 하여금 사념체가 만든 함정에 들어오라고 유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제 그런 것을 따질 때는 아니다. 이제는 결과가 어찌 나든 불필요한 희생은 필요치 않다.”
사념체가 자신의 의도를 이미 확실하게 꿰뚫고 있는 상황에서 당돌한여우를 이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희생일 뿐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나의 계획이 성공했다 해도, 아무것도 모른 채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널 생각하면 평생 마음의 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파 놓은 함정을 역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사념체의 의도에 따르기로 마음을 먹자 오히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사념체를 끌어들이기 위한 의식을 행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간질병 환자가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격렬한 발작을 일으키던 당돌한여우의 몸은 일순 힘이 풀리면서 빠르게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하나 그녀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든 사람처럼 의식을 차리진 못하고 있었다.
한편 자신의 의식 세계로 들어온 사념체의 모습을 처음으로 뚜렷하게 접할 수 있었던 알마리온은 냉소를 짓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처음 사념체를 느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갖게 하는 선이 굵은, 중후한 인상을 볼 수 있었다.
-후후!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다는 것인가?
‘…….’
명백한 비웃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알마리온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대의를 위한 일이었다 하더라도 정작 본인의 동의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당돌한여우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은 결코 옳은 결정이 아님을 이제는 분명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훗!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인가? 자신이 얼마나 비겁한 행동을 하였다는 것을?
자신의 비난에 한껏 후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알마리온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비난의 쓰디쓴 비난의 말을 하였지만 알마리온이 예상과는 다른, 후회가 역력한 반응을 보이자 조금은 맥이 빠지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하긴. 그동안 흐른 세월이 얼마이던가. 아무리 그 간악한자의 후예라 하더라도 이 정도의 세월이 지났으면 인성이 바뀔 수도 있겠지. 그것도 아니면 전승자일 수도 있는 일.’
-그자의 핏줄을 이은 것인가? 아니면 그자의 능력을 이은 전승자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너의 손목에 차여진 그것. 그것은 분명 그자가 주군의 힘을 봉인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
‘아! 이것은……. 한데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시는 것입니까?’
비록 사념체이긴 하지만 자신의 손목에 차여져 있는 정령의 고향을 알아보는 존재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알마리온은 크게 놀라며 물었다.
-후후.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을까!
‘무엇입니까? 이것을 만든 자가 누구입니까? 또 어떻게 이 정령의 고향이라는 물건 안에 최상급 정령들이 모두 봉인되어 있는 것입니까?’
정작 자신에게 이것을 건네준 로엔달 백작 또한 이것의 연원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단지 이것의 이름이 정령의 고향이라는 것만 그에게 알려 주었을 뿐이었다.
정령의 고향이라는 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지, 어떻게 그 안에 물, 불, 바람, 대지의 최상급 정령들 모두가 봉인되어 있는 것인지, 어떤 경위를 통해서 그것이 자신에게까지 전해 오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하여 그는 막연하게나마 그것이 이야기꾼들이 만들어 낸 터무니없는 존재인 드래곤이 만들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비록 사념체라고는 해도 분명 이 세상에 살았던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념체가 분명하게 자신의 손목에 차여져 있는 정령의 고향에 대한 존재를 확실히 알고 있는 듯 말하자 그것이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알고 싶어졌던 것이다.
-어리석은. 그런 식으로 발뺌을 하려는 것인가?
‘발뺌을 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흥! 그거야 네가 날 사냥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를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그건…….’
당돌한여우를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을 소멸시키려 한 알마리온의 행동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후후후. 어쨌든 내겐 차라리 잘된 일이군. 그동안 망자의 영혼을 흡수하며 힘을 키우는 것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중이었는데 말이야.
그동안은 영체를 만들기 위해 망자의 영혼을 흡수하며 힘을 키워 왔었다. 언제 자신의 존재 목적인 복수의 후예들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고, 이 세상에 목표의 후예들이 얼마나 퍼져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에 목적을 이룰 때까지 존재할 수 있는 영체를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하나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존재 목표인 그의 후예가 이렇게 눈앞에 제 발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대는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까?’
-훗! 날 만드신 창조주가 누구인지 모르겠는가? 그자의 후예들에게는 이미 나를 만드신 창조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름이란 뜻인가?
‘그자의 후예라니 누굴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분명 손목에 차여져 있는 정령의 고향이라는 물건과 연관된 일이라는 것을 알겠지만 정작 알마리온은 그 물건이 누구에 의해서,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네 손목에 차여진 요망한 물건을 만든 자. 오랜 친구이자 또한 주군이었던, 또한 나를 만드신 창조주의 주군이시자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셨던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를 배신한 배신자이자 배덕자인 가론 로드에릭이란 더러운 이름을, 그 배신자이자 배덕자의 후예인 네가 모른단 말이더냐!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 가론 로드에릭? 혹 가론 폰 로드에릭 대제? 이 땅에 마도 시대를 열었다던 바로 그?’
어린 시절 주인이었던 지크가 음유시인의 이야기에서 들은 대정령술사인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와 마법 시대를 열었던 주인공인 가론 폰 로드에릭 대제의 이름이 거론되자 알마리온은 또 다른 한 이름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혹 이 사념체를 만든 이가?’
그가 떠올린 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검을 든 모든 자들의 우상이자 목표이며, 신격화된 인물, 그러면서도 역사에는 단 한 번도 그 이름이 거론되지 않아 그가 실존 인물인지조차도 확인되지 않아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인물이라는 비판을 받는, 인간 최초이자 최후의 검의 지배자인 소드 마스터 하인리히 그나이제나우란 이름이 떠올랐다.
‘하인리히 그나이제나우? 그대를 만든 이가 혹시?’
-그렇다. 하인리히 폰 그나이제나우 대공. 반역자이자 배신자이며 배덕자인 가론 로드에릭. 그자를 제거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였으나 결국 이곳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셨던 바로 그분! 그분께서 바로 날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역시…….’
-후후. 그 표정을 보니 이제 날 만드신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날 창조하게 된 것인지 알게 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이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참으로 우연치고는 대단한 우연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저 장난삼아 지크 도련님께서 지어 주신 내 이름이 알마리온이라는 것도, 가론 폰 로드에릭 대제가 친구이자 주군인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를 배신하고 그의 힘을 봉인하기 위해 만든 봉인체인 정령의 고향이 내게까지 전해진 것도, 그리고 또 한 명의 초인이었던 하인리히 폰 그나이제나우 대공이 만든 사념이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이렇게 나타나 있는 것도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대단한 우연, 아니 이 정도면 필연이라고 해야겠지?’
그의 상념처럼 우연도 이 정도면 필연이라 해야 좋은 일이었다.
‘그 세 사람과 관계된 모든 것이 오랜 시간을 격하고 이렇게 모두 나에게 이어졌다는 것은 아마도 그 세 사람과 얽혀 있던 구원舊怨을 풀라는 의미이겠지?’
-후후. 자! 그럼 이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만 했던 목적을 이룰 시간이 된 것 같군.
어느 순간 하인리히 폰 그나이제나우가 만든 사념체의 손에는 청명한 푸른빛을 발하는 검이 쥐여 있었다.
‘소드 마스터가 만든 사념체와의 일전이라?’
검을 쥐고 있지 않았을 때에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존재감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움츠려 들었다. 한데 막상 검을 손에 쥐게 되자 이제는 그 날카로운 예기銳氣만으로도 온몸이 난자당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 알마리온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버렸다.
‘이런!’
사념체는 그것을 만든 이의 모든 능력을 그대로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인간 최초의 소드 마스터였던 하인리히 폰 그나이제나우 대공이 만든 사념체 또한 그와 동일한 능력인 소드 마스터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옛 기록에 따르면 소드 마스터의 능력은 6서클 마스터인 마법사와 동일하다고 되어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상급 정령술사와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결국 지금의 알마리온으로서는 눈앞의 사념체를 보통의 방법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상대는커녕 나의 계획 자체가 수포로 돌아갈 수도…….’
어차피 처음부터 영체를 갖기 전의 사념체를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당돌한여우를 희생물로 삼을 독한 마음까지 먹었던 것이다.
사념체에 의해 자신이 만든 함정이 오히려 역으로 자신을 끌어들이는 함정이 되어 버렸을 때, 알마리온은 주술사 최후의 술인 희생의 주문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사념체를 소멸시키는 일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하여 그는 또 한 가지의 함정을 준비했었다.
‘그래. 설사 내가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가 만든 사념체라면 이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 같은 것은 벌이지 않을 것이다.’
역사에는 그 존재조차 완벽하게 지워졌지만 배신자이자 배덕자인 가론 폰 로드에릭 대제에게 끝까지 항거하던 하인리히 폰 그나이제나우 대공은 바로 기사도騎士道를 처음으로 만든 이였다.
그의 이러한 기사도는 정작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굴복하지 않았던 적인 가론 폰 로드에릭 대제에 의해 휘하의 기사들의 충성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 사용되었기에 역사에는 정작 기사도를 만든 장본인이 아닌 가론 폰 로드에릭 대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하나 이미 이들 세 사람에 관계된 이야기를 정령의 고향에 봉인되어 있는 네 최상급 정령들로부터 전해 들었기에 알마리온만큼은 그러한 기사도의 창시자인 하인리히 폰 그나이제나우 대공이 만든 사념체라면 설사 자신의 영혼을 흡수하여 영체를 완성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육체에 깃들여 육체의 주인이 되어 결계를 풀고 세상 밖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결코 세상을 큰 혼란에 빠뜨리지는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다.
‘한데 이상하구나. 그분들이라면 나의 눈과 귀, 그리고 감각을 통해서 이미 이 사념체에 대해 알고 계셨을 텐데?’
자신은 몰랐다 하더라도 최소한 정령의 고향 안에 봉인되어 있는 네 최상급 정령들은 분명 이 사념체의 정체를 사전에 알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을 격동시켜 이 일에 끼어들게 만든 것에 대해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가? 하긴…… 이분들이 아무리 정령들이라 하더라도 2천 년이나 되는 오랜 시간을 봉인체 안에 봉인되어 있었다면…….’
생각해 보니 그 네 최상급 정령들이 무엇을 바라고 그러한 행동을 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를 알게 되자 알마리온은 분노보다는 그들에 대한 연민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어쨌든 나는 행운아일 수도 있다. 비록 그분이 아닌 그분에 의해 만들어진 사념체이고, 현실이 아닌 나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결투이지만 인간 최초이자 최후인, 검의 지배자인 소드 마스터와 결투를 나누는 기회를 갖게 되었음이니 말이다.’
비록 검의 길이 아닌 또 다른 길을 걷고 있긴 하였지만 그 또한 이제는 강함을 추구하는,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걷고 있기에 이러한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에 이제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기꺼이 이를 반겨 했다.
‘나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인간 최초이자 최후의 검의 지배자였던 하인리히 폰 그나이제나우 대공의 사념체인 그대와의 결투를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