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도로 가는 길 (31/70)

왕도로 가는 길

영지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며 몬스터 토벌 작전을 개시하는 것까지 살펴본 후, 얄란족의 대족장인 하얀이리와의 약속대로 얄란족의 근거지가 된 곳을 방문한 이후, 알마리온과 당돌한여우는 영지 내에서 발견된 광산 문제로 인해 궁내부 장관인 함멜 자작과 이 문제에 대해 협상을 하기 위해 왕도인 소렌토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제 곧 타론 성이겠군.’

타론 성은 알마리온에게도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그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높은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게 된 곳이 바로 이곳 타론 성 수복 작전에서부터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저 타론 성에서…….”

타론 성에 도착하면 아무래도 날이 저물 시간쯤 될 것 같아 오늘은 타론 성에서 머물고 가자는 말을 하려 하였지만 운디네와 드리아데스와 노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당돌한여우의 모습을 본 그는 말을 멈추고 그 노는 모습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와! 운디네! 드리아데스! 이것 봐, 이것! 정말 예쁘지 않니?”

알마리온이 나무의 요정인 드리아데스를 그녀에게 건네주고 물의 하급 정령인 운디네와 계약을 맺게 해 준 이후 그녀는 늘 틈만 나면 요정과 정령을 소환하여 함께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야 지금처럼 행동을 했다가는 저 혼자 좋아하고 떠드는 모습처럼 보여 미쳤단 소리나 듣겠지만 주술사이자 정령술사인 알마리온은 그녀가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잘 알기에 오히려 그녀가 이처럼 정령과 요정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것을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한데 당돌한여우와 운디네 그리고 드리아데스의 노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면 아무래도 이상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정령 또한 소환자의 성격을 따라가는가 보구나.’

자신이 정령들과 통하게 되었을 때나 그 이후 정령들을 소환하였을 때 보인 정령들의 모습과 지금 호들갑을 떨며 좋아하는 운디네의 모습을 보면, 분명 소환자의 성격에 따라 정령의 성격 또한 변화가 생기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걸 이제 알았냐, 이 멍청아?

‘실레스틴 님?’

-원래 정령이란 존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기운이야. 굳이 비유하자면 겨울에 내린 눈처럼 깨끗한 존재인 것이지. 그래서 소환자의 성격이나 능력에 따라서 정령의 성격도, 그리고 능력도 달라지지.

‘능력까지도 말입니까? 하지만 정령은 처음부터 등급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저런 바보 같은 놈이 어떻게 중급인 아이들까지 소환하게 될 수 있었는지 불가사의하단 말이야.

이번에 나선 것은 셀레아나였다. 알마리온과 가장 친화력이 많은 바람의 최상급 정령인 실레스틴과, 뭔가 잔뜩 삐뚤어져 있는 것처럼 꼬인 성격인 셀레아나는 툭하면 알마리온을 비난하거나 놀리거나 헐뜯었다.

하나 따지고 본다면 이 두 최상급 정령이야말로 알마리온에게 가장 많은 것을 알려 주는 정령들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셀레아나 님…….’

-우는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 공부 좀 하라고 그렇게 말했잖아! 네 목에 걸려 있는 그건 그냥 장식품이거나 아니면 이것저것 온갖 잡다한 것을 넣고 다니는 창고인 줄 아는 거냐?

-그것뿐이면 말도 안 하게? 이 멍청한 놈이 입고 있는 조끼는 또 어떻고? 그 안에 쌓여서 썩어 가고 있는 책들만 다 읽어도 이렇게 멍청하진 않겠다.

-맞아. 저런 멍청한 놈이니 우리 같은 엄청난 존재를 곁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실력이 늘지 않는 것이지.

아무리 최상급 정령들을 곁에 두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력이 어느 한순간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셀레아나의 질책 아닌 질책을 받자 알마리온은 자신이 그동안 주술에 빠져 정령 마법을 수련하는 것에 소홀했다는 자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잘 들으라고. 하급이니 중급이니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너희 인간들이 만든 것일 뿐이야. 우리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존재들, 그러니까 이제는 너와 같은 인간들과 엘프들만이 우리 정령들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지만 어쨌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소환자와 정령은 영적으로 서로 교감을 하는 상대이기 때문에 성격은 물론 능력까지도 그대로 동화되어 가는 것이지. 네가 전에 사용하던 접신being possessed of a spirit이라는 것도 결국은 너와 네가 소환한 정령이 영적으로 교감을 이루는 존재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야.

실레스틴의 설명을 들으면서 알마리온은 또 한 번 정령 마법과 주술이 유사한 점이 많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 그런 것이군요. 한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뭐가 이상한데?

‘저와 같은 경우엔 하급 정령에서 중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는데 실레스틴 님의 설명대로라면 제가 소환한 정령들 또한 같은 정령이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후!

‘제가 뭐 잘못 알고 있는 거라도……?’

의문이 들어 한 질문에 실레스틴이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자 주눅이 든 알마리온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정말 다른 정령이라고 확신해?

‘예? 하면…….’

-조금 전에도 말했지! 정령은 소환자와 영적으로 교감을 하는 존재라고! 너 그 말뜻이 무엇인지 몰라? 엉?

-쯧쯧! 저 멍청한 놈에게 뭘 기대하겠다고…….

‘…….’

영적으로 교감을 한다는 것은 일단 누군가에게 소환을 당한 정령의 경우 소환자가 죽는 그 순간까지 함께한다는 것을 뜻했다.

만약, 정말이지 만약 운 좋게 자신을 처음 소환하였던 소환자와 완벽하게 동일한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두 번 다시 소환되는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우리 같은 위대한 존재들은 그러한 속박에서 벗어나 언제나 자유롭게 소환자를 선택할 수 있긴 하지!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말하는 실레스틴이었다.

-허허, 그럼 뭐하나? 이제 이 세상에는 우리와 같은 존재를 소환할 만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 없는 것을. 예전 같았다면 드래곤들이라도 있어 가능했겠지만 말이야.

지금껏 조용히 있던 노에아넨이 처음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와 똑같은 이름을 가졌던 그 인간을 끝으로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위대한 존재들을 불러낼 수 있는 존재도 없어졌지.

서글픔이 느껴지는 노에아넨의 푸념이었다.

영원한 존재인 이들 정령들에게 수천 년이라는 시간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수천 년을 갇혀 지내야 한다는 것. 그건 정령들인 이들에게도 견디기 힘든 그러한 긴 시간이었다.

이들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이후, 알마리온은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이 자신에게 바라고 있는 것을.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이들은 자신들을 속박에서 풀어 주길 원하고 있었다. 하나 장령의 고향 안에 봉인되어 있는 이들을 풀어 주기 위해서는 상급 주술사가 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물론 최상급 주술사였던 가론 폰 로드에릭 대제가 말년에 만든 이 정령의 고향이라는 봉인체를 해체시킬 수 있을지는 해 봐야 알겠지만…….’

그렇게 석양이 지평선 저 너머로 지며 타는 듯 붉은 장관이 연출되는 배경 속에서 운디네와 드리아데스와 함께 뛰어노는 당돌한여우의 모습을 한껏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알마리온의 표정이 어느 한순간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타론 성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또다시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런 이상한 기운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노예 병사로 이곳 전투에 동원된 이후, 지금까지 몇 차례 이곳을 지나면서 매번 비슷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그동안 내 신경을 자극하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의 정체가 바로 저 지박령에 의한 것이었단 말인가? 하지만 어떻게?’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영들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영들 중 대부분의 영들은 인간을 비롯하여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유익한 영은 거의 없었다.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유익한 영들은 상서로운 기운이 뭉쳐지면서 이러한 영성이 깃들인 존재인데, 대표적으로 요정과 같은 존재는 그러한 영성이 오랜 시간 동안 뭉쳐지면서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존재였고, 성물聖物과 같은 특별한 영성이 깃들인 물건들은 그러한 영성이 특별한 물체에 깃들여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 지박령이라는 것은 원혼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지박령이 만들어지려면 원혼이 있어야 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 필요했는데, 바로 그러한 원혼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특별한 환경이 먼저 만들어져야 했다.

‘문제는 이 지역 일대는 지박령이 만들어질 수 없는 환경. 그럼에도 지박령이 만들어지고 그 지박령이 나조차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것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이지?’

세상에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다 하여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한 때만큼 당혹스러운 때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지금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이곳 타론 성 일대의 지형은 그가 아는 한 지박령이 만들어질 수 있을 만한 조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선택받은 자의 신물에 깃들여 있는 선대 주술사들이 남겨 놓은 지식에도 이러한 경우는 없거늘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지?’

중급 주술사이지만 주술에 대한 지식만큼은 그 어떤 주술사도 감히 따라오지 못할 방대하고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 지, 그가 수습한 지식의 양은 선택받은 자의 신물 안에 깃들여 있는 선대 주술사들의 지식의 양 중 극히 일부분일 정도로 방대하고 다양했다.

그리고 미처 수습하지 못한 지식이었지만 관련된 지식을 찾고자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기에 지금처럼 지박령이 존재할 수 없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지박령이 존재하는 것도 모자라 그 지박령에 의해 망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안식을 취해야 할 영혼들이 붙잡힌 채 흡수당하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건 지박령이 아니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실레스틴 님?’

-못 들었어? 저건 지박령이 아니라고, 이 멍청아!

‘지박령이 아니라면 저것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사념체思念體라는 것이야.

‘사념체? 그렇다면 저것이 누군가의 사념의 결정체라는 것입니까?’

실레스틴의 말에 알마리온은 크게 놀랐다. 사념체라는 것은 어떤 생명체가 의식을 집중해서 무엇을 강렬히 염원하거나 상상할 경우, 그러한 염원이나 상상에 의해 스스로 활동하는 사념의 결정체를 뜻했다.

즉, 사념체는 영靈이나 정精, 그리고 혼魂이 아닌 생각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무에서 유가 창조된 것인 만큼 그 어떠한 영이나 정, 그리고 혼보다 더욱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존재였다.

-어쨌든 대단한데? 인간이 저런 정도의 사념을 만들어 내다니 말이야. 저런 정도의 사념체를 만들어 낼 정도였다면 살아 있을 당시의 능력 또한 상당했겠어.

‘으음…….’

실레스틴이 감탄할 정도로 대단한 사념을 만들어 낸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슨 이유로 저러한 가공할 만한 사념체를 만들게 되었는지 그 사연 또한 궁금해지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이 상태로 사념체가 계속하여 망자들의 영혼을 흡수하여 무형無形의 존재에서 유형有形의 존재인 영체靈體를 갖게 될 경우, 그로 인해 어떠한 일이 벌어지게 될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더욱 걱정스러웠다.

영이라는 것은 형체가 없는 존재이지만 그러한 영이 어떤 계기를 통해 유형의 형체를 갖게 되면 이를 영체라고 한다.

이러한 영체는 존재하면서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존재로 그 어떤 물리력으로도 이를 죽일 수 없었다. 있다면 단 하나 영적인 힘으로 이러한 영체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려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하려면 신전의 주교나 대신관들, 그리고 최상급 주술사나 7서클 이상 마법사, 최상급 정령술사가 아니면 아예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가능할까?’

지금 이 순간에도 망자의 혼을 흡수하며 힘을 키워 나가고 있는 사념체에게서 어떤 삿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념체라는 것 또한 결국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그러한 존재였기에 알마리온은 몰랐다면 모를까 그 정체를 확실히 알게 된 사념체가 영체를 갖기 전에 소멸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하나 솔직히 알마리온은 자신이 없었다. 아직 영체를 갖기 전이긴 해도 이미 자신을 뛰어넘는, 능력으로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그러한 강력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만약 실패하게 된다면 오히려 나의 영혼이 사념체에 의해 제압당하거나 소멸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알마리온이란 존재는 껍데기만 남긴 채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왜 그런 모험을 하려는 것이지? 어떤 경우든 네가 위험할 수 있는데도 말이야.

‘그건…….’

-솔직히 넌 그냥 모른 체하여도 아무런 관계 없잖아?

‘…….’

실레스틴의 말처럼 구태여 자신보다 강해 보이는 사념체를 상대할 이유가 알마리온에게는 없었다.

-멋을 부리고 싶은가 보지. 그도 아니면 영웅 놀이를 하고 싶든지. 뭐 뻔한 것을 묻고 그래?

이번에는 셀레아나의 퉁명스러운 사념이 알마리온의 뇌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나름 대단한 주술사인데 저런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거의 대화에 끼어드는 법이 없는 노에아넨까지도 알마리온의 결정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난 그저…….’

-사명감이라는 것이냐? 저 흙덩어리 녀석의 말처럼 네가 주술사이기에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사념체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는?

-아! 시끄럽게 뭐하러 그런 것을 자꾸 물어?

-어리석은 놈. 넌 지금 네 결정이 넌 용기 있는 결정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것은 용기가 아닌, 만용일 뿐이라고. 알겠니?

사념을 통해서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은 마치 입가에 한껏 비웃음을 띤 실레스틴의 차가운 눈빛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쩌면 이분들의 말씀이 맞을지도. 내가 무어라고, 무엇 때문에 나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저 사념체를 소멸시키겠다고 나서는 것이지? 그것도 나 자신이 오히려 제압당할 위험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실레스틴의 말처럼 만용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설사 필요성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그의 능력으로는 영체를 갖기 직전에 있는 사념체를 상대하려 한다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기보다는 만용에 가까운 행동이 분명했다.

-훗! 잘 생각했어. 그런 일은 너 같은 놈이 아니라도 다른 누군가가 할 것이니 말이야. 너는 그저 네가 가진 것이나 잘 챙기면 되는 일이라고.

잔뜩 비틀린 셀레아나의 한마디에 알마리온은 마치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내가 무슨…….’

가진 것이 전혀 없던 시절 날카로운 검과 같은 사람도, 가진 것이 많게 되면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겠다는 생각에 쉽고 편안한 선택을 하거나 이전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양보 같은 것도 양보하곤 한다.

또한, 가진 것이 없었을 때에는 남들이 모두 하나같이 무모한 도전이라고 해도, 어리석은 선택이라 하더라도 거리낌 없이 행하던 일들도, 가진 것이 많아지게 되다 보면 어느새 그 가진 것을 잃는 것이 아까워 남들이 모두 충분히 가능하다 말하는 일에도, 일말의 여지도 없이 실현 가능한 일에도 겁을 내어 물러서거나 포기하여 안주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러다 보면 예전의 그 날카로운 검은 어느새 무뎌지고 녹이 슬어 결국 아무런 쓸모도 없는 고철이 되어 버린다.

‘나 또한 어느새 가진 자의 나약함에 빠져 버리고 말았구나.’

내가 가진 것을 지킨다는 명분, 아니 명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비겁함과 나약함에 안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그는 자신의 비겁함을, 그리고 나약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진 바 모든 능력을 다해도 영체를 갖기 직전의 사념체를 상대할 수 있을지 전혀 장담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자 더럭 겁이 났던 알마리온이다.

‘그 누구도 내게 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내가 평소 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 비록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난 이 일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난 강해져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의 그였다면 그저 살아남기만 하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나 지금의 그는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반드시 강해져야만 하는 의무가 있었다.

‘지금 내가 가야 할 길은 군주의 길. 나약한 군주는 결국 내가 돌봐야 하는 모든 이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 뿐이다.’

탐욕스러운 군주는 백성들의 삶을 고단하게 만들지만, 나약한 군주는 백성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게 된다.

‘지금 저 사념체를 이대로 놓아두게 되면 조만간 영체를 갖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내가 지키고자 하였던 모든 것들 또한 지켜 낼 수 없게 된다.’

몇 차례의 대규모 전투로 인해 많은 억울한 주검들이 만들어졌고, 그러한 주검들에게서 나온 영혼들이 망자의 고향에 들지 못한 채 사념체에게 붙잡혀 흡수당하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지금 저 사념체는 일전의 그 흑주술을 이용하던 그자와는 달리 망자의 영혼을 이해시키고 설득함으로써 힘을 키워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로 하여금 주술의 힘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헤리 제리코와의 대결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알마리온은 다행스럽게도 그가 소멸시키기로 마음먹은 사념체가 망자들의 영혼을 강제로 끌어들여 힘을 키워 나가는 사악한 존재는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저 사념체를 만든 자가 어떤 자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사악한 염원으로 저러한 사념체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 만약 내가 저 사념체를 이긴다면 그 승리의 요인은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사념을 만든 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저러한 사념을 만든 이가 광명정대光明正大한 자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광명정대함이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사념체의 약점임을 파악한 알마리온은 그것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 방법밖에는 없는 것인가?’

사념체를 소멸시킬 방법을 궁리하던 알마리온의 표정에 다시 한 번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지금으로써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저 아이를 이용하는 방법. 하지만…….’

영체를 만들기 직전의 사념체를 상대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또 고심하던 알마리온은 지금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당돌한여우를 이용하는 것 말고는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으로써는 당돌한여우의 몸에 사념체가 들어오게 만들어 사념체가 다시금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봉인한 후 저 아이의 몸에 깃들인 사념체를 소멸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저 아이 또한…….’

영체를 가졌다면 모를까 사념체인 상태에서 살아 있는 생명체의 육신 안에 깃들이게 되면 그 육신을 소멸시킬 때 그 사념체까지 함께 소멸하게 된다.

‘아니, 그 이전에 저러한 사념체를 당돌한여우의 몸에 깃들이게 하는 것 자체가 십중팔구 저 아이를 위험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생각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념체는 그것을 만들어 낸 자의 지모와 성품을 그대로 갖게 된다.

만약 사념체가 사악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거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면, 알마리온은 자신이 역으로 제압당하거나 소멸될 수 있다 하더라도 결코 당돌한여우를 이용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괜한 헛짓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하나 사념체의 성품이 광명정대하기에 그는 당돌한여우를 희생시키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혀 능력이 되지 않는 당돌한여우가 망자들의 영혼을 망자의 고향으로 보내기 위한 의식을 행하게 되면 분명 큰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물론 처음에는 당돌한여우가 어떻게 되든 자신을 소멸시키려는 알마리온의 의도를 파악한 사념체는 꼼짝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 결국 당돌한여우가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의 역할을 하다 위기에 처하게 되면 사념체의 성품상 이를 두고 보지 않고 그녀를 돕기 위해 그녀의 몸에 깃들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가 알마리온이 기다리던 때로, 사념체가 당돌한여우의 몸에 깃들이게 되면 그녀의 몸을 하나의 봉인체로 사용하여 사념체를 봉인한 후 그녀와 함께 사념체까지 소멸시켜 버리겠다는 것이 알마리온의 생각이었다.

하나 그 사념체가 당돌한여우의 몸에 깃들이든 그러지 않든, 결국 당돌한여우는 희생당하게 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이 일로 분명 난 평생을 자책하며 살게 될 것이다.’

대의大義를 위한다든지 하는 따위의 변명을 하거나 자기 합리화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은 단지 구차한 행동일 뿐이었다.

‘하나 너 혼자만 가게 두진 않으마. 만약 네가 희생당하게 되면 나 또한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니 말이다.’

만약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다면 그는 자신이 가진 마지막 한 수, 바로 헤리 제리코라는 흑주술을 사용하던 자의 몸에 빙의되어 있던 수많은 원혼들로 인해 오염된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주술사 최후의 술법인 희생의 주술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음 생이 또 온다면 그때는 내가 널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기사가 되어 평생을 널 위해 봉사할 것을 약속하마.’

그에게서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물러서게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너무들 하셨어요.

실레스틴과 셀레아나 그리고 노에아넨이 알마리온을 압박하여 사념체를 상대하게 만든 것을 두고 엘레스트라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이들의 행동을 추궁하는 한마디를 하였다.

-흥! 뭐가 너무하다는 것이지? 처음부터 저 사념체를 상대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이 녀석이었다고.

-하지만 지금 알마리온 님의 능력으로는 그자가 만든 사념체를 상대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

정령의 고향에 봉인되어 있는 이들 네 최상급 정령들은 그의 눈을 통해 사물을 볼 수도 있었고, 그의 귀를 통해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으며, 그의 감각을 통해 그가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도, 그가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었으며, 그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감각까지도 이들은 느낄 수 있었다.

알마리온이 단지 감각으로만 느끼는 사념체였지만 이들은 그의 눈을 통해 분명하게 사념체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투영된 사념체는 망각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 네 정령들의 기억 속에 분명하게 남아 있는 한 사람의 영상을 하고 있었다.

-그게 뭐 어때서 그렇다는 것이지?

-실레스틴 님께서는 정녕 모르셔서 물으시는 것인가요?

-아니.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의문이 드는 것은 우리의 의도를 아는 그대 또한 왜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냐는 것이야.

-그건…….

-그건 너도 우리와 같은 생각이기 때문이 아니었나?

-…….

-이 녀석이 진정 저 여자아이를 희생시킬 수 있다고 넌 생각하나 보지? 천만에! 내가 단언할 수 있지만 이 녀석은 절대 저 아이를 희생시키지 못할 것이야. 결국 저 여자아이가 위험하게 되면 자신이 나서게 될 것이야. 그 정도는 너도 예상을 했을 것이야.

실레스틴의 말처럼 엘레스트라 또한 알마리온이 진심으로 당돌한여우를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사념체를 소멸시키려 하진 못할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결국 이 녀석은 자신이 스스로 희생하려 하겠지. 안 그래?

-…….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우리가 바라는 것임을 너도 이미 짐작했을 거야. 그래서 너도 지금까지 가만히 우리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기만 하였던 것 아닌가?

그랬다. 이들이 알마리온으로 하여금 사념체를 상대하게 만들었던 것은 알마리온이 직접 사념체를 상대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알마리온 본인은 단단한 각오를 하였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들 네 최상급 정령들은 알마리온이 결코 당돌한여우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일을 벌이지 못할 것임을 자신하고 있었다.

그가 전장에서 아무리 수천의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수였다고는 해도 말이다.

차라리 이곳이 전장이었고, 그가 장수였으며, 당돌한여우가 병사였다면 그는 적인 사념체를 공격하여 물리치기 위해 기꺼이 병사인 당돌한여우를 희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이곳은 전장도 아니었고, 지금의 알마리온은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수도 아니었으며, 그 무엇보다도 당돌한여우는 그가 지휘해야 할 병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결국 알마리온은 차마 당돌한여우를 희생시키지 못하고 설사 자신의 육체를 사념체에게 빼앗기거나 그도 아니면 사념체와 함께 자신 또한 소멸하는 길을 선택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저 사념체가 우리가 알고 있던 그자가 만든 사념체가 분명하다면 지금 이 녀석의 능력으로는 함께 소멸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겠지. 그는 바로 인간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드 마스터였던 자이니까 말이야.

단지 전설이 되어 전해져 올 뿐, 그 어떠한 역사의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은 한 인물이 있었다. 인간 최초이자 최후로 검의 지배자였던 자의 전설이.

-저 사념체가 소드 마스터였던 그의 능력까지 담고 있진 못하지만 그의 불굴의 의지로 만들어진 사념이라면 이 아이의 정신력으로는 절대 저 사념체를 이길 수 없을 것이야. 그렇게 되면…….

-이 아이의 영혼은 소멸되고 이 아이의 몸은 그의 사념체에 의해 지배당하겠지.

실레스틴의 말을 받은 것은 셀레아나였다. 이어서 노에아넨이 말을 이어받았다.

-육체를 갖게 된 그라면 얼마지 않아 예전의 능력을 모두 되찾게 되겠지.

그 누구도 가 보지 않은 길을 찾아간다는 것은 목적지에 도착할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로운, 길조차 없는 곳을 개척하면서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이든, 한번 갔던 길은 그 흔적이 남게 마련이고 그 흔적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직접 그 길을 개척하였던 자라면 더더욱 쉽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맞아. 게다가 이 아이의 몸은 그가 예전의 능력을 충분히 되찾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육체고 말이야. 우린 그의 사념체가 이 아이의 몸에 깃들인 후 예전의 능력을 되찾게 될 때까지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지.

돌고 돌던 말을 다시 실레스틴이 마무리 지었다.

이들이 바라는 것. 그것은 차라리 알마리온의 몸이 이들이 알고 있는 한 사람이 만든 사념체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지금으로써는 가장 빨리 자신들이 이 빌어먹을 정령의 고향이라는 봉인체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가론 폰 로드에릭 대제에 의해 정령의 고향이란 봉인체에 갇힌 이들은 이미 2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갇혀 지냈었다.

영원한 존재인 이들에게도 2천 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이 녀석 이전에 정령의 고향을 가지고 있던 그 녀석이 우리를 이 속박에서 풀어 줬다면 좋았었지만…….

상급 정령술사인 로엔달은 이들이 자신들을 속박하고 있는 봉인체인 정령의 고향을 파괴하고 이들로 하여금 정령계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줄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네 정령들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주군인 메르타니온 국왕에게 힘을 실어 줘야 하는 입장이었던, 그리고 본인 또한 정령술사로서 이제는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고 있는 최상급 정령술사였던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와 같은 최상급 정령들을 소환할 수 있는 정령술사가 되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령의 고향을 파괴하고 이들을 정령계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부탁을 단번에 거절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알마리온을 희생시켜 자신들이 원래 있어야 할 곳, 정령계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알마리온을 추궁하여 그가 사념체를 상대하도록 유도하였던 것이다.

-…….

다른 세 정령들의 바람, 아니 엘레스트라 그 자신 또한 이들과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맞아. 결국은 나 또한 이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조용히 있었던 것이었어. 하지만…….’

엘레스트라는 뒤늦게 이의를 제기하는 자신이 최상급 정령답지 못한, 비겁한 행동을 하였다며 자책하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 녀석에게 알려 주지 않는 것만 보아도 너도 우리와 똑같은 것을 바라고 있다는 증거겠지. 안 그래?

정곡을 찌르는 실레스틴의 마지막 말에 엘레스트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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