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그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모이란족을 비롯한 하오란, 검은매, 붉은이리족까지 지난밤에 있었던 알마리온의 힘을 본 후 그를 대족장으로 인정을 하기로 결정을 한 후 그를 대하는 것부터가 확연하게 바뀌었다.
바로 하루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이 알마리온을 대하는 모습은 불편한 손님을 대하는 것 같았으나, 이제는 대족장으로 인정을 하여서인지 그에게 최고의 예우를 다하고 있었다.
“이곳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경작해야 할 땅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대족장님.”
“그나마도 힘들게 개간을 하여 곡식을 가꾸어도 몬스터들의 습격이 잦아 수확할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있고, 또 부족민들이 자주 위험에 처하는 일도 많습니다. 이곳으로 이주한 이후 몬스터의 공격으로 인해 습격당하여 목숨을 잃거나 큰 부상을 당한 부족민들의 수가 상당합니다.”
대족장으로 인정받게 된 알마리온과 그를 인정한 6개 부족의 족장들과 대전사들은 마치 먹이를 물어 온 어미 새에게서 그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더 큰 소리를 짹짹거리며 머리를 들이미는 새끼 새들처럼 앞다투어 그동안 이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이들과 얄란족의 영역을 맞바꾸는 것이지만…….’
메코이족이나 얄란족을 관리하는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면 당장이라도 이들 두 부족의 영역을 교체하도록 조치를 하였겠지만 그것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었다.
일단 이곳을 거쳐 얄란족을 방문하여 그들의 속사정도 들어 보긴 하겠지만 그들 또한 이들 메코이족과 비슷한 불평을 할 것이 분명했다.
‘설사 내가 직접 왕도에 가서 이들 두 부족의 영역을 교체하면 어떻겠냐는 청을 한다고 해도 재상이 그러한 나의 요청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일단 어느 정도 이곳이 안정이 되면 직접 왕도를 찾아가 두 부족의 영역을 교체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요청을 해 보긴 하겠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다.
‘최선은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노력하여 이곳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겠지.’
그동안 쌓인 불만들을 마치 성토하듯 토해 내고 있는 소부족의 족장들과 대전사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면서 알마리온은 우선적으로 자신과 이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곳이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언제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을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는 부족민들을 생각한다면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남아 있는 족장들 중 가장 연장자인 모이란족의 족장인 차분한심장 또한 알마리온과 같은 생각이었다.
“문제는 무슨 수로 몬스터의 씨를 말리는가 하는 것이지.”
툭 내뱉은 리처드의 말처럼 몬스터로부터 부족이나 영지민들을 보호하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했다.
아니, 한 가지 있다면 꾸준히 몬스터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벌임으로써 몬스터들이 더 이상 인간들의 영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학습 효과를 갖게 만드는 것이었다.
몬스터에게 이러한 학습 효과를 갖게 만드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 말고는 아예 이 세상에서 몬스터의 씨를 말려 버리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흠! 흠! 하다못해 몬스터의 습격을 사전에 알 수만 있어도…….”
마법에도 침입자가 있을 때 사전에 이를 알게 해 주는 알람 마법이 존재하듯 주술에도 그와 비슷한 ‘결계의 술’이라는 주술이 존재하였다.
문제는 알람 마법의 경우에는 그것이 1서클의 마법이었지만 결계의 술이란 주술은 상당히 고차원적인 주술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그러한 주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들은 그것을 펼칠 능력이 되지 못해 몬스터들의 침입을 사전에 알 수 없었고, 그에 대한 대처 또한 제대로 하지 못해 피해를 입어 왔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하면 그러한 결계는 내가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아!”
“오!”
결계의 술을 이용하여 사전에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 주겠다는 말에 모두가 크게 반색을 하였다.
“그리고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각 부족에서 열 명의 전사들을 차출하여 주십시오.”
“전사들을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들과 영지의 병사들을 함께 훈련시켜 몬스터 토벌대를 조직할 것입니다.”
“몬스터 토벌대를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꿈꾸는달 님. 토벌대를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인근 지역의 몬스터들을 토벌할 계획입니다.”
“그렇게 해서 몬스터들로 하여금 이 지역에 들어서면 곧 죽는다는 학습 효과를 길러 주겠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형님.”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텐데? 그리고 적지 않은 피해도 있을 것이고 말이야.”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그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도 그렇지. 흠! 오랜만에 진탕 사냥을 해 보게 생겼네.”
영지의 군사부장인 리처드였다. 결국 토벌대를 조직하고, 훈련시키고, 몬스터를 토벌하는 일은 그가 맡아서 해야 할 일이었다.
“전사들을 차출하는 데 큰 불편은 없겠지요?”
“열 명 정도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전사들을 차출하여 주십시오.”
“한 가지 질문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대족장.”
“말씀하십시오, 차분한심장 님.”
어떤 질문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차분한심장은 자리에 남아 있는 모두가 궁금히 여기는 어제의 일에 대해 물어 왔다.
“대족장께서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절반이나 되는 부족을 버리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친 환경 속에서 살아온 모든 게르혼족들은 강자를 존중하고, 존경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들 사이에서는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보냈던 존중과 존경도 어떠한 이유에서든 자신보다 약해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더 이상 존중을 하지도, 존경을 하지도 않을 정도였다.
강자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약자는 철저하게 짓밟는 자들, 그들이 바로 게르혼족 사람들이었다.
푸른하늘의 출신 부족인 칸족의 경우를 제외하고 그를 정당한 계승자로 인정하고 대족장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한 하오란족과 말린족의 경우가 오히려 이들의 이러한 관습에 비춰 보았을 때 무척이나 특이한 결정을 내린 상황이었다.
“그들은 머지않아 다시금 부족의 품에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오면 그들을 공격할 준비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꿈꾸는달 님.”
“예? 하면 당장 대족장님을 거부한 그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애초부터 그들을 공격할 생각이 없었으니 그들이 먼저 나머지 부족들을 공격하는 일이 없다면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었다.
‘이들은 아직 그들이 왜 부족을 이탈하였는지 그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구나.’
흰꼬리 부족을 비롯하여 6개의 부족이 메코이족이라는 큰 틀을 벗어나기로 결정한 진정한 이유는 알마리온이 이민족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그러한 이유 또한 포함되어 있긴 하였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더 이상 메코이족의 관습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메코이족은 대족장이나 소족장 모두 관례에 따라 주술사들이 족장의 자리를 승계하여 왔다. 이는 매우 오래된 전통으로 근 수백 년 이래 이러한 전통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문제는 이렇게 신탁에 의해 정해진 계승자가 그동안에는 가장 강한 자였기에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들이 더 이상 부족 내에서 가장 강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이 된 이후부터 문제가 쌓이고 쌓여 오다가 결국 알마리온이라는 이민족이 대족장으로 선택된 것이 알려짐으로써 그동안 쌓여 왔던 문제가 밖으로 분출된 것이었다.
‘실상 어젯밤 그들 앞에서 내 힘을 보여 주었다면 그들이 이탈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 푸른하늘 님이 내게 부여한 사명은 부족 전체가 앞으로도 영원토록 단결하는 것. 그것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힘으로 제압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이민족 출신이긴 하지만 푸른하늘로부터 선택받아 의식을 통해 메코이족의 대족장이 되었고, 이들 모두로부터 대족장의 지위를 인정받을 정도로 알마리온은 충분히 강하였다.
따라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메코이족은 그를 대족장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충성과 함께 존경까지도 기꺼이 바칠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또한 나의 뒤를 이어 메코이족의 대족장이 될 자가 이들이 인정할 수 없는 자라면?’
이제는 이들 메코이 부족에서도 주술에 대한 믿음이 이전만큼 강하지 않았다. 이는 성전의 사제들이나 성기사들에 의해 이들 또한 교화를 당하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들의 지도자인 주술사들의 능력이 확실히 예전만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뒤를 이어 신탁에 의해 선택받은 자가 이들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강한 자가 아니라면 설사 그 후계자가 이들 메코이족 내부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어젯밤 결별을 선언한 부족들은 또다시 어제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푸른하늘 님의 바람처럼, 앞으로도 계속하여 이들 메코이족이 하나로 단결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떠난 자들이 아닌, 이들 남아 있는 자들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메코이족이라는 큰 틀을 벗어나기로 결정한 6개 부족은 그동안 관례가 되어 버린 족장의 선출 방식이 아닌, 게르혼족 본연의 관례대로 진정 강한 자만이 소족장의 지위를, 아울러 대족장의 지위를 이어 나가는 방식을 택하였던 것이다.
이에 반해 남아 있던 6개 부족 중 결정을 유보하고 있던 모이란, 검은매, 붉은이리 부족은 게르혼족 본연의 관습과 메코이족만의 관습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방황을 하였던 것이고, 알마리온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칸, 하오란, 말린 부족은 여전히 메코이족의 관례에 따라 그를 인정한 것이었다.
‘오히려 메코이족 전체의 미래를 위해서는 어젯밤 부족을 이탈한 그들의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이들 또한 인정하게 만들고, 아울러 그들이 다시금 부족의 틀 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들어야만 푸른하늘 님의 바람을 이루어 드릴 수 있게 된다.’
이미 방법까지 모두 생각해 둔 알마리온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천과 중간에 필연적으로 뒤따를 반발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무마시키는 것뿐이었다.
“적절한 때가 되었다 판단되면 그때 가서 전사들을 소집하도록 할 것이니 내가 말을 꺼내기 전까진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거론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예, 대족장님.”
당장이라도 부족을 이탈한 소부족들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한 때가 아니라는 말에 내심 불만이 생겼지만 무조건 복종하였다.
“그럼 일단 각 족장님들과 대전사님들께서는 나와 함께 결계를 설치하는 작업을 함께하도록 하세요.”
“예, 대족장님.”
알람 마법과는 달리 결계의 술이 더욱 어려운 단 하나의 이유는 결계의 축이 되는 지형지물에 지박령을 속박시켜야 하는 고도의 작업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본시 영靈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면 안 되는 존재. 어떠한 이유로 영이 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 해도 이는 순리를 거역한 부정한 존재였다.
이처럼 부정한 존재인 영들을 조종하는 것이니 당연히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속박당한 영들을 위해서 영을 달래는 의식을 정기적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영들이 심술을 부리거나 하여 오히려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이곳이 적당하겠군요.”
지박령이 머물기 적당해 보이는 바위를 찾아낸 알마리온은 바위에다 주술을 이용하여 영이 머물 수 있는 영적 공간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영적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 모두 끝나자 이번에는 미리 봉인하여 두었던 지박령 하나를 소환하여 바위 안에 만들어 놓은 영적 공간에 봉인한 후, 알마리온이 이러한 속박을 풀어 주기 전까지는 영원히 봉인돼 버린 영을 위로하는 의식을 펼쳤다.
이러한 작업은 모이란족이 살아가고 있는 영역을 삥 둘러 가며 계속되었고 열흘 정도 같은 작업을 반복한 후에야 모이란족을 위한 결계를 모두 설치할 수 있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결계를 활성화시키는 의식만 하면 작업이 끝나네요.”
“결계를 만드는 일도 장난이 아니게 힘든가 보다?”
작업을 시작한 열흘 전에 비하면 작업이 끝난 지금 알마리온의 모습은 꽤나 많은 힘을 소비하였는지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기에 하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처음 시도해 보는 일이라서 그런지 익숙하지 않아 더 많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형님.”
지난 열흘 동안 스물한 곳이나 되는 결계의 축을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많이 힘들기도 하였지만 그러한 노력에 대한 대가 또한 적지 않았기에 힘들기만 하진 않았다.
‘덕분에 영들을 이용한 다양한 결계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답니다.’
결계라는 것도 마법처럼 능력만 된다면 거의 무한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알마리온은 선택받은 자의 신물을 통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다양한 결계의 수법을 무려 1만 5천 가지나 알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사실상 그 어떤 마법사보다 더 뛰어난 술법을 부릴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다양한 결계의 술을 펼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영들이 사전에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주술사들이 세상을 떠도는 영들을 만나기만 하면 이를 잡아 봉인하는 이유도 이처럼 다양한 결계의 술을 펼치기 위해서 이러한 영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푸른하늘 님으로부터 받은 선택받은 자의 신물이 바로 그러한 영들을 잡아 봉인해 놓은 봉인물封印物이었다니.’
마치 껍질을 벗겨 내면 그 안에 또 다른 껍질이 나오는 양파처럼 선택받은 자의 신물은 하나의 비밀을 풀면 또 다른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뭐 하냐?”
“아! 아닙니다.”
소부족의 족장들이 결계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의식 준비를 모두 끝내고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딴생각을 하느라 이를 모르고 있는 알마리온을 툭 건드려 정신을 차리게 하였다.
“그럼 의식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소부족장들의 도움을 받으며 의식을 시작하자 결계의 축이 되는 곳에서 상서로운 빛이 은은히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의식이 정점을 향할수록 그 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아!”
“으음!”
“일단 결계는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족장님! 이제는 부족민들이 모두 안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계가 완성되었다는 말에 차분한심장이 연방 고개를 깊이 숙이며 결계를 만들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해 댔다.
그만큼 이들 모두가 그동안 몬스터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고, 늘 몬스터의 침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이것은 단지 몬스터가 침입했음을 미리 알려 주는 기능만을 가진 결계일 뿐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결계 중에는 이러한 외부의 침입을 사전에 경고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를 퇴치해 주는 기능까지 가진 결계의 설치 방법 또한 있었지만 알마리온은 단지 사전에 이를 알려 주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결계를 설치하였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대족장님. 몬스터의 침입을 이처럼 사전에 알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힘없는 부족민들을 피신시키고 또 전사들로 하여금 몬스터를 상대할 준비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하긴 이것만으로도 이들에게는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하지만 더 뛰어난 결계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설치해 주지 않은 그가 이들의 이러한 감사를 받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흠! 하면 이만 마을로 돌아가도록 하지요.”
“예, 대족장님.”
부족민들을 위한 결계가 마련되자 모두 크게 기뻐하며 마을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저것 말고도 더 좋은 것 있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처드의 모습에 알마리온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애매모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음흉한 놈.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는 놈이 속으로는 온갖 꿍꿍이를 다 부리고 있으니…….”
“형님도 참…….”
이후 결계가 제대로 작동되는지를 확인까지 한 알마리온은 열 명의 모이란족 출신 전사들과 남아 있던 5개 부족의 족장들과 대전사들 그리고 이들을 수행해 온 전사들과 함께 모이란족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말린 부족의 영역으로 향했다.
이렇게 모이란, 말린, 검은매, 하오란, 붉은이리 부족의 영역을 차례로 돌면서 결계를 모두 설치한 알마리온 일행이 전대 대족장이었던 푸른하늘의 출신 부족인 칸 부족의 영역에 도착한 이들은 부족민들의 열광적인 환대를 받았다.
이미 이전에 들렀던 부족의 사람들이 칸 부족에도 새로운 대족장의 능력이 어느 정도라는 것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부족의 일에 대한 결정권은 전적으로 꿈꾸는달 님에게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족을 대표하는 대표자는 엄연히 알마리온이었다. 하나 그는 칸 부족과 늘 함께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칸 부족 내부에 그의 결정이 필요한 큰일이 없는 이상 칸 부족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꿈꾸는달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한데 이러한 사정은 다른 5개 부족 또한 다르지 않았다. 일단 영지로 돌아가야 하는 알마리온은 모이란, 검은매, 붉은이리, 하오란, 말린족의 족장들을 대동하고 있었는데 그가 각 소부족의 족장들을 대동하고 있는 표면적인 이유는 이들에게 주술사의 능력을 배양시키기 위한 수련을 돕겠다고 한 때문이었다.
“하오면 별도의 족장은 선출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이민족인 알마리온이 대족장이 되면서 그동안 대대로 대족장을 배출한 칸 부족 또한 다른 소부족과 마찬가지로 일개 소부족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칸족 또한 칸족을 대표하는 족장이 필요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아시지 않습니까? 족장은 신탁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훗! 아무래도 신께서는 이들에게 단단히 심술을 부리실 생각인 것 같구나. 나와 같은 이방인을 대족장으로 만드시더니 부족을 둘로 나누게 만들고,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그동안 금기시한 부족의 여인을 나의 뒤를 이을 대족장감으로 지목을 하시다니 말이야. 게다가 그 여인은…….’
칸 부족에 도착한 날 밤. 잠을 자던 알마리온은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에서 그는 자신의 뒤를 이을 대족장이 될 자에 대한 신의 계시를 받았다.
한데 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가 모든 게르혼족이 천대하는 여인의 몸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참으로 난감하네.’
주술사로서의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하면서 알마리온은 자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자들에 대한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특별히 보고자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러한 미래가 보였다. 문제는 자신의 뒤를 이어 메코이족의 대족장으로 신탁 받은 여인이 자신과는 보통의 인연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쨌든 선택받은 여인이니 다음 대를 위해서도 지금부터 그녀를 곁에 두긴 하여야겠지만…….’
한창 혈기가 왕성할 나이인 알마리온이었지만 여인에 대해서는 담담하다 못해 아예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그를 보면서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많이 걱정하였는데 특히 그가 정식 귀족이 되고 영지를 갖게 된 이후, 그의 가신들이 된 한센 등은 그가 서둘러 혼례를 올려 가정을 꾸려야 한다며 그를 은근히 압박하고 있었다.
‘훗! 그러고 보니 나도 그렇고 형님도 그렇고 가신들도 그렇고, 혼인을 하여 가정을 꾸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네. 일단 총관인 한센부터 서둘러 혼처를 마련해 줘야 할 것 같다.’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던 알마리온이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나를 대신하여 대전사인 그대가 부족을 잘 이끌어 나가 주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대족장님.”
이유야 어찌 되었든 메코이족의 12소부족들 중 처음으로 칸족은 족장이 없는 부족이 되는 것이었기에 꿈꾸는달은 내심 불만이었지만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면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결계를 설치하는 작업을 시작할 것이니 필요한 준비를 하도록 하세요.”
“예, 대족장님.”
이미 몇 번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결계를 설치하기 위한 준비는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모두 마쳤고, 준비가 끝나자 알마리온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각 소부족의 족장들을 대동한 채 결계 설치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첫 번째 결계의 축을 만들기 위해 지박령이 머물 장소를 물색하고 영이 머물 공간을 만든 후 미리 봉인하여 두었던 영을 공간 안에 이동시켜 봉인하는 작업을 마쳤을 때였다. 갑자기 들려온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알마리온과 리처드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깜짝 놀라며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불쌍해요.”
까무잡잡한 피부에 흑요석같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을 확인한 꿈꾸는달이 크게 당황하며 소리쳤다. 이유는 그 소녀가 바로 자신의 막내 여동생인 당돌한여우였기 때문이다.
“아니? 네가 어떻게!”
“감히 신성한 작업에 부정이 타게 계집이 나서다니!”
어떠한 종류의 의식이든 의식을 행할 때에는 여인들의 접근을 철저히 막음은 물론, 심지어는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의 경우 일정 기간 동안 여인을 멀리하는 금욕을 하며 매일같이 목욕을 하여 심신을 깨끗이 할 정도로 여인을 천대하는 메코이족이었다.
결계를 설치하는 작업 그 자체는 의식이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일정 기간 동안 금욕을 지키는 생활을 한다거나 매일같이 목욕을 하여 심신을 깨끗이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정不淨한 존재인 여인이 낄 자리는 전혀 아니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저 부정한 계집을 잡아 꿇리지 않고!”
“예, 족장님!”
다급한 성격의 소유자인 붉은이리 부족의 족장인 조용한울음이 함께하고 있던 전사들에게 소녀를 붙잡으라며 소리치자 그를 따라온 붉은이리 부족의 전사들이 이내 소녀의 몸을 잡고서는 우악스럽게 땅에 무릎을 꿇렸다.
“악!”
워낙 우악스러운 전사들의 힘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진 소녀의 입에서는 고통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런…….”
미처 말리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꿈꾸는달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네 이년! 감히 천박한 계집년이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나서는 것이냐!”
“전 천박하지 않아요! 그리고 전 단지 결계라는 것을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했단 말이에요! 그게 뭐가 잘못이란 말이에요!”
“뭐라! 이런 당돌한 계집을 보았나!”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자신을 윽박지르는 조용한울음에게 또박또박 말대답을 하는 모습에 꿈꾸는달은 주먹을 불끈 쥐어야만 했다.
가뜩이나 있지 말아야 할 장소에 막내 여동생이 나타난 것만으로도 크게 혼이 날 일이었거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고 용서를 구해도 모자랄 판국에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또박또박 말대답이나 하고 있으니 이제는 자신이 아무리 부족의 대전사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여동생을 무조건 감싸 줄 수만은 없게 돼 버린 것이다.
“네년도 머리가 있다면 지금 이 작업이 너희 부족 전체의 안전을 위한 성스러운 일임을 잘 알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부정한 계집이 예가 어디라고 함부로 날뛰는 것이냐!”
“흥! 난 부정하지 않단 말이에요!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부정하다는 법이 어디 있어요! 할아버진 풍요와 다산의 신이신 하오마 님께서 여신이라는 것도 몰라요?”
당돌한여우의 말처럼 이들 메코이족은 만물의 창조주이자 신 중의 신인 태양신 미트라를 가장 신성시하였고, 그다음으로 신성시하는 신이 바로 다산과 풍요의 신인 하오마가 바로 여신이었다.
“이년이 감히!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저 발칙한 망발을 해 대는 저 계집의 목을 치지 않고!”
당돌한여우가 끝까지 대들며 감히 붉은이리 부족의 족장인 자신을 모욕하기까지 하자 완전히 이성을 잃고 발악하듯 소녀의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 족장님!”
“이런…….”
다른 일은 몰라도 상대를, 그것도 다른 소부족의 족장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있는 자를 모욕했다는 것만은 꿈꾸는달로서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네가 결국!”
어려서부터 유난히 호기심이 많고 또한 당돌한 행동을 많이 하여 늘 골치를 썩게 만든 아이가 바로 당돌한여우였다.
대대로 칸 부족 내에서 대전사를 여럿 배출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나마 당돌한여우가 친 사고를 적당한 배상을 하여 무마시킬 수 있었지만 내심 언젠가는 감당할 수 없는 사고를 쳐서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 불안, 불안해 왔었다.
‘지금 이 상황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면…….’
지금의 상황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알마리온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알마리온도 자신을 보고 있었기에 애원의 눈빛을 그에게 보냈다.
‘제발!’
마치 자신이 마음속으로 제발 동생을 살려 달라는 염원을 보내고 있음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알마리온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입을 열어 붉은이리 부족의 전사들의 행동을 멈추게 하였다.
“그만! 잠시 멈추시오!”
“대족장님! 저 계집은 비단 부정한 몸으로 신성한 작업을 방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붉은이리 부족의 족장인 저 조용한울음을 모욕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만큼은 아무리 대족장님이라 하더라도 결코 끼어들 수 없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조용한울음 님.”
누군가의 권위와 명예를 모욕한다는 것은 그를 죽이는 행동으로 간주되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처벌이나 대가는 모욕한 자의 목숨이었다.
“조용한울음 님께서도 조금 전 말씀하셨듯이 이 작업은 부족 전체의 안전을 위해 행하는 신성한 작업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일에 피를 본다는 것은 좋은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하여 저 소녀의 목숨의 대가로 조용한울음 님께 한 가지 제안을 할까 합니다.”
“제안이라 하시면?”
“붉은이리 부족의 영역에 축복의 의식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정녕 저 계집아이를 넘기면 저희 부족의 영역에 축복의 의식을 해 주신다는 것입니까?”
축복의 의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리처드를 제외한 모두가 알마리온의 말에 크게 놀랐다.
“축복의 의식이 뭔데 저렇게들 놀라는 거지?”
“굳이 신전의 경우를 따진다면 축복을 기원하는 기도제와 비슷한 의식입니다.”
“없는 것이 없군?”
“뭐, 주술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초월한 존재인 신에 의지하는 행위이니 어지간한 것은 형태와 이름만 다를 뿐 비슷한 것들이 많습니다.”
귀족들이나 상인이나 평민들의 경우, 아이가 태어나거나 해마다 농사가 시작될 때 혹은 새집을 마련하거나 혹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자신이 믿는 신전의 사제를 초청하여 그에 대한 축원을 부탁하는데 이를 축복을 기원하는 기도제, 또는 축원식祝願式이라고 한다.
이러한 축원식은 보다 원시적이고 오래된 종교 행위인 주술에서 기원된 것으로 차이가 존재한다면 주술에서는 정精과 영靈을 이용하지만 신전에서는 신의 권능을 이용한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축복의 의식에 사용되는 영과 정은 모두 인간에게 이로운 영과 정 들로 이러한 영이나 정을 구한다는 것부터가 무척이나 힘이 든 일이었다.
때문에 천여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해 온 메코이족에서도 이러한 의식이 행해진 것은 단 두 번만 있을 뿐이었다. 그 두 번 또한 부족 전체가 아닌 메코이족 내부에서 큰 공을 세운 개인에게 행하였을 뿐 이처럼 소부족 전체에 축복의 의식을 해 준 경우는 전무하였다.
“하긴 그도 그렇겠네.”
나약한 인간들이니 무엇인가 믿고 의지할 대상을 찾기 마련이었고, 그러한 대상은 인간들에게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로 다가오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런 완벽한 존재, 초월적인 존재인 신에게 축복을 기원하는 것은 마치 아이가 부모에게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해 달라고 조르고 떼를 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대족장님.”
“아! 결정하셨습니까?”
“대족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사람의 권위와 명예가 전체보다 중요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원래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지금의 터전을 닦으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는 비록 족장의 권위와 명예가 상처받았다고는 하지만 부족민 전체의 삶과 직결된 축복의 의식과 맞바꾸는 것이라면 충분히 양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올바른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결계를 설치하는 작업을 방해하고 모욕까지 한 계집아이를 놓아주는 대가로 부족의 영역에 축복의 의식을 해 주겠다는 대가를 챙긴 조용한울음의 경우를 보면서 다른 부족의 족장들이나 대전사들, 전사들 모두가 부러운 눈빛으로 조용한울음을, 그리고 자신들도 같은 의식을 행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알마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대족장님…….”
철없이 당돌하기만 한 동생을 살려 달라는 애원의 눈빛을 보내긴 하였지만 알마리온이 이처럼 큰 대가를 주기로 하고 동생을 살려 내자 꿈꾸는달은 그저 한없이 알마리온에게 송구할 뿐이었다.
“무엇 하느냐! 넌 어서 대족장님께 평생 노예로 살 것임을 약속드리지 않고서!”
“오빠…….”
사고를 칠 때마다 큰오빠인 꿈꾸는달에게 엄한 꾸지람을 듣긴 하였지만 지금처럼 단호한 모습은 처음 접해 본 당돌한여우는 크게 놀랐는지 동그랗게 뜨인 두 눈에는 당혹감과 두려움 그리고 서러움 같은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너 따위 것을 살려 주시기 위해 큰 대가를 약속하신 대족장님께 어서 평생 노예로서 복종하겠단 맹세를 하지 않고 무엇 하는 것이냐!”
“흑흑! 오빠…….”
“듣기 싫다! 내 누누이 네게 경고했을 것이다. 언젠가 너의 그 당돌함으로 인해 너는 물론 타인에게도 큰 화를 불러오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난, 난 그저…….”
“그만하세요, 꿈꾸는달 님. 아직은 어린 소녀이지 않습니까? 아직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결과를 생각할 때이기보다는 왕성한 호기심이 더 클 때 아닙니까?”
당돌한여우의 나이 이제 불과 열두 살. 알마리온의 말처럼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결과를 두려워하기보다는 그저 눈앞에 당면한 호기심에 더 마음이 이끌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노예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아닙니다, 대족장님. 메코이족이라면, 아니 모든 게르혼족이라면 목숨을 구해 준 이에게 평생을 봉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계집의 경우에는 생명의 은인의 노예가 되는 것이 관습입니다! 만약 대족장님께서 저 아이를 받아들여 주시지 않거나 저 아이가 생명을 구해 준 대가를 지불하지 않겠다고 하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알마리온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난감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결국 신께서는 이렇게 저 아이와 나의 인연을 만드시는구나.’
자신이 당돌한여우를 거절하게 되면, 그리고 당돌한여우가 자신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그 대가는 단 하나. 바로 목숨이었다. 목숨값은 목숨으로 갚는다는 관습은 이들 게르혼족들이 가중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습이었다.
“…….”
알마리온이 대답이 없자 꿈꾸는달의 눈빛이 잠시 암울하게 변하더니 이내 굳은 결심을 하였는지 단호한 눈빛으로 허리에 찬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한 모습에 알마리온은 결국 당돌한여우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소녀를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대족장!”
여동생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한 알마리온에게 감사를 표시하였지만 잔뜩 굳어진 그의 표정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여동생인 당돌한여우에게서 알마리온의 노예가 되어 평생 그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선언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넌 어찌하겠느냐?”
“오빠…….”
챙!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과 너무나도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오빠의 모습에 더럭 겁이 나 머뭇거리자 다짜고짜 검을 뽑아 들자 죽음의 공포를 느낀 당돌한여우가 저도 모르게 알마리온의 노예가 되어 평생을 봉사하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할게요! 하겠어요! 나 당돌한여우는 생명의 은인이신 대족장님의 노예가 되어 평생 주인님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기실 앞서 조용한울음에 의해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만 하더라도 당돌한여우는 자신이 사고를 칠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내면서도 언제나 뒷수습을 해 준 꿈꾸는달이 이번에도 그렇게 해 주겠지 하는 생각에 불안하고 겁이 나는 가운데서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하나 이처럼 자신을 위해 뒷수습을 해 주던 꿈꾸는달이 직접 자신을 죽일 듯이 행동하자 이제 더 이상 기댈 구석이 없음을 파악한 당돌한여우가 결국 알마리온의 노예가 되겠다는 선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흑흑! 하, 하면 될 것 아니에요! 하면…… 으아앙! 아빠! 엄마! 흑흑흑!”
아무리 평소의 모습이 당돌하다 하더라도 이러한 순간에도 당돌하게 행동하기에는 아직은 너무나도 어린 나이인 당돌한여우가 끝내 서러움이 북받친 울음을 터뜨렸다.
“죄송합니다, 대족장님.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대신하여 어린 여동생을 제대로 보살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해 이처럼 대족장님께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
자신과의 인연도 인연이지만, 신탁에 따라 다음 대의 대족장이 될 당돌한여우와의 인연이 이런 식으로 이어지게 된 것에 신이 정한 운명이 참으로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는 저 아이를 대족장님의 게르로 데려가라. 그리고 저 아이의 물건들 또한 함께 옮기도록 하라.”
“예, 대전사님. 자! 이만 가자!”
“흑! 흑!”
두 명의 칸 부족 전사들이 당돌한여우를 끌고 가다시피 하여 부족의 마을로 돌아갔다.
“이제 소란도 끝났으니 다시금 결계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도록 하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결계를 완성하면 그만큼 더 부족민들이 안전하게 되니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예, 대족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