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그대를 대족장으로 인정할 수 없소!”
메코이족에 속하는 11개 소부족들의 모든 소부족장과 각 소부족의 대전사들이 모이란족의 영역에 모였다.
하나 이들에게 있어서 대족장인 알마리온이란 존재는 동화하기 힘든 존재라는 것을 아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일부, 아니 11개 소부족의 부족장들과 대전사들 중 절반에 가까운 자들이 그란 존재를 부정하였고, 그 나머지도 단 세 곳의 소부족을 제외하고는 그를 부정하는 식의 분명한 입장 표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들도 알마리온이란 존재를 부담스러워하긴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결국 그를 인정하고 믿고 따르겠다는 부족은 3개 부족밖에 없는데 이들은 푸른하늘의 출신 부족인 칸 부족과 하오란 부족 그리고 말린 부족뿐이었다.
“날 인정할 수 없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일이었기에 놀라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기분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생각은 없소이다. 다만 이민족인 그대를 대족장으로 인정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분명히 하자는 것일 뿐이오.”
“훗! 웃기는 작자들이군.”
애매한 답변만을 하는 메코이족의 소족장들과 대전사들의 행동을 지켜보던 리처드가 콧방귀를 뀌며 비꼬듯 말하였다.
“이건 완전히 자기들 입맛대로만 하겠다는 것이잖아? 이 녀석을 부정한다고 했으면 그대로 떠나든지, 그것도 아니면 한판 붙어서 끝장을 보든지 그래야지. 이도 저도 아니고 뭐 하겠다는 것이지?”
무엇이든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리처드로서는 알마리온을 대족장으로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는 메코이족의 소족장들과 대전사들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대는 이 문제에 있어서 철저한 외부인. 하니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대가 끼어들 수 없소.”
“흥! 난 여기 있는 이 아이의 형이 되는 사람이라고. 하니 아주 외부인은 아니란 것이지.”
“상관없소. 어차피 우리가 저자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니 저자 또한 우리에게는 외부인이니 말이오.”
“한 가지 묻고 싶군요.”
“……?”
“메코이족의 대족장이란 지위는 선출로 뽑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대족장님. 메코이족의 대족장이란 지위는 전대 대족장님의 선택, 아니 신의 뜻에 따라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뭐라 하기 전에 분명하게 못을 박아 버리는 꿈꾸는달이었다. 제1의용군에서 함께 전장을 누비면서 알마리온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된 그는 그만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부족 전체를 다시금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나란 존재를 아무리 부정한다 하더라도 전대 대족장님이셨던 푸른하늘 님이 날 대족장으로 선택하신 이상 그대들의 인정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대족장님.”
“흥! 그대가 억지를 부린다면 우리 또한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그대는?”
“난 흰꼬리 부족의 대전사 어두운밤이다.”
“그러한 견해는 그대 개인의 의견입니까, 아니면 부족 전체의 의견입니까?”
“부족 전체의 의견이다!”
부족 전체의 의견이라는 말에 알마리온은 담담한 눈빛으로 어두운밤과 함께 앉아 있는 흰꼬리 부족의 족장인 자를 바라보았다.
“부족 전체의 의견이라면 그대 또한 같은 뜻이라는 것인데 맞습니까?”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그래서 듣는 이로 하여금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와 말투였다. 이러한 것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날 수도, 그리고 교육을 받음으로써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힘을 갖춘 자만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각 소부족의 족장들은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컵을 가득 채운 물이 흘러넘치듯 알마리온에게서 느껴지는 주술의 힘을.
“그, 그렇습니다. 아니! 그렇소!”
넘쳐흐르는 강한 주술의 힘에 기가 죽은 흰꼬리 부족의 족장인 푸른점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거렸다.
그 모습에 어두운밤을 비롯한 다른 소부족의 대전사들은 모두 눈살을 찌푸렸지만, 소부족의 족장들은 푸른점의 그러한 모습이 십분 이해가 된다는 듯 슬쩍 시선을 외면하였다.
“날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다른 부족들 또한 그러한 의견이 부족 전체의 의견입니까?”
“그렇소!”
대답은 각 소부족의 족장들에게서가 아닌 대전사들에게서 나왔다.
‘역시 이미 족장들의 권위가 무너진 상태군.’
각 부족을 대표할 수 있는 자들은 엄연히 대전사가 아닌 족장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족장들이 아닌 대전사들이 각 부족을 대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꿈꾸는달 님.”
“예, 대족장님.”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메코이족의 대표자들은 족장인 것입니까, 아니면 대전사들입니까?”
“당연히 족장들입니다.”
꿈꾸는달의 말이 끝나자 다시 한 번 각 부족의 소족장들과 대전사들을 바라보자 모두 그의 시선을 피하였다.
‘결국 이들 내부에서도 더 이상 주술의 힘 같은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이 많아졌다는 뜻이겠지.’
메코이족 내부에서도 주술의 힘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자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 있은 일이 아니었다. 7년 전 이들 메코이족은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되었는데 전통에 따라 주술사를 족장으로 인정하자는 쪽과, 점차 약해지고 있는 주술의 힘만으로는 부족을 이끌어 나갈 수 없다며 강력한 힘만이 부족 전체의 안전을 지켜 나갈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쪽이 큰 충돌을 벌인 일이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당시 대족장이었던 푸른하늘을 따르는 쪽이 승리를 거두긴 하였지만 이로 인해 메코이족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고 미처 이 힘을 보완하기도 전에 타 부족의 공격을 받아 자신들의 영역을 빼앗긴 채 로엔 왕국의 영토 안으로 도망쳐 오게 된 것이었다.
한데 이러한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지금도 부족들 내부에서는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쪽과, 부족의 안전과 미래를 위해서는 강력한 힘을 지닌 대전사들이 부족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쪽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와는 달리 그동안 이들의 삶의 중심은 주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삶의 중심이었던 주술을 이들 스스로가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게 된 것은 이들을 이끌어 왔던 주술사들의 능력이 꾸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주술이라는 것은 믿음이 강할수록 더 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이는 마치 열두 신전의 신도들 중 신심이 강력한 이들만으로 구성된 성기사단이 강력한 신성력을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신은 자신을 믿는 자를 축복한다.’라는 성서의 구절이 있다. 믿음의 깊이가 깊고 크기가 클수록, 신은 그러한 인간에게 더 많은 축복을 내려 준다.
이러한 신도들 중에는 신에 대한 믿음이 크고 깊어 사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처럼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신의 권능 중 일부를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생겨났는데, 사제들의 간증干證을 통해 이들이 신으로부터 신의 권능 중 일부를 사용할 수 있는 자임을 확인받게 되면 성기사단에 들 수 있었다.
이들 성기사단은 신전을 수호하고 사제들을 보호하며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단자들을 척결하고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을 힘으로써 교화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성기사단에 뽑힌다는 것은 본인에게도 그러했지만 그 주변 사람들에게도 대단한 영광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것은 그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인데 이는 주술이라 해서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이들 메코이족에게서 주술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긴 이들 게르혼족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여러 신전에서 앞다투어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보내 이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니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이들 게르혼족을 두고 야만인이라 칭하는 것은 이들이 신들을 거부하고 주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을 개종시키는 것은 신을 믿고 따르는 사제들과 성기사들에게는 반드시 개종을 시켜야 하는 대상들이었고 이를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신전의 어느 사제나 성기사 들에 의해 이들 게르혼족을 찾아다니고 있거나 이들을 상대로 성력이나 교리를 통해 이들을 개종시켜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각 신전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게르혼족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으로 믿어 왔던 주술에 대한 믿음이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왔고 결국 이제는 대부분의 게르혼족들이 더 이상 주술의 힘을 믿지 않고 자신들을 교화시킨 사제들이 전파한 신전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
‘푸른하늘 님도 내게 이런 난감한 일을 떠맡기시다니, 참…….’
망자를 위한 의식을 행하던 마지막 순간 푸른하늘의 영이 나타나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던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그대들이 날 정당한 계승자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니 좋습니다. 하면 앞으로 그대들은 어떻게 할 계획인 것입니까?”
묻기는 모두에게 물었지만 알마리온의 눈길은 흰꼬리 부족의 대전사인 어두운밤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 무리의 수장이 그라는 것은 구태여 물어서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문제. 그대가 그러한 것을 알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그 무슨…….”
“아! 그만두세요, 꿈꾸는달 님.”
“하오나 대족장님!”
어두운밤이 계속해서 알마리온에게 무례하게 행동하자 이를 지켜보던 꿈꾸는달이 격분하여 나서려 했지만 알마리온은 오히려 그러한 꿈꾸는 달을 만류하였다.
한데 그의 이러한 모습은 마치 자신들을 두려워하여 말리는 것처럼 보였는지 어두운밤을 비롯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의 입가에는 짙은 조소가 어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알마리온은 담담히 자신이 할 말을 이어 나갔다.
“하긴 그도 그렇겠군요. 날 거부하기로 한 이상 그대들은 더 이상 메코이족이 아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
알마리온의 말에 꿈꾸는달처럼 그를 인정하겠다고 선언한 부족들이나 그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한 부족들의 족장과 대전사 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대 대족장님께서는 내게 그대들 모두를 화합하게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셨지만 난 굳이 날 거부하는 자들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습니다.”
“대족장님!”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꿈꾸는달 님.”
“하오나…….”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단지 눈이 마주친 것에 불과하였지만 그에게서 항거할 수 없는 마력과도 같은 힘에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날 인정하지 않는 그대들이 이곳에 살든 이곳을 떠나든, 그것 또한 자유입니다. 어차피 이곳은 그대들 중 일부가 생명을 담보로 얻은 땅이니 말입니다. 그럼 오늘의 회합은 이만 마치도록 하지요.”
제 할 말을 끝낸 알마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게르를 빠져나가자 그 뒤를 리처드가 따라나서다 뒤를 돌아보며 잔뜩 조소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후후, 오늘 저 아이를 거부한 그대들은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큰 실수를 하였음을 알아야 할 것이야. 후후후!”
비난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는 한마디를 남기고 리처드 또한 밖으로 나가 버리자 게르 안에는 심연과도 같은 깊은 침묵이 흘렀다. 알마리온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쪽도, 그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쪽도 그가 이처럼 간단하게 부족을 나누어 버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냐?”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걷겠다는 선언을 하러 온 소부족들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내쳐 버린 것을 두고 그 이유가 궁금해진 리처드였다.
“저들은 싸워야 할 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소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과 그가 전장에서 병사들을 지휘하여 적을 상대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적을 대함에 있어서 그의 모습은 평소 많은 것을 양보하고 정으로 대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냉정함 그 자체였다.
자신의 영지를 정리할 때의 모습만 보아도 그는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물어야 할 죄를 철저하게 따져 물을 정도의 냉혹함까지 보임으로써 영지민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보여 단번에 절대적인 권위를 세워 놓았을 정도다.
그런 그가 이들 메코이족의 여러 소부족들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걷겠다고 하자 순순히 그러라고 한 것은 확실히 의외의 일이었던 것이다. 한데 그 이유가 저들이 싸워야 할 적이 아니기 때문이란 말 또한 리처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면 저들은 네게 있어서 어떤 존재라는 것이지?”
“집을 나가겠다고 반항하는 아들 정도?”
“뭐?”
“내게 있어서 저들은 미우나 고우나 품고 가야 할 자식들과 같은 존재란 뜻입니다, 형님.”
푸른하늘로부터 메코이족의 대족장으로 선택받았을 때부터 그는 메코이족이 자신으로 인해 내분에 휩싸이게 될 것임을 예상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분열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을지를 두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그러다 문득 병사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 그 노병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집을 나가고 싶어 하는 자식들은 아무리 붙잡아도 결국은 집을 나가게 된다고 말입니다. 하나 결국엔 다시금 집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설사 부모가 모두 죽은 뒤가 되었든 어쨌든 말입니다.”
“하면 저들이 돌아오길 원한다면 언제든 다시 받아 주겠다는 것이냐?”
“자식이 부모를 버릴 수는 있어도 부모가 자식을 버리진 않지 않습니까?”
집을 나간다 하더라도 자식은 자식, 그러한 자식들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서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고향 집을 만드는 것. 그것이 알마리온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네 경우를 보면 뭐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만?”
꼬인 것이 많았기에 유난히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성질을 돋게 하는 독설을 자주 하는 그였지만, 그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자 이제는 내성이 생겨 버린 알마리온이었다.
“훗!”
“웃어? 이젠 내 말이 우습다 이거냐?”
“하하하!”
“쳇! 재미없게시리.”
기대했던 반응이 없자 오히려 재미를 잃었는지 삐죽거리는 리처드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반발이 심할 수도 있다.”
잠시 삐죽대던 리처드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오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널 모르는 자들 중에는 네게 실망하는 자들도 나올 것이야.”
알마리온보다 늦게 게르를 나오면서 당황해하는 모습들 사이에서 몇몇 사람들이 그의 결정에 실망감을 느끼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기에 한 말이었다.
“앞으로 해야 할 시간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겠지요.”
“너무 낙관적인 것 아니냐?”
“시간이 말해 줄 것입니다.”
“쳇! 무슨 예언자처럼 말하네.”
“모르셨습니까? 모든 주술사는 예언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잘났다, 정말. 지가 언제부터 주술사였다고 참……. 음? 이제들 떠나는 모양이네?”
“그런 것 같네요.”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부족을 떠나겠다는 선언을 한 소부족들의 족장들과 대전사들이 게르를 빠져나오더니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행을 위해 함께 온 전사들과 함께 이내 어둠 저편으로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만약 그분께서 그대들을 걱정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내가 선택한 방법이 다른 것이었다면 그대들 모두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것이오. 숲 저편에 대기하고 있는 그대들이 끌고 온 전사들까지도 말이오.’
떠나가는 자들을 바라보는 알마리온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쩝! 네놈이 너무 순순히 저들을 보내 주니 재미가 없어졌네. 오늘 밤 제대로 한판 벌일 수 있었는데 말이야.”
입맛을 다시며 허리에 찬 검을 만지작거리는 리처드의 모습을 보면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알마리온이었다.
작정을 하고 찾아온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올 리는 없는 법. 모이란족의 근거지 주변은 알마리온을 거부하기로 결정한 소부족들의 전사들이 완벽하게 포위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형님도 참…….”
“못해도 4∼5백 명 정도는 되겠지?”
“그보단 조금 많습니다.”
주술 중에는 지박령地縛靈의 눈을 통해 주변의 상황을 살펴보는 주술이 있는데 마치 정령 마법 중 땅의 정령의 눈을 통해 주변을 살피는 것과 매우 유사한 그러한 주술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먼 곳의 일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상세하게 설명하는 주술사를 보며 신기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처럼 지박령의 눈을 통해 그곳의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주술과 정령 마법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구나.’
주술이라는 것을 사용하면 할수록 정령 마법과 유사하거나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그는 이제는 정령 마법보다는 주술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그의 주술에 대한 능력 또한 정령 마법 때와 마찬가지로 더욱 높아져 갔다.
“그래? 대충 어느 정도였는데?”
“6백 명 정도더군요.”
“그렇다면 정말 제대로 몸 한번 풀어 볼 수 있었는데 아쉽네.”
“하하, 그렇게 몸을 풀고 싶으시면 제가 상대해 드릴까요?”
“정말이지?”
“제가 언제 빈말을 하던가요?”
“하긴. 게다가 어차피 저치들에게도 네가 힘이 없어서 저들을 곱게 돌려보내 주는 것이 아님을 한번 정도는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기도 해야 할 테니 겸사겸사 한번 놀아 보지, 뭐.”
자신의 의도를 단번에 짚어 내는 리처드를 보면서 내심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자신을 인정하고 따르기로 결정을 한 부족들이나 중립을 지키며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심산으로 결정을 유보한 부족들이나, 알마리온이 자신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로 결정한 부족들을 순순히 놓아준 것을 놓고 말들이 많을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특히 결정을 유보한 부족들의 경우에는 알마리온이 저들을 거둘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식의 판단을 내려 결과적으로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부족들까지 선동을 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한번 정도는 자신이 능력이 부족해서 저들을 순순히 보내 준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 줄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곳 모이란족 또한 아직은 분명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은 부족 중 한 곳이었으니 그런 식으로 무력시위를 보이게 되면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 알마리온의 생각이었다.
‘만약 이번 전쟁을 처음부터 형님 같은 분이 지휘를 하였다면 로엔이라는 나라가 과연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
지모나 무력, 사람들을 휘어잡는 매력까지, 리처드는 지금까지 알마리온이 보아 온 최고의 인물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리처드가 이번 전쟁에서 적이 되어 자신들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알마리온은 로엔 왕국에는 천만다행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분을 적으로 두었다면 그것이 어느 누구이든, 어떤 나라이든 잠시도 방심을 해서는 안 될 것이야. 그런 의미에서 포넬의 지배자인 고메즈 대공이란 자는 참으로 불행한 자이군. 이런 분을 적으로 돌렸으니 말이야.’
알마리온은 느낄 수 있었다. 리처드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운이 앞으로도 더욱 밝고 크게 될 것임을.
알마리온과 리처드, 그리고 알마리온을 대족장으로 인정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세 부족의 족장과 대전사 들을 제외한, 알마리온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 소부족의 족장들과 대전사들은 여전히 게르 안에 모여 있었다.
“…….”
이들 모두 일전을 각오하고 모인 자리였다. 한데 이처럼 자신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알마리온이 순순히 자신들의 이탈을 인정해 버리자 오히려 그에게 다른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인지 걱정이 되는 이들이었다.
“과연 오늘 우리의 결정이 제대로 된 결정인지 모르겠소.”
점박이말 부족의 족장인 하얀발톱은 영 마음 께름칙하였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말이오!”
무척이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어두운밤이었다. 그도 내심 알마리온이 너무나도 순순히 자신들의 이탈을 인정해 버리자 께름칙한 마음이 들던 중이었던 것이다.
“전장에서 돌아온 전사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는 로엔에서도 최고의 전쟁 영웅들 중 한 사람이었소. 그런 그가 이처럼 순순히 우리의 이탈을 인정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소?”
“그건…….”
자신들만의 안정된 영역을 얻기 위해 이들 각 부족에서는 전사들을 차출하여 로엔과 포넬의 전쟁에 개입하였고, 그런 이들 부족들의 전사들을 지휘한 인물인 알마리온에 대해서는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전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서 귀가 따갑게 들은 바가 있었다.
귀환한 전사들이 전하는 알마리온이란 인물은 한마디로 ‘영웅’ 그 자체였고, 평소에는 군기를 강조하되 병사들을 위해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지만 전투에 임한 적에게는 냉혹하리만치 적을 상대한다 했다.
어두운밤도 하얀발톱의 의문에 답할 수 있는 정답을 알고 있지 못하고 있었기에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었소! 그것이면 된 것 아니오?”
억지스러운 말이었다. 상대의 정확한 의도도 모른 채 그저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다고 해서 좋아할 정도로 이들은 어린아이들도 아니었으며, 멍청하지도 않은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이러한 말은 오히려 그에 대한 실망감과 과연 자신들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 뿐이었다.
“어두운밤 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가 무슨 까닭으로 이처럼 순순히 우리를 놓아주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빨리달리는말 부족의 대전사인 초록눈동자가 어두운밤의 말에 동조를 하고 나섰다. 그 또한 어두운밤의 말이 억지에 가까운 말임을 알지만, 알면서도 지금은 무작정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우리 모두 이제 막 그 끝을 모르는 긴 여정에 든 자들. 이제부터는 무조건 안내자를 따라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 안내자의 길 안내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면 굳이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성이 없는 것 아닙니까?”
하얀발톱의 말처럼 이제 이곳에서 이들이 더 이상 볼일은 없어진 셈이었다. 비록 자신들이 인정하진 않겠다고 선언을 하였지만 대족장인 알마리온으로부터 독자적인 길을 걸어도 좋다는 뜻과 함께 지금 살고 있는 영역 또한 그대로 인정을 해 주겠다는 확약까지 받은 상황에서 이곳 모이란족의 영역에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줄 알았다면 부족의 전사들을 괜히 끌고 온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그자가 로엔의 전쟁 영웅이라 하기에 내심 화끈하게 한판 붙어 보고 싶었는데, 알고 보니 머리로만 싸우는 그런 샌님 같은 놈이었나 보군.”
“하하, 아마도 그런 것 같소.”
“하긴 로엔 놈들이야 우리를 야만족이라며 깔보고 있지만 정작 그놈들이야말로 겁쟁이들 아니오? 우리가 말을 타고 한번 우르르 몰려오기만 하더라도 겁에 질린 채 식량과 계집들과 보석들을 갖다 바치는 놈들이니 말이오. 안 그렇소?”
“하하하, 맞습니다.”
마치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을 하는 개선장군들처럼 행동하는 대전사들이었지만 모두가 이들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족 회의를 통해 이민족인 그자를 대족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긴 하였지만 어쩌면 그자와 함께 왔다던 자의 말처럼 우리는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인지도…….’
알마리온을 처음 본 순간 하얀발톱은 내심 자신들의 결정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게다가 그대들 대전사들은 느끼지 못하였겠지만 나나 아니면 다른 족장들은 느꼈거나,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이미 전대 대족장님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는 알 수 없었다. 하나 꿈꾸는달을 단지 말 한마디, 눈빛 하나로 제압했을 때 하얀발톱을 비롯한 몇몇 족장들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고, 그 나머지도 막연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이미 전대 대족장인 푸른하늘이 보여 주었던 주술의 힘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마리온의 주술의 힘이 푸른하늘보다 강해지게 된 때는 제리코라는 흑주술사가 안식을 취해야 할 영혼들을 강제로 붙잡아 도구로 사용하였을 때, 이들에게 안식을 주고 삿된 기운에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는 ‘희생의 주술’을 사용하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전대 대족장께서는 인간적으로는 최고의 분이셨지만 주술사로서의 능력 면에서는 그다지 뛰어난 분은 아니셨다.’
주술사로서의 능력만 놓고 따진다면 푸른하늘은 전대 대족장들에 비해 결코 뛰어난 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비단 푸른하늘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벌써 몇 대째 대족장들이나 각 부족의 소족장들의 능력이나 자질도 떨어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대전사라 하더라도 족장의 권위를 넘보거나, 뛰어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하나 하얀발톱을 비롯한 몇몇 소족장들은 오늘 처음 알마리온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이 놀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알마리온이 푸른하늘의 수준을 이미 뛰어넘은 주술사임을 알아보았거나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모두 각자의 부족으로 돌아간 다음 부족민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잘 통제를 해야 할 것이오. 특히 이민족인 저자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부족민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오. 아시겠소?”
“잘 알겠습니다.”
이들 무리의 지도자인 어두운밤의 말에 다른 소부족의 대전사들이 힘차게 대답하였다. 이들 부족에 있어서 이들 대전사들은 이미 족장의 권한을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흰꼬리 부족을 비롯하여 알마리온을 대족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부족의 족장들과 대전사들, 그리고 이들을 수행한 전사들이 모이란족의 영역을 모두 떠나간 뒤에도 모이란족의 족장인 차분한심장의 게르 안에는 몇몇 부족의 족장들과 대전사들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알마리온을 대족장으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한 칸 부족과 하오란 부족 그리고 말린 부족의 족장들과 대전사들과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중립을 지키고 있는 모이란, 검은매, 그리고 붉은이리 부족의 족장들과 대전사들이었다.
“궁금한 것이 있소.”
말린 부족의 대전사인 초원에부는바람이 꿈꾸는달에게 물었다.
“무엇이오?”
“그대 칸 부족의 대전사인 꿈꾸는달은 전대 대족장님의 선택이 과연 옳았다고 보시오?”
대족장이나 각 부족의 소족장들은 신의 선택, 그러니까 신탁을 통해서 계승되는 계승자들이었다. 따라서 초원에부는바람의 질문은 알마리온이 과연 신탁에 의한 정당한 계승자인 것이 맞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그것은 신탁에 의한 것임을 그대 말린 부족의 대전사인 초원에부는바람 또한 잘 알고 있지 않소?”
“물론 알고 있소. 하지만 난 솔직히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소. 그자가 정녕 정당한 계승자라면 이런 식으로 부족을 버리는 결정을 어떻게 내릴 수가 있단 말이오?”
“그것은…….”
꿈꾸는달 또한 알마리온이 왜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인지 그 속내를 알 수 없으니 초원에부는바람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오. 설사 다른 부족들이 그를 대족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각 소부족들의 결정이었을 뿐이오. 한데 오늘 그가 그들의 이탈을 인정해 버림으로써 이제는 대족장의 권위라는 것은 더 이상 주장할 수도, 그리고 인정받을 수도 없게 되어 버렸소.”
초원에부는바람의 말처럼 인정을 받든 그러지 못하든, 알마리온의 결정으로 인해 그동안 대족장이 지녀 왔던 권위는 물론 통제력까지 모두 상실하게 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즉, 이제 더 이상 메코이족은 존재하지 않게 되어 버렸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체성의 상실은 전체 메코이족을 파멸의 길로 이끌 수도 있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으음…….”
“그는 과연 우리 메코이족을 위한 대족장인 것이오? 아니면 로엔의 귀족으로서 장차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는 우리를 흩어 놓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러한 결정을 한 것 아니오?”
“…….”
충분히 의심받을 수 있는 행동이었다. 당장 한 명의 병사가 아쉬웠던 로엔은 때마침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메코이족이나 얄란족의 힘을 빌리기 위해 이들에게 아무 쓸모도 없던 땅 일부를 내준 후 상황이 역전되니 이제는 그저 이들을 귀찮게만 여겨 힘을 약화시켜 놓기 위해 이러한 행동을 의도적으로 한 것은 아닌지 의심까지 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절대 아니오. 절대!”
“다른 일이었다면 그대 칸 부족의 대전사인 꿈꾸는달의 말에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을 것이오. 하나 그는 로엔의 귀족. 그동안 우리가 로엔인들에게 얼마나 많이 속아 왔는지는 그대 또한 잘 알 것이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은 아닌 것 같소.”
그동안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하오란족의 족장인 하얀구름이 최소한 알마리온이 자신들을 속이거나 하지는 않을 인물이라는 자신의 느낌을 말하였다. 그러자 다른 부족들, 심지어는 알마리온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한 초원에부는바람의 부족인 말린 부족의 족장인 따뜻한봄바람 또한 그러한 하얀구름의 말에 동조를 하고 나섰다.
“나도 같은 느낌이었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가 진실된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지더군.”
남아 있는 소부족의 족장들이 모두 하나같이 알마리온이 자신들을 속이거나 할 사람은 아니라는 말을 하자 초원에부는바람 또한 더 이상 알마리온을 의심하는 발언을 할 수는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들 족장들에게는 진실의 눈이라는 주술을 사용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을 속이는 행동을 하는지의 여부를 이내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자는…… 진심으로 우릴 대하고 있었다네.”
“진심으로 말입니까? 하면 그자의 진심이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솔직히 그건 나도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더군. 다만 그가 진심으로 우릴 대하고 있었던 것만큼은 확실하더군.”
아마도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큰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꿈꾸는달일 것이다.
푸른하늘로부터 신탁에 의해 알마리온이 자신의 뒤를 이어 메코이족의 대족장이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말을 처음 전해 들었을 때, 꿈꾸는달 또한 강한 반발심이 들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가 자신들과 같은 게르혼족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 알마리온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꿈꾸는달은 그가 자신들을 제대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푸른하늘의 임종이 임박했을 때 여전히 알마리온에 대한 일말의 거부감을 나타내는 다른 소부족의 대전사들을 기꺼이 설득하기까지 하였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대족장님께서는 어찌하여 이처럼 부족을 분열시키는 결정을 하셨단 말인가. 어찌하여.’
꿈꾸는달을 비롯하여 남아 있던 자들이 모두 알마리온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 단초라도 잡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하고 있던 때였다.
쾅! 콰광! 쾅!
“무슨…… 설마 그들이 공격을?”
갑자기 들려온 폭음 소리에 모이란족의 대전사인 달리는발은 이것이 먼저 자리를 떠난 이탈자들이 부족을 공격하는 소리인 줄 알고는 검을 뽑아 들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각 소부족의 대전사들 또한 무기를 챙겨 들며 분분히 게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럴 수가! 이건 분명?”
“이런 강력한 주술의 힘이라면…….”
외부의 공격인 줄 알고 달려 나간 대전사들과는 달리 여전히 게르 안에 남아 있던 다섯 명의 족장들은 온몸으로 느껴지는 강력한 주술의 힘에 두려움을 느끼며 떨고 있었다.
“역시 아까의 그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나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할 것 같네.”
모이란족의 족장인 차분한심장이 앞서 나가자 그 뒤를 따라 나머지 족장들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이들이 소란의 진원지를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모든 모이란족의 부족민들과 남아 있던 다섯 부족의 대전사와 족장 들을 수행하여 온 전사들이 주변을 빼곡히 에워싼 채 알마리온과 리처드가 벌이고 있는 실전보다 더욱더 살벌해 보이는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데 이 대결에서 알마리온은 평소와는 달리 전혀 정령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채 그저 주술의 힘만으로 익스퍼트인 리처드를 상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런!”
낯선 주술에 의한 공격에 리처드는 당황하고 또 당황하였다. 그동안 알마리온과 함께 실전보다 더 실전 같은 대련을 수십 차례나 해 왔지만 지금까지의 대련은 정령 마법으로만 해 왔었기에 어느 정도 그 패턴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하나 주술이라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낯설고도 전혀 예측하기 힘든 방법으로 취해지는 공격을 직접 접하게 되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는! 이대로 쉽게 물러나진 않는다!’
승부욕에 있어서만큼은 세상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 중 하나인 리처드였다. 비록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익숙지 않은 형태의 공격에 당황하여 선기를 빼앗기고 일방적으로 방어를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그였지만 일격 필살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원하던 기회가 찾아오자 리처드는 거침없이 반격을 취했다.
‘지금!’
주술과 마법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했다. 바로 어떤 현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주문과도 같은 사전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해야 할 때에는 그만큼 주문 또한 복잡하고 길어진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파악한 리처드가 또 다른 주술을 사용하기 위해 주문을 외우던 알마리온의 빈틈을 파악하고는 반격을 취한 것이었다. 하나 이 또한 리처드가 익스퍼트라는 초인의 경지에 든 것이었기에 가능한 일로 인간의 범주에 머물러 있는 기사라면 그 틈을 이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역시! 그 짧은 틈을 파고들다니 대단하시구나. 하지만.’
주문을 외우는 그 짧은 순간을 파고들어 반격을 취하는 리처드의 능력에 감탄을 하면서 알마리온 또한 방어를 위한 주술을 사용했다.
“미스릴의 단단함이여, 나의 몸을 보호하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특징을 빌리는 주술이 있었다. 바로 ‘차력借力(super strength)의 술術’이라는 주술로 이는 그 대상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이 될 수도, 생명체가 될 수도, 그리고 어떤 특정한 현상이 될 수도 있었다.
다만 이러한 주술을 사용하는 자의 능력에 따라 가장 낮은 단계가 물질의 특징을, 그다음 단계가 생명체의 특징을, 가장 높은 단계가 특정 자연현상의 힘을 차력의 술로 이용하는 주술이었다.
알마리온은 그 두 번째 단계인 생명체의 힘까지 차력의 술로 사용할 수 있는 단계에 있었다.
깡! 까강! 깡! 챙!
인간의 몸과 검이 부딪침에도 불구하고 마치 쇠와 쇠가 부딪칠 때 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차력의 술! 그것도 첫 번째 단계의 끝인 미스릴의 기운을 빌릴 정도라니!”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족장들 중 누군가의 입에서 경악에 찬, 마치 비명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있었다.
차력의 술 중 가장 낮은 단계인 물질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지만 미스릴과 같은 최상의 물질의 기운을 빌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마치 1서클 마스터가 2서클 비기너에 비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경우와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하나 정작 더 경악하고 있는 이는 바로 리처드였다. 그는 익스퍼트의 상징인 소드 오러까지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의 몸에 작은 상처조차도 만들어 내지 못하자 경악, 아니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이 무슨! 어찌 인간의 몸이 이토록 단단할 수가! 게다가 소드 오러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에 작은 상처조차 만들지 못하다니!’
경악을 뛰어넘어 두려움까지 느끼게 하는 주술의 힘에 리처드가 허둥거리자 이제 더 이상 대련을 이어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알마리온이 대련의 끝을 냈다.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후욱! 후욱!”
절대 잃지 말아야 할 평정심을 잃음으로써 호흡이 흐트러져 버린 리처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늘 자신만만해하던 모습과는 달리 약간의 두려움이 담긴 눈빛으로 알마리온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주술의 힘인 것이냐?”
“예.”
“정말 두려운 힘이었다.”
“익숙해지시면 또 달리 보일 것입니다.”
“훗! 그런가? 하긴 처음 정령의 힘을 보았을 때도 그랬던 것 같군.”
정령 마법이라는 것을 처음 접했을 때에도 리처드는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하나 대련이 거듭되고 정령 마법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그는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강한 투지를 일으켰다.
‘이번에도 그러시겠지. 형님의 가장 큰 장점이자 진정으로 형님을 두렵게 여기게 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불굴의 의지이니 말이야.’
“어쩌면 내게 있어서 가장 큰 신의 축복은 너라는 녀석을 만난 것이 아닌가 싶다.”
“…….”
“너란 존재는 끊임없이 이렇게 날 자극하니 말이야. 후훗!”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형님.’
알마리온이란 존재로 인해 리처드가 더욱 자극을 받아 더욱 강해지기 위해 노력을 한다면, 알마리온 또한 리처드라는 존재가 있기에 자극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보여 줄 만큼 보여 줬으니 이만 돌아가자.”
“그러시죠.”
두 사람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움직이자 이들의 대련을 지켜보기 위해 몰려들었던 부족민들이 길을 만들어 주었다. 한데 이들 모두 처음과는 달리 알마리온에게 대족장을 접하였을 때 올리는 최고의 예를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