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기로
“나의 초대에 응한 마계의 마물이여! 나의 능력이 미치는 이곳에서 나와 함께하라! 현신!”
사사사사!
사사사!
사사사사사!
“저건!”
마계의 마물 중에서 가장 약한 마물은 당연히 마계의 곤충들이었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계에서나 그렇다는 것이지 중간계에서는 가장 약한 마계의 곤충마저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제리코가 소환한 마계의 마물은 그중에서도 앤트 자이언트Ant Giant였다.
주먹만 한 개미 떼가 수만? 아니, 수십만 마리가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나는 소음은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절로 공포에 빠뜨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샐리스트!”
대지를 가득 메운 앤트 자이언트가 빠르게 다가오자 알마리온은 불의 중급 정령인 샐리스트를 소환하였다.
“태워 버렷!”
-크크크! 오랜만에 재미난 놈들을 보는군! 좋아! 모두 태워 주마!
화르르르!
치치칙! 치칙! 치치칙!
사사사사! 사사사! 사사사사!
샐리스트가 만든 불길은 마계의 마물인 앤트 자이언트에게도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샐리스트의 불길이 닿자 주먹만 한 앤트 자이언트의 몸이 불에 타 재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크크. 그 정도였군? 좋아!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할지 한번 볼까?”
앤트 자이언트를 소환하여 알마리온의 능력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 살펴본 제리코는 이번에는 더욱 강력한 마물을 소환하였다.
쿠어어엉!
쿵! 쿵!
쿠엉!
이번에 소환한 마물은 에이프Ape였다. 고릴라처럼 생긴, 하지만 고릴라와는 달리 두 배나 큰 덩치와 붉게 충혈되어 있는 눈, 입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거대한 송곳니, 그리고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털이 보통의 고릴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철저하게 육식을 하는 에이프는 다 자란 수컷 곰보다 수십 배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강력한 힘으로 먹잇감을 단번에 찢어 버리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무엇보다도 에이프를 상대하는 것이 곤란한 것은 바로 에이프의 질긴 가죽이었다.
에이프의 질긴 가죽은 하급 익스퍼트의 검으로도 간신히 흠집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질겼으며 온몸을 덮고 있는 핏빛 털은 불에도 타지 않았다.
이런 에이프가 한 마리도 아니고 무려 세 마리나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크아아앙!
크앙!
크르르르…….
“샐리스트, 화염의 창!”
핑! 퍼엉!
“으음…….”
앤트 자이언트에게는 통했던 샐리스트의 화염이 에이프에게는 단지 움찔거리게 만든 것 정도 이상의 효과는 나타낼 수 없자 내심 당황하는 알마리온이었다.
“실라페!”
-호호호, 날 처음부터 불렀어야 했어. 저런 겉보기에만 요란한 녀석을 불러 봐야 괜히 덥기만 할 뿐이라고. 호호호!
소환되자마자 샐리스트를 한마디로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실라페였다.
4대 정령 모두에 대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친화력이 높은 정령을 꼽으라면 단연 바람의 정령이었다.
때문에 같은 중급 정령이라 하더라도 실라페를 이용한 정령 마법에 가장 자신이 있었고, 또한 위력도 강력했다.
“바람의 칼날!”
피피핑! 피핑! 피피핑!
쿠아앙! 크헝! 크어어억!
샐리스트의 강력한 화염 공격에도 잠시 움찔거리는 것 이상의 피해는 주지 못하였지만 셀리스트를 이용한 정령 마법은 확실히 효과를 보였다.
아무리 불에도 타지 않는 강철 같은 털과, 마나 소드로도 흉터나 겨우 낼 수 있을 정도로 질긴 가죽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람의 칼날은 아무리 작은 틈도 파고들 수 있었으며, 그 무엇도 잘라 내는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에어 스피어!”
기대했던 것만큼 강력하진 않았지만 일단 공격이 효과를 보이자 알마리온은 더욱 날카로운, 그리고 강력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나 공격의 효과는 있어도 결정적이진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피를 보게 된 에이프들은 더욱더 강한 흉성을 드러내며 미친 듯이 알마리온에게 달려들었다.
“크윽!”
쾅!
만약 네 페니테를 착용하지 않았다면 강력하고 날카로운 에이프의 손톱에 가격당한 팔이 단번에 찢겨 나갔을 것이다.
비록 그렇게 네 페니테의 덕으로 팔이 찢겨 나가는 것은 면하였지만 그 강력한 힘만큼은 그대로 전해져 에이프에 가격당한 팔이 단번에 부러져 버렸다.
이제 막 시작된 전투에서 벌써부터 한쪽 팔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큰 타격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팔을 다치다니…….’
검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팔을 다쳐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된 것에 심적으로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쿠아아!
공격이 통했다는 생각이 든 에이프들이 더욱더 흉성을 드러내며 알마리온을 공격하였다.
이에 알마리온은 더욱더 분주히 에이프의 공격을 피하거나 막으며 에이프를 공략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 방법이라면!’
생각이 떠오르자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운다인! 저것들을 적셔 줘!”
-예, 알마리온 님.
에이프를 적셔 달라는 이상한 명령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운다인은 세 마리의 에이프의 몸을 흠뻑 적셔 버렸다.
“얼려 줘!”
처음 에이프의 몸을 적셔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만 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던 운다인은 곧바로 이어진 알마리온의 부탁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쩌적! 쩍! 쩍!
순식간이었다. 흉폭하게 날뛰던 에이프의 몸이 순식간에 두꺼운 얼음덩어리로 변해 버렸다.
“바람의 칼날!”
쨍! 퍼퍼퍽! 퍼퍽!
얼음덩어리가 된 에이프의 몸들이 알마리온의 공격에 깨진 유리병처럼 산산조각 나서 대지 위를 나뒹굴었다.
“크크! 좋아! 대단하군! 그런 정도란 말이지? 하지만 이건 어떨까?”
이번에 제리코가 소환한 것은 스켈레톤skeleton이었다.
키키키!
크크크!
한둘도 아니고 일백이나 되는 스켈레톤들이 움직일 때마다 뼈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모습은 솔직히 꿈에 나타날까 두렵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에어 밤!”
팡! 파팡! 쾅! 콰앙!
스켈레톤을 상대하기 위해 공기를 응축시켜 강력한 폭발력을 만들어 내는 에어 밤이란 정령 마법을 사용하였다.
“됐…….”
폭발이 일어나자 그 충격에 수십의 스켈레톤들이 산산조각 나서 사라졌다.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지만 조각난 스켈레톤들이 다시금 뭉치기 시작하더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이스!”
에어 밤이 전혀 소용이 없자 이번에는 에이프를 상대했던 방법을 다시 한 번 사용해 보았다.
하나 다를 것이 전혀 없었다.
잠시 얼음 조각으로 변했던 스켈레톤들은 이내 또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파이어 밤!”
퍼엉! 화르르르! 펑! 펑! 화르르르!
이번에는 순간적으로 강력한 화염을 사용하여 단번에 재로 만들어 버릴 생각으로 샐리스트를 소환하여 화염 폭탄을 사용했지만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계의 음습한 기운에 절어 있는 스켈레톤은 중급 정령인 샐리스트의 불길에도 완전히 재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타다 만 모습으로 다시금 원상 복구된 스켈레톤의 모습은 더욱더 괴기스러운 모습만 만들어 냈을 뿐이었다.
그가 효과적으로 스켈레톤을 막아 내지 못하는 사이 그의 곁으로 다가온 스켈레톤들이 자신의 몸을 터뜨렸다.
팡!
“크흑!”
파팡! 팡! 팡!
“으헉!”
대마법 방어력이 있는 네 페니테이지만 이런 식의 공격에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필립이 걸치고 있던 마법 물품인 로브가 더 효과적으로 자폭하는 스켈레톤들의 뼛조각들에 대한 방어 능력이 뛰어났다.
거기에 노임을 이용해 전신을 금속처럼 단단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알마리온의 몸은 벌써 구멍이 숭숭 뚫려 버렸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저것들을 없앨 수 있지?’
알마리온은 당황하고 있었다.
앤트 자이언트나 에이프 때와는 달리 스켈레톤들을 처리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노임, 저것들을 모두 묻어 버려!”
스켈레톤들이 땅속 깊이 사라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스켈레톤들로 효과는 확실히 본 제리코는 더 많은 스켈레톤들을 마계에서 소환하였다.
아울러 그는 알마리온이 제대로 정령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또 다른 하나를 더 소환하였다.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듀라한?”
목이 없는 말을 타고 있는 목 없는 기사의 모습. 그것은 듀라한의 모습이었다.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을, 명을 다한 자들을 방문하여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사자로서, 그리고 때로는 직접 죽음을 선사하는 죽음의 사자로서 알려진 바로 그 듀라한이 소환된 것이다.
“노임, 내 주변에 높은 벽을 쌓아 줘!”
일단은 스켈레톤들과 듀라한을 막아 이것들을 상대할 방법을 찾을 시간적 여유를 갖고자 하였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일견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켈레톤들은 수직으로 솟아난 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알마리온에게 접근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나 듀라한은 달랐다. 듀라한은 원래 형체가 없는 몸, 그 무엇으로도 죽음의 사자인 듀라한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두두두! 두두두두! 두두두두두!
말을 달려 알마리온에게 달려가는 듀라한의 손에는 어느새 거대한 낫이 들려 있었다.
“바람의 칼날!”
피피피핑!
형체가 없으니 잘릴 것도 없었다.
“좋아! 그렇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방법들, 그러니까 정령 마법만을 이용해서는 마계의 소환물인 스켈레톤들과 듀라한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불가능하자 알마리온은 또 다른 힘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정령들의 고향에 깃든 정령력을 끌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훗! 한때는 이것을 마나 수련법이라 알고 있었으니. 아마도 이것을 내게 준 로엔달 자작 또한 이것이 마나 수련법이 아닌 주술의 주문이라는 것은 알지 못하였겠지.’
로엔달이 마나 수련법이라고 건네준 것이 마나 수련법이 아니라 정령의 고향이라는 것에 깃들어 있는 정령력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주문이라는 것을 처음 안 것은 바로 선택받은 자의 신물에 깃든 선인들의 지식에 의해서였다.
“아아…….”
주술에서의 접신과 같은, 정령의 고향에 깃들어 있는 최상급 정령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정령의 힘들이 몸 안에 충만해지자 알마리온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묘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전에는 자신이 소환한 정령들을 몸으로 받아들여 더욱 강한 힘을 내던 알마리온이었다.
하나 지금은 정령의 고향 안에 깃들어 있는 최상급 정령들의 힘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바뀌었는데, 이 두 형태의 차이는 극명할 정도로 차이가 뚜렷했다.
마법도 서클의 차이에서 오는 힘의 차이는 극명하지만, 정령의 경우만큼 극명하진 못하다.
9단계로 나누어진 마법과는 달리 정령은 5단계로 구분되고, 따라서 그만큼 등급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힘의 차이 또한 그 폭이 넓고 크다.
가령 하급 정령과 중급 정령의 차이만 하더라도 굳이 표현을 하자면 개울물과 폭포수의 차이가 날 정도로 극명하였다.
이런 이유로 중급 정령을 소환하여 몸으로 받아들였을 때의 힘과 최상급 정령의 힘 중 중급 정령만큼만 사용할 때의 차이가 그만큼 뚜렷한 것이었다.
“크크크! 단지 재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펼칠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인가? 크크크! 좋아! 더욱 재미있어지는구나!”
재능은 단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면 능력은 그것을 직접 할 수 있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
알마리온이 단지 재능만이 아니라 실제로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제리코는 처음으로 주술사와 대결을 갖게 된 것에 더욱더 흥분하였다.
“크크크! 좋아! 아주 좋아! 더욱더 날 흥분하게 만드는구나! 크하하하하!”
더욱 강력한 어둠의 주술력이 제리코가 소환한 소환물들에게 전해지자 그 힘을 받은 소환물들의 움직임과 파괴력 또한 그만큼 빠르고 강력해졌다.
“타올라라!”
펑! 화르르르르!
주술의 힘이 섞인 알마리온의 정령 마법은 이전의 것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크아악!
순수한 정령의 힘만을 사용했을 때에는 불조차 붙지 않던 스켈레톤이었지만 주술의 힘이 담긴 정령의 힘은 확실히 스켈레톤의 몸에도 불이 붙었고, 그 뜨거움이 전해지는 것인지 견디지 못하겠는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기 시작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단번에 스켈레톤을 없앨 정도는 아니었다.
“좋아. 그렇다면…….”
주술의 힘이 깃든 정령의 힘이 효과를 보이는 모습을 보자 알마리온은 선택받은 자의 신물을 통해 전해진 주술들 중 성화聖火의 주문을 떠올리며 이를 읊조리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주술의 힘을 사용했다면 이처럼 힘들지도, 그리고 부상을 당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러지 않은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주술이란 여전히 신뢰하기 힘든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는 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보다는 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따지고 본다면 그 자신이 소환할 수 있는 정령 또한 영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이었으니 주술과 전혀 다를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주술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감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교육의 힘이었다.
지금처럼 주신인 오딘을 비롯한 12신전이 체계를 잡기 이전의 세상에는 주술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였다. 이후 신전이 체계를 잡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주술은 대표적인 이단으로 치부되었고, 마법 시대 이후 신들의 시대라고 하는 오딘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12신전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오자 이단인 주술에 대한 탄압은 더욱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아울러 이러한 주술에 대한 근본적인 차단을 위해 신관들에 의한 교육까지 오랜 동안 지속되어 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술이라는 것은 곧 악마의 힘을 빌리는 것이고 반드시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히게 될 수밖에 없었고, 알마리온 또한 다르지 않아 주술에 대해 근원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성화의 불꽃이여, 세상의 모든 부정한 것들을 태워 오염된 세상을 깨끗이 하라!”
불로써 세상을 정화시키는 주술은 주술이라는 것이 생겨난 이래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주술. 그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주술이었다.
첫 목표는 흙벽에 가로막혀 있는 스켈레톤이었다. 주술이 완성되자 스켈레톤의 머리 위에는 기이한 문양이 생겨나더니 그곳에서 이내 새파란 불꽃이 피어났다. 바로 세상을 정화시키는 힘이 담겨 있는 성화였다.
크아악!
크악!
“저런! 이놈이! 하찮은 주술 따위로 감히!”
익숙지 않은 주술을 처음 사용해 본 때문에 알마리온이 만들어 낸 성화의 크기는 겨우 촛불 크기만 하였다.
그것만으로도 마계의 수준 낮은 마물인 스켈레톤들을 재조차 남지 않고 모두 태워 버리기 시작하자 이를 지켜보던 제리코가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크크! 좋아!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볼까?”
제리코의 입에서 그 뜻을 알 수 없는 기이한 주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가뜩이나 달조차 없어 어두운 밤하늘에 검은 먹구름들이 잔뜩 몰려오기 시작했다.
쿠르릉! 쿠릉! 쿠르릉!
번쩍! 번쩍! 번쩍!
주술에도 자연현상을 인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주술이 존재하였다. 아니, 이러한 능력은 바로 주술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런!”
스켈레톤을 처리하긴 하였지만 스켈레톤보다 몇 배나 더 강력한 존재인 듀라한이 서슬 퍼런 낫을 들고 날뛰는 상황에서 제리코가 자연을 변화시켜 번개를 내리치게 만들자 알마리온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원래 형체가 없는 듀라한이었기에 번개를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드는 듀라한과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춰 떨어지는 번개로 인해 알마리온은 다시금 순식간에 위기 상황에 빠져 버렸다.
‘일단 듀라한부터 처리해야 해!’
생각은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행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지금!’
촤아아아!
정화의 힘을 가지고 있는 물과 불의 힘 중 듀라한에게는 정화의 힘을 가진 성수의 주술을 이용하여 공격하였다.
하나 성수의 주술이라면 충분히 통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그만의 착각이었다.
‘어떻게……?’
순간적이긴 하였지만 오히려 성수에 가격당한 듀라한의 움직임과 기운이 더욱 빠르고 강력해지는 것을 보고 알마리온은 더욱 당황하였다.
“크크큭! 어리석은 놈! 듀라한은 처음부터 마계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조차 모르다니!”
듀라한을 상대로 세상을 정화시키는 성수를 사용하는 알마리온의 모습을 보면서 제리코는 마치 재미있는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처럼 웃었다.
죽음의 사자라고 알려진 듀라한은 실상 죽은 자의 영혼을 신에게 안내하는 안내자였다.
목 없는 말이나 관을 실은 마차 ‘코쉬테 보하르’를 타고 곧 죽음을 맞이할 자들을 알려 주는 ‘밴시’를 데리고 다니면서 이제 곧 죽을 사람의 집을 찾아가 한 바가지의 피를 뿌리는 것으로 죽음을 알렸으며, 죽은 자의 영혼을 신께 인도하여 영원한 안식을 취하게 하는 좋은 의미의 영이었다.
하나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공포의 대상, 결국 듀라한이 나타난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전하는 것이었으니 인간들은 자신의 영혼을 신의 품에 안기게 하여 안식을 취하게 하는 전령인 그를 두려움의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고, 이러한 두려움이 더욱 커져 결국 그를 사악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이때부터 듀라한은 죽음을 전하는 신의 전령에서 죽음을 선사하는 죽음의 사자로 변하게 되었고, 그의 손에는 죽음을 선사하는 죽음의 낫이 쥐이게 되었다.
그러한 듀라한을 상대로 알마리온은 성수의 주술을 사용하였으니 통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크크크! 지금 듀라한의 눈에 넌 죽음을 맞이해야 할 자이면서도 죽음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다니, 크크크크큭!”
실제로 듀라한에게 알마리온은 곧 죽음을 맞이해야 할 자이면서도 이를 거부하는 자로 비쳐지고 있다는 것을 알마리온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내가 굳이 많은 힘을 쓰면서까지 네놈을 이곳으로 불러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상 넌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에 죽을 것이다. 크하하하하하!”
살아 있는 자를 상대로 소환의 주술을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리코가 이곳으로 알마리온을 불러들인 것은 이곳이 어둠의 주술을 사용하기에 적합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어둠의 주술을 사용하기 적합한 지역에 제리코는 미리 저주와 죽음의 주술까지 걸어 놓아 알마리온으로 하여금 절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여 놓았다.
이것을 알 리 없는 알마리온은 지금 혼란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주술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강한 신뢰감이 부족한 상태에서 우연히 그것을 사용해 본 결과 효과를 보이자 약간의 믿음이 생겼다가, 이처럼 다시금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되면서 그 조금이나마 생겼던 신뢰감이 다시금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허둥거리는 알마리온의 모습을 가학적인 눈빛으로 지켜보던 제리코가 어둠 저편을 힐끗 보았다.
“크크크. 저것들 또한 제법 괜찮은 컬렉션이 될 수 있을 것 같구나. 특히 저 가운데 있는 놈은 가슴 하나 가득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는 저놈!”
제리코가 바라보고 있는 어둠 저편, 그곳에는 네 명이 몸을 숨긴 채 알마리온의 모습을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다. 리처드와 칸, 한센과 요들이었다.
이들 네 사람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홀로 어디론가 사라진 알마리온의 모습을 본 병사가 그 사실을 한센에게 알리면서였다.
병사의 이야기를 들은 한센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이를 리처드에게 알렸고, 결국 네 사람이 이렇게 알마리온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
“크크크! 저놈이야말로 내가 그동안 수집한 것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수집품이 될 자질이 충분하군. 크크크크크!”
리처드에게 집중된 제리코의 시선에는 강한 탐욕의 빛이 어려 있었다.
제리코에게는 한 가지 좋지 않은 수집벽이 있었다. 바로 살아 있는 인간이나 유사 인종을 주술의 힘으로 제압하여 자신의 명령에만 충실히 따르는 살아 있는 인형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제리코에게는 그러한 살아 있는 인형이 모두 4개(?)가 존재하고 있었다.
두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수인족 그리고 한 명의 드워프였다.
하나 그가 수집한 컬렉션들 모두를 합쳐도 그의 눈에 띈 리처드만 못하였다.
“나머지 놈들도 제법 좋은 컬렉션이 될 자질들이 충분하군. 크크크. 좋았어! 저놈들 모두를 나의 컬렉션으로 만든 후 저놈의 피와 영혼을 내 것으로 하면…….”
제리코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이내 그는 한 가지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동원되었던 앤트 자이언트와 에이프 그리고 스켈레톤들이 다시금, 이전보다 더욱 많이 나타났다. 대신 알마리온을 가장 곤란하게 만들었던 번개는 사라졌는데, 리처드 등을 끌어들이기 위한 술책이었다.
“이대로 더 이상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맞아요! 저러다 주군께서 큰 봉변이라도 당하신다면…….”
한센과 요들이 더 이상 상황을 지켜볼 수가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젠장! 갑시다!”
“예.”
한센과 요들이 미처 상황도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무작정 달려들자 리처드와 칸 또한 어쩔 수 없이 검을 뽑아 들고 알마리온을 돕기 위해 뛰어들었다.
하나 알마리온을 돕기 위한 이들의 행동은 오히려 알마리온을 더욱 곤경에 빠뜨리기 시작했다.
“주군! 저희가 왔습니다!”
“주군!”
“이런! 돌아가요! 모두 이곳을 벗어나란 말이에요!”
갑자기 들려온 한센과 요들의 목소리에 알마리온은 기겁을 하고는 그들에게 돌아가라 소리쳤다. 하나 상황은 이미 그의 통제를 벗어났다.
한센과 요들에 이어 리처드와 칸까지 제리코가 설정해 놓은 권역 안에 들어서 있었고 이들에게도 앤트 자이언트와 에이프 그리고 스켈레톤 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런!”
마계의 마물들을 상대로 인간의 능력은 미약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것은 익스퍼트인 리처드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스켈레톤이라는 존재는 물리적인 힘만으로는 파괴할 수 없고 주술이나 신성력의 힘만으로 물리칠 수 있었기에 리처드 또한 자신에게 달려드는 스켈레톤을 상대로 헛되이 힘만 낭비하고 있었다.
“성화의 불꽃이여…….”
“흥! 내가 그것을 두고만 볼 것 같으냐!”
성화의 주술을 다시금 사용하려 하는 알마리온이었지만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제리코가 결코 아니었다.
알마리온이 주문을 미처 완성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구름을 일으켜 번개를 내리치게 하자 주문을 외우던 알마리온도 자신을 돌보기에도 벅찬 상황에 빠져 버렸다.
“크크크! 그래!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를 느껴라!”
알마리온을 돕기 위해 끼어들긴 하였지만 오히려 거미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쳐 놓은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무의미한 몸부림을 치느라 정신없는 리처드와 칸 그리고 한센과 요들이었다.
특히 이들 네 사람 중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요들은 가장 먼저 제리코의 마수에 걸려들었다.
“으으, 으악! 으아악! 죽어! 죽어! 죽으란 말이야!”
두려웠다.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닌가 싶어 두려웠다.
알마리온 덕분에 평범하기만 하던 자신도 무엇인가 될 수 있다는 희망에 차 있던 그는, 지금의 것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더욱 발전된 자신을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였다.
그만큼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한 요들이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과 같은, 도저히 자신의 능력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자 더럭 두려움이 생겨났고, 그 두려움 속에 삶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제리코가 원하던 현상이었다.
“으악! 떠,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야!”
한꺼번에 수만 마리나 되는 앤트 자이언트가 밀려들자 이를 감당 못한 요들의 몸에 순식간에 앤트 자이언트가 빼곡하게 달라붙었다.
“으악! 으아악! 살려 줘! 살려 줘!”
-살고 싶은가?
“크흑! 누, 누구?”
온몸에 달라붙은 앤트 자이언트로 인해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요들은 갑자기 머릿속에 울리듯 들려온 목소리에 격하게 반응하였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요들은 그 목소리가 자신을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죽음의 공포에서 구해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살고 싶은가?
“살려 주시오! 살려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살려만 준다면? 그럼 넌 내게 무엇을 주겠느냐?
“살려만 주신다면…… 그런다면…….”
-…….
“제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네 모든 것을?
“그렇습니다! 제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네 영혼까지도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제 영혼까지도 드리겠습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무엇을 희생한다 하더라도 살고 싶었다. 하여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도 모른 채, 요들은 그저 살고 싶다는 욕망에 무조건 허락하고 말았다.
-크크크크! 나의 이름은 헤리 제리코! 기억하라! 이제 너의 육체와 영혼은 모두 나의 것임을!
요들을 시작으로 칸과 한센이 차례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욕망을 이용한 제리코에게 영혼을 넘김으로써 그의 조종을 당하는 살아 있는 인형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속 가득한 증오와 복수심을 교묘히 이용한 제리코의 은밀한 회유에 리처드 또한 그의 살아 있는 인형이 되었다.
“크크크! 가라! 가서 놈을 죽여라!”
제리코의 조종을 당하게 된 리처드와 칸, 한센과 요들뿐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리코의 조종을 당하고 있던 그의 4개의 살아 있는 인형들까지도 모두 합류하여 알마리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신 지금까지 그에 의해 소환된 소환물들과 번개는 모두 사라졌는데, 이를 유지하느라 꽤나 많은 힘을 소모하였기 때문이다.
익스퍼트인 리처드가 알마리온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였다.
“형님?”
“죽어!”
“형님! 도대체 왜? 대장! 요들!”
리처드를 비롯한 한센과 요들 그리고 칸 등이 자신을 공격하자 이에 당황한 알마리온은 이내 그들이 누군가에 의해 정신이 제압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네 사람과 함께 자신을 공격하는 두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수인족 그리고 드워프 또한 리처드 등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제압당한, 살아 있는 인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리처드를 중심으로 한 이들 여덟의 공격은 알마리온을 이내 큰 위기에 빠뜨렸다.
제리코는 간악하게도 리처드만을 따로 움직이게 하고 그 나머지는 각기 짝을 지어 주어 사방에서 알마리온을 공격게 하였는데, 알마리온과 친분이 두터운 한센과 요들 그리고 칸을 앞세우고 그 뒤에 이전부터 자신의 살아 있는 인형이 되었던 자들을 내세웠다.
이렇게 함으로써 알마리온이 제대로 공격도, 방어도 하지 못하게 되면 그 틈을 이용하여 리처드의 강력한 공격이 알마리온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저들은 더 이상 내가 알던 그들이 아니다.’
알마리온도 자신을 공격해 오는 리처드 등이 불과 몇 시간 전에도 자신과 함께 웃으며 식사를 하던 그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지금의 상황에 당황하여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던 알마리온은 자신이 궁지에 몰리자 더욱 침착해지고 냉정해졌다. 그리고 분노했다.
‘감히! 내 친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알마리온에게 있어서 이들 네 사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살아 있는 인형으로 만들어 버린 제리코에 대한 차가운 분노가 알마리온으로 하여금 그동안 꺼리던 주술사로서의 재능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들어 놓았다.
‘영혼의 계약을 파괴시켜야 해!’
영혼의 계약을 통해 제리코의 살아 있는 인형으로 변해 버린 이들을 되돌려놓기 위해서는 이들이 스스로 그러한 계약을 파기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저들부터 제압해야 해!’
하나 이를 위해서는 이들이 스스로 강한 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설사 이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영혼의 계약을 파기하지 못할 경우 이를 도와 영혼의 계약을 파기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하려면 별도의 의식을 행해야만 했다.
‘노임! 저들 모두를 그대의 품속에서 보호해 줘!’
-그러지.
순식간이었다. 알마리온의 부탁을 받은 노임에 의해 리처드 등, 제리코에 의해 그의 살아 있는 인형이 된 여덟 명 모두가 순식간에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바람의 칼날! 에어 밤!”
그와 동시에 제리코에게 처음으로 강력한 공격을 가했다. 하나 그의 이러한 공격은 제리코에게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주술사로서의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법사로서의 능력 또한 갖추고 있는 자. 알마리온의 공격이 날카롭고 위협적이긴 했지만 제리코를 위기에 빠지게 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렇단 말이지!”
한 번 공격에 실패했다고 해서 물러서거나 적에게 기회를 줄 정도로 어리석지도, 무르지도 않은 알마리온이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분노하고 있는 상황. 결코 제리코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은, 폭풍우처럼 계속된 그의 공격에 결국 제리코의 몸에 처음으로 가볍지 않은 상처가 생겨났다.
그런 그의 상처에서는 검은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이놈! 감히 내 몸에 상처를 내다니! 결코 용서치 않겠다!”
반격의 기회를 잡기 위해 제리코에게서 마법 아이템을 이용한 강력한 마법 공격이 연속해서 가해졌다. 아울러 알마리온이 가장 막기 어려워하던 모습을 보인 번개를 다시금 만들어 냈다. 그리고 곧이어 제리코의 결정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어둠의 주재자인 나 헤리 제리코가 명하노니, 신의 품에 안겨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도는 모든 원혼들이여! 그대들에게 영혼 가득 쌓인 원한을 풀고 신의 품에 안겨 안식을 취할 기회를 주도록 하겠노라!”
주문이 끝나자 제리코의 몸에서 피어나기 시작하던 검은 연기 같은 것들이 하나로 뭉쳐 마치 작은 먹구름 같은 것을 만들어 냈다.
바로 안식을 얻지 못한 채, 주술의 힘에 의해 그의 육신에 빙의해 있던 죽은 자들의 영혼이었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수조차 셀 수 없었다.
“가라! 저기 너희를 이렇게 만든 저놈에게 너희 영혼 가득 쌓인 원한과 분노, 증오 들을 모두 풀고 영원한 안식의 땅으로 가라!”
단지 들리는 것만으로도 영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뭐라 표현할 수조차 없는 기괴한 소음들이 원한에 가득 찬 영혼들이 만들어 낸 구름에서 흘러나왔다.
“크윽! 그만! 그만!”
원한이 가득한 자들의 영혼이 만들어 낸 기괴한 소리. 그것은 바로 수조차 셀 수 없이 쌓인 영혼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만들어진 소음이었다.
빙의된 영혼들이 쏟아 내는 원한과 분노, 증오, 두려움, 애절함, 슬픔, 고통 등의 수많은 감정들이 일시에 쏟아지면서 알마리온의 영혼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빠르게 붕괴되어 갔다.
만약 이때 그의 목에 걸려 있던 선택받은 자의 신물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작동하지 않았다면 알마리온은 영혼이 붕괴된 채 단지 살아 숨만 쉬는 인형이 되어 버렸을 운명이었다.
푸른하늘로부터 선택받은 자의 신물을 전해 받았을 당시만 하더라도 신물의 한가운데 양각되어 있던 오딘의 눈은 뜨여 있는 상태였다.
이것이 알마리온에게 그것이 전해진 후 어느 순간부터 오딘의 눈은 감겨 있었는데, 이는 알마리온이 주술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그런 것이 신물을 전해 받은 자인 알마리온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하면서 그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감겼던 오딘의 눈이 살짝 뜨이면서 빠르게 붕괴되어 가고 있는 알마리온에게 한숨 돌릴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순간적으로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정도의 여유만을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짧은 단 한순간의 여유가 알마리온으로 하여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불쌍한 영혼들.’
자신에게 빙의된 원혼들이 한없이 가여워진 알마리온이었다. 자신에게 빙의된 원혼들 또한 사정은 제각각이지만 결국 세상에 한을 품은 불쌍한 영혼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들의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나 하나쯤 이들과 동행을 하는 것도 이들에게 나쁘지는 않겠지. 그리고 이들을 이렇게 만든, 내 친인들을 그렇게 만든 네놈 또한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삶에 대한 욕구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 그가 떠올린 마지막 한 수는 주술사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수법이었다.
“나 이제 이렇게 스스로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리니 어둠 속을 헤매는 나약한 이들이, 그 빛으로 인하여 어둠의 미망을 뚫고 밝음의 세상에 안주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리라!”
주술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주술이자 최후의 주술인 희생의 주술이 알마리온에게서 펼쳐진 것이다.
“뭐, 뭐야! 설마?”
알마리온의 몸을 감싼 먹구름처럼 보이는 원혼들이 차츰차츰 떠오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리코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단지 주술사로서의 재능만 있었던 것이 아니란 말인가?”
주술사로서의 재능만 있는 줄 알았던 알마리온이 단지 재능만이 아닌, 주술사로서의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것도 백주술의 최고봉인 자기희생의 주술을 사용하리라고 예상치 못했던 제리코는 황급히 알마리온의 주술을 방해하는 한편, 자신 또한 자기희생의 주술에 휩쓸리는 것을 막기 위해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빛이 어둠에 쌓인 세상을 밝히는 유일한 빛이 되듯, 원혼들로 이루어진 먹구름 사이를 뚫고 알마리온이 스스로를 희생시켜 만든 강렬하고도 성스러운 빛이 어둠으로 가득 찬 세상을 밝게 빛냈다.
-아, 안 돼! 난 아직 내 원한을…….
-나도! 나도 아직 내 원한을 풀지 못했어! 제발 내게 원한을 풀 수 있는 기회를 달란 말이야! 제발!
-저주하겠다! 원한을 풀 기회조차 빼앗은 널 저주하겠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영면에 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저마다 원망과 저주 그리고 고마움을 표하며 알마리온이 만든 희생의 빛에 의해 영원히 소멸되어 갔다.
“이, 이런! 아, 안 돼! 안 돼!”
희생의 주술은 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최고, 최후의 주술.
달리 표현하면 주술사가 가진 모든 드러난 힘과 잠재력까지 모두 태워 버리는 주술이 바로 희생의 주술.
중급 정령술사로서의 알마리온의 힘과 잠재력만이라면 원혼들을 소멸시키는 정도라면 몰라도, 알마리온이 희생의 주술을 펼치는 것을 사전에 감지하고 이를 막기 위해 나선 제리코를 위험에 빠뜨릴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하나 알마리온에게 깃든 힘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정령의 고향이라는 마법 물품 속에 깃들어 있는 최상급 정령들인 셀레아나, 엘레스트라, 실레스틴, 그리고 노에아넨의 힘과, 선택받은 자를 위한 신물 안에 깃들어 있는 역대 메코이족의 제사장이자 대족장들의 주술력은 물론, 신물 그 자체의 재료가 된 영혼석靈魂石에 깃든 힘까지 있었다.
원혼들은 물론 상급의 주술사인 제리코마저도, 아니 심지어는 제리코가 알마리온을 잡기 위해 어둠의 기운이 강력한 곳에다 미리 설치해 놓았던 흑주술을 위한 주술을 위한 진은 물론 대지에 깃든 어둠의 힘까지 단번에 깨져 버리거나 정화되어 버릴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안 돼! 으, 으악!”
알마리온이 스스로의 몸을 태우며 만들어진 빛이 온 세상을 밝게 비추자 그 빛에 닿은 모든 삿된 것들이 단번에 스러져 갔다.
“으악!”
어둠의 주술사인 제리코의 몸이 빛에 닿으면서 그대로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이대로!’
상극인 희생의 주술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그동안 쌓아 온 모든 것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제리코는 일단 정화의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피신한 후, 이제는 형체조차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녹아내린 육신에서 자신의 영혼을 분리시켰다.
그리고 이때쯤 짙게 드리워진 어둠을 뚫고 세상을 밝게 비추던 빛이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어느 한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허공에 떠 있던 알마리온의 몸도 그대로 대지에 떨어졌다.
털썩!
“…….”
빛이 사라지자 다시금 짙은 어둠이 주변에 가득했다. 그리고 아침이 될 때까지 알마리온의 몸은 쓰러질 때 그 모습 그대로 그렇게 대지 위에 버려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쉽군. 네놈이 희생의 주술을 사용하는 바람에 날 이렇게 만든 네놈에게 복수를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알마리온의 내동댕이쳐진 육신을 원한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제리코의 영혼이었다.
잠시 그렇게 원한 가득한 눈빛으로 알마리온의 주검을 바라보던 제리코의 영혼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육신이 철저하게 망가진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영혼을 분리시킨 제리코에게는 아직도 완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바로 자신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그릇, 새로운 육체가 필요했다.
‘젠장!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 짓을 해야 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내동댕이쳐진 알마리온의 주검을 원한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바라본 제리코의 영혼이 자신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찾기 위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