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알마리온
“그게 무슨 소린가? 조카가 귀국을 한 것이 언제인데 이제 와서 조카를 찾는단 말인가?”
베르그 대공 가문에서 온 자가 떠난 지 한참이나 된 하인리히를 이곳에서 찾자 프리모는 영문을 몰랐다.
“도련님이 분명 제국으로 귀환을 한 것이 맞습니까?”
“허! 이보게! 그랬으니 제국의 군대가 지금 전장에 나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긴 제국군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마법 아이템에 대한 모든 것을 얻은 이후에 하게끔 사전에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니 그것만 보면 분명 하인리히가 이곳에서의 일을 마치고 귀환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으음…….”
“무슨 일인가? 혹시 조카가 아직 귀환하지 않은 것인가?”
“예. 그렇습니다, 공작 전하.”
“그 무슨? 지금쯤이면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거늘? 혹시?”
혹시라도 게르혼족에게 당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프리모였다.
로엔에서는 떠났는데 제국에는 도착하지 않았다면 의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것 하나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그분을 호송하기 위해 충분한 병력을 배치하였습니다.”
“세상에 충분한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군. 게다가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베르그 공작 가문은 게르혼족에게는 특별히 더 악감정이 많은 곳. 그런 베르그 공작 가문의 후계자가 움직였다면 게르혼족들의 눈이 벌겋게 변할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상당히 직설적인 말이었지만, 아직도 베르그 공작가에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때문에 일부러 이렇게 직설적으로 표현을 한 것이었다.
“하나 출발 때부터…….”
“신분을 속였다?”
“그렇습니다.”
“자네 같으면 충분하다 생각되는 경호를 받고 있는 인물이 이동하면 그 무리를 가만 두겠나?”
“으음…….”
“일단 내 쪽에서도 사람을 풀어 게르혼족들이 혹시라도 무슨 일을 벌인 것이 아닌지 알아보겠네. 하니 형님께 말씀을 드려 그쪽에서도 게르혼족을 보다 철저하게 파 보라고 하게. 알겠나?”
“예, 공작 전하. 하오면 소관은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베르그 공작 가문에서 온 자가 돌아간 후 프리모는 사태가 어떻게 된 일인지 곰곰이 따져 보기 시작했다.
‘우연치고는 너무 기가 막힌 우연이군.’
처음에는 혹시 우연히 조카 일행이 게르혼족과 우발적으로 충돌을 하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하나 이내 그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어지간한 게르혼 부족 전체와 전쟁을 벌여도 충분할 전력이라고 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조카의 안전만을 고려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카를 탈출시켰을 것이다. 그런데도 돌아오지 못했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피하고자 했다면 아무리 많은 적을 만나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흔적조차 찾지 못하게 사라졌다면 그것은 바로…….
“누군가에 의해서 흔적까지 지워진 것이겠지. 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가인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과연 이 세상에 어느 누가 1천의 병사와 세 명의 익스퍼트가 포함된 쉰 명의 기사들, 그리고 그 본인 또한 4서클 마법사임에도 불구하고 흔적조차 남지 않게 처리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설마 국왕이?”
심증으로 가장 가능성 있는 자는 바로 국왕인 메르타니온이었다.
마법 아이템을 입수하고, 그 제작 능력까지 갖춘 드워프를 손에 넣게 되면서 한껏 분홍빛 미래를 꿈꾸던 국왕이 자신이 벌인 일로 인해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으니 복수를 하고 싶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나 결정적으로 메르타니온이 그랬을 가능성을 거의 없애 주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니, 아니야. 국왕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어.”
프리모가 알기로 국왕은 힘이 없었다.
국왕의 모든 힘은 그가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이처럼 단언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결론은…….”
모든 가능성을 상정하고 하나씩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해 보아도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게르혼족들에게 당했다는 것이다.
“후! 포넬과의 전쟁이 끝나면 아무래도 제국의 등쌀에 힘들어지겠군.”
제국의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는 베르그 대공이었다. 그런 베르그 대공의 장자인 하인리히가 게르혼족의 영역 안에서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면 그다음 일은 불을 보듯 분명한 일이었다.
하인리히가 로엔을 다녀간 후 게르혼족의 영역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지만 제국에서는 그 책임을 분명 로엔에 추궁하려고 할 것이고, 그렇다면 로엔 또한 이러한 제국의 추궁을 피하기 위해 게르혼족들에 대한 공략을 단독적으로, 혹은 제국과 함께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골치군, 골치야. 전란이 복구되기도 전에 또 다른 전란에 빠져야 하니 말이야.”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벌써 몇 번째입니까? 마지막 순간에 가서 이런저런 핑계로 군을 물린 때문에 우리만 적의 반격에 당한 것이 어디 한두 번입니까? 이대로는 안 됩니다! 이대로는!”
1군단장인 바우너 자작에 이어 11군단장인 에반 자작까지 제국군의 행태를 비난하고 나섰다.
다만 신중한 성격인 4군단장 바론 자작만이 이렇다 저렇다 아무 말 없이 동료들의 이야기만 눈을 감은 채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만들 하게.”
더글러스 또한 제국군만 생각하면 속이 타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제국군만으로 구성된 제1군과 더글러스 후작이 지휘하고 있는 제3군은 더글러스 후작 영지에 집중된 포넬군을 상대로 벌써 두 달째 지루한 공방만을 주고받고 있을 뿐, 이렇다 할 성과가 전혀 없었다.
이처럼 1군과 3군이 정체를 보이면서 덩달아 2군, 4군, 5군도 진격을 멈춰야만 했는데, 물론 전적으로 1군과 3군의 정체가 다른 곳에서의 정체를 불러온 것은 아니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바로 1, 3군의 정체였고, 그중에서도 1군단의 무능력함은 지금 상황에서 가장 뼈아픈 부분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그래도…….”
“아국을 도우러 왔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후작 각하, 이렇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어떻게 말인가?”
지금까지 조용히 듣기만 하고 있던 4군단장인 바론 자작이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예 1군을 배제한 채 움직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군을 배제하자고?”
“그렇습니다.”
이미 전부터 그런 말들이 있던 의견이었다. 하나 3군의 3개 군단 병력, 아니 이제는 2개 군단이 조금 넘는 병력만으로 험준한 산에 웅거하고 있는 4개 군단인 적군을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다른 곳의 도움을 조금 받는다면 이곳의 적을 돌파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다른 곳의 도움을 받는다? 바론 자작이 염두에 두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지금으로써는 근위군단이라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그곳은 안 되네.”
바론의 말에 일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단번에 거절하는 더글러스였다.
다른 곳은 몰라도 로엔달이 사령관으로 있는 근위군의 도움을 받는 것은 자존심상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글러스 후작과 로엔달 백작은 왕국 내에서도 모두가 인정하는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더글러스 후작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로엔 왕국 최고의 검사이지만 로엔달도 그에 못지않은 검사라는 것을 또한 다들 알고 있었다.
하나 이러한 세간의 평가는 실상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서로 대결을 하여 우열을 가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더글러스는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로엔달이 자신보다 더 높은 수준에 올라 있다는 것을.
중급 익스퍼트인 더글러스였지만, 상급 정령술사인 로엔달에게는 확실히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로엔달은 최근 승승장구하여 백작으로 승작함과 동시에 너른 영지까지 봉지 받아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지 모를 상대였다.
한데 그런 로엔달의 도움을 받으라고? 천만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외부의 도움은 절실합니다.”
다들 같은 생각들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제국군만 믿고 있다가는 이 전쟁을 끝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흠…….”
고민이 되는 더글러스였다.
그 또한 지금 상황에서 외부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막상 도움을 청할 곳을 찾아보면 마땅한 곳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말해 보게, 에반 자작.”
“2군에 지원을 요청하면 어떻겠습니까?”
“2군에?”
“그렇습니다. 그곳이라면 산맥 너머가 바로 적의 후방이니 효과적인 공략도 가능할 것입니다.”
“흠…….”
썩 마음에 내키는 제안은 아니었지만, 이 상태로 제국군만 믿고 있다가는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는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결국 에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적군이 지원군을 곧 요청할 것이라 이것인가?”
“크크. 그렇습니다, 주군.”
마치 까마귀가 울어 대는 듯 탁하면서도 묘한 떨림이 계속되는 것이 듣는 이로 하여금 상당히 귀에 거슬리게 만드는 목소리를 지닌 제리코였다.
아니, 비단 목소리뿐만 아니라 알비노인 때문에 피부는 물론 몸의 털이란 털이 모두 눈처럼 하얀 백색이었다.
이것만으로도 보는 이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하거늘, 결정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볼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의 동공 없는 검은 눈동자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어야 하는 동공임에도 불구하고 제리코는 동공이 없었다. 아니, 실제로는 존재하지만 그의 동공 색은 눈동자의 색과 동일한 검은색이라 구분하기 힘들어 마치 동공이 없어 보였다. 이는 그가 특이한 마법을 수련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마법에는 여러 유파가 존재한다. 그중에는 마법이라고 하기보다는 주술에 가까운 마법, 때문에 마법사들은 이를 따로 원형 마법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흑마법 중 소환 마법이라고 하는 특별한 마법을 수련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지원의 규모는?”
마치 제리코가 2군 지휘관 회의에 참석이라도 하고 온 것에 대한 보고라도 받는 듯 당연하다는 듯이 묻는 안하임이었다.
“적 2군의 제1의용군이라는 부대만을 요청한다고 하였습니다.”
“2군의 제1의용군?”
처음에는 제1의용군에 대해 언뜻 떠오르는 것이 없던 안하임이었지만 이내 제리코가 말하는 제1의용군이 어떤 부대인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 4군과 7군을 패퇴시키고 카즈모 백작의 네 페니테를 가지고 있는 그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남작이라는 자가 지휘하는 바로 그 부대로군!”
“…….”
적의 부대가 어떤 부대인지, 적장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했고, 알 필요도 없는 제리코였기에 그러한 것은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하나 안하임은 걱정이 컸다. 제1의용군과 그 제1의용군을 지휘하고 있는 알마리온에 대한 소문은 이미 포넬의 지휘관은 물론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열여덟 살의 나이로 익스퍼트에 오른 것도 모자라, 지휘관으로서의 능력까지도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지휘관들 사이에 퍼진 그에 대한 소문은 폰티악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존재라는 인식이 강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런 알마리온이 지휘하는 제1의용군이 지원을 나온다면 분명 어려운 전투가 될 것이 분명해지기에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는 현 상황이 더욱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걱정이군.”
“…….”
한데 안하임의 걱정이 커지면 커질수록 제리코의 입가에 어린 기이한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왜 웃는 것이지?”
제리코의 입가에 걸린 기묘한 웃음에 기분이 나빠진 안하임이 퉁명스레 말했다.
“주군의 다음 말씀이 무엇인지 아니까요. 크크크.”
“훗! 하긴 너라면 내 속을 거울 들여다보듯 들여다보겠지.”
“크크크!”
일반적인 주종 관계라면 이런 제리코의 행동은 분명 주군으로부터 크게 문책을 당할 행동이긴 해도 이 두 사람은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놈을 제거하게.”
“하면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그를 네놈의 장난감으로 주지.”
“크크크. 그자를 죽이면 어차피 그는 제 장난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다른 것을 주셔야겠습니다. 크크크크.”
“그건 안 돼!”
제리코가 전부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안하임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크크. 그러지요. 아직은 때가 덜 되기도 하였고, 또한 그자의 목이 그토록 대단한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크크크. 하지만 언젠가 제 부탁을 들어주셔야 할 것입니다, 주군.”
“…….”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냉기만이 흘렀다.
“하면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크크크. 크크.”
“내 생각에는 혼테르 남작의 제1의용군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는군요.”
국왕으로부터 내려온 명령서를 읽은 막스밀리언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소관의 판단으로도 제1의용군이 가장 적당할 것 같습니다, 전하.”
나르담 또한 막스밀리언의 생각에 동조하였다. 제2군 소속 병력 중 제1의용군이 산악전에서 가장 적합한 형태의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제1의용군을 빼고도 현 상황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적은 더 이상 공세를 취할 상황이 아닙니다, 전하.”
“하긴 그동안의 적의 움직임을 보면 그럴 것도 같군요. 하면 내가 혼테르 남작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도록 하지요.”
“예, 전하.”
최근 막스밀리언 왕자가 알마리온과 리처드와 함께 자주 어울리는 모습은 이미 2군 전체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우려스러운 비판을 하지만 나르담은 막스밀리언과 알마리온 등의 이러한 친분을 기분 좋게 바라보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한달음에 알마리온에게 달려간 막스밀리언은 제1의용군의 지원을 요청한 더글러스의 서신에 대한 이야기를 알마리온과 리처드에게 해 주었다.
“네가 그들을 도와 적군을 패퇴시키면 또 한 번 큰 공을 세우게 될 것이야.”
“쳇! 그렇게 눈이 띄게 밀어주면 남들이 오해하지 않겠나?”
리처드와는 나이가 같기에 서로 친구를 하기로 한 막스밀리언과 리처드였다.
“오해하라지. 그리고 이런 말을 내가 직접 하긴 뭐하지만 내가 밀어준다 해서 아버님께서 그걸 곧이곧대로 들어주실 것 같은가?”
같은 아들이라 해도, 장자이자 다음 대의 국왕이 될 형과 자신은 입장이 너무나도 달랐다.
자신이 다음 대의 국왕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그리고 형과의 경쟁 같은 것은 아예 원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가끔은 아버지인 메르타니온이 자신의 말을 좀 더 신중히 받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한데 네 표정이 왜 그래?”
“그러고 보니 표정이 좋지 않네?”
막스밀리언으로부터 2군의 지원 요청을 받았고, 나르담과의 협의 결과 자신의 제1의용군이 지원군으로 뽑혔다는 말을 들을 때부터 느낌이 좋지 않은 알마리온이었다.
“아닙니다.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랬습니다.”
“너 벌써부터 작전을 구상하고 있는 것이냐? 하긴 그러니까 네가 승승장구를 하는 것이겠지.”
“그러니까 재미없는 놈이지.”
매사에 진지하고 생각이 많은 알마리온의 모습이 때론 질리게 느껴질 때가 많은 리처드였다.
“너 그러다 공주님으로부터 버림 받는다. 자고로 레이드들은 나처럼 잘…… 쳇! 잘생긴 것은 아무래도 말할 수 없겠군. 어쨌든 나처럼 재미있고 춤 잘 추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냐?”
“흠……. 리처드 너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솔직히 알처럼 생기면 그 나머지야 뭐, 모두 용서되지 않겠어?”
“그런가?”
막스밀리언과 리처드가 실없는 농담을 하자 알마리온도 결국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의 마음은 이번 출정에 자신의 신변에 중대한 위기가 닥칠 것이라는 예감을 지워 버리진 못하였다.
-그대 꿈꾸는 자여, 이제 나의 부름에 응답하라.
“으음…….”
-일어나라. 일어나 나에게로 오라.
“……!”
잠들어 있던 알마리온은 꿈속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릿속에 들려오는 음산한 목소리는 계속하여 들려왔다.
-나에게 오라. 그대는 나의 마리오네트marionette. 나의 부름을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
잠에서 깬 알마리온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저주의 소환 주술. 살아 있는 사람의 꿈에 나타나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이런 극악한 주술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니!’
흑마법 중에 인큐버스나 서큐버스라는 마법이 있다. 둘 다 꿈을 이용한 마법으로 인간의 정기를 고갈시키는 마법으로 정신력이 시전자보다 강하지 못할 경우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당할 수밖에 없는 극악한 마법이었다.
마법의 원형인 주술에도 이와 비슷한 주술이 있는데 바로 저주의 소환 주술이었다.
소환이라는 것은 비단 죽은 자의 영혼, 즉 악령이나 마계의 마물이나 마족 들만을 소환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처럼 살아 있는 사람을 상대로 그 사람의 영혼을 조종하는 주술 또한 소환 주술의 한 부류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해악을 끼치는 어둠의 주술사가 아직도 존재하다니.’
주술에도 흑백이 존재하였다. 세상에 이로움을 주는 백주술과,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흑주술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정도로 강력한 주술력이라면…….’
마물이나 마족을 소환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소환자의 능력에 따라 어떤 마물이나 마족을 소환할 수 있는지가 결정되었지만 그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 살아 있는 사람의 영혼을 조종하는 것은 마법으로 이야기하자면 4서클 마스터의 흑마법사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푸른하늘 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의 신물을 전해 받은 나까지도 순간 영혼이 흔들릴 정도라면…….’
푸른하늘로부터 메코이족의 대족장의 신물인 선택받은 자의 신물을 전해 받은 알마리온은 그 안에 깃든 주술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안에 깃든 힘은 그 끝도, 깊이도 알 수 없을 정도의 것. 이제 겨우 몇 달을 가지고 있은 것으로는 그 안에 깃든 힘의 일부, 아니 터럭만큼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상태이지만 솔직히 지금의 알마리온의 능력으로는 자신의 영혼을 조종하려 드는 정체불명의 흑주술사의 주술령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하나 알마리온이 말한 것은 그 안에 깃든 힘이 아니었다. 선택받은 자의 신물 그 자체가 어둠의 기운을 물리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에 흑주술에 완전히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라면 가 주지. 어차피 그대가 만든 주술의 그물에 걸린 나로서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니.’
상대는 대단한 주술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두철미한 성격까지 가지고 있는 자가 분명했다.
만약에라도 자신이 소환 주술에 걸려들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광범위한 지역에 주술력을 이용하여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까지 쳐 놓음으로써 결국은 빠져나갈 모든 길을 차단해 놓는 치밀함까지도 보였던 것이다.
‘이 정도의 주술력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죽음 그리고 원한이 쌓인 영혼들을 끌어들였단 말인가?’
주술이란 결국 특별한 힘을 쌓기 위해,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힘을 끌어들여야 했다.
주술사의 가장 큰 특징인 접신이라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의 것으로 특정한 기운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영을 몸으로 받아들여 그러한 영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끌어내기 위해 꿈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조종하려 드는 자의 능력으로 보아 알마리온은 그가 지금과 같은 강력한 주술의 힘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죽음 그리고 원한이 쌓인 영혼을 몸으로 받아들였을까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느껴졌다.
‘저런 자가 이런 전장에 나온 것도 억울한 죽음을 당한 병사들의 영혼을 끌어들이기 위해서겠지.’
전장에 나온 병사들치고 억울하게 죽지 않은 자가 어디 있을까.
2년이 지나 3년째 접어들고 있는 이번 전쟁에서 죽은 자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단지 추정하기로만 최소 30만은 죽었을 것이라는 말들이 있을 뿐.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피와 죽음 그리고 억울한 영혼들 중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신의 품으로 돌아가 안식을 취하지 못한 채 악의 힘으로 변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알마리온은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편안히 쉬어야 할 영혼들이 그대에 의해 또다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만으로도 그대를 용서할 수 없소.”
작심을 한 알마리온은 필립으로부터 빼앗은 마법 물품인 로브, 아니 셔츠에서 네 페니테를 꺼내 착용하였다.
그가 카즈모의 네 페니테를 손에 넣은 후 그것을 착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알마리온은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이다.
그렇게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며 소환 주술을 사용하는 자의 부름에 따라 알마리온이 간 곳은 부대가 숙영하고 있는 곳에서 몇 개의 산봉우리를 넘은, 인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러한 곳이었다.
“크크크. 그대가 내 주술에 완전히 걸리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가뜩이나 달도 없어 어두운 음산한 분위기에 제리코의 기분 나쁜 탁한 음성에 저도 모르게 살짝 눈가가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구태여 연극을 할 필요가 없겠군요.”
“크크크. 세상이 그대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못 알고 있군. 익스퍼트라 알려진 그대가 실상은 정령술사라?”
주술사로서의 능력이 뛰어난 제리코는 알마리온이 정령술사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다.
정령이라는 것 또한 결국 크게 보면 주술의 한 영역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냄새가 나는군. 그대에게서 냄새가 나.”
“…….”
코까지 킁킁거리는 것이 마치 진짜로 알마리온에게서 무슨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처럼 냄새를 맡는 제리코였다.
“크크크.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대에게서 나는 그 향기! 나의 피를 더욱 들끓게 만드는 그 향기! 뜻밖의 대어를 낚게 되었구나. 크하하하하!”
어둠의 주술을 익힌 제리코는 알마리온을 보자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었다.
알마리온이 자신과는 영원한 숙적인 밝음의 주술을 익혔거나 아니면 그러한 자질을 가지고 있음을.
“네놈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 그러면 난 더욱 강한 어둠의 힘을 얻게 될 것이니 말이다!”
동공 없는 제리코의 검은 눈동자가 더욱 커지며 그곳을 통해 어둠의 빛이 줄기줄기 쏟아졌다.
최근 제리코의 성장은 크게 둔화되어 있었다. 지나치게 한쪽의 힘만을 쌓으면서 그만 심각한 불균형 상태에 놓인 것이었다.
어둠의 주술이나 밝음의 주술, 마법이나 정령 마법이나 공통적인 한 가지 특징은 어느 한쪽의 힘만을 받아들이면 일정 수준까지는 성장할 수 있어도 그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이를 뛰어넘어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상반되는 힘을 통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올곧게 한 가지의 힘만으로 성장을 하는 것이다.
성장을 위해 상반되는 힘이 필요한 것은, 그 상반된 힘을 통해 자신이 쌓아 온 것들을 끊임없이 순화시키고 또한 단련시켜 최종적으로는 정화된 순수한 힘을 쌓아 더 높은 수준 그리고 강력한 힘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으로 더 높은 수준과 강력한 힘을 얻는 방법이고, 길이었다.
이에 반해 올곧이 한 가지의 힘만으로 성장을 하는 방법도 있는데 실상 이것은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행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대표적인 자들이 바로 신관들이었고, 하이엘프라는 엘프들의 로드가 바로 그러한 존재였다.
하이엘프나 신관은 모두 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들로서 이들은 올곧은 하나의 힘만을 끝없는 수련을 통해 쌓아 더 높은 경지와 힘을 얻는 존재들이었다.
“크크크! 안 그래도 그동안 쌓은 내 힘을 정화시켜 줄 정화의 제물이 필요했는데 잘되었어! 이제 더 이상 주군께 구걸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야. 크크크크크!”
제리코가 주군인 안하임에 내어 달라고 한 것. 그것은 바로 안하임의 내연녀인 릴리라는 여인이었다.
본인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안하임의 내연녀인 릴리는 강한 주술사로서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여인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제리코는 릴리의 피와 영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심각하게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자신의 힘을 정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하나 비록 혼인을 할 수는 없어도 릴리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안하임은 자신의 수하인 제리코의 청을 당연히 거절해 오고 있었다.
제리코 또한 당분간 다른 방법으로 균형이 깨져 가는 자신의 힘을 다스릴 수 있기에 주군인 안하임이 릴리라는 어린 계집에게 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주군은 얼마 후에는 이내 또 다른 여인을 찾아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릴리라는 여인 또한 과거의 그의 여인들처럼 철저하게 버려질 것을 알기에.
한데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알마리온이란 존재에 깃들어 있는 재능이라면 충분히 균형을 되찾을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크크크! 역시 로엔으로 오길 잘했군!”
지금까지 찾았던 제물인 주군의 연인인 릴리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순화된 밝음의 기운이 느껴지는 알마리온이란 존재를 만나게 된 제리코는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