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정령술사 알마리온 (18/70)

정령술사 알마리온

“미리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말인가?”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전 익스퍼트가 아닌, 정령술사입니다.”

“정령술사?”

“그렇습니다.”

알마리온이 스스로를 정령술사라고 밝힌 것에 리처드는 적이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왕궁에 갇혀 살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독서와 검술. 때문에 그의 지식의 폭은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정령술사라는 것을 어떻게 숨겼지? 마법사들은 금방 알아본다고 하던데.”

“운이 좋아 한 분의 도움으로 그럴 수 있었습니다.”

“하면 지금도?”

“그렇습니다.”

마법사의 눈을 어떻게 속일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묻는다 해서 가르쳐 주지 않을 것 같아 아예 묻지도 않았다.

대신 전설로만 전해져 오고 있는 정령술사의 진정한 위력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생겨나기 시작한 리처드였다.

기실 알마리온 또한 흥분되긴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앞에서 이렇게 자신이 정령술사라는 것을 당당히 밝히고 결투를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묘한 흥분과 기대가 커졌던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한다? 난 검의 길을 걷는 검사인데?”

“각자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하하하! 하하! 하하하! 좋아! 역시 내가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군그래.”

“……!”

과장된 몸집과 행동을 하는 리처드나 그런 그를 묵묵히 바라보는 알마리온이나 내심 잔뜩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그러지요.”

챙!

“나 운명을 시험하려는 자, 리처드 레오폴트가 그대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나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그대 리처드 레오폴트의 결투 신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챙!

살짝 검을 한번 부딪치는 것으로 서로 정정당당하게 결투에 임하겠다는 맹세를 대신한 두 사람은 거리를 두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실라페.’

“호! 정령을 소환한 것인가?”

알마리온이 바람의 중급 정령인 실라페를 소환하자 그 존재감을 느낀 리처드가 호기심에 물었다. 여느 때 같으면 정령의 고향의 작용으로 인해 정령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마법 물품의 작용을 멈추었기에 정령의 존재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렇습니다.”

“대단한 중압감이군.”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는 정령의 존재감에 오히려 투지가 들끓기 시작했다.

‘바람의 칼날.’

피융!

“웃!”

팡!

피융! 핑! 핑!

팡! 파팡! 파앙!

선공을 취하였지만 알마리온의 공격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공격에 적응할 수 있는 수준의 가벼운 것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익숙해진 것 같군.”

정령이라는 것을 처음 접해 본 자신을 위해 배려를 해 주는 알마리온의 행동이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검의 길을 걷는 자신을 얕잡아 본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였는지 나오는 말투가 곱지 않았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댄 언제나 그런 식인가?”

짜증이 가득 담긴 말투였다.

결투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것 자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기분 나빠하자 또다시 사과를 하는 행동 같은 것은 자신을 적수로 생각하기보다는 한 수 가르쳐야 하는 정도의 하수로 보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

자신의 의도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변명 같은 것을 해 봤자 오히려 오해만 더 커질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지만 이미 마음을 크게 상한 리처드에게는 그런 행동마저도 고깝게 받아들여졌다.

“하하! 좋아. 그럼 그대가 얼마나 대단한지 두고 보도록 하지!”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리처드의 마음에는 맺힌 것이 많았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생활을 하였을 뿐 아니라, 큰형님이 자살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으며, 자신을 위해 어머니가 희생될 것임을 알면서도 단 하루라도 자유를 느끼며 살고 싶다는 마음에 새장을 벗어난 그였다.

그만큼 그의 마음속에는 응어리진 것이 많았다. 그런 그에게 이런 식의 어설픈 호의 같은 것이나 사과 같은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포넬의 기사들은 치열한 삶과 죽음의 전장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로 이런 식의 호의라는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닌 모욕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폭풍과도 같이 거친 리처드의 공격이 시작되자 알마리온은 자신의 어설픈 호의가 오히려 상대를 분노케 만들었음에 당황하였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상대의 거친 공격을 받아 내기 시작했다.

실프를 이용해 몸을 가볍게 하여 공격을 피하거나 바람의 칼날이라는 정령 마법을 이용하여 폭풍처럼 몰아치는 리처드의 거친 공세를 차단하는 그의 모습은 이전에 비하면 상당히 안정돼 보였으며, 아울러 동작이나 기술을 사용하는 모습이 이전보다는 확실히 간결해져 있었다.

“끝까지 날 우롱할 셈인가!”

반격을 하지 않은 채 피하거나 막기만 하는 알마리온의 행동에 더욱 화를 내며 공격의 강도를 높이는 리처드였다.

“우웃!”

공격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알마리온의 움직임 또한 더욱 민첩해졌다.

하나 리처드의 말처럼 언제까지 피하고 막기만 할 수는 없는 일. 알마리온 또한 본격적으로 공격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4대 정령 모두와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알마리온이었지만, 그중 가장 높은 친화력을 지닌 정령은 바로 바람의 정령이었다.

이미 정령을 받아들이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에서 리처드라는 또 다른 강자와의 대결은 정령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그만의 또 다른 정령 마법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깡! 까강! 챙! 치익! 챙!

‘대단해! 정말 대단해!’

이 결투가 비단 알마리온에게만 전기를 마련해 준 것만은 아니었다. 상대인 리처드 또한 그와의 결투를 통해서 그동안 쌓였던 모든 것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내면서 발전의 전기를 마련해 나갔다.

‘이렇게 신이 날 수가!’

예측하기 힘든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정령 마법이라는 것에 적응이 되지 않아 허둥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익스퍼트. 초인이라 불리는 사나이였다. 정령 마법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공방은 더욱 치열해졌고 그러한 과정에서 리처드는 처음으로 검의 길을 걷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그가 검을 든 것은 검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증오와 분노를 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었다.

하나 그것도 이내 또 다른 갈증이 되어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단지 이용물에 불과한 포넬의 왕실에서 태어난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 검에 매달렸다. 하나 신이 그에게 부여한 재능은 결국 그를 초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난 그런 신을 증오하였다!’

신은 자신에게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주었지만, 그것을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될 운명을 또한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증오심이 결국 나를 미치게 만들었지.’

그에게 있어서 넘치는 재능은 축복이 아니라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만 더해 주는 소금물과도 같았다. 결국 그는 갈증이 더해져 광기에 미쳐 가고 있었다.

‘어머니, 당신은 그런 저를 늘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셨지요.’

치미는 광기를 참지 못할 때마다 그는 해서는 안 될 행동들을 함으로써 자신의 광기를 풀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의 어머니, 마리 폰 브리스톨 여왕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범인이 자신임을 알고 있다는 듯이 안쓰럽게 자신을 바라보곤 하였다.

‘어쩌면 전 그런 당신 또한 저주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그래서 당신의 희생을 전제로 한 마지막 제안을 그렇게 선뜻 받아들였는지도…….’

깡! 까강! 파앙! 팡!

“우웃!”

알마리온의 날카로운 반격을 간신히 피하였지만 리처드의 왼쪽 뺨에는 제법 큰 상처가 생겨났다.

“좋아. 아주 좋아!”

무엇이 그리도 좋은 것인지 리처드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렸다.

한순간의 실수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리처드는 매순간 떠오르는 잡념들과 상념들로 인해 그 움직임이 정밀하지 못하였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움직임은 거칠었지만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위협적이었고, 그의 이러한 거친 공세에 알마리온 또한 수차례 위험한 순간을 맞이해야만 하였다.

‘그는 내게 경고를 하고 있다. 내가 더 이상 상념이나 잡념에 빠져 있으면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내게 검의 길을 걷는 자로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 주길 바라고 있어. 오직 검의 길을 걷는 자로서 내가 지닌 모든 것만을. 좋아. 그렇다면 보여 주지.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또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지를!’

흐트러졌던 마음을 가다듬자 리처드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달라지기 시작했다.

비록 갈증을 풀기 위해 들어섰던 검의 길이지만 그는 초인의 경지라는 익스퍼트에 들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

그동안 왕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여러 검술을 두루 섭렵하여 자신만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가 작심을 하고 검에 충실하기 시작하자 조금 전까지 위력적이었지만 거칠기만 하였던 것이 위력은 여전하면서도 더욱 정밀하게 변한 것이다.

‘이것도! 이것도! 이렇게도!’

그동안 수없이 머릿속으로만 그려 보았던 모든 것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 보았다.

모두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오늘 처음 만난 알마리온이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그려 보았던 검술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증오도, 분노도 그리고 갈증도 모두 받아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니 알 필요도 없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하였지만, 누군가 자신을 받아 줄 수 있다는 그것만이 지금 그에게는 중요했고, 또한 기쁘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23년 동안을 마음에 쌓아 놓기만 하였던 모든 것을 털어 내 버리면서 그토록 원했던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시작한 리처드의 검은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변했다.’

“우웃!”

팡!

“큭!”

리처드의 공격을 미처 다 피하지 못한 알마리온의 왼쪽 팔에 깊진 않지만 상처가 생겨났다.

‘훗! 이젠 완전히 나와의 대결을 즐기는군. 그렇다면!’

리처드의 검이 변하는 것을 통해서 그의 마음을 읽은 알마리온은 자신 또한 그와의 대결을 즐기기 위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 또한 정령술사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단 한 번도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해 본 일이 없었다. 하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러한 속박을 모두 벗어버릴 수가 있었기에 그 또한 처음으로 온전한 자유로움을 느끼면서 본연의 실력을 모두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쾅! 콰광! 팡! 파앙! 팡!

두 사람이 주고받는 공방으로 인해 대기가 터져 나갔으며 땅이 뒤집혔고, 주변의 수목들이 잘리거나 부러져 나가면서 주변을 폐허로 만들어 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두 사람은 느끼지 못했다. 또 자신들이 결투를 벌이고 있는 주변이 어떻게 변했는지조차 두 사람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 또한 처음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많이 변해 있었다.

그동안 주고받은 공방으로 인해 단정하게 묶어 두었던 머리칼은 이미 마구 흐트러진 것도 모자라 곳곳이 뭉텅이로 잘려 나가 있었다.

의복 또한 곳곳이 날카롭게 베여 있거나 불에 그슬려 있었고, 그곳을 통해 핏물이 배어 나오거나, 화상을 입은 상처가 나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쳐 이제 더 이상 손 하나 까딱거릴 힘이 없을 정도가 될 때까지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잠시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후욱! 후욱! 후욱!”

“헉! 헉! 헉!”

“후욱! 이제 결론을 내야겠지? 후욱! 훅!”

“헉! 헉!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허억! 헉!”

마지막 한 수로 결투를 마무리하기 위해 둘은 잠시 숨을 고르며 힘을 쥐어짜 냈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어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쾅! 콰광! 쾅!

“……!”

“…….”

순식간에 몇 차례의 공방이 이루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깊게 드리워졌다.

“졌네.”

패배를 인정하는 리처드였다.

머리 위까지 검을 치켜든 리처드였지만 알마리온의 검은 이미 그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정말 즐거운 대결이었습니다.”

겨누었던 검을 거둬들이며 뒤로 물러섰지만 여전히 그는 언제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하나 그의 얼굴에는 승리에 대한 기쁨과는 의미가 다른 미소가 살짝 어려 있었다.

“훗! 얼굴에 피까지 흘리면서 뭐가 좋아 웃는 거지?”

결투 도중 두 사람 모두 온몸에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는데 알마리온은 리처드의 검을 미처 제대로 피하지 못해 오른쪽 뺨에 제법 큰 상처가 났고, 그곳을 통해서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려 얼굴의 절반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 얼굴로 웃고 있으니 보는 쪽에서는 조금은 괴기해 보일 정도였다.

“하하, 이상해 보입니까?”

“당연하지. 날도 이렇게 어두워…… 음? 언제 이렇게 어두워졌지?”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으로 날이 어두워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자신들로 인해 주변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된 때문이다.

“아야야……. 자네 포션 좀 있음 줘 봐.”

그렇게 주변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부상 부위들이 한꺼번에 아파 오기 시작했는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마치 맡겨 놓은 포션을 달라는 식으로 손을 내미는 리처드였다.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리처드 곁에 마찬가지로 털썩 주저앉은 알마리온은 필립에게서 얻은 전리품인 로브의 안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내 건네주었다.

필립이 가지고 있던 로브는 과연 마법 물품답게 다른 형태의 옷으로도 변형이 가능했는데, 알마리온은 필립의 로브를 로브 형태가 아닌 옷 속에 입을 수 있는 셔츠로 변형시켜 늘 입고 다녔다.

“여기 있습니다. 그거 제법 비싼 것이니 너무 막 쓰지 마십시오.”

“어라? 자네도 농담이라는 것을 하나 보네?”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담담하고 정중함을 잃지 않던 알마리온이 격의 없는 행동과 농담을 해 오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기 좋지 않습니까?”

“하하. 나야 당연히 좋지.”

진심이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자신을 이렇게 편하게 대해 준 이가 없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대해 줄 수 있겠지?”

“어째 그 말은 계속 제 옆에 붙어 있을 것처럼 들리네요?”

“싫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묻는 리처드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웃는 알마리온이었다.

“하하, 좋죠. 어릴 때부터 형제가 없어 늘 형이 있었으면 했는데 말입니다.”

노예들도 가족이 있었다. 물론 없는 경우도 많았지만 로뎀 자작가의 노예들 중 가족이 없는 노예는 알마리온 혼자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힘들 때 서로 위로해 주고 아파해 주는 다른 노예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랬나? 난 말이야, 두 분의 형님과 두 분의 누님이 계신 막내였지. 해서 늘 말 잘 듣는 남동생이나 아니면 귀여운 여동생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지.”

“그래요? 그럼 전 어떻습니까?”

“자네? 글쎄……. 보아하니 말 잘 들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귀여운 여동생은 또 아니고…….”

“쳇! 큰맘 먹고 한 말인데 거절입니까?”

“하하, 거절은 무슨!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뭐, 그냥 귀여운 남동생이 생긴 것으로 하지. 하하하! 아이구, 아파라!”

해 놓고 보니 말 잘 듣는 남동생과 귀여운 여동생을 섞어서 귀여운 남동생이 생긴 것으로 하겠다는 자신의 말이 스스로도 재미있었는지 호탕하게 웃다가 상처가 더 벌어지면서 아파하는 리처드였다.

“벌 받는 겁니다. 동생을 놀린 대가로 말이지요. 주세요. 제가 해 드릴 테니.”

빼앗듯 포션이 든 병을 건네받은 알마리온이 리처드의 상처들에 꼼꼼히 포션을 발라 주기 시작했다.

“고마워.”

“…….”

“인마, 고맙다고!”

알마리온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상처를 치료하는 일에만 열중이자 빽 소리를 지르는 리처드였다.

“알이라고 부르세요.”

“알?”

“예. 저의 친한 이들은 절 그렇게 부릅니다.”

“그래? 그럼 난 뭐라고 부르라고 하지? 흠∼! 뭐, 적당한 것이 잘 안 떠오르네. 난 그냥 리처드라고 불러라.”

“뭐, 그 이름 얼마나 부를 일 있을까 싶네요, 형님.”

“형님? 아! 하하하. 맞아, 이제 형 동생 하기로 했지. 그래, 그냥 그렇게 형님이라고 부르면 되겠네.”

“그래요, 형님.”

“그리고 고맙다. 네 덕분에…….”

가슴에 켜켜이 쌓여 있는 증오와 분노 그리고 죄송함을 모두 털어 내릴 수 있게 해 준 알마리온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리처드였다.

“무슨 그런 말을 해요? 낯간지럽게.”

“그런데 어떻게 안 거냐?”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기에 알마리온도 이내 대답해 주었다.

“그냥 느껴졌어요.”

“느껴져? 너 혹시 내 사정을 알았던 것은 아니고?”

“오늘 처음 본 형님 사정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냥 날 척 보니 그냥 알게 되었다고? 정령술사는 모두 그러냐?”

“정령술사가 무슨 주술사인 줄 아십니까?”

“맞는 것 같던데? 아까도 보니까 너 계속해서 뭘 중얼거리던데?”

“그건 내가 알고 있는 마나 수련법이 좀 특이한 것이라 그런 것이고요.”

그는 지금도 자신이 수련하고 있는 마나 수련법이 주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카즈모와의 대결 중에 힘이 크게 부족해지자 혹시라도 마나 수련법을 함께 병행하면 부족한 힘이 더 생길까 싶어 했던 것이 효과를 보았기에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저도 모르게 마나 수련법으로 알고 있는 주문을 외우곤 하였다.

“이상하네. 어쨌든 고맙다, 아우야.”

확실히 정령술사인 알마리온의 모든 것이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하나 이내 더 이상의 궁금증은 접어 버렸다.

아무리 이제부터 형, 동생을 하기로 하였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그런 것을 캐묻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그랬다.

“음? 뭐? 이걸 마시라고? 몸속은 괜찮은 것 같은데?”

또 다른 포션 병을 꺼내 건네주는 알마리온을 보면서 내상은 입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사양하였다.

“아니, 형님, 누가 이걸 마시라고 했습니까? 저도 형님을 치료해 드렸으니 형님도 절 치료해 줘야 할 것 아닙니까?”

“아! 하하하! 그런 뜻이었어? 그럼 말로 하지.”

알마리온이 내민 포션 병을 받아 든 리처드도 꼼꼼한 손길로 알마리온의 몸 곳곳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얼굴은 계집애처럼 곱상한 녀석이 무슨 상처가 이리 많아?”

상처를 치료받기 위해 웃옷을 벗은 알마리온의 상체에 거의 빼곡하다 싶을 정도로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리처드였다.

로뎀 자작의 아들인 지크를 대신해 매 맞는 아이의 자리에서 쫓겨난 이후 가해진 지크의 괴롭힘과, 노예병이 되어 전장에서 입은 상처들, 그리고 필립과 카즈모를 상대하면서 입은 부상들로 인한 상처들이었다.

“그나마 곱상하던 얼굴마저 형님이 상처를 내 놨으니 이젠 어쩌시렵니까?”

“음? 하하하. 그거야 뭐……. 하하하.”

“하하, 됐어요. 뭐, 어차피 얼굴로 먹고사는 집시나 광대도 아닌데 아무렴 어때요.”

“맞아, 맞아. 사내 녀석이 얼굴만 곱상하면 뭐하겠어. 흠! 다시 보니 그 상처도 제법 잘 어울리는데?”

“예? 형님, 정말!”

“하하하. 그나저나 어디 가서 씻을 데가 없을까? 이거 온몸이 피와 땀으로 축축해져서 그런지 영 찜찜하네.”

“그거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죠. 운디네.”

“정령을 소환한 것인가?”

실라페를 소환했을 때와는 달리 거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무엇인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예. 운디네, 형님과 날 깨끗이 씻겨 주겠어?”

-…….

운디네의 귀여운 얼굴에 활짝 웃음이 어리더니 이내 두 사람의 몸을 깨끗이 씻겨 주고는 남은 물기를 단번에 없애 주는 운디네였다.

“오호! 이거 정말 대단한데?”

보면 볼수록 신기한 정령들이었다.

“이제 돌아가죠. 다들 목이 빠지게 기다릴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래. 안 그래도 너무 힘을 썼더니 배도 고파 온다.”

“하하, 그래요. 안 그래도 나도 마침 배가 무척 고프던 차였습니다.”

타고 온 말에 올라타고 완전히 어두워지기 시작한 밤길을 따라 다시금 조른 성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리처드는 마음에 쌓였던 증오와 분노 그리고 자신을 위해 스스로 희생을 하신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을 털어 낼 수, 아니 비록 그러한 마음들이 자신이 죽을 때까지 남아 있기는 하겠지만 이제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에 한결 가벼워질 수 있었고, 알마리온 또한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처음으로 모두 펼쳐 보았다는 것에 그동안 쌓여 있던 답답함이 확 풀려 버렸기에 가벼운 마음이 되었다.

하나 이들 두 사람 모두가 오늘의 일로 인해 가장 흡족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생겼다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 제1의용군에 함께하기로 한 객원 기사인 리처드 레오폴트 경입니다. 모두 인사 나누도록 하세요.”

“하하, 반갑습니다. 리처드 레오폴트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하하하.”

“푸른하늘 님이 말인가요?”

“예, 주군.”

“어서 가 봅시다!”

알베르토로부터 푸른하늘이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은 알마리온이 황급히 그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오셨습니까.”

푸른하늘의 방에는 메코이족의 대전사인 꿈꾸는달을 비롯한 일족의 주요 전사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푸른하늘 님!”

“허허…… 오셨는가?”

“푸른하늘 님…….”

부상을 입은 것이라면 포션을 사용했을 것이고, 병에 걸린 것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법사나 신관을 찾아 그의 병을 낫게 하겠지만, 나이가 많아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는 것만큼은 마법사도, 신관이나 포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들 나가 있거라.”

“예, 대족장님.”

“그대들도 나가 있도록 하시오.”

“예, 주군.”

“예, 군단장님.”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어 보이는 푸른하늘이었기에 알마리온 또한 소식을 듣고 따라온 칸과 한센 등을 방에서 내보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허허, 그렇소. 날 좀 앉혀 주시겠소?”

“예. 잠시만…….”

침대에 앉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 것인지 푸른하늘의 숨이 조금 더 거칠어졌다.

“후……. 역시 이제는 이렇게 앉는 것도 힘이 드는구려.”

“푸른하늘 님…….”

“허허, 그런 표정 짓지 마시오. 어차피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은 다 때가 되면 다시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신의 뜻 아니겠소?”

“힘을 내십시오. 푸른하늘 님께는 아직 하실 일이 많으시지 않습니까? 새로운 터전을 잡은 부족민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셔야 합니다.”

“허허. 못된 사람이로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늙은이를 얼마나 더 부려 먹고 싶은 것이오?”

“그게 아니라…….”

푸른하늘의 때아닌 농담에 얼굴을 붉히는 알마리온이었다.

“허허허……. 하긴 마지막으로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긴 있구려.”

“…….”

“그대…… 운명이라는 것을 믿소?”

“믿습니다.”

“하면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것도 믿겠구려.”

“정해진 운명?”

“그렇소. 신께서 각자에게 부여한 정해진 운명을.”

갑자기 왜 이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허허. 내가 갑작스러운 말을 해서 당황한 모양이구려.”

“…….”

“전에 말했던 우리 메코이족의 특징을 기억하시오?”

“어떤 것 말씀이신지…….”

신탁에 의해 알마리온이 자신의 뒤를 이어 메코이족을 이끌어 나갈 대족장이 될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푸른하늘은 그에게 메코이족에 대해 가능한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우리 일족의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이오.”

“아! 기억하고 있습니다. 신탁에 의해서 다음 대의 대족장을 선택한다 하셨습니다.”

“허허. 그렇소.”

푸른하늘의 눈과 마주친 알마리온은 순간 그가 왜 이런 말들을 하는지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하나 짐짓 모른 체하였다.

“한데 갑자기 그 말씀은 왜…….”

“정말 모르겠소?”

“…….”

대답을 하지 않는 알마리온의 모습에 힘든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하고 싶은 것이오?”

“…….”

당연히 피하고 싶었다.

“피하고 싶을 것이오. 하나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나 또한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라오.”

푸른하늘 또한 자신이 다음 대의 메코이족의 대족장으로서 선택을 받았을 당시 지금의 알마리온처럼 주저하고, 피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것이 숙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난 이후에 푸른하늘은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에 따랐다.

“숙명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오.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지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도 없는.”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것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알마리온은 이러한 것을 전혀 믿지 않았다.

운명이란 것도 숙명이란 것도 없다는, 단지 패배자들이 자신의 패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말들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그의 생각들은 지금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운명이든 숙명이든, 그것은 정해진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할 수 있는 환경일 뿐이라고 말이다.

때문에 진실로 원하고 노력하면, 운명도 숙명도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허허.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오. 하나 그댄 결국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오.”

결국에는 자신의 뜻대로 메코이족의 대족장이 될 것이라는 푸른하늘의 말에, 그가 어떤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문득 정말로 그의 말처럼 될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잠시 손을 내밀어 보겠소?”

“……?”

갑자기 손을 내밀어 보라는 말에 멈칫거렸다. 하나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강한 느낌에 알마리온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 알마리온의 손에 늘 목에 걸고 있던 선택받은 자의 신물을 올려놓더니 이내 알마리온의 손을 꼭 움켜쥐어 선택받은 자의 신물을 떨어뜨리거나 놓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푸른하늘의 입에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이 읊조려졌다.

그와 동시에 알마리온의 손에 쥐인 선택받은 자의 신물에서 푸르고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알마리온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윽! 으윽! 으아악!”

“비키시오!”

방 안에서 알마리온의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칸과 한센 등이 방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지만 꿈꾸는달을 비롯한 메코이족 전사 십여 명이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당장 비키지 못해!”

문을 가로막아 선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이들의 행동에 칸과 한센이 거의 동시에 소리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걱정 마십시오. 그분에게는 아무 이상 없을 것입니다.”

“저렇게 비명을 지르시는데 아무 일도 없을 것이란 말인가! 당장 비키지 않으면 그대들 모두를 죽이겠다!”

“그러셔도 비킬 수는 없습니다. 지금 방 안에서는 의식이 진행되고 있기에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의식? 무슨 의식을 벌인단 것이지?”

꿈꾸는달의 말에 칸이 으르렁거리듯 다그쳐 물었다.

“다음 대의 대족장이 되기 위한 의식입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지?”

“말씀드렸듯이 그분은 바로 우리 메코이족의 다음 대 대족장이 되시기 위해 의식을 받고 계시는 중입니다. 하니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그분은 절대 안전하실 것입니다.”

“이 무슨…….”

꿈꾸는달의 말에 칸도, 한센도 도무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알마리온이 메코이족의 대족장이 되기 위한 의식을 받고 있다니.

“그분은 로엔 왕국의 귀족이시다! 어떻게 그런 분이 메코이족의 대족장이 된다는 것인가!”

“그런 것은 상관없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분은 신에 의해 정해진 운명에 따라 푸른하늘 님의 뒤를 이어 대족장이 되실 분이라는 것뿐입니다.”

“으아악!”

잠시 잦아드는가 싶던 알마리온의 비명 소리가 다시 크게 들려왔다.

“비켜! 비키란 말이다!”

“절대 비킬 수 없습니다!”

“드란 경!”

“예, 부군단장님!”

“경은 지금 당장 전군에 비상을 내리시오! 그리고 메코이족 모두를 포위토록 하시오! 그리고 반항하는 자들이 있다면…… 가차 없이 베도록 하시오!”

“예!”

“보내 드려.”

메코이족 전사들이 한센을 가로막으려 하였지만 꿈꾸는달이 그를 보내 주라 하였다.

“그리고 전사들에게 알려라. 의식이 끝날 때까지 내 명령 없이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절대 이탈하지도, 그리고 이들에게 책잡힐 일은 하지 말라고.”

“예! 대전사님.”

칸과 꿈꾸는달의 날카로운 눈빛이 서로 허공에서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으으…….”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갑자기 들려오기 시작한 환청도 환청이었지만 그보다는 그의 머릿속에서 보이기 시작한 이상한 장면들 같은 것이 그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허허, 대단하구나. 참으로 대단하구나.’

푸른하늘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알마리온을 보면서 감탄하고 또 감탄하였다.

지금 알마리온에게 행하고 있는 의식은 메코이족의 대족장이 되기 위해 신의 선택을 받은 자를 위한 ‘지혜를 전하는 의식’이라는 것이었다.

메코이족은 문자가 없다. 아니, 비단 메코이족뿐만이 아니라 게르혼족들 모두가 문자가 없다.

이들에게 있어서 문자는 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성한 것이기에 하찮은 인간인 자신들은 문자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메코이족의 대족장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까지 해야 하기에 신께 제사를 지내는 정확한 날짜의 계산법과 제사를 행하는 방법 등등을 알아야 하고, 이를 또다시 후대의 대족장에게 전해야 했다.

이 많은 것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족히 10여 년을 꾸준히 곁에 두고 가르쳐야 하는데 문제는 메코이족의 대족장은 전대 대족장이 신탁을 받아서 다음 대의 대족장을 선출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신탁을 일찍 받는다면야 곁에 두고 모든 것을 가르치겠지만, 알마리온의 경우처럼 시간이 촉박할 경우에는 제사장으로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전해 줄 시간이 없었다.

이로 인해 생각해 낸 방법이 바로 주술의 힘으로 가르치고 배워야 할 많은 것들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이것이 바로 지혜를 전하는 의식이란 것이었다.

하나 이것도 그리 쉬운 방법은 아니었다. 선택받은 자의 신물에 담긴 주술의 권능으로 행해지는 이 의식 또한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야만 하는 것이, 워낙 방대한 양의 지식이 주술의 힘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었기에 이것을 견딜 만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이미 전부터 주술의 힘이 이 아이에게 이어져 있었던 것이야. 그것도 아주 강한 주술의 힘이.’

어떻게 알마리온에게 주술의 힘이 전해진 것인지는 푸른하늘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자신의 생명의 촛불이 불과 얼마 남지 않았음에 푸른하늘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하나 그는 알고 있었다. 알마리온이 말로 설득해서 설득당하지 않을 것임을.

하여 그는 강제로라도 그에게 대족장의 지위를 넘겨주기 위해 이러한 일을 꾸민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에게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아 급하게 일을 하느라 자칫 알마리온이 의식을 제대로 견딜 수 있을까였다.

‘역시 신의 뜻이었어. 이제 마음 놓고 갈 수 있겠구나. 앞으로 많은 역경이 그대 앞에 있겠지만 그대라면 지금처럼 모든 것을 잘 헤쳐 나갈 것이라 믿겠소. 부디 그대의 품에 안길 아이들을 잘 부탁하겠소. 허허허.’

이제 더 이상 알마리온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알마리온의 상태가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알아듣기 힘든 주문이 읊조려지고 있었으며, 그의 몸은 마치 간질병 환자처럼 경련을 계속하였다.

“으음…….”

알마리온이 정신을 차린 것은 지혜를 전하는 의식이 시작된 지 사흘 만이었다.

정신을 차린 알마리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푸른하늘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었다.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된 푸른하늘의 얼굴에는 복잡한 그의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동의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이고 무거운 짐을 지운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제게 너무 큰 짐을 넘겨주셨습니다.”

주검이 된 푸른하늘의 복잡한 표정처럼 알마리온의 표정 또한 복잡하기만 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푸른하늘의 주검을 바라보던 알마리온은 여전히 손에 쥐고 있던 선택받은 자의 신물을 목에 걸었다.

“이제 그만들 안으로 들어오시오.”

알마리온의 말에 조용히 문이 열리며 꿈꾸는달을 비롯한 메코이족 전사들과 리처드를 비롯한 제1의용군 지휘관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흑흑! 대족장님! 흑흑흑!”

꿈꾸는달을 비롯한 메코이족 전사들이 푸른하늘의 주검 앞에 무릎을 꿇으며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아우, 괜찮은 것인가?”

“주군, 괜찮으십니까?”

“군단장님.”

“난 괜찮아요. 그보다…… 한 며칠 자리를 좀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자릴 비우다니 무슨 일로?”

“저분을 위한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형님.”

“그럼 너 정말로…….”

“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

“칸 경, 내 대신 사흘간 군단을 지휘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동안 메코이족 대족장님이셨던 푸른하늘 님을 위한 애도 기간을 선포합니다. 칸 경은 꿈꾸는달 님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내주십시오.”

“……예, 군단장님.”

필요한 일들을 지시한 알마리온은 푸른하늘의 주검을 안고 성을 빠져나가 산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메코이족의 전통에 따라 사자의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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