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연
“정녕 그가 대족장님을 이어 우리 일족을 이끌어 갈 후계자란 말씀이십니까?”
“허허, 내 말이 믿기 어려운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푸른하늘의 말에 꿈꾸는달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허허, 나도 네가 왜 그러는지 안다. 그는 우리와 같은 혈통도 아닌데 어떻게 신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당연히 궁금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대족장님. 저는 지금까지 일족이 아닌 자 중에서 대족장이 나온 적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랬지. 하여 나 또한 신의 선택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척이나 놀랐단다. 하여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지만 신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단다.”
“으음.”
메코이족의 대족장은 단지 일족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메코이족의 대족장은 바로 신의 뜻을 대변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과 권력자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위치였다.
“내가 나이 들고 몸이 쇠해짐에도 신의 뜻을 이을 자를 선택해 주시지 않아 애를 태웠는데 그를 만나고 그에게 신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단다.”
“하나 그 이전에는 그 어떤 징조도 없었지 않습니까?”
“허허, 그랬지. 아니, 그랬다고 여겼지. 하나 이제 돌이켜 보면 신께서는 이미 그때에도 내게 언질을 주셨더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지 않느냐. 우리가 이곳에 있게 된 이유를.”
이들 메코이족이 이곳에 있게 된 이유. 그것은 바로 신의 뜻이었다.
실상 이들이나 얄란족이나 굳이 로엔의 백성으로 살아갈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이들이 새롭게 터를 잡은 지역은 로엔의 땅이긴 해도 로엔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버려진 땅이었다.
물론 이들을 설득했던 자들의 말처럼 이번 전란이 끝나면 로엔의 땅에 허락도 없이 들어온 이들을 몰아내겠다는 협박이 있긴 했지만, 그것에 겁을 집어먹고 이렇게 전장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구태여 로엔의 백성이 되기 위해 일족의 전사들의 피를 대가로 내놓기로 한 것은 모두가 푸른하늘이 신으로부터 받은 신탁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푸른하늘은 일족의 앞날을 예측하기 위해 신탁을 받았고,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 있던 구름이 바람에 실려 남쪽 하늘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았다.
푸른하늘은 이러한 신탁을 놓고 로엔과의 연합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한데 그것이 로엔과의 연합만을 위한 신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알마리온에게서 하늘의 향기를 느꼈을 때, 그러니까 알마리온이 바람의 정령인 실라페를 소환하였을 때였다.
“그때 처음으로 신의 뜻이 우리가 로엔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 아닌, 우리에게 새로운 인도자를 알려 주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았다.”
푸른하늘의 말에 의구심을 갖거나 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는달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일족의 그 누구도 대족장님의 신탁을 의심하거나 하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허허, 어찌 모르겠느냐. 그가 일족의 사람이 아니기에 설사 내가 그를 후계자로 지목한다 해도 그를 믿고 따르기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임을 말이야.”
꿈꾸는달의 표정이 심각한 이유, 그것은 바로 알마리온이 일족의 혈통이 아니란 데 있었다. 이로 인해 자칫 일족들 사이에 분란과 분열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단다. 그가 진정 신의 뜻을 이은 자라면 네가 우려하는 일 같은 것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네게 그에 대한 것을 미리 말하는 것은, 네가 그의 곁에서 그를 많이 도와주었으면 해서란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것이 신의 뜻이고 또한 대족장님의 뜻이라면 전 그를 믿고 따를 것입니다. 하오나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우리 일족의 대족장이란 자리는 단지 일족을 다스리는 지도자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도자뿐만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예언자로서의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메코이족의 대족장이기에 주술사로서의 능력이 없다면 설사 신의 뜻이 그에게 있다 하더라도 일족 모두는 그를 배척할 것이 분명했다.
“허허, 그 점은 걱정할 것 없단다. 그는 이미 이것을 받아들일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더구나.”
푸른하늘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옷 속에서 꺼냈다.
그가 꺼낸 목걸이는 매우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재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은은한 푸른빛이 나는, 아이 손바닥 크기만 한 둥근 판 위에는 산과 호수가 양각되어 있었고, 그 산의 정상 부근에는 ‘진실을 보는 눈’이라고도 하는 ‘오딘의 눈’이, 그리고 흘러가는 구름과 대지, 물과 불이 각각 양각되어 있었다.
실상 이 목걸이에는 메코이족이 보는 우주관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목걸이가 둥근 것은 바로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둥글다는 것을 뜻했다.
그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산은 바로 오라클 오브 오딘 산, 즉 오딘의 산으로 이 산 정상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다. 이 호수는 이 세상의 모든 지혜가 녹아 있는, 일명 지혜의 호수라고 한다.
주신 오딘은 세상의 모든 지혜를 얻기 위해 이 호수를 지키고 있는 거인에게 자신의 한쪽 눈을 내주고 호수의 물을 마심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한다.
이때 호수를 지켜 주는 거인에게 내준 오딘의 한쪽 눈을 이들 메코이족은 진실의 눈, 또는 지혜의 눈이라 하였는데, 목걸이의 산 정상에 새겨진 눈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새겨진 바람을 뜻하는 구름과 물, 불, 대지는 바로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네 가지 원소를 뜻하는 것으로 세상 만물을 상징하였다.
이제는 게르혼족에서도 메코이족에만 전해지는 이러한 우주관은, 한때 로엔은 물론 카빌란 제국 일부 지역에서까지 믿었던 신화였다.
어쨌든 메코이족의 우주관과 탄생 신화, 그리고 대족장의 지위를 나타내는 이 목걸이를 메코이족은 ‘선택받은 자의 신물’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데 이 선택받은 자의 신물에는 오직 이것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알고 있는 하나의 신비한 권능이 있었다. 바로 주술사로서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선택받은 자의 신물에 담겨 있는 권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못 만들고는 전적으로 이것을 소지한 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푸른하늘도 그 선택받은 자의 신물에 담긴 권능의 극히 일부분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습니까?”
“그렇더구나.”
“다행입니다. 그 선택받은 자의 신물이야말로 신탁을 받은 자만을 위한 것. 그것이면 크게 우려할 일은 아마도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허허, 그렇게만 된다면 내 어찌 네게 이런 부탁을 하겠느냐?’
푸른하늘은 얼마 전 다시 한 번 신탁을 받았다. 자신의 죽음을 알려 주는, 그리고 일족에 큰 위기가 닥치고 그로 인해 일족이 나누어지게 될 것이라는.
“네가 그를 많이 도와야 할 것이다.”
“예, 대족장님.”
“힘이 드는구나. 좀 쉬어야겠다.”
“예. 그럼 전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뭐라고? 낯선 자가 나타나서 행패를 부리고 있다고?”
“예, 드란 기사님.”
조른 성의 정문을 지키던 병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거리며 정체불명의 사내가 나타나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한센에게 보고했다.
“아니, 어떤 미친놈이 감히 여기에 와서 행패를 부린다는 거지? 그거 아주 제대로 미친놈 같은데?”
한센과 함께 훈련 계획을 살피던 요들이 어이없어했다.
“병사들을 시켜 내쫓도록 해.”
한센의 말에 병사가 다시 한 번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그것이…….”
“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이안 멕라인 님이 우연히 그자를 상대했다가 그만…….”
비록 기사는 아니지만 이안 멕라인은 직할대의 백인대장 중 한 명으로 상당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어 몇 번의 공을 더 세우면 알마리온이 그를 기사로 추천하려고 할 정도로 실력자였다.
“뭐라고? 멕라인이 그자를 상대하다 어쨌다고?”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것도 그자가 멕라인 기사님을 봐주어서 가벼운 부상만으로 그친 것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이안 멕라인이 비록 실력이 뛰어난 기사는 아니라 하더라도 아무에게나 당할 정도로 형편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한데 그러한 이안 멕라인이 상대의 배려 덕분에 가벼운 부상을 당한 정도로 물러났다는 말에 한센과 요들은 아무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행동이 의도적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무래도 나가 봐야 할 것 같네요.”
“그래야 할 것 같다.”
정문으로 나가자 그곳에는 이미 소식이 쫙 퍼졌는지 앞을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병사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길을 비켜라!”
한센과 요들이 나타나자 병사들 모두가 웅성거리며 길을 내주었다.
“난 제1의용군 제2대 대장인 기사 한센 드란이라 하오. 그대는 어디서 온 누구시오?”
“한센 드란? 그럼 내가 찾는 자는 아니군.”
“그대가 찾는 이가 누구지?”
이번에 나선 것은 요들이었다.
“이곳에 오면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남작을 만날 수 있다고 하던데 아닌가?”
“하면 그댄 주군을 뵈러 온 것이오?”
“주군? 하면 그대는 그의 기사인가?”
“그렇소.”
“그렇군.”
“이제 그대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서 오신 분인지 알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 주셨으면 하오만?”
“나 말인가? 난 종마 중의 종마, 하늘이 내린 종마이자 드넓은 대지를 자유롭게 거니는 사자. 그것이 바로 나다.”
거창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자신을 소개하는 그의 모습에 요들은 그를 한마디로 정의했다.
“미친놈 맞네.”
“하하하, 그렇지. 나도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을 때가 많더라고. 하하하!”
한데 자신을 종마 중의 종마, 하늘이 내린 종마이자 드넓은 대지를 자유롭게 거니는 사자라고 하는 소개를 듣고 기겁을 하듯 놀란 이가 한 명 있었다.
바로 알베르토였다. 그 또한 성의 정문에서 정체불명의 자가 나타나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에 궁금증이 생겨 밖으로 나왔다가 소란을 일으킨 자의 자기소개를 들었던 것이다.
‘종마 중의 종마, 하늘이 내린 종마이자 드넓은 대지를 자유롭게 거니는 사자라?’
무엇인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알베르토가 당황한 표정으로 허겁지겁 병사들을 제치고 한센에게 다가갔다.
“한센 님.”
“음? 뭐지, 알베르토?”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일단 저자를 주군께 데려가는, 아니 모셔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왜 그래야 하지?”
곁에서 듣고 있던 요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베르토에게 물었다.
“일단 제 말대로 해 주십시오. 이유는 후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알베르토의 행동을 보면 일단은 그의 말에 따라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
평소 이렇듯 당황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한센은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일단 그의 뜻에 따라 주었다.
“따라오시오.”
“하하, 고맙네.”
밖에서의 소란에 신경 쓸 틈조차 없을 정도로 검토해야 할 서류들이 많은 알마리온은, 어느 한순간 온몸을 긴장케 만드는 기운에 저도 모르게 곁에 두었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런 기운은?’
레드로를 처음 보았을 때 그에게서 느꼈던, 바로 익스퍼트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기운을 느낀 알마리온이었다.
똑똑.
“들어와요.”
“주군?”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던 모두는 그가 검을 손에 쥐고 서 있는 모습에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단 한 사람만큼은 그런 알마리온의 모습에 빙긋 웃음을 지었다.
“대단한 분이 날 찾아왔군요. 한데 그댄 누구입니까?”
“보아하니 그대는 내 정체를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으니 그대가 날 소개하는 것이 어떻겠나? 내 아무리 얼굴이 두꺼워도 그런 말을 또다시 하기에는 좀 그렇군.”
정체불명의 사내가 알베르토에게 자신에 대한 소개를 대신해 달라고 하자 알베르토가 슬쩍 그의 눈치를 보며 그자에 대한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주군, 이분은 종마 중의 종마, 하늘이 내린 종마이자 드넓은 대지를 자유롭게 거니는 사자이신, 포넬 왕국의 왕세자 프란시스 레오나르도 폰 브리스톨 왕세자 전하이십니다.”
“으음.”
“뭐, 뭐야…….”
알베르토의 말에 한센과 요들은 크게 놀라며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도 그럴 것이 일국의 왕세자라는 자가 수행 인원도 없이 시정잡배조차도 하지 않는 행동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하는 것을 보았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알마리온은 이렇다 할 표정의 변화가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한 분의 방문이군요. 프란시스 레오나르도 폰 브리스톨 왕세자 전하, 소관은 제1의용군을 지휘하고 있는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남작이라고 합니다.”
비록 적국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국의 왕세자를 대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행동을 하는 알마리온의 모습은 무례함 그 자체였지만 상대가 자신에게 왕자 대우를 해 달라고 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 알마리온은 그를 그저 자신을 찾아온 평범한 방문자 정도로만 생각하고 행동했다.
“음? 생각보다 그다지 놀라지 않는군.”
“그래 보이십니까? 하나 소관은 지금 꽤나 놀라고 있습니다. 왕자 전하 같은 분께서 어떻게 이곳까지 이렇게 친히 왕림하신 것인지 말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맡겨 놓은 물건이 있다고 해서 말이네. 내가 주인은 아니지만 전부터 갖고 싶었던 물건이거든. 하여 그것을 찾아갈까 해서 왔다네.”
“네 페니테라는 것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복수를 위한 것은 아니신 것 같군요.”
“아아! 그런 시시한 것은 아니네. 내가 한때 그분을 존경하고 또 그분의 모습을 닮고 싶어 하기는 하였지만, 그분의 복수를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네.”
“하면 왕세자 전하의 뜻은 네 페니테만을 원하신다는 것이군요?”
“맞네. 그리고 날 왕세자라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네. 난 더 이상 그런 거추장스러운 옷을 걸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네.”
조금 전까지의 다소 장난기 있는 표정이 완전히 사라지며 정색을 하는 프란시스의 표정에서 그만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말이네, 리처드 레오폴트, 그래, 앞으로는 날 리처드 레오폴트라고 불러 주었으면 하는군.”
“리처드 레오폴트라……. 어울리는 이름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런가? 고맙네. 남작의 이름 또한 그런 것 같군.”
“감사합니다. 하면 어떻게 소관에게서 네 페니테를 찾아가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히 검을 겨루어야겠지. 내가 그 고생을 해 가면서 이곳까지 자네를 찾아온 것은 비단 네 페니테를 갖기 위해서만은 아니라네.”
프란시스, 아니 리처드가 굳이 알마리온을 찾아온 것, 그것은 자신의 운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카즈모 백작은 포넬에서도 단 두 명뿐인 중급의 익스퍼트. 그런 카즈모 백작을 정면 승부에서 이긴 자가 나보다 어린 사람이라고 들었을 때의 놀라움은 무척이나 컸다네.”
지금도 포넬에서는, 아니 비단 포넬뿐만이 아니라 로엔에서도 중급 익스퍼트인 카즈모 백작을 상대한 알마리온에 대한 이야기는 끝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포넬에서는 카즈모 백작을 상대로 승리한 알마리온에 대해 대체적으로 무엇인가 비겁한 수를 썼을 것이라며 그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무성한 상태였고, 로엔에서는 운이 좋아 그랬을 뿐이라며 애써 그의 성공을 폄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카즈모를 상대했던 알마리온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알마리온이 당당히 자신의 실력으로 그를 상대했고, 목숨을 내던진 승부수가 통해 결국 카즈모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을.
“포넬에서도 그리고 로엔에서도, 자네에 대한 평가는 별로 좋지 않더군.”
“그렇습니까?”
“그렇더라고. 아마도 자네의 출신과 자네가 적이라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네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겠지.”
리처드의 말처럼 로엔에서는 알마리온의 출신이, 그리고 포넬에서는 자국의 자존심인 카즈모 백작이 이름도 없고 출신도 비천한 그에게 당했다는 것이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인지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안다네. 카즈모 백작이 어떤 분인지를. 그리고 그런 분을 꺾은 자네가 세상의 평가와는 전혀 다른 자라는 것을.”
“…….”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불처럼 뜨거운 열정이 담긴 리처드의 눈빛과 거대한 호수의 물처럼 깊고 잔잔한 알마리온의 눈빛이.
“하여 내 운명을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네. 바로 자네를 통해서 말이네.”
“…….”
“내가 자네를 이기면 네 페니테를 가지고 로엔의 국왕을 만나러 갈 생각이네. 하나 자네에게 지면…….”
알마리온을 제외한 모두가 리처드가 또 무슨 파격적인 말을 하려는 것인지 귀를 쫑긋 세우며 기다렸다.
일국의 왕세자이면서 스스로 그 신분을 버렸다며 제 스스로 이름을 즉흥적으로 만드는가 하면,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 보겠다며 다짜고짜 알마리온을 찾아왔다는 것 등,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파격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자연 그가 또 어떤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할 것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대의 수하가 되지. 어때?”
그리고 기대했던 것만큼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리처드의 행동에 한센과 요들 그리고 알베르토는 과연 알마리온이 리처드의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그를 바라보았다.
“별로 공평치 않은 조건인 것 같습니다.”
“흠! 하긴 나 같은 능력자가 겨우 네 페니테 따위와 동급으로 취급되는 것은 좀 그렇겠지?”
네 페니테는 대단한 마법 물품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지만, 알마리온은 그러한 것을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뭐, 그래도 다른 것을 걸 만한 것이 없으니 어쩌겠어.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난 자네를 통해서 내 운명을 시험해 보고 싶으니 날 걸 수밖에.”
“…….”
리처드를 보기도 전에 그가 뿜어낸 기운만으로도 그가 익스퍼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얼마든지 로엔에 뿌리를 내릴 수가 있었다. 굳이 자신을 통해 운명을 시험해 볼 필요성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알마리온은 그가 처음부터 자신을 찾아온 것이 단지 네 페니테를 갖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무엇이 이 남자를 이렇게 증오하고 분노하게 만든 것일까?’
그가 왜, 그리고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 그리고 그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어떤 희생들을 감수해야 했는지 알마리온은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가슴에는 온통 켜켜이 쌓인 증오와 분노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그의 눈빛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최근 알마리온은 이상하게도 다른 이의 눈을 마주하게 되면 그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략은 알 수 있게 되었다.
알마리온은 리처드의 눈빛 속에서 증오와 분노를 보았다. 그것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이 세상을 피로 물들이게 만들 정도의 강한 증오와 분노를.
‘대단한 자다. 나라면 저자처럼 켜켜이 쌓인 증오와 분노를 참고 자신을 통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자신은 운이 참으로 좋은 자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하는 알마리온이었다.
세상을 향한 증오와 분노가 스스로를 집어삼켜 자신은 물론 타인들까지도 파멸시켜 버리는 피에 굶주린 살인귀가 되기 전에 더 이상 세상을, 그리고 자신의 불우한 환경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리처드가 자신을 상대로 운명을 시험하겠다고 한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나를 상대로 그러한 증오와 분노를 모두 쏟아 버리고 싶어 하는구나. 그렇게 하여 과거의 암울했던 운명을 깨끗이 털어 버리려 하고 있다.’
리처드는 자신을 통해 불우했던 과거의 운명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운명, 설사 그것이 또다시 누군가에게 종속되는 운명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이 진실로 원해서 선택한, 새로운 운명을 살아가고 싶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러했어. 설사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내가 원해서 선택할 수 있는 운명이라면 그 어떠한 것도 순응하겠다던.’
“좋습니다. 그 제안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려는 듯하던 알마리온의 말에 막 그동안 억눌러 왔던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리처드는 이어진 알마리온의 말에 간신히 가슴 한가득 켜켜이 쌓여 있던 증오와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참을 수 있었다.
“대신, 레오폴트 님도 조건을 말씀하셨으니 저 또한 한 가지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좋네. 그래야 공평하겠지. 무엇인가, 그대의 조건은?”
“저와의 결투가 시작되면 모든 것을 완전히 비울 때까지 결코 중단하지 않는다는 조건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신다면 결투에 응하겠습니다.”
“으음…….”
‘알았단 말인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겠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리고 결투의 결과에 상관없이 미리 한 가지만 말하겠네.”
“무엇입니까?”
“고맙네.”
“훗! 아직은 좀 이른 인사말 같습니다. 어쨌든 나가시지요. 적당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지.”
“아! 그리고 이건 어디까지나 이분과 나만의 일이니 세 분은 이곳에서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한센과 요들 그리고 알베르토가 두 사람을 따라나서려 하자 이를 말리는 알마리온이었다.
“하지만 주군…….”
“그렇게 하십시오.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으음…….”
분명히 자신의 뜻을 밝히자 세 사람 모두 결국 물러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가시죠.”
“그러지.”
그렇게 두 사람은 말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훗날 알마리온은 이날의 이 만남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뜨겁고 열정적으로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낸 단 하루였다.’라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