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렌토 수복
“도대체 언제까지 똑같은 핑계만 댈 것이오! 왕도를 되찾기 위해 투입된 병력이 대체 얼마인지 알고들 있는 것이오?”
메르타니온의 질책이 계속되었다.
롬 강을 건넌 이후 병력을 집중 투입하여 적들을 왕도인 소렌토를 가로질러 흐르는 도란 강 너머까지 밀어내는 데 성공을 하였지만, 도란 강에서 막힌 지 벌써 한 달째였다.
강을 사이에 두고 지루한 공방이 계속되자 군을 독려하기 위해 국왕인 메르타니온이 직접 전장에 머물기 시작한 것도 열흘이 넘었고, 그동안 두 차례의 대규모 공세를 취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이에 메르타니온은 분노하여 이렇게 군의 수뇌부를 강하게 질책하고 있는 중이었다.
“…….”
“대답들을 해 보시오! 그토록 자신 있어 하던 그대들의 모습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고 이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이오!”
메르타니온의 질타에 재상인 프리모와 원수인 더글러스 그리고 각 군단을 지휘하고 있는 군단장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들이 없었다.
“다들 꼴 보기 싫으니 나가시오!”
“폐하.”
“썩 물러나라 했소!”
일국의 공작인 재상과 후작인 원수를 비롯한 왕국 최고의 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할 행동은 아니었지만 워낙 화가 나 있는지라 누구도 그의 행동을 막지 못한 채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폐하, 오늘 폐하의 행동은…….”
“그만! 나도 내 행동이 지나쳤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니 더 이상 그에 대해 말하지 말라.”
도르첸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나무라려 하자 이를 막는 메르타니온이었다.
“자넨 가서 그를 불러오도록 하라.”
“로엔달 자작을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그를 불러오도록 하게.”
“예, 폐하.”
곤란한 일에 직면할 때마다 자신이 아닌 로엔달을 찾는 메르타니온의 행동에 도르첸은 서운한 마음이 솟구쳤다.
“자네 나와 술 한잔할 텐가?”
얼마 후 도르첸과 함께 온 로엔달을 보며 메르타니온은 다짜고짜 술을 함께하자 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도르첸, 자네도 함께하세나.”
“예, 폐하.”
얼마 후 세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후∼! 답답하군. 내 집을 코앞에 두고 이처럼 발길이 막혀 버렸으니 말이야.”
2년을 피난길에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하소연을 하는 메르타니온의 모습을 보면서 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였다.
“폐하, 신에게 나름 방책이 있사옵니다만…….”
“도르첸 자네에게?”
“예, 폐하.”
“어디 들어 보세나. 어서!”
좋은 계획이 있다는 도르첸의 말에 메르타니온이 다그치듯 물었다.
“지금으로써는 도란 강을 건넌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힘이 드옵니다.”
“그래서?”
“하여 군의 일부를 크게 우회시켜 강폭도 도란 강보다는 좁고 또한 물살도 그리 강하지 않은 디엔 강을 통해 소렌토로 진입하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흠…….”
도르첸의 말을 들으면서 메르타니온은 슬쩍 로엔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엔달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술잔만을 입으로 가져갔다.
‘훗! 아마도 로 그대가 도르첸에게 조언을 해 주었던가 보군.’
로엔달을 중시하는 자신의 행동에 도르첸이 간혹 서운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 메르타니온이었다.
그도 자신을 위해 도르첸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알지만, 알면서도 언제나 자신에게 처음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 온 로엔달에게만큼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흠, 그러니까 카르파티아 산맥을 따라 남하해서 적의 후방을 치자 이건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좋군! 좋은 생각이야.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소관이 생각하기에도 공작의 생각이 참으로 좋아 보입니다.”
“좋아. 두 사람의 생각이 그러하니 그대로 실행하도록 하지. 하면 자네가 가 주겠는가?”
“소관보다는 갈리 자작의 6군단이 움직이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6군단을?”
“그러하옵니다, 폐하.”
“흠……. 도르첸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소신 또한 자작과 같은 생각이옵니다.”
“두 사람이 모두 그것이 좋다 하니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이 문제는 도르첸 자네가 내일 더글러스 후작과 상의하여 결정짓도록 하게.”
“예, 폐하.”
“그나저나 그것을 훔친 것들에 대한 흔적은 찾았는가?”
“송구하옵니다, 폐하. 전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법 아이템의 분실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로엔달이었지만 아무리 조사를 하여도 그것을 누가 어떻게 훔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프리모 공작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조사를 하였는가?”
누가 마법 아이템을 훔쳐 갔는지 심증은 갔다. 하나 물증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자네마저 찾지 못하였다면 그것을 훔친 자들이 직접 모습을 나타내기 전까진 알 수가 없겠지.”
“송구하옵니다, 폐하.”
“아니네. 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난 이쯤 해서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두 사람의 의견을 듣고 싶군.”
단단한머리를 통해 이들은 10개 정도의 마법 아이템을 제작하였고, 알마리온이 건네준 것까지 합쳐 25개의 마법 아이템을 보유한 상태였다.
메르타니온은 이것을 당장이라도 사용하여 소렌토를 적으로부터 되찾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적절한 판단이시옵니다.”
도르첸은 메르타니온의 생각에 전적으로 찬성을 하였다.
“신은 좀 더 이 사실을 숨기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반면 로엔달은 마법 아이템의 사용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왜인가?”
메르타니온이 자신의 생각에 반대하는 로엔달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것을 훔친 자가 어느 누가 되었든, 그것을 제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런 상황에서 폐하께서 그것을 제작할 능력까지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되면 더욱더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자칫 폐하의 숨겨진 힘이 드러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흠…….”
현재 단단한머리는 로엔달이 마스터로 있는 로열가드에서 은밀히 보호 중에 있었다.
그동안은 이러한 무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비밀스러웠지만 마법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자를 가지고 있는 자를 찾는 과정에서 자칫 로열가드란 존재가 드러날 수 있음을 걱정하는 로엔달이었다.
“하면 도르첸 자네는 왜 찬성을 하는 것인가?”
“소신 또한 자작과 같은 생각 때문이옵니다.”
“같은 생각이라?”
“그렇사옵니다. 로열가드는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세상에 그 존재가 드러나서는 안 될 폐하의 힘이옵니다. 한데 마법 아이템을 훔친 자가, 그것이 마법사라 하더라도 제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그 나머지를 훔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폐하께서 그것들을 제작할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폐하의 주변을 더욱 샅샅이 살피게 될 것이옵니다.”
도르첸의 말처럼 이미 프리모 공작은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이 아무나 제작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하고는 또 다른 마법 아이템이나 아니면 마법 아이템을 제작할 능력을 가진 이가 혹시라도 메르타니온에게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도르첸 자네의 생각은 차라리 그것을 드러내서 더 이상 내 주변을 파고들지 못하게 하자 이건가?”
“그렇사옵니다. 또한 그것을 왕실의 것으로 공식화하여 왕실의 수입을 극대화시키는 것 또한 한 방법일 것이옵니다.”
“흠…….”
완전히 감출 수 없다면 차라리 드러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도르첸의 생각 또한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방법이 지금 상황에서 최선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장 그것을 사용하여 왕도를 수복하고 싶어 하는 메르타니온이었기에 한동안 두 사람의 의견을 놓고 고민하던 메르타니온은 결정을 내렸다.
“도르첸 자네의 생각이 아무래도 더 좋을 것 같군.”
하루라도 빨리 왕도를 되찾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마법 아이템이란 것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는 메르타니온의 모습에 로엔달은 내심 낭패감을 느꼈다.
‘앞으로 이 일로 인해 큰 곤란함을 겪으실지도…….’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메르타니온은 도르첸에게 마법 아이템을 6군단에 주어 소렌토를 되찾는 데 사용토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렌토에 주둔하고 있는 군의 일부를 빼도록 하게.”
로엔 정벌군 총사령관인 우즈엘 폰 스펜서 후작은 4군에 이어 7군이 괴멸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더 이상 동부로 보낼 여유 병력이 없자 소렌토 방어전에 투입한 군단 중 일부를 동부로 이동시키려 하였다.
“재고하여 주십시오, 후작 각하.”
공식적인 직함은 로엔 정벌군 후군 총사령관, 바로 물자를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로, 고메즈 대공의 조카인 카리안 백작이 스펜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대하고 나섰다.
“무엇을 재고하라는 것인가?”
“각하께서 동부 지역이 비었음을 우려하심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하나 곧 지원 병력이 도착하지 않습니까?”
“훗! 지원군이 오긴 하지. 하나 그들은 이곳으로 상륙하지 않고 곧바로 로엔의 왕이 머물고 있는 팬픽으로 향하게 될 것이네.”
“팬픽으로 말입니까?”
전혀 모르고 있던 새로운 소식에 정벌군 최고 지휘관들은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네. 하여 소렌토에 주둔하고 있는 군단 중 일부를 차출하여 동부로 이동시키려 하는 것이네.”
“하면 몇 개 군단을 차출하실 계획이십니까?”
“2개 정도를 차출할 생각이네.”
“1개 군단이 적당치 않겠습니까? 적은 불과 수천의 의용군이라 들었습니다. 이곳에 남아 있는 병력까지 있는데 2개나 되는 군단을 차출하는 것은 과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들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후작 각하. 카이네에는 아국의 제5군단이 주둔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히 불안하시다면 그곳에 1개 군단을 더 추가하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애송이 같은 놈. 그리고 저런 애송이 놈에게 무조건 아부하는 놈들이라니.’
카리안의 어설픈 생각과 그런 어설픈 생각에 무조건 동조하는 것으로 아부하는 다른 지휘관들의 행태에 스펜서는 분노를 느꼈다.
“자네가 말한 그 수천의 의용군에게 제4군은 물론 7군까지 당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가, 카리안 백작?”
“그건 4군 사령관 카즈모 백작과 7군 사령관인 서머셋 백작에게 그런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카즈모 백작은 왕국에 단둘밖에 없는 중급의 익스퍼트였네. 그런 그에게 능력이 없다 하는 것인가?”
“그것이야 검사로서의 능력이지 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으로 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하면 서머셋 백작은 무엇 때문에 당했다 보는 것인가? 게다가 7군에는 그대도 잘 아는 제2친위군 군단장인 가니에 자작과 레드블러드 기사단의 단장인 브레드포드 남작도 함께하고 있었는데 말이네.”
“후작 각하, 무능한 지휘관 아래 아무리 뛰어난 수하가 있다 한들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4군을 지휘했던 카즈모의 경우에는 검에 있어서는 모를까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부족했고, 그리고 7군을 지휘한 서머셋의 경우에는 능력 있는 수하들을 붙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는 지휘관이란 말이었다.
카리안이 이처럼 왕국의 존경받는 지휘관들을 무능한 지휘관이라며 깔아뭉개고 있는 것은 이들 두 백작이 바로 스펜서 후작과 관계가 깊은 사람들로 정치적으로 스펜서 후작의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고메즈 대공에게 충성을 맹세한 스펜서 후작이지만, 고메즈는 늘 스펜서를 부담스러워했다.
숙부인 고메즈의 그런 생각을 잘 알기에 카리안은 이처럼 카즈모와 서머셋을 무능한 지휘관으로, 그리고 그들에게 4군과 7군을 지휘케 하여 군 전체에 큰 피해를 끼친 스펜서 후작의 입지를 흔들기 위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한동안 두 사람의 눈이 서로를 마주 노려보았다.
“좋아. 그럼 백작의 의견대로 하지. 서기는 분명히 지금의 상황을 기록하도록 하라. 알겠는가?”
“예? 예, 후작 각하.”
스펜서가 서기에게 지금 회의의 내용을 정확하게 기록하라고 하는 것 또한 나중을 위해서였다.
‘만약 내가 생각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문책을 당하여 이 기록을 내놓는다 해도 내게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도 네놈 같은 무능한 놈이 대공이라는 배경만 믿고 까부는 것을 그대로 두고만 보진 않겠다.’
이른바 흠집 내기였다.
일국의 후작인 자신이 이런 치사한 일까지 해야 한다는 것에 스펜서는 자괴감이 들었다.
결국 이날 회의에서는 소렌토 방어에 동원되고 있는 군단들 중 가장 피해가 많은 제6군단을 차출하여 카이네 백작 영지에 주둔하고 있는 제5군단과 함께 동부 지역 방어에 투입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자네에게 무슨 좋은 생각이 없는가?”
레드로에게 묘책이 있는지를 묻는 갈리였다.
오늘 아침 원수부를 통해 6군단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크게 우회하여 디엔 강 남쪽 지역을 통해 소렌토에 입성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발상 자체는 좋았지만 문제는 이러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먼 거리를 우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여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레드로에게 좋은 생각이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은 특별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흠. 하긴 다짜고짜 좋은 생각을 달라고 한 내가 좀 성급했군. 일단 명령이 내려온 이상 군을 이동시킬 준비를 하도록 하게. 그사이 좋은 생각이 나면 말하고 말이네.”
“예, 군단장님.”
레드로는 6군단 부군단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지휘관들에게 군을 이동시킬 준비를 하도록 지시를 하고 자신 또한 몇 가지 직접 챙길 것이 있어 행정관과 함께 6군단이 사용할 물자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음? 저들은 뭐지?”
“아, 군단에 물자를 공급하고 있는 상단의 일꾼들입니다, 부군단장님.”
군단 행정관인 워렌이 레드로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일꾼들? 한데 왜 짐을 마차로 나르지 않고 저렇게 사람이 지고 다니는 것인가?”
“그건 마차로 물건을 나를 정도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살짝 황당한 표정을 짓던 워렌이 이내 표정 관리를 하며 대답하였다.
“마차가 다닐 만한 길이 없다?”
“예, 부군단장님. 사람이 타는 마차 정도는 다닐 수 있지만 저 많은 물건을 실을 수 있는 수레는, 날이 조금만 흐려 비가 와도 길이 진창으로 변하기에 이동에 더 많은 시간과 힘이 듭니다. 하여 아예 저렇게 사람들을 이용해 물건을 나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소렌토를 벗어난 적이 없다가 이번 전란으로 인해 처음으로 왕도를 벗어나 본 레드로였기에 로엔 왕국의 길이 얼마나 극악한 상황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면 다른 지역에서도 다들 저렇게 한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강이 있는 곳에서는 주로 배를 이용하지만 강이 없는 곳에서는 상인들이 저렇게 등짐을 지고 전국을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예, 부군단장님.”
“자네, 저 상단의 최고 책임자를 지금 당장 내게 보내도록 하게.”
“예? 예.”
제 할 말만 하고는 몸을 돌려 다시금 지휘부 막사 쪽으로 가 버리는 레드로의 행동에 어이없어하던 워렌은 어쨌든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상단 책임자를 찾아 그를 데리고 레드로의 막사로 향했다.
“돈 케일이라고 하옵니다. 남작님께서 소인을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그렇네. 내 궁금한 것이 있어 자네를 오라 했네.”
“궁금하신 것이 무엇이옵니까?”
“내 듣기로, 자네 같은 상인들은 전국을 걸어서 다닌다고 하더군.”
“그렇습니다, 남작님.”
뜬금없이 뭘 그런 것을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하면 전국 곳곳의 길을 상세히 알겠군?”
“그렇습니다. 자랑이 아니라, 저희 상단뿐 아니라 왕국의 모든 상단이 전국 방방곡곡의 길이란 길은 모두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지도에 없는 길도?”
“훗! 남작님, 저희는 지도에 있는 길보다 없는 길을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실상 지도에 나올 정도의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면 묻겠네. 카르파티아 산맥을 따라 디엔 강 남쪽의 케인으로 최단시간 내에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
“예, 남작님. 힘들긴 하지만 소인들 발걸음으로 이틀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습니다.”
“정말인가?”
“예, 남작님.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좋네. 자네, 나와 함께 갈리 자작님을 뵈러 가도록 하지.”
“예? 예.”
묘책을 찾아낸 레드로는 케일 상단의 단주의 아들인 돈이란 자와 함께 서둘러 갈리 자작을 만나러 갔다.
이틀 후 6군단 병사들은 질 수 있는 만큼의 등짐을 진 채 카르파티아 산맥을 오르기 시작했다.
“적의 대선단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규모는?”
“대략 350척 정도라고 합니다.”
“선종은?”
“수송선이 대부분이지만 각종 전함의 수가 150척 정도라고 합니다.”
“곧 출동할 것이니 준비시키게.”
“예, 백작 각하!”
해군 사령관 아몬 폰 폰티악 백작은 적의 대규모 선단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적들이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 후, 델마항에 정박해 있던 로엔의 해군 전함 40여 척이 폰티악 백작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닻을 올리고 돛을 내려 출항하였다.
“적장의 능력이 상당하다 들었는데 너무 자신하는 것 아닌가?”
프란시스는 걱정이 되었다.
해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지만 로엔의 해군 사령관인 아몬 폰 폰티악 백작의 귀신같은 지휘 능력은 이미 포넬에서도 유명했다.
아니, 유명한 정도가 아니라 그를 존경하고 영웅시하는 무리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이먼 백작은 거침없이 적의 바다를 진격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 동원된 전함만 150척입니다. 그리고 해전이라는 것이 결국은 배 위에 오른 병사들 간의 접전을 통해서 승패가 좌우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2백 척이나 되는 수송선도 결국은 전함과 다를 바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로엔의 해군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호! 해전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아는가 보네?”
코넬이 알은체하자 빈정거리는 프란시스였다.
“그, 그것이 아니라…….”
“됐어. 그냥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마라.”
“예, 전하.”
정벌군에 속하여 출전을 하게 된 이후, 프란시스는 늘 이처럼 냉소적으로 사람을 비꼬았다.
덕분에 가장 힘든 것은 그의 호위 기사로 함께하고 있는 코넬이었다.
“그만 나가 봐.”
“예, 전하.”
코넬이 선실 밖으로 나가자 프란시스는 신경질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선실 안을 서성거렸다.
“어머니.”
문득 어머니인 마리가 생각났다. 아들인 자신에게 자유를 만들어 주기 위해 당신 스스로의 삶과 왕실의 혈통마저도 포기하신 분이다.
정벌군에 속해 출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뵙기 위해 찾아갔을 때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렸다.
“대가를 치르게 하겠습니다. 왕실을, 그리고 어머니와 형제들을 그렇게 만든, 나로 하여금 자랑스러운 나의 이름을 버리게 만든 그들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도록 할 것이다!”
분노가 일자 선실 안의 공기가 갑자기 팽팽하게 당겨졌다. 마법사나 정령술사 그리고 익스퍼트에 오른 검사만이 보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적이다! 적선이 보인다! 모두 전투준비!”
땡! 땡! 땡! 땡!
“후후! 좋아. 어디 로엔의 대영웅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살펴보기로 할까?”
적선이 나타나자 갑자기 배가 온통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소란을 느끼면서 프란시스는 갑옷을 챙겨 입었다.
똑! 똑!
“전하! 코넬입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적선이 나타나자 단숨에 달려온 코넬의 목소리는 상당히 상기되어 있었다.
“뭐지?”
“적이 나타났다고……. 아! 소관이 하겠습니다.”
적이 나타났음을 알리고 전투를 위한 준비를 돕기 위해 달려온 코넬은 프란시스가 홀로 갑옷을 챙겨 입는 모습에 황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갑옷을 입는 것을 도왔다.
“예전에 신년 하례 때 입궁한 카즈모 백작이 네 페니테라는 갑옷을 보여 준 적이 있지.”
“네 페니테 말씀이십니까?”
“그래. 정말 대단했지.”
“전하께서 감탄하실 정도라면 확실히 대단하긴 대단한가 봅니다.”
프란시스 왕자에 대해 잘 아는 코넬은 그가 결코 빈말을 하거나 무엇인가를 과장해서 말하는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맞아.”
“하면 이제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카즈모가 그 이전까지는 무명이었던 신예인 알마리온에게 당하였고, 카즈모 백작의 가신인 발몬 남작이 카즈모 백작의 신물과도 같은 네 페니테를 그에게 맡겨 놓으며 주군의 복수를 한 후 네 페니테를 찾아갈 때까지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는 것은 이미 포넬의 모든 귀족들에게 널리 퍼진 이야기였다.
“훗! 그래야지. 반드시.”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을 위한 것이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그자는 어떤 자일까? 내가 존경하는 카즈모 백작을 제압할 정도라면 분명 대단한 자이겠지?’
어린 시절 몇 번 보았던 카즈모를 프란시스는 존경했다. 카즈모는 프란시스의 우상이자 닮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던 대상이다.
그런 카즈모를 정당한 대결로 이기고 백작의 신물인 네 페니테를 보관하고 있는 알마리온이라는 자를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는 프란시스였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 그대를 꺾고 네 페니테를 찾으러 곧 갈 것이니 말이야!’
“다 됐습니다, 전하.”
“그래? 그럼 나가지.”
“예!”
드레이크 해협은 그 폭이 그리 넓지 않고 물살이 빠르기로 유명한 곳으로, 이곳 해협이 악명 높은 것은 밀물 때 넓은 남해의 바닷물이 좁은 드레이크 해협으로 한꺼번에 밀려와서 서해로 빠져나가면서 해안의 양쪽 바닷가와 급경사를 이뤄 물이 쏟아지듯 빠른 급물살이 흐르기 때문이었다.
이곳 드레이크 해협의 또 다른 특징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암초가 솟아 있다는 점이다.
급물살로 흐르던 물살이 이러한 암초에 부딪쳐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용돌이치면서, 이곳에 휩쓸리게 되면 배를 조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뭐야? 겨우 저 정도뿐인가?”
갑판 위로 나온 프란시스는 로엔의 해군 함정이 불과 20여 척이 전부이고 그나마도 크기가 포넬의 함선에 비하면 그리 크지도 않다는 것에, 잔뜩 기대하고 있다가 맥이 확 빠져 버렸다.
“쳇! 뭐야? 게다가 도망가잖아? 정말로 적장이 우리 포넬에서도 영웅으로 추앙받는 아몬 폰 폰티악 백작이 맞는 건가?”
이대로 끝이 나면 안 되었다. 어머니 스스로 당신의 삶을 포기하고 또한 왕가의 혈통까지 포기해 가면서까지 자신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그 기회를 완성시켜 줄 이가 바로 로엔 해군 총사령관인 폰티악 백작이었다.
한데 그가 이대로 배를 돌려 도망을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조급한 마음이 드는 프란시스였다.
“그게…….”
“하긴 겨우 20척 정도로 3백 척이 넘는 우리를 상대한다는 것은 자살행위겠지. 그래도 뭔가 아쉽네. 안 그래?”
“그러게 말입니다.”
프란시스와 코넬이 아쉬워하는 것을 알기라도 한 것일까? 포넬의 전함들이 줄을 지어 도망치는 로엔의 전함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전함에 타길 잘했군.”
“그러게 말입니다.”
적의 전함을 쫓는 것은 덩치가 큰 수송선의 몫이 아닌 전함들의 몫이었고, 프란시스는 전함에 승선해 있었다.
“어라? 저놈들 뭐지? 기함은 버티고 있는데 일부가 도망을 치기 시작하네.”
대장기가 걸려 있는 로엔의 기함을 비롯한 일부 전함은 후퇴를 하면서도 철저하게 진형을 구축한 채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지만, 일부는 겁을 집어먹었는지 진을 이탈하여 제멋대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전열을 이탈하는 적의 모습까지도 함정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비단 프란시스만이 한 것이 아니었는지, 정벌군 선단을 지휘하는 게이먼 백작 또한 적을 공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겠는지 일관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보십시오. 기함에서 총공격 명령을 알리는 깃발이 올랐습니다!”
“…….”
코넬의 말처럼 기함에서 총공격을 알리는 깃발이 올라오기는 하였지만 프란시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단지 느낌뿐이지만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드는군. 좀 더 신중히 적의 작전을 알아보지도 않고 총공격이라?’
일단 적의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총공격을 선택하기보다는 일부를 동원하여 적을 찔러보는 신중함을 보여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함정이야, 이건! 분명해!’
이러한 프란시스의 느낌이 확인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 왜 저러지? 전하! 앞선 배들의 움직임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코넬의 지적처럼 어느 한 지점에서 포넬의 전함들의 움직임이 확실히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급물살을 타고 빠르게 이동하던 전함들이 어느 한곳에서 갑자기 움직이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거나 하기 시작했다.
“함정이다! 배를 돌려야 해!”
저도 모르게 한 말이었다.
아무리 어머니의 죽음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만든 기회였고 그것이 완성되기만을 기다렸던 그이지만, 그는 포넬 왕국의 왕가의 혈통을 이은 직계.
결국 이러한 순간에 함정에 빠진 포넬군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소리친 것이다.
“함정이란 말입니까? 하지만 어떻게 바다 한가운데에 함정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비록 연안이긴 해도 바다 한가운데서 함정이라니.
“보라고! 뭔가에 걸려서 배들이 전혀 움직이질 않고 있어! 게다가 바다의 폭도 좁은 데다가 물살이 너무 빨라 뒤따르는 배들이 방향을 틀지 못한 채 서로 부딪치고 있잖아!”
“이런!”
프란시스의 말처럼 어느 한 지점에서 배들이 꼼짝을 못하는 사이 뒤를 따르던 배들이 미처 방향을 틀지 못한 채 빠른 물살에 휩쓸리면서 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포넬의 배는 가볍고 속도가 빠르지만 그만큼 약하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치명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배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함령이 오래된 배들과 건조 과정에서 부실하게 건조되었던 것들 그리고 재료가 좋지 않았던 배들이 이내 깨져 나갔다.
이에 뒤를 따르던 배들이 앞선 배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내렸던 돛을 올리고 닻을 내리며 충돌을 피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지만 이러한 노력도 그다지 효과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이러다 물살이라도 바뀌게 되면…….”
또 하나의 불길한 생각이 드는 프란시스였다.
“어? 어? 어?”
불길한 생각일수록 더 잘 들어맞는다 했던가?
프란시스가 승선한 전함은 필사적인 노력으로 간신히 앞선 배들과의 충돌을 피하긴 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배가 물길에 따라 뒤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그리고 이때를 맞춰 먼저 전열을 이탈한 전함들을 제외한, 전열을 유지하며 퇴각하던 로엔의 전함들이 일거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적, 적선이! 적선이 몰려옵니다!”
‘이런 것이군. 이렇게 그동안 우리 포넬의 해군이 저 한 사람에게 농락당했던 것이군. 후후후!’
그동안 왜 그렇게 포넬의 해군이 로엔의 해군을 당해 내지 못하고 번번이 당하기만 하였는지 현장에서 직접 겪어 보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놀랄 일들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물살이 바뀌면서 충돌하여 파괴된 배들을 무시한 채 살아남은 포넬의 전함들을 집중 공략하기 시작한 로엔 측 전함들은 노를 이용하여 배를 조함하며 철저하게 근접전을 피하면서 원거리에서 공격을 하였다.
여기서도 로엔과 포넬의 전함의 차이점이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로엔의 전함은 근해에서만 운항을 하였기에 정밀한 조함을 위해 노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포넬의 전함은 주로 먼 곳까지 나가 해적 활동을 하느라 빠른 속도만을 원했고 때문에 노 같은 것은 설치되어 있지 않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정밀한 조함이 불가능했다.
원거리에서 불화살들이 빗줄기처럼 날아 들어왔다.
‘약군. 철저하게 이점을 잃지 않고 최대한 활용하고 있어. 정말 대단한 자다. 이런 자를 적으로 두고 있다는 것이 포넬의 불운이라면 불운이겠군.’
이점을 이용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충분한 이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지휘관의 실수로 인해 결정적인 승기를 놓치는 경우는 허다했다.
주어진 이점을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활용하는 것도 지휘관의 능력이었고, 그런 점에서 볼 때 로엔의 해군을 지휘하고 있는 폰티악 백작은 확실히 포넬의 해군을 지휘하는 지휘관들이 따르지 못할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하! 저쪽을! 저쪽을 보십시오!”
“또 무슨? 이런!”
호들갑을 떠는 코넬이 가리킨 곳을 본 프란시스 또한 낭패감이 들었다.
해협 입구에 남아 있던 수송 선단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또 다른 로엔 해군 소속 전함들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완전히 당했어!”
거대한 크기의 수송선들이 로엔의 전함에 의해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당하여 격침되자 가뜩이나 좁고 수심도 깊지 않은 해협의 입구와 출구가 동시에 막혀 버리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렇게 앞과 뒤가 막혀 버리자 로엔의 공세는 더욱 강력해졌고, 그에 따라 포넬의 피해는 순식간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란시스가 승선해 있는 전함 또한 로엔의 공격의 목표가 되었다.
“불이다! 불이 붙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불을 끄란 말이다!”
불길이 일어나자 다들 허겁지겁 배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노력하였다.
불길을 잡는 데 실패하면서 배 전체로 화염이 번져 나가자 결국 포넬의 병사들은 황급히 바다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전하, 아무래도…….”
“잘됐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못 들었나? 잘됐다고 했다.”
“그렇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육지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으니 말입니다.”
“훗! 내 말을 오해한 모양이군.”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망망대해의 배 위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적에 의해 구출되지 않는 이상 죽은 목숨이다. 하지만 이처럼 가까운 곳에 육지가 위치해 있다면 조금만 고생하면 살아날 수 있었기에 이를 다행이라고 하는 줄로만 알았다.
“이제 더 이상 그댄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지.”
“전하?”
이제야 프란시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잡은 코넬이었다.
“훗! 마치 전혀 예상 못 했다는 표정이군?”
“전하!”
“훗! 모난 돌에 가까이 있다 자네까지 정을 맞게 되었군. 어차피 나도, 그리고 자네도 죽기 위해 이곳에 보내졌다는 것을 전혀 몰랐나?”
“그게 무슨…….”
“하긴 큰일을 꾸미려면 때로는 자신을 속여야 할 때도 있는 법. 자네 같은 하급 기사에게 일일이 중대사를 알릴 필요는 없지.”
“하면…….”
“맞아. 이 자리는 나와 그대의 죽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
“하지만 그런 고메즈의 생각은 처음부터 어머니께서 만드신 함정이었지.”
“으음…….”
“내가 왜 이런 것을 자네에게 알려 주는 것인지 아나? 그리고 내가 왜 배 안에서 일부러 내 갑옷을 망가뜨리고 자네와 똑같은 갑옷을 구했는지 아는가?”
“알 것 같습니다. 소관의 죽음을 전하의 죽음으로 위장하려고 하시는 것이군요.”
“그렇네. 이게 그동안 어쨌든 내 곁에서 함께했던 자네에게 주는 내 마지막 선물이라네.”
“으음.”
“이제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군.”
“성공하십시오. 그리고 부디 뜻하시는 바를 모두 이루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자네…….”
“그동안 전하와 함께하였던 시간들, 소관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전하의 사람이 되지 못했던 것이 늘 후회스러웠습니다.”
“으음…….”
“그럼 소관은 이만.”
“그만!”
말릴 틈조차 없었다. 프란시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코넬이 그대로 몸을 돌려 타오르는 불길 속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젠장! 젠장! 젠장! 으아아아!”
처음에는 자신의 완벽한 탈출을 위해 코넬을 희생시킬 생각이었다.
하나 마지막 순간 코넬의 말과 행동으로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그가 자신을 위해 스스로 불구덩이 속에 몸을 던지는 모습을 보면서 프란시스는 울분을 터뜨렸다.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6군단 병력 전체가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디엔 강의 남쪽에 위치한 직영지인 케인이란 곳에 도착을 한 것은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닷새가 지난 후였다.
그리고 이틀 동안 휴식과 함께 강을 건널 수 있는 뗏목을 만들며 주변을 정찰하는 등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케인에는 현재 7백 정도의 적군이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케인의 백성들의 말로는 주변 직영지나 영지에도 비슷한 정도의 적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강 북쪽의 몬테른 요새에는 지금 1개 천인대 정도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기사 데니스 브레인의 보고 내용을 모두 들은 갈리 자작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부군단장.”
“예, 군단장님.”
“자네가 1개 천인대를 지휘하여 디엔 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하는 한편, 몬테른 요새를 포위하여 적의 대응을 차단토록 하게.”
“예, 군단장님.”
“브레인 경, 빅터 경 그리고 작센 경.”
“예, 군단장님.”
“자네들 세 사람은 각각 1개 천인대씩을 지휘하여 케인 성에 주둔하고 있는 적군을 섬멸토록 하게.”
“예!”
“이후 자네 세 사람은 이곳 케인 성을 근거로 하여 적을 차단, 보급로를 확보, 유지토록 하게.”
“예, 군단장님.”
“곧 로엔달 자작이 지휘하는 25군단이 후속해 올 것이니 당분간만 버티면 된다. 알겠나?”
“예! 군단장님.”
“그럼 시작하도록 하게.”
“예! 군단장님!”
계획은 세워졌고, 이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날 밤. 레드로의 지휘를 받은 1개 천인대가 지난번 롬 강을 건널 때와 같은 방식으로 강을 건널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경.”
“예.”
“그대가 부교를 놓는 작업을 지휘하시오. 나는 주변을 정찰하고 오도록 하겠소.”
“예, 부군단장님.”
이런 일은 수하에게 맡겨도 좋을 일이지만 유난히 적극적인 레드로는 이러한 일까지 직접 하였다. 그로 인해 그의 밑에 있는 기사들이나 병사들이 무척이나 힘들어하였지만 레드로는 그런 것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체하는 것인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게 십여 명 정도의 병사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레드로의 모습에 제임스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부교를 놓는 작업을 계속 진행해 나갔다.
“정찰을 도는 적병들입니다.”
“좋아. 저들을 생포해.”
“예, 부군단장님.”
정찰을 도는 적병들을 발견한 순간 레드로에게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얼마 후 정찰을 돌던 포넬 병사들을 생포해 오자 레드로는 그들을 심문하여 몬테른 요새의 사정에 대해 속속들이 캐묻고는, 요새 안의 포넬군 병력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의 절반 정도밖에는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상당 부분이 부상병들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자네는 지금 곧바로 제임스 경을 이곳으로 모셔 오게. 아울러 지금까지 강을 건넌 병력도. 알겠나?”
“예, 부군단장님.”
10여 분 후쯤 제임스가 백 명 정도의 병사들을 데리고 레드로가 기다리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사정 이야긴 들었나?”
“예. 한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강을 건넌 병사들의 수는 불과 2백 명. 레드로의 명령으로 인해 그중 절반을 데리고 오긴 하였지만 제임스는 불안했다.
“적은 아직 우리가 이곳에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네. 지금이 기회야.”
“하지만 병력이…….”
“백 명 정도면 충분하네.”
“알겠습니다.”
하긴 레드로는 익스퍼트.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요새 안에는 대략 6백 명 정도의 병력이 머물고 있지만 그중 절반은 부상자들이라 들었으니 레드로와 백 명 정도의 병력이라면 승산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승산이 아주 높은 편이었기에 제임스 또한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그럼 자네는 계속해서 도강을 위한 작업을 진행하면서 군단장님께 이 일을 보고토록 하게. 그러면 알아서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이네.”
“예, 부군단장님.”
“그럼 돌아가게.”
“건승을 빌겠습니다.”
제임스가 병사들을 남겨 놓고 돌아가자 레드로는 곧바로 기습 공격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네가 영웅이 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네놈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전적으로 네가 하기에 달려 있음을!”
“아, 알겠습니다.”
몬테른 요새의 문 앞에서 다시 한 번 포로로 잡은 포넬 병사에게 다짐을 받은 레드로는 그를 앞세워 요새로 다가갔다.
“어이, 데니! 별일 없지?”
“하하. 있을 턱이 있겠어? 피곤하니까 어서 빨리 문이나 열어 달라고.”
“쳇! 뭘 했다고 피곤해? 알았으니까 잠시 기다리라고. 이봐! 문을 열어라! 정찰을 나갔던 자들이 돌아왔다!”
이윽고 요새 문이 열리자 포넬의 병사로 변장을 한 레드로와 그를 따르는 십여 명의 병사들이 그 뒤를 따라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시작한다!”
“예!”
챙! 채챙!
“무슨?”
“으악!”
레드로는 자신들을 안내한 포넬의 병사를 밀쳐 내고는 순식간에 요새의 문을 여닫는 도르래가 있는 곳을 장악했다.
“적? 적이다! 적이 침입했다!”
땡! 땡! 땡! 땡!
문을 여닫는 장치를 빼앗긴 이후에야 적이 침입했음을 깨달은 포넬의 병사들이 서둘러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소리치고 비상종을 올렸지만 이들의 대응은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이때는 이미 대기하고 있던 6군단 소속 병사들이 열린 요새 문을 통해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절반은 나를, 나머지 절반은 문을 지킨다. 가자!”
“예!”
조만간 또 다른 지원병들이 계속해서 도착하겠지만 일단 백 명으로 이곳 몬테른 요새를 방어하고 있는 적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 누구도 실패를 걱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러한 자신감은 익스퍼트인 레드로란 존재가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드로 또한 처음부터 자신의 능력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면서 적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빠르게 항복을 결정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강을 건넌 후 허겁지겁 달려온 또 다른 지원병들이 요새에 도착하자 요새를 지키던 포넬군 지휘관은 비세를 인정하고는 순순히 항복을 하였다.
“하하. 수고하였네, 부군단장! 하하하!”
순간의 기지로 몬테른 요새를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장악한 것에 갈리는 크게 기뻐하였다.
만약 레드로가 그러한 기지를 발휘하지 못하였다면, 몬테른 요새를 장악하는 것 자체가 어렵거나 하진 않았겠지만 어쨌든 시간이 걸리거나 피해가 발생하였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군단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소관의 생각으로는, 곧바로 서쪽의 호이켄 요새 또한 점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곳 요새를 지휘하던 자의 말에 의하면 그곳 또한 6백 명 정도의 적군만이 주둔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긴 이곳과 그곳은 디엔 강 상류의 핵심적인 요새이지. 알겠네. 자네가 2개 천인대를 인솔하여 그곳을 점령하도록 하게. 아! 그리고 조금 전 후속해 온 25군단과 함께 신무기가 도착하였네.”
“신무기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후후, 아마 자네도 깜짝 놀랄 것이네.”
“……?”
갈리의 장난기 어린 표정에 궁금증이 더해진 레드로였다.
“자네도 알지? 마법 아이템 말이네.”
“그건 적군들이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마법 아이템을 모르는 로엔군 지휘관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으로 지금까지 입은 피해가 한두 번이 아니고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네.”
“예? 그게 무슨……. 하면 우리 로엔의 마법사들도 그것을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까?”
갈리의 말에 레드로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하, 자네도 영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군. 하긴, 나도 조금 전 그 말을 듣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네. 아! 어서 오시오, 체임버스 남작.”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는 쿤테르를 반갑게 맞이하는 갈리였다.
“자네 오랜만이군, 이그나티우스 남작.”
“예.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체임버스 남작님. 한데 정말입니까?”
“뭐? 아! 마법 아이템 말인가? 그렇다네. 그동안 적의 비밀 병기인 마법 아이템을 연구하였는데 그것을 우리도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이번에 소렌토 수복을 위해 처음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네.”
“하면 남작님께서 그것을 제작하실 수 있게 되신 것입니까?”
“하하. 그건 아니네. 나도 일조를 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을 만든 이는 따로 있다네.”
“아…….”
이후 세 사람은 마법 아이템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가 호이켄 요새 공략을 위한 전략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강을 건너온 2개 천인대를 레드로가 지휘하여 호이켄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이동하였다.
다만 세 사람의 협의 결과 호이켄 요새 공략에는 마법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기에 쿤테르는 호이켄 요새 공략 작전에는 빠지게 되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 올 무렵 나타난 일단의 병력을 보며 호이켄 요새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가 비상종을 울렸다.
“어디서 오는 병력이냐?”
비상종 소리에 황급히 옷을 챙겨 입고 나타난 체이스 보우는 요새 문 앞에 도열해 있는 일단의 병사를 보고 긴장하여 물었다.
“연락 못 받았나? 우리는 5군단에 충원되기 위해 이동 중인 지원 병력이다! 그리고 나는 골리안 백작 영지의 기사인 덴버 딘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아! 골리안 백작 영지의 딘 경이시오? 난 하겐 남작 영지의 기사 체이스 보우라고 하오.”
“하하! 반갑소, 보우 경.”
“반갑소. 한데 5군단에 배속되었다 하였소?”
“그렇소!”
적군의 공격이 치열하게 진행되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군단이 바로 5군단이었다.
현재 이곳 호이켄 요새와 바로 이웃하고 있는 몬테른 요새에는 그러한 5군단에 속해 있던 병사들 중 부상을 입고 치료를 위해 이송된 부상병들이 제법 많았다.
게다가 이미 1군 사령관인 안하임 백작이 여러 차례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곧 지원 병력이 도착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기에 갑자기 모습을 나타낸 이들에 대한 의심이 처음보다는 확실히 줄어들었다.
하나 그래도 뭔가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남았는지 보우는 쉽게 문을 열어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한데 5군단에 배속된 지원 병력이라면 의당 5군단 주둔지로 향할 것이지 왜 이곳으로 온 것이오?”
당연한 의문이었다.
“보우 경! 우리는 20일 전에 처음으로 로엔에 건너왔소. 이곳까지 찾아오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시오? 게다가 지원 병력을 워낙 재촉하는 바람에 필요한 물자조차 가져오지 못했단 말이오. 요새 문을 열어 주지 못하겠다면 좋소! 대신 다들 밤새 길을 걷고 강을 건너오느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괜찮다면 따뜻한 수프라도 좀 나눠 주시오!”
“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우 기사님.”
따뜻한 수프라도 나눠 달라는 말에 잠시 고민하던 보우는 다시금 요새 아래를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좋소! 하지만 요새 문을 열 수는 없소! 이 점 양해 바라오.”
“하하하, 알겠소. 따뜻한 수프만 나눠 주는 것으로 충분히 감사하오, 보우 경!”
마지막 남은 찜찜함 때문에 요새 문을 열어 주지 못하겠다는 자신의 말에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그나마도 고맙다며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 불편해지기도 하였다.
“대신 딘 경을 비롯한 백인대장들은 요새 안으로 모시도록 하겠소.”
“오! 참으로 감사하오, 보우 경.”
그래도 지휘관들에 대한 대우를 해 주겠다는 보우의 말에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는 딘이었다.
“모두 긴장을 풀고 자연스럽게 행동하시오.”
“예, 부군단장님.”
그랬다. 이들은 바로 호이켄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몬테른 요새에서 생포한 포넬 병사들의 군복으로 갈아입은 레드로와 로엔의 병사들이었다.
다만 2개 천인대 병사들 전원이 포넬 병사들의 복장으로 위장할 수가 없어 최대한 비슷하게 보이는 옷으로 갈아입게 하였다.
얼마 후 보우를 비롯한 몇 명이 요새의 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고, 이들은 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들어가십시다, 딘 경.”
“예, 보우 경.”
보우와 딘이란 자로 위장한 레드로가 앞서 요새의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고, 그 뒤를 따라 레드로와 함께 온 스무 명의 백인대 대장들이 줄줄이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챙! 채챙! 챙! 챙!
“헉!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딘 경!”
목젖에 닿아 있는 검에 기겁을 한 보우가 당황하며 물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보우와 함께 나왔던 자들도, 그리고 요새의 문 근처에서 기웃거리던 병사들도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훗! 아직도 그대 눈에는 내가 포넬군으로 보이나?”
“하면…….”
“난 대로엔 왕국 제6군단 부군단장인 레드로 폰 이그나티우스 남작이다.”
“이, 이런!”
“브레인 경.”
“예, 부군단장님.”
“문을 여시오.”
“예.”
그그긍! 그긍!
요새 문이 열리고 포넬 병사로 변장한 로엔의 병사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자! 이제 경이 해 주어야 할 일이 한 가지 남은 것 같은데. 어떻소, 보우 경?”
“하, 항복하겠습니다.”
“현명한 판단이오. 들으라! 너희의 지휘관이 항복하였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투항하면 모두 살려 주도록 하겠다!”
구태여 소리칠 필요조차 없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긴 해도 이미 포넬의 병사들은 요새를 가득 메우기 시작한 로엔군의 모습에 전의를 잃고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였다.
만 하루 동안 디엔 강을 건넌 6군단과 25군단의 협의 끝에 병력의 일부를 칼리에 남겨 놓은 6군단은 그동안의 공방으로 인해 가장 취약한 상태인 포넬의 5군단을 상대하기 위해 랜돌프 성으로, 그리고 로엔달이 지휘하는 25군단은 6군단이 포넬의 5군단을 상대하는 동안 이웃하고 있는 포넬의 3군단을 차단하기로 협의를 하고 곧바로 군을 움직였다.
“뭐야? 저것들 왜 저러는 거지?”
웅성. 웅성. 웅성.
갑자기 배후에서 나타난 적들로 인해 랜돌프 성에 주둔하고 있던 포넬의 5군단은 크게 당황하였지만 성이라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며 방어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성을 공략하기 위해 성에 접근했던 적군이 일순간 꽁지 빠지게 내빼는 모습을 보며, 적을 패퇴시켰다는 환호성보다는 그러한 행동을 하는 적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하나 이들의 의아함은 이내 풀렸다.
쾅! 콰앙! 쾅! 쾅! 쾅!
우르릉. 우릉! 쿵! 쿵!
거대한 폭발과 함께 그 충격으로 뿌연 흙먼지가 랜돌프 성 전체를 뒤덮었다.
거대한 흙먼지가 랜돌프 성 전체를 뒤덮을 때, 마치 천둥이 치는 것과 같은 소리가 흙먼지 속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럴 수가.”
“…….”
흙먼지가 바람에 실려 조금씩 걷히면서 드러난 참상은 6군단 병사들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도란 강변에 우뚝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던 랜돌프 성의 그 당당하던 모습이 이제는 거대한 벽돌 더미로 변해 버린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엄청난 위력이군요.”
“으음. 나도 이 정도 위력이 나오리라고는…….”
마법 아이템을 작동시킨 쿤테르 또한 랜돌프 성을 단번에 무너뜨린 마법 아이템의 위력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지 마나 증폭 마법진을 추가한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위력이 나오다니…….’
마법 아이템이라는 획기적인 물건을 개발한 포넬이었지만, 실상 전체적인 마법 수준은 포넬보다는 로엔이 월등히 높았다.
그런 로엔에서도 마법의 명가로 통하는 체임버스 남작 가문의 당대 가주가 바로 쿤테르였다.
비록 그 자신은 자질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 오랜 동안 3서클 마법사에 머물고 있지만, 그동안 가문에 쌓인 마법 지식만큼은 모두 그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쿤테르에게 국왕은 마법 아이템에 대한 연구를 맡겼고, 비록 자신의 실수로 그중 하나를 분실하는 큰 실수를 하긴 하였어도 짧은 기간 동안 마법 아이템을 연구한 쿤테르는 마법 아이템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알아냈다.
동일한 마법도 1서클 마법사와 3서클 마법사가 사용하면 그 위력이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
이유는 당연히 3서클 마법사가 마법에 대한 이해와 숙련도가 더욱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마나의 양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쿤테르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기존의 마법 아이템에 마나 증폭 마법진이라는 것을 결합하여 그 위력을 배가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단순히 성문과 그 주변의 성벽을 파괴하여 그곳을 통해 성안으로 진입할 계획으로 준비하고 있었다가 너무나 강력한 폭발력에 성의 한쪽이 아예 완전히 사라져 버린 모습에, 공격하는 6군단 측도 그리고 성에서 농성을 준비하던 포넬의 5군단 측에서도 모두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서는 반이나 날아가 버린 성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군단장님?”
그나마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레드로였다.
“음? 아! 내가 그만 깜빡했군. 고, 공격을…… . 아니, 하, 항복을 권유하게.”
“예, 군단장님.”
단 한차례의 강력한 마법 아이템의 공격으로 성의 절반이 날아가 버리면서 포넬의 5군단 지휘부 또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한꺼번에 날아가 버린 탓에 항복 권유는 쉽게 받아들여졌다.
아니, 설사 포넬의 5군단 지휘부가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적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마법 아이템보다 더욱 강력한 마법 아이템이 있음을 직접 몸으로 확인한 상태에서 무모한 항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항복하였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전장을 정리토록 하면서 강 건너로 전령을 보내도록 하지. 자네는 병력의 절반을 이끌고 25군단을 지원토록 하게.”
“예, 군단장님.”
“서둘러라! 한시라도 빨리 아군을 지원해야 한다!”
3군단 소속 제2천인대를 지휘하는 데이몬은 병사들을 재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멀리서도 확연히 확인될 정도로 큰 폭발이라면 이번에도 제5군단 전면으로 강력한 적의 공격이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하여 보유하고 있는 나머지 모든 마법 아이템을 한꺼번에 사용한 것처럼 보였다.
이에 3군단장인 마틴 폰 호세 자작의 명령에 따라 5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서둘러 이동하고 있었다.
쾅! 콰광!
“와아∼!”
“와∼!”
한데 이들이 5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랜돌프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착하였을 무렵 갑자기 대열의 앞과 뒤에서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화염이 크게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일단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몸을 드러냈다.
“저,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화염이 가시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자 사방은 어느새 적으로 물 샐 틈조차 없을 정도로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난 로엔의 25군단 군단장 로뎀 폰 로엔달 자작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포넬 제3군 제5천인대를 지휘하고 있는 기사 로크 데이몬입니다.”
“어떤가, 데이몬 경? 난 데이몬 경이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원하네.”
“항복을 권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
몇 번이고 갈등하고 또 갈등하였다.
하지만 데이몬은 결국 로엔달의 항복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항복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는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움직이는 이동로의 앞뒤에서 터진 것이 어떤 물건이라는 것을 데이몬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에게 사용했다면, 제5천인대는 최소한 절반 이상이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이렇게 항복을 권유하는 번거로운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 귀한 것을 이런 식으로 사용할 아군의 지휘관들이 과연 있을까?’
결과는 ‘없다’라는 것이다. 그것이 데이몬으로 하여금 항복을 결심케 한 것이다.
“항복하겠습니다.”
“현명한 판단이네.”
“퇴각하겠네.”
“하오나 백작 각하, 이대로 물러난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포넬의 3군단장인 호세 자작은 소렌토에 주둔하고 있는 포넬 1군 사령관이자 1군단장인 칼릭스 폰 안하임 백작의 말에 분통을 터트렸다.
“누군 좋아서 이러겠는가? 아직 자네에게까지 전달되진 않았지만, 어제 늦게 스펜서 후작 각하께서 보낸 전령이 도착하였다네.”
“스펜서 후작 각하께서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어떤 소식이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1군 사령관 안하임 백작은 차라리 전장에서 죽으면 죽었지 후퇴라는 것을 모르는 저돌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안하임이 이처럼 침통한 표정으로 퇴각을 결정했다는 것은 그만큼 정벌군 총사령관인 스펜서 후작에게서 전해진 소식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호세 또한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다.
“얼마 전 본국을 출발한 5진이 또다시 당하였다네.”
“예?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네. 게다가 이번에 출발한 5진에는 왕세자 전하께서 사기 진작 차원에서 함께 출정하셨다가 그만…….”
“으음.”
상징적인 의미 이상의 의미가 없는 왕세자다. 하지만 그러한 왕세자가 적군과의 교전 중에 전사를 하였다면 그것은 더 이상 상징적인 의미로 그치지는 않는 일이었다.
“하면 왕세자 전하의 복수를 위해서도.”
“나도 그렇게 하고 싶네. 하나 당분간 본국으로부터의 지원 자체가 곤란하다는 것이네. 따라서 전선의 폭을 줄이라는 것이 후작 각하의 명령이네. 그리고 나 또한 그것이 옳다 여긴 것이고 말이네.”
“하면 어디까지 퇴각하라는 것입니까?”
“바로 이곳이네.”
로엔의 영토가 모두 표시되어 있는 지도 위에서 안하임이 가리킨 곳은 중부 지역과 남동부 지역을 연결하는, 기름지고 너른 평야와 영지를 관통하며 흐르는 네일 강으로, 예부터 로엔 왕국 최고의 곡창 지역으로 알려진 더글러스 후작 영지였다.
포넬군이 굳이 이곳을 방어의 거점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이곳 더글러스 후작 영지의 동남쪽에 걸쳐져 있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끝부분은 현재 포넬 정벌군이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로엔의 동남부 지역과 연결되는 교통로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언제부터 퇴각을 하는 것입니까?”
“가능한 빨리.”
“알겠습니다. 하면 1군단부터 먼저 퇴각하도록 하십시오. 소관의 3군단이 뒤를 차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로엔 측의 병력이 속속 도란 강을 건너 랜돌프 성에 집결하는 동안 포넬의 1군은 디엔 강을 넘어 퇴각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의 뒤를 따라 제3군단 또한 퇴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하나 이들은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지난 2백 년 동안 로엔 왕국의 왕도였던 소렌토는 퇴각하는 이들 포넬군이 놓은 불로 인해 완전히 철저하게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