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인연
“느려! 그렇게 느려서 어떻게 날 상대하겠다는 것인가!”
챙! 채챙! 깡!
“이제 그만!”
“헉!”
날이 없는 수련용 검이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검 끝이 목 줄기에 닿을 때마다 코넬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이것이 만약 실전이었다면…….’
“소, 소관이 졌습니다, 왕세자 전하.”
“훗! 그렇다고 그렇게 얼굴까지 하얗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
“그건…….”
“됐어. 그건 그렇고 코넬, 자네 연습 좀 더 해야 되겠더군. 오히려 전보다 실력이 줄었어.”
‘소관의 실력이 준 것이 아니라 전하의 실력이 느신 것을 모르시는 것입니까?’
확실히 자신의 실력은 프란시스 레오나르도 폰 브리스톨 왕세자를 만나기 이전에 비하면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많이 늘었다.
하나 그보다는 프란시스 왕자의 성장이 더욱 빠른 것이었기에 오히려 자신의 실력이 준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을 자신도 왕세자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전하께서는 이미 초인의 벽을 뛰어넘으신 것이 아닐까?’
문득 의심이 드는 코넬이었지만 자신으로서는 확인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단지 의심만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세자 전하.”
“그러게 궁녀들 뒤꽁무니는 그만 쫓아다니라고 하지 않았나?”
“전하, 그건…….”
“하하. 웃자고 한 소린데 뭘 그렇게 정색까지 하는 건가? 그나저나 최근에 이상한 소식이 들리더군.”
“이상한 소식이라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전하?”
“로엔에 꽤 강한 자가 나타났다고 하더군. 그것도 나보다 어린 자가 말이야.”
“소관 또한 소문을 들었사옵니다. 노예 출신이라고…….”
“출신 따위는 중요치 않지.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가 중요할 뿐이야.”
전란이 잦은 포넬이었고, 이런 때문에 능력을 중요시하는 풍토가 보편화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하긴 왕자의 신분이면서도 오히려 그 신분으로 인해 날개를 펴 보지도 못하시는 분이시니. 왕가가 아닌 평범한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셨다면 이미 저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닐 분이시거늘…….’
왕세자인 프란시스의 호위 기사였지만 실상은 고메즈 대공의 사람인 코넬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프란시스의 면면을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상황이 얼마나 불우한 것인지 또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포넬에서의 왕가는 상징성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오히려 그 상징성으로 인해 철저하게 경계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 왕가의 혈통을 이은 존재들이었다.
“그자의 이름이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라고 했던가?”
“예? 예, 전하.”
“전장의 용맹한 전설이라? 쳇! 나만큼이나 멋진 이름이군.”
프란시스 레오나르도 폰 브리스톨 왕자의 이름은 자유로운 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속에 갇힌 영혼이 아닌, 저 드넓은 초원을 포효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라는 의미로 선왕이 직접 지어 준 이름이었다.
하나 프란시스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심지어 스물세 살의 나이인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궁을 나가 본 경험이 없었다.
“어쨌든 그런 멋진 이름을 가진 만큼 멋진 활약을 하고 있군. 그렇지 않나? 아니, 그렇게 말할 수도 없네. 그자가 상대한 군이 바로 우리 포넬의 군이니 말이야.”
“그렇습니다, 전하.”
문득 걸음을 멈추고 푸르디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프란시스였다.
“푸르군.”
‘내 마음은 언제 저 하늘처럼 푸르게 될 수 있을까?’
“소신을 청하셨다 들었사옵니다.”
포넬의 여왕인 마리 폰 브리스톨의 부름을 받고 입궁을 한 고메즈 대공의 행동에는 일국의 여왕을 대하는 공경함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대공. 공사가 다망한 분인데 이처럼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하군요.”
“별말씀을. 하온데 소신을 청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메즈의 행동에 여왕의 주먹이 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꼭 쥐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공께 한 가지 의논을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이렇게 청했답니다. 대공도 아시겠지만, 프란시스 왕자의 나이가 벌써 스물세 살입니다.”
“…….”
여왕이 갑자기 3왕자인 프란시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의도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고메즈의 냉정한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미 혼사가 상당히 늦은 나이가 아닙니까? 하여 혼사를 논했으면 해서 이렇게 대공을 청했답니다.”
“그러십니까?”
프란시스 왕자의 혼사에 대해 의논을 하겠다는 말에도 고메즈 대공의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뭐지? 왜 이러한 시점에서 갑자기 3왕자인 프란시스 왕자의 혼사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지?’
비상할 정도로 계산이 빠른 고메즈였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갑자기 3왕자인 프란시스의 혼사 문제를 꺼내는 여왕의 의도를 쉽게 짚어 내지는 못했다.
“내가 듣기에, 대공의 막내 여식이 올해 열여섯 살이라고 했던가요?”
“그러하옵니다, 여왕 폐하.”
“어떠한가요. 나는 대공의 여식과 3왕자가 혼인을 하는 것이 왕실을 위해서도, 그리고 대공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보는데 말이에요.”
“소신의 막내 여식과 말씀이시옵니까?”
“그래요.”
갑작스러운 혼담 제안에 고메즈는 가는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였다.
포넬의 왕가에는 모두 세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가 있었다.
이 중 첫 번째 왕자인 알프레드의 경우는 포넬의 4대 공작 가문 중 한 곳인 안트워프 공작 가문의 여식과 혼인을 하였지만 안트워프 공작 가문이 패권 다툼에서 가장 먼저 패배하면서 다른 세 공작 가문의 결정에 의해 독약으로 자결하게 되었으며, 두 번째 왕자인 베네딕트의 경우에는 열세 살의 나이에 한차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후 스스로 신관이 되어 지금은 전사의 신전의 신관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또한 두 명의 공주 중 언니인 레베카는 고메즈의 조카인 카리안 백작과 혼인을 하였으며, 두 번째 공주인 판도라 공주는 고메즈의 핵심 측근 중 한 사람인 카덴 백작의 후처로 들어가 있었다.
즉, 비록 유명무실하기는 하지만 프란시스 3왕자는 다음 대의 포넬의 국왕에 즉위할 가장 강력한 계승권자로, 고메즈가 패권 다툼에서 승리하기 이전에는 오히려 고메즈 측에서 그러한 3왕자를 자신의 사위로 만들기 위해 은밀히 추진하였지만 번번이 이를 거절당해 왔다.
‘그럼에도 끝까지 버티던 여왕이 이제는 오히려 3왕자와 내 딸과의 혼사를 제안한다?’
일단 여왕의 제안은 고메즈 측에서는 반대할 것이 전혀 없었다.
상징적이긴 해도 다음 대의 국왕이 자신의 사위라면 그만큼 정치적인 기반이 다져지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런 제안에 담겨 있는 여왕의 진심이 무엇인가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그것이 떠오르지 않는 고메즈였다.
이렇듯 쉽게 자신의 의도를 짚어 내지 못하고 있는 고메즈의 모습을 보며 여왕은 내심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대가 아무리 계산이 빠르다 하더라도 쉽게 내 의도를 알아내진 못할 것이오.’
“아무래도 중대한 문제이니 대공께서도 쉽게 결정하진 못하시는 것 같군요.”
“흠! 그렇사옵니다, 여왕 폐하.”
“그래야지요. 여염집의 혼사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하물며 왕국의 최고 명문가인 대공의 가문과 왕실과의 혼사 문제이니 더욱더 신중해야겠지요.”
여왕은 의도적으로 대공의 가문을 왕가보다 앞에 말하여 고메즈의 우월감을 치켜세워 줬다. 이러한 여왕의 행동 또한 의도된 것이긴 하지만 효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여 주시니 소신 다시 한 번 신중히 생각해 보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하오면 신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사옵니다.”
고메즈가 물러나자 여왕의 집무실과 연결된 내실에서 또 다른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들었나요?”
“예, 여왕 폐하.”
“이제는 후작이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잘 알고 있사옵니다. 여왕 폐하의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후작 또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에요. 안 그런가요, 칼리프 폰 에인세 후작?”
칼리프 폰 에인세 후작. 고메즈 대공의 최측근이자 고메즈 대공에 이은 2인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그러한 인물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고메즈 대공의 명령이라면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 정도로 맹목적으로 고메즈를 따르는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여왕은 알고 있었다. 그가 고메즈 대공에게 보이는 맹목적인 충성심 뒤에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고 있는 맹수라는 것을.
“명심하겠사옵니다, 여왕 폐하.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러도록 하세요.”
고메즈 대공에 이어 대공의 최측근인 에인세 후작과의 짧지만 의미심장한 만남을 끝낸 여왕은 현기증을 느꼈다.
“후…….”
딸랑! 딸랑!
“부르셨습니까, 여왕 폐하.”
종을 울리자 시종장과 하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를 좀 부축해 다오. 좀 쉬고 싶구나.”
“예, 여왕 폐하.”
“또다시 참패했단 것인가!”
“…….”
고메즈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대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 한 놈에게 당해야 한단 말인가! 언제까지!”
그를 이렇듯 분노하게 만든 것은 바로 로엔의 해군 총사령관 아몬 폰 폰티악 백작이었다.
아몬 폰 폰티악 백작은 포넬 왕국으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적이었다.
포넬의 해군들 사이에 폰티악 백작은 바다의 신과 전쟁의 신의 축복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로 그를 죽게 만들 수 있는 자는 오직 주신인 오딘뿐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수십 배에 달하는 전력의 차이를 보이는 상태라 해도 그는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어 냈고, 그로 인해 포넬의 로엔 왕국 정복 전쟁의 일정은 큰 타격을 받아야만 했다.
오죽하면 욱하는 마음에 그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들을 대거 보내기도 하였지만, 로엔 왕국의 네 번째 익스퍼트이기도 한 폰티악 백작의 암살은 번번이 실패를 하였다.
이에 고메즈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 로엔의 귀족들을 매수하기 시작하였고, 고메즈 대공에게서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뇌물을 받아먹은 프리모 공작과 더글러스 후작 등은 가뜩이나 국왕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하는 폰티악 백작에게 누명을 씌워 그를 해군 총사령관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폰티악 백작이 국왕의 철저한 비호 아래 처형당하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어쨌든 그가 해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당한 것을 기회로 최대한 병력과 물자를 로엔에 보냈고, 대대적인 반격을 취하여 전쟁을 끝내려 했다.
그 정도로 포넬에 있어서 아몬 폰 폰티악이란 존재는 최고의 기피 대상이었다.
한데 그런 그가 최근 힘이 강대해진 국왕에 의해 해군 총사령관의 자리에 복귀하였고, 이제는 무의미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인 몇 척 되지도 않는 전함을 이끌고 또다시 수십 배나 되는 포넬의 해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자 포넬 해군에는 그에 대한 공포가 또다시 고조되고 있었다.
고메즈로서는 그가 없을 때에 전쟁을 끝내지 못한 것이 아쉬우면서도,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전쟁 전체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게다가 뭐라고? 제4군도 모자라 7군까지도 의용군 놈들에게 당했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보나?”
“…….”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보란 말이다! 말을!”
쾅! 쾅! 쾅!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미는 것인지 책상을 두들기며 수하들을 닦달하였다.
“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가 무엇이기에 그놈 하나를 이기지 못해 이런 치욕을 당해야 하는 것이냔 말이다!”
“…….”
“내가 말해 줄까? 그대들이 왜 그놈 하나를 이기지 못하는 것인지를 말이다!”
고메즈의 말에 고개를 잔뜩 숙이고 있던 자들이 저도 모르게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끗거렸다.
“적장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도 문제다! 어느새 그대들 마음속에 그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더 큰 문제는, 그대들 마음속에 그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두려움이란 극복할 수 있는 불편함이라면, 존경이란 그것을 극복해야 할 불편함이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아몬 폰 폰티악 백작이 존경받을 위인이라는 것은 나 또한 인정한다. 하지만 그를 존경하는 것은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그를 존경하는 것은 그를 극복한 후에 하여야 한단 말이다. 패배를 당연시하는 패자의 존경이 아닌, 스승의 경지를 뛰어넘는 제자와 같은, 승자의 존경을 보이는 것이 그를 더욱더 존경하는 것임을 모른단 말인가!”
고메즈의 열변에 대전은 일순 숙연한 분위기가 되었다.
확실히 그의 말처럼 패자의 존경은 자신의 패배를 정당화시키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승자로서의 존경은 존경하는 대상의 빼어남을 순수하게 존경할 수 있게 된다.
고메즈는 이러한 점을 모두에게 주지시켜 주었던 것이다.
“에인세 후작!”
“예, 대공 전하.”
“5차 원정대는 잘 꾸려지고 있는 것인가?”
로엔을 침공한 이래 이미 총 4차 60만에 가까운 포넬의 병력이 바다를 건너 로엔으로 향했다.
하지만 현재 로엔에 주둔하고 있는 포넬의 병력은 불과 23만.
지난 2년 동안 총 37만 명이나 되는 포넬의 젊은이들이 바다에서, 그리고 로엔의 땅에서 아까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이에 고메즈는 다시금 대규모 원정대를 꾸릴 것을 지시하였고, 이번 제5차 원정대에는 그동안 최대한 아껴 오고 있던 그의 친위군단을 포함한 10만 병력이 출병을 하기 위해 준비 중에 있었다.
이것으로 고메즈는 로엔과의 전쟁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었다.
“예, 대공 전하. 지금까지는 계획에 차질이 없사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하면 오늘 회의는 이만하도록 하지.”
두통과 함께 피곤함을 느낀 고메즈가 회의를 서둘러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인세, 그대는 나를 따르도록 하게.”
“예, 대공 전하.”
회의를 마친 고메즈와 에인세 두 사람은 고메즈의 집무실로 이동을 하고는 다시금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의논하기 시작했다.
“좀 쉬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전하.”
“아니야. 난 괜찮다네. 그보다 자네의 의견을 들어 보고 싶은 것이 있네.”
평소 독단적인 모습을 많이 보이긴 해도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이처럼 측근들의 의견 또한 폭넓게 수렴할 줄도 아는 인물이 고메즈였다.
“무엇이옵니까?”
“실은 여왕이 내게 혼담을 제의해 왔네.”
“혼담이라면, 3왕자와 대공녀와의 혼담 말이옵니까?”
처음 듣는 일처럼 짐짓 모르는 체하는 에인세였다.
“그렇다네.”
“하오나 그 일은 이미 전하께서 추진하였던 것이 아니옵니까?”
“그랬지. 한데 난데없이 여왕이 오늘 내게 혼담을 제의해 왔다네. 하여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은 것이네.”
“소관의 생각으로는 여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이유는?”
“그는 한 가지 이유 말고는 필요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한 가지는 무엇이지?”
“바로 대공 전하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내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지금도 세상은 대공 전하의 것이지만, 왕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대공 전하께서는 언제나 막후 실세의 자리를 면하실 수가 없습니다.”
“자네 말이 지나치군.”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왕실을 완전히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릴 수 있었다. 하나 그러지 않는 것은, 왕실이라는 허울을 이용하여 불필요한 힘의 낭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현실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왕자와 내 딸과의 혼사다?”
“그렇습니다.”
프란시스 왕세자는 왕실의 유일한 남자였다. 비록 둘째 왕자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전사의 신전은 한번 신관이 되면 두 번 다시 환속이 불가능하였으니 있어도 없는 존재와 다를 것이 없었다.
따라서 프란시스 왕세자와 대공녀가 혼인한 이후 왕세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다음 대의 왕위는 전례에 따라 대공녀에게로 전해지게 된다.
“후후, 재미난 생각이군.”
확실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재미난 생각이었다. 비록 막내딸인 셀리나가 평생을 수절하며 지내야 하겠지만 딸들이란 원래 가문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희생물들.
여왕이 사라지면 자연 셀리나가 전례에 따라 여왕이 될 것이고, 딸이 자신에게 왕위를 이양하게 되면 자신은 포넬의 왕이 될 수 있었다. 생각만 해도 짜릿한 쾌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후후후,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아니라 명실공히 유일한 포넬의 주인이 된다 이건가? 후후후.’
‘그래, 그렇게 달콤한 꿈에 빠져라. 하나 알아야 할 것이다. 그 달콤함이 사라지는 날, 비참한 현실이 그대를 집어삼킬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좋아. 그대의 계획대로 하지.”
“감사합니다, 전하.”
“그럼 나머지 일들은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게나.”
“예! 대공 전하.”
“부르셨사옵니까, 폐하.”
“그래. 어서 오너라.”
“한데 무슨 일로 소자를 부르셨습니까?”
“녀석. 이 엄마가 오랜만에 너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런 것인데 싫은 것이냐?”
“하하, 어머니도 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여기 다과를 좀 내오도록 하렴.”
“예, 여왕 폐하.”
궁 안에 같이 살고 있기는 하지만 아들이라 해도 자주 볼 수는 없는 것이 왕실 가족들이었다.
“이제 내 곁에는 너 하나밖에 없구나.”
“원, 어머니도 참……. 누님들도 자주 입궁을 하지 않습니까?”
“훗! 하긴 그건 그렇구나. 그래도 알지? 내가 네게 얼마나 의지하는지 말이다.”
“……예, 어머니.”
이제 왕가에 남은 아들이라고는 프란시스만이 유일했다. 첫째인 알프레드는 자결하였고, 암살을 당해 충격을 받은 둘째인 베네딕트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상행동을 보이다가 결국 전사의 신전으로 들어가 신관이 되었으며 두 공주 또한 정략혼으로 원치 않는 혼인을 한 이후 궁을 이내 떠나 버렸다.
두 딸이 그래도 자주 입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가 믿고 의지한 유일한 존재가 바로 프란시스였다.
“실은 오늘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오라고 했단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마리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이자 프란시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실은 요즘 네 혼담을 추진하고 있단다.”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보통의 경우라면 이미 가정을 꾸리고 남았을 나이다. 따라서 혼담이 오가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상대는 고메즈 대공녀입니까?”
혼담을 추진하고 있다는 어머니의 말에 프란시스는 그 상대가 누구인지 곧바로 예측할 수 있었다.
“그렇단다.”
“결국 그렇게 되는군요. 알겠습니다. 혼인 날짜는 언제입니까?”
오히려 담담하게 묻는 프란시스였다.
어차피 자신의 위치에서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어 혼인을 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더욱더 여인들을 멀리한 채 오직 검술 수련과 학문을 닦는 것에만 열중하였던 것이다.
혹시라도 사랑하는 여인이 생기게 되면 자신만 마음 아파하는 정도가 아니라 열에 열은 그 여인의 생명이 위태로울 것이 분명했기에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
“조만간 하게 될 것이란다.”
“예.”
“그리고 혼인식이 끝난 후, 넌 곧바로 전장에 나가게 될 것이란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단다.”
“으음.”
왕세자 책봉과 혼인식에 이어 곧바로 전장에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에 프란시스는 고메즈 대공과 그 일파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분노할 것 없단다. 그것은 이 어미가 꾸민 일이니 말이다.”
“어머니?”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였다는 마리의 말에 프란시스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살아남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거라. 그리하여 네가 그토록 원하는 것처럼 창공을 마음껏 자유롭게 날거라.”
포넬의 여왕이자 어머니인 마리의 눈에는 짙은 아픔과 그 아픔이 아롱져 있는 눈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게 내가 네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자, 마지막 선물인 것 같구나.”
“어머니!”
“이것을 늘 지니고 있어 주겠니?”
마리는 남편인 게오르그 폰 브리스톨로부터 혼인 때 예물로 받은 소박한 모양의 목걸이를 떼어서는 그것을 건네주었다.
“어머니. 흑흑!”
“사랑한다, 아들아.”
“소자도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두 모자가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들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 어떻게 되실 것인지 알면서도 떠나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차마 반대하지 않는 이 이기적인 소자를 부디 용서치 말아 주십시오, 어머니…….’
프란시스 왕세자와 셀리나 대공녀의 혼인식은 혼인 발표가 있은 지 닷새 만에 거창하게 치러졌다.
그리고 그 혼인식이 있은 지 열흘 후, 프란시스는 제5차 원정대에 속해 전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