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술의 승리 (13/70)

전술의 승리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적에게 기사단과 기병대 그리고 중장보병의 모습이 보이질 않고 있습니다.”

칸의 말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진을 벌인 포넬 7군 진형에는 이들 제1의용군 지휘부가 가장 우려하던 기사단도, 기병대도 그리고 중장보병도 전혀 보이질 않고 있었다.

“그러네? 저놈들이 우리를 얕보고 아예 출전 안 시키는 것 아냐?”

칸의 말에 적진을 살펴보던 하얀이리의 추측이었다.

“우회했다고 볼 수도 없는 것이, 기병대야 그렇다 치지만 기사단과 중장보병을 우회시키는 바보는 없지 않나요?”

한센을 보며 묻는 요들이었다. 그의 말처럼 기병대야 우회 공격을 기본으로 하는 병과이지만 중장보병과 기사단만큼은 우회 공격이 아니라 정면 돌파를 기본으로 하는 병과. 오직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병과였다.

“혹시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그것을 노린 노림수?”

“글쎄? 그건 아닐 것 같다. 적의 수가 저렇게 많은데 그런 꼼수까지 부리겠어? 게다가 우리에겐 기사단도 기병대도 중장보병도 없을 뿐 아니라 병력도 적은데?”

하얀이리의 말에 모두가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병대만큼은 몰라도 기사단과 중장보병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우회 공격이 아닌 정면 돌파. 그러한 장점을 스스로 포기할 정도로 적은 다급한 상황도, 열세인 상황도 아니었다.

이렇듯 적의 진형에서 기사단, 기병대, 중장보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두고 여러 추측들을 하고 있을 때 알마리온은 실라페가 전해 주는 적의 움직임에 대해 듣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리다 푸른하늘과 눈이 마주쳤다.

‘저분의 저런 눈빛은? 혹 푸른하늘 님이 내가 한 일들을 알고 계신 것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과 함께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하늘의 모습에서 알마리온은 혹 그가 모든 것을 눈치챘나 싶어 내심 뜨끔하였다.

“이제 곧 드란 경이 고안한 그것의 위력을 알 수 있겠군요.”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주군.”

알마리온이 기대하는 말을 하자 한센은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빼기는. 내가 장담하지. 한센 그대가 고안한 무기는 확실히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이야. 우리에게도 진즉에 이런 무기가 있었다면 그놈들에게 그렇게 땅을 빼앗기지 않았을지도 몰랐을 것이야.”

“맞소. 이런 무기를 생각해 내다니 그대 또한 평범한 사람은 확실히 아닌 것 같구려.”

“하하. 모두 왜들 이러십니까. 별것 아닌 것을 말입니다. 하하하.”

칸과 알마리온에 이어 하얀이리와 푸른하늘까지도 칭찬하는 말을 하자 한센은 더욱 머쓱해졌다.

“그럼 이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곧 전투가 시작될 것이니 말입니다.”

“예! 군단장님!”

한센과 요들이 힘차게 대답한 후, 진의 좌측과 우측에 위치한 직할대와 제2대를 지휘하기 위해 움직였다.

“한데 대장, 저들이 대장 생각처럼 병력을 나눠 우회를 할까? 저렇게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야.”

여전히 의문이 드는 것인지, 하얀이리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이런 지형에서 저 정도의 병력이라면, 효율적으로 우릴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분명 병력 중 일부를 우회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아도 병력이 줄어 있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블랙스톤을 전장으로 선택한 것도 최대한 지형을 이용한 작전을 통해 병력의 차이를 극복하자는 의도였다.

하나 이러한 지형은 제1의용군에게만 유리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상대 또한 구릉 지역이 많은 블랙스톤의 지형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들 또한 이러한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하긴. 처음 보고받은 적의 병력보다는 좀 준 것 같기는 하네. 어쨌든 대장 생각대로만 되면 저놈들 아주 뜨거운 맛을 보게 되겠지.”

갑자기 불어난 물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기는 하였지만 포넬의 7군은 여전히 제1의용군에 비해 월등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적을 전면에 두고서도 이들 제1의용군 지휘부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당한 여유까지 보이고 있었다.

이들의 이러한 자신감과 여유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척! 척! 척! 척!

척! 척! 척!

“아쉽군요. 주변이 탁 트인 곳이었다면 저 정도 적군은 일거에 몰아붙일 수 있었을 것을 말입니다.”

제2친위군단장인 하르디 폰 가니에 자작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의 말처럼 주변 지역만 탁 트인 곳이었다면, 자신들의 6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적은, 구태여 복잡한 전술 같은 것은 필요도 없이 그저 가지고 있는 병력만으로 밀어붙이기만 해도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이렇듯 아쉬워하는 것이었다.

“한데 그들까지 그렇게 전투에 투입하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하르디가 말하는 그들이란 다름 아닌 레드블러드 기사단과 기병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지난 태풍 때 말들을 모두 잃어버린 때문에 기사단과 기병대로서의 임무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는데, 서머셋은 이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 임시로 특임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들 특임대와 서머셋 백작의 영지군 일부는 서머셋의 명령에 따라 길을 우회하여 제1의용군의 후방을 공략하기 위해 이동 중에 있었다.

“자작도 알 것이네. 당분간 더 이상의 병력을 지원받을 수 없음을 말이야.”

포넬이라고 해서 무한정으로 병력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최근 폰티악 백작이라는 로엔 최고의 명장이 다시금 해군 제독으로 복귀하면서 포넬과 로엔을 연결하는 바닷길이 막혀 버리자 병력과 물자 모든 면에서 포넬은 곤란한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상징적인 의미이긴 하지만 로엔이 왕도인 소렌토를 수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반격을 취해 오자 자존심 대결로 변한 소렌토 공방 때문에, 양측 모두 다른 곳에는 신경을 쓸 여력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우리가 처음 출정을 하였을 때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는 최대한 병력을 아껴야 하네.”

이들의 첫 번째 목표는 괴멸한 제4군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지만 최종 목표는 타론 성까지 진출하여 로엔으로 하여금 소렌토에만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굳이 소리쳐 알리지 않아도 이미 두 사람은 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엔 측의 첫 공격은 활이었다. 메코이족은 엘프의 후예라고 하는 로엔만큼 활을 잘 다루는 부족으로, 이들 또한 로엔과 거의 비슷한 형태의 활을 사용하였고 활의 위력 또한 비슷하였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빗줄기였다.

두 줄로 늘어선 메코이족 5백 명의 전사가 일제히 쏜 화살들이 죽음의 빗줄기가 되어 다가오는 포넬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으악!”

“컥!”

“아악!”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이들의 발걸음은 계속되었다.

아니, 화살 비가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이들은 더욱더 몸을 가까이하며 빠른 속도로 제1의용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됐어!’

화살 공격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서로의 간격이 좁아지는 것을 확인하자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알마리온이 명령을 내렸다.

“발사!”

뿌우웅! 뿡! 뿌우우웅!

강하면서도 긴 뿔 나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자 구릉 너머에서 이제나저제나 명령을 기다리던 병사들이 트레뷰셋을 잔뜩 축소시켜 놓은 소형 트레뷰셋을 끌고 나와서는 불붙은 기름이 든 항아리들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바로 모두가 기대한다고 하던, 한센이 고안한 트레뷰셋이었다.

실상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트레뷰셋이라는 공성 무기가 만들어진 게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오래된,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보통 트레뷰셋이라고 하면 성벽을 부수고 성문을 깨뜨리는 거대한 평형추식 트레뷰셋을 생각하지만, 옛 문헌에 따르면 혼자서도 장전하고 발사할 수도 있는 견인식 트레뷰셋이 원형이었다.

한센이 생각해 낸 것은 바로 이처럼 혼자서도 장전하고 발사할 수 있는 견인식 트레뷰셋으로, 이것의 단점인 짧은 사거리를 개선한 것이었다.

로엔은 궁병들의 뛰어난 실력 못지않게 활의 제작 기술도 뛰어났다. 로엔의 활이 유명한 이유는 서로 다른 탄성을 가진 여러 재료들을 사용하여 만든 복합궁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러한 로엔의 활의 특성을 이용하여 사거리를 결정짓는 지렛대 부분을 탄성이 서로 다른 몇 가지 재료로 만들어 견인식 트레뷰셋의 최대 단점인 짧은 사거리를 상당히 개선하였던 것이다.

물론 평형추식 트레뷰셋에 비한다면 절반도 미치지 못하는 사거리와 겨우 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의 돌밖에는 쏠 수 없어 공성 병기로서의 역할은 기대하기 힘들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확실히 제 몫을 다해 주었다.

제1의용군은 이러한 견인식 트레뷰셋을 1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려 200대나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드워프의 피가 섞여 있어 손재주가 뛰어난 얄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펑! 퍼펑! 펑! 펑!

“으악, 부, 불이다!”

“사, 살려 줘!”

“으아악! 제발 불 좀 꺼 줘! 제발!”

포넬군 진형 곳곳에 떨어지기 시작한 불붙은 기름 항아리로 인해 활 공격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의도하지 않은, 단지 지형으로 인해 한곳에서 트레뷰셋을 운용하기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진의 양측 두 곳의 구릉과 진의 중앙에 각각 50대씩의 트레뷰셋을 설치하고 발사한 것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집중적으로 떨어진 불붙은 기름 항아리로 인해 일정 구역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어 진의 움직임 전체를 방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칸 경.”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가 만들어지자 알마리온은 칸에게 트레뷰셋의 방향을 조정하면서 최대한 한 구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려 하였다.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알겠습니다.”

구태여 설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칸 또한 알마리온이 본 것과 같은 것을 보고 있었고 그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내 칸의 명령이 진의 좌우측 구릉 위에서 트레뷰셋을 작동하는 병사들에게 전달되었고, 명령을 받은 그들은 중앙에 위치한 트레뷰셋이 쏘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불붙은 기름 항아리를 날려 대기 시작했다.

“어디서 저런!”

서머셋과 하르디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당황했다.

간혹 평지에서 벌어지는 전투에도 트레뷰셋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 이들도 거대한 트레뷰셋이라면 모를까 10분의 1 정도 크기의 트레뷰셋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작으면서도 사거리는 보통의 트레뷰셋의 절반가량이나 되며, 오히려 사거리가 짧아서 그런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정확도 면에서 더욱 뛰어난 것에 무척이나 놀랐다.

무엇보다도 일정 구역에 집중적으로 떨어지는 불붙은 기름 항아리 때문에 대열 곳곳이 불바다가 되면서 진의 움직임이 무너지고 이로 인해 흐름에 문제가 생겼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단지 약간의 우세만을 내주고 있을 뿐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곧 그들이 적진에 도착할 때입니다.”

“그렇군. 그럼 진격 속도를 좀 더 높이도록 신호를 보내게.”

“예, 백작 각하.”

속도를 높이라는 신호가 울려 퍼지자 병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길을 피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우세를 앞으로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

확실히 지금까지는 적군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지형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점도 그러했고, 또한 생각지도 못했던 신무기를 내놓은 것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러한 우세를 언제까지 유지할지 두고 보겠다.’

정찰 보고와는 달리 적이 나타났고,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적은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이점은 물론 생각지도 못한 신무기를 들고 나와 제법 큰 피해를 주어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머셋을 비롯한 제7군 지휘부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서머셋은 이 정도의 피해에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 당분간 병력 충원이 힘든 상황 때문이었다.

“헉! 헉! 헉! 젠장! 뭐 빠지겠네! 이렇게 뛰다간, 헉헉! 적이랑 싸우기도 전에, 헉헉! 지쳐 쓰러지겠네. 헉헉!”

레드블러드 소속 기사인 안셀모는 연방 헉헉거리면서도 구시렁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무거운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하고 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호버크에 코이프 거기에 아밍캡과 무거운 장검을 들고 수 킬로미터를 거의 뛰다시피 달려왔더니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헉헉! 말만 그렇게 잃어버리지 않았어도 지금쯤 멋지게 달리고 있었을 것을 이게 뭐야!”

갑자기 몰아닥친 태풍으로 인해 말들이 모두 도망가면서 레드블러드 기사단과 제2친위군단 소속 기병대원들은 말을 타고 멋있게 달리는 게 아니라 지금처럼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다니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조용해! 네놈 구시렁거리는 소리 때문에 귀가 다 아프다! 그러게 평소 체력 훈련 때 요령을 피우지 말지 그랬어!”

안셀모와 가까운 친구인 게이츠는 연방 헉헉거리면서도 투덜대는 것을 멈추지 않는 안셀모로 인해 짜증이 잔뜩 나 있었다.

“이 자식! 내가 누구 때문에 체력 훈련 때마다 빠지게 됐는데! 이게 모두 네 여동생 때문이잖아!”

“그걸 왜 그 아이 탓을 해? 네놈이 죽자 살자 쫓아다니는 것이면서!”

“어떤 놈들이 잡담을 하는 것인가? 좋아! 오늘 놈들을 뭉개 준 후에 확실히 손봐 주겠다!”

앞장서 달리고 있는 레드블러드 기사단의 단장인 트로이 폰 브레드포드 남작의 호통 소리가 대열의 끝까지 들렸다.

“제길! 네놈 때문에…….”

“왜 내 탓을 해! 네놈이 큰 소리로 떠들었잖아!”

여전히 아옹다옹하는 안셀모와 게이츠였다. 하나 이들의 이러한 아옹다옹은 이내 멈춰야만 했다.

“뭐야! 왜 갑자기 멈…….”

갑자기 멈춰 서는 앞사람으로 인해 몸을 부딪치자 짜증을 부리려던 안셀모가 이내 입을 다물고 저도 모르게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굽이진 길인지라 대열 앞의 모습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양옆의 구릉 위에서 몸을 드러낸 적군의 모습만 보아도 앞의 상황이 어떻다는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니, 서로 잔뜩 긴장한 때문에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어 소리가 들려왔기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있었다.

“제길! 저 미친놈이 이런 상황에서도 꼴통 짓을 하고 있네.”

항복을 권유하는 적장의 말에 기사단 단장인 브레드포드 남작이 기사도를 운운하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자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나온 것이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전쟁이 끝나고 돌아가면 일레나와 혼인하기로 되어 있는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절대로!’

“게이츠, 내 말 잘 들어.”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전투가 벌어지면 무조건 죽은 척해.”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대포넬의 레드블러드 기사단이다! 그런…….”

기사단에 들어와 친해진 친구이지만 기사로서의 자긍심 같은 것은 애초 약에 쓰려고 해도 써먹을 수 없는 종자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라니.

“닥치고 내 말 잘 들어. 넌 집에 계신 모친과 네 여동생이 걱정되지도 않아?”

“흥! 어머니도 일레나도 내가 기사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버리고 구차하게 살아 돌아오는 것을 바라시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설사 저들에게 포로가 된다 하더라도 우리 집안은 너희 집안과는 다르게 내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어.”

“그딴 것이 무슨 상관이야! 게다가 내가 일레나의 오빠인 널 죽게 내버려 둘 것 같아?”

“…….”

“천만에! 하니까 내 말대로 해. 그리고 난 일레나와 약속을 했거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무사히 데려가기로 말이야.”

이들 두 사람이 이런 말들을 속삭이고 있을 때였다.

“어리석군요. 그대들의 만용으로 많은 이들이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말이오.”

우회하는 적이 있을지 모른다는 알마리온의 명령에 따라 매복을 하고 있던 한센은 매복 지점에 나타난 적의 지휘관이 레드블러드 기사단 단장이라는 트로이 폰 브레드포드 남작과 기병대 대장이라는 레온 폰 엑스터 남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꽤나 놀랐다. 그리고 왜 적진에서 가장 우려하던 기사단과 기병대가 보이지 않았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한센은 그들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무의미한 저항을 하기보다는 항복을 권유하였지만 그런 한센의 제안을 다 듣기도 전에 거절을 하는 두 사람의 행동에, 한센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수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마는 두 사람의 만용에 대해 한마디 따끔한 충고를 해 주고는 곧바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공격!”

핑! 피핑! 핑! 핑! 핑!

“악!”

“으악!”

“컥!”

한센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방에서 쿼럴과 화살 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일까?’

다수의 적이기에 우회 공격을 시도하리라는 것 정도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기에 그에 대비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만도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진 않았다. 한데 자신을 나중에 따로 불러 석궁과 활 그리고 창으로 무장을 하라는 별도의 명령을 내렸을 때에는 확실히 이상하게 여겼다.

그리고 이렇게 적을 마주하게 되자 한센은 왜 알마리온이 석궁과 활 그리고 창으로 무장을 하라고 지시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주한 적들은 하나같이 호버크를 착용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대에게 검은 그리 큰 효과를 볼 수 없다.

게다가 상대는 기사와 기사보다는 못하지만 기병대.

얼치기로 검을 수련해서는 이들을 상대로 검을 들고 근접전을 벌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

이들을 상대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쿼럴과 활 그리고 창이었다.

‘이런 것은 단순히 예상으로 알 수는 없는 것들. 그 아이에게 내가 알고 있는 것 말고 또 다른 능력이라도 있는 것인가?’

한센과 요들은 알마리온이 정령술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 이들 두 사람은 세상에 정령술사라는 것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이런 것도 익스퍼트라는 자들의 능력이란 말인가?’

의심되는 것이라고는 이러한 것도 익스퍼트의 능력인가 하는 것이었지만, 이내 자신의 그러한 추측을 부정했다. 익스퍼트가 초인이라고 불리지만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익스퍼트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에이. 설마……. 알, 아니 주군께서 마법사일 리가 없지. 암!’

결국 남은 것은 마법사뿐이었는데 알마리온이 마법사가 아니란 것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한센이었다. 결국 알마리온이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했는지는 끝내 풀지 못한 한센이었다.

“대장님, 적이 항복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무장을 해제시키고 밧줄로 묶어.”

“예, 대장님.”

펑! 퍼펑! 펑! 평!

“쏴!”

처음으로 군을 지휘하게 된 요들이었지만 생각보다 흥분하지 않은 채 침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보여 주겠어! 보여 주고 말겠어! 내가 운이 좋아, 단지 알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겠어!’

언제나 웃고 다녔지만 요들은 늘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도 지금의 지위가 자신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병사들 대부분이 자신을 두고 수군대고 있다는 것도.

때문에 기사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죽기만큼 싫어하는 공부도 스스로 찾아서 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그를 가르치고 있는 한센이 제발 좀 쉬자며 짜증을 부려도 요들은 그럴 수 없다며 그를 조르고 졸라 기사가 배워야 할 것들을 배워 가고 있었다.

그런 요들에게 알마리온은 처음으로 직할대를 전적으로 맡겨 주었다.

다른 지휘관들, 심지어는 한센과, 그리고 아저씨, 조카라고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아진 하얀이리까지도 아직은 자신에게 직할대를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이르다며 반대를 분명히 했다.

인간적으로는 그렇게 반대를 한 한센과 하얀이리에게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이제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요들 자신도 이 두 사람의 반대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때문에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요들 자신도 수백 명이나 되는 병력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만한 자신이 없었다.

정작 놀라운 것은 그런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이 자신에게 직할대를 완전히 맡겨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 대한 너의 믿음. 절대로 저버리지 않겠어! 절대로!’

“대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적을 치고 들어가야 합니까?”

“훗! 케인 경, 날 시험해 보고 싶은가 보네요?”

“그게 무슨…….”

짐 케인은 칸과 함께 로열가드에 속해 있는 자였다. 원래는 칸이 지휘하는 제1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알마리온이 요들에게 직할대를 지휘하여 우회하는 적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그가 무책임한 행동을 벌일까 봐 강력하게 주장을 하여 수하인 짐 케인을 임시로 요들에게 배속시킨 것이었다.

“우리 임무는 이곳으로 접근하는 적을 차단하는 것 아니었던가요?”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데 뭐하러 힘들게 상대해요? 그냥 여기서 드란 경께서 만든 이거나 진탕 쏴 주자고요.”

여전히 격의 없는 거친 말투였지만 그래도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있어 다행이다 싶은 케인이었다.

우회하여 적진 후방을 공격하라는 명령에 따라 1개 천인대를 지휘하여 이동하던 백스터 보노는 강력한 적의 반격을 받자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 그는 적이 이미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이곳에서 버티거나 무모하게 적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개죽음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라 판단하고 퇴각을 명령하였다.

이렇게 포넬군을 지휘하는 서머셋의 의도는 하나씩, 하나씩 무산되어 갔다.

“트레뷰셋 부대와 메코이족은 계속해서 적의 움직임을 차단하도록 하세요.”

“예.”

“제1대와 얄란족에 진격 명령을 내리세요.”

전면을 주시하던 알마리온이 때가 되었다 생각했는지 드디어 제1대와 4대에는 진격 명령을, 그리고 트레뷰셋 부대와 제3대에는 계속하여 적의 움직임을 차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퇴각시키게.”

자신의 모든 의도가 완전히 가로막혔다는 것을 확인한 서머셋은 더 이상의 피해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퇴각을 명령하고는 말을 몰아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군을 물리고 확인한 결과에 모두가 침통한 표정이 되었다.

레드블러드 기사단 전원과 기병대 전원이 귀환하지 못하였고, 아울러 우회를 하였던 또 다른 천인대도 3백여 명의 병력을 잃은 채 퇴각하였다.

또한 적의 전면을 공격했던 서머셋의 영지병들도 1천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우회를 하였던 천인대나 서머셋의 영지병이 입은 피해는 실상 적다면 적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기사단과 기병대 전원, 그리고 비록 이번 전투에 의한 손실은 아니지만 중장보병 전원을 잃었다는 것은 실상 제7군 전체 병력의 절반 정도를 잃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을 20킬로미터 정도 퇴각시킨다. 그곳에서 적을 상대한다.”

“불가합니다, 백작 각하.”

서머셋의 말에 제2친위군단 군단장인 하르디가 곧바로 반대했다.

“불가하다 했는가?”

“그렇습니다. 비록 서전에 큰 피해를 입긴 하였지만 아직도 아군의 병력은 적에 비해 다섯 배나 많습니다. 적의 신무기가 다소 걱정되기는 하지만 이 정도의 병력 차이면 충분히 적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소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 심지어는 서머셋의 가신들 또한 하르디와 같은 생각이라며 동조하자 서머셋은 답답한 심정이었다.

“자네들은 적들이 겨우 저 정도의 병력으로 우릴 막아서겠다고 나선 것이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는가?”

3천의 병력으로 몇 배나 많은 적을 상대하겠다고 나선 것은 확실히 정상적인 것은 아닌 결정이었다.

“그건 적이 왕도를 회복하기 위해 모든 병력을 소렌토 방향으로 돌렸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적군의 깃발을 보니 적은 정규군이 아닌 의용군이었습니다!”

정규군도 아닌 의용군에게 패배를 당했다는 것도 이들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적에게 더 이상의 병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르디의 이러한 생각에는 서머셋 또한 공감하였다. 하지만 서머셋이 지적하고자 하는 부분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자네 말처럼 적이 정규군이 아닌 의용군을 이 지역에 투입했다는 것이 더 이상 병력의 여유가 없다는 뜻이라는 점에는 나 또한 공감하네. 하지만!”

“…….”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적이 이미 이 지역을 전장으로 선택하면서 나름 충분한 준비를 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네.”

“설사 적이 어떠한 준비를 하였다 하더라도 다섯 배의 병력의 차이라면 무시할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 하르디였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비단 하르디만이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소관의 제2친위군단이 전면에 나서겠습니다.”

“자네 정말!”

정면으로 서머셋의 결정에 반기를 드는 하르디의 행동에 다른 이들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급급했다.

“소관 또한 백작 각하의 우려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대로 물러난다면 가뜩이나 떨어져 있는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질 것입니다.”

지금 이들 제7군의 가장 큰 문제는 서전에서 패배를 하였고 그 패전에서 기사단과 기병대를 모두 잃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병사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있는, 이번 출정이 부정을 탔다는 미신이었다.

그동안은 그래도 지휘부의 강력한 대응으로 쉬쉬하는 정도였지만, 문제는 이번 첫 전투에서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치러 보지 못한 채 여섯 배나 적은 적에게 패배하고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살아 있는 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인 기사들과 기병대가 단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 것을 두고 이제는 부정을 탔다는 미신을 통제가 힘들 정도가 되었고 그에 따라 병사들 전체의 사기가 완전히 떨어졌다는 점이다.

“하니 재고하여 주십시오, 백작 각하!”

하르디의 의견 또한 일리가 있었다. 그의 말처럼 땅에 떨어진 병사들의 사기는 만약 이 상태로 물러선다면 더욱더 떨어질 것이고, 자칫 무기력증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

서머셋은 가문의 기사이자 오랜 전우인 마농과 눈을 마주쳤다. 중대한 판단을 해야 할 때, 간혹 어떤 것을 선택해야 최선일지 홀로 판단하기 힘들 때면 항상 조언을 구하는 상대가 바로 마농이었다.

그런 마농 또한 땅에 떨어진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서라도 곧바로 반격을 취해야 한다는 하르디의 생각에 동조하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후. 알겠네. 자네의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내일 아침 적에 대한 공세를 다시 하겠네.”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반드시 적을 무찌르도록 하겠습니다!”

“요새로 들어갑니다.”

서전을 대승으로 마친 알마리온은 곧바로 병력을 미리 준비하여 놓았던 요새로 이동시키도록 하였다.

블랙스톤을 전장으로 결정하면서 알마리온은 오래전에 버려졌던 옛 성터에 요새를 건설토록 하였다.

워낙 오래전부터 버려지고 그동안 전혀 관리도 하지 않아 겨우 성의 기단부만 남아 있어 이곳에 성이 있다는 것을 간신히 알 수 있는 정도였지만, 지난 한 달여 동안 알마리온은 이곳에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을 동원하여 요새를 건설하였다.

“단 요새에는 직할대와 제3대만 들어가고 제1, 2, 4대는 산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적의 배후를 노리도록 하세요.”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제4대 병력도 요새에 남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센과 칸이 직할대와 메코이족만으로 구성된 제3대 병력만으로 적을 상대하겠다는 말에 불안감을 드러냈다.

“요새가 있으니 걱정 없습니다. 적들은 우리가 요새 안으로 들어간 것을 알면 당장 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요새 주변의 해자는 넓고 깊습니다. 아무리 적이 병력이 많다 해도 요새를 공략하려면 그만한 준비가 필요하단 것입니다.”

알마리온이 폐성에다 요새를 건설하면서 가장 정성을 들인 부분이 바로 해자였다.

성 주변의 해자 또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대부분 다시금 메워졌지만 그곳을 넓고 깊게 파도록 하였다. 물론 이러한 해자에 물까지 채워 놓았으면 좋았겠지만 물길 또한 끊겨 현재 이곳에는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 박아 놓음으로써 쉽게 건너오지 못하게 만들어 놓는 정도의 조치를 취해 놓았지만 이것만으로도 적은 쉽게 해자를 넘어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공성전에 쓰이는 무기들을 준비하는 시간이 걸릴 것이고 본격적인 공략을 위해서는 최소 하루나 이틀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알마리온의 계산이었다.

“그동안 제1, 2, 4대는 최대한 빠르게 남쪽으로 이동, 적의 배후를 공략한다면 다음 전투 또한 우리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계획 자체는 무리가 없어 보였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으로 그와 같은 결과가 과연 만들어질 것인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 알마리온은 더 이상의 우려나 반대는 용납지 않았다.

“공성 준비를 하라.”

적들이 요새에서 농성하자 공격을 주도하고 있는 하르디는 공성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공성 준비는 알마리온의 예상처럼 이틀의 시간이 걸린 후에나 마쳐졌다.

“발사!”

제1의용군에서 사용한 견인식 트레뷰셋과는 상대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트레뷰셋에서 바위가 쏘아지기 시작했다.

요새에서 농성하고 있는 제1의용군 측에 다행인 점이라면, 워낙 급하게 트레뷰셋을 만들었기에 제작된 것은 단 3대뿐이었다.

“거리를 재조정하라!”

첫 시험 발사 결과 쏘아진 바위가 요새를 훌쩍 넘어가 버리자 거리를 재조정하고 다시 한 번 거대한 바위를 날리기 시작했다.

“명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좋아! 계속 발사해! 그리고 병력을 전진시키도록 한다!”

“예!”

“후후, 제법 준비를 한 것 같지만 이제 네놈들도 끝이다.”

하르디의 입가에 비릿한 비소가 어렸다.

적이 약삭빠르게 요새에 들어가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병력이 절대적으로 우위인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상황이라고 하르디는 판단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판단도 아주 틀린 것도 아닌 것이, 적이 병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치고 빠지는 식의 전략을 사용했다면 아무래도 지리에 익숙지 않은 자신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데 트레뷰셋의 명중률을 좀 더 높일 수가 없나? 왜 저렇게 부정확한 것이야!”

트레뷰셋이라는 무기가 워낙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난히 정확도가 너무나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아무래도 급히 제작하다 보니 정확도가 더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따위 것을 변명이라고 하는가! 속히 재조정하란 말이야! 네놈 눈에는 적들의 반격에 당하는 아군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야!”

“시, 시정하겠습니다!”

처음 몇 차례는 나무로 만든 요새 벽을 때리며 단번에 벽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그다음부터는 이상하게도 요새 벽을 넘어가거나 아니면 못 미친 채 애꿎게 땅바닥에 커다란 구멍만 뚫어 댔다.

그사이 첫날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힌 견인식 트레뷰셋에서 쏘아진 불붙은 기름 항아리와 화살 공격으로 인해 제2친위군 병사들은 꾸준히 피해가 쌓여 갔다.

“해자를 메워라!”

“가져온 자루들을 해자에 던져 넣어!”

피해를 각오하고 요새 주변에 파 놓은 해자까지 도달한 포넬군은 미리 준비한, 흙이 든 자루들을 해자에 던져 넣기 시작했다.

이사이에도 꾸준히 피해가 늘어났지만 그래도 이들은 작업을 멈추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해자의 일부가 빠르게 메워져 갔다.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충차를 들여보내!”

“예!”

적지 않은 피해 속에서도 해자를 메우고 요새 문과 통하는 길이 만들어지자 곧바로 충차를 투입하였다.

“다른 곳도 서둘러 메우도록 하고!”

“예, 군단장님!”

일단은 요새 문을 부수기 위해 충차를 투입할 길은 만들었지만 달랑 충차만 들여보냈다가는 집중 공격을 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따라서 적의 공격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라도 해자의 다른 부분을 메워 직접적인 공격이 가능하게 해야 했다.

이를 위해 더 많은 병력이 요새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이제는 제2친위군 병력 대부분이 요새를 포위한 채 해자를 빠르게 메우는 일에 집중하였다.

뒤에 남은 서머셋 백작의 영지군 또한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전장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언제든 출동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곧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농의 말처럼 이제 곧 요새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서머셋의 표정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주군?”

좀처럼 펴지지 않는 서머셋의 모습에 마농이 물었다.

“아니네.”

‘설마 주군께서 브레드포드 남작의 성공을 질투하시는 것인가? 아냐. 주군이 어떤 분이신데 그런 것을 질투하시겠는가.’

갑자기 든 망령된 생각에 마농은 스스로를 책망했다. 하지만 지금 서머셋의 표정은 첫 전투에서 실패한 자신에 비해 성공적으로 요새를 공략하고 있는 하르디의 선전을 질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온데 어이하여…….”

지금까지의 상황으로만 보아서는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머셋은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 계속 들었다.

‘뭐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이지?’

“아니네.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하게나. 그보단 언제든 지원할 수 있도록 상황을 예의 주시하도록 하게.”

“예, 주군.”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들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이 적장인 알마리온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없었다.

“준비는?”

칸의 물음에 트레뷰셋을 다루는 부대를 지휘하는 밀러가 대답하였다.

“마쳤습니다.”

“첫 공격 목표는 후방에 위치한 적 지휘부다.”

“반드시 첫 공격에 적 지휘부를 잡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믿겠다.”

밀러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돌아가자 칸의 곁에 있던 몇몇 낯선 자들의 표정에는 의구심이 짙게 드리워졌다.

“훗! 걱정되시오?”

칸이 웃으며 묻자 젝슨은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말하였다.

젝슨 이스트만은 블랙스톤보다 남쪽에 위치한 슈마이더 남작 영지의 영주인 슈마이더 남작을 대신하여 전쟁 이전부터 영지를 관리하는 자였다.

블랙스톤 이남의 여러 영지들 중 일부는 농사를 지을 땅이 거의 없는 대신 광산이 존재하는 곳이 많았다. 슈마이더 남작 영지 또한 그러한 곳으로, 이곳을 비롯한 인근 몇몇 남작 영지에는 이번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었다.

또한 이곳 영지들의 영주도 굳이 가을걷이와 세금 정산을 위해 영지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기에 이번 전쟁으로 인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런 곳들 중 가장 큰 철광석 광산이 존재하는 슈마이더 남작 영지를 관리하던 젝슨은 주변의 비슷한 상황의 영지들을 관리하던 자들과 의용군 부대를 조직하여 산을 타고 블랙스톤으로 이동하다 때마침 적을 우회하여 이동 중이던 칸의 부대와 만나 합류한 것이다.

“솔직히 그렇군요. 저런 트레뷰셋으로 적을 공격한다고 해서 과연 얼마나 큰 효과를 볼 수 있겠소?”

“보기에는 저래도 저것들의 위력을 곧 확인할 수 있을 것이오.”

말을 마친 칸이 다시 한 번 준비 상태를 확인한 후 공격 명령을 내렸다.

“공격!”

“발사!”

퉁! 투퉁! 퉁! 퉁! 퉁!

100대의 트레뷰셋 중 절반인 50대의 트레뷰셋이 불붙은 기름 항아리를 쏟아 냈다.

“좀 더 왼쪽으로! 발사!”

거리는 적당했지만 방향이 약간 잘못된 것을 확인하자 밀러는 방향을 수정하도록 지시한 후 곧바로 발사 명령을 내렸다.

“됐어!”

“지금 방향으로 계속 발사해.”

산길을 이동하느라 많은 수의 기름 항아리를 준비할 수가 없었기에 트레뷰셋의 공격은 이내 멈춰야만 했다.

하나 그 효과는 대단했다.

처음부터 목표를 후방에 남은 적의 지휘부로 잡았고, 연이은 몇 차례의 공격으로 포넬의 지휘부는 이내 화염 속에 갇힌 채 온몸에 불이 붙어 고통스러워하다 하나씩 쓰러져 갔다.

“저럴 수가!”

그 모습에 젝슨을 비롯한, 의용군을 조직하여 합류한 다른 이들 또한 크게 놀라워했다.

하나 계속해서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칸이 돌격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와아!”

“와!”

제1대 병력 1천과 제2대 병력 5백 그리고 젝슨 등이 모집한 의용군 5백이 합쳐 2천의 병력이 칸의 명령에 따라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아 당황한 적을 향해 달려 나갔다.

“뭐야!”

뒤쪽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요새 공격을 지휘하던 하르디는 깜짝 놀라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진의 후방 지역에서 치솟는 화염을 볼 수 있었다.

“저건?”

“큰일 났습니다! 뒤쪽으로 적이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머셋 백작 각하를 비롯한 지휘부 전원이 적의 그 화염 공격에 그만…….”

“뭐야? 서머셋 백작 각하를 비롯한 지휘부 모두가 적에게 당했단 말인가!”

“예.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갑자기 집중된 적의 화염 공격에 그만…….”

후방에 남아 있던 서머셋을 비롯한 지휘부 전원이 소형 트레뷰셋을 이용한 화염 공격에 당했다는 말에 하르디는 당황하였지만 이내 침착하게 상황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하몬 남작! 자네가 후방의 아군을 지휘하도록 하게. 어서!”

“예! 군단장님.”

“요새 공격을 포기한다. 서둘러 군을 물려!”

“예, 군단장님.”

하르디는 연이어 상황을 통제하기 위한 명령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하나 그의 이러한 노력은 난관에 봉착했다. 갑작스럽게 등 뒤에 나타난 적도 적이었지만 문제는 서머셋 백작 등의 지휘부가 일순간에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본 서머셋 백작의 영지병들이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하면서 전혀 통제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결국 요새 공략을 포기하고 천천히 뒤로 물러나려던 제2친위군 병력과 서머셋 백작의 영지군이 한데 뒤엉켜 버렸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푸른하늘 님.”

“우리도 곧 따라가리다.”

의도했던 상황이 만들어지자 알마리온은 직접 출전을 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요들과 직할대 병력이 요새를 나가기 위해 대기 중에 있었다.

얼마 후 반쯤 망가져 버린 요새의 문이 열리면서 알마리온을 선두로 줄줄이 요새를 달려 나갔다.

“이, 익스퍼트다!”

“적에게 익스퍼트가 있다!”

작정을 한 듯, 처음부터 알마리온은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비록 우세를 점하긴 하였지만 상대는 여전히 몇 배나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적이 스스로 물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적에게 공포심을 느끼게 만들어야만 했다.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알마리온이 지나간 곳에는 하나의 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직할대와 그 뒤를 따라 메코이족 전사들로 구성된 병력이 더욱 길을 넓히며 적진을 깊이 파고들어 갔다.

알마리온의 목표는 요새 공격을 지휘하다가 중간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적의 나머지 지휘관들이었다.

“막아! 군단장님을 보호해라!”

“길을 비켜! 길을 비키란 말이다!”

요새를 나온 적군이 익스퍼트를 앞세운 채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자 당황한 제2친위군 지휘부는 한편으로는 적을 막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퇴로를 뚫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뒤쪽에서 밀려오는 아군으로 인해 퇴로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사이 거의 달리듯 길을 뚫고 나타난 알마리온이 어느새 우왕좌왕하는 이들 제2친위군 지휘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항복하시오.”

“이, 이놈!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제2친위군 지휘부에 속한 몇몇 기사들이 용감하게 검을 휘두르며 알마리온에게 달려들었지만 그것은 어설픈 객기에 불과했다.

“아악!”

“컥!”

“다시 한 번 권하겠소. 항복하시오.”

“으으…….”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주변의 혼란스러움에도 뚜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의 기세에 하르디 등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이번이 마지막 권유요. 항복하시오.”

알마리온의 목소리가 더욱 차갑고 낮아졌다.

천천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서 하르디는 강한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지금까지 수십 년을 전장에서 살아온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결국 그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 하르디는 손에서 검을 놓으며 말에서 내려 알마리온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다.

“하, 항복하겠소. 항복하겠소!”

“적장이 항복했다! 적장이 항복했다!”

“와아∼! 적장이 항복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너희 지휘관이 항복하였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항복하면 살려 준다!”

적장의 항복 소식이 빠르게 전장에 퍼지자 포넬의 병사들은 속속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중에는 끝까지 저항을 하는 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지만 이들은 이내 강력하게 제압당했고, 그러한 모습이 오히려 더 많은 포넬의 병사들이 더 빠르게 항복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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