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
“부르셨습니까, 후작 각하.”
“어서 오게.”
포넬의 로엔 침략군 총사령관인 우즈엘 폰 스펜서 후작의 부름을 받은 보리스 폰 서머셋 백작이 그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앉게.”
“감사합니다.”
“내가 자네를 오라 한 것은 자네가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네.”
서머셋이 자리에 앉자마자 스펜서는 곧바로 그를 부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마음이 급하단 증거였다.
“자네도 들었을 것이네.”
“카즈모 백작과 4군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4군의 소식은 포넬군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포넬 왕국의 두 명뿐인 중급의 익스퍼트 테어도어 폰 카즈모 백작과, 비록 후작에서 자작으로 강등되었지만 4서클 마법사인 필립 폰 아르몬의 전사 소식.
그리고 3만의 4군 병력 중 귀환한 병력의 수가 불과 1개 천인대 정도라는 것도 그러했다. 그나마도 상대가 아량을 베풀어 명예로운 항복을 권했기에 그 정도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당연히 포넬군 전체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바다에서라면 모를까 육지에서 이와 같은 대패를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백작도 알다시피 해전에서 이러한 큰 패배는 있었어도 육지에서의 패배는 처음 있는 일이라 병사들의 동요가 상당하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네의 직속군단과 제2친위군단 그리고 중장보병 1개 천인대와 레드블러드 기사단을 지휘하여 상황을 돌려놓도록 하게.”
“제2친위군단과 레드블러드 기사단까지 말씀이십니까?”
예상치 못한 많은 병력을 지원하겠다는 말에 서머셋 백작은 크게 놀랐다.
제2친위군단은 정벌군에 있어서 상징적인 존재였다. 고메즈 대공의 10개의 친위군단 중 한 곳으로 고메즈 대공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일명 죽음의 전사들이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군단이었다.
또한 지금까지 기사단은 단 한 번도 전장에 투입된 적이 없다. 기사단까지 투입할 정도로 로엔군이 강하지도 않았고, 또한 급박한 상황이 벌어진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장보병 1개 천인대라면 비록 숫자는 정규군보다는 적을지 몰라도 전력으로는 정규군을 훨씬 상회하는 그러한 전력이었다.
그만큼 스펜서 후작이 이번 사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렇네. 하니 자네는 최대한 빨리 병력을 지휘하여 동부 전선의 전황을 회복시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네 뒤에 또 다른 후속 부대가 진출할 것이니, 적에게 빼앗긴 곳들을 되찾은 후에는 곧바로 이동을 하여 타론 성을 공략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하면 최대한 빨리 출동을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정말 대단한 계책입니다.”
“허허, 이 늙은이가 모처럼 밥값을 했다니 다행이구려.”
“어이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푸른하늘 님께서 제 곁에 계셔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푸른하늘은 늘 알마리온이 미처 살펴보지 못한 것들을 살펴보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모두 조른에서 발이 묶인 것에 대해 불만만 가지고 있었을 뿐 그것을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푸른하늘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묘책을 제시해 주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제 곁에 계셔 주십시오. 앞으로도 푸른하늘 님께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허허, 이 늙은이에게 배울 것이 무에 있다 그러시오. 어쨌든 군단장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오. 하면 난 좀 피곤하여 이만 돌아가 쉬도록 하겠소.”
“예, 푸른하늘 님.”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는 푸른하늘의 뒷모습을 보면서 알마리온은 내심 걱정이 많이 되었다.
일족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노구를 이끌고 전장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푸른하늘이 근래 들어 자주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베르토.”
“예, 주군.”
“곧바로 푸른하늘 님을 제외한 다른 지휘관들을 소집하도록 하세요. 급히 의논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알마리온의 소집을 받은 지휘관들이 그의 집무실로 속속 모여들었다.
지휘관들이 모두 모이자 알마리온은 푸른하늘이 알려 준 계책에 따른 내용대로 명령을 내렸다.
“드란 경.”
“예, 군단장님.”
“드란 경은 곧 말을 탈 줄 아는 병사 백 명을 추려서 최대한 남쪽으로 이동하세요.”
“남쪽으로 말입니까?”
“그래요. 적이 보이는 곳까지 이동을 한 후, 적이 반격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면 즉시 전령을 보내도록 하십시오.”
적의 움직임을 사전에 아는 것은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이지 무조건 적이 보이는 곳까지 이동하여 그곳부터 적의 움직임을 살펴 보고하라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힘든 명령이었다.
다소 이해되지 않는 명령이었지만, 한센은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칸 경.”
“예, 군단장님.”
“오늘부터 조른 남작 영지 이남의 5개 영지의 백성들을 소개하도록 하십시오.”
전란 중에 백성들을 소개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로엔의 경우에는 워낙 급박하게 일이 벌어지면서 미처 백성들을 소개할 틈조차 갖지 못하였고, 이렇게 방치된 백성들은 적에 의해 강제로 부역을 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고 있었다.
“예, 군단장님.”
“군단장님, 죄송하지만 소관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인가요, 요하네스 경?”
“전란 중에 백성들을 소개하여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은 소관 또한 인정합니다. 하오나 현재 우리의 상황상 주변 영지의 백성들까지 돌볼 여력이 없습니다.”
제1의용군의 보급 사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테일러 상단이 필요한 물품들과 식량들을 독점 공급을 하고 그 대금을 왕실에서 지불하게 되어 있지만, 왕실에서는 아직도 단 한 번도 대금을 지불한 적이 없다.
아니, 처음부터 왕실에는 대금을 지불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
상단에서 몇 차례 대금 지불을 요청하였지만 매번 알겠다는 말만 할 뿐, 막상 대금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불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한센과 요들이 투자란 이름으로 건네준 20개의 최상급 마정석을 판매한 자금과 게르혼족과의 교역으로 상단도 근근이 버텨 오고 있는 중이었다.
무엇보다도 식량 사정은 더욱 심각하였는데, 테일러 상단 자체도 원래 무기만을 전문적으로 거래하던 상단인지라 지금 같은 전란에 식량을 구하는 일은 요원하기만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 5개 영지의 백성들까지 소개한다면 가뜩이나 빠듯하게 운영되고 있는 식량 배급에 큰 차질이 빚어질 것이다.
“알아요. 하지만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도록 하세요.”
“군단장님께서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알아서 하겠다고는 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기에는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는지 표정이 영 좋지 않은 알베르토였다.
아니,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하얀이리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이 곤란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표정들이 모두 왜 그래? 대장이 알아서 한다잖아? 그럼 믿어야지!”
처음 대면했을 때만 하더라도 하얀이리는 알마리온을 절대 믿지 않았다. 아니, 알마리온이라는 개인을 믿지 못하였다기보다는 로엔 왕국을 믿지 못하였던 것이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사사건건 충돌을 하였다.
푸른하늘이 게르혼족의 관습 등에 대한 조언과 중재를 하고 알마리온이 이들에 대해 이해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지금도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하얀이리가 알마리온을 지금처럼 무조건 신임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아직 로엔달이 제1의용군의 군단장으로 착임하기 이전, 그러니까 알마리온이 부군단장으로 제1의용군의 병력을 책임지고 있던 때였다.
하얀이리의 부족인 얄란족에서 부족에 남아 있던 전사들 몇이 다급하게 족장인 하얀이리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들이 부족 전체에 퍼진 전염병으로 인해 부족민들 전체가 고통 받고 있으며 벌써 절반에 가까운 부족민들이 전염병으로 인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하얀이리를 비롯하여 얄란족 전사들 전체가 동요를 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이들은 무단이탈을 해서라도 부족에게로 돌아가려 하였다.
이때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 바로 알마리온이었다.
알마리온 또한 이들의 부족에 대한 소식을 접하였고, 이들이 무단이탈을 시도해서라도 부족에게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들에게 이대로 군을 이탈할 경우 왕국 차원에서 응징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자신이 이들 부족을 위해 약을 구해 보내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당연히 이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단지 자신들을 붙잡아 두기 위한 술수라고 생각했고, 무단이탈을 실행하였다.
물론 이들의 이러한 무단이탈은 실패하였고, 푸른하늘의 중재로 다시금 숙영지로 돌아오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알마리온의 약속을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약속 또한 그 이전에 제국과 로엔에서 해 왔던 지켜지지 않던 약속들, 아니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는 그러한 약속이라 여기면서도 마음 한 가닥 알마리온이 자신들에게 한 약속을 꼭 지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러니까 이들이 막 전장에 투입되기 직전에 다시금 찾아온 부족의 전사들로부터 테일러 상단이라는 곳에서 약을 가지고 와서 더 이상 부족민이 병으로 목숨을 잃지 않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하얀이리와 얄란족 전사들은 알마리온의 말이라면 무조건, 그것이 어떤 내용이 되었든 절대적인 믿음을 보이고 있었다.
하얀이리의 말에 다들 더 이상의 반발은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알마리온이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하려 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말로는 대답을 하였지만 알베르토의 머리는 남아 있는 식량 포대 수를 세며 앞으로 어떻게 생활을 꾸려 나가야 할지 그것부터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얀이리 님은 저와 함께 블랙스톤에 다녀오도록 하지요.”
“블랙스톤? 거긴 어디지?”
블랙스톤 남작 영지는 조른보다 남쪽에 위치한 영지로, 백성들의 소개 작업을 지시한 곳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한데 거길 왜?”
“그곳이 적을 맞이할 전장이 될 것입니다.”
원래 푸른하늘이 한 조언은 주변 영지의 백성들을 소개하면서 그들 중 의용군을 모집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알마리온 또한 조른에 주둔하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선뜻 이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푸른하늘의 조언으로 결정을 하고 이렇게 회의를 소집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적을 맞이해 싸울 부대가 자신들 말고는 없다는 현실이 알마리온으로 하여금 전장을 이곳 조른이 아닌 블랙스톤이라는 곳으로 선택하게 하였다.
“블랙스톤은 구릉이 많은 지역입니다.”
“그래서?”
“그런 곳에서는 대규모 군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죠.”
“혹시 군단장님께서는 옛 전투를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칸이 말하는 옛 전투란 아스론 제국과 브라이튼 왕국의 전투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스론 제국은 현 로엔 왕국의 절반과 게르혼족이 살아가고 있는 대초원을 영토로 하고 있던 대제국이었고, 브라이튼 왕국은 로엔의 남부 지역을 영토로 하고 있던 나라였다.
기마병이 중심인 아스론 제국의 1만 병력이 브라이튼 왕국의 2천 보병과의 전투에서 전멸을 당한 전투, 그 현장이 바로 지금의 블랙스톤 남작 영지였다.
블랙스톤은 구릉이 많은 지역이었다. 마치 거대한 무덤들이 곳곳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것처럼, 이 지역 전체가 고만고만한 구릉인 지형이었다.
이런 곳에서는 대규모 병력을 운용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힘이 들었는데, 거기에 기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당시 브라이튼 왕국군은 이러한 지형을 철저히 이용하여 1만이나 되는 아스론 제국 기병군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알마리온은 어린 시절 이러한 전사를 연구한 서적을 읽은 기억을 떠올리고 그곳을 적을 상대로 하는 주전장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었다.
“흠∼! 확실히 그런 지형이라면 소수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 쉬운 곳이지. 알았어. 함께 둘러보자고.”
“칸 경.”
“예, 군단장님.”
“칸 경은 내가 없는 동안 부대를 지휘해 주세요. 웹 경이 칸 경을 돕도록 하고 말이에요.”
“예, 군단장님.”
“예.”
“그리고 요하네스 경, 상단에서 며칠 후에 도착한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군단장님.”
“그럼 출발은 며칠 후에 하도록 하지요.”
“뭐, 그러자고. 나야 언제든 상관없으니 말이야.”
“그러지요. 그럼 오늘 회의는 이만 마치도록 하지요.”
“예, 군단장님.”
“후∼! 제자 놈이 있었을 때는 좀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었는데 그놈이 없으니 일일이 귀찮군.”
요즘 들어 시끄럽기만 하던 안톤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는 쿤테르였다.
마법 실험을 하려면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소렌토의 왕궁이거나 아니면 소렌토 자신의 저택이었다면 마법 실험을 위한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어 상대적으로 준비할 것이 많지 않겠지만 겨우 포션이나 만들어 낼 정도의 시설밖에 없는 이곳에서 제자인 안톤마저도 없어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준비를 하였기에, 평소 인내심 많기로 소문난 그로서도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도 그것을 제작할 능력이 있다는 드워프가 곧 도착을 한다니 그게 어딘가? 나야 이것들을 좀 더 분석하여 더 많은 종류의 마법 아이템을 만드는 연구만 하면 되는 것이니 말이야.”
과거 마법 제국 시절의 마법 물품처럼 다양하게 쓰일 수 있는 마법 아이템을 제작할 수만 있다면 다시 한 번 마법이, 그리고 마법사들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한가운데에 자신이 서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 해도 온몸에 희열감이 가득 차오르는 쿤테르였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지금 당장은 분명 준비했다고 생각한 실험 도구가 빠져 있어 그것부터 챙겨 와야 할 판이었다.
“에잇! 조수를 들일 수도 없고, 정말 짜증 나는군!”
짜증이 치솟은 쿤테르가 신경질을 부리면서 실험실을 벗어났다. 한데 여기서 그는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하고 만다.
실험실 문에는 쿤테르가 직접 마법을 걸어 문이 닫힌 이후 그가 아니면 절대 방 안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하였지만, 문제는 그러한 마법은 문이 닫힌 상태에서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한데 짜증이 난 쿤테르가 벌컥 문을 열고 문이 닫히는 것도 확인을 하지도 않은 채 어디론가 가 버린 것이다.
신병을 이유로 두문불출하고 있는 쿤테르를 감시하고 그가 만약 신병으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니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 오라는 밀명을 받고 그의 행적을 감시하던 중 팔리모는 쿤테르가 신병이 아닌 다른 은밀한 일을 하고 있음을 알고 은밀히 만들어진 이곳 마법 실험실까지 그의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문에 걸린 마법을 어떻게 흔적 없이 깰 수 있는지 궁리하던 중에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껏 짜증이 난 쿤테르가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훗! 저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이래서는 힘들게 이곳까지 온 보람도 없군. 어쨌든 나야 일이 편하게 되었어.”
쿤테르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프리모 공작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실험실 안으로 들어간 팔리모는 다시 한 번 어이없어했다.
그가 찾고자 하던 것이 굳이 찾을 필요도 없이 그냥 실험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군.”
너무나 손쉽게 원하는 물건을 얻게 된 팔리모는 이내 그것을 들고 실험실을 빠져나갔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것을 분실하다니!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그 중요한 것을 대체 어떻게 관리하였기에 분실할 수 있단 말인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기는 하였지만 으르렁거리는 도르첸의 목소리에는 그의 분노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누군가? 누가 그것에 손을 댔을 것 같은가?”
“모, 모르겠습니다.”
“모르다니? 자네 정도의 마법사가 설치한 마법을 깼으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같은 마법이라고 해도 개개인이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서로 달랐다. 때문에 상대가 마법을 사용했다면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지 어느 정도 추적이 가능했다.
“그것이, 전혀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
마법을 사용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는 쿤테르의 말에 도르첸은 더욱 어이가 없어졌다.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마저 없어졌기 때문이다.
‘누구란 말인가? 마법 아이템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데 어떻게 그 비밀이 새어 나갔단 말인가?’
일단은 누가 과연 그러한 소행을 벌인 것인지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 대책을 세워도 세울 수 있는 일이었다.
“자네는 돌아가도록 하게. 그리고 지금부터 예전처럼 활동하도록 하게. 절대로 티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 명심하게. 알았나?”
“예, 전하.”
메르타니온 또한 도르첸으로부터 마법 아이템을 분실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대로하였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화만 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단단한머리라는 드워프를 그들에게 보내 철저하게 보호하도록 조치하시오.”
“예, 폐하.”
메르타니온과 도르첸이 마법 아이템을 분실한 것을 놓고 끌탕을 하고 있는 동안 프리모는 정반대로 너무나도 간단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되어 희희낙락하였다.
“확실한 것이지?”
“그렇습니다, 전하.”
“좋아. 수고 많았네. 자네가 아주 큰일을 해 주었어. 내 그대의 공을 크게 보상토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전하!”
프리모의 말에 팔리모는 크게 고무되어 잔뜩 허리를 숙였다.
“그럼 돌아가서 기다리도록 하게.”
“예. 하오면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비단 단 하나뿐이지만 팔리모 덕분에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을 손에 넣게 된 프리모는 곧바로 믿을 만한 수하를 불렀다.
“이것을 제국의 베르그 공작 가문에 가져가도록 하라. 그리고 이 서신을 베르그 대공에게 전하면 그 나머지 일은 그쪽에서 알아서 해 줄 것이다.”
제국의 대공가인 베르그 공작가와 프리모 공작가는 혼인을 통한 인척 관계에 있었다.
당대 베르그 공작가의 가주인 플레툰 폰 베르그 대공과 프리모 공작은 고종사촌 간으로, 제국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대공의 모친이 바로 프리모 공작의 고모였던 것이다.
“후후, 이제 제국도 더 이상 발을 뺄 수는 없겠지. 그리고 제국이 개입하게 되면 국왕도 세를 키우긴 힘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법 아이템을 국왕이 독점하지 못하는 것이지. 후후후!”
“역시 놀라시는군요.”
쿠엔토와 알베르토 모두 알마리온의 말에 크게 놀랐다.
“정녕 주군께 그 많은 물건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이놈! 감히 주군의 말씀을 의심한단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아버님. 하지만…….”
“이놈이!”
“그만하세요. 놀라서 그런 것이니 괜찮습니다.”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아닙니다, 주군. 주군께서 그렇게 받아 주시다 보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럴 것입니다. 주군께서 너른 마음에 못난 제 자식을 높이 평가해 주시는 점은 이 아이의 아비 된 자로 참으로 기쁘고 은혜로운 일이지만 군신 간의 예의는 그 무엇으로도 범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너는 뭐 하느냐! 어서 주군께 머리 숙여 죄를 청하지 않고!”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알마리온은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노예인 그는 언제나 고개조차 들지 못하였던 삶을 살아온 그였으니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는 것보다는 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푸른하늘 님도 그렇고, 같은 충고를 하시더니……. 그러고 보니 전에는 대장도 비슷한 말을 하였지.’
얼마 전 알마리온은 푸른하늘과 한센으로부터 꽤나 충격적인 충고를 연이어 들어야 했다.
푸른하늘로부터 들은 충고는 조금 전 쿠엔토가 아들인 알베르토를 나무랐던 것처럼 군신의 예를 철저히 지키라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예절만을 따지는 것도 서로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어 마음이 멀어지게 만들 수 있지만, 지나치게 격이 없게 되면, 설사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저도 모르게 아랫사람이 상전을 능멸하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으며,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자신을 적대시하거나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에게는 그러한 모습은 공격당할 좋은 구실만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가족들 사이에도 올바른 훈육을 위해서는 적당한 격식이 필요한데 하물며 지휘 체계가 분명해야 할 조직에서의 이러한 행동은 더더욱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충고였다.
이러한 푸른하늘의 충고에 알마리온은 자신의 행동을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지만 보다 더 큰 충격적인 충고를 받은 것은 한센으로부터였다.
필립을 제거한 후, 그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들 중에서 마나 수련법을 찾은 알마리온은 이것을 한센과 요들에게 전해 주었다.
당연히 두 사람이 크게 기뻐하리라 생각했던 알마리온이었지만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요들의 경우에는 뛸 듯이 기뻐하였지만 한센에게는 쓰디쓴 충고를 들어야 했다.
요들의 일도 있어 한센과 요들이 좀 더 강해지길 원하여 한 행동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뼈아픈 충고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오늘 이런 큰 선물을 주었으니 내일은 또 어떤 선물을 주어 환심을 사려는 것이냐며 크게 꾸중을 하였던 것이다.
환심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센과 요들이 좀 더 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마나 수련법을 건네준 것임을 알면서도, 그리고 알마리온이 충격을 받을 것을 알면서도 한 충고였다.
실제로 알마리온은 정도 이상으로 자신의 것을 양보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알마리온의 모습에 한센은 언젠가 한번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가 그가 마나 수련법이라는 가치를 따지기 힘든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주자 결국 따끔하게 한마디 했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의 뼈아픈 충고가 자신을 위한 것들이었기에 내심 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행동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조심을 하였지만 저도 모르게 또다시 습관처럼 튀어나온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주군. 소관이 그만 주군을 능멸하였습니다. 이에 죄를 청합니다.”
“이는 비단 그대만의 잘못이라 할 수 없소. 나 또한 그만큼 잘못을 하였던 것이오. 하니 이번만큼은 나로서도 그대에게 죄를 주긴 힘들 것 같소. 하나 이번만이오. 앞으로 또다시 이러한 행동을 할 때에는 상응하는 벌을 내리도록 할 것이오. 알겠소?”
“감사합니다, 주군!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러한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지켜보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주군. 소인의 미욱한 자식 놈을 이렇듯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니 말입니다.”
“아닙니다. 단주가 아니었다면 나 또한 내 허물을 알아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감사는 오히려 내가 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나의 잘못된 점을 보면 지금처럼 꾸짖어 주십시오.”
“어이 그런 말씀을. 당치 않은 분부이십니다.”
“하하. 단주께서는 내가 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가 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좋은 충고와 조언은 나를 더욱 성장하게 만들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허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주군.”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습니다.”
“예, 주군.”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것이 천성이 되었든 아니면 어린 시절부터 눈치를 봐야 했던 자신의 환경에 의해 만들어졌던 것이든, 이제는 그것을 바꾸는 것 자체가 힘들다면 그것을 단점으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장점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에 하는 행동이었다.
“주군께서 말씀하신 정도의 물자라면 당분간 상단에도 여유가 생길 것 같습니다.”
포넬 4군의 보급기지를 기습 공격하였을 때, 알마리온은 적의 보급 물자 전체를 불태운 것이 아니라 그중 3분의 1 정도만 불에 타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땅속에 감추어 두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오늘은 쉬었다 돌아가도록 하세요.”
“예, 주군.”
알마리온이 밖으로 나가자 알베르토가 쿠엔토에게 물었다.
“주군께서는 그런 것을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아버님.”
“알아서 무엇하려고 그러느냐?”
“하지만…….”
“내 네게도 해 둘 말이 있다.”
“…….”
“궁금하다 해서 모든 것을 알려고 하지 말거라. 지나친 호기심은 네 몸은 물론 네 주변에까지도 화를 불러올 것이다. 알겠느냐?”
30년을 은밀히 왕실을 위해 일해 온 쿠엔토였다. 왕실 사람들을 대하면서 그가 깨달은 단 한 가지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스스로 알려 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알려고 해서도, 설사 아주 우연하게 알았다 하더라도 절대 알고 있음을 드러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여 아들에게도 같은 충고를 하는 것이었다.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은 화를 불러오는 첩경이라는 것을.
“예, 아버님.”
“적의 규모는?”
“2개 정규군단과 1개 천인대 규모의 중장보병 그리고 기사단까지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한센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적의 반격은 알마리온의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빨리, 그리고 강력하게 나타났다.
‘이런 정도로 강력하고 빠르게 반격을 취해 오다니. 이 정도의 적이라면 절대로 우리 제1의용군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다. 절대로!’
“너희는 지금 당장 이러한 정찰 내용을 남작님께 보고하도록 하라.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적의 동태를 살피며 소식을 계속 전하겠다고 하라.”
“예, 부군단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