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영웅들
“소관에게 1개 천인대, 아니 1개 백인대를 내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강을 건널 교두보를 확보하도록 하겠습니다, 군단장님.”
레드로의 말에 갈리 자작은 갈등하였다.
로엔 측의 입장에서는 롬 강은 타론 성과 함께 최후의 보루인 곳이었다.
사실상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지만, 설사 있다 하더라도 이 두 곳을 적에게 빼앗기면 왕국은 다시 일어설 여력도 사라지게 되었기에 이 두 곳은 로엔의 입장에서는 생명 줄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를 잘 알기에 포넬은 로엔의 얼마 남지 않은 숨통을 끊어 놓으려 했고, 지난 한 달여 동안 롬 강을 건너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당연히 방어하는 입장인 로엔 측에서도 적의 도강을 저지하기 위해 모든 힘을 기울여야 했고, 내일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때만큼은 국왕과 모든 귀족들이 합심을 하여 적이 롬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단합된 힘을 발휘함으로써 포넬의 노도와도 같은 공세를 어려웠지만 저지할 수 있었다는 점은 적의 강력한 공세를 막았다는 것과 함께 가장 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단결된 모습은 그때뿐이었다.
메르타니온은 국왕에 즉위한 이후 처음으로 자신과 귀족들이 단결된 모습을 보인 것에 크게 고무되어 공이 있는 자들을 치하하겠다고 발표하고 이를 위해 공적을 조사토록 하였고, 전장에 나온 자들 모두가 이러한 국왕의 명령에 아주 작은 공이라도 세우기 위해 무리한 일을 벌이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갈리 자작이 갈등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현재의 상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갈리 자작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때다 싶어 레드로의 의견을 무책임하고 공적을 쌓는 것에 눈이 멀어 무모한 말을 하는 것이라며 그를 비난하는 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국왕파에 속하는 갈리 자작이었기에 국왕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6군단이었지만, 실상 실질적으로 군단을 그리고 병사들을 이끌고 지휘하는 기사들 대부분은 귀족 파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있어서 레드로는 가문과 아버지를 배반한 변절자일 뿐이었다.
“부군단장은 지금 공에 눈이 어두워 말도 되지 않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강남의 적의 규모만 해도 무려 7개 군단이나 됩니다. 그중 저희 6군단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적군 또한 2개 군단입니다. 그런데 1개 천인대, 아니 1개 백인대 병력만으로 강을 건너 교두보를 마련하겠다는 부군단장의 말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아니 허무맹랑한 말입니다.”
“그만! 말들이 지나치다! 생각할 것이 있으니 부군단장만 남고 모두 나가도록. 각자 위치로 돌아가라!”
도를 넘는 말들이 계속해서 나오자 결국 참지 못한 갈리가 레드로만을 남게 하고는 모두를 내쫓았다.
“말해 보게. 정녕 그 정도 병력으로 교두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자작님. 자작님께서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알마리온 폰 혼테르 남작을 말입니다.”
“혼테르 남작? 아! 당연히 기억하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노예 출신인 그가 익스퍼트임을 인증한 것이 바로 자신이거늘.
“한데 갑자기 왜 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갑자기가 아닙니다. 자작님께서도 혼테르 남작이 12군단에 있던 시절 가장 마지막으로 강을 건너왔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자네, 괜한 기대를 하고 있군. 당시 그는 수영으로 강을 건너왔네.”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지가 않다니?”
“모두가 수영을 해서 건넜다고 알고 있지만, 혼테르 남작의 말에 의하면 당시 마지막까지 적진에 남아 있던 혼테르 남작은 수영을 하여 롬 강을 건널 정도의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6군단에 배속 받은 레드로를 위해 알마리온은 자신이 롬 강을 건넜을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하여 주었다.
“하면 어떻게 강을 건넜다는 것이지?”
“요즘 같은 갈수기 때면 이 지점은 수위가 낮아져 물이 허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확실한가?”
레드로의 말에 갈리의 눈이 빛이 났다.
“혼테르 남작이 직접 건넌 곳입니다. 게다가 강바닥도 자갈로 되어 있어 강을 건너는 것도 어렵지 않을뿐더러, 강의 남쪽은 갈대밭인지라 몸을 숨기는 것도 용이합니다.”
“흠…….”
알마리온이 탈출하면서 불을 놓아 강변의 갈대는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워낙 넓은 곳에 분포되어 있었기에 아직도 여전히 갈대가 무성했다.
“문제인 것은 습지인데, 그것은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강과 습지를 건너 이곳으로 이동하면 적의 후방으로 군을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확실히 레드로의 말처럼만 된다면 적의 후방으로 은밀히 군을 이동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인하게. 마침 군에 당시 혼테르 남작과 함께 강을 건넜던 병사들 중 몇이 남아 있을 것이네. 그들을 붙여 줄 것이니 일단 자네가 강을 건너 확인하고 돌아오게.”
“감사합니다, 자작님.”
이날 밤 레드로는 당시 알마리온과 함께 강을 건넜던 병사들 십여 명과 함께 어둠을 틈타 은밀히 강을 건넜다.
“설치는?”
“끝났습니다.”
나중을 위해 이들은 강물 속에 제법 굵은 쇠사슬을 묶어 놓았는데, 후에 군단이 강을 건널 때 이 쇠사슬을 끌어 올려 이곳에다 뗏목을 걸어 임시로 다리를 만들어 사용할 생각으로 한 일이었다.
쇠사슬을 모두 설치한 이들은 다시금 습지를 따라 이동을 하기 시작하였고, 일정한 거리마다 표시를 해 놓았다.
그렇게 목적지까지 표식을 설치하는 작업을 마친 이들은 날이 어슴푸레 밝아 올 무렵 자신들이 갔던 그 길을 따라 복귀하였다.
이처럼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지만 강을 건너는 계획은 곧바로 추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격을 취하기에는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지만, 이들만 강을 건넌다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다만 언제든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이들은 착실히 준비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의 기다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제1의용군으로부터 적의 전략이 항복을 받아 전쟁을 조속히 종결하는 것에서 점령으로 그 목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보고를 접한 메르타니온은 회의를 통해 대대적인 반격을 취해 하루라도 빨리 롬 강 이남으로 진격해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국왕 폐하의 명령이 내려졌네.”
“하면 이제 강을 건너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준비는 다 되었겠지?”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언제든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좋아. 하면 자네는 강을 건널 준비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게. 난 이웃하고 있는 9군단의 오웬 자작과 협의를 하고 오겠네.”
“예, 자작님.”
9군단의 오웬 자작과의 협의는 순조롭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전공을 세우는 것은 전장에 나온 장수라면 누구나 원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공을 세우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는 메르타니온의 공약도 있는 상황이라 없던 공도 만들어 낼 판에 이런 좋은 기회를 포기할 위인은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9군단장인 오웬 자작이 쉽게 갈리의 제안에 동의한 것은, 9군단으로서는 설사 이번 계획이 실패한다 하더라도 손해날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
레드로를 선두로 일단의 병사들이 어둠 속에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달이 없는 밤이기도 하였지만 강의 남쪽에는 너른 습지가 펼쳐져 있고 갈대도 무성하게 자라 있어 실상 이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을 건너는 이들의 움직임은 조심스럽기만 하였다.
그렇게 강을 건너고 주변에 퍼져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경계를 서며 지난번에 설치해 두었던 쇠사슬을 끌어 올려 뗏목을 걸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해야 했기에 시간도 오래 걸렸고 또 작업 도중 부상을 당하는 이들이 제법 나왔지만 결국 강을 가로지르는 뗏목으로 만들어진 다리가 완성되자, 그곳을 통해 대기하고 있던 6군단 병력이 차례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전에 만들어 놓았던 표식을 따라 무와 짚을 이용하여 습지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이동하였다.
무려 하루가 꼬박 걸린 일이었지만 포넬군은 이러한 로엔의 6, 9군단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처음부터 만약을 대비하여 상당히 먼 거리를 돌아가도록 길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다시 어둠이 짙게 내렸지만 레드로의 눈빛은 타는 듯 불타고 있었다.
“공격!”
이윽고 기다리던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선두 부대를 지휘하는 레드로의 입에서도 단호한 명령이 떨어지고, 적진을 향해 앞장서 달려갔다.
“공격하라!”
“와아∼!”
갑작스럽게 배후에서 나타난 적군으로 인해 포넬군은 제대로 된 대응조차 하지 못한 채 빠르게 무너졌다.
“서둘러 피신하셔야 합니다!”
“가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미 사방이 온통 적인 것을. 차라리 이곳에서 한 놈이라도 더 적의 목을 베겠다. 하니 그대들은 각자 알아서 탈출하도록 하라!”
포넬의 제2군단 군단장인 루딘 폰 베르크 자작은 결연한 의지로 검을 뽑아 들었다.
“어서! 여기 있다가는 그대들 또한…….”
베르크가 다시 한 번 수하들에게 각자 탈출할 것을 종용하려 하였지만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기다! 저기 적의 지휘관들이 몰려 있다!”
“아니! 어떻게 벌써?”
“막아! 적을 막아라! 자작님을 보호하라!”
“이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어둠 속에서 불쑥 솟아나듯 나타난 적군을 향해 베르크 자작을 지키기 위해 2군단 소속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으악!”
“악!”
사나운 기세로 달려드는 기사들을 상대로 로엔의 병사들은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하나 이러한 우세는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이내 막을 내렸다.
“컥!”
“으악!”
적의 지휘부를 발견했다는 병사들의 외침을 듣고 달려온 레드로의 검에 포넬의 기사들이 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이놈!”
레드로에 의해 수하들이 당하는 모습을 본 베르크가 레드로에게 달려들었다.
깡! 까강! 깡!
“이제 끝내야겠소. 잘 가시오!”
몇 차례 검을 겨루던 레드로가 마나 소드를 만들어 베르크를 베어 갔다.
팡!
“……!”
자신의 아들 또래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레드로가 평생을 검의 길을 걸어온 자신도 오르지 못한 익스퍼트였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는지 베르크의 눈은 온통 경악으로 가득했다.
“적장의 목을 베었다! 내가 적장의 목을 베었다!”
“와아∼! 적장이 죽었다! 적장이 죽었다!”
“와아∼!”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진 상태에서 최고 지휘관의 전사 소식이 퍼지자 포넬의 병사들은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한 채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기 시작했다.
대승이었다. 이날의 전투로 생포한 적군의 수는 무려 5천이나 되었고 사살한 적의 수가 3천이었으며, 막대한 양의 물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하나 이날의 승리가 가져다준 가장 준 의미는 롬 강 이남으로의 진출로, 로엔은 다시금 반격을 가할 소중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전원 옥쇄를 각오한 혈전을 벌임으로써 로엔군의 발을 철저하게 묶어 놓았던 발몬 남작이었지만 배후에서 또 다른 적군이 나타나자 이내 퇴각하던 아군에게 큰 문제가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온 사절인 알마리온이 친구이자 주군인 카즈모 백작의 시신을 수레에 실어 온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백작 각하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카즈모와의 대결에서 어깨뼈가 잘리는 큰 부상을 당했지만 안톤이 가지고 있던 포션과 치료 마법으로 움직이는 데에는 큰 불편함이 없었다. 다만 아직도 격한 움직임이나 충격을 받으면 여전히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렇게 주군의 시신을 정성껏 다뤄 주어서 감사하오.”
급히 만들긴 하였지만 나름 정성들여 만든 관에 담긴 카즈모의 시신은 깨끗이 목욕시킨 후 상처를 꿰매고, 그것도 모자라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마법 처리까지 되어 있었다.
아울러 관과 함께 가져온 또 하나의 상자에는 네 페니테를 비롯하여 카즈모가 평소 사용하던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자신들의 항복을 권유하기 위한 의도였든 아니든, 발몬은 주군이자 또한 오랜 친구인 카즈모를 이처럼 정중하게 대우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해했다.
“비록 적장이시긴 하였지만 백작 각하께서는 충분히 예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자였나? 자네를 그렇게 내게 돌아오게 한 자가 바로 이 젊은이였나?’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그대였소?”
“예.”
카즈모를 쓰러뜨린 것이 자신이냐는 질문에 잠시 발몬을 유심히 바라본 알마리온이 짧게 대답하였다.
“놀랍구려.”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토록 젊고, 유약하게까지 보일 정도인 청년이 포넬 최고의 검 중 한 명인 카즈모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운이 좋았다는 식의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망자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한 가지 물건을 더 가져오셨구려.”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페니테. 주군께서 늘 착용하고 계시던 저 아머 말이오.”
“그건 백작 각하의 물건입니다. 하니 당연히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네 페니테가 어떤 물건인지 분명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탐내지 않고 가지고 온 것은 솔직히 발몬으로서도 상당히 의외라고 여겨지는 일이었다.
마법 물품이 그리 흔한 것은 아니지만 작정을 하고 찾는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네 페니테와 같은 마법 물품은 결코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마법 물품들 중에서도 네 페니테와 같은 마법 물품은 그 짝을 찾아보기 힘든 최고의 것이었다.
“네 페니테가 어떤 물건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돌려주어 감사하오. 하지만 저것만큼은 받을 수가 없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페니테를 돌려받지 못하겠다는 말을 알마리온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주군의 평소 유지셨소. 전장에서 자신을 꺾는 자만이 네 페니테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말이오.”
“하지만…….”
“내게 있어서 최고의 선은 주군의 뜻을 따르는 것이오. 부디 부탁하건대 나로 하여금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해 주었으면 하오.”
주군을 둔 기사로서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가장 큰 죄를 짓는 일이었다.
한데 거기에 주군의 평소 유지까지 지키지 못한다면 발몬은 당장이라도 자결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부담을 느끼는 것이라면 잠시 저것을 맡아 준다 생각하시오.”
“저것을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주군께는 어린 아드님이 계시오. 그분이 그대에게 주군의 복수를 하러 오실 때까지 네 페니테를 맡아 주시오. 이렇게 고개 숙여 부탁하겠소.”
“으음.”
이렇게까지 말하자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네 페니테라는 저것을 보관토록 하겠습니다.”
“감사하오. 그럼 귀측의 권유에 따라 명예로운 항복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소.”
명예로운 항복.
용맹한 적에게 승자로서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이 조건부 항복은 승자에게도, 그리고 패자에게도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였다.
명예로운 항복을 한 패자 측에서도 부대를 상징하는 깃발을 앞세운 채, 무기를 지니고 당당하게 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귀측의 용단에 감사드립니다.”
초췌한 몰골이었지만 카즈모 백작의 시신을 앞세운 포넬군 제4군 잔여 병력이 당당하게 전장을 떠나갔다.
“하하하.”
메르타니온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그의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그의 이러한 웃음소리는 요즘 들어 전에 없이 잦았는데, 그가 이런 웃음을 짓기 시작한 건 알마리온과 레드로라는 두 명의 젊은 익스퍼트를 유입한 이후부터였다.
“참으로 대단한 것 같지 않나? 그 두 남작의 활약이 말이네.”
“그렇사옵니다, 폐하. 참으로 그들 두 젊은 남작의 활약이 눈이 부실 정도이옵니다.”
연이어 전해진 승전보에 따르면 알마리온과 레드로의 활약은 눈부신 것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승전으로 인해 왕도를 되찾을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다 할 것이옵니다.”
도르첸의 말처럼 동부와 서부에서의 승리는 로엔이 반격의 고삐를 죌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참으로 어렵군.”
“무엇이 말씀이시옵니까?”
“그 두 남작들 말이야. 누가 더 큰 공을 세웠는지 판별하기가 너무 어렵군.”
이미 공을 세운 이들에게 적절한 포상을 할 것이라 공언을 한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알마리온과 레드로가 세운 공은 어느 사람의 공이 더 크다고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드러난 공의 크기는 비슷하지만 드러낼 수 없는 공까지 생각한다면 혼테르 남작의 공이 더욱 클 것이옵니다.”
“하긴 그렇겠구려.”
제1의용군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벌어진 카즈모와의 혈투야 그렇다지만 4서클 마법사인 필립을 제거한 일, 그 과정에서 마법 아이템을 제작하는 일을 하는 드워프 노예를 왕실로 보낸 일 등은 드러낼 수 없는 그의 공이었다.
이러한 것까지 계산한다면 분명 알마리온의 공이, 롬 강을 건너 교두보를 마련하고 강을 건넌 6군단의 선봉으로 적장의 목을 벤 레드로의 공에 비해 확실히 눈에 띄는 것이었다.
‘폐하의 마음 역시 그들에게 가 있구나.’
즐거워하는 가운데 고민하는 메르타니온의 모습을 보면서 도르첸은 다시 한 번 그의 마음이 로엔달과 알마리온에게 기울어져 있음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엄청난 전공을 세운 그들 모두에게 큰 상을 내리고 싶지만…… 역시 그러지 않는 것이 그들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군.”
마음 같아서는 이번에 공을 세운 로엔달과 갈리 그리고 알마리온과 레드로 모두에게 당장에 승작은 물론, 영지까지 챙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일이라는 것을 메르타니온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들의 공적은 분명 큰 상을 받아도 좋을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그들에 대한 귀족 파벌의 견제가 심해질 것이옵니다. 아쉽지만 이번에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자제하심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분명 큰 공을 세웠고 그에 따른 포상을 한다 해도 누구도 반대할 수 없을 정도로 이들의 공은 뚜렷했다.
그러나 모난 돌은 정을 맞는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더욱이 왕궁에서 지나치게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적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적은 진실된 적뿐만이 아니라 동지들 속에서도 나올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 모든 적들을 물리치고 우뚝 서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그러한 일에 신경 쓰게 만들 때가 아니야. 지금은.’
앞으로도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왕실을 위해서 많은 일들을 해 줘야 할 이들이 처음부터 거친 정치판에 휘둘리는 것을 원치 않은 메르타니온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당장 많은 것을 쥐여 주기보다는 이들을 보호하여 더욱 단단한 기반을 닦을 기회를 만들어 주기로 결정하였다.
“그럼 그들에 대한 포상 문제는 공작이 알아서 처리토록 하시오.”
“예, 폐하. 그리하겠사옵니다.”
국왕의 집무실을 나온 도르첸은 재상인 프리모 공작을 만나기 위해 재상부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도르첸 공작.”
“이렇게 갑자기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마침 원수께서도 함께 계셨구려?”
“어서 오십시오, 공작 전하.”
재상인 프리모 공작의 집무실에서는 원수인 구스타프 폰 더글러스 후작 또한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어인 일로 이곳까지 친히 걸음을 하신 것이오, 도르첸 공작?”
같은 공작이기는 해도 왕족으로서의 상징적인 작위를 가지고 있는 도르첸에 비하면, 로엔 왕국의 공작의 작위와 영지를 가지고 있는 프리모는 모든 면에서 큰 차이가 나는 존재였다.
“아마도 원수인 더글러스 후작이 공작을 찾아온 것과 같은 이유 같구려.”
도르첸의 말에 프리모와 더글러스의 눈빛이 짧게 교환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동부 전선에서의 승전보를 전한 제1의용군 사령관 로엔달 자작과 6군단장 갈리 자작, 7군단장 클레이튼 자작, 9군단장 오웬 자작, 24군단장 티모시 자작, 카넬 자작, 드레인 남작이 올린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들은 이번에 모두 큰 공을 세운 부대들의 지휘관들과 영주들이었다.
“안 그래도 지금 관련자들이 올린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던 중이었소.”
“그러셨다니 이야기를 꺼내기가 훨씬 편하겠군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도르첸이 할 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전에도 공약하셨듯이 폐하께서는 이번에 빛나는 업적을 세운 제장에 대한 확실한 포상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아직은 포상을 논의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르첸 공작 전하.”
“무슨 말이오, 더글러스 후작? 하면 후작은 폐하의 공약을 무시하겠다는 것이오?”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하면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전하께서도 아시듯이 논공행상을 함에 있어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차후에 이로 인한 분란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들이 공을 세운 것은 맞지만 철저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 포상을 논의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확실히 더글러스의 말이 옳았다.
논공행상을 행함에 있어 그 옳고 그름은 늘 많은 잡음과 분란을 일으켰다. 심지어는 이에 대한 불만을 가진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역을 꾀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바로 논공행상이었다.
“후작의 말이 일리가 있음은 인정하오. 하나 폐하께서는 이미 공을 세운 자들에게 적절한 포상을 약속하셨고, 그러한 폐하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것이오. 게다가 후작 또한 적절한 포상은 군의 사기를 올리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소?”
반대할 명분을 찾을 수 없게 만드는 도르첸이었다. 그의 말처럼 전쟁 중에 적절히 행해지는 포상은 군의 사기를 올리는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흠. 하면 공작은 어느 정도의 포상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조용히 듣기만 하던 프리모가 도르첸에게 물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재상이신 프리모 공작과 원수인 더글러스 후작이 의논하여 결정하실 문제 아니겠소? 다만 폐하께서는 이번에 공을 세운 자들이 서운해하지 않게, 그리고 이번에 공을 세우지는 못한 다른 많은 귀족들에게도 공을 세우면 반드시 그에 따른 적절한 포상이 있을 것이라는 의지가 전달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참으로 어렵고도 난감한 주문이었다.
실상 메르타니온의 공약은 이들 프리모 공작과 더글러스 후작이 조장한 것이었다.
전쟁 발발 이후 계속된 패전으로 군을 장악하고 있던 귀족 파벌의 입김이 크게 위축되면서 메르타니온이 힘을 키우는 것을 두고만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롬 강 방어전을 치르면서 자신들 편에 속한 많은 이들이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그래서 프리모와 더글러스는 메르타니온이 그러했듯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메르타니온이 더 이상 힘을 키우지 못하게 하는 명분으로 삼으려 했다. 공을 세운 자들에 대한 포상을 내세워 국왕의 힘을 내리누르려 했던 것이다.
한데 처음으로 귀족 파벌에 속한 군의 지휘관들이 제 몫을 다해 주면서 롬 강을 지켜 냈으며, 아울러 적의 강력한 공격 의지 또한 확실하게 꺾어 놓았다.
결국 자신들이 내건 방법이 오히려 자신들의 의도를 깨뜨리는 명분이 될 줄이야.
“도르첸 공작의 말씀이 옳소. 폐하의 약속은 의당 지켜져야 하는 것이오. 아울러 군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적절한 포상이 있어야 할 것이오.”
“하하, 공작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이상 내가 할 말이 없군요. 하면 난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소.”
“그렇게 하시오.”
도르첸이 나간 후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두 사람이었다.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애초의 계획은 전혀 이것이 아니었는데 결국 엉뚱한 자들을 위한 판을 벌여 놓은 꼴이 되자 난감해진 두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국은 이번에도 폐하의 의중대로 되겠지.”
“하면 아까 말씀하시던 대로 포상 계획을 폐하께 올리시겠습니까?”
도르첸이 오기 이전, 이들은 이미 비슷한 내용으로 의논을 하였고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그 문제는 그 정도로 처리하도록 해야겠지.”
“알겠습니다.”
“정작 지금 우리가 걱정할 것은 그것이 아니네. 폐하께서 어떻게 그 물건을 손에 넣으신 것인지와 앞으로도 그와 같은 물건을 계속 만들 능력을 가지고 있나 하는 것이네.”
중요하게 다루었던 포상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이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시급하고 우려스러운 문제, 바로 마법 아이템에 대한 문제였다.
정식으로 보고되진 않았지만 제1의용군이 퇴각하는 포넬의 4군을 상대로 마법 아이템을 사용했다는 것을 이들 또한 이미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그건 아무래도 적이 만든 것을 탈취하여 사용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나?”
로엔 왕국 유일의 중급 익스퍼트라는 대단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정치적인 감각이나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는 더글러스였다.
‘그래서 부려 먹기에는 쉽지만…….’
“아니라는 것입니까?”
“생각해 보게. 만약 그런 물건을 얻었다면, 자네라면 아무리 급하더라도 당장 모두 써 버리겠는가?”
프리모의 핀잔 섞인 말에 더글러스의 굵은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프리모가 아무리 정치적인 동반자라고는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상전이 아니었다.
“…….”
“아닐 것이야. 게다가 제1의용군의 로엔달 자작이라면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네. 결국 최소한 국왕께서 그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을 입수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네.”
많은 사람들이 국왕의 최측근을 꼽으라면, 국왕파에 속한 이들까지도 주저 없이 도르첸 공작을 꼽지만 프리모는 알고 있었다.
메르타니온 국왕의 진실된 최고 측근은 바로 로뎀 폰 로엔달 자작이라는 것을.
그런 자라면 설사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그와 같은 귀중한 물건을 모두 사용해 버리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고, 그의 이러한 확신은 정확한 것이긴 했다.
하나 그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면, 마법 아이템이 전달된 것은 이미 2개월 전쯤이라는 것과 이제는 그것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크게 걱정하실 것은 없을 것입니다.”
“포넬의 귀화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를 말하는 것인가?”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이 처음 사용되었을 때 로엔 측은 크게 당황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로엔에 귀화한 포넬 출신자들에게 마법 아이템에 대한 것을 조사했던 일이 있었다.
그 결과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이 제작이 용이하지 않아 포넬에서도 매우 귀중하게 다루어진다는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안심할 수 없는 일이네.”
단 한순간이라도 방심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왕궁이다. 언제 어디서 비수가 날아올지 모르는 곳, 그곳이 바로 왕궁이었다.
‘그런 나태함이 자네로 하여금 더 이상의 것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네. 하긴 그러했기에 아들이 그런 일을 벌이는 것조차 몰랐겠지.’
모두 쉬쉬하고 있었지만 더글러스 후작과 그의 차자인 레드로의 일은 모르는 이가 없었다. 실상 그 일로 인해 더글러스 후작은 정치적인 면에서도, 부인이었던 이멜다와의 관계, 레드로와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인간적인 면에서도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
특히 이들 두 부자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은 원인을 제공했던 바로 그 사건.
더글러스 후작의 장자인 하알란의 경우에는 동생의 연인을 빼앗은 질투의 화신으로 낙인찍히면서 어디에서도 그를 환영하는 이들이 없었다.
“폐하의 주변에는 아직도 우리가 알 수 없는 힘과 사람들이 있네. 자네는 제1의용군에 게르혼의 두 부족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도 잊었단 말인가? 우리 중 폐하가 게르혼족과 그런 협약을 맺었다는 것을 사전에 알았던 자가 있었나?”
“…….”
할 말이 없어진 더글러스였다.
“대책을 세워야 해, 대책을. 이대로 계속해서 야금야금 밀리다간 나중에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야.”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막상 대책을 세우려 해도 마땅한 대책이라는 것이 없었다.
아니,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 하나. 로엔 왕국의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어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존재가 한 곳 있었다.
‘제국을 끌어들여야 해. 그래야만 폐하를 제어할 수 있다. 그동안은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계속하여 거절하였지만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더 이상 발을 뺄 수는 없겠지.’
제국을 끌어들여서라도 메르타니온이 세를 쌓아 가는 것을 막겠다는 생각을 하는 프리모였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왕국에 어떤 손해가 발생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프리모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단지 말만으로 제국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마법이라면 일단 체임버스 남작부터 뒤져 봐야겠군. 그동안 신병을 이유로 두문불출하고 있는 그의 행동이 가뜩이나 이상했는데 말이야.’
“그 문제는 후작도 좀 더 알아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나도 나대로 최대한 알아보겠지만 말이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일 보도록 하게. 자네야말로 지금 가장 바쁜 사람이 아니겠나?”
“예. 그럼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알마리온 폰 혼테르 남작에게는 다음과 같이 포상토록 한다. 우선 남작에게 헤이그haig라는 미들 네임을 하사토록 한다.”
‘전설’이라는 뜻의 헤이그라는 미들 네임을 하사한다는 발표가 있자 약간의 소요가 일었다.
미들 네임이라는 것이 이름 그 자체만으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국왕이 이름을 내린다는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이었다.
“또한 3만 골드의 포상금과 함께 소렌토에 저택 한 채를 하사한다.”
얼핏 보기에는 대단한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비영주 귀족들의 1년 연금은 최하위 작위인 남작의 경우가 3만 골드였다. 그리고 한 등급씩 올라갈수록 3만 골드가 추가되어 지급된다.
따라서 그가 지급받게 될 연금을 1년 치 더 받게 된다는 것뿐이었다.
또한 왕도인 소렌토에 저택을 하사하겠다고 하였지만, 그것도 소렌토가 적의 수중에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이러한 조치는 단지 생색내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나 마지막 내용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알마리온 헤이그 폰 혼테르 남작을 제1의용군 부군단장에서 제1의용군 군단장으로 임명한다. 아울러 현재 영주는 물론 그 일가친척 모두가 적에게 살해당해 영주가 없는 조른 남작 영지의 임시 영주로 임명한다. 이상이다.”
확실히 알마리온을 임시긴 하지만 조른 남작 영지의 영주로 임명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조치였다.
실상 이번 포상에 있어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었다.
비록 임시긴 하여도 알마리온을 조른 남작 영지의 임시 영주로 임명한 것은 지나친 파격이라는 것은 국왕을 믿고 따르는 자들 또한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하나 메르타니온은 다른 부분에서 양보를 하면서도 이 부분만큼은 끝까지 결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자신을 이롭게 한 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상한다는 그의 평소 지론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한 메르타니온의 지론이 힘을 키우기 위한 의도된 것이었든 원래의 성격이 그러했던 것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이러한 그의 지론이 철저하게 지켜지면서 비록 처음에는 반발을 하였던 자들 또한 언젠가 공을 세우면 그만큼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가지게 되어 더욱 분발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포상 내용이 모두 전달되자 포상을 받은 자들의 표정은 단 두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불만족스러워했다.
제1의용군 사령관인 로엔달 자작의 경우 포상금 등과 함께 7군단과 24군단의 잔여 병력을 통합하여 구성한 25군단의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그동안 익스퍼트이면서도, 그리고 지휘관의 능력 또한 여러 차례 입증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더글러스 후작의 적극적인 방해로 로엔달은 제대로 된 군단을 지휘해 본 경험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이번에 25군단이 맡겨진 것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규군단을 지휘하는 의미 있는 일이긴 하였지만, 그가 세운 공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이처럼 뚜렷한 공을 세운 로엔달과 알마리온이 이런 정도의 포상을 받았으니 그보다 못한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포상의 내용 또한 잔뜩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별 볼일 없던 것이었으니 불만을 가질 만도 하였다.
다만 한 가지. 이번에 새롭게 정해진 규정에 따라 군공이 있는 자들 모두에게 점수를 매겨 훗날 전쟁이 종결된 이후 이러한 점수를 합산하여 그에 따른 제대로 된 포상을 하겠다는 발표마저 없었다면, 군의 사기를 높이겠다고 시작한 포상이 오히려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자작님. 자작님도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그럼 앞으로도 자네의 행보를 주시하겠네. 수고하게.”
25군단장으로 임명된 로엔달은 부대가 왕도인 소렌토 회복을 위한 작전에 투입되기로 결정되면서 며칠 후에 부대 전체가 이동해야 했다.
“감사합니다, 자작님. 소관 또한 자작님의 건승을 기원토록 하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주군.”
“축하드립니다, 남작님.”
제1의용군이 주둔하고 있는 조른 성으로 돌아오자 모두의 축하가 이어졌다.
“축하드리오.”
“쳇! 힘은 우리가 다 썼는데 상은 제가 다 받았건만 축하는 무슨.”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혼자만 상을 받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특히 두 분께는 더더욱 말입니다.”
“허허, 우린 이미 받을 만큼 받았거늘 무엇이 서운하겠소? 안 그런가?”
“그거야 애초의 약속을 이행한 것이지요. 만날 그렇게 허허거리시니까 지들끼리만 나눠 먹는 것 아닙니까!”
푸른하늘의 말에 툴툴거리는 하얀이리였다.
“하하, 그렇다고 그렇게 서운해하지 마세요, 하얀이리 님.”
“음? 왜? 네가 따로 챙겨 주려고? 그렇다면야 감사히 받도록 하지. 하하하!”
처음에는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으르렁거리던 하얀이리였지만 지금은 알마리온의 말이라면 설사 그것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라 해도 일단 믿고 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알마리온에 대한 신뢰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1의용군에 속한 자들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그에 대한 강한 신뢰를 보이고 있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공이라는 것은 모두가 함께했으니 세울 수 있는 것이지 어느 하나가 잘했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음? 하하하! 그렇지! 바로 그거야, 그거! 암! 당연한 말이지. 안 그렇습니까, 푸른하늘 님?”
실상 제1의용군의 활약은 드레인 남작 영지를 포위 공격하고 있는 포넬의 16군을 궤멸시킨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하나 알마리온은 이들을 치켜세워 줬다.
어찌 보면 약은 계산으로 한 행동일 수도 있었지만 이것은 알마리온의 진심이었고, 그러했기에 모두가 그에게 강한 신뢰를 보이는 것이었다.
“마침 다들 모였으니 우선 몇 가지 처리해야 할 일들을 먼저 하도록 하지요.”
“…….”
알마리온의 말에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일순 바뀌었다.
“먼저 부대 조직을 개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3개 대였던 편성을 4개 대로 재편하겠습니다. 칸 경.”
“예, 군단장님.”
“칸 경을 제1의용군 부군단장직에 임명합니다. 아울러 제1대를 맡아 주십시오. 제1대의 병력은 1천으로, 제1의용군의 주력이 될 것입니다.”
“충!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드란 경, 경은 제2대를 맡아 주십시오. 병력은 5백입니다.”
“충!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이후에도 알마리온의 발표는 계속되었다.
“푸른하늘 님께서는 부족의 전사들로 구성된 제3대를 맡아 주십시오.”
“그러리다.”
“하얀이리 님 또한 부족의 전사들로 구성된 제4대를 맡아 주십시오.”
“그러지.”
“웹 경은 직할대 부대장입니다. 그리고 요하네스 경은 내 부관인 동시에 군단 행정관에 임명합니다.”
“충! 성심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대를 재편성한 내용을 발표한 이후에도 알마리온의 지시 내용은 계속 이어졌다.
“폐하와 원수부의 명에 따라 당분간 제1의용군은 이곳 조른 성에 주둔합니다.”
“하면 공세를 멈추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칸 경.”
“아니, 뭐 그런 엉터리 명령이 다 있어!”
모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알마리온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4군이 괴멸되면서 카이네 백작 영지 이북에서 조른 남작 영지 사이에 있는 14개 영지에는 점령을 유지하기 위한 소수의 적들만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격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얀이리 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냥 밀고 내려가기만 하면 모두 다시 찾을 수 있는 땅들 아닙니까? 도대체 윗대가리 놈들은 머릿속에 똥만 들어 있는 것이랍니까?”
요들의 거친 항변이었다.
“웹 경! 말을 가려서 하게.”
“아니, 대장! 아니 아니, 드란 경께서도 이 명령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모르셔서 그러십니까?”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는 명령에 살고 죽는 군인들이네. 상부의 명령이 그러하다면 따라야 하는 것이 우리 입장이야.”
“상부의 설명에 따르면 7군단과 24군단 잔여 병력을 합쳐 새롭게 구성한 25군단이 왕도를 수복하기 위한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곧 이동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면 우리 뒤쪽에는 더 이상의 아군 병력이 없는 것입니까?”
“카넬 자작 영지의 영지군 일부가 있긴 하지만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입니다.”
왕도를 되찾을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지금 그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것이 설사 실질적인 의미보다 상징적인 의미가 더욱 강하다 하더라도 왕도를 빼앗긴 지 벌써 2년여인 지금까지도 왕도가 적의 수중에 있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납득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이 수긍해야 하겠군요.”
“그렇습니다. 하니 그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도록 하십시오. 요하네스 경.”
“예, 주군.”
“영지에 대한 문제는 전적으로 경에게 맡기도록 하겠소. 경도 할 일이 많겠지만 이곳 영지민들을 위해서 좀 더 분발해 주도록 하십시오.”
“예, 주군. 주군의 명성에 누가 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겠소. 그리고 일단 이곳에 주둔하면서 충분한 휴식과 함께 훈련을 실시하도록 하십시오.”
“쳇! 또 훈련인가?”
“허허, 왜? 덕분에 전투에서 그만큼 생존하는 형제들이 더 많아지지 않았는가?”
“아, 그거야 그렇지만 어쨌든 힘드니까 그렇지요. 무슨 훈련이 실전보다 더 힘듭니까?”
“하하하.”
“허허허.”
하얀이리의 엄살에 모두가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