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카즈모 백작 (9/70)

카즈모 백작

“후∼!”

마나 수련을 마친 알마리온은, 매번 느끼는 것이었지만 마나 수련을 할 때마다 쌓여 가는 마나의 충만함을 느끼며 뿌듯한 느낌에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밤을 새워 버렸네.”

창밖이 어슴푸레 밝아 오고 있었다.

마나 수련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이후 이처럼 수련을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아졌다.

“윽!”

아직도 전날 입었던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아 욱신거렸다.

외상이야 남작에 봉해지던 날 쿤테르로부터 선물로 받은 포션으로 치료를 하여 겉보기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완치되어 보였지만 그 충격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여전히 움직일 때마다 결려 왔다.

그렇게 고통이 느껴지자 자연스레 어제의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정말 대단했어. 하지만 그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내 실력이 아닌 그의 자만심 때문이었어.”

마법사란 존재를 직접 상대해 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첫 상대치고는 그에게 지나치게 강한 자였다.

만약 필립이 처음부터 그를 생포하여 마법 실험의 재료로 쓸 생각이 아니라 그를 적으로만 규정하고 상대를 하였다면 알마리온은 필립의 적수가 되긴 힘들었다.

중급 정령술사와 4서클 마법사는 서로 비슷한 능력이었지만, 필립은 수십 년을 마법을 수련하면서 기초부터 실력을 쌓아 온 자라면 알마리온은 비록 중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긴 했지만 단지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애송이에 불과했다.

“어쨌든 어제의 대결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그 경험을 통해 습득한 것은 학습만으로 습득한 것과는 달리 쉽게 잊지 않는다.

특히 어제와 같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상황에서 체득한 것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런 의미에서 필립과 같은 고위 마법사와의 결투는 그의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실제로 알마리온은 필립과의 결투에서 그가 사용한 마법을 통해서 그동안 단순하게만 활용하였던 정령들을 보다 폭넓게 그리고 강력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군. 단단한머리의 말에 의하면 어제의 그 마법사는 중요한 모든 것을 로브에 넣고 다닌다고 했어. 그렇다면 그 안에 마법서가 들어 있을지도 모르겠네.”

마법사의 마법을 보면서 정령을 활용하는 방법을 체득한 알마리온은 마법서라는 것을 보면 좀 더 많은 정령의 활용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한쪽에 챙겨 놓은 필립의 로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뭐야, 이게?”

이건 꺼내도 꺼내도 끝이 없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이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 있는 것이야?”

필립은 남을 절대로 신뢰하지 않았다. 그가 이 세상에서 신뢰했던 이는 단둘뿐으로, 주군인 고메즈 대공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의 딸뿐이었다.

오죽하면 사람을 믿지 못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제자도 들이지 않을 정도였겠는가.

그런 그가 딸이 자결을 한 이후 주군인 고메즈 대공에게까지 버림을 받게 되자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 모든 것을 마법 물품이기도 한, 평소 늘 착용하는 로브에 넣고 다녔다.

그렇게 선대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60 평생을 살아오면서 얻은 모든 것이 고스란히 그의 로브 안에 담겨 있었으니 그 양이 오죽 많을까.

“종류도 참 다양하네.”

필립의 가문인 아르몬 후작가는 그 역사만 해도 8백 년이나 된 마법사 가문으로 포넬에서 가장 유서 깊은 마법사 가문이었다.

처음 남작 가문으로 시작한 아르몬 가문이 당대에는 후작 가문으로까지 성장을 하였고, 이렇게 성장을 하면서 획득한 온갖 것들이 지금 알마리온의 손에 있는 로브 안의 주머니에 들어 있었으니 그 종류도 종류였고 양 또한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한데 마법서는 없나?”

엉뚱한 것들만 자꾸 나오자 조금은 짜증이 나던 알마리온이 로브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저도 모르게 한 말이었다.

“어? 이것은 분명?”

손에 느껴지는 느낌은 분명 두툼한 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을 꺼내 보니 손에는 두툼한 마법서 한 권이 쥐여 있었다.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었네.”

실로 우연히 사용 방법을 알게 된 알마리온은 그동안 꺼낸 엉뚱한 것들을 다시 주머니 안에 넣고는 다시 한 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마법서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혹시 마나 수련법도 있을까?”

이 정도로 온갖 것들이 들어 있다면 어쩌면 마나 수련법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역시!”

혹시나 싶었지만 워낙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이 주머니 안에서 나왔기에 기대를 하였고, 그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무려 다섯 권이나 되는 마나 수련법이 쥐여 있었던 것이다.

그가 마나 수련법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은 이제는 가신이 된 한센과 요들 그리고 알베르토를 위해서였다.

다른 가문의 기사들이 모두 마나 수련법을 가지고 있어 마나 수련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마나 수련법을 가지고 있는 기사들의 가문은 오히려 극소수에 불과하였고, 그러한 기사들을 가신으로 둔 가문은 로엔 왕국의 최고의 귀족 가문들 중에서도 몇 되지 않았다.

가신의 가문이 강성해지는 것은 자칫 그 주인 된 자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가신의 가문에 힘을 키울 기회를 주는 가문은 실상 없었다.

때문에 아무리 여분의 마나 수련법이 생긴다 하더라도 이를 가신의 가문에 넘기는 일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알마리온은 확실히 특이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다면 당해도 싸지, 뭐.”

어린 시절을 노예 신분으로 살면서 자신이 불우하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이 능력이 없어 그러한 험한 일들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알마리온이었다.

“잘됐다. 이것들을 세 사람에게 나눠 주면 되겠어.”

찾고자 하는 것을 모두 찾은 알마리온은 일단 가신이 된 세 사람에게 나눠 줄 마나 수련법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싸늘한 침묵이 막사 안을 감돌았다.

후방의 거점인 조른 성이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1개 천인대라도 성에 더 주둔시켰다면.’

때늦은 후회였다.

카즈모는 4서클 마법사인 필립과 또 다른 한 명의 마법사 그리고 5백 명 정도의 병력이라면 조른 성과 같은 작은 성은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지만,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자 더 많은 병력을 그곳에 배치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전면에 자신들과 비슷한 규모의 적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후방을 튼튼히 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병력을 뒤로 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 지금이라도 결정을 해야 한다.’

이미 포위된 데다가 보급이 언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 더 이상 이곳에서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퇴각을 한 이후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금 공세를 취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돌아간다.”

“…….”

퇴각한다는 카즈모의 결정에 반대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들도 지금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은 퇴각 후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금 공세를 취하는 것이라는 카즈모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퇴각을 결정하기는 하였지만 그 자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과 뒤로 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태에서 최대한 병력을 보존한 채 퇴각을 하려면 적들의 눈을 속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전면에 대치하고 있는 적의 눈을 속이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이들의 눈을 속이지 않고서는 퇴각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막중한 임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단 한 사람뿐이었다.

‘역시 믿을 만한 자는 발몬밖에는.’

그런 그의 생각이 서로 통했음인가? 서로 눈길이 마주치자 발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이 적의 발을 묶어 놓는 임무를 맡겠다며 스스로 나섰다.

“소관에게 2개 천인대의 병력을 주시면 본대가 퇴각하는 동안 전면의 적을 막도록 하겠습니다.”

“자신 있는가?”

“예, 백작 각하.”

담담한 말투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걱정 말라며 무모한 자신감을 내비치거나 아니면 죽음으로써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결연함을 느끼게 하는 대답보다 더욱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카즈모였다.

“그럼 발몬 남작이 이곳에 남도록 한다. 각 천인대에서 가장 뛰어난 병사들을 추려 2개 천인대를 구성한다.”

“아닙니다, 백작 각하. 이런 일에 군의 최정예를 투입한다는 것은 낭비이옵니다. 차라리 가장 늙고 약한 병사들로 2개 천인대를 만들겠습니다.”

가신이긴 하지만 유일하게 무엇이든 마음을 터놓고 모든 것을 의논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이기도 한 발몬에게 사지에 남아 적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려야 하는 카즈모는 그의 생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여 주기 위해 정예들로 2개 천인대를 구성하라 하였지만, 그러한 카즈모의 결정은 이내 발몬의 반발에 부딪쳤다.

“그냥 내 지시에 따르도록 하라, 발몬 남작!”

“불가합니다. 백작 각하께서 치욕을 무릅쓰고 퇴각을 결정하신 이유가 무엇이옵니까? 바로 훗날을 위해서입니다. 한데 군의 최정예들을 빼다니요? 그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각하, 그것은 발몬 남작의 생각이 옳습니다.”

“으음.”

카즈모도 스스로 자신의 명령이 부당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일한 친구인 발몬을 사지에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에 큰 심적 부담을 느낀 그로서는 어떻게 하든 그의 생환 가능성을 높여 주기 위해 스스로도 부당하게 생각하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하나 발몬의 반대와 그동안 조용하기만 하던 다른 지휘관들 또한 모두가 그러한 명령의 부당함을 지적하자 결국 카즈모 또한 물러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겠네. 하면 남작의 뜻대로 하도록 하게.”

“충!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하도록 하겠습니다!”

발몬 또한 주군이자 친구인 카즈모가 왜 스스로도 부당하게 여기는 명령을 내렸는지 잘 알기에 그의 심적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반드시 살아서 귀환하겠다고 말하였고 그제야 카즈모는 심적 부담감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하면 조른 성에 있는 적은 누가 상대하겠는가?”

“소관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나선 것은 15군단의 부군단장인 에인세 남작이었다.

“소관에게 1개 천인대만 주시면 조른 성에서 적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맡기겠네.”

“충!”

그렇게 두 곳의 적을 상대할 자들을 결정하자 카즈모는 은밀히 퇴각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잘 부탁하네.”

“이곳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주군.”

“미안하네. 자네에게 이런 큰 짐을 지워서 말이네.”

“주군!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기사인 제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스러운 의무입니다.”

주군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기사에게는 가장 영광스러운 의무였다. 특히 포넬 왕국처럼 오랜 내전이 치열하였던 곳에서는 주군을 위해 희생한 기사들은 영웅 대우를 받았다.

주군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기사들의 이야기는 대대로 전해졌으며 부풀리고 부풀려져서 이제는 그런 자들을 신격화할 정도였다.

“후. 알겠네. 그럼 부탁하네.”

“충! 그동안 주군을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건승하십시오.”

“만약 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네의 아내와 아이들은 내가 끝까지 돌보도록 하겠네, 친구.”

“하하! 당연하지! 그럼 그 정도도 안 해 줄 생각이었나? 하하하.”

주군과 가신이 아닌 친구라는 표현을 사용하자 발몬 또한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그에게 편히 말하였다.

“하하.”

“내가 자네에게 한마디 해도 되겠나?”

“물론이지. 자네가 아니면 그 누가 내게 충고를 할 수 있겠나.”

“처음부터 자네는 이 전쟁을 반대했지.”

발몬의 말처럼 카즈모는 고메즈 대공의 측근들 중 유일하게 이번 전쟁을 끝까지 반대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국 전쟁이 결정되었고, 카즈모 백작은 대공의 결정에 따라 전장까지 나와야만 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고메즈 대공은 무서운 자이네.”

“알지.”

“그도 자네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네의 진정한 능력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음…….”

카즈모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능력을 모두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다.

그가 이처럼 자신의 능력을 모두 드러내 보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이유는 바로 그의 주군인 고메즈 대공 때문이었다.

고메즈는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를 결코 가만두지 않았다.

자신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는, 아무리 그가 자신의 수하라 하더라도 결국 잠재적인 적이라 여기는 고메즈였다.

그의 이런 생각 때문에 그가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 중에도 많은 아까운 이들이 사라져 갔고,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도 의심이 되는 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였다.

그런 고메즈였기에 카즈모는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즈모는 중급의 익스퍼트로서 포넬의 젊은이들에게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대로 패장이 되어 돌아간다면 자네는 크게 문책을 당할 것이야.”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조금 전 내게 약속했지? 내 가족들을 돌봐 주겠다고 말이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 주게나.”

“…….”

그것이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필요하다면, 그리고 친구이자 주군인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발몬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가족들도 베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카즈모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넬 믿겠네.”

“쳇! 괜한 약속을 한 것 같군. 이제 앞으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도 상당히 귀찮아질 것이니 말이야.”

“훗! 자넨 그 게으름이 문제야. 그것만 아니었음 아마 포넬은 자네 손에 들어갔을 것이야.”

“하하하, 내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 줄 몰랐군.”

발몬의 말은 전혀 허풍이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카즈모 백작을 믿고 따랐다.

“어쨌든 살아 돌아오게. 내겐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자네가 꼭 필요해. 알지?”

“훗! 가능하다면.”

“아니!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 해.”

“명령인가? 아니면 부탁?”

“부탁이네.”

“쳇! 명령이라고 하면 안 들어주려 했더니.”

“후훗! 그럴 것 같았다네.”

“알았네. 그 부탁 꼭 들어주도록 하지.”

“그래. 그럼…….”

굳세게 맞잡은 손에서 친구이자 주군인 카즈모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미안하네. 아무래도 그 부탁 들어주진 못할 것 같네.’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설사 적의 눈을 속이지 못한다 하더라도 퇴각하는 아군을 위해서 적의 주력을 최대한 붙들어 두려면 자신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으로 자네와도 마지막이군.’

“그럼 이만 가 보게.”

결국 카즈모는 힘없이 돌아서야만 했다. 그에게는 그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은가.

그렇게 이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인 발몬을 남겨 놓은 카즈모는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어둠 속을 헤치며 조용히 떠나갔다.

“척후로부터의 보고는?”

“적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합니다.”

“그런가? 알겠네. 선두에 좀 더 속도를 내라고 하게.”

“예, 백작 각하.”

구태여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이미 퇴각하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 가고만 있었다.

적으로 인해 앞뒤가 포위당한 상태라는 것을 모두 아는 병사들의 급한 마음이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빠르게 만든 것이었다.

“속도를 조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걷는 병사들의 모습에 15군단장 볼코프가 우려가 되는 듯 말했다.

“각 부대의 대열과 거리만 흐트러지지 않게 하게.”

척후 부대를 앞서게 하고 각 부대 간에도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하여, 기습 공격을 당해도 모두가 한꺼번에 당하지 않고 언제든지 서로 간에 호응할 수 있도록 대열만 유지된다면 구태여 속도를 조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카즈모는 볼코프의 의견을 기각하였다.

실상 퇴각하는 이들의 모습은 속도가 조금 빠르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교본에서 말하는 퇴각 시의 요령을 완벽하게 따르고 있었다.

하나 운명의 신은 이들이 이대로 귀환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준비는?”

“다, 다 되었습니다, 로엔달 자작님.”

유난히 주눅이 든 목소리로 로엔달의 질문에 답을 하는 안톤이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스승인 쿤테르가 와 있어야 할 일이지만 마법 아이템을 분석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는 현재 왕궁에 남아 있었고, 병사들의 치료를 위해 그의 제자인 1서클 마법사인 안톤이 제1의용군과 함께 전장에 나와 있었다.

지난밤, 앞과 뒤를 포위당한 적이 분명 퇴각을 할 것이라 판단을 한 로엔달은 조른 성에서는 하룻밤만을 머물고 일부 병력만을 남겨 놓은 채 은밀히 성을 빠져나와 적이 이동할 것으로 예상되는 곳에 미리 함정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명령하면 곧바로 작동시키도록.”

“예? 예…….”

이들이 설치해 놓은 함정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알마리온이 습득하여 국왕에게 전달된 바로 그 마법 아이템 중 일부였다.

메르타니온은 자신의 충복인 로엔달이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주길 바라고 있었다.

이는 비단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그를 키워 주겠다는 정도의 생각이 아니었다.

전쟁 초반 갑작스러운, 게다가 강력한 적의 공격에 미처 대응하지 못하면서 적지 않은 수의 영주들이 포넬군에 의해 포로가 되거나 죽었고, 이런 이유로 주인 없는 영지가 제법 생겨났다.

그곳들 중 한곳을 로엔달에게 줌으로써 정적인 귀족 파벌들을 견제하는 한편 보다 많은 힘을 키워 자신의 힘 또한 강력해지길 원하고 있었다.

하여 20개의 마법 아이템 중 5개를 로엔달에게 건네주어 그가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었다.

“시작하게.”

“예.”

충분히 적이 함정에 빠졌다고 판단한 로엔달이 안톤에게 마법 아이템을 작동하도록 하였고, 이에 안톤은 주문을 외워 마법 아이템을 작동시켰다.

쾅! 콰앙! 쾅! 쾅!

마법 아이템이 동시에 작동하면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거대한 화염들이 빠른 속도로 퇴각하고 있는 포넬군을 덮쳤다.

한데 불과 5개의 마법 아이템을 사용한 것치고는 그 위력이 너무나도 엄청났다.

실상 마법 아이템 1개로는 사방 10여 미터 정도가 피해를 줄 수 있는 범위였다. 결국 5개의 마법 아이템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아무리 넓게 잡아도 그 피해 범위는 불과 50에서 60여 미터.

한데 지금은 포넬군의 대열 거의 대부분이 거대한 화염에 휩쓸렸고, 마법 아이템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염에 의한 열기가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곳까지 그대로 전달될 정도로 가공할 위력을 보이고 있었다.

“이럴 수가…….”

그런 가공할 위력과 엄청난 광경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제1의용군의 병사들 모두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으…….”

저도 모르게 온몸이 떨려 왔다.

심지어 로엔달조차도 난생처음 본 광경에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을 정도였다.

‘저것이 정녕 그 아이의 능력이란 말인가?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 자신도 정령술사였다. 그것도 알마리온보다 한 단계 높은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상급 정령술사였고,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도와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런 일을 벌인 알마리온은 중급의 정령술사였다. 당연히 그의 능력만으로는 절대 이런 정도의 위력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 로엔달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로엔달은 미리 함정을 만들 것을 지시하면서 알마리온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안톤이 마법 아이템을 터뜨릴 때 그와 동시에 정령을 이용해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이런 정도까지 기대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도 한때 중급 정령술사로서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 그도 필립과 결투를 벌이기 전의 알마리온처럼 정령 마법이라는 것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그 또한 단지 자신이 소환할 수 있는 바람의 정령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활용 방법밖에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그에 의해 뭉친 몇몇 정령술사들 모두가 그러했고, 이는 정령술사가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면서 그 맥이 끊겼기 때문에 발전이 아니라 퇴보가 된 때문이었다.

‘그날 마법사와의 결투에서 많은 것을 얻었던 모양이구나. 그래, 그렇게 마음껏 비상하거라. 그게 그녀를 위해서도, 너 자신을 위해서도 최선이니.’

알마리온의 성장에 로엔달은 진심으로 기쁜 마음이었다.

‘역시!’

마법 아이템이 작동하면 곧바로 정령을 이용하여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라는 로엔달의 명령에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던 알마리온은 필립을 상대하면서 깨달은 것과 마법서를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자 잔뜩 기대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자 내심 다시 한 번 큰 자신감을 얻었다.

‘확실히 두 가지의 정령을 혼합하여 쓸 수도 있구나. 무엇보다도 그럴 경우 더욱 강력한 위력이 만들어지고 말이야.’

지금도 알마리온은 두 가지의 정령을 이용하였다. 불의 중급 정령인 샐리스트와 바람의 중급 정령인 실라페를 사용하여 파이어 밤이라는 마법과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마법 아이템 수십 개를 사용한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 내자 알마리온은 앞으로 보다 다양한 정령의 활용법을 찾아내거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가 이처럼 자신이 만들어 낸 광경에 한편으로는 스스로 놀라워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동안 폭음과 화염 그리고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드러난 참상은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앞으로 더욱 분발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던 그 자신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타론 성에서 일순간 로엔의 병사들이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린 것과 비슷한 광경이, 아니 그보다 더욱 심각한 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1만 5천이나 되는 포넬의 병사들 중 멀쩡하게 제 발로 서 있는 자들은 아예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저항할 적군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전장을 수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예, 자작님.”

마법 아이템 공격으로도 살아남은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전장을 정리하라는 새로운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은 두려운 몸짓으로 멈칫거리며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포넬군이 가득하던 곳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이들이 해야 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 가공할 화염으로 인해 상당수의 포넬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우욱!”

“우웩!”

현장에 가까워질수록 참기 힘든 냄새에 병사들이 토악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실라페, 부탁해.’

-쳇! 이런 것 말고 조금 전처럼 멋진 일만 부탁하라고! 알겠어?

다시 나타난 실라페가 투덜거리면서도 바람을 일으켜 인간의 살이 타는 고약한 냄새를 날려 보내 주었다.

그렇게 냄새가 가시자 그나마 조금은 살 것 같아졌는지 전장을 수습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병사들의 모습이 다소나마 괜찮아 보였다.

“드란 경, 웹 경, 알베르토.”

“예, 주군.”

“경들도 병사들을 지휘하여 살아 있는 자들을 수습하도록 하세요.”

“예, 주군.”

병사들에게 부상자를 수습하도록 지시를 내린 알마리온 또한 다른 병사들처럼 이미 숯덩이처럼 새카맣게 타 버린 적병의 시체들 사이를 살피며 살아남은 자를 찾기 시작했다.

“헉! 크윽!”

정신이 돌아오자 온몸으로 참기 힘든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또 네 페니테의 도움을 받은 것인가?”

네 페니테. 고대어로 ‘후회하지 마라’라는 의미였다. 바로 카즈모 백작이 착용한 풀 플레이트 메일의 이름이었다.

검과 같은 것에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일이 많았지만 메일과 같은 방어구에는 특별히 이름을 붙이는 일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네 페니테와 같은 특별한 물건에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어로 후회하지 마라라는 식의 특이한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카즈모 백작이 착용하고 있는 풀 플레이트 메일이 아마도 유일할 것이 분명했다.

“훗! 또다시 이처럼 생명을 구함 받다니. 정말 대단한 물건이야. 그 화염 속에서도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니 말이야.”

비록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이곳저곳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 엄청난 폭발과 화염 속에서 상처 하나 입지 않은 것, 그것은 모두 네 페니테 덕분이었다.

“막막하군.”

살아남은 것은 다행이지만 그저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다. 느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한데 어찌 된 것이지? 분명 적은 이러한 무기가 없었는데? 하면 조른 성이 함락되었을 때, 후작 각하께서 가지고 계시던 마법 아이템이 적의 수중에?”

자신이 알고 있는 한 로엔은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그런 적이 마법 아이템을 사용했다면 그 가능성은 단 하나뿐이었다.

“훗! 아군이 만든 물건에 이렇게 당하다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다니…….”

아군이 만든 물건에 아군이 당했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카즈모는 한동안 멍하니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일단 일어서야겠지?”

3개 군단이나 되는 병력을 모두 잃어버린 패장이긴 했지만, 적이 마법 아이템을 입수하게 되었고 최악의 경우 그것을 제작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만큼은 반드시 보고해야 했다.

몸을 일으키려 하니 또다시 온몸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젠장. 몸도 무거운데 뭔 놈들이 이렇게 많은 거야?”

중급의 익스퍼트인 그에게는 아무리 많은 병사들이 있다 하더라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생존자다! 생존자가 있다!”

“어디? 어! 생존자다! 정말로 생존자가 있다!”

적이긴 하지만 생존자를 발견하자 전장을 정리하던 병사들이 오히려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그 엄청난 불구덩이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적아를 떠나서 기뻐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훗! 적군인 내가 살아 있다는 것에 기뻐한다? 역시 들은 대로 정이 많구나.”

자신의 생존을 확인한 적군들이 오히려 반가워하며 달려오고 있는 모습을 보며 언젠가 들었던 로엔 사람들의 다정함이 잠시 떠올랐다.

“반가워해 주니 고맙긴 한데, 어쩌나? 난 너희에게 포로가 될 생각은 전혀 없거든.”

원래부터 낙천적이고 장난기가 많은 카즈모였다. 그동안은 그런 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렇게 위기의 상황에 처하자 특유의 그 낙천적이고도 장난기 많은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흠! 대충 잡아서 한 오륙백 정도를 해치우면 여길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자신이 중급의 익스퍼트라는 것을 알면 스스로 물러나거나 길을 열어 줄 것이라 생각하며 검을 뽑았다.

챙!

“헛! 뭐, 뭐야, 저놈…….”

“이봐! 괜히 죽고 싶어? 우린 널 살려 주려는 거라고! 그러니 무기를 버려!”

“훗! 이놈들! 감히 누구에게 검을 버리라는 거야! 난 대포넬 왕국의 백작 테어도오 폰 카즈모란 말이다!”

멈칫거리는 로엔의 병사들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기백이 담겨 있었다.

“으악!”

“악!”

포넬 왕국에서 단 두 명뿐인 중급 익스퍼트. 그중 한 명이 바로 테어도어 폰 카즈모 백작이었다.

그의 앞에 선 로엔의 병사들은 가을날 낙엽이 떨어지듯 쓰러져 갔다.

“요들! 피해!”

“악!”

“안 돼!”

피융!

팡!

하필이면 카즈모가 도주하기로 작정한 방향에 요들이 서 있었다.

군에서 가르치는 검술을 한센을 통해서 배우기는 하였지만 검을 손에 쥔 지 채 2년도 되지 않는 요들이었다.

만약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지 않았다면, 그리고 만약 카즈모에 의해 병사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알마리온이 달려오다 위험에 빠진 요들을 구하기 위해 정령 마법을 펼치지 않았다면 요들은 더 이상 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호! 그대 이름은?”

알마리온의 마나 소드를 간단하게 무력화시킨 카즈모가 다소 놀랍다는 눈빛으로 알마리온에게 물었다.

“알마리온, 알마리온 폰 혼테르 남작입니다.”

자신의 공격을 너무나도 간단하게 무력화시켜 버린 카즈모의 모습에 알마리온은 아연 긴장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그가 자신의 공격을 간단하게 무력화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능력을 알아본 알마리온의 표정이 돌덩이처럼 굳어져 있었다.

“알마리온 폰 혼테르 남작? 대단하군. 보아하니 아직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초급의 익스퍼트라니 말이네.”

“…….”

“그럼 내 소개도 해야겠지? 난 대포넬 왕국의 로엔 정벌군 제4군 사령관 테어도어 폰 카즈모 백작이라고 하네.”

카즈모가 자신을 소개하자 알마리온의 표정은 더욱더 굳어졌다.

이곳에 온 이후 적의 최고 지휘관인 카즈모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명이 높으신 분을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즈모 백작 각하.”

“나에 대한 이야길 들은 것인가?”

“그렇습니다. 포넬 왕국 최고의 명장, 포넬 왕국에 단 두 명뿐인 중급의 익스퍼트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그런가? 그건 그렇고, 어쨌든 보아하니 자네가 이 부대의 지휘관인 것 같은데 내 한 가지 충고를 하지. 길을 열어 주게. 그게 과부를 하나라도 덜 만드는 일일 것이야.”

확실히 중급의 익스퍼트라면 이런 상황이라 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말씀은 따를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자네가 아무리 익스퍼트라 해도 나보다는 하수라는 것을 생각하게. 내 말은 비단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자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작 각하의 배려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 부대의 지휘관은 소관이 아닙니다.”

“그래? 하면 자네 부대의 지휘관에게 안내하게. 내가 직접 말하도록 하지.”

카즈모의 말에 한순간 따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공을 세우는 것도 탄핵을 당하는 것도, 내 알 바는 아니다. 하지만 강해지고 싶다. 강해질 수만 있다면…….’

필립과의 결투 이후 알마리온에게는 한 가지 열망이 생겼다.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운이 좋아, 그리고 상대의 방심으로 인해 거둔 승리이기는 하지만 그와의 결투로 정령 마법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면서 정령 마법이란 것에 대해 큰 흥미와 재미를 느낀 것은 물론 강해지는 것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괜한 수고는 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 같습니다. 그보다 어떠십니까? 항복하신다면 최고의 예우를 다하겠습니다.”

“후훗! 항복이라? 하하하하! 정말 재미난 말이군. 내 면전에서 그런 말을 하는 자가 있다니 말이야. 하하하!”

항복하라는 알마리온의 권유에 카즈모가 어이없어하며 크게 웃었다.

“싫다면? 자네가 내 앞을 가로막기라도 할 텐가?”

“그렇습니다.”

“역부족이라는 걸 알 것이네. 비록 오늘 처음 만났고 또 적으로 만나긴 했지만, 자네 같은 젊은 영웅을 내 손으로 베고 싶지는 않아서 하는 말이네. 비켜나게.”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하지만 각하의 말씀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무모하군. 하긴 젊음은 무모하지. 그리고 그런 무모함이야말로 발전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말이네. 좋아. 자네가 정히 그런다면 나도 더 이상 권하지 않겠네.”

“거듭 감사드립니다, 백작 각하.”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보다시피 내 쪽 사정이 좀 급해서 말이야.”

“예. 그리고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요들과 그런 요들을 보살피느라 정신이 없는 한센의 모습을 힐끗거리자 알마리온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내 알아본 카즈모가 물었다.

“훗! 자네와 가까운 사이인가?”

“제 친구입니다.”

“친구? 흠∼! 알겠네.”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대장, 이것 받으세요. 그리고 요들을 데리고 가서 치료하세요. 어서!”

“주군……. 알겠습니다. 그럼 주군께서 승리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알마리온이 마음 놓고 대결에 임하도록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한센은 알마리온이 건네준 포션으로 응급처치를 한 후 요들을 부축하여 멀리 물러났다.

“그럼 시작할까?”

“예.”

마치 결투를 하는 기사들처럼 둘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벌려 서더니 서로를 향해 예를 취하였다. 그리고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챙! 채챙! 챙! 캉! 까앙!

순식간에 십여 차례의 공방을 교환한 후 다시금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그 검술은?”

“군에서 가르치는 검술입니다.”

“그런가? 한데 대단하군. 그런 기본 검술의 위력이 말이야. 단순하면서도 위력적이군.”

같은 검술이라 하더라도 펼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그 위력은 천차만별로 나타난다. 알마리온이 펼치는 검술 또한 그러했다.

“그럼 다시 시작하지.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끝내 주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카즈모의 빠르고도 강력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것도 마나 소드를 이용한 공격이.

팡! 파팡! 팡! 팡!

‘크윽! 이것이 진정한 익스퍼트의 실력이란 말인가?’

마법사 때도 그랬지만 익스퍼트를 처음 대하는 알마리온은 마법사와 익스퍼트 들이 왜 그토록 중용되는 것인지, 왜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인지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대로는.’

지금까지는 바람의 정령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하였지만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라는 것이 이내 드러나자 알마리온은 4대 정령 모두를 적절히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세를 점한 것도 아니었다.

파앙! 쾅! 팡! 파앙!

본격적으로 서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정작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신이 나 버린 카즈모의 공격은 더욱 거칠어졌다.

쾅!

“……!”

“욱!”

동시에 공격을 성공시켰지만 알마리온만이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미안하군. 실은 내가 착용하고 있는 이것이 좀 특별한 물건이라서 말이네. 이런 것으로 득을 보게 되었네.”

“으음…….”

“그래도 대단했어. 솔직히 자네의 그 빠른 움직임,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결정적인 일격을 날리려 한 자네의 의도 또한 대단했네.”

시간이 지날수록 실력의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자 알마리온은 죽음을 각오하고 카즈모를 쓰러뜨리기 위해 모험을 감행했다.

처음 자신을 목표로 달려들던 기사를 쓰러뜨렸을 때도, 그리고 바로 이틀 전 필립이라는 4서클 마법사를 상대하였을 때에도 죽기를 각오하였기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알마리온이다.

이처럼 늘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로 죽기를 각오하였을 때, 자신보다 강한 적을 무너뜨리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처절한 과정을 통해 알마리온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네의 빠른 몸놀림은 나로서도 감당하기 힘들었네. 마치 강풍이 몰아치듯 몰아치는 그 검술 또한 그렇고 말이야. 하지만 이제 정말로 끝내야 할 것 같군. 자네를 상대로 더 이상 힘을 뺐다가는 정말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으니 말이야.”

네 페니테의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말이 많아진 카즈모였다.

한데 그도 몰랐을 것이다. 자신의 말로 인해 결국 자신이 죽음의 길을 걸어야 했음을.

‘바람? 강풍이 몰아치듯 몰아치는 나의 검술이 무서웠다고? 좋아! 그렇다면!’

빠른 움직임과 강풍처럼 몰아친 자신의 검술이 무서웠다는 카즈모의 말에 알마리온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강풍이 아니라 태풍이 되어 주겠어! 실라페, 내게 너의 모든 힘을 전해 줘!’

로엔달이 전해 준 정령의 고향의 원리를 궁리해 본 적이 있다. 그것을 사용하면 아무리 정령의 힘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마법사조차 알아차릴 수 없다고 한 로엔달의 말이 계속해서 걸렸던 때문이다.

그러다 아주 우연히 알마리온은 그 가능성 중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정령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그가 찾은 가능성 중 하나였다.

가능성을 찾은 알마리온은 곧바로 그것을 실험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찾은 가능성이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상 이 방법은 정령 마법의 최후의 단계였다.

정령술사라는 것은 강한 정령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서로 감응할 수 있는 존재였다. 즉, 주술사가 주술이라는 방법으로 신과 교감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주술에는 접신being possessed of a spirit이라는 최고의 술법이 존재하였는데, 말 그대로 신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술법이었다.

알마리온이 찾아낸 방법, 그것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아 정령을 몸에 받아들이려 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가능치 않았지만 그때 알마리온도 모르게 작용한 것이 있었다.

바로 정령의 고향이었다.

정령의 고향은 최고의 주술사인 로드에릭이 주술의 힘으로 만든 것.

정령의 고향 안에 담긴 로드에릭의 주술의 힘이 그에게 전해지면서 정령의 순수한 기운을 일부나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알마리온이었다.

‘태풍이 되겠어! 태풍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킬 태풍이!’

“우와앗!”

태풍이 되어 갔다.

“웃!”

쾅! 콰광! 콰광! 쾅! 쾅!

그리고 태풍이 되었다. 그의 바람처럼 이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태풍이.

하나 알마리온이 만든 태풍은, 아니 태풍이 된 알마리온이었지만 중급 익스퍼트인 카즈모를 뛰어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태풍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아직도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킬 능력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실력 차이가 뚜렷하다 해도 상대가 미친 듯 달려들면 고수라 하더라도 쉽게 대처하지 못하게 된다. 지금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카즈모는 미친 듯 달려드는 알마리온의 파상 공세에 휘말려 좀처럼 반격의 기회를 잡기 힘들었다.

‘기회가 없다면 만들면 되는 것! 바로 지금! 놈!’

카즈모의 움직임을 묶어 두는 데 성공한 알마리온은 그가 뒤로 물러서는 순간 놈을 소환하여 그의 몸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지금!”

“감히!”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상대는 중급의 익스퍼트.

마치 촛불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처럼 알마리온은 무모하게 카즈모를 향해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카즈모 또한, 위기의 순간이기는 했지만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알마리온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알마리온의 검 또한 자신의 심장을 향해 찔러 오고 있음을 알지만 그는 네 페니테의 방어력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마법은 물론 물리적인 힘에도 상당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는 네 페니테는 착용자의 능력에 따라 그 방어력도 높아지게 되는 최고의 마법 물품이었기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던 것이다.

퍽!

“컥!”

챙!

“큭!”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카즈모는 네 페니테를 뚫고 자신의 가슴 깊이 박혀 있는 알마리온의 검을 바라보다 알마리온을 바라보았다.

알마리온 또한 무사하지는 못했다. 알마리온의 왼쪽 어깨에는 카즈모의 검이 반이나 넘게 깊이 박혀 있었다.

마지막 순간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심장을 보호한 알마리온의 행동으로, 운 좋게도 카즈모의 검이 팔찌에 부딪치면서 심장을 벗어나 어깨에 박힌 것이었다.

“어떻게…….”

자신보다 낮은 능력을 가진 알마리온은 절대로 네 페니테의 방어력을 뚫을 수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방어보다는 공격을 택했던 카즈모였기에 알마리온의 검이 네 페니테를 뚫고 심장을 관통한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제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힘이 제 온몸을 관통하고 흘렀다는 것밖에는.”

“알 수 없는 힘?”

“예.”

처음 중급 정령술사가 되었을 때처럼 한계를 뛰어넘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며 아주 짧은 한순간 자신이 낼 수 있는 힘의 한계를 뛰어넘게 된 것을 알마리온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후. 결국 이렇게 되었군.”

“…….”

“부탁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발몬이라고 내 친구가 있네. 그에게 내 시신을 고향으로 가져가 달라고 해 주게.”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 오며 모든 것을 함께한 발몬이 카즈모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듯이, 카즈모 또한 발몬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하여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부탁이 아니라면 물러서지 않을 것이었기에.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고맙네.”

카즈모의 몸이 완전히 알마리온의 몸에 기대어졌다. 숨을 거둔 것이다.

그런 카즈모의 몸을 알마리온은 정중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땅에 눕히고는 그의 가슴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냈다. 그러자 카즈모가 착용하고 있던 네 페니테에서 잠시 빛이 일더니 벨트 모양으로 바뀌었다.

잠시 그 모습에 놀랐지만 알마리온은 자신의 어깨에 박혀 있던 카즈모의 검을 단숨에 뽑아서는 검에 묻은 자신의 피를 깨끗이 닦아 낸 후 검집에 넣고는 카즈모의 주검 위에 올려놓고는 두 손을 모아 주었다.

“대장, 이분의 시신을 정중히 수습해 주십시오! 포넬군 제4군 사령관 테어도어 폰 카즈모 백작 각하이십니다.”

요들을 무사히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는 다시금 돌아온 한센에게 카즈모의 주검을 수습하게 하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 보았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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