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받기 시작하다
“테일러 상단이란 곳의 쿠엔토 요하네스와 알베르토 요하네스란 자가 부군단장님을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숙영지로 돌아오니 당번병이 테일러 상단에서 사람이 찾아왔다는 전갈을 건넸다.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게.”
“예, 부군단장님.”
훈련을 끝내고 돌아온 때문에 온몸에 땀과 먼지가 범벅되어 있었지만 반 시간 정도 후에 훈련 성과를 분석하기 위한 회의가 약속되어 있어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테일러 상단의 단주인 쿠엔토 요하네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소인의 셋째 아들인 알베르토 요하네스라고 합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습니다. 알마리온 폰 혼테르 남작입니다. 막 훈련을 마치고 온지라 모습이 좀 그렇군요. 곧 회의가 있어 이런 모습으로 그대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십니까? 소인들이야 나중에 편한 시간에 부르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아닙니다. 먼 길을 오셨는데 푹 쉬지도 못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혼테르 남작님.”
“일단 내가 가진 서류를 먼저 확인하겠소?”
“아닙니다. 이미 그에 대한 통보를 받은 상태입니다. 하니 구태여 번거롭게 그러실 것 없습니다.”
“아! 그래요?”
“예, 혼테르 남작님.”
“하면 지시한 것들은 모두 가져왔나요?”
알마리온은 이들에게 테일러 상단의 모든 인적 내용과 거래 내역 그리고 재산 내역 등 상단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서류를 가져오도록 인편으로 보낸 서신에서 지시했었다. 아울러 자신을 곁에서 도울 사람도 보내라고 했는데, 아마도 단주의 셋째 아들인 알베르토를 자신의 곁에 두려고 함께 온 것 같았다.
“예, 남작님. 그것을 남작님께 드리도록 하거라.”
“예, 아버님.”
아비인 쿠엔토의 말에 알베르토는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두 손으로 받쳐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가방 안에 지시하신 모든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수고했군요.”
이때였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병사들을 끝까지 챙긴 한센과 요들이 막사로 돌아왔다.
“주군!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한센과 요들 또한 알마리온과 다를 것 없이 온몸에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그대로였다.
“인사들 나누세요. 이쪽은 내 가신인 한센 드란 경, 그리고 요들 웹 경. 그리고 이쪽은 테일러 상단의 단주인 쿠엔토 요하네스, 이쪽은 쿠엔토 요하네스 님의 셋째 아들인 알베르토 요하네스입니다.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되었군요.”
“한센 드란이오.”
“요들 웹입니다.”
“쿠엔토 요하네스입니다.”
“알베르토 요하네스입니다.”
간략하게 인사가 끝나자 알마리온은 곧장 궁금한 점을 묻기 시작했다.
“단주.”
“예, 남작님.”
“현재 상단에서 보유하고 있는 무기들이 어느 정도입니까?”
“무기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쿠엔토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다소 당황하기는 하였지만 이내 상인의 기질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알마리온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다른 곳에 납품하기로 한 것들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많지가 않습니다.”
“납품 기한 중 아직 시일이 남은 것들까지 계산한다면 어느 정도 됩니까?”
“최대한 끌어모은다면 1천 명 정도 무장시킬 수 있는 양은 됩니다.”
“그래요?”
“예, 남작님.”
“천 명을 무장할 정도라면 군단장님과 함께 도착하는 분량까지 해서 약간의 여유가 생기는 분량입니다.”
로엔달로부터 온 전령에 따르면 조만간 도착할 그가 가져올 물자는 대략 1천5백 명 정도를 무장시킬 수 있는 무구와 제1의용군이 약 20일간 먹을 수 있는 식량 등이었다.
거기에 1천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구를 추가로 확보한다면 당장 전장에 나갈 수 있을 정도의 무장은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언제 또다시 원활하게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을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단주.”
“예, 남작님.”
“앞으로 상단은 다른 곳과 더 이상의 납품 계약을 하지 말도록 하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하오나 그렇게 하면 상단의 자금력으로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제1의용군은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이 말은 전적으로 왕실에서 이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현재로써는 왕실이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나 알마리온에게는 이를 해결할 해결책이 있었다.
“두 분, 날 믿고 그것을 투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예, 주군.”
최상급 마정석을 말하는 것이었다. 개당 백 골드, 모두 2천 골드 가치의 마정석이라면 일단 2∼3개월은 자금 걱정을 덜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이것이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겠지요?”
한센과 요들이 내놓은 마정석들을 본 쿠엔토는 놀란 눈으로 잠시 그것들을 들여다보더니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다.
“이것은! 예, 이 정도의 최상급 마정석이라면 최소 2∼3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면 이 정도 가치면 상단 지분을 얼마나 인수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 정도라면 대략 7∼8퍼센트 정도의 가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하면 이 두 분께 각각 10퍼센트의 지분을 나누어 주도록 하세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 정도의 가치는 인정해야 할 것 같군요. 안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남작님.”
확실히 알마리온의 말처럼 당장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테일러 상단의 사정상 2천 골드 가치의 최상급 마정석은 상단의 자금 사정에 어느 정도 숨통을 트일 수 있게 해 주는 귀중한 것이었고, 그런 이유로 10퍼센트씩의 지분을 넘겨주는 것도 무리한 거래는 아니었다.
하나 솔직히 쿠엔토는 속이 쓰렸다. 정작 자신은 지난 30년간 상단을 운영하느라 온갖 고생을 다 하였음에도 상단에 대한 지분은커녕 그동안 제대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새로운 주인이 된 알마리온의 결정 여부에 따라 빈손으로 상단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그의 의견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말을 이어 갔다. 그러는 것이 지난 30년을 뼈가 빠지게 꾸려 온 상단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남작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세요.”
“지금 당장은 이것을 처분하는 것으로 2∼3개월은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알마리온은 품에서 게르혼족과의 교역을 허락한다는 국왕의 증명서를 꺼내 보여 줬다.
“이, 이것은?”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게르혼족과의 교역을 허락받은 상단은 단 한 곳도 없다. 물론 왕실에서 은밀히 운영하고 있는 몇몇 상단이 그들과 교역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조차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밀교역이었다.
한데 그것을 공식적으로 허락한다는 국왕의 증명서가 있다면 막대한 이익을 약속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것을…….”
“그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죄송합니다. 소인이 그만 주제를 넘었습니다.”
“아니에요. 나도 너무 민감하게 반응을 한 것 같군요.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일이니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예, 남작님.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그것이라면 충분히 상단을 꾸려 나갈 수 있겠지요?”
“충분합니다! 아니, 이것이 위조가 아니라면 앞으로 테일러 상단은 로엔 왕국 최고의 상단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입니까?”
“그렇습니다. 소인이 보장할 수 있습니다.”
“훗! 그 정도로 자신 있어 하니 보기 좋군요.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도, 그리고 티를 내지도 않았으면 합니다. 괜히 이러한 것이 외부로 알려지면 시끄러워질 것이니 말입니다.”
정식으로 게르혼족과의 교역을 허락받은 유일한 상단이라는 것이 외부로 알려지면 주변의 견제도 견제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왕국 전체가 시끄러워질 것이고,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경우 가뜩이나 게르혼족과의 교역을 철저하게 금하고 있는 제국과의 관계 또한 껄끄러워질 것이란 생각이었기에 가급적이면 은밀히 게르혼족과의 교역을 하라는 뜻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아! 가급적이면 교역을 메코이족과 얄란족이 머물고 있는 지역을 통해서 했으면 좋겠는데 가능한가요?”
“두 부족을 통해서 말입니까?”
“그래요. 아무래도 그들 두 부족이 지금 제1의용군에 속해 있으니 그곳을 통한다면 소문도 덜 날 것이고 또한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이득이 될 것 같은데, 단주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알마리온의 말을 잠시 생각해 본 쿠엔토는 여러모로 그것이 좋을 것 같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작님의 생각이 참으로 좋은 것 같습니다.”
“단주도 같은 생각이라고 하니 내 두 족장과 의논한 후 결정토록 하십시다.”
“예, 남작님.”
“그리고 쿠엔토 단주가 지난 30년 동안 상단을 운영하였다 들었습니다.”
“예, 남작님.”
“외부적으로는 악명이 자자하긴 했지만 그대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작님.”
아닌 게 아니라 테일러 상단은 군에 물건을 납품하면서 악명이 자자했다. 때문에 정작 전쟁으로 인해 상단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악명으로 인해 이전에는 상대도 되지 않던 중소 상단보다도 못한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하나 이것은 왕실에서 책정한 금액을 맞추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질 낮은 물건은 만들지 말도록 하십시오. 난 내가 주인인 상단이 타인들의 입에 좋지 않은 일로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으니 말입니다. 알았나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주군!”
그간의 대화로 보면 자신에게 계속해서 상단을 맡기는 것으로 결정한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어쨌든 이렇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유임을 확정해 주는 말을 하자 처음으로 알마리온을 주군이라고 부르는 쿠엔토였다.
“그리고 그대에게도 상단의 지분 10퍼센트를 나눠 주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최선을 다해서 일해 주기 바랍니다.”
“주, 주군. 감사합니다! 앞으로 주군을 위해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군!”
알마리온의 말에 알베르토 부자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충성을 다하겠다며 머리를 깊게 조아렸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쉬도록 하십시오. 저녁 식사 때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군.”
이들이 나가고 얼마 후 알마리온은 푸른하늘과 하얀이리와 함께 오늘 있었던 훈련에 대한 평가를 한 후 차후 훈련의 일정 등을 논의하였다.
이러한 일은 알마리온이 부군단장으로 착임한 이후 지난 1개월 동안 꾸준히 행해져 오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적인 훈련을 통해 불과 1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구난방이던 제1의용군은 이제는 로엔 왕국의 그 어떤 정규군보다도 뛰어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모두가 자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계속된 고된 훈련 과정을 거치면서 그동안 제각각이었던 지휘부와 병사들도 이제는 진한 전우애와 서로에 대한 배려를 당연시하고 있다는 것 또한 지난 한 달 동안 만들어진 큰 변화였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알마리온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알마리온을 비롯한 지휘부는 훈련부터 식사까지 모든 것을 병사와 동등하게, 함께 어울리며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날 밤. 테일러 상단의 단주인 알베르토 부자가 함께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알마리온과 메코이족 그리고 얄란족 사이에는 의미 있는 한 가지 협정이 맺어졌다.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어 로엔의 땅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지만 이들 두 부족 모두 공통의 어려움이 있었다. 바로 식량을 비롯한 여타 물자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로엔 왕국 전체가 전란을 겪고 있어 모두가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지만, 삶의 터전을 모두 잃고 쫓기듯 국경을 넘은 이들 두 부족의 생활 또한 비참함 그 자체였다.
그런 상황에서 테일러 상단이 이들 두 부족이 터전을 삼고 있는 곳을 통해서 국경 너머의 게르혼족과의 교역을 추진하고 아울러 이들 두 부족과도 물물교역을 추진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특히 이들 두 부족은 게르혼족들 사이에서도 손재주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는데 메코이족은 활을 만드는 데 있어서, 그리고 드워프의 혈통이 섞여 있는 얄란족의 경우 다양한 무구와 목공예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뛰어난 장인들이었기에 이들과의 교역은 테일러 상단으로서도 이윤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거래였다.
“첫 공격 목표는 동부의 카넬 자작 영지다.”
테일러 상단이 최대한 서둘러 보내 준 물자로 모든 병사가 무장을 마치자 로엔달 자작은 곧바로 출동 명령을 내렸고, 그 첫 번째 목표는 왕국의 등뼈라는 토른 산맥의 한 지류인 빅스톤 산맥 너머에 위치한 곳이었다.
카넬 영지에는 현재 로엔 왕국의 7군단과 포넬 왕국의 15, 16, 17군단이 대치 중에 있으며, 이들 제1의용군은 포넬 왕국의 후방을 차단하고 이들과 대치 중인 7군단을 새로 편성 중인 24군단이 도착할 때까지 지원해야 했다. 그것이 이들에게 내려진 첫 임무였다.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현재 카넬 영지에서 적을 상대하고 있는 7군단의 잔여 병력이 4천 정도로, 포넬 왕국 2만 5천을 상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로엔달의 설명에 제1의용군 지휘부 전체는 첫 전투부터 너무 힘든 전투에 투입되는 것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무리 24군단이 곧 편성을 마치고 지원을 나올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다섯 배나 많은 적을 상대하며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계획이었다.
하지만 명령은 명령. 알마리온이 지휘하고 있는 제1대를 선두로 하여 이동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반나절 정도만 더 이동을 하면 목적지인 카넬 영지가 보이는 곳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군.”
알베르토의 합류는 여러모로 알마리온에게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 특히 테일러 상단, 아니 이제는 혼테르 상단으로 이름이 바뀐 상단에는 왕국 전역의 세부적인 지도가 있었고, 그 지도는 이러한 때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장자가 아닌 셋째이긴 해도 어려서부터 상단의 일과 함께 검술 등을 배워 용병들과 원행을 자주 다녔던 알베르토는 이래저래 알마리온에게는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하면 오늘 저녁 무렵이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드란 경.”
“예, 주군.”
“드란 경이 먼저 십여 명을 차출하여 목적지 주변을 탐문하도록 하세요. 또한 숙영지로 쓸 만한 곳도 미리 파악해 두고 말입니다.”
“예, 주군. 그럼 곧 출발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그리고 웹 경, 경은 후속하고 있는 부대가 우리와 접촉하는 데 문제가 없도록 뒤에서 따라오면서 필요한 조치들을 취해 주도록 하세요.”
셋만 있었다면 편하게 말을 하겠지만 주변에 여러 다른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었기에 서로 예의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 아! 아니, 알겠습니다, 주군.”
뭐, 간혹 잊어버리는 때도 있었지만.
“그럼 다시 이동을 하겠소.”
“예, 주군.”
제1의용군 전체가 카넬 영지가 바라다보이는 목적지인 알레른 산에 모두 집결을 마친 것은 알마리온의 제1대가 알레른 산에 도착한 지 반나절 정도가 지난 후였다.
“그동안 탐문해 본 결과 현재 이곳 카넬 영지에는 포넬의 15, 17군단만 주둔하고 있으며 적의 16군단은 카넬 영지를 우회하여 해안가를 따라 북쪽으로 이동, 카넬 영지 북쪽에 위치한 드레인 남작 영지를 공략 중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확실한 것인가?”
“예, 자작님.”
“적 16군단의 병력 규모는?”
“정규군단이긴 해도 그동안 카넬 영지를 공략하면서 피해를 입은 때문에 대략 5천 정도인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하진 않지만 드레인 남작 본인이 1천 정도의 병력으로 성에서 항거 중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하지만 드레인 남작 영지에 속한 백성들을 통해 알아본 결과 영지병의 수는 대략 2백 정도이고 나머지는 영지 백성들을 징집한 병력이라고 합니다.”
말은 정확하지 않다고 했지만 정령을 통해 세세히 알아본 것이기에 정확한 수치들이었다.
“카넬의 상황은?”
“원래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7군단과 카넬 자작의 영지병 5천이 연합하여 항전 중에 있지만 이미 보급이 완전히 끊긴 상황에서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
“그리고 한 가지 더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드란 경의 판단으로는, 적의 움직임이 이전과는 다른 것 같다고 합니다.”
“설명해 보게.”
“예, 군단장님. 소관이 판단하기로는 적군이 점령을 위한 조치들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확실한가?”
로엔달의 날카로운 눈빛에 한센은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이 떨려 왔다.
“예, 군단장님.”
비록 하급 군관 출신이지만 그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로엔달 또한 인정하는 바였다. 때문에 적이 단순히 항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예 로엔 왕국을 점령할 목적으로 전쟁의 성격을 바꾸었다는 한센의 판단을 신뢰하였다.
“일단 드란 경의 말에 대한 진위 여부를 확인한 후 그것이 사실이라면 서둘러 이를 상부에 알려야 합니다.”
적이 항복이 아닌 점령을 위한 전쟁으로 전쟁의 목적 자체를 바꾸었다는 것은 이에 대응하는 로엔군의 전략 또한 바꾸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알마리온 또한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전령을 보내도록 하게.”
“일단 확인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드란 경의 판단이라면 신뢰할 만하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서신을 작성하여 전령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달도 없는 그믐날 밤이었다. 그 어둠 속을 은밀히 움직이는 무리가 있었다.
이들이 향하는 방향에는 밤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힌 채 드레인 성을 공략 중에 있는 포넬의 16군단이 위치하고 있었다.
제1의용군은 첫 공격 목표로 드레인 성을 공략 중에 있는 포넬의 16군단을 선택했다.
포넬의 16군단을 공략하는 임무는 알마리온이 지휘하는 제1대와 메코이족의 제2대 그리고 얄란족의 제3대가 맡았고, 로엔달이 지휘하는 직할대는 절반만이 기사인 제임스 칸의 지휘 아래 공격에 가담하고 나머지 절반은 뒤에 남아 상황에 따라 공격에 가담하거나 아니면 퇴각이나 도주를 하는 적군을 제압하는 임무를 맡기로 하였다.
여전히 제1의용군의 병력에 비해 두 배는 많은 포넬의 16군단이었지만 드레인 성의 공략에만 집중하고 있었기에 후방 지역에 대한 경계는 거의 하지 않았기에 기습 공격의 묘를 최대한 살린다면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
‘실라페, 소음을 없애 줘.’
-넌 어째 만날 이런 일만 시키니? 좀 화끈하게 놀면 안 되니?
‘하하, 미안해.’
-쳇!
기습 공격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소리가 날 만한 것은 모두 떼어 내고 옷도 끈으로 묶어 바람에 펄럭이지 않게 단단히 준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알마리온은 실라페를 소환하여 소리가 퍼지는 것을 차단하였다.
‘그랬군. 저 아이에게서 하늘의 냄새가 났던 것도 이것 때문이었구나.’
알마리온이 실라페를 소환해 낸 그 순간, 푸른하늘은 그에게서 하늘의 냄새가 났던 이유를 비로소 알았다. 지도자이자 제사장이기도 한 그는 알마리온이 정령을 소환해 낸 바로 그 순간 정령의 향기를 맡은 것이다.
‘한데 특이하구나. 정령의 향기와 함께하고 있는 이것은 분명 주술의 향기. 그것도 나 같은 것으로서는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강한 주술의 향기이거늘, 어찌 저 아이에게서? 모를 일이구나, 모를 일이야…….’
자신의 뒤를 이어 메코이족의 족장으로 내심 결정을 한 알마리온에게서 자신으로서는 감당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주술의 향기를 맡은 푸른하늘은 혼란스러웠다.
드레인 성을 공략 중에 있는 포넬의 16군단의 뒤쪽 불과 1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접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포넬군은 이들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드레인 성 공략에 집중하고 있었기도 하였지만 실라페를 소환하여 이들이 움직이면서 나는 소리 자체가 차단되었기에 들키지 않고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르느라 멈추어 섰던 이들은 알마리온의 공격 신호에 따라 일제히 몸을 일으켜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움직임이 처음으로 적병의 눈에 띈 것은 적과의 거리가 불과 10여 미터 정도밖에는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였다.
대열의 최후미에서 공격을 지휘하고 있던 포넬의 16군단 군단장인 에브린 폰 하이스 자작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적?”
“우와아∼!”
“와아∼!”
마치 자신이 돌아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뒤를 돌아보자 거친 함성과 함께 사나운 기세로 달려드는 일단의 정체불명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또한 볼 수 있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처럼 어둠 속에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녹색 눈동자를.
그것이 그날 그가 보았던 마지막 모습이었다.
쾅!
“……!”
갑자기 머리에서 느껴진 강렬한 충격에 하이스는 그대로 기절한 채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죽어!”
“으악!”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다짜고짜 칼부림을 해 대는 통에 포넬의 병사들은 자신이 왜 죽는 것인지, 누구에게 죽음을 당한 것인지 모르고 낯설고 먼 이국땅에서 고혼이 되어 버렸다.
“으악!”
“저, 적!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이미 완벽하게 기습 공격을 당한 이후에나 적은 자신들이 뒤를 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상황은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남작님! 적들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포넬의 공격을 상대로 성을 방어하는 방어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있는 앤서니 드롬 기사는 포넬 병사들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부터 이상함을 느꼈다.
달이 없는 밤이고 불을 밝혀 놓기는 하였지만 높은 성벽 위에서 아래쪽의 상황을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드롬 경? 적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니?”
피곤함과 공포심에 잔뜩 찌들어 있던 드레인 남작은 적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기사 드롬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군이 도착한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성을 공격하는 적군들이 서둘러 물러나고 있습니다!”
“적이 물러간다고? 어디!”
다급한 마음에 체면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기에 다소 경박한 마음으로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조금 전까지도 죽자 살자 성문을 뚫기 위해 공격하던 적군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데 아군의 모습은…….”
“그건 어두워서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주군, 허락해 주십시오.”
“무엇을 말인가, 드롬 경?”
“적의 움직임을 보건대 아군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 분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 또한 아군의 움직임에 호응을 하여야 합니다.”
“하면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겠단 말인가?”
“예! 주군!”
“불가하네. 자네 말처럼 설사 지원군이 도착했다 하더라도 사전 협의도 없었지 않은가. 자칫 아군끼리 충돌할 수도 있네. 게다가 우리의 병력이라고는 겨우 수백. 성을 나가는 것을 허락할 수는 없네.”
“하오나 주군.”
“자네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건 아니야.”
사실 드롬 자신도 자신이 떼를 쓰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성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주장하지 못하였다.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에 당한 포넬의 16군단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무너졌다. 전투가 끝난 후 확인해 본 결과 전사한 포넬 병사의 시신만 무려 2천9백에 달했고, 부상당한 채 신음하고 있는 병사의 수가 8백에 가까웠으며, 포로의 수가 7백여 명이나 되었다.
7백이나 되는 포로들 중에는 포넬의 16군단의 지휘부 또한 전원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모두가 알마리온에 의해 초반에 제압을 당했던 것이다.
이렇듯 포로와 부상자, 사망자의 수자만 4천4백에 달했으며 도망간 자들의 수는 불과 6백여 정도였다.
이날 올린 전과만 계산한다면 제1의용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1의용군의 피해 또한 적은 것은 아니었다.
완벽하게 기습 공격을 성공시키긴 하였지만, 이 전투로 인해 제1의용군 측에서도 2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적의 사상자 수에 비하면 불과 2백여 명의 사상자는 실상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병력 충원이 거의 힘든 이들에게 있어서 이 정도의 숫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피해였다.
이렇게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이들에게는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자네가 해 줘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네.”
전투가 이제 막 끝난 상태였지만 로엔달은 알마리온을 소환하여 또 다른 임무를 맡겼다.
“무엇입니까?”
“이곳에 적의 보급 부대가 위치해 있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 것일세.”
“예.”
“그곳을 공략해서 적의 보급 물자를 없애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제1대 병력 일부와 제2대 병력만으로 공략하도록 하게.”
적의 3개 군단이 사용할 보급 물자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따라서 그곳을 지키는 병력 또한 적은 수가 아니었는데 그것을 1천 정도의 병력만으로 공략을 하라는 것이었다.
“예. 곧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외람되지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동안 조용히 있던 드롬이, 막 적의 보급기지를 공략하라는 명령을 받고 알마리온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였다.
“소관이 안내를 맡아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계신다 하더라도 이런 어둠 속에서 지리도 모른 채 이동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할뿐더러 시간도 오래 걸릴 것입니다. 적의 보급기지가 있는 곳은 소관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입니다. 하니 소관이 길을 안내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자신이 길 안내라도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드롬의 말에 드레인 또한 로엔달에게 부탁하였다.
“자작님, 드롬 경의 청을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네가 판단하게.”
알마리온에게 선택하라고 한 말이지만 실상은 이미 허락한 셈이었다.
“잘 부탁하겠소, 드롬 경.”
“감사합니다, 로엔달 자작님 그리고 혼테르 남작님.”
“인사는 경의 주군이신 드레인 남작님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출발은 30분 후에 할 것이니 준비하고 오도록 하세요.”
“예, 혼테르 남작님.”
“드란 경, 몸이 날랜 병사들 중 5백을 추리도록 하세요. 그리고 웹 경은 최대한 기름을 많이 가져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말입니다.”
“예, 주군!”
“그리고 푸른하늘 님, 이번에는 화살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알겠소. 그렇게 준비시키겠소.”
“그럼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한차례의 기습 공격을 위해 준비할 것이 많은 이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한데 이제 막 전투가 끝났는데 꼭 다시 한 번 이래야 하는 거요?”
이제 막 전투가 끝나고 전장을 정리하기 시작한 상태에서 또다시 적의 보급기지를 공격하라는 로엔달의 지시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투덜거리는 요들이 한센에게 물었다.
“옳으신 판단이야. 적은 아직도 우리보다 몇 배나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어. 그런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일단 적도 적극적으로 우리를 상대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해.”
한센의 말처럼 적에게는 아직도 2개 군단 병력이 남아 있었고, 이들을 정면으로 상대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적의 보급 물자를 없앰으로써 적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지금 이들로서는 최선의 길이었던 것이다.
“……!”
외곽을 경계하고 있던 적의 경계병들이 하나씩 소리 없이 제거되었다.
“외곽 경계병을 모두 처리했습니다.”
“생각보다 경계가 심하진 않았습니다.”
경계병을 모두 처리하고 돌아온 한센과 요들이 보고했다.
3개 군단이 1개월 동안 사용할 물자와 식량이 잔뜩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비는 그다지 삼엄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전선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은 전장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평온했다. 게다가 이곳에 진출한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단 한 번도 공격을 당하거나 한 일이 없었으니 자연 경계심이 풀릴 대로 풀려 있었다.
게다가 아직 이들에게까지 16군단이 기습 공격을 당해 소멸됐다는 내용이 전해지지 않았기에 특별히 경계를 강화하지도 않았다.
“수고했습니다. 그럼 계획대로 움직입니다.”
“예!”
이미 경계를 서던 적군을 모두 제거한 때문에 이들의 움직임을 눈치채는 적군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시간이 됐습니다.”
모래시계를 가지고 시간을 측정하던 병사가 알마리온에게 약속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좋아. 그럼 불을 붙이고 모두 물러난다.”
“예.”
워낙 많은 물자가 쌓여 있었기에 모든 것을 태워 버릴 수는 없어 주로 식량과 화살 같은 반드시 필요한 물자를 우선적인 목표물로 삼았다.
간편하게 불씨를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대롱 속에서 불씨를 꺼내 든 병사들이 불이 잘 붙도록 기름을 듬뿍 칠해 놓은 홰에 불을 붙인 후, 자신에게 할당된 곳에 빠르게 불을 붙였다.
“간다!”
“예!”
산처럼 쌓아 놓은 물자에 불이 붙은 것을 포넬군이 알아차린 것은 이미 불이 크게 붙은 이후였고, 이때는 이미 기습 공격을 감행한 제1의용군 병력은 이미 모두 물러난 후였다.
“불이야! 불이다!”
“불이야!”
“서둘러 불을 꺼! 물을 가져와서 불을 꺼라!”
화광이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불을 끄기 위해 호들갑을 떠는 포넬의 병사들의 모습을 먼 곳에서 확인한 알마리온 등이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샐리스트.’
-왜?
‘불길을 더욱 강하게 타오르게 해 줘.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크크크.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불의 중급 정령인 샐리스트는 알마리온의 부탁에 신이 나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노임.’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은가?
‘난 괜찮아. 그보다 부탁이 있어.’
확실히 불과 대지의 중급 정령을 동시에 소환하는 것은 하급 정령을 소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많은 마나가 급격히 소모되었다. 그나마도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마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버틸 수 있었다.
‘샐리스트가 모든 것을 태워 버리기 전에 저것들을 최대한 많이 숨겨 줘.’
-그러지.
더 이상 말을 시키는 것조차 안쓰러워 보였는지 알마리온의 부탁을 받은 노임이 이내 사라졌다.
“지금 뭐라고 했나?”
갑자기 들려온 두 가지 소식에 카즈모 백작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16군단의 궤멸 소식을 접한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었는데 보급 부대를 지휘하는 겔라노 남작이 창백한 낯빛을 해 가지고 허둥거리며 달려와서는 적의 기습 공격을 받아 모든 보급 물자가 타 버렸다는 보고를 해 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들을 하고 있었기에 16군단이 궤멸된 것도 모자라 보급 부대까지 당한단 말이야!”
카즈모의 호통에 아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전장에서 기습 공격을 당했다는 것은 상황이 어떠하든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군, 흥분을 가라앉히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카즈모가 지나치게 흥분한 모습을 보자 그의 가신인 발몬 남작이 나섰다.
“후∼! 알겠네. 하면 피해 규모는?”
“그것이…….”
우물쭈물하는 겔라노의 모습에 이번에는 얼음 굴의 한풍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윽박지르는 카즈모였다.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이, 남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은 침묵이 막사 안을 휘감았다.
“다음 물자 보급일이 언제이지?”
카즈모의 질문에 발몬이 곧바로 대답하였다.
“앞으로 2개월 후입니다.”
“젠장! 당장 주변의 각 군단에 내 명의로 지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내!”
화가 나 있긴 하지만 곧바로 사후 조치를 취하는 카즈모의 모습은 그가 왜 포넬 최고의 명장들 중 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예!”
“아울러 이곳에서 20킬로미터 정도 후방인 이곳으로 군을 물리도록 한다.”
“공략을 멈추는 것입니까?”
“하면 돌이라도 던질까? 돌팔매라도 해서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면 하고!”
카즈모 백작이 잔뜩 비틀린 목소리로 공격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던 자를 비꼬았다.
“…….”
“당장 실행에 옮겨!”
“예! 백작 각하!”
명령을 받은 제장이 각자 할 일을 위해 막사를 떠나갔다.
쾅!
“젠장…….”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2개의 성을 모두 함락시킬 수 있었기에, 이렇게 물러나야 하는 카즈모 백작으로서는 땅을 치며 통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포넬군은 카넬 성의 포위를 풀고 퇴각을 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자 제1의용군은 카넬 성에서 항전하고 있던 카넬 자작의 영지군과 7군단 병력과 합류할 수 있었다.
단 두 차례의 기습 공격으로 카넬과 드레인을 포위 공격하던 포넬의 3개 정규군단을 물러나게 만든 제1의용군은 성에서 결사항전을 벌이던 카넬 자작의 영지군과 7군단 잔존 병력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개선장군처럼 입성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