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의용군
“앉지.”
연회장에서는 아직도 연회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알마리온은 지금 로엔달의 부름을 받고 그의 집무실에 와 있었다.
“감사합니다.”
첫 만남이 그러해서 그런 것인지 여전히 이들 두 사람은 무엇인가 자꾸 어긋나는 느낌을 가지게 하였다.
“이것 받게.”
자리에 앉자마자 무엇인가를 내미는 로엔달이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상단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서류와, 그것을 자네에게 양도한다는 증서일세. 또한 이것은 게르혼족과의 거래를 허락한다는 증명서일세.”
“왜 이것을 제게 주시는 것입니까?”
“대가이네.”
“받을 수 없습니다. 전 분명 빚을 갚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는 것이야.”
“무슨 뜻입니까?”
“내가 자네에게 준 것들도 그 가치를 따지기 힘들 정도이긴 하지. 하지만 자네가 내게 준 것들 또한 그 가치를 따지기 힘들 정도이네.”
정령의 고향이나 마나 수련법도 그렇지만 마법 아이템 또한 가치를 따지기 힘든 물건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 가치의 경중을 따진다면 정령의 고향이나 마나 수련법보다는 마법 아이템이 더 가치가 높다 할 수 있었다. 이유는 마법 아이템의 쓰임새가 훨씬 더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를 알기에 메르타니온은 또한 당장 재정 상태가 극도로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왕실의 여러 사업체들과 권리를 로엔달에게 건네려 했다. 당연히 로엔달은 이 모든 것을 극구 거절하였지만 메르타니온 또한 고집을 꺾지 않다가 결국 타협점을 찾은 것이, 로엔달이 지금 알마리온에게 건넨 상단의 소유권과 게르혼족과의 무역을 허락한다는 증명서였다.
“나 또한 자네에게 부담을 느끼고 싶지 않네. 하여 내가 폐하로부터 받은 것들 중 가장 하찮은 것인 이 두 가지를 그대에게 넘기는 것이야.”
“으음…….”
이렇게까지 말하자 더 이상 거절하기도 힘들어진 알마리온은 결국 상단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서류와 게르혼족과의 교역을 인정한다는 증명서를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더. 내일 정식으로 자네를 제1의용군 부군단장에 임명한다는 폐하의 임명장이 발표될 것이네. 하니 미리 준비하도록 하게.”
제1의용군이라면 로엔달이 군단장으로 임명된 바로 그 부대였다. 알마리온의 입장에서는 로엔달과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알겠습니다.”
“그만 돌아가게.”
로엔달의 집무실을 나온 알마리온은 연회장이 아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한데 방에는 연회장에 있어야 할 한센과 요들이 이미 돌아와 있었다.
“아니, 왜 벌써 돌아와 계셨습니까?”
“쳇! 아니꼽고 더러워서…….”
“훗! 그만 화 풀어라. 저들이 얼마나 배타적인지 그동안 경험해 볼 만큼 해 봤지 않냐?”
굳이 묻지 않아도 연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만했다. 연회장에서 다른 귀족 가문의 기사들에게 놀림을 당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아니, 우리 둘에게만 그랬다면 몰라요! 그 자식들이…….”
“그만! 말을 가려서 해라!”
“대장! 대장은 그런 말을 듣고도…….”
“그만하라니까!”
“훗! 두 분 다 그만해요.”
“웃어? 너 지금 웃음이 나와? 그놈들이 너에 대해서 뭐라 했는지 알기나 하고 웃는 거야?”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분통이 터지는지 요들의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알아. 보지 않아도 알아. 듣지 않아도 알아.”
“아는 놈이 그렇게 웃어?”
“그럼? 당장 달려가서 그들을 모두 베어 버릴까?”
“너…….”
요들은 볼 수 있었다. 알마리온의 녹색 눈동자 한가운데서 차갑게 빛나고 있는 활화산 같은 분노를.
“웃자고. 어차피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그리고 어떤 위치에 올라도 그들은 우리의 과거를 들먹거리며 자신들이 못한 일을 해내는 우리를 질투하고 시기할 것이니 말이야.”
“알의 말이 맞다. 우리가 격한 반응을 보이면 보일수록 그들은 더욱더 우릴 자극할 거다.”
“젠장!”
아무리 신분의 벽을 뛰어넘었다 하더라도, 근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억하자고. 그리고 노력하자고. 저들이 우리에 대해서 더 이상 우리의 과거를 비난하지도 비방하지도 못하도록 말이야. 알았지?”
“그래, 당당해지자고. 지들도 부모 잘 만나서 귀족이 된 것이지 지들이 잘나서 귀족이 된 자가 몇이나 된다고. 안 그러냐?”
자신의 약점을 약점으로만 여기고 이를 감추기에 급급하거나, 아니면 이로 인해 주눅 들어 남에게 이유 없이 머리를 숙이거나, 잘 지내보겠다는 이유로 정도 이상으로 호의를 베푸는 것은 오히려 약점을 더욱 크게 만들고, 결국은 그러한 약점을 평생 극복하지 못하게 된다.
“맞아요. 지들이 잘나면 언제부터 잘났다고 말이에요. 흥! 두고 보라지! 놈들의 높은 콧대가 얼마나 계속 높을지 말이야!”
“그래. 그렇게 마음 단단히 먹자고. 그것만이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의 콧대를 눌러 주는 첩경이니까 말이야.”
“그래, 알았어.”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우리 세 사람 모두 공부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겠지.”
“공부? 무슨 공부?”
공부를 해야겠다는 알마리온의 말에 요들은 무슨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를 하냐는 듯이 물었다.
“인석아, 그럼 기사가 되는 것이 날로 먹는 것인 줄 알았냐? 글도 배워야지, 예법도 배워야지, 승마도 배워야지, 그리고 검술도 그렇고 마상 창술 등등 배워야 할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인 줄 아냐?”
“그, 그걸 정말로 다 배워야 한단 말이에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진저리 치는 요들이었다.
“당연하지. 괜히 기사가 되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왕궁에 들여보내 교육시키는 줄 아냐?”
한센의 말처럼 귀족 가문의 아이들은, 특히 가문을 계승할 장자가 아닌 경우 보통 다섯 살에서 일곱 살 사이에 아이들을 왕궁에 들여보내 기사가 되는 수업을 받게 한다.
그렇게 최소 10년에서 15년 정도를 가혹할 정도로 강도 높은 수련을 거쳐 정식으로 기사의 작위를 받게 된다.
이 밖에도 지방의 호족들이 자체적인 교육을 통해 기사가 되거나 기사의 작위를 가진 이가 개인적으로 호종을 들여 기사 교육을 시켜 기사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이든 강도 높은 수련을 받는다는 데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대, 대장이 그걸 어떻게 아는 거요?”
“훗! 이제 와서 이야기하지만 한때 기사가 되기 위해 마상 창술 시합에 출전하는 삼류 떠돌이 기사를 따라다닌 적이 있다.”
“에? 그게 정말이우?”
자신들이 몰랐던 한센의 옛날 이야기를 듣자 알마리온과 요들은 깜짝 놀랐다.
“그래. 그것도 15년이나 말이야.”
“한데 어떻게 하다…….”
“군인이 되었냐고? 그 빌어먹을 늙은 삼류 기사 놈이 더 이상 팔아먹을 것이 없게 되자 그놈처럼 늙은 말과 나까지 덤으로 군에 팔아 버렸지.”
“대장도 참 기구한 팔자였네.”
요들의 말처럼 한센 또한 결코 평범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아니었다.
“어쩐지. 아까 알의 갑옷을 입혀 줄 때 손놀림이 거침이 없더라니. 그래서 그랬던 것이었네.”
“하면 대장은 기사가 갖추어야 할 소양을 모두 다 알고 있겠네요?”
“뭐, 어느 정도는. 하지만 제대로 배운 것은 아니지. 어차피 내게 그것을 가르쳐 준 그 늙은 기사 놈도 삼류에 불과했던 자니까 말이야.”
“그래도 일단 선생을 찾기 전까지는 대장이 수고를 해 줘야 할 것 같네요.”
“저, 정말로 그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하는 거야?”
“응. 설마 조금 전에 우리를 깔보던 치들의 콧대를 꺾어 주겠다고 한 말은 괜히 한 것은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후! 알았어, 알았다고. 하면 되잖아, 하면.”
“하하, 기대되는구나.”
“뭐가 말이우?”
“네놈이 공부라는 것을 한답시고 끙끙거릴 모습이 말이야. 하하하!”
“하하.”
“쳇!”
“아! 그건 그렇고 대장, 혹시 테일러 상단이라고 아세요?”
“테일러 상단? 내가 아는 테일러 상단이라면 북쪽 국경 지역에 있는 그 상단을 말하는 것인가?”
“그 상단이 맞는 것 같네요.”
“한데 갑자기 왜 그 상단에 대해 묻는 거지?”
“그 상단이 이제 제 소유가 되었어요.”
“뭐라고? 정말 네가 상단의 주인이 된 거야? 하지만 네게 주어진 것은 저택 한 채와 가구들 그리고 하인들 몇과 연금밖에 없었잖아?”
“응. 한데 그것을 넘겼더니 대신 이것을 주더라고.”
얼마 전 그는 한센과 요들에게도 마법 아이템에 대한 것을 알려 주었다.
“넘긴 것이냐?”
“예, 대장. 대신 이것을 주더라고요.”
“이야! 그럼 너 이제 부자 된 것이네? 그렇죠?”
“글쎄…….”
“응? 무슨 표정이 그래요? 그 상단 별 볼일 없는 곳이에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센을 보며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인지 요들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놈들 하는 짓이 좀…….”
“아! 뜸 들이지 말고 좀 속 시원하게 말을 해 봐요.”
“그 상단, 주로 북부군에 물자를 납품하는 상단인데, 아주 질이 안 좋은 놈들이다.”
북부군이란 왕국의 북쪽 국경을 지키는 부대 전체를 칭하는 말이었다.
“질이 안 좋다니요?”
“그놈들이 납품하는 무기나 다른 물건들 중 불량품이 너무 많거든. 해서 병사들 원망이 자자하지. 한데 그 상단이 정말 맞는 거냐?”
“예.”
“이상하네? 하면 그 상단이 그 냉혈한의 것이었단 말인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진 않던데?”
비록 병사들 모두를 죽게 만든 비정한 명령을 내린 지휘관이긴 하지만 그래도 로엔달은 주어진 명령과 목표를 충실히 수행한 뛰어난 지휘관이라는 것이 그에 대한 한센의 평가였다. 그런 로엔달이 주인인 상단이 군에 납품하는 물건에 장난질을 친다는 것은 아무리 직접 상단을 챙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고개가 갸우뚱해진 것이었다.
“아니에요. 그도 폐하께 받은 것들 중 하나를 내게 주었다고 했어요.”
“뭐? 그럼 그 상단이 왕실 소유였단 말이냐?”
“뭐야? 그럼 왕실 소유 상단이 군에 납품하는 물건에 장난질을 쳤단 말이에요?”
“흠.”
“아니, 뭐 그런…….”
세 사람 모두 왕실에 속한 상단이 군에 납품하는 물건에 장난질을 쳤다는 말에 어이없어했다.
“어쨌든 그 상단이 이제 내 소유가 되었네요. 그리고 이것은 두 사람 몫이에요.”
“이게 무엇이냐?”
“언제나 그랬잖아요? 전투 후에 습득한 것들 중 일부는 나눠 갖는 것 말이에요. 이게 두 사람 몫이에요.”
원래 마법 아이템은 그것을 작동시키기 위해 최상급 마정석을 필요로 했다. 알마리온은 마법 아이템을 로엔달에게 넘기기 전에 이것들을 모두 빼냈고, 그것을 한센과 로엔달의 몫으로 건네준 것이다.
“뭔데? 이게 뭔데?”
“최상급 마정석. 알아보니까 개당 1백 골드 정도는 하는 것 같더라.”
“뭐, 뭐, 뭐라고? 배, 배, 백 골드?”
“그래.”
“하, 하, 하면?”
“10개니까 천 골드지.”
“헉! 허억! 헉! 헉! 나, 수, 숨 좀…….”
천 골드라는 말에 요들은 숨이 멈출 것만 같은지 가슴을 부여잡고 헐떡거렸다.
“이, 이건 너무 과하구나. 아무리 우리가 서로 나눴다 해도…….”
천 골드나 되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마정석을 건네받은 한센의 두툼한 손도 부들부들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도 40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큰 재물은 처음 접해 보는 것이긴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받으세요. 두 사람도 이제 새로운 가문을 열었는데 필요한 것들이 많잖아요?”
“그래도 이건…….”
“또 하나 전할 말이 있어요. 조금 전 로엔달 자작으로부터 듣기로 내일부로 내가 제1의용군 부군단장으로 임명된다는 임명장이 내려올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제1의용군 부군단장으로?”
“예. 하니 미리 준비를 해 두라고 하더라고요.”
“알겠다. 미리 준비하도록 하지. 그리고 사람을 보내 테일러 상단의 주인을 부르도록 하자.”
“그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그럼 피곤하니 저 먼저 쉬러 가도록 할게요.”
“그래.”
방으로 돌아온 알마리온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그도 피곤함이 몰려왔던 것이다.
하나 그는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자마자 곧바로 정신과 마음을 가다듬고 마나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로엔달의 말처럼 알마리온에게 제1의용군 부사령관에 임명한다는 정식 임명장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로엔달을 대신하여 부대를 통솔하고 관리하기 위해 알마리온은 제1의용군이 집결해 있는 타론 성으로 먼저 출발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연락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임시로 제1의용군을 책임지고 있는 제임스 칸이라고 합니다.”
외부에 알려지기로는 북부 국경 지역에 몰래 들어와 살던 게르혼족을 규합하여 의용군을 조직한 것으로 알려진 제임스 칸은 실상은 은밀히 국왕의 명을 수행하는, 세상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로열가드라는 비밀 세력에 속해 있는 자였다.
물론 알마리온은 그러한 비밀스러운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다.
“반갑소. 부군단장인 알마리온 폰 혼테르 남작이오. 그리고 이쪽은 나의 기사들인 한센 드란 경과 요들 웹 경이오.”
알마리온으로부터 한센과 요들은 각각 드란과 웹이라는 성을 받았다.
“이쪽은 게르혼족의 한 부류인 메코이족의 족장인 푸른하늘 님이시고, 이쪽은 얄란족의 족장이신 하얀이리 님이십니다.”
“반갑습니다. 알마리온 폰 혼테르 남작입니다.”
“푸른하늘이오.”
백발이 성성하였지만 혈색은 오히려 젊은 청년들 못지않았으며 드러난 팔의 근육 또한 젊은이들의 그것 못지않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쌓이고 쌓인 지혜가 충만한 심유한 눈빛이었다.
그에 반해 하얀이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얄란족의 족장은 온몸에 털이 부숭부숭 나 있는 것도 그렇고 유난히 작아 보이는 키도 그렇고, 어딘지 모르게 인간과는 상당히 달라 보이는 모습이었기에 처음부터 낯설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알마리온의 곱상한 모습도 어린 나이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처음부터 삐딱하게 나왔다.
“제대로 된 인간이 올 줄 알았더니 이런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라니, 원…….”
“하얀이리 님, 예의를 지켜 주십시오. 이분은 왕국의 일곱 번째 익스퍼트이시며 또한 남작이십니다.”
“흥! 그깟 익스퍼트가 무에 그리 대단하다고.”
“하얀이리 님!”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칸이 단호하게 행동하자 그제야 다시 한 번 콧방귀를 뀌며 자신을 소개하였다.
“흥! 알았어, 알았다고! 얄란족의 족장 하얀이리다.”
“반갑습니다.”
간략하게 서로 인사를 나누어야 할 사람들끼리 인사를 마친 후 알마리온은 이들에게 전달할 사항들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져서 군단장님이신 로뎀 폰 로엔달 자작님께서는 이달 말쯤 착임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여간 머릿속에 뭐가 좀 든 놈들이란 그저…….”
“그건 그렇고,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애초에 우리 두 부족이 로엔의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소.”
이들 게르혼족들이 아무 이유 없이 남의 전쟁이나 다름없는 로엔과 포넬의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도 이들 나름대로의 충분한 이유와 대가를 받기로 하고 이번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드란 경.”
“예, 주군. 여기 있습니다.”
“남작님, 소관이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알마리온이 국왕으로부터 받은 서류들을 순순히 건네주려 하자 다급해진 칸이 끼어들었다.
“지금 말입니까?”
“예, 남작님. 잠시 밖으로 나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지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칸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알마리온은 순순히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막사를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칸은 저들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 국왕이 작성한 증명서들을 건네주는 것을 만류하였다.
“남작님, 저들에게 그 서류들을 건네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어 주십시오.”
“칸 경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그냥 두고 보도록 하세요.”
“하지만 남작님, 저들이 비록 약속을 했다고는 하지만 언제 마음을 바꿀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괜히 저들을 야만족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간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게르혼족은 전혀 믿을 수 없는 자들이었다.
이런 생각은 비단 로엔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게르혼족들 또한 카빌란 제국과 로엔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다. 제국이나 로엔 모두 이들 게르혼족들이 통합되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온갖 분열 정책을 펼치느라 신의를 잃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알마리온은 이곳에 오는 동안 한센으로부터 이러한 게르혼족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북부군에서 10년 넘게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한센은 게르혼족에 대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알마리온은 한센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 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였다.
실상 국왕이 이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한 두 가지의 증명서는 그가 가져와서 처리할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연히 군단장인 로엔달이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것을 로엔달이 알마리온에게 특별한 지침도 없이 건넨 것은 알마리온의 능력을 시험해 보겠다는 의도였다.
그의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첫 시험치고는 분명 지나치게 과한 임무였다. 한데 여기에는 알마리온이 알지 못하는 한 가지 비밀이 존재하고 있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앞으로 저들과 함께 전장을 다녀야 하지 않습니까? 칸 경도 잘 알 것입니다. 전장에서 곁에 있는 전우를 믿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전장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과 곁에 있는 전우들이다. 그런 전우들을 믿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단 하나뿐이다.
“됐습니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내가 책임질 일이니 그대로 지켜보기만 하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충고 감사합니다, 칸 경. 그럼 들어갑시다.”
다시금 막사 안으로 들어간 알마리온은 한센에게서 서류들을 건네받고는 그것을 푸른하늘과 하얀이리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이 두 부족을 왕국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폐하가 친필로 작성하고 직접 서명하신 증명서입니다.”
알마리온이 건네주는 서류를 받아 든 두 사람이 그 내용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두 부족이 현재 머물고 있는 지역을 두 분의 영지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증명서입니다.”
이들 두 부족이 남의 전쟁에 끼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 두 부족 모두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이들 두 부족의 일부는 국경을 넘어 로엔의 영토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지만 실상 이들 두 부족의 주류는 모두 국경 너머의 땅에 살고 있었다.
그런 두 부족 전체가 국경을 넘어 로엔의 영토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의 삶의 터전을 또 다른 게르혼족 중 한 부류인 하이란족에 의해 빼앗기게 되면서부터였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 두 부족은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어 로엔의 영토로 이주를 하였지만, 그렇다고 생존이 보장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비록 로엔 왕국이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어 북방 국경 지역 전체를 철통같이 지킬 정도는 아니었고 또 일부 지역은 아예 비워 놓고 있기는 하지만, 꾸준히 군대를 파견하여 국경을 넘은 게르혼족의 토벌을 해 오고 있었다.
결국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긴 했지만 이들 두 부족들은 여전히 로엔과 하이란족으로부터 모두 공격을 당해야 했다.
그러던 차에 포넬의 침공으로 로엔의 사정이 급박하게 되자 협상을 통해 이들 두 부족을 전쟁에 참여시키는 대신, 그 대가로 이들을 로엔의 백성으로 받아들이며, 지금 살고 있는 땅을 영지로 내주기로 합의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두 분 모두 아시겠지만 영지란 것은 로엔의 귀족들에게만 허용되는 것. 아직 두 분께서는 정식으로 로엔의 귀족이 되신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번 전쟁에서 어느 정도의 공을 세우느냐에 따라 두 분의 작위가 결정될 것입니다.”
“흥! 주려면 확 주든지! 기분 나쁘게 찔끔찔끔 주는 것은 또 뭐야?”
“알겠소. 어쨌든 그쪽에서 모든 약속을 지켰으니 우리 또한 그쪽과 한 약속을 지키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그리고 칸 경.”
“예, 남작님.”
“이 서류는 칸 경이 그들에게 낭독해 주는 것이 아무래도 좋을 것 같군요.”
제1의용군에는 비단 두 게르혼 부족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 두 부족의 수는 모두 합해 1천, 그 나머지는 모두 로엔의 백성인 자들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하나같이 죄수들이거나 각 영지에서 탈출한 도망자들로, 이들에게도 이번 전쟁에 출전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에 복무하면 그 대가로 죄를 사하여 주고 아울러 새로운 신분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알마리온이 건네준 서류는 바로 그것을 약속한다는 증명서였다.
그만큼 현재 로엔 왕국은 병력을 충당하는 것조차 이미 한계점에 도달해 있는 상황이었다.
“예, 남작님.”
“다음으로 부대 구성에 대해 말씀드리죠. 우선 부대를 각각 5백 명씩 4개 대로 나누라는 군단장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로엔달은 제1의용군 3천 병력을 4개 대로 구성하기로 결정하고 죄수와 도망자들 2천을 반으로 나눠 각각 로엔달이 직접 지휘하는 직할대와 알마리온이 지휘하는 제1대로, 그리고 메코이족 전사 5백과 얄란족 전사 5백을 각각 제2대와 제3대로 구성하도록 하였다.
“자작님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직할대는 칸 경이 맡습니다. 그리고 제1대는 내가 맡도록 합니다. 그리고 두 분 족장님들께서는 기존처럼 각 부족의 전사들을 맡으시면 됩니다. 직할대와 제1대 병력은 드란 경과 칸 경이 협의해서 결정토록 하세요.”
“알겠소.”
“예, 남작님. 한데 질문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병사들을 무장시킬 무기와 의복 그리고 식량 같은 것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언제쯤 그 문제가 해결될 것 같습니까?”
게르혼족의 전사들이야 기본적으로 무장이 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식량만 지원을 하면 되었지만 그 나머지 병력은 현재 무기도 의복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안 그래도 자작님께서 그 문제로 인해 예상보다 늦게 착임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필요한 것들을 구하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계시긴 하지만 솔직히 언제 필요한 것들을 완전히 갖출 수 있을지 확답은 못 하겠군요.”
“흥! 그런 것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면서 무슨 전쟁을 하겠다고.”
하얀이리의 비아냥거림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만큼 지금 로엔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좋지 않았다.
“그 문제는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니 일단 부대를 재구성한 이후에 자작님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훈련을 하면서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훈련은 무슨! 우리 얄란족 전사들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단 말이지. 하니 귀찮게 훈련이니 뭐니 떠들지 말고 당장 싸우게 해 달란 말이다! 만약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이곳에서 계속 죽치게 만든다면 우린 떠날 것이다.”
“족장! 그것은 약속 위반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곁에서 지켜보던 칸이 목소리를 높이며 끼어들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흥! 우린 분명 너희와의 약속을 지켰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그 증거 아닌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하얀이리가, 당분간 훈련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말에 결국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칸 경, 그만하세요.”
“하오나 남작님! 지금 이자가…….”
“그만하라고 했습니다.”
익스퍼트란 존재가 반드시 검을 들어야만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으음…….”
“……!”
“큭!”
알마리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 강렬한 기운은 평생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 모두를 단숨에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하나 그러한 강렬한 기운은 이내 사라졌다.
“메코이족 족장님께 먼저 묻겠습니다.”
“…….”
“메코이족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알마리온과 푸른하늘의 눈이 마주쳤다.
‘이 아이, 보통 아이가 아니군. 유순해 보이는 외모이면서도 그 안에는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강직함을 가지고 있어. 무엇보다도 이 아이에게서 하늘의 운명이 느껴진다.’
다른 게르혼족들의 족장 또한 혈통으로 이루어지지만 메코이족은 그런 점에서 여느 게르혼족과는 상당히 달랐다.
메코이족은 족장을 선출함에 있어서 철저하게 신탁에 따른다. 즉, 메코이족의 족장이라는 자리는 신의 선택에 의해 선출되는 것으로 전대 족장이 신탁을 받은 후 후계자를 선택하게 되는데, 이는 메코이족의 족장의 경우 일족을 통치하는 지배자의 위치뿐만 아니라 일족의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허허, 그동안 아무리 신탁을 받으려 해도 받을 수가 없더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구나. 신께서는 이 아이를 만나게 하려고 그러셨던 것이야.’
푸른하늘의 나이가 올해 일흔이 넘었다. 그동안 신의 은혜 덕분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왔지만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몸이 쇠약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이제는 신의 품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하여 다음 대의 족장을 선택하기 위해 신성한 땅에서 신탁을 받기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지만 신탁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에 결국 신성한 땅에서 부족의 품으로 돌아오긴 하였지만 그의 근심은 하루가 다르게 깊어만 갔다.
한데 그토록 원하던, 자신의 뒤를 이어 부족을 이끌어 나갈 후계자를 이런 곳에서 일족과는 전혀 다른 피를 가진 알마리온에게 느꼈던 것이다.
‘하긴 우리 메코이족의 족장은 혈통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니, 무리는 있겠지만 결국 하늘의 뜻대로 행해지겠지.’
메코이족이 아닌 외부인이 족장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메코이족 대부분이 반발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신의 뜻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아니오.”
“신의를 지켜 주신다니 감사드립니다, 푸른하늘 족장님.”
챙길 것만 챙기고 떠나지는 않겠다는 푸른하늘의 확답을 들은 알마리온은 그러한 결정을 내린 푸른하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하였다.
“그럼 이번에는 하얀이리 님께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정녕 신의를 어기고 이탈하실 것입니까?”
“그게…….”
하얀이리가 성난 눈빛으로 푸른하늘을 째려보았다. 사전에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슷한 처지인 푸른하늘이 자신과 뜻을 함께하지 않은 것을 두고 화가 난 것이었다.
“흥! 좋아. 일단은 두고 보도록 하지. 하지만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 얄란족에 일방적으로 불리하거나 위험한 임무를 주거나 부당한 대우를 한다면 그땐 결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알겠나?”
“그러지요. 하지만 그쪽도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이후 다시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분란을 일으키거나 부당하게 명령을 거부할 때에는 군법에 의거, 처벌받게 될 것입니다.”
“…….”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치열한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하지만 먼저 눈을 돌린 것은 하얀이리였다.
“그럼 일단 병사들의 상황부터 챙겨 본 후 필요한 훈련 계획을 짜도록 하겠습니다.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회의를 종료하자 하얀이리는 인사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휑하니 막사를 나가 버렸다. 푸른하늘도 별다른 말 없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막사를 떠나갔다.
“지나친 모험이었습니다, 남작님.”
“그랬나요? 하지만 난 충분히 승산 있는 모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도 그렇고 저들도 그렇고, 그동안의 일들로 인해 서로 믿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가 잘못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저들이 신의를 지키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남작님께서도 저들과 조금만 더 함께하다 보면 소관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칸 경, 그래서 더욱더 저들에게 신의를 먼저 보여 준 것입니다.”
“솔직히 소관은 남작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간단합니다.”
한센으로부터 들은 게르혼족은 거칠고 흥분을 잘하며, 문명이 발달한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미개한 관습이 많았지만, 일단 마음의 벽을 허물고 신의로 서로 맺어지게 되면 그를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버리는 자들이라고 했다.
하여 알마리온은 그들에게 먼저 신의를 내보인 것이다.
물론 이 한 번의 행동으로 그들의 신의를 얻겠다는 생각은 전혀 아니었다. 그렇게 순진한 생각을 할 정도로 알마리온은 어리석지도, 단순하지도 않았다.
“저들에게 선의를 먼저 베푼 것은 명분을 쌓기 위해서입니다.”
“으음…….”
명분을 쌓기 위해 그랬다는 말에 칸도 알마리온의 의도를 확실히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저들이 아무리 로엔과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저들과 약속된 내용을 이행한다면 더 이상 그에 대한 의심을 갖지 않게 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이는 두고두고 앞으로도 크게 작용하게 되어 저들로 하여금 그동안의 약속을 먼저 파기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뚜렷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끝까지 함께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게르혼족 출신들을 제외한 모든 병사들의 신상명세를 정확하게 기록하도록 하십시오.”
죄수와 도망자 들이야말로 어쩌면 제1의용군의 핵심 전력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에게도 단순히 국왕의 사면장만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상명세를 정확히 기록함으로써 국왕이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여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겠다는 것이 알마리온의 계획이라는 것을 칸은 이내 알아챌 수 있었다.
“예, 남작님.”
대답하는 칸의 목소리에는 이전보다 확실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직 온전히 알마리온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