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벌의 등장 (4/70)

라이벌의 등장

벌써 몇 시간째 레드로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정도가 아니라 반쯤 정신이 빠진 미친 사람처럼, 무엇인가에 홀린 듯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왜!”

피융!

“왜! 왜 하필 그녀란 말이야! 왜!”

몇 시간 전 레드로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자신의 형인 하알란과 오드란 남작 가문의 장녀인 베라 폰 오드란과의 혼인이 결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몇 시간째 이렇게 수련장에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는 중이었다.

형제이긴 해도 형인 하알란과 자신은 어머니가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인 더글러스 후작이 바람을 피워 낳은 아들은 아니었다. 장자인 하알란의 생모는 하알란이 다섯 살 때 병으로 죽었고, 레드로는 그 이후 새로 맞이한 두 번째 부인인 이멜다에게서 낳은 아들로, 둘은 이복형제였던 것이다.

더글러스 후작 가문의 장자인 하알란은 모든 면에서 특혜를 받고 자라 독선적인 면이 많았다. 특히 아버지인 더글러스 후작의 그에 대한 애정은 맹목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구스타프의 첫 번째 부인인 힐다에 대한 사랑은 거의 맹목적에 가까웠다.

구스타프와 힐다의 로맨스는 로엔 왕국의 귀족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더글러스 후작 가문의 유일한 계승자인 구스타프의 첫 번째 아내인 힐다는 단승 남작 가문의 여식으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궁중 연회 때였다. 두 사람은 처음 보는 그 순간부터 서로에게 강하게 끌렸고, 이내 불같은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차이가 나는 두 가문이었기에 후작가에서는 두 사람의 사랑을 결코 인정하지 않은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힐다의 집안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처음부터 구스타프와 혼담이 있던 아이거 백작 가문과의 혼인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자, 구스타프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부모에게 대항하다 자결을 시도해 버렸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아들인 구스타프의 이러한 행동에 결국 두 사람의 혼인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혼인을 한 두 연인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내 두 사람 사이에는 하알란이 태어나 더욱더 행복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두 사람의 사랑을 하늘이 시기했음인가? 하알란이 다섯 살이 되던 해에 힐다는 그만 원인 모를 큰 병을 얻어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후 지금의 부인이자, 왕실의 방계인 이멜다와 재혼을 하게 되었고 그 슬하에 레드로가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멜다도 그리고 아들인 레드로도, 결코 행복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

첫 부인인 힐다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었던 때문인지 두 번째 부인인 이멜다와의 사이는 극도로 소원했다. 심한 때에는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어떤 해에는 두 부부가 얼굴을 맞댄 날이 손에 꼽을 정도인 때도 있었다.

심지어 레드로가 태어나던 때에도 구스타프는 왕도인 소렌토에 머물면서 레드로가 태어난 지 거의 1년 만에 아들을 보러 왔을 정도로 소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멜다는 그런 남편인 구스타프를 늘 그리워했다. 그리고 그건 아들인 레드로 또한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인 구스타프의 눈에 들기 위해 어릴 때부터 무던히도 노력을 하였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이복형인 하알란의 미움만 받았다.

실상 자질 면으로 보면 장자인 하알란은 둘째인 레드로보다 많이 부족하였다. 천성적으로 그다지 몸이 건강하지 않은 때문에 기사의 가문인 더글러스 후작 가문의 검술을 전승하기에는 하알란은 무리가 있었다.

그에 반해 레드로는 가문의 검술을 계승하는 데 완벽한 신체와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구스타프는 장자 계승의 원칙을 내세워 하알란에게는 가문의 검술과 마나 수련법을 전수하면서도 레드로에게는 그것을 전하지 않았다.

실상 지금 레드로가 익히는 검술과 마나 수련법은 어머니인 이멜다가 친정에서 구해 온 것으로, 왕실에서 유래된 검술과 마나 수련법이었다.

이렇듯 차남인 레드로는 마치 천한 신분의 여인에게서 본 서자인 것처럼 대하는 아버지였고 가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로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고 가문에 대한 애정은 한결같았다. 아버지에게도,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질투하는 형에게도 모든 것을 양보하며 참고 또 참아 왔다.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그런 레드로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동생인 레드로의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고 해도 기필코 빼앗고야 마는 하알란은 어느 날 이복동생인 레드로와 함께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더글러스 후작 가문의 영지와 이웃하고 있는 오드란 남작 가문의 여식인 베라 폰 오드란이었다.

두 사람 모두 영지에서 지내면서 적지 않은 만남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서로에 대한 애정을 키워 왔다. 전쟁이 일어나고 불과 며칠 만에 영지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영지를 버리고 왕도인 소렌토로, 그리고 다시 팬픽으로 피난길에 오르면서 두 젊은 연인은 더욱 사랑을 키워 가고 있었는데 그만 질투심 많은 이복형인 하알란의 눈에 띈 것이었다.

평범한 외모를 지닌 베라였지만 그녀에게도 뛰어난 장점이 있었다. 바로 남의 상처를 감싸 줄 수 있는 푸근함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애정을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그리고 이복형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였던 레드로는 내색은 못 하였지만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상태였다. 그런 그를 늘 포근하게 감싸 주고 달래 준 것은 그의 어머니인 이멜다가 아닌 베라였다.

이처럼 언제나 힘들고 상처받은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 주고 달래 주었던 베라를 사랑하게 된 레드로는 이미 베라의 부친인 오드란 남작에게서 혼인을 허락받은 상태였다.

다만 지금은 전쟁 중이었기에 레드로는 아버지인 더글러스 후작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하지 못하고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중이었다.

한데 이런 두 젊은 연인들 사이에 하알란이 끼어든 것이다. 하알란은 이복동생이 웃음 짓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하알란은 전혀 사랑하지도 않는, 그렇다고 해서 가문에 도움이 될 것도 전혀 없는 오드란 남작 가문의 여식인 베라와 혼인을 하겠다며 구스타프에게 떼를 쓰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들인 하알란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들어주는 구스타프였다.

하알란의 청을 받아들인 구스타프는 오드란 남작을 불러 혼담을 의논하였고, 그때 처음으로 자신의 둘째 아들인 레드로와 하알란이 원하는 베라라는 오드란 남작가의 여식이 이미 혼인을 승낙받은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하알란을 달래 베라와의 혼인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든지, 아니면 레드로와 베라의 혼담을 추진하거나, 그도 아니면 아예 두 아들 모두를 포기시키거나 할 것이지만 구스타프는 오히려 오드란 남작에게 압력을 넣어 레드로와의 혼담을 깨고 대신 하알란과 베라를 혼인시키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바로 오늘 하알란과 베라의 혼인을 세상에 발표할 때까지 레드로는 아버지인 구스타프로부터 그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하다가 타인의 입을 통해 하알란과 베라의 혼담 소식이 공표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아무리 아버님이 형님에 대한 사랑이 깊다 하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라는 것을 아시면서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떻게!”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무조건 자신을 질투해 온 형이야 그렇다 해도, 분명 자신과 베라가 이미 장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하였고, 오드란 남작으로부터 허락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이 문제를 상의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에 더 큰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우아악! 우악! 으아아악!”

수련장이 떠나갈 정도로 레드로의 피맺힌 고함이 울려 퍼졌다.

“으악!”

이대로 온몸이 터져 버리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이대로 온몸이 터져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님! 말리셔야 합니다! 이러다가 자칫 도련님이 큰 화를 입을 수 있습니다!”

이멜다가 더글러스 후작과 혼인을 하면서 그녀와 함께 후작 가문으로 온 기사인 알렉 에드윈이 다급한 목소리로 레드로를 말려야 한다며 이멜다를 재촉했다.

비록 익스퍼트의 수준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또한 검의 길을 걷고 있는 자로 레드로의 지금 상태가 매우 위험한 상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처연한 표정에 회한이 가득한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멜다는 아들을 말려야 한다는 알렉의 강변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묵묵히 아들인 레드로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마님!”

“그냥 두세요.”

“하지만 마님! 이대로 도련님을 방치하였다가는 자칫 평생을 불구로 지낼 수도 있습니다!”

“알아요.”

“아시는 분께서 도련님을 이대로…….”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저 아이의 가슴에 맺힌 한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요?”

“…….”

“차라리…… 그래요, 차라리 저 아이가 잘못된다면, 그랬으면 좋겠어요.”

“마님!”

이멜다의 말에 알렉은 크게 놀랐다. 세상에 자신의 아들이 차라리 잘못되기를 바라는 어머니라니.

하지만 이어지는 이멜다의 말에 알렉은 그녀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알고는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폐인이 된다면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겠죠. 제 아버지를 그리고 제 형을 평생 원망하며 지내겠지만, 그렇게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가문에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 피를 부르는 충돌이 생길 수도 있답니다.”

그녀의 말처럼 일방적인 차별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참고 또 참아 온 레드로였다.

레드로가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고 있는 것이 모두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이멜다는 잘 알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여자로도, 아내로도 보아 주지 않는 남편만을 바라보며 한평생을 살아온 자신을 위해 그 모든 서러움과 차별을 묵묵히 견뎌 온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을 위해 단 한 번도 자신은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 없었다.

‘그래. 이제 그만두자꾸나. 이제 나도 지쳤단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널 더 이상 내 욕심으로 힘들게 할 수는 없구나.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자꾸나.’

그녀가 막 떠날 것을 결심한 그 순간이었다.

“우아아악!”

수련장이 무너질 것 같은 괴성이 레드로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알렉의 입에서도 예상 밖의 일을 당하게 된 자들에게서나 나올 그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 어? 어!”

“우아!”

핑! 쾅!

“허억! 허억! 허억!”

“도련님…….”

“…….”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모두가 놀란 모습으로 한동안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가장 먼저 이성을 차린 것은 경험 많은 기사인 알렉이었다.

“도련님! 속히 마나 수련을 하십시오! 어서!”

레드로가 나이트 오브 나이트의 단계, 익스퍼트가 되었다는 것을 안 알렉은 레드로에게 서둘러 마나 수련을 할 것을 종용했다.

익스퍼트 단계에 오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성취감에 취해 곧바로 마나 수련을 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이로 인해 어렵게 오른 익스퍼트의 권능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가 하면 앞으로의 성장을 저해하는 걸림돌을 제 스스로 만들어 놓곤 한다.

비록 자신은 익스퍼트가 못 되었지만 알렉은 이러한 사실을 이론적으로나마 잘 알고 있었기에 레드로에게 서둘러 마나 수련을 하도록 종용한 것이었다.

“아? 알겠어요.”

알렉의 종용에 레드로는 다시 한 번 멈추었던 검을 들고 천천히 춤을 추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찌 된 영문인가요, 에드윈 경?”

지금의 상황에 대해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이멜다가 알렉에게 그 영문을 물었다.

“축하드립니다, 마님! 도련님이 왕국의 일곱 번째 익스퍼트가 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레드로가 익스퍼트가 된 것은 일곱 번째가 아닌, 여덟 번째였다. 하나 아직 알마리온이 왕국의 일곱 번째 익스퍼트가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알렉이었기에 이러한 사소한 착오를 하게 된 것이다.

“아! 지, 진정 내 아이가 익스퍼트라는 것인가요? 진정?”

“그렇습니다, 마님.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진정 감사합니다. 흑!”

익스퍼트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익히 알기에 이멜다는 자신의 아들인 레드로가 익스퍼트가 되었다는 알렉의 말을 듣고는 이를 신께 감사드리며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렸다.

‘그래. 이제 되었어. 이제 저 아이가 제 아버지와 형에게 시달림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

“에드윈 경.”

“예, 마님.”

“지금 당장 아버님께 가세요. 가서 아버님께 당신의 외손자인 레드로가 익스퍼트가 되었다고 말씀드리세요. 그러면 모든 것을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마님, 그렇게 되면 후작님께서…….”

“아까도 말했지요? 난 형제가 다툼을 벌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이에요. 게다가 더 이상 레드로가 하알란의 그늘에 가려져 살아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으음. 알겠습니다.”

만약 이 사실이 남편인 구스타프나 하알란에게 먼저 알려진다면 분명 다시 한 번 레드로의 날개를 꺾으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레드로는 못난 어미인 자신을 위해 스스로의 날개를 꺾어 버린 채 최소한 아버지인 구스타프가 죽기 전까지는 하알란의 그림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구스타프가 죽기 전에 하알란을 위한답시고 레드로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쨌든 레드로 또한 자신의 친아들인데 설마 그러겠는가 하겠지만, 후작 가문을 온전히 장자인 하알란에게 전해 주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귀족 가문, 그것도 고위 귀족 가문 내에서 가문을 승계하기 위해서 부모에 의해 아들이, 아들에 의해 부모가, 아니면 형제들 간의 암투가 벌어지는 일은 비일비재하였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구스타프의 사후 형제인 하알란과 레드로 간에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은 너무나도 높았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참극이 설사 벌어지지 않는다 해도 이제 더 이상 저 아이가 이 못난 어미로 인해 지난 18년간 그래 왔듯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을 볼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가문을 떠나야 해. 저 아이도, 그리고 나 또한.’

“그러니 내 말에 따르세요.”

이멜다가 혼인을 하고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알렉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 이멜다와 레드로가 더글러스 후작과 장자인 하알란으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알겠습니다, 마님. 하면 지금 곧 자작님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알렉이 수련장을 나가고 얼마 후 레드로가 마나 수련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하한다, 아들아.”

“감사합니다, 어머니.”

익스퍼트라는 초인의 경지에 들어선 레드로였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이 어미는 네가 내 아들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고맙고, 또한 미안하구나.”

“어머니…….”

“해서 말이다, 이제 더 이상 네가 나로 인해 마음 아파하고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한단다.”

문득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어머니?”

“조금 전 에드윈 경을 네 외조부님께 보냈단다. 네가 익스퍼트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러 말이다.”

“어머님, 그렇게 되면…….”

“안다. 하지만 너도 알 것이야. 이 사실이 네 아버지나 형에게 먼저 전해진다면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말이다.”

어찌 모르겠는가. 사랑하는 연인마저도 빼앗아 형의 여자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형인 하알란에 대한 일방적인 애정을 보이는 아버지를.

“하지만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어머니!”

“이젠 나도 더 이상 네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에 지쳤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사랑하는 아들이 나로 인해 힘들어하고 아파하지 않았으면 한단다. 하여 난 네 아버지와 이혼을 할 생각이란다.”

“어머니!”

이혼을 결심했다는 이멜다의 말에 레드로는 그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좀 더 일찍, 그래 좀 더 일찍 이런 결심을 하지 못해 그만큼 더 널 힘들게 만들어서 미안하구나.”

“어머니…….”

자신을 위해 이혼을 결심했다는 어머니의 말에 레드로는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말거라. 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질 않느냐. 오히려 이 어미가 네게 늘 미안했단다.”

“어머니.”

“일어나렴. 그리고 앞으로는 네가 네 인생을 마음껏 그려 나가려무나.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설사 그것이 나라 할지라도 네 앞을 가로막는 자가 나타난다면 내 결코 그것을 용납지 않을 것이다. 알겠느냐?”

결심을 한 이멜다에게서는 절로 단호함과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이 느껴졌다.

실상 이멜다의 이러한 말은 남편인 구스타프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굳은 결의였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의 사랑을 구걸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당신에 의해서 나나 그리고 내 아들이 휘둘리는 것을 결코 용납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로!’

이러한 이멜다의 굳건한 모습은 레드로에게도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예! 어머니.”

‘그리고 감사합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를 위해서도, 그리고 저 자신을 위해서도 이제 두 번 다시 오늘과 같은 못난 모습 절대 보여 드리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그것이 사실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조금 전 캠벨 자작이 직접 입궁하여 소신에게 전해 준 내용으로, 아직 더글러스 후작은 모르는 사실이라 하옵니다.”

“그래?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왜 친부인 더글러스 후작이 알기도 전에 외조부인 캠벨 자작이 이러한 소식을 먼저 은밀히 전해 온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

“소신이 듣기로 그동안 더글러스 후작과 그의 부인과의 관계가 무척이나 소원하다고 하옵니다. 또한 후작의 장자에 대한 편애가 유별나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소문이 나 있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오늘 후작이 발표한 장자의 혼인 또한 실상은 차자의 연인을 장자가 빼앗은 것이라 하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사옵니다, 폐하.”

“재미있군.”

확실히 메르타니온의 입장에서는 재미난 일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귀족 파벌의 핵심이기도 하며 군의 최고 상급자인 더글러스 후작의 가족들 간의 불화로 인해 한쪽이 자신의 도움을 청해 왔다는 것은, 두고두고 더글러스 후작의 발목을 잡아끌 수 있는 확실한 패였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어미를 궁으로 불러들이게. 물론 당분간 그 일은 비밀에 부치도록 하고 말이네.”

“예, 폐하.”

도르첸이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나간 후, 메르타니온은 문득 재미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흠. 대외적이긴 해도 세 명의 익스퍼트가 존재하는 군단이라? 하하. 생각만 해도 뿌듯하군.”

확실히 생각만으로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나 이내 그는 생각을 달리했다.

“훗! 아직도 내게 이런 동심 같은 것이 남아 있다니.”

확실히 생각만 해도 가슴 뿌듯해지는 일이긴 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해야만 했다.

“일단은 로엔달 자작의 요청대로 그 노예 출신 정령술사는 자작의 지휘하에 두는 것이 최선일 것이야. 그리고 레드로라는 그 아이는 역시 그렇게 활용하는 것이 최선일 것 같군.”

메르타니온의 눈빛이 차갑게 빛이 났다. 더글러스 후작에게 자신이 방치한 아들이 어떻게 나래를 펴는가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그로 하여금 자신의 실책을 두고두고 뼈저리게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확실한 활용법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 아이는 끊임없이 충성심을 검증받아야 하겠지만 그 아이가 내게, 그리고 왕실에 대해 충성하는 한 더글러스 후작 가문의 좋은 대항마가 될 것이야.”

왕국 최고의 익스퍼트인 더글러스 후작이었다. 그런 그도 익스퍼트가 된 것은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였다. 그리고 지금 그의 나이가 41세인 것으로 보면, 단 16년 만에 익스퍼트 상급이 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불가사의하게 여길 정도였다.

한데 그의 아들인 레드로는 그 아비보다도 7년이나 빠른, 불과 열여덟 살의 나이로 익스퍼트가 된 것이다.

만약 레드로가 그 아비인 더글러스 후작의 뛰어난 자질을 그대로 이었다면 그에 대한 투자 정도에 따라 더 높은 경지까지 오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군. 그 방법이 있었군.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하지 않았지만 왕실 마법사 가문인 체임버스 남작 가문에는 그 방법이 남아 있을 것이야.”

로엔 왕국이 건국되고 얼마 되지 않은 때부터 왕국은 왕위 계승을 놓고 왕자들에 의해 잦은 반정이 일어났다.

이때 각 진영의 귀족들과 기사들이 주군에 대한 충성보다는 누가 더 많은 이권을 주는가에 따라 말을 갈아타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각 진영에서는 이러한 배신과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한 가지 악의적인 마법을 만들어 내는데, 이른바 피의 맹약이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저주 마법 계열의 이 의식은 맹세를 한 자가 단지 배신이라는 것을 생각하기만 하여도 생명력이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극도의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가혹한 마법이었다.

이후 왕위 계승권에 대한 분쟁이 완전히 종식되었지만 이후 귀족들의 권한이 커지면서 왕국은 또다시 귀족들에 의한 반정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 더 이상 피의 맹약이란 마법을 사용치 않는다는 것과 앞으로 그러한 마법을 사용하는 곳을 공통의 적으로 삼겠다는 신사협정을 맺은 이후, 이러한 피의 맹약은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마법사 가문인 체임버스 남작 가문에는 여전히 그러한 방법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한 메르타니온은 그것으로 레드로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묶어 둘 생각이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로엔달과 쿤테르 그리고 알마리온은 각자의 수행 인원들과 함께 팬픽으로 향했다.

“걱정입니다. 적이 사용하고 있는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으로 인한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승마를 할 줄 모르는 알마리온 때문에 이들 세 사람은 마차를 이용하여 이동 중에 있었기에 한 가지 좋은 점은 대화를 나누기가 쉽다는 것이었다. 물론 대화의 대부분은 쿤테르가 말을 걸고 로엔달과 알마리온은 마지못해 그에 답을 하거나 아예 침묵을 하거나 할 뿐이었지만.

“그러고 보니 그댄 적이 처음으로 마법 아이템을 사용한 타론 성 전투 때에도 현장에 있었지?”

“예, 체임버스 남작님.”

단지 현장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성벽 위에 올랐던 인물이 바로 그라는 것을 쿤테르는 모르고 있었다.

“어땠는가, 적이 사용한 마법 아이템이란 것의 위력이?”

그동안 쿤테르는 왕실 가족들을 돌보다가 처음으로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6군단에 배속되었기에 마법 아이템이란 것의 실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여 이를 직접 경험해 본 알마리온에게 그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한데 그런 질문을 받은 알마리온의 손이 저도 모르게 떨려 왔다. 기억하기 싫은 기억을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소인이 경험한 것은…….”

생각만 떠올린 것으로도 무의식적으로 손이 떨린 것에 비해 담담한 목소리로 그날 타론 성에서 벌어진 일들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알마리온이었다.

“단 두 번의 폭발로 그러한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거대한 화염 폭발이 있은 것은 두 번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2개의 마법 아이템으로 벌어진 일은 아닙니다.”

“그 말은, 여러 개가 동시에 사용되었다?”

“예, 체임버스 남작님.”

마법 아이템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쿤테르에게는 이를 직접 경험해 본 알마리온과 같은 자의 증언은 매우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기에 이후에도 그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듯 물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포넬의 비밀 병기인 마법 아이템에 대한 호기심은 물론, 그것을 갖고 싶다는 욕구가 더욱 커졌다.

“후! 그 마법 아이템이라는 것을 하나만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포넬의 비밀 병기인 마법 아이템이 처음으로 사용된 이후, 이로 인해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자 로엔 왕국에서는 이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마법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나 마법 아이템을 획득하는 것도, 그리고 대응할 수 있는 마법 무기를 개발하는 것도 모두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됐어. 일단 이 정도로 호기심을 자극하여 놓았으니 다음에는…….’

타론 성 공략 당시 알마리온은 20개나 되는 마법 아이템을 습득하였다. 하나 이는 철저한 비밀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면 그의 신분상, 이것을 대가로 하여 무엇을 얻게 되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으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하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익스퍼트라는 것을 인정받게 되고 최소한 기사라는 신분을 얻게 된 이후라면 얼마든지 우연을 가장하여 이것을 가지고 있음을 세상에 밝힐 수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유난히 쿤테르의 호기심을 자극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것도, 후에 그를 통해 마법 아이템을 처분할 경우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상당히 말을 잘하는 아이군. 나조차도 이 아이의 말에 빨려 들어갈 정도이니 말이야.’

곁에서 함께 듣고 있던 로엔달마저도 마치 어린아이가 노인들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한껏 빠져들어 이야기를 듣듯 알마리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포넬군이 사용하는 마법 아이템의 이야기로 시작된 대화는 궁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 방면의 이야기들로 계속 이어졌고 로엔달과 쿤테르는 알마리온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마리온의 주인인 로뎀 자작 가문은 왕국에서도 알아주는 학자의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의 유일한 계승자인 지크의 놀이 친구로서, 그리고 대신 매를 맞는 아이로서 어릴 때부터 지크와 함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을 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 때문에 지크에 의해 다치고 내쳐지기 전까지 서재를 들락거리며 많은 책을 읽었다.

더 이상 지크와 함께할 수 없게 되어, 저택에서 쫓겨나 노예들이 하는 일들을 하게 된 이후에도 알마리온은 정령을 이용하여 서재의 책들을 몰래 꺼내다 달빛과 별빛 아래서 잠도 자지 않은 채 읽었을 정도로 그는 책을 좋아했다.

그가 이처럼 책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그 안에 자신이 볼 수 없는 수많은 세상과 진리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지식이 지금 로엔달과 쿤테르를 놀라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잘난 체하지도, 그렇다고 남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도 아닌, 단지 살짝 내놓은 작은 단서 같은 것으로 결국 대화의 흐름을 자신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게 만들다니 놀랍구나.’

이처럼 알마리온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다르게 하게 된 두 사람이 내심 놀라고 있을 때 이들이 탄 마차는 팬픽 성이 보이는 한 대저택에 도착하였다.

“폐하를 처음 알현하는 것이니 조심해야 할 것이 많네. 우선…….”

궁에 도착하여 국왕인 메르타니온을 처음 알현하기 위해 대기하던 중에도 쿤테르는 알마리온에게 궁중 예법에 대한 것과 국왕인 메르타니온의 개인적인 취향 그리고 해서 좋을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 등을 일일이 그리고 꼼꼼하게 일러 주었다.

“폐하께서 들어오라 하십니다.”

“알겠소.”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안내된 곳은 국왕의 집무실이 아니라 국왕의 개인 거처였다.

실상 이들 세 사람의 입궁은 외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비밀리에 행해진 것으로, 처음부터 변복을 한 상태에서 궁의 근처까지는 마차로, 이후에는 은밀히 뒷문을 통해 들어갔기에 이들이 입궁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오느라 수고들 하였소. 다들 일어서도록 하시오.”

“감사하옵니다, 폐하.”

“오랜만에 보는구려, 로엔달 자작.”

“그간 평안하셨사옵니까, 폐하.”

“하하, 나야 늘 그렇지 않겠소? 어쨌든 자작이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워 주었기에 적을 상대함에 있어서 조금은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소.”

12군단을 전멸시키면서 적의 발걸음을 최대한 롬 평야에 묶어 둔 것을 이르는 말이었다.

한데 이러한 메르타니온의 치사를 듣고 있는 알마리온의 심정은 착잡함 그 자체였다.

지휘관의 입장에서야 잘한 일이고 잘된 일이었지만,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전투는 그야말로 섶을 지게 하고 불구덩이로 밀어 넣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러기에 전쟁을 미친 짓이라 하는 것이겠지.’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정상적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임은 지난 1년 동안 충분히 경험했다.

“이제 자작과 남작이 돌아왔으니 그들을 맡아 주어야겠네.”

“성심을 다하겠사옵니다, 폐하.”

이미 사전에 모종의 합의가 있었던 듯, 함께 자리하고 있는 자들 중 알마리온을 제외한 모두는 메르타니온의 말에 서로 의미 있는 눈빛을 교환하였다.

“그리고 경이 바로 왕국의 일곱 번째 익스퍼트로 인정받은 알마리온 경이오?”

“그렇사옵니다, 폐하.”

처음으로 메르타니온이 알마리온에게 관심을 보였고, 그의 관심에 알마리온은 한발 앞으로 나서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예를 올렸다.

“호! 이렇게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청년이 왕국의 일곱 번째 익스퍼트라니 참으로 놀랍구려.”

“망극하옵니다, 폐하.”

무엇이 망극한 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국왕이 칭찬조로 한 말이었기에 적절한 사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만간 왕국의 일곱 번째 익스퍼트가 된 경에게 걸맞은 대우가 취해질 것이오.”

“황공하옵니다, 폐하.”

“앞으로 그대의 활약을 기대해도 되겠소?”

“충심을 다하겠사옵니다, 폐하.”

“하하, 좋소. 하면 경은 이만 나가 보도록 하시오.”

“예, 폐하. 하오시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사옵니다. 국왕 폐하 만세! 만세! 만세!”

짧기만 한 국왕과의 첫 대면을 마치고 배석하고 있던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그의 거처를 나오던 알마리온은 밖에서 국왕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두 사람 모두 몸의 근육들이 팽팽하게 긴장하며 숨이 턱 막혔다.

“……!”

아마도 두 사람 모두 검을 차고 있었다면 서로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검을 뽑아 들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한 채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흠! 흠! 이만 가시지요.”

만약 시종이 두 사람을 말리지 않았다면 두 사람 모두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서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

“가시지요.”

“예.”

시종이 다시 한 번 종용하자 또래로 보이는 청년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알마리온은 시종을 따라 처음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던 그 방으로 돌아갔다.

“누군지 알 수 있겠소?”

멀어지는 알마리온을 보면서 레드로는 자신을 안내한 시종에게 알마리온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조만간에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흠.”

‘대체 누구이기에 함구령까지 내려진 것일까?’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긴장시킬 정도라면 분명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저자도?’

차분한 걸음걸이로 시종을 따라 걷는 알마리온의 뒷모습을 보면서 레드로는 느낄 수 있었다.

‘훗! 어쩐지 저자와는 앞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을 것 같구나.’

밖에서 앞으로 로엔 왕국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킬 젊은 두 영웅의 긴장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메르타니온의 거처에서도 전쟁의 양상을 뒤바꿔 버릴 특단의 조치에 대한 마지막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아직 그들을 제대로 무장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네.”

어느 왕국이든 다 그렇지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상황이 아니라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재정난이었다.

로엔 왕국의 경우 특히 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각종 명목으로 자신들이 내야 하는 세금을 줄여 온 때문에 국가재정이라는 것이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왕실의 재정이 튼실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이래저래 전쟁이 벌어진 지 1년이 되어 가자 왕국은 물론 왕실 또한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때문에 왕실에서는 이웃하고 있는 카빌란 제국에 병력과 전쟁에 필요한 자금 그리고 물자에 대한 지원 요청을 꾸준히 해 오고 있었지만 카빌란 제국은 시종일관 묵묵부답默默不答이었다.

“소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만하시오. 내가 자작의 사정을 알거늘…….”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놓겠다고 하는 로엔달의 행동에 메르타니온은 감동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였다. 오랜 친구이자 동지인 로엔달의 사정은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지가 없는 단승 귀족인 로엔달은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가 살고 있는 저택 한 채와 그동안 연금으로 받은 것들 그리고 메르타니온이 그를 위해 챙겨 준 약간의 재물이 전부였다. 심지어는 메르타니온의 지시로 은밀히 조직된 왕실을 위한 비밀결사 또한 원래는 필요한 자금을 왕실에서 지원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왕실 자체가 워낙 재정이 부실하여 필요한 자금을 제때 지급하지 못하자 자신에게 지급되는 연금을 비밀결사의 활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남은 유일한 재산은 저택뿐이었는데 이것마저 내놓겠다고 하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신 또한 재물을 내놓겠습니다. 아울러 가문에 속한 상단을 통해 지속적으로 병기와 식량 그리고 의복 등을 지원토록 하겠사옵니다.”

마법사 가문인 체임버스 남작 가문은 로엔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었다. 특히 치료 마법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존재인 체임버스 남작 가문이 만드는 포션은 그 효능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비단 로엔 왕국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지금 전쟁을 벌이고 있는 포넬뿐만 아니라 북방의 게르혼족, 그리고 카빌란 제국에서도 그 뛰어난 효능이 알려지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쌓을 수 있었다.

실상 지금도 체임버스 남작 가문의 지원이 없었다면 왕실은 진즉에 도산을 하였을 정도로 남작 가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나서니 메르타니온 국왕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남작까지? 허허. 두 사람 모두 참으로 고맙네. 정말 고마워. 내 두 사람의 충정은 반드시 보답을 하겠네. 반드시!”

로엔달에 이어 쿤테르까지 자신의 재물을 내놓겠다고 말하자 절로 목이 메어 왔다.

“그리고 그 일은 이번에 익스퍼트가 된 두 사람에 대한 작위 수여식 때에 발표할 것이오.”

“……?”

“하하. 두 사람은 아직 모르겠구려. 실은 그대들이 데려온 알마리온 경 말고도 또 한 사람의 익스퍼트가 탄생하였다오.”

또 한 사람의 익스퍼트가 탄생하였다는 메르타니온의 말에 로엔달도, 쿤테르도 크게 놀랐다.

“또 다른 익스퍼트가 탄생하였사옵니까?”

“그렇다네. 바로 어젯밤에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네.”

메르타니온을 대신하여 도르첸 공작이 대신 답하여 주었다.

“어느 가문의 누가 익스퍼트가 된 것이옵니까?”

“그것이…… 더글러스 후작 가문의 차자인 레드로 폰 더글러스라네.”

“으음. 하필이면…….”

저도 모르게 탄식하듯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쿤테르였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네.”

“무슨 뜻이옵니까, 폐하? 더글러스 후작 가문의 차자라면 폐하와는 적대적인 귀족 파벌의 사람이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는 이번에 가문을 완전히 떠날 것이네.”

“예? 그게 무슨…….”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가문을 잇는 것은 장자의 몫이었다. 물론 유언으로 장자가 아닌 다른 아들을 계승자로 지명할 수는 있지만 이런 경우는 지극히 드문 경우였다.

그리고 계승자가 아닌 나머지 아들들은 가문을 떠남과 동시에 다른 성을 사용하게 된다. 즉, 가문을 떠나는 것이다.

또한 지금처럼 특별한 이유가 있어 성을 하사받고 가문을 새로이 여는 경우에도 가문을 떠난다고 표현한다.

하나 메르타니온 국왕이 말한 가문을 떠날 것이란 말은 단지 이런 통념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어젯밤 그 아이가 은밀히 외조부인 캠벨 자작을 통해 폐하께 연락을 해 왔다네.”

“더글러스 후작 몰래 말씀이십니까?”

“그러하다네. 남작도 후작 가문에 대한 소문은 들어 알 것이야.”

확실히 예전부터 더글러스 후작의 장자와 차자에 대한 극단적인 차별은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하면 결국 가족들 간의 불화로…….”

아비인 더글러스 후작 몰래 외조부인 캠벨 자작을 통해 자신이 익스퍼트가 되었다는 것을 국왕에게 알려 왔다는 것은 결국 절연을 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마침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남작.”

“예, 폐하.”

“자네 가문에 아직도 그 방법이 전해질 것 같은데…….”

“그 방법이라면 무엇을……. 설마! 혹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 쿤테르는 그만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그렇네.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네.”

‘이건 아니다.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 해도 그런 저주 마법을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할 수는 없다!’

짧은 순간 쿤테르는 갈등을 하였지만 이내 결심을 하였다. 아무리 메르타니온 국왕을 위해, 왕실과 왕국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지만 피의 맹약 같은 저주 마법을 다시금 세상에 드러나게 한다면 훗날 더 큰 시련이 왕실을 덮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폐하, 신의 가문 또한 마법사의 가문. 당시 신사협정 이후 그 마법에 대한 모든 것을 파기하였사옵니다.”

“정말인가?”

“폐하의 어전에서 어찌 거짓을 입에 담겠사옵니까?”

“내 남작을 의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네. 다만 그것이 있다면 그를 좀 더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게 아쉬워서 한 말이었네.”

피의 맹약이라는 마법이 남아 있지 않다는 쿤테르의 말에 아쉬워하는 메르타니온이었다.

“폐하, 외람되오나 신이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무엇인가, 자작?”

“폐하, 폐하께옵서는 신이 폐하를 따르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옵니까?”

“음…….”

로엔달의 발언에 순간 침묵이 방 안을 싸하게 감쌌다.

“자작! 그대가 아무리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 하더라도…….”

“그만! 공작은 그만하게.”

“하오나, 폐하.”

“그만하게. 자작은 내게 충분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이니 말이야.”

“으음…….”

메르타니온의 말에 도르첸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오래전부터 메르타니온을 위해 음지에서, 그리고 전쟁이 난 이후에는 양지에서 그의 곁에서 혼신을 다해 충성을 바쳐 오고 있는 도르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르타니온은 지금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조언보다는 로엔달의 조언에 더욱 귀를 기울였고, 그것이 늘 불만인 도르첸이었다.

“계속하게, 로.”

더욱이 로엔달의 애칭으로 그를 지칭할 때에는 그 어떠한 말이나 행동을 해도 메르타니온은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날 소신이 폐하께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였던 것은 폐하께서 장차 이 왕국의 국왕이 되실 분이었기 때문도, 소신에게 많은 것을 약속해 주셔서도, 그리고 소신을 강제하셔서도, 겁을 주셔서도 아니었사옵니다. 소신이 폐하께 충성을 맹세하였던 것은 바로 폐하의 진심과 열정 때문이었사옵니다.”

“진심과 열정이라?”

“그렇사옵니다. 사내로 이 세상에 태어나 원대한 꿈과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실행해 나가시는 폐하의 모습에서 소신은 뜨거운 열정을 느꼈고 그러한 폐하의 열정에 감복하여 폐하를 찾아간 소신을 미욱하다 내치지 않으시고 받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읍할 일이거늘, 폐하께서는 그러한 소신을 진심으로 받아 주시고 지금까지도 이처럼 진심으로 대해 주고 계시옵니다. 그런 폐하께 어찌 소신이 불충한 생각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는 폐하의 곁에 있는 다른 이들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옵니다.”

담담한 말투였지만 그 담담함 속에 뜨거운 충정이 담겨 있다는 것은 메르타니온뿐만이 아니라 함께하던 도르첸도, 그리고 쿤테르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잠시 침묵만이 흐르던 방 안이 메르타니온의 커다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역시! 역시! 로 자네가 내 가장 오래된 충신이로다! 하하하!”

메르타니온과 로엔달이 인연을 맺은 지 벌써 33년째였다. 당시 메르타니온은 왕자의 신분이었고, 로엔달은 왕궁에서 시종으로 일하고 있는 자의 양자로, 역시 시종이 되기 위해 왕궁에 들어와 있던 아이였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지금까지 비록 은밀하지만 지금도 끈끈하게 이어져 오고 있었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밖에 있는가?”

“대령해 있사옵니다, 폐하.”

“그를 들여보내도록 하라.”

“분부 받자옵니다, 폐하.”

로엔달의 충고에 초심을 되찾은 메르타니온의 목소리에 힘이 가득했다.

얼마 후 시종을 따라 레드로가 안으로 들어왔다.

“로엔의 하늘에 가장 높이 떠 있는 태양의 고귀함을 이은 푸른 혈통의 적자…….”

“되었네. 내 솔직히 그런 인사를 받을 때마다 낯이 간지럽더군.”

“예? 어인 말씀이신지…….”

갑작스러운 메르타니온의 말에 레드로는 어리둥절했다. 그 모습에 모두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하나 메르타니온의 표정이 변하자 모두 웃음을 지워 버렸다.

“먼저 묻겠네.”

“하문하시옵소서, 폐하.”

“어젯밤 그대 외조부인 캠벨 자작이 날 찾아왔다. 그것은 그대의 뜻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런 이야기를 듣고 굳이 반대하지 않았으니 결국 자신의 의지로 행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알겠지?”

“예, 폐하.”

“그대의 아비와 형제 그리고 가문을 등질 수 있겠는가?”

예상했던 질문이다. 그리고 지난 밤새도록 이에 대해 국왕이 마음에 들어 할 것 같은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하지만 막상 이러한 질문을 직접 받게 되니 잠시 멈칫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심에 또 결심을 하였지만 막상 이제 자신의 한마디에 어쩌면 단지 등을 돌리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 검을 겨누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현실감이 더욱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

“어째 말이 없는가?”

레드로의 대답이 늦어지자 메르타니온의 목소리가 준엄해졌다.

“있사옵니다.”

“뭐라고 했는가?”

“있다 하였사옵니다! 설사 제 아비와 형제 그리고 가문을 향해 검을 겨누어야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군의 뜻이라면 기꺼이 그리하겠사옵니다.”

“진심인가?”

“그렇사옵니다. 소인, 비록 나이 어리나 사내의 붉은 단심이 무엇인지는 안다 생각하옵니다.”

“사내의 붉은 단심을 안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톡! 톡! 톡!

생각할 일이 생기면 자연적으로 나오는 메르타니온의 습관이 다시금 나왔다.

“앞으로 짐을 비롯하여 짐의 동지들은 늘 그대를 시험하고 의심할 것이다. 그래도 내게 일편단심으로 충성을 다하겠는가?”

“폐하께 충성을 다하겠사옵니다.”

“설사 그대가 감당하기 힘든 명령을 내린다 해도?”

감당하기 힘든 명령이란 바로 혈육에게 검을 겨누라는 명령을 뜻하였다.

“그것이 어떠한 명령이라 하더라도 폐하의 명이시라면 반드시 따르겠사옵니다.”

“흠…….”

다시 한 번 침묵이 방 안을 감쌌다. 이번 침묵은 제법 긴 침묵이었기에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레드로는 애가 타들어 갔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그대가 내 울타리 안에 있는 한 어쩌면 평생을 끊임없이 의심받고, 시험받게 될 것이야. 한데 내 가장 오랜 친구이자 동지인, 저기 있는 로뎀 폰 로엔달 자작이 그러더군.”

“……?”

메르타니온의 말에 레드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로엔달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의외였다. 대외적으로 메르타니온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는 인물로 알려진 자는 보좌관 역할을 하고 있는 도르첸 공작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로엔달 자작이라면 왕국의 익스퍼트 중 한 명인 바로 그분이지 않은가? 맞아. 언젠가 아버님께서 저분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 만약 자신의 상대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바로 저분 로엔달 자작뿐일 것이라고.’

“진심과 열정으로 대하라고 말이야.”

그 말은 곧 앞으로 메르타니온이 자신을 대함에 있어서 진심과 열정으로 대할 것이란 뜻이었다. 이런 메르타니온의 말에 레드로의 가슴에 따뜻한 파문이 일었다.

“이제부터 그대의 활약을 기대하도록 하지.”

“충! 소신 신명을 다해 폐하의 뜻이 만천하에 널리 퍼지도록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이렇게 하여 왕국의 두 새로운 익스퍼트를 곁에 두시게 되었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도르첸의 말처럼 한날에 새롭게 탄생한 두 명의 익스퍼트를 함께 얻은 메르타니온은 그 어떤 바람도 뚫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거대하고 힘찬 날개를 얻은 것 같았다.

“궁금한가 보군. 하긴 그렇기도 하겠지.”

“…….”

새롭게 탄생한 두 명의 익스퍼트라는 말에 레드로가 궁금한 듯 의문이 담긴 눈으로 도르첸을 바라보았다.

“그대도 보았을 것 같은데 말이네. 조금 전 이곳을 나간 젊은이를.”

“아! 하면 그도?”

“그렇다네. 자네에게는 아쉽겠지만 그가 왕국의 일곱 번째 익스퍼트라네. 자네보다 반나절 먼저 익스퍼트로 인정을 받았지.”

“아!”

‘역시. 내 느낌이 맞았어.’

문득 그를 처음 봤을 때, 그에게서 숙명을 느꼈던 자신의 느낌이 맞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도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게.”

“예, 폐하. 하오면 소신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사옵니다.”

“어떻게 되었느냐? 폐하께서 널 받아 주셨느냐?”

“예, 외할아버님.”

힘이 필요한 국왕이 소속이 없는 익스퍼트를 마다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캠벨 자작이나 레드로의 어미인 이멜다는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잘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외할아버님. 폐하께서도 절 기꺼이 중용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시더냐?”

“예.”

“그래. 이왕 네가 그렇게 결심하였고 또한 폐하께서도 널 중히 쓰겠다고 하셨다니, 앞으로 잘해 나가리라 믿겠다.”

“걱정 마십시오, 외할아버님. 최선을 다해 외할아버님과 어머니께서 걱정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아! 한데 조금 전에 안 일인데, 저 말고도 어제 또 다른 익스퍼트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익스퍼트가 말이냐?”

레드로 말고 또 다른 익스퍼트가 같은 날 탄생했다는 말에 캠벨 자작도 그리고 이멜다도 깜짝 놀랐다.

“예, 외할아버님.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거나 대화를 나눠 보진 못했지만, 폐하를 알현하기 전에 잠시 그와 마주쳤습니다.”

“하면 그자도?”

공표되지 않은 익스퍼트가 국왕을 먼저 알현했다면, 그것은 그가 국왕파의 귀족이란 뜻이다.

“예, 외할아버님. 그도 국왕 폐하의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전에 본 적이 있는 자더냐?”

“아닙니다. 이전에 전혀 본 적이 없던 자입니다. 다만 그는 귀족 가문의 자제는 아닐 것입니다.”

레드로의 말에 캠벨 자작이 의문을 드러냈다.

“그것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그자는 남자인 제가 봐도 가슴이 떨릴 정도로 뛰어난 외모를 지닌 자였습니다. 설사 그가 중앙 귀족의 자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외모라면 분명 소문이 크게 돌았을 것입니다. 한데 그러한 자에 대한 소문은 들은 바가 없습니다.”

확실히 알마리온의 외모는 지나치게 뛰어났다. 그리고 그런 정도의 외모라면 설사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하더라도 벌써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외모를 지닌 자에 대한 소문을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던 레드로였기에 그가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라고 추측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어쨌든 국왕 폐하의 입장으로는 지금과 같은 전란이 벌어진 때에 두 명의 새로운 익스퍼트를 곁에 두게 되셨으니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하구나.”

“그렇습니다, 외할아버님.”

“어쨌든 난 네가 잘하리라 믿는다.”

“감사합니다, 외할아버님. 그리고 너무 걱정 마십시오.”

“허허, 그래그래. 그럼 난 이만 돌아가겠다. 그리고 그리 대단치는 않지만 이 할아비가 필요하면 언제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찾아오거라. 네 외숙부들과 네 외사촌들 또한 기꺼이 널 도울 것이니. 알겠느냐?”

“감사합니다, 외할아버님. 그리고 숙부님들과 사촌들에게도 제가 감사해한다고 꼭 전해 주십시오.”

“오냐.”

캠벨 자작이 돌아간 후 모자만 남자 이멜다가 힘들게 말문을 열었다.

“네가 폐하를 알현하는 동안 네 외조부님과 난 네 아버지에게 다녀왔단다.”

“아버님께 말이십니까?”

아버지에게 다녀왔다는 어머니의 말에 레드로의 표정이 잔뜩 굳어졌다.

“그래. 가서 네 아버지에게 이혼을 할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아버님께서는 뭐라 하시던가요?”

“…….”

이혼하겠다는 말에 아버지인 구스타프가 어떤 반응이었는지를 묻자 고개를 푹 숙인 어머니의 작고 흰 주먹이 치맛자락을 꽉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며 어떤 반응과 대답을 들었는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방적이긴 해도 이혼을 통보하자 구스타프는 한껏 비웃음을 지은 채 장인인 캠벨 자작이 있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모욕적인 언사를 남발하였다. 아울러 먼저 이혼을 요청하였으니 혼인 때 지참금으로 가져온 것도 돌려줄 수 없으며, 또한 심지어는 누구의 씨인지도 모를 레드로는 두 번 다시 더글러스라는 성을 쓸 수 없으며 영원히 후작가의 혈통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겠다고까지 하였다.

실상 두 부부 사이에 레드로가 생긴 것은 단 한 번의 관계에 의해서였다. 그것도 전 부인의 기일, 폭음으로 이성을 완전히 잃었던 그가 강간을 하듯 그녀를 범했고 그로 인해 태어난 것이 바로 레드로였다.

하지만 정작 구스타프는 그날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는 단 한 번도 이멜다와 관계를 맺은 일이 없다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었다.

결국 그가 이멜다와 레드로를 더욱더 멀리하게 된 것은 레드로가 이멜다의 부정으로 태어난 불륜의 씨앗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구스타프는 지금까지 대외적인 눈도 있고 또한 자존심도 지키기 위해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단 한 번도 타인에게 밝힌 적이 없다가, 이혼을 통보하러 오자 처음으로 그간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일을 처음으로 밝힌 것이었다.

그런 구스타프의 행동에 참담한 심정이 된 이멜다는 더 이상 그와는 한 공간에 있을 수 없어 도망치듯 돌아왔던 것이다.

‘끝까지…… 끝까지 당신은 어머니와 날 실망시키시는군요, 아버님.’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그분을 아버지라 부를 이유가 없어진 것이군요.”

레드로의 말에 고개를 숙인 채 울먹거리던 이멜다의 고개가 들렸다. 그런 이멜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꼭 잡은 레드로가 맹세를 하듯 말하였다.

“이제 그 누구도 어머님을 아프거나 힘들게 하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흑! 그래, 고맙구나.”

‘앞으로 절 지켜보셔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버린 제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