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받다
“선전관을 파견하여 왕국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고 있는 모든 지휘관들과 병사들을 위무토록 하고 공을 세운 자들을 신분 고하에 관계없이 모두 찾아내어 포상토록 하시오.”
팬픽에 몽진 중인 메르타니온 국왕은 전선에서 불과 20킬로미터 떨어진 팬픽보다 좀 더 북쪽의 안전한 곳으로 몽진하라는 권유를 뿌리친 채 팬픽에서 직접 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국왕은 군을 직접 지휘할 위치에 있지도 못하였다. 귀족 파벌에 의해 왕권이 제한된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국왕에게도 결정적인 반전의 기회가 만들어졌는데, 그 반전의 기회를 만들어 준 이가 바로 해군 사령관 폰티악 백작이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그가 해군의 지휘권을 되찾은 후 보인 기적적인 승리로 인해 전선 전체의 상황이 다시금 호전될 기미가 보이자 국왕은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귀족들에 의해 제한되었던 왕권을 강화해 나가기 시작했고, 이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선전관을 파견하여 전장에서 공을 세운 자들이라면 신분의 귀천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보고하여 포상을 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참으로 은혜로운 명이십니다, 폐하! 폐하를 위해, 그리고 왕국을 위해 제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이들을 치하하신다면 모두가 폐하의 은혜로움에 더욱더 분발하게 될 것이옵니다.”
국왕인 메르타니온과는 사촌지간인 도르첸 공작이 메르타니온의 명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공작의 신분을 갖고 있기는 하여도 왕족인 그는 왕국의 법에 따라 영지를 가질 수 없었고, 아울러 정치에도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도 없었다. 하나 메르타니온 국왕은 그를 끌어들여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구심점으로 만들기 위해 특별히 그를 보좌관에 임명을 하여 곁에 두었다.
이처럼 단지 국왕의 사무를 개인적으로 보좌하는 보좌관이라는 자리는 공식적인 직함이 아닌 때문에 왕국의 법에 저촉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지금의 발언은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일 뿐, 그것이 국정을 결정하는 데 있어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다만 메르타니온 국왕의 사촌이라는 점과, 공작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그 무게감이 조금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허허, 공작이 이처럼 짐의 뜻에 적극 동참하니 참으로 든든하구려.”
“황공하옵니다, 폐하.”
“그리고 그 문제는 어떻게 논의되어 가고 있소?”
메르타니온 국왕이 거론한 그 문제란 바로 자신 직속의 군단인 제1의용군단의 창설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 문제는 아직 논의 중이옵니다, 폐하.”
왕국의 군을 총지휘하는 원수인 구스타프 폰 더글러스 후작이 메르타니온 국왕의 질문에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대답하였다.
“아직도 말이오?”
“송구하옵니다, 폐하.”
“프리모 공작, 그리고 더글러스 후작.”
“예, 폐하.”
메르타니온의 호명을 받은 재상인 마이클 폰 프리모 공작과 원수인 구스타프 폰 더글러스 후작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짐이 그 일에 대해서 조속한 시일 내에 결론을 내 달라고 하였거늘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논의만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오?”
“폐하, 소신 등도 새로운 군단의 창설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사옵니다. 하오나 폐하께서 명하신 제1의용군단의 경우 지휘 체계의 문제로 인해 아직도 논의 중인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전시에 새로운 군단을 편성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거의 한 달에 하나꼴로 새로운 군단이 창설되고 있는 실정에서 또 하나의 군단을 창설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상인 프리모 공작과 원수인 더글러스 후작이 이처럼 제1의용군단의 창설에 난색을 표하는 것은 그 군단을 국왕의 직속으로 두려 했기 때문이다.
로엔 왕국의 모든 군단은 국왕과 왕실 가족들, 그리고 왕궁을 호위하는 1개의 호위군을 제외하고는 모두 원수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왕 직속의 또 다른 정규군단의 창설은 자칫 군의 지휘 체계에 큰 혼란을 불러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귀족들이 장악한 군부와, 이런 현실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국왕과의 암투가 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지휘 체계라 하셨소?”
“그렇사옵니다, 폐하.”
“흠! 알겠소. 다른 때도 아니고 전시인 지금 지휘 체계에 문제를 일으키면서까지 일을 처리하는 것은 역시 무리라는 그대들의 의견이 옳은 것 같소. 그 문제는 그럼 없었던 것으로 하겠소.”
메르타니온이 순순히 직속의 제1의용군단 창설을 포기하겠다는 갑작스러운 발언을 하자 그동안 이 문제로 논란을 벌여 왔던 프리모 공작과 더글러스 후작 등은 이러한 국왕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해 당황하였다.
“하면 더 논의할 것이 남아 있소?”
“흠! 어, 없사옵니다, 폐하.”
“하면 오늘 회의는 이만 하도록 하겠소.”
그 말을 끝으로 메르타니온 국왕과 도르첸 공작이 자리를 떠나 버렸다.
“후훗! 재상과 원수의 표정을 보았나?”
회의를 마치고 집무실에 돌아오자마자 메르타니온은 사촌 동생인 도르첸 공작에게 그동안 논란을 일으켰던 제1의용군단 창설 문제의 뜻을 접겠다는 갑작스러운 통보에 프리모 공작과 더글러스 후작의 당황해하던 모습을 두고 재미있다는 듯이 말하였다.
“예, 폐하.”
“하하. 한동안 내가 갑자기 제1의용군단 창설의 뜻을 철회한 것을 두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릴 두 사람을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다 좋아지는군. 하하하.”
“…….”
“그건 그렇고 준비는?”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여 공식적으로 제1의용군단 창설을 포기하겠다는 발표를 하였지만 메르타니온 국왕은 전혀 그 뜻을 접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프리모 공작과 더글러스 후작을 비롯한 귀족 파벌이 친위군단을 갖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무작정 밀어붙일 정도로 생각이 없는 메르타니온이 전혀 아니었다.
“이미 완벽하게 마쳤사옵니다.”
“수고했네. 그럼 로엔달 자작만 복귀하면 되는 것인가?”
로뎀 폰 로엔달 자작이 지휘하던 12군단은 현재 공식적으로 해체를 위한 작업 중에 있었다.
롬 강 북안의 방어진을 구축할 동안 롬 평원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라는 명령을 받았던 12군단은, 지휘부는 무사히 강을 건넜지만 극히 일부의 병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상태로 군단을 해체한다는 결정에 따라 공식적인 해체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후후! 궁금해지지 않나? 며칠 후에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이야. 하하하!”
“……”
며칠 후면 벌어질 반전과 그 반전을 통해 당황해할 것이 분명한 프리모 공작과 더글러스 후작의 모습을 생각하니 절로 유쾌해지는 듯 연방 웃음을 참지 못하는 메르타니온이었다.
한편 프리모 공작의 집무실에는 모두 다섯 명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왕국의 재상이자 남부 귀족 파벌의 수장인 프리모 공작, 원수부의 원수이자 중부 귀족 파벌의 수장인 더글러스 후작, 왕국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출납원의 원장이자 동부 귀족 파벌의 수장인 루이스 폰 로보 후작, 재상부와 함께 국정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관인 자문 회의의 의장이자 서부 귀족 파벌의 수장인 아약스 폰 사뮤엘 후작, 그리고 집사장이자 북부 귀족 파벌의 수장인 베론 폰 제거 백작 등이었다.
“폐하께서 갑작스럽게 제1의용군단 창설을 번복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거 백작은 뭐 알고 있는 일이 있는가?”
“소관 또한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도르첸 공작이 보좌관으로 임명되신 후, 폐하께서는 거의 모든 일을 도르첸 공작과 의논하시고 있다는 것은 사뮤엘 후작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집사장이라면 국왕과는 매우 가까운 관계인 것이 보통이었지만 도르첸 공작이 보좌관으로 임명된 이후부터 집사장인 제거는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궁내부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가?”
집사부가 왕궁의 전반적인 관리를 담당하는 부서라면, 궁내부는 왕실의 재정만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제가 알기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궁내부를 맡고 있는 함멜 자작이란 자가 워낙 의뭉스러운지라 그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알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긴 함멜 자작가는 대대로 철저한 국왕 지지파이고, 함멜 자작가에서 고르고 고른 자들만이 궁내부를 장악하고 있으니 무엇인가를 알아내기가 쉽진 않을 것입니다.”
로보 후작도 제거의 어려움이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폐하라면 분명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실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우리가 모르는 일을 꾸미고 계시는 것이 분명한 것 같은데 그것을 전혀 모르겠으니…….”
상대의 패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은 게임을 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군에서의 특별한 움직임은 없는가?”
“전혀 없었습니다, 공작 전하.”
군에서도 이상 움직임이 전혀 없고 재상부나 자문회 그리고 집사부에서도 아무런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이들로 하여금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전쟁 발발 이후 그동안 권력을 독점해 오던 귀족들은 그 기반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우려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군에 대한 통제력의 약화였다.
그동안 군부는 국왕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귀족 파벌의 힘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런 군부가 전쟁 발발 이후 능력이 부족하여도 출신 성분과 배경만으로 군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귀족들이 패전의 멍에를 쓰고 쫓겨나면서 그 빈자리를 국왕파의 인물들이 대신하여 차지하였다.
이런 식으로 빠르게 군부를 장악해 나가고 있는 메르타니온 국왕의 행동에 대하여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귀족 파벌이었다.
“아무래도 무엇인가 일을 꾸미고 계신 것은 확실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답답한 심정인 자는 프리모 공작과 더글러스 후작이었다. 이 상태로 국왕의 권력이 계속해서 강화되고 이를 적절히 통제할 수 없게 된다면, 그동안 왕권 축소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던 이들 두 가문은 그야말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국왕 폐하께서 꾸미시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해야 하오. 하니 모두 좀 더 분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잘 알겠습니다, 공작 전하.”
“스승님! 스승님! 그 소문 들으셨나요?”
또 어디 가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 헐레벌떡 치료소로 쓰이는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온 안톤이 호들갑을 떨어 댔다.
“또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렇게 호들갑인 것이냐?”
그러한 제자의 모습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핀잔을 주듯 말하는 쿤테르였다.
3서클 마법사인 쿤테르 폰 체임버스 남작은 로엔 왕국에서 치료 마법으로 일가를 이루고 있는 체임버스 남작 가문의 당대 가주였다.
원래 그는 왕실 가족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왕실 마법사였지만 국왕인 메르타니온의 명령에 따라 전장에 나와 부상병을 돌보는 중이었다.
“스승님도 아시죠, 이틀 전에 마지막으로 12군단 패잔병들이 귀환한 것을 말이에요.”
롬 평원의 전투가 12군단의 전멸이라는 참혹한 결과로 끝난 것이 사흘 전의 일이었다.
이렇듯 전멸한 12군단이었지만 생존하여 귀환한 병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살아서 돌아온 12군단 소속의 귀환병의 총수는 417명. 지휘부 전체가 무사히 강을 건너 돌아온 것에 비하면 귀환한 병사들의 수는 너무나도 적었다.
하지만 이를 안타까워하는 이는 무사히 강을 건너 복귀한 417명의 12군단 소속 병사 그 자신들뿐이었다. 노예를 주축으로 구성된 12군단이었기에 이들의 이러한 희생은 희생이 아니라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있다.”
노예 출신 병사들은 부상을 입는다 해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가뜩이나 넘쳐 나는 부상병들로 인해 로엔 왕국의 마법사들이나 치료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리에 무리를 하고 있었다.
“한데 그들이 무얼 어쨌기에 그렇게 호들갑인 것이냐?”
“쳇! 스승님은 제가 무슨 계집애입니까? 만날 호들갑 떤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럼 아니란 말이냐?”
“스승님!”
“하하. 알았다. 알았으니까 무슨 일인데 그렇게 호들, 아니 요란을 떠는 것이냐?”
호들갑이란 말에 살짝 삐친 체를 하는 제자를 건들지 않기 위해 다른 말로 표현했지만 호들갑이나 요란이나 거기서 거기인 단어였다.
“에이, 말씀 안 드려요!”
“뭐, 그러려무나. 나야 아쉬울 것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하긴 밖으로 나가 아무나 붙잡고 최근 떠도는 소문을 물어보기만 하면 될 일이니 아쉬울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씨……. 정말 너무하세요! 한창 잘 자라는 제자에게 좀 져 주시면 안 되나요?”
“인석아, 스승님을 이겨 먹으려는 네놈이 더 이상한 놈이지.”
“쳇! 정말 너무하세요!”
“그렇게 싸돌아다니지 말고 어서 수련이나 하거라. 그나마 요즘 며칠 조용하지만 곧 적들이 다시 강을 건너 공격해 올 것이라 하는구나. 그때 되면 또다시 부상자들이 많이 생길 것이니 틈나는 대로 수련을 해서 힘을 비축해 두거라.”
강이라는 천연의 장애물을 이용해 적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숨을 고르고는 있지만 적군이 강을 건널 준비가 끝나면 이내 다시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한데 정말 안 궁금하세요?”
“그래.”
다시금 마법서로 눈길을 주는 쿤테르의 모습에 안톤은 결국 잘난 체하는 것을 포기하고는 밖에서 듣고 온 이야기들을 풀어 놓기 시작하였다.
“쳇! 알았어요. 그냥 말씀드리면 되잖아요. 엊그제 마지막으로 귀환한 노예 병사들 중에 나이트 오브 나이트가 있다고 지금 다들 난리가 났어요.”
“이 녀석! 헛소리하려면 수련이나 하거라.”
침까지 튀겨 가면서 말하였건만 돌아오는 반응은 헛소리하지 말라는 핀잔뿐이자 화가 나는 안톤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왜 스승인 쿤테르가 자신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는 것인지 이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마법사나 익스퍼트 기사나 모두, 마나에 대한 친화력을 가진 아이들을 선별하여 마나 수련법이라는 특별한 수련법을 통해 육성한다. 이론적으로는 특별한 마나 수련을 통하지 않고서도 마나를 활용할 수 있다고는 알려져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러한 일은 단 한 번도 보고된 바가 없기에 단지 이론으로만 가능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나 수련법은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며, 학파의 제자나 아니면 가문의 혈통을 통해서만 전해지기 때문에 제자인 안톤의 말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 정말이라니까요! 스승님도 안 믿기시죠? 그렇죠? 지금 그것 때문에 다들 난리도 아니라니까요!”
“허! 이 녀석이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와서 그러는구나. 쓸데없이 돌아다니면서 말도 되지 않는 소문 퍼뜨리지 말고 어서 수련을 시작하지 못하겠느냐!”
끝까지 우기려 드는 안톤의 행동에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 쿤테르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하나 그런 스승의 모습에도 안톤은 굴하지 않았다.
“진짜라니까요! 조금 전에 그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6군단장님이 12군단장님을 비롯한 군단 지휘관들과 그 노예 병사를 지휘 막사로 데려갔단 말이에요!”
이쯤 되자 안톤의 말을 헛소리로 단정하였던 쿤테르 또한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게 사실이냐?”
“그렇다니까요! 스승님은 제자인 제 말이 그렇게 못 미더우세요?”
솔직히 믿기 힘들었다. 아직 수습 마법사인 안톤이야 마나 수련 없이도 마법사나 익스퍼트가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겠지만 3서클 마법사인 쿤테르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를 알기에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혹시 이런 것 아닐까요? 예전에 귀족 가문이었다가 정변 때 노예가 되었던 귀족 가문의 후예 아닐까요?”
“흠.”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실제로 그러한 사례도 몇 차례 있었다.
‘곧 나를 찾겠군. 그 노예 출신 병사가 진실로 익스퍼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마법사인 내 판정이 필요할 것이니 말이야.’
익스퍼트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검으로 직접 익스퍼트의 상징인 마나 소드를 확인시켜 주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법 말고도 익스퍼트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었는데 바로 마법사를 통해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마법 중에 마나 스캔이라는 마법이 있다. 원래는 상대 마법사의 능력을 은밀히 판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법이었지만, 이를 약간 변형하면 상대가 마나에 대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의 판별은 물론, 마나의 속성 중 어떤 속성과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판별할 수 있었는데, 마법사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제자들을 선별하였다.
여기에 마나 스캔이란 마법은 또 하나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기능은 원래 병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마나 스캔이라는 마법을 변형하여 사용하게 되면서 우연하게 발견한 방법이었다.
인간의 몸은 아무리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없다 하여도 일정량의 마나를 체내에 담고 있다. 마나란 것 자체가 바로 생명의 원천이었으니 당연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체내에 일정량의 마나가 담겨 있는 것이다.
하나 병자의 경우 병이 난 부분에서 마나의 흐름이 이상하게 왜곡되어 있거나 아니면 그 양이 정상인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이러한 마나의 이상 흐름이나 정상인과는 다른 양의 차이를 보이는 것을 통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쓰였던 마나 스캔 마법이 익스퍼트를 판별하는 데에도 쓰이게 된 것이다.
마법사의 경우에는 마나 홀이라는 것이 심장 부분에 존재하여 외부의 마나를 강제로 묶어 두지만, 익스퍼트의 경우에는 몸 그 자체가 하나의 마나 홀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정상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활발한 마나의 흐름과 함께 체내에 축적된 마나의 양이 정상인에 비해 확연하게 많아지게 되는데 이를 읽어 내어 익스퍼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 아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만간 날 부르겠군.’
아니나 다를까. 쿤테르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의 막사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흠! 흠! 체임버스 남작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오게.”
“감사합니다. 소관은 6군단장님 휘하의 기사 켄트 홀이라고 합니다. 군단장님께서 자작님을 급히 청하셨습니다.”
“무슨 일 때문인가?”
“급히 확인을 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알겠네. 곧 가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하면 소관이 남작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켄트란 기사를 따라 6군단 지휘부로 가자 그곳에는 과연 안톤의 말처럼 6군단장을 비롯한 6군단 지휘관 전원과 12군단장인 로엔달 자작을 비롯한 12군단 지휘관들까지 모두 함께 있었다.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자작님.”
“어서 오시오, 남작.”
“로엔달 자작님께서도 함께 계셨군요.”
“…….”
쿤테르의 인사에도 로엔달 자작은 그저 가볍게 목례만 살짝 하였을 뿐이다.
“혹, 지금 병영 내에 떠도는 이야길 들었소?”
“그 노예 출신 병사에 관계된 소문 말씀이십니까?”
“아! 알고 있다니 달리 설명을 하진 않아도 되겠군요.”
“제자 녀석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하면 소관으로 하여금 그 병사에 관계된 소문이 진실인지를 판명해 달라는 것이겠군요?”
“그렇소.”
“알겠습니다. 소관이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쿤테르가 소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겠다고 하자 갈리 자작은 기사를 시켜 소문의 근원인 알마리온을 데려오도록 하였다.
얼마 후 두 명의 기사와 함께 알마리온과 한센 그리고 요들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한데 이미 준비를 시켜 놓았음인지 알마리온은 평소와는 달리 목욕은 물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아!”
“오!”
모두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새 군복으로 갈아입은 알마리온의 외모가 너무나도 빼어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외모 또한 언제든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알마리온은 그동안 의도적으로 외모를 감추기 위해 노력해 왔다. 심지어 지난 1년 동안 같은 막사의 옆자리에서 함께 생활했던 요들과 한센조차도 이번에 처음으로 알마리온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
한데 알마리온의 빼어난 외모에 놀람을 감추지 못하던 이들 중 조금 다른 이유로 놀라는 이가 한 명 있었다.
“무슨 일이시오, 로엔달 자작?”
“아니오.”
“하하. 로엔달 자작 또한 저 병사의 외모에 놀라셨던 모양이오. 하하하.”
평소 아이언마스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만큼 표정의 변화가 적은 로엔달이었다. 그런 그조차도 알마리온을 보고는 놀라는 표정이 되어 버리자 그것이 재미있고도 신기하였던지 슬쩍 농을 던지는 갈리 자작이었다.
‘저 얼굴은 분명…….’
문득 18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이 행하기는 하였지만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을 하고 만 그는 18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의 일을 잊지 못한 채, 그때 벌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에 하루하루 스스로를 벌하며 지내오고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알마리온의 모습은 그때 그 여성 엘프와 판박이라고 해도 좋을 것처럼 닮았다.
‘하면 그때 그 일로 그녀가?’
의심되는 일이라고는 한 가지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의 모습, 어딘지 모르지만 나와도…….’
뚫어지게 알마리온을 바라보던 로엔달은 그의 모습에 딱히 어디라고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모습 또한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는 분명 정령술사다. 그것도 중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정령술사라니! 게다가…….’
그를 놀라게 하는 일은 비단 옛일을 기억나게 하는 알마리온의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로엔달은 알마리온이 익스퍼트가 아닌 정령술사라는 것을, 그것도 중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정령술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것도 한 종류의 정령만 소환할 수 있는 정령술사가 아닌,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정령술사임을.
‘역시 그녀의 혈통을 이은 것인가? 아무래도 저 아이에 대해서 가능한 많은 것을 알아보아야 할 것 같구나.’
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갈리 자작에 의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그대의 이름이 알마리온이라 했던가?”
알마리온이 아직도 노예의 신분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만약 진실로 알마리온이 익스퍼트라는 것이 확인되면 얼마든지 지금의 천한 신분을 벗어나 최소한 기사 이상의 신분을 획득할 수 있었기에 그를 대함에 정중함을 유지하는 갈리였다.
마법사처럼 익스퍼트 또한 매우 귀중한 존재였다. 그동안 전례를 보면, 새로운 익스퍼트가 탄생하면 국왕은 그를 왕궁으로 초대해 만찬을 베풂은 물론 그에게 새로운 성과 작위를 내려 새로운 가문을 열게끔 하였다. 그만큼 새로운 익스퍼트의 등장은 국가적으로도 중대한 일이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 알마리온이 익스퍼트가 분명하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면 그는 로엔 왕국의 일곱 번째 익스퍼트가 되는 일이었기에 갈리 자작의 이러한 행동은 결코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예, 군단장님.”
“기록을 보니 로뎀 자작가의 노예이던데 맞는가?”
“예. 그렇습니다.”
“입대를 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는군.”
“예.”
면천을 조건으로 입대를 한 노예 출신 병사들 중 1년간이나 생존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정말 대단하군. 하면 입대할 당시부터 익스퍼트였던 것인가?”
이는 그가 몰락한 귀족 가문 출신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돌려 묻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뒤에 있는 한센 백인대장의 배려로 군에서 가르치는 검술과 창술을 처음 배우게 되었고 그것을 통해 이와 같은 신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으음…….”
군에서 가르치는 검술을 단 1년 정도 수련해서 익스퍼트가 되었다는 그의 말에 다들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 되었다.
“불가능한…….”
“아니, 가능합니다.”
막사에 모여 있던 자들 중 누군가가 알마리온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말하려 하였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나섰다. 마법사로 알마리온의 익스퍼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온 쿤테르였다.
“익스퍼트는 마나를 다루는 영역. 어떤 검술을 수련하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수련하였는지는 전혀 중요치 않습니다.”
그의 설명처럼 마법사나 익스퍼트는 마나를 다루는 존재들로, 검술 그 자체는 마나를 활용하는 한 방법에 불과할 뿐, 검술을 통해 익스퍼트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저자는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체임버스 남작의 말이 옳네.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지.”
검의 길을 걷는 자들이 쉽게 빠지는 착각이 바로, 검술과 마나 수련법에 굉장히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하면 그대가 익스퍼트인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직접 확인시켜 주겠는가, 아니면 마법사인 체임버스 남작의 도움을 받겠는가?”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미 이런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사전에 준비하였던 알마리온이었다.
스스로 직접 익스퍼트라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두는 그를 익스퍼트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법사에 의해 자신이 익스퍼트가 아님이 밝혀진다면 자칫 귀족들을 상대로 사기를 쳤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울러 알마리온은, 어차피 판을 벌일 것이라면 모두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라도 마법사를 통해 증명받기보다는 직접 시연을 보이기로 한 것이었다.
“하면 모두 밖으로 나가도록 하지.”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미리 준비를 해 놓은 것이 있었기에 갈리 자작은 모두를 대동한 채 막사를 나섰다.
한데 막 쿤테르가 막사를 나가려 할 때였다. 로엔달이 그를 조용히 불러 세웠다.
“자네.”
다른 이들처럼 뒤따라 나가려던 쿤테르는 로엔달이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자 걸음을 멈추었다.
선부 때부터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다. 또한 이 두 사람은 모두 한 가지 공통된 비밀을 가지고 있는 동료이기도 하였다.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모르는 체하게.”
밑도 끝도 없이 무엇을 모르는 체하라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말만을 남긴 채 성큼성큼 걸어서 밖으로 나가는 로엔달의 뒷모습을 보면서 쿤테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금은 타인에게 곁을 내주어도 좋으시련만.’
아이언마스크, 냉혈한, 얼음동상 등등. 로엔달을 가리키는 별명은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별명은 모두 하나같이 그의 차가운 성격을 나타내는 것들로, 어려서부터 그를 보아 온 쿤테르로서는 그가 세상 사람들이 아는 것만큼 차가운 사람이 아님을 알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익스퍼트를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대략 3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세워진 단단한 참나무 위에 입혀 놓은 플레이트 메일을 절단하면 되는 일이었다.
‘부탁해, 실라페.’
-쳇! 지난번에는 빌빌거려 날 실망시키더니 이제는 사기 치는 데 도와 달라고 하네?
‘미안해.’
대번에 알마리온이 모두를 속이기 위해 자신을 소환한 것임을 알아챈 실라페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한데 이렇게 그가 익스퍼트의 흉내를 내기 위해 실라페를 소환하자 갑작스러운 마나의 움직임에 흠칫 놀란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3서클 마법사인 쿤테르였다.
“……!”
알마리온이 소환한 정령이 일으킨 급격한 마나의 파동으로 인해 크게 놀란 쿤테르가 깜짝 놀란 눈으로 알마리온과 로엔달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런 쿤테르와 눈이 마주친 로엔달은 다른 이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랬군. 그래서 자작님께서 나보고 모른 체하라고 하셨던 것이군.’
막사를 나서기 전에 왜 자신에게 모른 체하라는 말을 남긴 것인지 이해가 된 쿤테르는 그의 부탁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였다.
‘한데 정말 대책 없는 자구나. 만약 이 자리에 자작님이나 내가 아닌 또 다른 익스퍼트나 마법사가 존재하였다면 단번에 익스퍼트가 아님을 알아차렸을 것인데도 무슨 생각으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도 있듯이 몰라서 한 행동이었겠지만 이처럼 터무니없는 행동으로 남을 속이려고 하고 있는 알마리온의 대책 없는 무모한 행동에 내심 혀를 차는 쿤테르였다.
‘하지만 저 나이에 중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중급 정령사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놀랍구나.’
마법사라 해서 정령술사의 능력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 땅에서 인간 정령술사가 모두 사라진 이후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하더라도 상대가 정령술사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보거나, 어느 정도 수준의 정령술사인지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마법사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쿤테르가 알마리온이 정령술사라는 것과, 그 수준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지금의 상황에 대해 일절 알은척을 하지 말라고 한 로엔달이란 존재 때문이었다.
“그럼 시작해 보게.”
“예, 자작님.”
시작하라는 갈리 자작의 말에 알마리온은 정해진 위치에 서서 준비된 표적을 절단하기 위해 자세를 취했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실라페가 알마리온의 뜻에 따르지 않은 채 엉뚱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 실라페! 왜 그러는 거야?’
-…….
이러한 일은 처음 경험하는 알마리온이었다.
정령이 소환자의 의뢰를 거절하는 경우는 소환된 정령의 능력을 벗어난 범위의 일을 의뢰하거나, 아니면 소환자의 마나가 충분치 못해 소환자의 의뢰를 수행할 경우 소환자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을 때뿐이었다. 그것도 소환한 정령이 최소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정령, 즉 중급 정령 이상일 경우에만 그러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모두 해당되지 않았기에 알마리온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뭐야? 왜 저러지?”
“혹시 저거 사기 아냐?”
잔뜩 기대를 하며 기다리던 이들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때 뜻밖의 사람이 알마리온에게 도움을 주었다. 바로 로엔달이었다.
“긴장했나 보군.”
“하긴 그렇기도 하겠구려.”
로엔달의 말에 갈리 또한 동조를 하고 나섰다.
“그대는 부담 갖지 말고 마음을 안정시키고 하도록 하게. 그리고 모두 조용하도록 하게.”
갈리가 이처럼 알마리온을 돕는 행동을 하는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갈리 자작 가문은 오래전부터 국왕에 대한 충정이 높은 가문으로 유명했다. 그 충성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갈리 자작 가문의 충성심에 탄복한 로엔 왕실이 그에 대한 보답을 어떻게 하였는지 알려 주는 한 일화가 있었다.
갈리 자작 가문의 영지인 갈리의 원래 지명은 로엔이었다. 바로 로엔 왕가가 탄생한 그곳으로, 로엔 왕실은 기꺼이 자신의 성과 똑같은 이름의 영지를 갈리 자작 가문의 영지로 내줄 만큼 갈리 자작 가문의 충절은 대단한 것이었다.
때문에 왕국에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귀족 파벌에 속하는 다른 가문들에 의해 가장 많은 견제를 당한 곳도 바로 갈리 자작 가문이었다.
지금도 연고가 없는 알마리온이 익스퍼트임이 확인된다면 그를 포섭하여 국왕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이처럼 알마리온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아! 미안. 내가 잠깐 딴짓을 했지?
‘무슨 일 있는 거야?’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나중에. 지금은 네 일이 더 급하지 않아?
‘알았어. 그럼 부탁해.’
실라페가 다시금 자신의 말을 들어 주기 시작하자 마음을 진정시킨 알마리온이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오!”
“저것이 마나 소드!”
마나 소드라는 것은 익스퍼트를 상징하는 상징물과도 같은 것으로, 무형의 마나가 유형의 검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쉭!
공기를 가르며 날카로운 소성이 잠시 들리는가 싶더니 참나무에 입혀 놓은 플레이트 메일의 가슴 부분이 선명하게 잘려 나갔다.
“아!”
“오오!”
그 모습에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지만 단 두 사람, 이미 알마리온이 익스퍼트가 아닌 정령술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로엔달과 쿤테르는 다른 이들처럼 탄성을 내뱉지는 않았다.
“하하, 어떻소?”
갈리 자작이 로엔달과 쿤테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로엔달은 왕국의 다섯 번째 익스퍼트였으며 쿤테르는 마법사로서, 이 두 사람이 인정을 한다면 알마리온은 더 이상의 검증 작업 없이도 익스퍼트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맞습니다. 저자는 익스퍼트가 맞습니다.”
“동의하오.”
“하하하하!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라니! 이와 같은 어려운 때에 새로운 익스퍼트가 탄생하였다니 왕국을 위해서도, 그리고 폐하를 위해서도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오! 하하. 안 그렇소, 로엔달 자작?”
“그렇습니다.”
“하면 이런 경사스러운 일을 한시라도 빨리 폐하께 알려야 하지 않겠소?”
“그 문제라면 전적으로 갈리 자작께 일임하겠소.”
어차피 12군단은 해체를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12군단 소속 병사들 또한 이미 그 소속이 12군단에서 6군단으로 변경된 상태였다. 따라서 더 이상 로엔달이 알마리온의 신병에 대해 간여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알겠소. 그럼 그렇게 하리다. 그리고 이런 경사를 그대로 보낼 수는 없는 일. 부관!”
“예, 자작님.”
“조촐하게 연회를 준비토록 하게. 아! 비용은 내가 낼 것이니 그렇게 처리토록 하고.”
“예, 자작님.”
“또한 정식은 아니지만 당분간 그댈 알마리온 경이라고 부르겠네.”
아직은 성이 없었기에 그저 이름 뒤에 기사임을 뜻하는 경이라는 호칭을 붙이겠다고 하는 갈리 자작이었다. 과거에도 이러한 전례가 있었기에 이를 두고 반대하거나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거기 두 사람은 알마리온 경과 친분이 있다고 했던가?”
“예? 예, 군단장님.”
“그럼 그대들 둘이 지금부터 알마리온 경의 시중을 들도록 하라.”
“예, 군당장님!”
알마리온의 시중만 들라는 갈리 자작의 명령에 신이 난 두 사람이 힘차게 대답하였다.
“그리고 파인 경은 알마리온 경에게 별도의 숙소와 필요한 물품들을 빠짐없이 챙겨 주도록 하게. 알겠나?”
“예, 군단장님.”
“자! 그럼 오늘 밤 본인이 주최하는 파티에 모두 참석해 주도록 하시오.”
일곱 번째 익스퍼트의 탄생으로 모두 흥분해 있었지만 갈리 자작은 어딘지 모르게 그들로부터 알마리온을 떼어 놓으려 하는 것처럼 자신이 마련할 조촐한 연회에 초대할 때까지 서둘러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도록 종용했다.
“경에게도 나중에 사람을 보낼 것이니 그때 보도록 하세나, 알마리온 경.”
“감사합니다, 자작님.”
“가시지요, 알마리온 경.”
“예.”
“그럼 이곳에서 쉬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대들 두 사람은 날 따라오도록 하라. 알마리온 경께서 필요하신 것들을 챙겨 줄 것이니.”
“예? 예, 기사님.”
“그럼 쉬십시오.”
자신을 안내한 기사가 끝까지 공경함을 잃지 않고 자신에게 예의를 표한 후 한센과 요들을 데리고 천막 밖으로 나가자 홀로 남은 알마리온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후!”
손을 펴 보니 손바닥에는 땀이 가득했다. 당당하게 행동하였지만 내심 긴장을 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그때 실라페가 왜 그랬던 것이지?”
특히 익스퍼트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시연을 펼치려 했을 때 실라페가 뭔가에 놀라 자신의 통제를 잠깐이나마 벗어났을 때에는 그야말로 식은땀이 등을 적실 정도로 흘러내렸다.
‘실라페.’
-왜 불러?
나타나자마자 심드렁히 툴툴거리는 실라페였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아까 그 일 말이야? 쳇! 사내 녀석이 쫀쫀하게 그런 것을 꼭 따져야겠냐? 흥!
‘아니, 난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설명할 인간이 오네. 그럼 난 이만!
‘실라페?’
제멋대로 정령계로 돌아가 버린 실라페의 행동에 어이없어졌다. 하나 그런 당혹감은 이내 감추어야만 했다. 실라페의 말처럼 누군가 자신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의 방문에 알마리온은 저도 모르게 노예 신분으로 살면서 몸에 밴 습관이 튀어나왔다. 그런 알마리온의 모습에 로엔달의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충! 군단…….”
“일어서라.”
미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로엔달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일어서라.”
“…….”
놀라고 당황한 알마리온이 멈칫거리며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이었다.
짝!
“큭!”
쿠당탕!
몸을 일으키다가 뺨을 얻어맞은 알마리온의 몸이 막사에 나뒹굴었다.
“……!”
갑자기 나타나서는 다짜고짜 뺨을 때리는 로엔달을 바라보는 알마리온의 눈빛에는 분노가 일렁거렸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참아야 해! 이제 와서 모든 것을 망칠 수는 없어. 하지만 내가 왜 당신에게 맞아야 하는 것인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일단은 끓어오르는 화를 내리누르기는 하였지만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을 경우 무슨 일이 있어도 가만있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알마리온이었다.
“경고하지. 두 번 다시 그따위 어설픈 행동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어설픈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의문이 담긴 눈으로 로엔달을 바라보았다.
“너의 그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정령술사들이 또다시 마법사들의 주목을 받게 만든다면 마법사가 아닌, 내 손에 먼저 죽을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그것을 어떻게?”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란 알마리온이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법사들에 의해 정령술사들이 이 땅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마리온은 알지 못했다. 아니, 알 수조차 없는 것이, 정령이라는 것 자체가 그저 동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 정도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알마리온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이렇듯 존재 자체도 부정당하고, 모두가 그것을 당연시할 정도로 정령에 관계된 모든 것을 철저하게 말살시켜 버린 것이 바로 마법사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정령술사에 대한 것이라면 눈에 불을 켜는 것이 바로 마법사들이었다. 물론 지금은 척결의 대상이기보다는 실험 대상으로서 정령술사에 대해 눈에 불을 켜는 것이 과거와는 다를 뿐이었다.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모르고 한 행동이라 해도 마법사 앞에서 버젓이 정령을 소환하여 눈속임을 하려 했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이 세상에 너 혼자만이 정령술사인 것으로 착각하지 마라.”
“……!”
연이은 충격적인 말에 알마리온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로엔달의 말에 왜 실라페가 갑자기 그렇게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그렇다면 이자도? 맞아. 어쩌면 이자도 나와 같은 정령술사였어. 그것도 나보다 더 뛰어난!’
아직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단번에 자신이 정령술사라는 것을 알아본 로엔달이 어쩌면 자신과 같은 정령술사가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이 세상에 나 말고도 또 다른 정령술사가 있다 이 말이지?’
자신과 똑같은 능력을 지닌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해지는 알마리온이었다.
“내 경고를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알겠나? 만약 그러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워낙 예상 밖의 인물이 자신을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뺨을 때리며 경고망동하지 말라며 엄중히 경고하자 당황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지만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자 자신이 당한 부당한 대우를 따지기 시작하였다.
“…….”
그런 알마리온의 모습에 로엔달은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잠시 알마리온을 바라보았다.
‘똑같군. 그날 날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과.’
알마리온의 눈빛에서 로엔달은 다시 한 번 옛 기억이 떠올랐다. 비록 명령에 의한 것이었지만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날.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일이 벌어질 그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 눈빛을 알마리온에게서 다시 볼 수 있었던 로엔달은 더욱 굳어진 목소리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이 땅에 정령술사가 사라진 것이 마법사들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
마법사에 의해서 정령술사들이 이 땅에서 사라졌다는 말이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알마리온이었다. 하나 로엔달은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았다.
“긴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어쨌든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지만, 함부로 네 능력을 드러내지 말도록 하라. 특히 마법사 앞에서는. 알겠나?”
“불가능합니다. 이유는 군단장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이제 막 익스퍼트로 인정받은 그는 앞으로도 많은 이들 앞에서 자신이 익스퍼트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어야 했다.
“이걸 받아라.”
철커덕!
마치 그 말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했듯이 곧바로 무엇인가를 꺼내 던지듯 건네주었다.
로엔달이 건네준 것은 투박한 모양이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한 쌍의 팔찌였다.
“무엇입니까?”
“정령의 고향이라는 마법 물품이다.”
로엔달이 건네준 마법 물품은 그 이름만을 보아서는 마치 정령술사를 위한 마법 물품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이 물건을 만든 장본인은 바로 인간의 몸으로는 유일하게 7서클의 벽을 깬 가론 폰 로드에릭 대제였다. 그리고 그가 이런 마법 물품을 만든 이유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주군이었던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와 가론 폰 로드에릭 대제는 한마을에서 태어나 함께 자라 온 친구였다. 그런 두 사람이 열 살이 된 어느 날 당대 최고의 정령술사와 마법사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두 사람의 운명은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각자의 스승을 따라 정령 마법과 마법을 수학하느라 40년을 떨어져 지내던 두 친구는 50의 나이가 되어서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들 두 사람의 재회는 우연이 아닌 사전에 이미 약속된 것이었다. 당대 최고의 정령술사와 마법사였던 스승을 둔 이들 두 사람은 스승이 남긴 유언에 따라 정령과 마법 중 어느 쪽이 더 강한지를 결론짓기 위해 40년이란 시간을 격하고 재회하였던 것이다.
어린 시절 함께 산과 들을 뛰어다녔던 친구를 다시 만난 기쁨에 잠시 회포를 푼 이들 두 사람은 단순한 승부보다는 이왕이면 내기를 걸자는 로드에릭의 제안에 따라 승자가 패자의 주군이 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실상 로드에릭은 어려서부터 친구였지만 모든 면에서 자신을 앞선 알마리온에게 내심 질투심을 가졌는데 이번 승부를 계기로 그를 자신의 수하로 만들어 어렸을 때 가졌던 질투심을 털어 버릴 심산이었다.
하나 결과는 그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났다. 스승조차도 오르지 못했던 7서클 벽을 깬 로드에릭이었지만, 40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인 알마리온 또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최상급 정령들을 소환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결국 내기에서 패한 로드에릭은 약속대로 친구인 알마리온의 수하가 되었고, 친구이자 수하가 된 로드에릭의 설득에 알마리온은 대륙에 산재해 있는 모든 나라를 정복하며 대제국을 건국하였다.
폴랑 대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을 일통한 대제국의 이름이었다.
이처럼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반면, 다른 한 친구는 모든 것을 가진 친구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 2인자의 삶을 살아가야 했다는 것은 다가올 불행의 시작이었다. 아니, 이처럼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는 두 사람이 동시대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부터가 불행의 시작이었다.
어려서부터 단 한 번도 친구인 알마리온을 뛰어넘지 못한 것에 대해 강한 질투심을 가져 왔던 로드에릭은 자신이 친구인 알마리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죽이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마법 지식과 실험을 통해 10년 동안 연구를 한 끝에 한 가지 마법 물품을 만들어 냈는데, 그것이 바로 정령의 고향이라는 것이었다.
정령의 고향은 정령술사에 의해 소환된 정령을 강제로 마법 물품 안에 봉인할 수 있는 강력한 소환 마법진이 인챈트되어 있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알마리온이 소환한 최상급 정령들이 모두 봉인되어 버리자 무기력해진 알마리온은 결국 친구인 로드에릭에 의해 제거되었다.
가론 폰 로드에릭에 의해 만들어진, 정령술사에게는 치명적인 무기인 정령의 고향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경로로 로엔 왕국의 왕가에 전해졌는지 알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 시동으로 왕궁에서 생활하던 로엔달이 우연히 왕실 창고에서 뽀얗게 먼지가 쌓인 오래된 상자에 담겨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그것을 발견하였고, 이후 그의 삶은 일대 변화를 겪었다.
이전까지 로엔달은 자신이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높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런 그가 팔찌에 새겨진 간단한 마나 수련법을 수련하게 되면서 지금은 바람의 상급 정령인 실라이론을 소환할 수 있는 상급 정령술사로까지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을 차고 있으면 정령을 소환할 필요도 없이 그에 상응하는 힘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령을 소환할 수도 있다. 그것도 마법사가 전혀 알 수 없이.”
애초 이런 의도까지는 없었지만 로드에릭이 만든 정령의 고향이라는 마법 물품은 그에게 또 다른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바로 봉인된 정령의 힘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전혀 없던 그가 말이다.
비록 마법 물품에 봉인되었긴 하지만 그 안에 봉인된 정령들은 여전히 소환 상태 그대로였다. 따라서 마법 물품을 가지고 있는 자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그 능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렇게 해서 사용되는 정령 마법은 특이하게도 마법사조차 그 징후를 전혀 느낄 수 없었는데 이 또한 애초에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의외의 결과였다.
“이런 귀한 것을 왜 제게 주시는 것입니까?”
“네가 정령술사라는 것이 밝혀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조금 전 말씀하신, 마법사들에 의해 정령술사들이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 네가 정령술사임이 밝혀진다면 마법사들은 과거에 그랬듯이 또다시 정령술사란 존재를 모두 제거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억측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기에는 로엔달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기에 도저히 그러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것도 받아라.”
이번에 건넨 것은 단 몇 장뿐인 책이었다.
“마나 수련법이다.”
“……!”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왜 제게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 것입니까?”
“훗!”
알마리온의 질문에 로엔달은 차가운 비웃음을 지었다.
“아니라는 것입니까?”
재차 물었지만 로엔달은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는 무표정과 무심한 눈빛으로 한동안 알마리온을 바라본 후 몸을 돌려 그대로 막사를 나가 버렸다.
그런 로엔달의 뒷모습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알마리온이었다. 그는 지금도 로엔달이 왜 이런 호의를 자신에게 베푼 것인지 전혀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아!”
“역시 옷이 날개라더니, 널 보면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연회에 나가기 위해 갈리 자작의 배려로 그가 준비해 준 몇 벌의 옷들 중 하나를 착용한 알마리온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뽐내고 있었다.
알마리온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쯤 넋을 잃고 살펴보던 요들이 팔에 착용하고 있는 투박한 형태의 팔찌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야! 한데 그 팔찌 어디서 난 거냐?”
“아! 이거? 누가 줬어.”
“누가?”
“그냥 아는 사람이 줬어.”
“아는 사람?”
“그래.”
더 이상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서운했는지 잠시 알마리온을 째려보던 요들이 삐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 말이야, 안 어울린다. 차라리 빼 버려라.”
확실히 지금 알마리온이 입고 있는 복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팔찌였다.
“확실히 내 눈에도 그건 아니다 싶구나.”
“그래요? 그럼 옷 속으로 넣어야겠네요.”
“차라리 빼지 그래?”
“그게 말이죠…….”
한센과 요들이 옷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차고 있던 팔찌를 빼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하자 난처한 표정이 되어 우물쭈물하는 알마리온이었다.
“왜 그래?”
“그게 말이야, 이걸 어떻게 빼는 것인지 도통…….”
“안 빠져? 왜?”
“모르겠어. 아까부터 빼려고 했는데 안 빠지더라고.”
호기심에 팔찌를 차 보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한번 채워진 팔찌는 도무지 뺄 수가 없었다.
“어디 손 내밀어 봐.”
빠지지 않는다는 알마리온의 말에 요들도 한센도 나서 보았지만, 두 사람 역시 아무리 힘을 써도 꿈쩍도 하지 않는 팔찌에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어 버렸다.
“뭐 이따위 것이 다 있어! 안 되겠다. 네 말대로 그거 소매 속에 넣어라.”
“그래. 참! 두 사람도 어서 옷 갈아입어요.”
“우린 왜?”
“함께 가야죠.”
“정말? 정말 나와 대장도 함께 가자고?”
함께 가자는 알마리온의 말에 한센과 요들은 놀라면서도 즐거워했다.
“당연한 것 아냐? 우리 세 사람이 어디 보통 인연이야? 두 사람이 내 곁을 떠나기 전까지는 결코 내가 두 사람 곁을 떠나는 일은 없다고요. 알겠죠?”
알마리온의 이러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를 두 사람이 아니었다.
아직은 정식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 아니지만, 전례로 보아 알마리온은 영지까지는 몰라도 분명 작위를 받게 될 것이다. 알마리온이 끝까지 함께하자는 것은 두 사람을 자신의 기사로 쓰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한센도, 요들도 기뻐하고 또한 고마워하는 것이었다.
“하하! 좋았어! 역시 알 너다!”
“훗! 고맙구나.”
“별말씀을요. 어서 준비하세요. 이러다 늦겠어요.”
“하하, 그래!”
한편 알마리온을 은밀히 만나고 돌아온 로엔달의 막사에는 쿤테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다녀오시는 것입니까?”
“그렇네.”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지금 상태로는 그가 정령술사라는 것이 이내 들통 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네.”
“마스터께서 무슨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까?”
“…….”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날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 한 가지는 정령술사인 것이 분명한 로엔달이었지만 로엔달과 친분이 깊었던 선친은 물론 자신을 포함한 그 어떤 마법사도 그가 정령술사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선친은 물론 자신도 그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 로엔달 몰래 연구를 거듭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 비밀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추측건대 로엔달이 수련한 마나 수련법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 아닌가 할 뿐이었다.
“그랜드마스터께 보고를 올렸네. 자네가 그를 데리고 궁에 다녀와야 할 것이네.”
“예, 알겠습니다.”
“그럼 그만 돌아가 보게.”
“예.”
갈리 자작이 주최하는 연회는 전장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많은 것을 준비하진 않았지만 나름 최선을 다한 그러한 것이었다. 물론 이런 연회를 처음 접하는 한센과 요들의 눈에는 이것만으로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연회를 끝내고 날을 넘겨서야 알마리온은 자신의 막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것이…….”
한센과 요들이 술에 취해 잠들 때까지 기다린 알마리온은 로엔달이 주고 간 마나 수련법이 적힌 얇은 책자를 꺼내 보았다.
그토록 원하던 마나 수련법이었지만 막상 그것이 눈앞에 있어도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솔직한 심정으로 그는 로엔달 자작이 주고 간 두 가지 물건 모두가 부담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자가 내게 선의로 다가온 것인지 악의로 다가온 것인지는 시간이 지나 보면 자연 알 수 있겠지.”
솔직히 로엔달 자작이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 선의를 가진 것인지 악의를 가진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알마리온은 로엔달 자작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로엔달 자작은 그가 속한 12군단의 군단장이었다. 12군단에 소속되어 있던 자라면 치가 떨릴 정도로 냉혹한 명령을 내리는 로엔달 자작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없었다.
심지어는 십수년을 군에 머물면서 많은 유형의 지휘관을 경험해 본 한센조차도 고개를 휘휘 내저을 정도였다.
아닌 게 아니라 노예 병사들과 도망자, 강제로 군에 끌려온 자들로 구성된 12군단으로 포넬의 정규군을 상대하여 그 정도로 선전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효율성을 강조하는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인 로엔달 자작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로엔달 자작이 자신을 직접 찾아와서는 정령의 고향이라는 마법 물품과 마나 수련법을 던져 주고 갔다.
“정말로 그 이유가 마법사들로부터 나와 같은 정령술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지만 역시 로엔달이 말한 이유는 어딘지 모르게 불충분해 보였다.
“언젠가는 그가 왜 내게 이런 호의를 베푼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마음에 남아 있는 껄끄러움을 완전히 털어 내 버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고민하지도 않기로 하였다.
언젠가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요구해 온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그가 자신에게 준 마나 수련법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차라리 불꽃같은 삶을 살리라. 결국 모두 타서 재만 남는 한이 있더라도!”
결심을 한 알마리온은 책자를 펼쳐 보았다.
“이게 뭐야?”
마나 수련법이라고 건네준 책을 단번에 읽어 본 알마리온은 그 내용의 황당함에 어이가 없었다.
“정말 마나 수련법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그가 이런 의심을 하는 것은 로엔달이 건네준 책자 안의 내용이 어떤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길고 긴 주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 로엔달이 건네준 마나 수련법은 엄밀히 말하면 마나 수련법이 전혀 아니었다. 그것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마법 주문이었다.
가론 폰 로드에릭 대제는 자신이 만든 정령의 고향이라는 마법 물품이 의도하지 않았던 효과를 보이자 그에 착안하여 한 가지 마법 아닌 마법을 만들어 낸다.
바로 정령의 고향 안에 강제로 봉인된 최상급 정령들의 힘을 강제로 흡수하는 마법이었다.
로드에릭에게는 남아 있는 한 가지 꿈이 있었다. 바로 ‘신의 대리자’라는 드래곤처럼 궁극의 마법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주변을 먼저 정리해야만 했다. 온전히 마법을 연구하고 수련하는 것만으로도 그 가능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을 이런저런 일에 시간과 정열, 마음이 빼앗긴 상태에서 꿈꾼다는 것은 말 그대로 허황된 꿈이나 꾸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들 또한 충분하였고 재능 또한 뛰어났다. 그러했기에 안심하고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주변 정리를 거의 마칠 무렵, 로드에릭은 자신의 대를 이어 제위帝位에 오를 장자인 바이테른에게 손목에 차고 있던 한 쌍의 정령의 고향을 건네준다.
아무래도 자신이 건국하였고, 또한 자신의 혈통들이 대대로 제위에 올라 제국을 다스리려면 그만큼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설사 그것이 마법의 힘이 아닌 또 다른 힘, 바로 자신에 의해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린 정령의 힘이라 해도 말이다.
정령의 고향을 건네받은 바이테른은 호승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 대상이 설사 자신의 형제는 물론 아버지라 하더라도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이가 존재하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는 로드에릭의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하였다.
아버지로부터 정령의 고향을 건네받은 바이테른은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이자 주군이었던 알마리온 폰 폴랑 대제 사이에 있었던 최후의 결투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를 말이다.
즉, 자신이 아버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정령의 고향 안에 강제로 봉인된 물과 불, 바람과 대지의 최상급 정령들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밖에 없다는 섣부른 결론을 내리고는 이내 수련에 들어간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아버지를 능가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린 바이테른은 곧바로 정령의 고향을 착용하고 마법 주문으로 정령들의 힘을 받아들였다. 하나 그것은 이내 파멸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통제하지 못한 정령의 힘들로 인해 바이테른의 마나 홀이 그만 파괴되어 버렸고, 마나 홀이 파괴되자 어찌 손을 써 볼 틈도 없이 바이테른의 몸이 폭죽 터지듯 터져 버린 것이다.
가장 신뢰하고 아끼던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靑天霹靂과도 같았다.
로드에릭은 아들의 처참한 주검을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아들의 죽음이 자신이 건네준 정령의 고향이 원인이었음을 확인하고는 그것이 자신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자신의 친구이자 주군이었던 알마리온의 저주에 의한 것이라며 다시 한 번 이 땅에 마법과 마법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정령술사를 제거하라는 절대명령을 내린다.
물론 이러한 명령은 아들을 잃은 아비의 애절한 마음에서 온 화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이러한 명령으로 인해 세상에서는 다시 한 번 마녀사냥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마녀사냥에 의해 애꿎은 수많은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한편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아들을 잃은 슬픔이 조금 가시게 되자 로드에릭은 자신에게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 왜 아들에게서는 문제가 되어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는지 원인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원인을 찾게 된 것은 그가 3백 명이나 되는 마법사들을 실험 대상으로 희생시키고 난 이후였다.
자신에게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하지만 다른 마법사에게서는 정령의 힘과 마나 홀이 충돌하여 결국 폭사하게 만들었던 원인, 그것은 바로 자신과 이들의 차이점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로드에릭의 스승인 제로니모는 6서클 마법사이기도 하였지만 모사렌족이라는 부족의 대제사장이기도 하였다.
그런 제로니모의 제자가 된 로드에릭 또한 스승인 제로니모로부터 단지 마법에 대해서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또한 혈통은 달랐지만 스승에 의해 모사렌족의 대제사장, 그러니까 쉽게 말해 주술까지도 배웠던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는 가능했던 일을, 다른 사람은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령 마법과 마법은 그 뿌리가 주술에 있었다. 정령술사들의 경우에는 정령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다루는 자들이었기에 역시 자신들의 뿌리인 주술, 즉 초자연적인 현상을 조작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비록 마법이라는 것 자체가 주술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여도 초자연적인 부분을 연구하여 일정한 규칙과 법칙을 만들어 낸 학문답게 모든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마법사들이 초월적인 존재인 신을 부정하는 이유 또한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로드에릭에게는 가능했던 일이 다른 마법사들에게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마법사로부터 신적인 존재처럼 받들리고 있는 자신이 주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자신이 만든 정령의 고향을 사장시키는 것이 이래저래 간단한 해결책이었고, 그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자신이 만든 마법 물품인 정령의 고향을 사장시켜 버린 것이다.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마나 수련법에 알마리온은 잠시 갈등했다. 하나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해 보는 거야. 그가 날 죽이거나 해를 가하기 위해 이러한 것을 주었을 리가 없다.”
결정을 내린 알마리온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자세를 바로 하고 두 눈을 감은 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암기했던 주문을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마치 주문과도 같은 마나 수련법을 몇 차례 연거푸 실행했을 때만도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내심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기에 몇 차례 반복해서 실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변화도 느껴지지 않게 되자 실망감과 함께 다시금 자신이 속은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스멀스멀 커지기도 하였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아니겠어? 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데 계속해서 수련이나 해 보자.”
그토록 원하였던 마나 수련법을 손에 넣었다는 흥분감에 이미 잠은 저 멀리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그렇게 반복하여 마법 주문을 암송하고 또 암송하던 그가 자신의 몸에서 아주 미약하기는 하지만 어떤 변화가 일기 시작했음을 감지한 것은 밤을 완전히 지새우고 어슴푸레 아침이 밝아 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런 것이었나?”
자신의 몸에서 일기 시작한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것을 감지한 알마리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특별한 마나 수련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급 정령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솔직히 운이 강하게 작용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그의 몸에 축적된 마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것으로, 그만큼 정순貞純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그와 정령 사이에 연결이 자주 끊어지는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곤 하였으며 마나의 소모량도 많았다.
“확실히 이전에 내 몸에 쌓여 있던 마나가 약간이긴 하지만 좀 더 깨끗해진 느낌이 든다. 마치 탁하였던 물이 깨끗해진 그런 느낌?”
조금은 깨끗해진 마나의 느낌은 그 자체만으로도 몸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덕분에 기분까지 좋아지게 만들었다. 마치 맑은 공기가 가득한 숲 속을 거닐 때의 그 기분처럼 말이다. 지금은 단지 그 정도의 느낌뿐, 이것이 과연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런 상쾌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어디야.”
문득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이처럼 상쾌하게 아침을 맞이한 기억이 없었던 것 같을 정도로 알마리온의 몸과 마음은 상쾌함으로 가득했다.
“좋아! 그럼 이 느낌, 이 기분 그대로 오늘 하루도 시작해 볼까?”
한껏 기분이 좋아진 알마리온은 아직 날도 완전히 밝아 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곁에 놓아둔 검을 집어 들고는 막사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