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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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유치한 신

지그문트 마이어가 돌아왔다.

당연히 레온하트 왕국에서는 성대한 환영식이 열렸다.

그 규모는 무려 건국제보다 컸고, 여러 유명 인사가 참여하는 것으로 화제가 됐다.

“나는 자네가 죽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네!”

“레드라인 후작님께서는 여전하시군요.”

“으하하! 이제는 공작이라네. 후작은 자네 아버지가 후작이지!”

지그문트는 요하네스 레드라인과 가볍게 술잔을 부딪쳤다.

그 말대로, 라스 마이어는 후작위에, 요하네스 레드라인은 공작위에 올랐다.

대전쟁에서의 활약을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다.

그러나 라스 마이어의 신분 상승은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남작위에서 단숨에 후작위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반발은 없었습니까?”

“감히 누가 하겠는가.”

지그문트는 뒤늦게 안 사실인데, 살인귀 글레엄을 벤 것이 라스라고 한다.

소드 마스터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그 공적까지 화려하니 반발이 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가문이라는 것만으로, 그에 반하는 가문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이런. 내가 유명 인사를 너무 붙잡고 있었군.”

요하네스 레드라인은 주변을 살폈다.

이번 연회에는 수많은 사람이 참석을 희망했는데, 그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인물만 모였다.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서대륙인이라면 이름 정도는 들어 봤을 법한 굵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모두 지그문트 마이어와 말 한 번이라도 붙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럼, 즐기게나.”

“감사합니다.”

“지그문트 공.”

요하네스가 물러서자마자 재빠르게 자리를 선점한 것은 루터 레온하트였다.

최근 왕세자 자리에 오른 루터였고, 레온하트에서 주최한 연회인 만큼 확실히 힘이 있었다.

요하네스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배려한 듯, 가벼운 안부만 주고받았다.

그렇게 연달아 지그문트를 찾은 인물들은, 모두 걸출하다고 할 수 있었다.

각국의 왕족은 물론, 성자 말론과 퀸틴의 의회장 룬달, 그리고 하이엘프 르네, 심지어 행방이 묘연했던 그랜드 소드 마스터, 요아힘 월베른까지.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그런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그들은 모두 지그문트와 친분이 있었으며,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가식적인 인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으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파울 레드라인은 끊었던 술이 눈에 아른거려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지그문트의 처신은 흠잡을 점 없이 완벽했고, 파서벌 레온하트의 표정은 아주 흡족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잠깐만 주목해 주시겠습니까?”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루터 레온하트가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한마디 하겠다고 나선 것이 이유였다.

단상으로 지그문트가 올라섰다.

뒤에는 단과 마리나, 리옐이 있었는데, 그 셋을 알아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귀찮으니까 뻔한 말은 생략하겠습니다.”

지그문트의 목소리가 조용한 장내를 채웠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언사였지만, 지그문트의 성격을 아는 대부분은 그러려니 넘어갔다.

사소한 실수 정도는 너그럽게 넘어가고도 남을 만한 업적을 세웠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지그문트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지그문트는 아주 담담하게 선언했다.

“저, 은퇴하겠습니다.”

말 한마디에, 연회장이 발칵 뒤집혔다.

* * *

“정말 이렇게 물러서실 생각이십니까?”

“이게 맞아.”

나는 레온하트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거절했고, 공적인 일로 움직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원래 레온하트 왕국은 트리옌이나 웨스트리아에 비해 크기가 작은 약소국에 속했다.

그러나 지금은 두 명의 소드 마스터와 한 명의 마탑주까지 둔 강대국이었다.

연합군의 중축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모든 국가와 우호적 관계를 구축한 상태였다.

거기에 내 존재까지 더하면, 더없이 위력적인 열강이 탄생한다.

“또 하나의 제국이 나오는 꼴은 보고 싶지 않거든.”

“난 아빠랑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어서 좋아!”

“대련 시간이 늘겠군요.”

리옐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우리는 네르갈의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이목을 끌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면이 이목을 끌 수도 있었지만, 지금 네르갈의 모든 사람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내게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라고 하는데, 시몬 밀러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그 덕분에 나도 편하게 환영식을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그냥 뭐 재밌는 거 없나 돌아다니는 거지.”

대규모 축제인 만큼 관광객도 상당했고, 유흥거리도 준비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팔씨름 대회 같은 것이 있었다.

한 거한이 앉아 있었는데, 팔뚝이 마른 사람 몸통만 했다.

“자! 다른 도전자는 없습니까!”

“오호.”

그 옆에는 호기롭게 나섰던 수많은 장정이 쓰러져 있었다.

연승을 이어 나가고 있었는데, 상금이 상당히 누적되는 상태였다.

“단, 저거 해 봐라.”

“재밌겠군요.”

“오?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났습니다!”

구경꾼만 가득할 뿐 아무도 도전을 못 하고 있었는데, 단이 나섰다.

거한은 씩 웃으며 앉으라고 턱짓했다.

단은 거한과 마주 앉아, 팔을 마주잡았다.

“파죽의 9연승을 깰 수 있을 것인가! 체급 차이가 많이 납니다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겁니다.”

“좋습니다! 준비하시고, 시작!”

순간적으로, 공기가 바뀌었다.

자신만만하게 힘을 줬던 거한의 표정이 굳었다.

단이 순식간에 팔을 넘긴 것이었다.

쾅!

거한의 손등이 테이블을 내리쳤고, 사람들이 환호했다.

내 옆에 있어서 그렇지, 단도 상당한 괴물이었다.

“우와아아아아!”

“이건 대반전입니다! 도전자의 압승! 새로운 챔피언입니다!”

단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거한은 크게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단과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치고 패배를 인정했다.

“새로운 챔피언에 도전하실 분은 없으십니까! 없다면 상금은 모두 챔피언에게 돌아갑니다!”

이번에도 역시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9연승 중인 우락부락한 거한을 단숨에 꺾은 단에게는 어쩐지 위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회자가 도전자를 찾고 있을 무렵, 옆에 있던 여자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다음 도전자는 여성분이십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미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다.

팔뚝이 드러난 옷차림이었는데, 가느다란 편이라 솔직히 이길 것 같진 않았다.

꾸벅 인사한 여자는 단의 맞은편에 앉았다.

단은 난처한 듯 중얼거렸다.

“저, 이건 아무래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라셨죠? 전력을 다하세요.”

여자는 단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며 찡긋 윙크했다.

단은 어쩔 수 없이 여자와 손을 마주 잡고, 테이블에 팔꿈치를 단단히 고정했다.

“자, 준비하시고, 시작!”

단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반면 여자는 여유로운 듯 생글생글 웃으며 단을 보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봐주는 거냐!”

“아니, 이게.”

당황한 단이 깊게 호흡했다.

다른 손으로 테이블 끄트머리를 잡고, 어깨까지 써 가며 힘을 줬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을 정도로 힘을 가했으나, 여자의 손은 꿈쩍 할 생각을 안 했다.

여자가 가볍게 단의 팔을 쓰러트렸다.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테이블이 박살 났다.

장내가 잠깐 정적에 휩싸이더니, 아까보다 큰 환호성이 폭발했다.

“우와아아아아아!”

“테이블이 부서졌습니다! 이 무슨 괴력!”

단은 부딪친 손등을 붙잡은 채 쓰러졌다.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리옐과 마리나가 다급히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새로운 테이블이 준비됐고, 여자는 내게 손을 까딱였다.

“거기 잘생겼을 것 같은 분. 저랑 겨뤄 보실래요?”

“새로운 챔피언의 지목! 응하시겠습니까?”

사회자는 은근히 나를 부추겼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앞으로 나섰다.

발치에 쓰러져 있던 단이 나지막이 말했다.

“도련님…… 그분, 상당히 강하십니다.”

“그렇겠지.”

나는 여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순간, 시간이 멈췄다.

여자는 싱긋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안녕, 죽음의 신님.”

“리에이트, 너 미쳤냐?”

단이 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 여성의 정체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었으니까.

리에이트는 모른 척 어깨를 으쓱였다.

“왜. 나도 좀 즐겨야지. 큰 개입도 아니고.”

“대전쟁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마계랑 천계도 난리가 아니었거든. 수습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렇긴 했겠지. 인정.”

리에이트라고 개입하기 싫어서 안 한 것은 아니다.

리에이트는 세계수처럼 서대륙을 끔찍이 아꼈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유희 때문에 내 부하를 저렇게 만들어? 드루와.”

“오, 자신 있나 보네.”

“쫄리면 뒤지시던가.”

“어쭈, 이게 이제 신 됐다고.”

“천하의 리에이트가 왜 이리 혓바닥이 길어. 후달리냐?”

“후달려? 허허허허. 오냐, 오늘 신끼리 서열 정리 한번 하고 가자.”

리에이트는 테이블에 신성력을 부여해, 부서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사회자가 짧게 규칙을 설명했다.

나는 가볍게 손목을 풀고, 허리를 약간 숙인 후 팔뚝을 테이블에 붙였다.

도발이 꽤 유효했는지, 내 팔을 마주 잡은 리에이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언니,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이거 먹어.”

“튀긴 옥수수? 좋아요. 단 님도 좀 드실래요?”

“패배자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리옐은 리에이트가 누군지 눈치챘는지, 재빨리 구경꾼에 합류했다.

네르갈 한구석에서 죽음의 신과 성신의 팔씨름이 성사됐다.

“준비하시고…….”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는지, 침을 꼴깍 삼킨 사회자는 나와 리에이트의 눈치를 살폈다.

리에이트는 상당히 진심이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시작!”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나와 리에이트는 전심전력을 담아 팔에 힘을 가했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폭발한 풍압에, 구경꾼들이 나가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살짝 떨어져 있던 서로의 손바닥이 부딪치며 바람이 터진 것이다.

“미친! 방금 뭐야?”

“팔씨름 수준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리에이트는 자신의 신성력을 물리력으로 전환해 행사했다.

좀 쉽게 말하자면, 어마어마하게 강했다.

하지만 나도 만만치는 않았다.

-지그문트 마이어! 이겨!

-응원!

신성과 죽음까지 나섰다.

마리나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팝콘을 입에 넣었다.

어느새 깨어난 단도 상황을 눈치채고 함께 팝콘을 먹었다.

“큭!”

예상과는 달리, 내 팔이 점점 테이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나는 아홉 개의 마나 서클을 회전시켰다.

마나 번(Mana Burn), 최대 출력.

이빨 사이로 푸른 안개가 새어 나왔다.

“후우!”

“너! 치사하게!”

조금 기울었던 팔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래도 리에이트의 팔은 넘어갈 생각을 안 했다.

땅이 움푹 파였고, 공기가 거세게 진동했다.

우득, 우득.

나와 리에이트의 팔뚝이 떨렸다.

거의 대등한 힘, 이대로라면 결판이 안 난다.

아니, 힘이 먼저 떨어지는 건 필시 내 쪽이다.

리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파이팅!”

“으랴아아!”

조금이라도 더 힘을 내기 위해서 기합까지 내질렀다.

과장 좀 보태서 나는 대전쟁 때보다 더 진심이었다.

어느 순간, 리에이트의 팔이 홱 꺾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일생일대의 승부가 났다.

다행히 테이블에 여러 가지 축복을 걸어 놔, 대폭발이 일어나는 참사는 면할 수 있었다.

잠시 침묵이 지나가고,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인 환호가 뒤따랐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에이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제 팔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전형적인 패배자의 대사군.”

“승부는 삼 세 판!”

“난 나보다 약한 녀석의 명령 따위는 듣지 않는다.”

“이익! 너 마법 썼잖아!”

나와 리에이트는 잠깐 티격태격 댔다.

단과 마리나는 쓴웃음을 지었고, 리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으휴. 유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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