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28/134)

10

종장

-미침!

과거, 신성은 지그문트의 등을 토닥이며 그를 말렸다.

반면, 지그문트는 아랑곳 않고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그것은 지그문트 마이어, 정확히는 신성이 성역에 보관해 뒀던 지그문트의 육신이었다.

-아, 제발. 가능하다니까?

-죽음에 자기 육체를 담금질하는 인간이 어딨음!

-여기!

죽음의 극복은 격의 상승에 일조한다.

이 편린에 가까운 진실을 통해, 지그문트는 발칙한 상상을 해냈다.

바로 죽음에 자신의 육체를 담금질하는 것이었다.

육체에 영혼은 없기에, 죽음이라는 개념이 유효하게 작용하진 않는다.

-그건 정신과 영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

-육체도 마찬가지일 거야. 인간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경이로운 능력을 발휘한다잖아.

-거기서 인간의 육체를 죽음의 경계에 담금질한다는 결론이 어떻게 나옴!

-제발. 나도 9서클 만들어야 할 거 아니야. 적이 적인데.

지그문트는 신성의 타박과 잔소리를 무시하고, 기어코 성역에서 육체를 빼냈다.

영혼 없는 육체는 잠든 것처럼 고요하게 눈을 감은 채, 질질 끌려 나왔다.

신성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있을 리 없는 두통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9서클은 어떻게 만들 거임?

-육체가 여기 있잖아.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으래서?

-가슴을 절개한 다음에, 심장에 마나를 불어넣어 유지되고 있는 서클을 강제로 회전시켜.

-벌써 미친 소리 같음.

-그다음에, 아홉 번째 서클을 심는 거지. 직접 보면서 하니까 안정적일 거야!

-미친 소리가 맞았음!

신성은 경악했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발상은 도를 지나칠 정도로 발칙했고, 대담했다.

육체 밖에서 자신의 육체를 수술해 아홉 번째 서클을 만들겠다니.

-미쳤음? 절대 안 됨!

-천재들은 항상 그런 오해를 사고, 적극적인 만류를 당하지.

-천재가 아니라 괴짜임!

-하지만 강행해야 비로소 위대한 업적이 이뤄지는 법.

-듣고 있음?

-그러기 위해선 네 협조가 필요해.

-바보!

* * *

“어떻게.”

라그힐의 경악 어린 목소리를 뒤로하고, 지그문트가 땅을 박찼다.

푸른 궤적과 함께, 순식간에 라그힐의 코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라그힐이 아니었다.

발레리아를 포위하고 있던 숲지기들이 지그문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쿵!

그리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짓눌려 무력화됐다.

드래곤 피어처럼 격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약자를 짓누른 것이다.

지그문트는 곧장 라그힐 팔베르크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흑!”

그대로 억눌린 라그힐이 뒤통수부터 바닥에 처박혔다.

지그문트는 인상을 찡그리고 뒤쪽을 살폈다.

요르문간드가 부러진 세계수를 옥죄어, 억지로 붙들고 있었다.

검은색의 신살이 세계수의 줄기를 타고 요르문간드의 비늘 위로 스멀거리며 올라갔다.

시간이 없다.

푸확!

라그힐의 가슴팍을 밟고 선 지그문트가 아공간에서 이름 없는 검을 뽑았다.

지그문트의 금색 눈동자에는 전과 달리 한 치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검 끝이 지체 없이 라그힐의 심장을 관통했다.

“쿨럭.”

라그힐은 울컥 피를 토해 내며 지그문트를 올려다봤다.

아우나가 담긴 검날을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심장에 꽂힌 검을 천천히 위로 뽑아낸다.

“저는 불사의 괴물과 같은 힘을 지닌 몸. 이 정도로는 죽지 않습니다.”

“그 불사의 괴물을 죽인 게 나다. 이 씹새야.”

지그문트가 발로 밟고 고정하고 있던 라그힐의 몸이 사라졌다.

라그힐은 적당히 거리가 벌어진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꿰뚫렸던 심장부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오너라.”

라그힐의 뒤로 나타난 것은, 십수 마리의 드래곤들.

드래곤들이 지그문트를 향해 입을 쩍 벌렸다.

목구멍에 화기가 모여들었다.

에인션트 드래곤 린시스도 버티지 못한 드래곤 브레스 세례.

지그문트가 검지와 중지를 까딱 위로 올렸다.

셧 업(Shut Up).

간단한 동작에, 라그힐의 강제력에 복종하던 드래곤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입 밖으로 뿜어 나오지 못한 화기는 입 안쪽에서 폭발했다.

펑! 펑! 펑!

입을 벌리지 못한 드래곤들의 입에서 브레스가 터졌다.

내부에서 큰 충격을 받았는지, 드래곤들이 모두 앞으로 쓰러졌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당황하지 않고 지그문트를 살폈다.

“후우.”

숨을 뱉어낸 지그문트가 앞으로 도약했다.

라그힐은 다급히 지그문트에게 멈추라는 듯 손을 뻗었다.

다른 이들에게 그러했듯, 고압적인 어조로 명령한다.

“멈춰라.”

“좆 까.”

지그문트는 라그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전과 같이 짓누름과 동시에, 풍경이 바뀌었다.

철썩!

라그힐은 등을 때리는 무언가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뒤집히며 보이는 것은, 텅 빈 하늘.

그리고 볼을 때리는 차가운 물방울의 감촉.

‘바다?’

지그문트는 라그힐 팔베르크와 함께 서대륙 동부 바다로 텔레포트했다.

불사의 괴물, 이그룬타의 약점은 물.

지그문트는 그대로 라그힐을 바다에 담갔다.

풍덩!

* * *

어두운 하늘은 금방이라도 폭우를 쏟아 낼 것 같았고, 바다는 성난 듯 낮게 울었다.

세계수가 부러짐에 따라, 기어코 흐름의 끝이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되돌릴 여지는 있었다.

요르문간드가 줄기를 붙잡고 있으니, 신살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다시 말해, 최대한 빠르게 라그힐 팔베르크를 죽여야 했다.

“스읍.”

숨을 들이쉬었고, 멈췄다.

동시에, 세계가 정지했다.

암초에 부딪쳐 부서진 물 알갱이가 허공에 고정됐다.

먹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낙뢰가 허공에 뿌리를 내렸다.

멈춘 세상에서, 아홉 개의 마나 서클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죽나 안 죽나, 한번 해 보자.”

그와 동시에, 고형물처럼 멈춰 있던 바다가 크게 출렁거렸다.

바다에서 무언가 솟아 올라왔다.

라그힐 팔베르크였다.

“쿨럭. 대공, 인사가 거치십니다.”

라그힐은 플라이(Fly)라도 사용하고 있는 듯 하늘에 떠 있었다.

그야 신위에 올랐으니 다리를 움직여 걸어 다닐 필요도 없었겠지.

아마 대사제의 협조를 받아 최초의 제단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됐다.

육체를 완전히 새롭게 구성해, 신성을 받아들이기 위한 껍데기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육체에 환생함으로, 신성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저는 대공을 다시 뵙게 돼서 진심으로 기쁜데, 대공께서는 그렇지 않으신가 보군요.”

물기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린 라그힐은 손가락을 튕겼다.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마법 같은 일이었으나, 기적에 조금 더 가까웠다.

디스펠이 아니라, 마법 자체를 없던 것으로 해 버린 것이다.

“입 털지 마라.”

나는 라그힐의 궤변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들어 줄 시간이 아까웠다.

손을 앞으로 뻗었다.

대마법사의 손(Archmage’s Hand).

마나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이 라그힐을 움켜쥐었다.

라그힐의 몸이 다시 한번 바다에 처박혔다.

콰앙!

물기둥이 솟아오름과 동시에, 그대로 대마법사의 손을 해제했다.

동시에, 바다에 잔류한 마나를 치환시켰다.

빙하기(Ice Age).

충격으로 솟아오른 물기둥은 그대로 얼음기둥이 됐다.

쩌어어어억!

무언가 쪼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다 전체가 얼어붙었다.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가며 입김이 새어 나왔다.

하얀 얼음덩어리 너머로 얼핏 라그힐의 몸이 보였다.

까득.

라그힐의 몸이 조금 움직였다.

곧바로 손을 허공에 내리쳤다.

신벌(Judgement).

신의 손바닥이 얼어붙은 바다 위로 내려앉았다.

신성력과 융화된 마나는 얼음을 압축하듯 단단히 짓눌렀다.

나는 라그힐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얼음 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완전한 붕괴(Perfect Disintegration).

불사의 괴물, 이그룬타의 재생력을 역이용해서 신체를 붕괴시키는 마법.

그 상위 호환에 해당하는 고유 마법이었다.

즉석에서 만든 것이지만 이그룬타의 신성을 지닌 라그힐이니만큼 유효하게 작용할 것이다.

연달아 사용한 마법에, 마나 번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푸른 숨이 새어 나왔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우득, 우득.

얼음 속에 갇힌 라그힐 팔베르크의 신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붕괴한 신체는 곧바로 얼어붙어 재생조차 하지 못했다.

신벌이 억누르고 있는 탓에 공간 이동도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이다.

영혼 부수기(Soul Break).

상대의 영혼을 완전히 부숴, 죽음에 이르지도 못하고 존재를 부수는 마법.

크기를 감안하면, 이그룬타의 신성을 부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라그힐 팔베르크의 영혼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위험!

다급한 신성의 목소리와 함께, 집중이 끊어졌다.

얼어붙은 바다에 가느다란 실선이 생겼다.

실선은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올라가며, 점점 두꺼워졌다.

이윽고, 얼어붙은 바다가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수천 개에 달하는 얼음 조각이 나를 향해 튀었다.

재빠르게 앞으로 날아든 여로가 방어막처럼 나를 감싸, 얼음 조각들을 막았다.

막이 내리듯 여로가 내게 돌아오자, 시야가 트이며 라그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환장하겠군.”

그 영혼은 신성에 의해 단단히 보호 받은 덕에 멀쩡했다.

붕괴와 재생을 반복해야 할 육체 또한, 완전히 붕괴시킨 뒤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보존했다.

매끄러운 피부에는 상처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9서클 마법에 신성 마법까지 때려 박았다.

말 그대로 나라 하나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힘이었으나, 흠집 하나 안 났다.

“역시 대공이십니다. 베르제 같은 것과는 차원이 다르군요.”

라그힐은 환희에 찬 얼굴이었다.

확실히 베르제는 전생의 나보다 강했다.

하지만 그것은 종족적인 차이와, 노화한 내 몸의 탓이 컸다.

마법적인 측면만 보면 내가 압도적으로 우월했으니.

“너 왜 안 죽냐?”

“신은 죽음으로부터 먼 존재라는 것을 알고 계실 텐데요.”

퀸틴에서, 나는 반신화함으로써 죽음의 눈 밖으로 벗어났다.

라그힐은 그 이야기를 정확히 콕 집어서 하고 있었다.

애초에 내 동선도, 행동도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건 대공께서도 마찬가지시겠지요. 불완전하지만, 신이기도 하니.”

라그힐 팔베르크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곳은, 내 코 앞.

텔레포트를 시도했으나, 라그힐은 한 박자 빠르게 내 손목을 붙잡았다,

우악스럽게 붙잡혀 돋아난 손목의 핏줄을 따라 검은 기운이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신이라고 안 죽는 것은 또 아니지요.”

신을 죽이는 힘, 신살(神殺).

검은 기운이 팔뚝에서 어깨를 타고 기어 들어왔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체크메이트입니다. 대공.”

* * *

신살은 빠른 속도로 내 몸을 잠식했다.

신격을 잃고 봉인 당한 이그룬타와 달리, 라그힐은 지금 내 앞에 있다.

신살이 퍼지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고, 걷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이름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아직 수를 제대로 못 보는구나. 라그힐.”

체스에 대입하자면, 지금 상황은 체크메이트가 아니라 체크가 맞다.

신살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 몸을 좀먹었고, 신성을 죽이려 하고 있었으나.

죽음으로 담금질된 몸은 쉬이 쓰러지지 않았고, 신성은 간단하게 죽지 않았다.

“죽기 전에 네 목을 따면 그만이거늘.”

세계수를 좀먹던 신살은 이그룬타의 죽음으로 하여금 사라졌다.

즉 내가 쓰러지기 전에, 세계수가 무너지기 전에.

내 모든 것을 동원해, 라그힐 팔베르크를 죽인다.

“글쎄요. 저는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데요.”

먼저 움직인 것은 라그힐이었다.

영혼을 도려내지 않는 한, 신살을 제거할 방법은 없다.

즉, 시간을 벌거나 버티기만 하면 라그힐이 이기는 싸움.

당연히 쉬운 길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도주를 위해 손목을 놓았다.

“어딜 튀려고.”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역으로 라그힐의 손목을 잡아챘다.

몸을 감싸고 있던 로브, 여로가 그 크기를 부풀리더니 벽처럼 원형으로 일대를 감쌌다.

개인 공간(Private Room)변환 마법, 콜로세움(Colosseum).

여로를 통해 공간 이동을 차단했다.

라그힐은 인상을 찡그렸다.

“운명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랬다면 내가 곱게 뒈졌겠지.”

이름 없는 검을 가로로 길게 휘둘렀다.

긴 선이 허공과 함께 라그힐 팔베르크의 목을 가로질렀다.

검에 담긴 아우나(Aunar)가 깔끔하게 라그힐의 목을 잘랐다.

산 자르기.

서걱!

라그힐은 기괴하게도, 양팔을 위로 뻗었다.

허공에 뜬 잘린 머리를 잡아다가, 목에 붙였다.

초고속에 가까운 속도로 머리와 몸이 도로 붙었다.

이그룬타와 같다고 했지만, 명백히 그것을 능가하는 재생 속도였다.

‘환장하겠네.’

그리무아르에 손을 올렸다.

가죽 표지가 달라붙듯이 손에 엉겨 붙었다.

순식간에 연결이 완료됐고, 라그힐을 향해 그리무아르를 펼쳤다.

식탐(Gluttony).

그리무아르를 가로로 회전시키고, 라그힐 팔베르크를 향했다.

순식간에 팽창한 그리무아르가 굶주린 괴물처럼 아가리를 벌렸다.

페이지 끝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달려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몬스터였다.

앞에 있는 라그힐 팔베르크와 함께, 공간 자체를 한 입에 집어삼키려 한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태연하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렇게 하는 거였군요.”

그리무아르가 라그힐을 집어삼키기 직전.

돌연 마나가 그리무아르의 아가리를 억지로 닫아 버렸다.

캉!

라그힐을 앞에 둔 그리무아르는 제압당한 짐승처럼 입을 도로 벌리려 했다.

압도적인 마나 흐름이 그리무아르의 아가리를 위아래로 억눌렀다.

내가 사용했던 고유 마법, 셧 업(Shut Up).

“배움이 빠르구나.”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군요.”

마나 서클을 회전시키지 않고, 신성력으로 마나 자체를 조작해 버렸다.

마법 이론을 뒤흔들 법한 기괴한 방식이었지만, 어쨌든 마법을 사용한 건 확실했다.

술식에 따른 것이 아니라 디스펠(Dispell)도 불가능했다.

“쯧.”

어쩔 수 없이 그리무아르를 회수했다.

검도, 마법도, 아티팩트도 통하지 않았다.

라그힐 팔베르크가 손을 꽉 움켜쥐었다.

내 몸 속으로 들어온 신살을 가속시킨 것이다.

“큭.”

신살이 처음 흘러 들어온 오른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두근.

처음으로 들린 것은, 세차게 심장이 뛰는 소리.

그 주위를 맹렬하게 회전하는 아홉 개의 마나 서클과, 혈관을 따라 흐르는 피의 소리였다.

감각이 예민해지며, 살갗에 닿는 공기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윽고 보인 것은, 손목에서 어깻죽지를 타고 심장 쪽으로 내려가는 신살의 기운이었다.

‘너는 뭐냐.’

오러, 마나, 그리고 신성력까지.

나는 세 힘을 모두 지니고 있었기에, 신성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시에 세 힘을 모두 지니고 있었기에, 어떤 종류의 힘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신살은 신성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지닌 환형동물처럼 꾸물거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키이이잉.

아홉 개의 마나 서클이 회전했다.

막대한 양의 마나가 가슴께로 움직여, 신살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신살은 형체가 없기라도 한 듯, 두꺼운 마나 속으로 파고들더니 관통했다.

속도가 조금 줄어들긴 했으나, 저항은 거의 없는 것만 못했다.

이어서 단전 부근에서 오러를 끌어 올렸다.

쩌엉!

불과 같은 기운이 세차게 치솟으며, 신살을 막아섰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신살은 불길을 무시하며 아래로 뿌리를 내렸다.

신을 죽이는 힘은 멈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신성.

-부름?

-우린 일심동체라고 그랬지?

-맞음.

신성이 없다면 오러와 마나가 충돌하며, 나는 폭사한다.

내가 없다면 주인을 잃은 신성은 흩어져 서대륙의 일부가 된다.

애초에 신성은 내 힘인 만큼, 지켜야만 했다.

-오빠 믿지?

-미침?

신성은 질색했으나, 괜히 일심동체가 아니었다.

내가 했던 말이 괜한 농담이라는 것과, 내 생각 정도는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신성은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

나는 오러와 마나를 풀었다.

급류를 틀어막고 있던 둑이 무너진 듯, 신살이 순식간에 신성을 꿰뚫었다.

그렇게 나는 세 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 * *

지그문트 마이어의 몸이 허물어졌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신살은 확실히 신성을 꿰뚫었고, 지그문트의 숨은 끊어졌다.

‘죽어도 다시 살아 돌아오시는 분이긴 하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라그힐에게 필요했던 것은 시간이었다.

세계수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땅에 사는 신의 신성을 찬탈할 시간.

이 흐름을 뒤집을 수 있었던 유일한 변수가 지금, 죽음을 맞이했다.

라그힐은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하며 잠깐의 만족감을 만끽했다.

“금방 돌아와서, 마무리 해드리겠습니다. 대공.”

라그힐은 얼음 위에 쓰러진 지그문트를 두고, 공간을 바꿨다.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태초의 숲이었다.

세계수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린시스나 요아힘 월베른, 발레리아 로안처럼 범접할 수도 없었던 강자들.

요정족과 인어가 뒤섞여 있는 연합군의 군세와, 세 명의 소드 마스터.

지그문트 마이어의 종자인 단 록벨런과 마리나, 신의 대리인 둘.

그리고 세계수의 후계자인 리옐.

“유감스럽군요.”

아주 옅은 희망이 얼핏 보이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웠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패인은, 그가 신성을 지니고 있는 반신이었다는 것.

라그힐이 이그룬타에게서 찬탈한 신살의 힘은 신에게 상당히 유효했다.

지그문트는 신이 아니었으나, 신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였으니.

쿵.

라그힐의 신성력이 태초의 숲 일대를 짓눌렀다.

연합군 병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모든 것의 위에 섰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불안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요아힘 월베른과 델 로안은 터지지 않는 폭탄이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대공의 말씀이 옳았군.’

델 로안은 언젠가 지나가듯 말했다.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있을 땐, 힘이 부족한 게 아닐까 생각해 봐라.

라그힐 팔베르크는 절대적인 힘을 지니게 됐고, 비로소 안정을 느꼈다.

‘비록 아직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으나.’

다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니었다.

국가급 전력들은 강제력에도 꼿꼿이 서서 라그힐을 직시하고 있었다.

단을 비롯해서 의지가 강한 몇몇 인물도 후들거리는 무릎을 억지로 잡고 섰다.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제 곧, 생각이 바뀌겠지.’

버티고 선 자들은 라그힐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엄청난 압박감에 짓눌려 멈출 수밖에 없었다.

라그힐은 그들을 여태껏 죽이지 못해서 안 죽인 게 아니었다.

“비켜라. 뱀.”

요르문간드는 제 꼬리에 이빨을 박아 넣고, 단단히 세계수를 옥죄고 있었다.

덕분에 세계수는 쓰러지지 않았으나, 요르문간드의 몸은 신살에 잠식당한 후였다.

검게 죽은피가 이빨을 박은 상처 부분에서 뚝뚝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요르문간드는 라그힐의 강제력을 무시하고 버텼다.

물고 있는 꼬리를 놓는 순간, 흐름이 끝날 것을 알기에.

“말이 들리지 않나 보군.”

라그힐은 요르문간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신성력이 형체를 이루더니, 거대한 팔이 요르문간드의 목을 움켜쥐었다.

지그문트가 사용했던 마법, 대마법사의 손(Archmage’s Hand)과 비슷한 모양새.

손이 요르문간드를 세계수에게서 억지로 잡아 뜯었다.

목 부분이 찢어진 요르문간드가 황폐화된 태초의 숲 구석에 떨어졌다.

쿠웅.

세계수의 줄기는 이미 신살로 검게 물든 상태였다.

푸른 잎사귀는 다 시들어 떨어졌고, 겨우 형체만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덕택에 서대륙이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나오시지요.

라그힐의 부름에, 세계수의 가지들이 흔들렸다.

이윽고, 라그힐의 눈앞에 세계수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서대륙에 상당한 힘을 할애한 탓에, 퀸틴 때처럼 어린 모습이었다.

싱그러운 빛을 머금고 있던 머리카락은 검고 탁하게 물들어 있었다.

-발칙하구나. 언제부터 인간이 신을 멋대로 부를 수 있었지?

-이제는 신위에 올랐으니, 같은 신으로 대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만들어진 신을 두고 같은 신으로 대우해 달라니, 어이가 없구나.

세계수는 라그힐을 따갑게 쏘아붙였으나, 그 안색은 좋지 못했다.

반면 라그힐은 여유로웠다.

신살은 세계수를 잠식했고, 제 손에 세계수의 생명줄이 있었다.

오러와 마나를 동원해서 버티던 지그문트와는 다르다.

서대륙에 힘을 쏟고 있는 세계수는 조금만 힘을 가해도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여유로운 척이라니, 꼴사납군요.

-같잖은 도발이로구나. 불러낸 이유나 말하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십니까?

-고작 그거 물어보려고 불렀니?

-네. 그렇습니다. 혹시 무릎을 꿇는다면, 살려 줄까 하여.

라그힐은 입장상 세계수의 우위에 있었다.

그의 마음에 따라, 세계수가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세계수가 죽지 않는다면, 서대륙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라그힐은 당연히 세계수가 자신의 비위를 맞출 거라고 생각했다.

세계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견을 들어 보고 싶은 사항은 있구나.

-질문입니까? 해 보시지요.

-혹시 이런 생각 안 해봤니?

-무슨 생각이요?

-세 번쯤 죽으면, 죽음이랑 친해지지 않을까?

라그힐은 세계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신이 된 후로, 처음 느껴지는 전율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이 찢어지고 있었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두 눈을 치떴다.

찢어진 하늘 너머로 보이는 것은 칠흑이 들어찬 공간.

하늘에서 거꾸로 새싹이 움트듯이, 거대한 팔이 튀어나왔다.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한기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죽음?’

죽음의 가운데에서, 누군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본능적으로 그가 누군지를 알 수 있었다.

라그힐 팔베르크를 향해 똑바로 떨어지고 있는 것은, 지그문트 마이어.

“라그힐 팔베르크!”

지그문트 마이어는 이름 없는 검을 쥐고 있었다.

강하게 움켜쥔 손을 따라, 아우나(Aunar)가 검날을 감쌌다.

황금색의 검이 허공을 찢었다.

그것은 한 줄기의 뇌전이었다.

‘위험하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직감했다.

지금이 바로 마지막 갈림길이라는 것을.

어떻게 된 건지 지그문트 마이어는 완전한 신격을 지니고 있었다.

한없이 신에 가까운 인간이 아닌, 신을 죽이고자 하는 신의 전심전력.

아무리 신위에 오른 라그힐일지라도 무사할 수 없는, 신의 일격이었다.

‘피해야.’

공간을 이동하려는 순간, 발을 타고 올라온 무언가 발목을 붙잡았다.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보인 것은 나무뿌리.

땅 밑으로 이루어진 뿌리 끝에는, 단의 부축을 받아 일어선 마리나가 있었다.

“감히!”

너무도 조잡한 방해물이었다.

라그힐은 아래로 손을 뻗어 뿌리를 제거하려 했다.

동시에, 뿌리를 타고 검은 기운이 꾸물거리며 올라왔다.

그리고 돌연 나무뿌리가 라그힐의 발목과 하나로 일체화됐다.

“할머니!”

고위 저주.

어디선가 나타난 벨수스가 마녀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마녀는 마리나의 등에 손을 얹고, 저주의 주문을 중얼거리며 외웠다.

이어서 움직인 것은 발레리아 로안이었다.

“크라우드 컨트롤(Crowd Control)!”

크라우드 컨트롤은 공간 이동을 방해하는 마법이었다.

물론 라그힐의 공간 이동은 마법을 통한 공간 이동이 아니었기에, 상대적으로 제한을 덜 받는다.

그러나 라그힐을 막아선 것은 발레리아 로안 혼자가 아니었다.

드래곤들이 발레리아를 따라 크라우드 컨트롤을 사용했다.

마법사들과 엘프들은 마나 링크(Mana Link)를 통해 이들을 도왔다.

“벌레 같은 것들이!”

생명의 위기가 다가오면, 인간은 초월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했던가.

라그힐 팔베르크는 반사적으로 신성을 일으켰다.

뜨거운 열기가 몰아치며, 신성력이 지그문트와 라그힐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콰아아아아아앙!

지그문트의 검 끝과, 신성력의 장벽이 부딪쳤다.

굉음과 함께, 신성 폭발 때처럼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지그문트 마이어의 낙하는 멈춘 상태였다.

이름 없는 검은 장벽을 뚫지 못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으나.

쿠구구구구구……!

돌연 하늘에서 반쯤 몸을 내민 죽음이, 지그문트 마이어를 감쌌다.

모든 것의 생명을 앗아가는 손은 아이의 등을 밀어주듯이, 지그문트의 등을 밀어줬다.

하늘이 무너져도 뚫리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장벽에, 거대한 금이 갔다.

꽈드득!

모든 힘을 끌어모아 만든 아우나(Aunar)가 신성력 장벽을 꿰뚫었다.

얼음벽이 부서지듯, 신성력 장벽의 조각들이 깨지며 쏟아져 내렸다.

일순간, 지그문트 마이어와 라그힐 팔베르크의 시선이 마주쳤다.

라그힐의 눈동자와 반대로, 지그문트의 눈동자에는 미세한 흔들림도 없었다.

라그힐의 판단은 빨랐다.

‘세계수를!’

천천히 세계수를 잠식하던 신살이 급속도로 세계수를 집어삼켰다.

두꺼운 줄기가 조금씩 말라비틀어지며, 거대한 기둥이 기울였다.

어서 세계수를 죽이고 신성을 갈취해야만 했다.

그런데, 돌연 신살의 속도가 늦춰졌다.

라그힐이 인상을 찡그렸다.

‘후계자?’

기절했을 터인 세계수의 후계자.

리옐이 가까스로 세계수의 줄기에 작은 손을 올렸다.

오직 세계수를 죽이고자 하던 신살이, 돌연 방향을 틀었다.

신성을 지닌 리옐의 접촉에 의해, 신살의 목표를 둘로 나눈 것이다.

신살은 세계수와 리옐의 신성을 모두 집어삼키고자, 양쪽으로 갈라졌다.

리옐의 손을 타고 신살이 흘러 들어왔다.

리옐이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벌었던 시간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푸확!

지그문트의 검이 라그힐의 심장, 그 너머에 있던 신성에 닿았다.

오로지 만들어진 신을, 라그힐 팔베르크를 죽이기 위한 일격.

신 죽이기.

쩌억!

라그힐의 신성이, 반으로 갈라졌다.

동시에 라그힐의 온몸에서 빛이 폭발했다.

전례 없을 정도로 거대한 굉음이 서대륙 전역을 뒤흔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앙!

신성이 폭발하며 일어난 충격에 일대가 쓸려 나갔다.

발레리아는 순간적으로 남은 마나를 죄다 긁어모아, 거대한 배리어를 구성했다.

기사들이 몸으로 마법사들을 보호했다.

동시에 드래곤 십수 마리가 달려들어 세계수가 쓰러지지 않도록 받쳤다.

힘의 폭발에 의해 온몸이 찢겨 나가면서도, 지그문트는 검을 놓지 않았다.

쿵! 쿵! 쿵!

온 힘을 끌어다 쓴 탓에, 머리가 터질 듯 울렸다.

몸 전체가 업화에 불타는 듯했고, 정신은 한계에 가까웠다.

지그문트는 이를 악물고, 이름 없는 검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그 등을 떠밀어 준 것은, 분명 죽음 하나가 아니라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라그힐 팔베르크의 몸에서 새어 나오던 옅은 빛이, 섬광을 터트리며 폭발했다.

“끄아아아아아악!”

끔찍한 단말마가 멀어지며, 빛기둥이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하늘에 드리웠던 먹구름이 원형으로 흩어졌다.

르네가 눈을 크게 떴다.

“위험……!”

신성이 죽으며 발생하는 현상, 초신성의 전조.

막대한 양의 힘이 폭발하면, 이 일대의 모두가 무사할 리 만무했다.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 쓰러지듯 내려왔다.

죽음이 양손으로 지그문트와 라그힐 팔베르크를 덮듯이 감쌌다.

가느다란 손가락 틈으로, 빛이 폭발했다.

쿠우우우우우우웅!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의 큰 소리와 함께 지축이 뒤흔들렸다.

죽음은 한동안 그것을 조심스레 감싸고 있었고, 이윽고 고요가 찾아왔다.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시선을 집중한 가운데, 죽음이 양손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누군가 안도라도 한 듯 짧은 목소리를 냈다.

“아.”

그곳에 서 있는 건 한 명.

이름 없는 검을 지팡이 삼아 선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선 채로 의식을 잃은 듯 보였지만, 그는 분명 살아 있었다.

검 끝에는 빛의 조각들이 부서져 있었고, 라그힐 팔베르크는 보이지 않았다.

갈라진 구름 사이로 드리운 햇빛이 지그문트를 비췄다.

“이겼다…….”

누군지 모를 사람의 중얼거림.

그것이 시발점이었는지, 연합군 전체가 소리를 내질렀다.

쩌렁쩌렁한 함성이 태초의 숲을 뒤흔들었다.

“이겼다아아아아아악!”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무기를 던지고, 서로를 얼싸안는다.

감정에 복받쳐 철퍼덕 주저앉거나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쟁취한 것은, 무엇보다 달콤한 승리와 삶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지그문트 마이어가 있었다.

“어?”

승리의 희열과 기쁨도 잠시.

돌연 연합군은 깨달았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신을 죽이기 위해 불러온 것을.

죽음의 입김에, 연합군들뿐만 아니라 일대에 모인 모든 존재가 오한을 느꼈다.

-걱정하지 마라.

원래와는 달리, 죽음의 말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조에서 얼핏 자애로움과 따뜻함이 묻어났기에, 사람들은 괴리감에 몸서리 쳤다.

죽음의 손이 부드럽게 지그문트의 몸을 붙잡았다.

선 채로 기절한 지그문트는 죽음의 손길을 거부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하나만 거두어 가면 충분하니.

-안 돼!

등을 돌려 돌아가려던 죽음을 멈춰 세운 것은, 어린 신.

라그힐의 죽음으로 신살에서 벗어난 리옐이었다.

죽음은 리옐을 가상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자진해서 한 계약이다.

-아빠를…… 돌려주세요.

리옐은 이미 떨어진 힘을 다 써서 죽음에게 의사를 전달했다.

간절한 울음기가 섞여, 잘게 떨리는 목소리.

그러나 죽음은 리옐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찢어진 공간 위로 올라갔다.

하늘 중간쯤에서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보고 중얼거렸다.

-돌려주마. 언젠가는.

그 말을 끝으로, 죽음은 경계 너머로 사라졌다.

모든 것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찢어진 공간은 닫혔다.

그렇게 지그문트 마이어는 사라졌다.

* * *

서대륙의 명운을 건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흘렀다.

세계수는 한동안 요르문간드를 붕대처럼 감은 채 천천히 회복했다.

상대적으로 불안정하던 서쪽에 세계수의 후계자, 리옐이 뿌리를 내린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혼자 서대륙을 지탱하던 세계수의 부담이 줄어들며, 회복에 사용할 여력이 생긴 것이다.

“으응.”

목오 사막 끝자락, 웨스트 던.

생명이 움튼 녹지 한가운데, 묘목에 기대 꾸벅꾸벅 졸던 리옐이 눈을 떴다.

근처에는 드라이어드와 엘프들이 식물을 보살피고 있었는데, 그사이에는 마리나도 있었다.

리옐은 비몽사몽 한 얼굴로 마리나에게 손을 뻗으며 보챘다.

“마리나 언니, 물 주세요.”

“네. 리옐 님.”

리옐은 성장하지 않았다.

묘목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발레리아가 복제한 델 로안의 시약 덕분이었다.

시약의 힘을 빌린 리옐은 서대륙에 잠깐 뿌리를 내려 세계수의 일을 돕고자 했다.

발레리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세계수도 말리지 않았다.

언젠가 리옐도 뿌리를 내려야 했기에 좋은 경험이 될 거라 판단한 것이다.

톡, 톡.

마리나는 묘목에 시약을 뿌렸다.

다행히 발레리아는 리옐이 시약을 소모하기 전, 그 성분을 대강 분석해 놓은 상태였다.

대마법사의 제자라는 천재성에 걸맞게, 린시스의 도움을 받아 금방 복제에 성공했다.

리옐을 포함한 몇몇은 세계수가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이곳에서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나 싶었어요.”

“많이 좋아졌어!”

룬달을 포함한 인어들이 웨스트 던에 물을 공급한 덕에 이런 녹지까지 형성할 수 있었다.

리옐을 돕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자원했고, 그 결과 서쪽은 빠르게 안정됐다.

대전쟁 때와 비교하면 수십, 수백 배 가까이 나아졌다고 한다.

말론이 리에이트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끝을 보이던 흐름도 제대로 이어졌다고 한다.

“저 왔습니다.”

“단 아저씨!”

멀리서 평범한 클레이모어를 짊어진 단 록벨런이 걸어왔다.

단은 방치됐던 웨스트 던 인근에 서식하는 몬스터를 틀어막고 있었다.

초기에 샌드 웜 몇 마리가 요정족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 자진해서 나선 것이다.

단의 실력은 탁월했고, 일대의 몬스터들은 금방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됐다.

“어서 오세요. 물 좀 드실래요?”

“부탁드립니다.”

단은 물을 받아 마시다 말고, 수통을 살폈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목오 사막에서 권했던 생명의 샘물.

그것이 들어 있던 것과 같은 수통이었다.

“연락은 없었습니까?”

“곧 정기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오늘따라 늦으시네요.”

셋은 노심초사하며 한 통신구를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신구가 깜빡거렸다.

다급히 마석을 연결하자, 두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이트 드래곤 린시스와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이었다.

“연결 제대로 된 거 맞습니까?”

“소리가 안 나요. 잠시만요. 레골라스 님?”

발레리아는 흥분한 듯 뭐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법사가 없던 탓에 마석을 사용했는데,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은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나가 레골라스를 불러왔다.

레골라스는 금방 통신구를 마석과 제대로 연결시켰다.

그제야 발레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이판사판이다, 리에이트 님을 찾아갔고, 어떻게든 답변을 들었어요.

죽음이 지그문트를 데려간 이후로, 발레리아는 이토록 흥분하는 일이 없었다.

줄곧 린시스와 함께 지그문트를 찾아다녔으나 성과를 내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데, 드물게도 발레리아는 희망적인 어조를 보였다.

린시스가 말을 받았다.

-요점은, 찾았다는 거다. 지그문트 마이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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