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악마들의 행진
팔베르크 제국 동부.
제국군 잔존 병력을 이끈 기사는 낡은 성에 몸을 숨겼다.
오래 전 버려진 영지였는데, 성은 거의 반파되어 있었다.
건물로써의 기능은 어느 정도 했기에, 임시 거처로 사용할 수는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아무래도 동부를 장악 당한 것 같다. 일단 여기에 머무는 수밖에.”
“렘센으로 후퇴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전장을 이탈할 셈이냐.”
“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상부와 연결된 통신구는 먹통이었다.
상당한 병력을 이끌고 올라온 연합군과 조우하기 일쑤여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에 언제까지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근처에 큰 숲이 있었기에 식량을 조달할 수는 있었지만.
이렇게 버티는 것도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명예로운 팔베르크 제국의 기사다. 더 물러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알겠습니다. 일단 정찰조에게 식량 조달에 힘써 달라고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물자를 구비하는 것이 먼저겠지.”
몇 시간 후.
팔베르크 제국군의 정찰조가 식량 조달을 위해 편성됐다.
정찰조에는 사냥꾼이나 용병 출신이 더러 있었다.
작은 동물 따위를 잡아내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그럴 터였다.
“이상하다. 왜 코빼기도 안 보인담?”
“그러게 말입니다. 쥐새끼 한 마리도 없군요. 꼭 유령의 숲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찰조도 허탕을 치고 있었다.
숲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고, 짐승은커녕 몬스터도 보이지 않았다.
사냥꾼 출신의 정찰조 대원 한 명이 손으로 흙을 만져 가며 땅을 유심히 살폈다.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지 말입니다.”
“뭐지? 발자국?”
그것은 동물의 발굽으로 추정되는 족적이었다.
대원은 말없이 주변을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한 마리가 아니지 말입니다.”
“이건…… 무리 지어 이동한 건가?”
“그런 것 같지 말입니다.”
일부러 땅을 다져 놓은 듯, 동물의 발자국이 어수선하게 찍혀 있었다.
정찰조는 간단한 회의 끝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찾아보기로 했다.
여기서 물러나면 성에 있는 제국군 모두가 쫄쫄 굶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리 지어 있으면 눈에 띌 거지 말입니다.”
“그럼 자네가 확인 좀 해 주게.”
사냥꾼 출신 대원은 높은 나무 한 그루를 찾아, 발로 꾹꾹 밀어 봤다.
충분히 뿌리내렸다고 생각했는지, 손도끼로 줄기를 턱턱 찍어 가며 순식간에 나무를 오른다.
기예에 가까운 속도에, 그것을 지켜보던 정찰조가 작게 감탄했다.
사냥꾼 출신 대원은 나무줄기 끝까지 올라가, 주위를 살폈다.
‘숲 끝까지 왔었구나.’
정찰조는 사냥감을 찾아 숲의 끝까지 다다른 상태였다.
동쪽 멀리 제국군이 몸을 숨긴 영지가 보였다.
대원은 무리 지은 짐승을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으억!”
돌연 흔들린 나무에, 대원은 질겁해 줄기를 붙잡았다.
아래를 보니, 정찰조 인원들이 나무를 흔들어 장난을 친 것이었다.
“아! 장난치지 마시지 말입니다!”
“으하하하! 알았어, 인마!”
대원은 뾰로통한 얼굴로 손과 다리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한번 나무가 흔들렸다.
대원은 아래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장난치지 마시지 말입니다!”
“뭐?”
“왜 또 흔드십니까!”
“뭔 소리야! 우리 아니야!”
대원은 인상을 찡그렸다.
실제로 정찰조는 나무줄기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바람도 불지 않는데, 이 굵은 나무가 왜 흔들린단 말인가.
대원은 숲 너머, 들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지평선 너머로, 검은 선이 보였다.
밀물처럼 밀려오고 있는 것은 검은 파도.
아니, 멀어서 정확히 확인 불가능한 생물체의 무리였다.
동물의 대규모 이동이라 생각했지만, 그 수가 지나칠 정도로 많았다.
단순한 이동으로 인한 진동이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니, 그 수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끙.”
대원은 허리에서 망원경을 꺼냈다.
흔들리는 나무줄기에서 한 손으로 망원경을 꺼내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떨어트릴 뻔한 망원경을 가까스로 잡고, 눈에 가져다 댄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악마들의 행진.
“딸꾹.”
수십만 마리가 넘는 몬스터들이 군대를 이뤄 이동하고 있었다.
그 속도는 말도 안 되게 빨랐다.
대원은 경고를 위해 아래쪽으로 입을 열었다.
“도망……!”
그 순간, 하늘에서 무언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검은 드레이크의 발톱이 대원의 얼굴을 잡아챘다.
퍽!
한편, 대원이 드레이크에게 맞아 죽자, 정찰조원들은 혼란에 빠졌다.
드레이크는 용의 산맥 북쪽 아니면 마계에나 있는 몬스터.
왜 팔베르크의 동부에 출현했단 말인가.
쿠구구구…….
뒤늦게 들려오는 땅울림에, 정찰조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아무런 말 없이, 그들은 숲 끝자락으로 향했다.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지평선이 보였다.
그리고 검은 해일이 밀려오고 있는 것 또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리에이트시여.”
허망한 중얼거림을 끝으로, 해일이 숲을 집어삼켰다.
* * *
1차 방어선, 팔베르크 제국 동남부, 드모어 영지.
이미 연합군에게 점령당한 드모어 영지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성벽 너머, 넓은 평원을 바라보았다.
“리아는?”
“2차 방어선에서 합류할 거야.”
“그 아이. 여전히 당신 말은 잘 듣네.”
인기척도 없이 옆에 나타난 것은 린시스였다.
궁병을 쏘기 위해 움푹 파인 부분에 훌쩍 올라가 걸터앉는다.
그 뒷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작아 보였다.
“괜찮냐?”
“할머니는 마나로 돌아간 것뿐이야.”
“나 죽었다고 꽁해서 자던 놈이 말은 잘하네.”
카닉스에 이어 마날루스까지 잃었다.
성격을 생각하면 꽤 상심일 클 텐데, 퍽 괜찮은 척하고 있었다.
아마도, 에인션트라는 책임을 물려받았기에 그런 것이리라.
“다 끝나면 술 한잔하자.”
“크. 좋지.”
등 뒤에 인기척이 하나둘 늘었다.
용의 산맥의 드래곤들이었다.
예외로 퀸틴의 의회장, 룬달도 끼어 있었다.
린시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얼마나 남았어?”
“한 시간 남짓입니다. 에인션트님.”
“한 시간? 슬슬 준비하긴 해야겠네.”
파베스는 전과 달리 린시스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린시스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내 어깨를 툭 쳤다.
“신호 화려하게 부탁해. 아마 애들이 보고 배우는 것도 있을 거야.”
“오냐.”
1차 방어선에서의 목적은 방어보다는 숫자 줄이기에 가깝다.
일개 군대는 가볍게 쓸어 버릴 수 있는 화력을 지닌 전력이다.
버려진 제국의 영지고, 다른 사람도 없는 만큼 한껏 마법을 쓸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따로 있었다.
린시스는 내 손 위에 차르륵 푸른 돌을 떨어트렸다.
“여기. 부탁했던 거.”
“습. 역시 용의 산맥이 통이 커.”
“그렇지? 나중에 한번 도와줘.”
“봐서.”
순도 높은 마석의 제공.
이건 경매에서 찾을 수 있는 상등품의 마석 따위가 아니었다.
상처의 조각에는 살짝 못 미치지만, 그 질 자체가 궤를 달리 했다.
아마 이 정도면, 8서클 마법을 마나 소모 없이 갈길 수도 있을 것이다.
“너희 애들 몸은 알아서 챙겨라.”
“알았어. 다들, 위치로 가서 대기하렴.”
린시스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드래곤들이 모습을 감췄다.
룬달은 나와 함께 행동하기로 했는데, 후퇴 시 데리고 텔레포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드래곤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룬달은 반쯤 쓰러지다시피 외벽을 짚고 섰다.
“허억. 죽는 줄 알았어요.”
“왜?”
“압박감 때문에요. 드래곤이 몇이야.”
“쫄지마.”
지금 작전에서, 룬달의 역할은 반쯤은 보험이었다.
전력의 전원이 마법사인 것보다는 다른 거 하나 끼어 있는 편이 나았다.
발을 묶는 데 꽤 용이한 능력을 지니기도 했고 말이다.
-저기!
팔랑팔랑 날아온 신성이 내 머리 위에 앉았다.
그리고 먼 지평선을 가리켰다.
마법을 통해 보니, 작은 점들이 보였다.
딱 한 시간 정도면 닿을 거리였다.
“룬달.”
“아. 네!”
바람의 정령을 탄 룬달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땅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울컥, 울컥.
토지가 순식간에 젖은 것처럼 검게 물들더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드모어 영지 북서 방향을 전부 진창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저런 걸 보면, 정령술이 확실히 속성 마법보다 우위에 있는 건 사실이었다.
동급의 힘을 사용한 물 속성 마법과는 수준이 다른 범위였다.
“어디까지 할까요?”
“최대한 크게 부탁해.”
“네!”
저것들은 길을 막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 버리면서 오고 있었다.
숲 하나를 몸으로 밀어 버리기도 했고, 영지나 건물 따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진창이 있더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마 진창에 빠진 놈들을 짓밟고 여기까지 올 것이다.
스티키 에어리어(Sticky Area).
진창 위에 마법을 겹쳤다.
끈적끈적한 공기가 눌어붙으며 행동을 둔화시킬 것이다.
작업을 이어 나가다 보니, 이윽고 마족군이 진창에 다다랐다.
쿠구구구구구구……!
그것은 군대라기보다는, 무리에 가까웠다.
난잡하게 섞인 몬스터들이 서로를 짓밟으며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구울이 긴 팔로 땅을 짚어 가며 앞서 나갔고, 드레이크가 날아다녔다.
팔베르크 제국군을 아득히 뛰어넘는 숫자였다.
그것은 거의 해일에 가까웠다.
끼에에에엑!
쇠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마족군이 진창에 들어섰다.
순간적으로 속도가 현저하게 늘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치고 올라온다.
느려진 선두를 뒤에서 밀어 버린 것이다.
진창에 처박힌 몬스터를 발판 삼아, 행진이 계속됐다.
놈들이 진창을 반쯤 통과했을 때, 나는 한 움큼 쥔 마석을 일제히 깨트렸다.
‘화려하게 부탁한다고 했지.’
내 마법이 신호인 만큼, 화려하게 해 줘야 드래곤들이 인지할 수 있다.
땅에 미리 그려 뒀던 마법진이 파랗게 빛났다.
여덟 개의 마나 서클이 동시에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룬달이 허둥지둥 내 옆으로 날아왔다.
“자, 화려하게 간다.”
성벽이 일렁거렸다.
대마법으로 인한 마나 메이즈 현상.
몬스터 몇 마리가 힘을 느낀 듯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저건…….”
룬달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아연실색했다.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은, 거대한 운석.
메테오라이트(Meteorite)였다.
낮게 깔렸던 구름이 운석의 영향으로 쫙 갈라졌다.
“하나는 너무 정 없을 것 같아서.”
하늘 위에서는, 수십 개에 달하는 운석이 떨어지고 있었다.
요아힘이 너무 간단하게 운석을 파훼해서, 만든 마법.
유성우(Meteor Shower)였다.
“지나치게 화려하잖아.”
허망하게 중얼거린 린시스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이 굉음과 함께 지면에 충돌했다.
땅이 폭발하듯 터져 나가며, 수천 마리에 달하는 몬스터가 휩쓸렸다.
그 운석이 수십여 개에 달했다.
“조금씩 나눠 쓰라고 준 건데. 저 바보,”
아마 마석을 전부 사용했을 것이다.
린시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대기 명령을 보냈다.
원래는 신호가 떨어진 즉시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지만.
지금 들어가면 오히려 드래곤들이 휩쓸릴 우려가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그 어떤 일에도 물러서지 않고 직진하던 마족군이 주춤했다.
아무리 정신이 나갔더라도, 유성우가 떨어지는 일대에 들어가고 싶진 않을 것이다.
물론 가까스로 멈췄다고 해도, 운석 충돌의 여파는 상당했다.
먼지바람이 터지며, 진창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졌다.
멀리 떨어져 있던 마족군도 소리에 당황했는지, 움직임을 멈추는 모습이었다.
“응?”
그때, 린시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준귀족으로 추정되는 마족 하나가 하늘로 솟아 오른 것이다.
동시에, 마나로 이루어진 거대한 장벽이 마족군을 갈라놓았다.
운석이 쏟아지고 있는 지역과, 살 수 있는 마족군을 분리한 것이다.
“오호, 7서클?”
저 정도라면 피해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마족군의 선두는 대부분 몬스터였는데, 방향을 잡아 주고 있는 마족이 하나 끼어 있었다.
지그문트는 가급적이면 그놈을 노려야 시간을 더 벌 수 있을 거라 했는데.
자진해서 나와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텔레포트(Teleport).
린시스는 장벽 후방으로 이동했다.
드래곤들이 린시스를 따라 텔레포트했다.
일제히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와 함께, 폴리모프(Polymoph)를 해제했다.
허공에서 수십 마리의 드래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린시스 화이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배 속에서 목구멍으로 뜨거운 화기가 전달됐다.
주변에 있던 드래곤들의 목에서도 붉은 기운이 모여들었다.
콰아아아아!
수십 줄기의 드래곤 브레스가 쏟아져 내렸다.
* * *
2차 방어선, 코스타 영지.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은 부상 입은 어깨를 점검했다.
다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미약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검을 휘두르는 데는 지장이 없었으니 다행일 따름이었다.
요하네스는 지그문트 마이어의 계획을 되짚었다.
‘일단 화력을 퍼부어 수를 줄인다.’
드래곤의 마법이라면, 적군뿐만 아니라 아군에게도 여파가 미칠 수 있었다.
차라리 따로 화력전을 선택해 수를 줄이는 것은 이상적인 선택이었다.
사실상 1차 방어선은 적군의 수를 줄이기 위한 정예 부대였다.
국가급 전력이라 불리는 요하네스가 끼지 못할 정도로 막강한 화력을 지닌 마법사들.
‘최소한 반절을 줄인다고 했던가.’
요하네스는 기록구를 통해 마족군의 수를 대략 확인한 바 있다.
그것은 종말에 가까웠다.
만약 연합군이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놈들이 쳐들어왔다면, 아마 서대륙은 무연에게 들었던 동대륙과 같은 상태가 됐을 것이다.
차라리 놈들이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것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 목표가 서대륙의 종말인 것이 문제지만.’
태초의 숲이 괜히 신성불가침 지역인 것이 아니었다.
세계수는 그만큼 서대륙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였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지그문트의 설명을 들은 후 인식이 확 달라졌다.
설마 혼자 서대륙 전체를 지탱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근심이 많아 보이는군.”
돌연 들려온 목소리에, 요하네스는 화들짝 놀랐다.
인기척도 없이 등장한 것은, 라스 마이어였다.
“라스!”
“20년 만이군. 전장에서는.”
“으하하하! 이게 무슨 일인가!”
요하네스는 대뜸 라스와 포옹했다.
그가 한 손에 들고 있는 검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둘은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아직 왕성에 보고되지 않은 글레엄 백작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글레엄 백작이 마이어 영지에?”
“그래. 밀러 자작이 참변을 당했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흑탑주인가?”
“아마 그런 걸로 추정된다.”
“해서, 어떻게 했나?”
라스는 말없이 검 자루를 쓰다듬었다.
요하네스는 라스의 고충을 알고 있었다.
아마 글레엄 후작은 죽었을 것이다.
라스가 검을 잡았다는 것은, 테레제의 환영을 어떻게든 극복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수고했네.”
“아들놈이 워낙 눈에 띄어서 말이야. 뒷바라지가 여간 일이 아니야.”
“지그문트 그놈이 특출나긴 했지. 내 제자로 들였어야 했는데!”
“어림없는 소리. 이미 마이어가에서 검을 가르쳤건만. 내 아들의 스승은 나라네.”
“그래. 자네 잘났네.”
라스는 퍽 자랑스러운 모양새였다.
요하네스는 괜히 그에게 핀잔을 주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서대륙의 운명을 건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요하네스는 기묘하게도 평화를 느꼈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평화가 깨질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 * *
며칠 후.
코스타 영지에 있던 병력이 전면에 나섰다.
드래곤을 동원한 공격에도, 악마들의 행진을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애초에 몬스터들을 선두에 세워 고기 방패 역할을 하게 했다.
하지만 그 몬스터들조차 전선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수.
후방에 방어 가능한 전력이 있다면 손해 보는 건 연합군 측이라 판단했다.
“도련님, 어떻습니까?”
“드럽게 많아. 피곤해 죽겠네.”
“아빠. 죽어?”
“안 죽어.”
“돌아가시면 안 돼요.”
“안 죽는다고.”
코스타 영지는 지형 자체가 뒤바뀐 상태였다.
자연스레 마족군을 유도하도록, 산을 옮겨 뒀다.
드래곤들이 용의 산맥 일부를 떼어 온 것이다.
덩달아 그 위에 살던 드워프가 같이 옮겨지는 소소한 사건이 있었다.
“오랜만에 일 좀 했구먼!”
“망치질 이리 열심히 하는 게 얼마만인지!”
“입 놀리지 말고 풀무질 제대로 해!”
다행히 그들은 모두 무사했는데, 알고 보니 오래된 화로의 드워프들이었다.
장로 하우전드나 모루모루는 나를 기억하고 기꺼이 도움을 주기로 했다.
그 덕분에 연합군 측의 기사들 중 한가락 하는 이들은 드워프의 무기를 제공 받을 수 있었다.
양질의 무기는 전투력 향상으로 이어졌기에,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물론 각국 왕가에서 합당한 대가를 지불했기에, 드워프들도 만족한 눈치였다.
“지그문트 공.”
“어. 왜?”
그리고 드워프들은 쉬는 시간에 종종 나를 찾아오곤 했다.
무슨 고백하기 전의 소녀처럼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힌다.
그것이 전부 수염 덥수룩한 드워프라,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 지그문트 공의 검 좀 보여 주시겠소?”
“이 검을 봐. 어때?”
“아름답소…….”
드워프들은 시도 때도 없이 이름 없는 검을 찾곤 했다.
하우전드에게 검에 대해 묻기 위해 꺼낸 것이 발단이었다.
잠깐 보고 검에 매료된 드워프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 이제는 모든 드워프들이 관찰하기에 이르렀다.
“후욱. 후욱. 저 날 좀 봐.”
“저 얇은 날에 음각을 새겨 넣다니. 큭, 대단해.”
“망치질을 거의 아트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거지. 하아, 하아.”
검의 가치를 아는 만큼 드워프들은 신중히 검을 관찰하기만 했다.
문제는 저놈의 신음이었다.
나는 귀를 후비며 하우전드에게 다가갔다.
“진척은?”
“인간 대장장이도 솜씨가 꽤 괜찮더군. 손 좀 봤소.”
“수고했어. 전쟁에 참가할 생각은 없나?”
“높은 망치의 의지대로 뚝배기를 깨고 싶은 마음은 있소만.”
하우전드는 애정 어린 눈으로 이름 없는 검을 흘겨봤다.
“저걸 보니 창작 욕구가 솟아서 말이지. 죽을 수는 없을 것 같소.”
“그래? 그럼 벨수스에게 부탁할 테니, 전쟁 전에 돌아가라고.”
“호의에 감사할 따름이오.”
조금 머뭇거리던 하우전드가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부디 막아 주시오. 세계의 명운이 당신에게 달렸소.”
“별 관심 없을 줄 알았는데.”
“서대륙이 멸망하면, 무구를 만들어도 쓸 곳이 없잖소.”
“그건 그렇지.”
“그러니, 부탁하오.”
“알아서 한다.”
몇 시간 후.
드워프들은 벨수스의 텔레포트를 통해 코스타 영지를 떠났다.
떠나기 직전, 모루모루와 함께 나를 찾아온 드워프들은 신신당부했다.
검 깨먹지 말라고.
참 머릿속이 한결같은 녀석들이었다.
“아빠.”
“왜?”
“오는 것 같아.”
“그러냐.”
신성을 지니고 있는 나와 리옐은 얼핏 느낄 수 있었다.
수차례에 이은 폭격에 가까운 공격에도, 줄어든 기미도 없는 괴물들의 무리를.
연합군 측 전력도 만만치 않았다.
‘막을 수 있을까.’
검을 부수는 검 요하네스 레드라인과, 검 없는 소드 마스터 엘트렛 커큰이 선두로 나섰다.
후방에서는 요정족과 인어들이 화력을 지원했다.
주요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들도 곳곳에 배치됐다.
‘중요한 건 일단 틀어막고,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건데.’
악마들의 행진을 일단 틀어막는 것이 1순위.
속수무책으로 밀리면 정말 답이 없다.
그 이후 피해를 최소화하며, 후방에 화력을 퍼붓는다.
‘놈들이 얼마나 전쟁을 준비했는지는 모르지만, 병력은 유한하다.’
문제는 후방에 있는 귀족급 마족이었다.
귀족급 마족 하나는 드래곤과 엇비슷한 힘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 수가 채 열이 안 되겠지만, 큰 걸림돌이 될 건 분명했다.
“새.”
“예. 지그문트 님.”
“할 수 있는 거 맞냐?”
“해 봐야지요.”
낮말을 듣는 새.
정확히는 암국의 왕이 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동안 나는 화력 지원이 아닌, 암살조로 들어간다.
목표는 귀족급 마족이었다.
놈들도 결국 생물이다.
몬스터들은 동족상잔이라도 해 가며 길바닥에서 지내겠지만.
‘장기전에 들어가면, 마족도 진지를 세우겠지.’
이것은 자연재해가 아닌 전쟁이다.
마족 측 또한 오랫동안 막힌다면 여러 방법을 고안할 것이다.
그사이, 귀족급 마족의 수를 줄여야 했다.
이 암살조에는 린시스와, 라스 마이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최근 알게 된 사실인데, 오래 전 검귀라 불렸다고 한다.
제국 소속이었던 만큼, 당연히 나는 그 명성을 익히 들었다.
글레엄 백작을 베었다고 하니,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상위.
‘속도를 감안하면, 귀족급이라도 암살이 가능할 터.’
나와 린시스가 기회를 만들고, 암국의 왕과 라스 마이어가 마무리한다.
나는 검도 사용할 수 있었기에 마무리에 가담할 수도 있었다.
이게 이번 전쟁에서 중요한 기본 골자였다.
쿠구구구구…….
멀리서 땅울림이 느껴졌다.
성벽 위 망루에서 묵직한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먼 곳을 바라봤다.
연이은 공격에도, 그 수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어난 것 같기도 했다.
악마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흐아아아아아악!”
공포에 질린 트리옌 병사의 배 속 깊은 곳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괴물의 파도가 연합군을 휩쓸고 지나갔다.
병사가 냅다 내민 검이 무언가에 박혔다.
그리고 병사는 몬스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고꾸라졌다.
수많은 발이 병사를 짓밟기 직전.
“흐읍!”
그의 손목을 잡고 건져 올리다시피 끌어온 것은 파울 레드라인이었다.
파울은 병사를 도로 세운 뒤, 검을 크게 휘둘렀다.
긴 팔로 땅을 짚어 가며 뛰어오던 구울 한 마리가 잘려 죽었다.
“정신 차려! 전위에 있는 놈들은 약체다! 수에 기죽지 말란 말이다!”
그 말대로, 마족군은 지그문트 마이어의 공습 이후로 전열을 조금 바꿨다.
고기 방패 역할을 위해, 약한 몬스터를 앞에 세운 것이다.
그 수가 많아 기세에 짓눌린 병사들이 더러 있었다.
실제로는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연합군 측에는 소드 마스터가 있었다.
콰아앙!
웨스트리아의 검 없는 소드 마스터.
엘트렛 커큰이 방패를 앞으로 짧게 밀었다.
그 반동만으로, 전방에 있던 몬스터 몇 마리가 튕겨 나가다시피 공중을 날았다.
단순한 방패 밀치기였는데도, 가공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쿠어어어어!
무장한 블랙 트롤이 메이스로 땅을 내리쳤다.
사상자가 속출하자, 요하네스 레드라인이 빠르게 합류했다.
블랙 트롤은 아랑곳 않고 메이스로 요하네스의 머리를 내리치려 했으나.
쩌엉!
오히려 메이스가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완성형의 검을 부수는 검은, 그것이 설령 금속 덩어리더라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다.
요하네스는 곧바로 블랙 트롤의 무릎을 차고 뛰어 올라, 목을 잘라 버렸다.
“아아아아!”
마족군 측도 만만치 않았다.
비록 약한 몬스터라도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다섯 마리에 달하는 작은 몬스터가 한 기사에게 들러붙었다.
기사는 몸을 버둥거리다가 가슴께를 잡고 앉은 놈에게 목이 뜯겨 죽었다.
인간 간의 전쟁에는 암묵적인 도의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 전쟁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키이이익!
드레이크에게 얼굴을 잡혀 높이 떠올랐던 병사 하나가 떨어져 죽었다.
가고일을 찔렀다가 오히려 무기가 부서지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죽은 이도 있었다.
정면충돌한 선봉에서는 순식간에 수천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파울은 혀를 찼다.
이대로라면 밀린다.
“후우.”
그 순간, 뒤에서 어떤 존재가 명료하게 느껴졌다.
뒤 돌아볼 틈도 없이, 무언가 파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경로를 따라 남은 푸른 숨의 궤적.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무모한!”
파울은 지그문트의 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열 밖으로 이탈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전방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몬스터들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먹잇감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지그문트는 아공간에서 검을 뽑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산 자르기.
그 순간.
파울 레드라인은 지그문트 마이어의 검에 매료됐다.
왼쪽 허리까지 가져간 검을, 오른쪽으로 베어 내는 단순한 동작.
감히 따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완벽한 베기였다.
검을 그은 방향을 따라, 공간에 긴 선이 생기는가 싶더니.
서걱!
마족군 선봉에 있던 몬스터들의 몸이 잘려 전멸했다.
단 한 번의 베기로 수천에 달하는 몬스터를 베어 낸 것이다.
경이로운 광경에, 연합군의 기사들은 전율했다.
선봉에 서 있던 소드 마스터, 요하네스와 엘트렛조차 입을 벌렸다.
스릉.
이름 없는 검이 지그문트의 손바닥에서 빠져나갔다.
버리다시피 옆으로 던진 검은 아공간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산 자르기에 의해 전멸한 마족군의 사체를 밟고, 순식간에 다른 몬스터들이 자리를 채웠다.
지그문트는 양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드래곤 브레스(Dragon Breath).
숨결에서 용의 숨결이 폭발했다.
반동에 몸이 뒤로 밀리며, 뒤꿈치 부분이 파였다.
용의 숨결을 그대로 재현한 화기가 마족군을 한 번 더 쓸어 버렸다.
위에서 아래로 쏘는 대신, 직선으로 쏴 공격 범위를 최대한 늘린 것이다.
전장을 두 번에 걸쳐 완전히 쓸어버리자, 연합군 측에도 여유가 생겼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요하네스가 떨떠름한 듯 중얼거렸다.
“전쟁 혼자 하는군.”
* * *
며칠이 지나도 전황은 팽팽했다.
수적으로는 명백한 연합군의 열세였다.
하지만 지그문트를 비롯한 국가급 전력의 맹활약으로, 전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마족군 측에서는 아직 귀족급 마족이 등장하지 않았단 것이었다.
“차라리 잘됐어. 후방에 빠져 있으면 족치러 가기 편해.”
“너무 위험할 것 같습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두세 마리만 잡아도, 피해를 상당히 줄일 수 있다.”
코스타 영지 성내.
지그문트와 룬달의 대화를 듣던 연합군의 왕족들은 감탄했다.
지그문트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막고자 했다.
살신성인이었다.
‘그게 효율적이니까.’
물론 왕족들의 생각은 오해에 가까웠다.
지그문트는 극단적으로 효율을 추구할 뿐이었다.
이것이 효율적이었기에 택했을 뿐, 숭고한 대의는 없었다.
너무 많은 생명이 죽으면 심연에 기세를 실어 주는 꼴이었기 때문에 채택한 방법이었다.
“여차하면 이곳으로 텔레포트할 겁니다.”
지그문트는 여분의 텔레포트 반지를 암국의 왕에게 전달했다.
암국의 왕은 이미 마족군 사이로 침투해, 귀족급 마족을 찾고 있었다.
“그러니, 제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켜 주십시오.”
지그문트는 진심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텔레포트했는데 그곳이 난장판이면 피곤해진다.
다른 왕족들에게는 그것이 자신이 나서서 희생하기 위한 구실로 들렸다.
크게 감동한 파서벌 레온하트는 눈물까지 흘렸다.
“수호자여. 짐은 자네를 믿네.”
“예. 근데 왜 우십니까?”
“킁. 눈에 먼지가 들어간 모양이야.”
“씻으시지요.”
지그문트의 본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엘레너와 루터만이 말뜻을 제대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지그문트의 침투 작전은 확정됐고, 린시스는 그를 원호하기 위해 나섰다.
지그문트는 천막을 나섰다.
린시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송 장치는?”
“벨수스에게 유지시켰어.”
“완벽하군. 멱따러 가자.”
“위치는?”
“대략 파악했어.”
둘은 긴 대화 없이도 서로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시간을 길게 끌 것이 없었다.
“아 참, 리옐이 당신 찾던데.”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금방 올 텐데, 뭐.”
“그건 그렇지. 갔다 와서는 꼭 봐 줘. 애가 아빠를 많이 좋아하더라.”
그리고 지그문트와 린시스는 동시에 모습을 감췄다.
* * *
팔베르크 제국, 렘센.
이제는 심연으로 완전히 장악 당한 땅에는 적막이 들어 찬 상태였다.
나는 암국의 왕에게 넘긴 마석 쪽으로 이동했는데, 설마 이곳일 줄은 몰랐다.
‘귀족급은 아직 출정도 안 했다고?’
그 수가 너무 많아 전부 확인하지 못했지만.
확실히 1차 방어선에서 조우한 마족은 기껏해야 준귀족급이었다.
귀족급 마족은 아직 렘센에 머무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 이유였다.
‘드래곤들이 움직일 걸 알았을 텐데.’
귀족급 마족이 나서면, 용의 산맥 측과 비슷한 화력을 낼 수 있다.
어째서 병력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뒀단 말인가.
암국의 왕이 몸을 숙이라고 수신호를 보냈다.
나와 린시스는 일단 그의 옆에서 기척을 감췄다.
“어디 있지?”
“저깁니다.”
암국의 왕은 심연의 지근거리에 있는 귀족급 마족을 가리켰다.
서번트 몇 마리가 시체를 옮기고 있었다.
제국민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체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라그힐 팔베르크가 불사의 병사를 시켜 학살한 이들이었다.
린시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의식인가?”
귀족급 마족은 직접 제단에 오른 상태였다.
얼굴을 아는 놈들도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다 하기 전에 조져야겠는데?”
“찬성이야. 둘 둘 하나 맡으면 되겠네. 내가 좌측에 둘. 델, 네가 중앙 둘. 마지막 놈은.”
“제가 맡게 되겠군요. 솔직히 자신 없었는데, 하나라니 다행입니다.”
“신호는?”
“내가 줄게. 대기해.”
“확인했습니다.”
내가 맡은 건 중앙에 있는 두 놈.
뿔 달린 갑옷으로 중무장한 덩치와, 전형적인 정장 차림의 마족이었다.
나는 여로를 몸에 둘렀다.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
음소거(Mute).
무취(Odorless).
여로의 도움까지 받으니,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암국의 왕에 의하면, 유령 걸음을 완전 소화한 자신과 같다고 했다.
아무리 귀족급 마족이더라도 눈치채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충분한가?
-아니. 부족하다.
-땅은 피를 충분히 머금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부패한 성배 확보에 실패했으니.
-완전한 현현은 아무래도 무리에 가까운 일 아닌가.
마족의 대화 소리가 얼핏 들려왔다.
부패한 성배 확보 실패가 아무래도 큰 영향을 끼친 듯했다.
사정거리까지 접근했지만,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음?
-왜 그래?
그때, 한 마족이 뒤를 돌아봤다.
가장 좌측에 있던 놈, 담당은 린시스였다.
확실한 처리를 위해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것이 오판이었다.
내게 배운 마법을 그대로 적용하긴 했으나, 기척을 감추는 데는 익숙지 않은 린시스다.
-지금!
샌딩(Sending)으로 신호가 떨어졌다.
나는 곧바로 내 목표 중에서, 왜소한 체구의 마족을 노렸다.
아마, 이놈이 마법사 혹은 사제.
최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놈이었다.
-컥!
귀족급 마족이라도 생명체다.
아우나를 머금은 검을 박아 넣으니, 곧바로 절명했다.
거의 반사적인 속도로 중갑옷의 마족이 내게 손을 뻗었다.
공간 수정(Modify Space).
그래비티(Gravity).
쿵!
수십 배에 달하는 중력이 마족을 짓눌렀다.
순간적으로 마족의 무릎이 꺾였으나, 놈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사이 충전해 둔 숨결을 뻗었다.
드래곤 브레스(Dragon Breath).
마족은 옴짝달싹 못 하고 용의 숨결에 휩쓸렸다.
아무리 중무장 하고 있더라도, 이걸 정면으로 맞았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쿠우우웅!
좌측에서는 린시스가 한 놈을 팔로 짓눌러 버렸다.
다른 놈은 절대 영도(Absolute Zero Point)를 맞은 듯 얼어 있었다.
원래 절대 영도는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것보다, 저렇게 압축시키는 편이 효율적이다.
암국의 왕은 살짝 고전하는 기색이었으나, 기습이 유효했는지 확실히 처리한 모습이었다.
‘싱겁네.’
기습이 유효했는지, 생각보다 간단하게 제압됐다.
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마치 죽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찜찜함이 느껴졌다.
린시스도 마찬가지인지 인상을 찡그렸다.
“이것들. 이상하지 않아?”
“그치.”
“큰 저항이 없었습니다.”
암국의 왕까지 같은 생각이었다.
귀족급 마족이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리 없다.
솔직히 한 놈은 암살에 성공하고, 다른 하나와는 전투를 벌여야 할 거라 예측했는데.
너무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뚝. 뚝.
이름 없는 검 끝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제단에 스며들었다.
검붉은색으로 물드는 석재를 보고,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암국의 왕이 인상을 찡그렸다.
“비린내가 납니다.”
“피비린내 아니야?”
“아니요. 뭔가, 비 냄새와 섞인 듯한.”
사체가 이만큼 즐비한 만큼, 피비린내에 의해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암국의 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순간.
톡.
뺨 위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졌다.
손으로 슥 닦아 살폈다.
“피?”
피였다.
고개를 들었다.
붉게 물든 구름에서 피의 비가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