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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패의 기사
팔베르크 제국, 렘센의 황성.
요아힘 월베른은 라그힐 팔베르크와 마주한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동대륙에서 흘러 들어온 귀한 찻잎이었는데, 씁쓸한 향이 일품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어지간한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하는 황성의 시종들도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이 늙은이는 참전할 생각이 없습니다. 황제 폐하.”
라그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요아힘 월베른은 애초에 그런 인물이다.
글레엄 같은 전쟁광도 아니었고, 클라우스 같은 방랑자도 아니었다.
어떤 풍파에도 그저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 산과 같은 존재라고 보는 편이 맞았다.
그래서 라그힐 팔베르크도 요아힘을 참전시킬 생각은 없었다.
“약조만 잊지 말도록.”
“늙었어도 치매는 안 왔습니다만. 껄껄. 마땅히 지켜야 할 약조지요.”
요아힘 월베른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렘센을 지킬 것이다.
이것은 요아힘의 신념에 직결된 문제였고, 라그힐은 요아힘을 믿고 있었다.
요아힘에 대한 신뢰보다는, 그가 약조를 지킨다는 부분에 있어서 큰 신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가 입 밖으로 낸 말은 지키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손님이 온 모양이군요. 일어나 보겠습니다.”
요아힘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취향에 맞는 차를 남겨 두는 것이 짐짓 아쉽다는 눈빛이었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아힘은 의자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옆에서 시종이 공손히 들고 있던 검을 잡았다.
라그힐은 짧게 무운을 빌었다.
“그대의 전장에 패배란 없으리니.”
* * *
렘센 남문 외곽에 배치된 병사는 허리를 두드렸다.
오랫동안 서 있어서 그런지, 좀이 쑤셔서 견디기 힘들었다.
입을 달싹이다가 다물고, 조심스럽게 옆을 흘겨봤다.
자신의 옆에 나열한 검은 갑옷의 기사들은 미동도 없이 석상처럼 서 있었다.
사람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는데, 간간이 숨소리가 들려오긴 했다.
‘괜히 무섭네.’
아군이라지만, 괜히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전선은 팔베르크 제국 측이 우세하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도 꽤 됐다.
렘센은 최후방인 만큼, 안전해서 내심 다행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만큼 대기 시간이 길어지니 지루한 감도 있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전장에 나서는 것보다는 백번 나으니, 버티고 있었지만 말이다.
‘뭐 재밌는 것도 없고.’
렘센의 성벽 외곽은 원래 사람으로 북적거린다.
아무래도 제국의 수도다 보니 사람도 많이 드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시라 그런지, 민간인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병사가 본 것이라고는 군량을 싣고 가는 군대뿐이었다.
‘진짜 없나?’
가만히 서 있다 보면 뭐든 관찰하게 되는 법이다.
하품을 억지로 참으니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둘러봐도 뭐가 없기에, 포기하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
그리고 보인 것은, 도를 지나치는 무료함이 만들어 낸 환생이라고 생각했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흔들림과, 긴장하는 기사들이 이건 명백한 사실이라 자각시켜 줬다.
쿠구구구구……!
땅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쨍한 태양이 그것의 등에 가려지며, 거대한 그림자가 성벽에 내려앉았다.
역광이라 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골렘과 유사한 면이 많았다.
문제는 높이만 족히 수십 미터는 될 것 같았다는 것.
팔만 제대로 휘둘러도 수백 명이 휩쓸릴 것이 분명했다.
“저게, 뭐야……?”
병사는 멀거니 그것을 올려다봤다.
먼 곳을 줄곧 보고 있어서 또렷한 시야에, 작은 무언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니, 원래 크기를 생각하면 이상하리만치 큰 무언가였다.
두 눈을 비비고 봐도, 그것은 분명히 병사의 생각과 일치하는 무언가였다.
곡선을 그리며 휜 줄기 위로 큼직한 나뭇잎 두 장이 양팔을 벌리듯 돋아 있다.
‘새싹?’
머리에 새싹이 돋은 숲의 거신이, 렘센 외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얍.”
“옳지. 잘하네.”
“야, 너무 오냐오냐 해 주는 거 아니야……?”
몇 주 전, 세계수의 성역, 하늘 정원.
지그문트는 확인차 세계수와 리옐을 찾아간 적 있었다.
세계수는 제 딸에게 지나칠 정도로 관대한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수의 가르침은 깜찍하기 그지없었다.
“아빠, 나 잘했지?”
-……잘했지?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뿌듯한 듯 콧바람을 내뿜는 리옐.
그리고 그 앞에는, 웬 주먹만 한 숲의 거신이 리옐을 따라 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거신으로 부르기도 뭐한 수준이었는데, 머리에는 새싹이 달려 있었다.
“이걸 어디다 써먹어?”
“힝.”
-힝.
“당신, 칭찬은 못 해 줄망정! 사랑으로 감싸야지.”
“누가 당신이야.”
세계수는 리옐을 싸고돌았다.
물론 리옐의 재능은 출중했다.
계약 없이 정령을 불러들이거나, 가호 같은 건 곧잘 사용한다.
하지만 이 두 개 부분은 거의 본능적인 부분이 강했다.
정령과 대화를 하고 교감할 수 있기에 정령술을 빠르게 익혔으며, 사람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본능적으로 가호를 사용했다.
“이건 너무 앙증맞잖아.”
하지만 리옐이 만든 숲의 거신은 너무 작았다.
재능이 가득한 줄 알았는데, 약한 부분도 있긴 했던 모양이다.
하긴, 숲의 거신은 식물을 급생장시키는 것과 궤가 다른 일이었다.
이미 있는 것을 성장시키는 건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보다 간단하다.
“고블린은 이길 수 있겠냐?”
“칫칫!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야!”
-칫칫!
리옐이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자, 거신이 따라 했다.
솔직히 좀 많이 하찮게 귀여워 보이기만 했지, 위력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차라리 나무를 급성장시키거나, 식물에게 명령을 내리는 기존 방식이 효율적일 듯싶었다.
“괜찮아. 우리 애한테는 유능한 대리인이 있잖아. 쿼터 엘프, 이름이 마리나던가?”
“마리나 언니?”
“언니?”
세계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리옐은 성역에 머무르지 않고 중간계를 돌아다니는 신이다.
물론 그 힘이 아직 미약한 탓이겠지만, 그 덕에 대리인과 즉각적인 시너지가 나왔다.
게다가, 마리나는 세계수의 말마따나 상당히 유능한 대리인이었다.
마녀의 후예이자 쿼터 엘프, 선천적으로 운이 좋은 경우였다.
자각하지는 못 했겠지만 숨어 살았으니, 차별 받지 않아 정신적인 문제도 없다.
윌리엄에게 간단한 암기술까지 배웠으니 금상첨화였다.
“왜, 그거 있잖아.”
“아, 그거?”
“응. 그거 쓰면 되지 않을까?”
“그거 아직 못 쓸 텐데.”
“그쪽으로 특화시켜야지.”
“괜찮네.”
알아듣기 힘든 대화가 오고 갔다.
리옐은 멀거니 나와 세계수를 바라보다가, 활짝 웃었다.
“부부는 통한다더니!”
* * *
“언니!”
“네! 리옐 님!”
마리나와 리옐은 거신의 목과 등 사이, 구부정한 부분에 앉아 있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거신을 여기까지 키운 방법은 간단했다.
상대를 거대화시키는 티탄의 저주를 응용한 것이다.
티탄의 저주는 본래, 몸의 크기를 부풀리는 저주다.
저주는 몸에 스며들기에 변형 면에서 탁월한 성능을 보였다.
하지만 저주인 만큼, 티탄의 저주는 썩 좋은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께선, 최악의 저주라고 하셨지.’
몸 크기를 부풀리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거인족이라면 모를까, 일반인의 몸이 부풀어 오르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많은 음식과 움직임을 요구하고, 조건이 맞더라도 괴물 취급 받으며 사냥 당하기 일쑤다.
또한, 극적으로 비대해진 몸은 온갖 부작용을 가져온다.
‘이걸 이런 식으로 풀어내실 줄이야.’
마리나는 새삼 지그문트 마이어를 천재라고 생각하게 됐다.
저주에 일가견도 있었으며, 신성을 품고 있기에 신성력을 다루는 법도 안다.
하여 지그문트는 티탄의 저주를 약간 변형했는데, 마리나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신성과 저주라는 상반되는 힘을 접목한 것이다.
스며드는 저주의 특성과, 균형을 유지시키려는 신성의 특성을 종합했다.
축복에 한없이 가깝지만, 그 효과는 강제적이며 반영구적이다.
이름 붙이길.
‘신성 저주.’
마리나는 여기에 꼭두각시의 저주를 더해, 리옐 혼자는 버거운 조종을 돕고 있었다.
리옐의 신호에, 마리나가 오른팔을 들었다.
그러자, 거신의 거대한 팔이 들어 올려졌다.
“때찌!”
리옐과 마리나가 동시에 손을 내리쳤다.
한 발 늦게, 숲의 거신이 손을 내렸다.
때애애…… 찌이이이이……!
동굴 같은 목소리가 낮게 내려앉았다.
거대한 손이 적진을 강타하며, 풍압이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앙!
태초의 숲 거신보다는 아무래도 한참 크기가 작아 위력이 덜한 면이 있었으나.
절대적인 기준으로, 그 내려치기의 위력이 부족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지축이 뒤흔들리고, 흙먼지가 터져 나왔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제국군의 진형이 완전히 붕괴됐다.
리옐이 내리친 팔을 왼쪽으로 크게 휘둘렀다.
“쓸어!”
땅바닥에 내려앉은 거신의 손이, 땅을 긁으며 제국군을 쓸어 버렸다.
콰가가가가강!
손가락이 성벽을 부수며 2차적인 피해가 더러 나왔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혼비백산한 제국군이 전열을 정비했다.
마리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화살 세례가 쏟아졌다.
파바바바바박!
* * *
렘센, 북문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거의 동시에, 수십에 이르는 기사와 불사의 병사들, 일반 병사들이 날아갔다.
그 중심에 있는 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기사였다.
“전열을 정비하라!”
“상대는 하나다! 막아!”
“크윽!”
기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백 명에 달하는 군대를 상대하고 있었다.
클레이모어가 반달 모양의 궤적을 그릴 때마다, 붙으려던 기사와 병사들이 밀려났다.
소드 마스터 정도의 무위는 아니었으나, 검의 능력이 워낙 강했다.
그리고 기사 또한, 검을 오래 다뤘는지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저자가, 레온하트의 수호자인가?”
“모른다! 일단 생포해야 돼!”
“생포? 저걸? 미친!”
단 록벨런은 무심한 눈으로 적군을 응시했다.
자신이 지그문트 마이어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 너무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사람 옆에 선다는 것이 만용이었다.
하지만, 단은 멈출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저 올곧게 가다 보면, 뒤에는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후우.”
지그문트는 잠깐이면 된다고 했다.
단은 애초에 일개 군대를 상대할 만한 전력이 못 된다.
과도할 정도의 수련과 급성장을 거쳐, 잠깐 버티는 것 정도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남발하다시피 사용했으니, 곧 힘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 반지를 사용하긴 이르다.
1분이라도, 지그문트 마이어에게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
쾅! 쾅!
그를 둘러싼 기사들이 연달아 검을 내리쳤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가 부서질 듯 크게 뒤로 밀려났다.
충격이 쌓인 검날이 웅웅거리며 울었다.
이를 악문 단이 검을 쳐 내고, 클레이모어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 * *
용의 산맥 꼭대기, 에인션트 드래곤의 레어.
린시스와 파베스를 필두로 한 모든 드래곤들이 인간의 형상을 한 채 모였다.
속죄를 위해 지상으로 갔던 벨수스를 비롯해, 잠에 빠지거나 유희를 즐기던 이들도 있었다.
규율만 지킨다면 그 어떤 종족보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종족이 바로 드래곤이었다.
그런 드래곤이 이렇게 한날한시에 모이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할머니.
그들의 앞에 웅크리고 앉은 것은, 빛바랜 비늘의 화이트 드래곤.
천 년 가까이 용의 산맥을 이끌어 온 에인션트 드래곤, 마날루스 화이트였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도 버거워 보였으나, 가까스로 뜬 눈동자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마치 기억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드래곤 하나하나에게 시선이 머무른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가장 앞에 있는 화이트 드래곤, 린시스였다.
-린시스. 울지 말거라.
마날루스에게 있어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였다.
린시스는 예쁜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린 채 겨우 울음을 참고 있었다.
다른 드래곤들도 침통한 표정이긴 매한가지였다.
-네가 어렸을 적에,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봤던 것을 기억하느냐?
-……네, 기억해요.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린시스가 아직 어렸을 때.
처음 내려간 지상은 린시스에게 충격적이었다.
모든 생명들이 너무 적은 시간을 지니고 있었다.
멀게만 느껴지던 죽음이 덜컥 앞으로 온 것 같은 기분.
린시스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펑펑 울다가, 마날루스를 찾았다.
당시 린시스는 에인션트 드래곤인 마날루스라면 뭐든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내가 뭐라 했지?
-……마나로 돌아간다고 하셨어요.
죽은 드래곤은 마나로 되돌아간다.
오래된 구전이었다.
-그래. 나는 그저 마나로 돌아가는 것뿐이란다.
-하지만.
-쉿. 아가, 너밖에 없는 것이 아니잖느냐.
타이르는 듯한 마날루스의 말투에, 린시스는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마날루스는 드래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마지막 말을 전했다.
매사에 냉정한 편인 파베스마저 아랫입술을 깨물고 감정을 억제해야 했다.
그만큼, 그들을 이끌어 가던 어머니와 같은 존재의 죽음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듣거라. 내가 마나로 돌아간다면, 서대륙은 극도로 불안정해질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뒀음에도, 마날루스는 서대륙을 걱정하고 있었다.
땅에 사는 신이 세계수 하나밖에 남지 않은 지금, 서대륙은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당장 온갖 자연재해가 덮쳐 와 붕괴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내 죽음이 아마 흐름의 끝에 일조하는 것 같더구나.
성신과 에인션트 드래곤, 마녀가 공통적으로 예언한 것이었다.
이미 기정사실에 가까운 일이었기에, 드래곤들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은 모순적이게도 규율에 얽매여 있기에 힘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규율에 얽매여 있기에 힘을 행사할 수 없었다.
이 흐름을 뒤바꿀 만한 일은, 드래곤들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곧 나타날 것이다. 그릇된 방법으로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자 하는 자가.
드래곤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죽음을 거스르고, 정해진 운명을 거부한, 흐름 전체를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변수.
그러나 용의 산맥에 사는 드래곤들은 이미 지그문트 마이어에 대해서 알고 있다.
반면 마날루스는 멸망의 시발점을 두고 곧 나타난다고 말했다.
즉, 멸망의 시발점은 지그문트 마이어가 아니었다.
-지금 막 변수의 첫 번째 싸움이 시작됐으니.
마날루스는 눈꺼풀이 스르륵 닫혔다.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두 개의 변수가 정면충돌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숨이 꺼져 가듯 사그라지며, 미약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종말의 뱀이 입에 문 꼬리를 놓지 않도록….
* * *
그가 발을 디딘 전장에 패배란 없다.
그 검에 산과 하늘이 잘리고, 지축이 흔들린다.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서, 검의 극의에 다다른 기사.
그의 이름은 불패의 기사, 요아힘 월베른이었다.
요아힘은 제 검으로 땅을 짚고 황성 앞에 굳건히 서 있었다.
그 눈동자와 자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씁, 후달리네.’
난생 처음으로, 나는 앞으로 나서는 것을 주저했다.
상대는 전생의 나조차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이다.
격의 부분에 있어서도 신성의 도움 없이 중하급에 다다른 인간.
솔직히, 승률은 일 할이 채 안 됐다.
-쫄음?
-쫄긴 누가.
신성은 그런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경악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웬만한 것이 나와도 주저하지 않는다.
불사의 괴물이 바닷속에서 기어 나왔을 때도, 하늘이 열리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도.
이런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 무취(Dorless), 음소거(Mute) 따위를 해제했다.
어차피 이런 환상 마법 따위로 저 늙은이를 속일 수 없다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렘센 전역에 퍼져 있던 크라우드 컨트롤(Crowd Control)은 어째선지 풀려 있는 상태.
아마 아이들이 도망치는 데 무리는 없을 것이었다.
“후우.”
어차피 넘어서야 하는 벽이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앞으로 나아갔다.
황성 앞, 넓은 광장 중앙에 요아힘 월베른이 고요하게 서 있었다.
“왔는가. 지그문트 마이어.”
“쯧. 눈치 깠냐?”
“그 정도 마나를 가지고 있으면, 눈치 못 챌 수가 없지 않는가.”
“장례식 때는 깜빡 속았으면서, 하여튼 말은 잘해요.”
요아힘 월베른은 내 정체를 눈치채고 있었다.
애초에, 장례식 당시 죽음을 직접 목도하고 베어 내기까지 한 요아힘이다.
내가 관짝을 걷어차고 일어난 것을 보고, 기억도 온전할 테니 짐작하고 있었겠지.
“재밌군. 애초에 그대와 적대할 생각이 없었는데.”
“안 싸울 거면 비켜 주지. 검은 왜 들고 있어.”
“약조는 지켜야 하지 않겠나. 이것은 내 신념의 문제니.”
“그렇겠지. 내가 너에게 걸었던 약조가 독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죽기도 하고 말이지. 전지전능한 건 아닌가 보군.”
“전지전능이라니, 그런 모순적인 단어를 내게 대입하지 마.”
해후는 필요 없었다.
요아힘 월베른에게 있어서 나는 렘센에 침입한, 적이었다.
그리고 내게 있어서 요아힘 월베른은 내 앞길을 막아선, 적이었다.
적과 적의 조우에서, 이어질 것은 뻔했다.
나는 아공간에서 이름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자네와 검으로 겨루게 될 줄은 몰랐는데.”
“검만 쓰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
“검과 마법을 동시에 쓰다니. 정말 동화 속 이야기군.”
“하나 더 있어.”
나는 지금도 내게 마법을 걸고 있었다.
상대는 마법사가 아니지만,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할 상대였다.
마나가 온몸을 휘감았고, 여덟 개의 마나 서클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 렘센의 국민들을 대피시킨 듯,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우선, 환영 인사다.
“너랑 나랑 처음 떴을 때 기억하냐?”
“기억하고말고. 자네만큼 강한 인간이 있을 줄 몰랐거든.”
“그럼, 네가 왜 불패의 기사라고 불리는지도 기억하겠군.”
불패의 기사가 발을 디디는 전장에 패배란 없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 전장에 반드시 승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불패라고 불리지 않고 필승이라고 불렸겠지.
“네가 불패의 기사라고 불리도록 한 장본인이, 나다.”
전생에, 나는 단 한 차례도 전투로 불패의 기사를 이기지 못했다.
그것은 요아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불패의 기사에게 패배는 없을지언정, 무승부는 있었다.
“자, 그때처럼 가볍게 인사 한번 나누고 시작하지.”
요아힘 월베른은 미세한 대기 중의 진동을 느꼈는지, 하늘을 올려다봤다.
맨눈으로 관측조차 안 되는 높이에, 푸른 마나가 선을 그리며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사이로 빠져나온 것은, 기억을 통해 목오 사막에서 한 번 선보인 적 있는 마법.
8서클 대규모 공격 마법, 메테오라이트(Meteorite)였다.
쿠구구구구구구…….
처음에는 작은 점 같았던 운석이,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불타오르는 운석은 공기를 찢고 빠른 속도로 낙하했다.
요아힘 월베른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립군.”
향수에 젖은 듯한 목소리였다.
역시 두려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요아힘에게 운석은 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준비 운동은 되겠어.”
요아힘 월베른은 검을 뽑아 들었다.
애초에, 나는 이런 식으로 렘센을 박살 낼 생각이 없었다.
요아힘이라면 이 정도 운석은 간단하게 막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떨어트린 것이다.
겸사겸사, 내심 몸을 안 움직여 녹슬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상대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였다.
‘아름답다.’
전생에는 별것 없다고 생각했던 동작 하나하나가, 너무 아름다웠다.
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낮추고, 하늘을 직시한다.
땅을 제대로 디디자, 돌로 이루어진 바닥이 자연스레 뭉개진다.
나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스릉.
느리지는 않지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속도의 올려 베기.
정말 아무것도 아닌 듯한 동작이었지만,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저 간단한 베기가, 운석을 잘라 냈음을.
쩌억.
렘센을 향해 떨어지던 운석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양쪽으로 나뉘어 흩어진 운석 조각은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멀리서 들려온 강렬한 충돌음과 함께, 양쪽에서 일제히 여파가 터져 나왔다.
흙먼지 섞인 강풍이 몰아치며,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원래대로라면 반으로 잘라 낸다고 이 정도에서 그칠 리 없었다.
요아힘은 단순히 운석을 벤 것이 아니라, 한 번 밀어내기까지 했다.
“나도 옛날 같지 않군. 완전히 박살을 냈을 텐데 말일세.”
“마음만 먹으면 가능할 것 같은데.”
“그도 그렇지.”
요아힘 월베른은 겉보기에 정말 평범한 노귀족이었다.
하지만 검을 뽑아 든 순간, 확실히 기세가 바뀌었다.
나와 동일 선상에 있는, 격이 드러난 것이다.
“드디어 제대로 자웅을 겨룰 수 있겠군.”
“죽고 원망하지 마라. 노친네.”
“나는 언젠가 죽는다면, 자네에게 죽고 싶다고 생각했으니, 괜한 걱정 말게나.”
“우연이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뤄지진 않을 것 같지만.”
메테오라이트가 떨어지는 동안, 나는 이미 마법 무장을 완료했다.
마나 서클이 비상식적으로 빠르게 회전하며, 짙은 푸른색의 숨이 새어 나왔다.
양쪽이 동시에 자세를 낮췄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잠깐의 정적이 대뜸 끊겼다.
나와 요아힘은 서로를 향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쾅!
검을 부딪치자마자 느꼈다.
정면 승부로는 답이 없다는 것을.
비록 아직 반신화를 안 하긴 했지만, 이름 없는 검이 부하를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오러 부분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났다.
아우나(Aunar)도 압도적인 오러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왼쪽 손가락을 인형의 실을 조종하듯 까딱였다.
타임 그리드락(Time Gridlock).
내가 선택한 수는, 8서클 시간 정체 마법이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옆으로 튕겨 나가던 돌이 허공에 머무르고, 새가 공중에 체류한다.
요아힘은 나를 직시하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고, 더 이상 오르기는 버겁다고 판단했다.
이 정도면 요아힘 월베른의 검을 막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만용을, 어느 순간부터 부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단 한 번 검을 부딪쳤을 뿐인데, 양팔이 저렸다.
마나 번(Mana Burn)의 출력을 순간적으로 높여서 망정이지.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꼴사납게 튕겨 나갔을 것이다.
찌익.
귀를 찌르는 이상한 소리에 요아힘을 쳐다봤다.
시간 정체의 영향을 받으면 점도 높은 액체에 잠긴 것처럼 느리게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요아힘의 팔은 시간의 저항을 찢어 버리듯, 서서히 빨라지고 있었다.
‘미친놈!’
요아힘은 기어코 정체된 시간을 뚫고 나왔다.
흥미롭다는 듯 주변을 살피더니, 다시 내 쪽으로 돌격했다.
마법으로 동체 시력을 끌어 올린 눈에도 잡히지 않는 속도였다.
어느 순간, 요아힘 월베른은 내 앞에 있었다.
지연된 블링크(Delayed Blink).
요아힘의 검이 내 목에 닿기 직전, 미리 걸어 뒀던 블링크가 발동했다.
한순간 시야가 뒤집힘과 동시에, 나는 요아힘의 등 뒤 공중으로 이동했다.
이름 없는 검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양팔을 쭉 뻗었다.
하얀 장갑, 숨결에 화기가 모여들었다.
완전 속박(Perfect Restraint).
드래곤 브레스(Dragon Breath).
타임 그리드락으로도 요아힘 월베른은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 움직임을 지연시키는 정도면 충분했다.
미리 완충시켜 둔 드래곤 브레스 두 개가 하나로 융합되면서, 요아힘을 향해 폭발했다.
지나칠 정도의 반동에 대각선 뒤로 쭉 밀려난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폭음과 함께, 렘센의 광장이 폭발했다.
드래곤 브레스가 요아힘 월베른에게 닿기 직전.
요아힘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얼핏 확인할 수 있었다.
적어도 피하지는 못한 것이 분명했다.
양손을 주먹 쥐어, 드래곤 브레스를 끊었다.
“끝인가?”
드래곤 브레스의 여파로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타임 그리드락이 풀리며, 공중을 날던 잔해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요아힘 월베른은 검을 든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옷이 살짝 그을린 것을 빼면 달라진 것 하나 없었다.
“실망스럽군. 델 로안.”
내가 마법사여도 근접전에 자신이 있는 편이라지만, 상대가 저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단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으나, 요아힘의 검은 거리에 큰 구애를 받지 않는다.
비록 그 위력이 덜해지긴 하겠지만, 결과는 같다.
요아힘이 검을 휘둘렀다.
‘위험……!’
앱솔루트 배리어(Absolute Barrier), 쿼터 캐스팅.
흡착(Adsorption).
마나 코팅(Mana Coating).
짧은 순간 여섯 개의 마법을 영창하고, 몸에 둘렀던 방어 마법을 활성화했다.
거의 조건반사적인 속도였고, 그렇기에 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네 개의 앱솔루트 배리어를 흡착시키고, 코팅까지 해 견고함을 더했다.
드래곤 브레스도 간단하게 막을 수 있는 방어막이, 슬라임 잘리듯 잘려 나갔다.
서걱!
방어 마법의 발동과 동시에, 나는 목을 옆으로 크게 기울였다.
거의 동시에, 턱선 아래를 따라 목의 살점이 잘려 나갔다.
아주 미세한 차이로 치명상을 면했다.
나는 곧장 목을 붙잡고 지혈함과 동시에, 신성력을 끌어 올려 치료했다.
‘저 미친 늙은이가 진짜.’
뜨거운 피가 손바닥을 적셨다.
마법을 섞어 간단하게 응급조치를 했다.
또다시, 요아힘 월베른이 사라졌다.
여로가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우측 후방.
뒤를 돌아보니, 검을 쳐든 요아힘이 보였다.
신성이 스며들었다.
반신화.
* * *
요아힘 월베른은 순간적으로 지그문트 마이어에게 압도당했다.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마치 존재가 뒤바뀐 듯한 섬뜩한 감각이 목을 찔렀다.
‘눈동자의 색이 변했다.’
선명한 금색의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요아힘은 뒤로 물러서는 것을 택했다.
자세와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대로 베었어도 유효한 공격이 됐겠지만.
지그문트 마이어의 변화는 범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장례식 때처럼, 여전히 힘을 숨기고 있던 것이다.
‘역시, 자네가 나를 실망시킬 리 없었는데 말일세.’
죽은 뒤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요아힘은 그런 것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적수로서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항상 그랬다.
‘정상에 다다른 자는 고독하다.’
요아힘 월베른이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위치에 오른 뒤, 온갖 존경과 추앙을 받았을 때.
그가 느낀 것은 모순적이게도 만족이나 희열이 아닌, 공허함과 비통함이었다.
지상 최강의 생물이라는 드래곤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 이상 올라갈 경지는 없었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내려다보는 것뿐.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와중, 전혀 관심도 없던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대마법사 델 로안.’
다른 영역이지만, 정점이라는 같은 경지에 다다른 인간.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하고, 그와 같이 존경과 두려움을 받는 존재.
요아힘 월베른은 자진해서 델 로안을 찾아갔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고? 미안하지만, 지금은 바쁜데.
-바쁘다고? 무엇을 그리 바삐 하는가?
-마법사가 뭐 하겠나. 마법 연구 하지.
-수초 만에 마법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다고 들었는데.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근데 그거랑 뭔 상관이지?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데, 어찌 헛된 걸음을 한단 말인가.
-반대로 묻지. 안 가 봤는데 헛된 걸음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요아힘은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섰을 때보다, 그 말 한마디로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 요아힘 월베른은 자진해서 팔베르크 제국에 머무르기로 했다.
경지는 오르지 않았으나, 검을 손에서 놓은 날이 없었다.
그는 델 로안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빚, 빚이라. 지운 적도 없긴 한데, 어떻게 갚으려고?
-내 검술의 비전이라도 가르쳐 주는 건 어떤가?
-관심 없네. 다 늙어서 무슨 검인가. 나는 천성이 마법사라네.
-이거 정말 귀한 건데. 나중에 후회하지 말게.
-헹. 내가 죽었다 살아나면 후회할지도 모르지.
지그문트는 실제로 이 발언을 크게 후회했다.
만약 저때 요아힘의 비전을 들어 뒀다면, 필시 큰 도움이 됐을 텐데.
죽었다 살아난 뒤 후회했으니, 정말 그 말대로 된 셈이었다.
-그럼 하나, 약조해 주게.
-무엇을?
-렘센을 지켜 줄 수 있겠나?
당시 팔베르크는 평범한 왕국 정도로 세를 확장한 상태였다.
델 로안은 직접 힘을 드러내지 않고 전술 지휘 정도에서 그쳤다.
이유인즉슨, 자신이 없어도 제국이 유지될 수 있도록 이끌고자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 바로 수도 렘센의 유지였다.
하지만 델 로안은 방랑벽도 심했고, 지휘를 할 때 그곳으로 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남아서 렘센에 대한 침입을 막아 줄 전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선택된 것이, 정계와 전쟁에 일절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요아힘 월베른이었다.
-그러지. 자네에게는 빚이 있으니.
-고맙군.
약조가 성사됐다.
그리고 요아힘 월베른은 신념에 따라, 그 약조를 죽을 때까지 지켰다.
렘센을 공격한 별동대는 요아힘 월베른에 의해 대패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고, 팔베르크는 제국의 위치에 올라섰다.
“자네가 내게 건 약조가 독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겠지.”
“이럴 때는 신념 안 지켜도 괜찮은데.”
“그럴 수는 없다네.”
짧은 대화가 오고 갔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푸른 숨을 뱉으며, 순식간에 접근해 왔다.
거리를 벌리는 대신 오히려 접근하는, 그다운 과감한 판단이었다.
“흡!”
어느새 뽑아 든 검을 휘두른다.
오러가 확실히 검에 스며들어 있었다.
성질이 일반적인 오러와 얼핏 달랐는데, 마나와 융합시킨 듯했다.
그 덕택에 검이 부서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거겠지만.
‘검을 부딪치는 건, 만용이다.’
요아힘은 검을 휘둘렀다.
이름 없는 검과, 요아힘의 검이 격돌했다.
당연하게도, 이름 없는 검이 부서질 듯 진동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아예 부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그문트 마이어와 눈이 마주쳤다.
‘뭐지?’
지그문트는 웃고 있었다.
아까와 같이 움직임을 방해하는 마법을 사용하는 건가 싶었으나, 그런 기색은 없었다.
대신 금색 눈동자가 유독 짙게 빛나는 경향이 있었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요아힘 월베른을 적으로 가정하고, 수많은 상대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전력 차는 명백했고, 그 힘을 꺾을 확률은 적었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다.
‘뭘 준비하고 있는 거지.’
요아힘 월베른의 산 자르기를 따라 한 것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검술적인 면에서, 지그문트는 요아힘을 결코 따라갈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다른 두 힘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번만큼은 검술이 부가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요 1년 새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꽤 영감을 받았거든?”
지그문트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즐긴다.
요 근래에는 세 가지 힘을 동시에 다루게 되면서, 힘의 합에 중점을 두고 연구를 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마리나의 신성 저주나, 아우나와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지그문트는 한 가지 새로운 것을 고안해 냈다.
“리에이트 교국에서, 인상적인 걸 봤어.”
성신 리에이트가, 무슨 날파리를 눌러 죽이듯 몰렉을 누르는 것.
그리고 태초의 숲에서 리옐의 명을 받은 거신이 사용한 내리치기.
전생이었다면 신적인 존재들의 힘인 만큼 별개의 문제로 취급했겠지만.
지그문트의 절반은 지금 신이었으며, 지그문트는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신성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뤄 보기로 했다.
“이것도 한번 막아 봐.”
지그문트는 검을 붙인 채, 한 손을 슬며시 놓았다.
당연히 힘에서 밀리게 됐지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손을 펴고, 어깨 높이까지 살짝 들어 올린다.
돌연 온몸을 짓누르는 거대한 중압감에, 요아힘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건.”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렘센 전체를 누를 크기의 손바닥이 상공에 출현했다.
신성이라는 막대한 힘과, 자연재해를 태연하게 일으킬 수 있는 8서클 마나의 융합.
다룰 수 없는 막대한 힘에 마나를 부여해 다루기에, 이름 붙이길, 신성 마법.
지그문트는 손바닥을 아래로 지그시 눌렀다.
신벌(Judgment).
신의 손바닥이 렘센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