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20/134)

2

8서클

렘브란트 님푸스를 중심으로, 시간이 얼어붙었다.

아래의 전장 일대에 있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인식도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온몸이 얼어붙어 그 자세 그대로 멈춘 것이다.

상대를 향해 달려든 기사도, 심장을 관통 당해 허물어지고 있던 병사도.

위의 상황을 주시하던 마법사까지도, 모두 얼어붙었다.

“후우.”

렘브란트는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냉기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인상을 찡그렸다.

얼음의 서와의 연결로 사용한 8서클 마법, 절대 영도(Absolute Zero Point).

그 위력은 가히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후퇴하던 연합군의 선봉도 대다수가 얼어붙어 버렸다.

얼음의 서에서는 더 이상 냉기가 뿜어 나오지 않았다.

한계를 초과하여 연결 자체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전투는 종결됐다.

“잔챙이들에게 힘을 너무 썼군.”

가장 가까이에 있던 무연과 파울은 그 여파에 직접적으로 휘말렸다.

그 때문에, 렘브란트를 주시하고 있는 그 자세로 얼어 버린 상태였다.

렘브란트는 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의미 없는 발버둥은 아니었으니, 만족하고 죽어라.’

얼음 조각상은 간단한 스마이트(Smite)로도 부술 수 있다.

급속 냉각에 가까웠기에 아직 전부 생존해 있었지만.

얼음이 부서지듯 몸이 부서지면 끝이었다.

방금 8서클 마법을 사용했기에, 아무래도 몸에 부담이 왔다.

하지만 얼어붙어 있는 것을 상대로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렘브란트는 차분히 마나 서클을 회전시키고, 입술을 열었다.

화악.

얼음장같이 차갑던 살갗에, 돌연 온기가 닿았다.

절대 영도의 여파를 뚫어 낼 정도면, 온기가 아니라 강렬한 열기에 가까웠다.

파울과 무연의 온몸에 내려 있던 얼음이 녹아내렸다.

눈을 깜빡인 둘은 거의 동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개씹. 뭐야.”

“춥고, 덥고, 축축하군.”

렘브란트는 마나의 흐름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콜드 슬립(Cold Sleep)으로 투명한 얼음덩어리에 갇혀 있던 발레리아 로안.

그 눈동자가 렘브란트 님푸스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건, 허리에 달린 불의 서.

“이런.”

거기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은, 지옥의 불, 업화.

발레리아 로안은 렘브란트를 노려보았다.

불의 서가 열렸다.

화악!

* * *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에게 있어서, 델 로안은 마법사였다.

그 어떤 마법사보다 더 마법사다운 것이 바로 델 로안이었다.

순수하게 마법을 사랑하는 마음가짐과, 그것을 위해 기꺼이 한 몸을 불사르는 열의.

태도적인 부분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고, 실력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델 로안과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마법사들에겐 영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검에는 관심이 없으셨지.’

델 로안은 마법사였으며, 기사에게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흥미를 가진 건 검이 아닌 육체적인 부분이었다.

검술이나 오러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고,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방심하지 않았다.

‘은사께서는 희대의 천재다.’

인간 중 처음으로 9서클이라는 경지에 다다른 마법사.

죽음에서도 돌아온 인간이 바로 델 로안이었다.

당연히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을 것이고.

그만큼, 강할 것이 뻔했다.

‘온다.’

지그문트의 경로를 따라 일직선으로 푸른 숨이 남았다.

순간적인 속도만으로도,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의 머리가 위험 판단을 내리기 충분했다.

고속으로 클라우스의 앞까지 전진한 지그문트가 측면을 파고들었다.

‘왼쪽 아래.’

몸체에 검이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시선과 자세, 균형이 쏠린 정도로 알 수 있었다.

우측으로 한껏 젖힌 검에 무게를 실어 베어 올 것이다.

요아힘에게서 봤던, 완벽한 힘의 균형이 얼핏 보였다.

클라우스는 방어를 준비했다가, 기이함을 느꼈다.

‘오러가?’

반대쪽에서 느껴졌다.

눈동자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분명 오른손으로 쥐고 있었을 검이 어느새 왼손으로 이동해 있었다.

클라우스는 그제야 지그문트의 시선과 자세 따위가 모두 속임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효율적인 공격을 포기하고, 기만전술을 택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어느 정도 유효했다는 것이다.

‘쯧.’

클라우스는 노련한 기사였다.

이번 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대비도 안 되어 있었지만.

늦게라도 파악한 이상, 어떻게든 타파할 수단을 강구할 수는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찌르기!’

몸의 균형이 오른쪽으로 틀어져 있어, 큰 베기는 불가능한 자세다.

필연적으로 지그문트가 선택한 공격은 찌르기.

클라우스의 어깨를 노리고 이름 없는 검을 똑바로 찌른다.

본래라면 회피가 맞는 판단이나.

‘막아야 한다.’

클라우스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회피를 선택한 순간, 수세에 몰릴 것이라고.

우선 검을 쳐 내 자세를 흐트러트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찔러 오는 이름 없는 검의 날 부분을 받치듯, 검을 들었다.

검날 간의 마찰을 이용해, 찔러 오는 검을 튕겨 낼 셈이었다.

스릉.

그러나 클라우스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지그문트의 검술은 지나칠 정도로 정교했다.

클라우스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순간적으로 손목을 튼 것이다.

검면부는 검날을 매끄럽게 지나가, 클라우스의 어깨를 노리고 들어왔다.

“큭!”

이번에야말로 당황한 클라우스가 검을 쳐올렸다.

지그문트의 검이 위로 튕겨 나갔다.

이름 없는 검은 확실히 클라우스의 어깨 윗부분을 찔렀다.

‘위험하다!’

단 한 수만으로, 클라우스는 깨달았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극단적으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타입의 기사였다.

전생의 성격이나, 전투 스타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검을 가까스로 튕겨 냈지만, 지그문트는 후퇴하지 않았다.

‘어?’

왼손으로 잡고 있던 검이, 어느새 오른손으로 이동해 있었다.

마법으로 검을 이동시킨 것이었다.

지그문트는 왼손에 작은 돌을 쥐고 있었다.

물건과 물건의 위치를 바꾸는 마법, 스위치(Switch).

‘이런!’

지그문트는 오른손으로 검을 잡는 경향이 있었으나.

애초에 양손잡이였기에, 어느 손으로 검을 쥐든 상관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튕겨 내는 것으로는 답이 없었다.

이번에 들어오는 건, 확실히 힘이 실린 베기.

쿵.

지그문트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발이 단단히 땅을 디딘다.

우측으로 틀었던 허리가 돌아가며, 검을 크게 휘두른다.

클라우스는 검을 안쪽으로 잡은 상태였기에,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카앙!

이번에야말로 검이 제대로 부딪쳤다.

의외로 강한 힘에 놀란 클라우스가 인상을 썼다.

속도, 기술에 힘까지 지니고 있었다.

속도와 힘은 마법으로 보충한 것에 가까웠지만.

‘강하다!’

경지는 비슷하다지만, 지그문트 마이어가 가진 힘은 하나가 아니었다.

마법의 보조를 받는 지그문트는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단연 상위라 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하지만, 해볼 만하다.’

양손으로 번갈아 검을 이동시키며 사용하는 건, 검술적인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다.

확실히 상대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빈틈을 찌르는 데에는 최적화되어 있었으나.

결국 한 손으로 쥔 검은 양손으로 쥔 검을 힘적인 부분으로 이기기 어려웠다.

힘이 지나치게 강한 엘트렛 커큰이나 요하네스 레드라인이면 모를까.

지그문트 마이어의 힘은 클라우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 번 더!’

서로의 검이 튕겨 나가자마자, 추가 공격이 들어온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계 동작.

의아한 것은, 자세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의 눈에 기이하게 비쳐 보인 것이 있었다.

‘요하네스 레드라인?’

그와 함께 상위 소드 마스터라고 평가 받는, 레온하트 왕국의 기사.

요하네스 레드라인이 검을 휘두르는 것이 얼핏 보였다.

지그문트는 실제로, 그의 동작을 정확히 재현하고 있었다.

검을 부수는 검.

검과 검이 부딪친 순간, 느껴진 충격으로 순간 깨달았다.

이번 건 강하다.

쾅!

검과 검이 부딪쳤다기엔 기이할 정도로 큰 소리.

클라우스는 충격을 그대로 받아 내려는 듯, 옆으로 밀려나갔다.

여기에는 오히려 저항하는 것이 손해였다.

다행히도 클라우스의 검이 부서지지 않았다.

상당한 충격을 받긴 했으나 막시밀리안의 유산은 명검인 만큼 상당한 내구력을 자랑했다.

지그문트는 그를 놔줄 생각이 일절 없는지, 곧장 추격해 왔다.

‘공수를 전환해야 한다.’

지그문트의 공격은 맞공격을 하기에는 너무 까다로운 경로로 들어왔다.

그렇다고 수비하자니, 계속 이런 양상으로 진행될 것이 뻔했다.

클라우스는 검의 능력을 발현시켰다.

검을 맞대고 있던 지그문트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개 같은.”

거의 몰아세우다시피 공격하던 전과 달리, 검을 뒤로 뺀다.

클라우스가 그 궤적을 따라 검을 계속 붙이고 있자, 급하게 뒤로 물러섰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그런 검이었지.”

“그렇습니다. 어떠십니까?”

“빡세네.”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의 검은 상당히 특이했다.

일반적인 롱소드처럼 보였는데, 날 부분이 옅은 회색이었다.

얼핏 보기에도 평범한 금속을 사용한 물건은 아니었다.

막시밀리안의 유산은 모두 높은 망치의 작품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빼앗는 자의 롱소드였나.”

빼앗는 자의 롱소드는 상당히 특이한 성질을 가진 검이었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가 충격을 흡수해 방출한다면, 빼앗는 자의 롱소드는 상대의 오러를 흡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기사에게 있어서는 거의 최악이나 다름없는 힘, 오러 강탈.

클라우스는 검술적인 측면에서 완성된 소드 마스터인 만큼, 검의 힘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단처럼 의존하게 될까 봐 사용하기 꺼리는 것은 아니었다.

불리한 상황을 뒤집기 위한 전술로써 기꺼이 활용할 용의가 있었다.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하실 겁니다.”

“요아힘 잡으러 가야 돼. 너 오래 상대할 생각도 없었어.”

“그건 좀 자존심 상하는군요. 아무리 은사님이시더라도, 져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질 생각 없어도 질 거야.”

지그문트 마이어가 검을 고쳐 잡았다.

고작 몇 합 주고받았을 뿐인데, 꽤 오러를 빼앗겼다.

클라우스의 말마따나 검을 부딪치고 있으면 패배할 것이 뻔했다.

마법으로 밀고 나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보조 수단 정도로 사용할 셈이었다.

“다시 간다.”

“오시지요.”

지그문트는 살짝 무릎을 구부리고, 클라우스를 향해 검을 겨눴다.

그 별것 아닌 동작에,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순간적으로 압도당했다.

“무슨.”

언젠가 델 로안에게서 느꼈던, 상대가 한없이 거대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

클라우스는 잘 쉬어지지 않는 숨을 억지로 들이쉬었다.

클라우스가 히든카드를 꺼내 들었으니, 지그문트 또한 숨겨둔 수를 보이고자 한 것이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물들었다.

* * *

마계, 지옥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을 두고 연옥이라고 한다.

마족도 연옥에는 좀처럼 발을 들이지 않는데, 그곳에 사는 영물이 문제였다.

일단은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의사소통까지 가능한 만큼 영물로 분류되긴 하지만.

청조나 그리핀과 같은 영물이라기보다는 종말의 뱀 요르문간드와 같은, 괴물에 가까웠다.

화악.

지옥의 불과 같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거대한 날개.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발레리아의 머리 위에 출현했다.

그 존재만으로도 뜨거운 열기가 주변을 감싸며, 콜드 슬립의 얼음이 녹아내렸다.

렘브란트 님푸스는 그것을 멀거니 올려다봤다.

덩달아, 그 뒤에 있던 파울과 무연도 무심코 입을 벌렸다.

“불사조?”

델 로안이 생전에 아주 흥미롭게 연구한 바 있는 영물인데, 이는 불사성 때문이었다.

죽음을 완전히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인 후 다시 태어나는 존재.

델 로안은 여기서 영감을 얻어, 환생(Reincarnation)을 만들기도 했다.

발레리아 로안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지그문트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연옥에는 갑자기 왜요?

-불사조 잡는 법을 알려 주마.

-불사조? 아, 그 작은 불새요?

-그때 내가 훔쳐 왔을 때는 막 되살아난 거라 작았던 거고, 지금쯤이면 성체가 됐을 거야.

-불사조는 지옥 밖에서 살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내가 어떻게 데려왔겠냐. 조건만 맞추면 돼.

지그문트는 상세하게 불사조 잡는 법을 설명했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그문트가 베르제 대공의 저택에서 차를 마시는 동안, 발레리아는 개고생을 해야 했다.

머리카락 일부가 불탔고, 로브는 아예 쓰지도 못 하게 됐으며, 완드 세 개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기어코 불사조를 잡아 내는 데 성공했다.

치이이익.

불사조가 불타오르는 날개로 발레리아를 가두고 있던 얼음 감옥을 감쌌다.

고열에 수증기를 터트리던 얼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발레리아는 렘브란트 님푸스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불사조가 렘브란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죽여!”

“이런, 젠장.”

렘브란트는 드물게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발레리아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불사조가 날아올랐기 때문이다.

평범한 영물이라면 모를까, 불사조는 지옥 가장 깊숙한 곳에서 살아가는 괴물.

간단한 마법으로 저지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끼이이이이익!

전장을 울리는 높은 새소리와 함께, 불사조가 렘브란트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날개를 따라 불이 잔상처럼 남을 정도로 빠른 속도.

렘브란트는 곧장 블링크(Blink)로 회피를 시도했지만.

“해 봐.”

발레리아는 그걸 순순히 두지 않았다.

렘브란트가 했던 것과 같이, 일대에 작은 불 알갱이들을 배치해 둔 것이다.

자신의 방법에 그대로 당한 꼴이었다.

혀를 찬 렘브란트는 곧바로 방어 마법을 사용했다.

앱솔루트 배리어(Absolute Barrier).

냉기 섞인 마나가 벽으로 바뀌어 렘브란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불사조가 앱솔루트 배리어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아앙!

장벽에 부딪친 불사조에게서 순간적으로 화기(火氣)가 폭발했다.

단순한 충돌임에도 불구하고 7서클 방어 마법인 앱솔루트 배리어가 흔들릴 정도의 위력.

렘브란트 님푸스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마나 서클을 회전시켰다.

불길이 사그라지고, 불사조의 뒤편이 보였다.

‘없다?’

발레리아 로안은 온데간데없었다.

뒤늦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파울과 무연의 등에 각각 손을 올리고 있는 발레리아가 보였다.

“추방(Deport).”

“적탑주, 잠……!”

파울과 무연의 모습이 사라졌다.

상대의 위치 이동을 강제하는 델 로안의 고유 마법, 추방이었다.

분명 위기 상황에서 주의를 끌어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앞으로의 싸움에서는 괜히 걸림돌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플레임 스피어(Flame Spear), 다중 영창.

수십 개의 플레임 스피어가 발레리아의 후방에서 출현했다.

궁병에게 화살 세례를 지시하는 듯한 손짓과 함께, 불의 창이 일제히 쏘아져 나갔다.

여전히 불로 이루어진 탄막은 유지된 상태였고, 반대쪽에는 불사조가 있었다.

7서클 마법인 앱솔루트 배리어를 유지하며 방어 마법을 캐스팅하는 것도 무리였다.

“큭.”

렘브란트 님푸스는 어쩔 수 없이 얼음의 서를 열었다.

냉기가 뇌를 찌르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다른 대항 수단이 없었다.

렘브란트는 발레리아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일대가 얼어붙었다.

치이이이이익!

다시 한번 수증기가 터져 나왔다.

렘브란트가 의도한 대로, 서로의 시야를 차단한 것이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렘브란트 님푸스의 판단은 냉정했다.

‘물러선다.’

마석을 깨트려 가면서 버티고 있었지만, 한계는 명백했다.

상성적인 부분보다, 발레리아 로안의 준비가 철저했다.

더군다나 불사조까지 가세한 상황에서, 승산은 희박했다.

“텔레포트(Teleport).”

“지연된 트레이스(Delayed Trace).”

블링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렘브란트는 결국 텔레포트를 선택했다.

제국군 측으로 물러서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팟.

렘브란트 님푸스의 시야가 바뀌었다.

제국군 측의 진지였다.

기사와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렘브란트의 출현에 살짝 놀란 기색이었으나, 그러려니 했다.

탑주는 텔레포트를 통해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이다.

“후우.”

서리가 내린 머리카락은 얼어붙었고, 입가에선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렘브란트는 통증을 억지로 참으며 얼음의 서를 덮었다.

마도서는 마법사의 힘을 대폭 증가시켜 준다.

심지어 한 서클 이상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그 효능만큼이나 부작용도 확실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건 뭐였지?’

발레리아가 사용한 마법은 렘브란트가 난생 처음 듣는 마법이었다.

일반적으로, 마법사는 하나의 고유 마법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발레리아 로안 같은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많은 종류의 고유 마법을 보유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마법을 고유 마법으로 행사하는 델 로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화악!

거의 동시에, 렘브란트의 머리 위에 작은 태양이 출현했다.

운석이라고 불러도 좋을, 거대한 불덩어리를 들고 있는 것은, 발레리아 로안.

렘브란트 님푸스는 눈을 부릅떴다.

통증을 참으면서까지 크라우드 컨트롤(Crowd Control)로 일대를 장악한 상태였다.

텔레포트는 불가능할 터였다.

“어떻게!”

발레리아의 고유 마법, 트레이스(Trace)는 공간 이동한 상대를 뒤쫓는 마법이었다.

전생의 모의전 당시, 델 로안이 자꾸 공간 이동을 하자 억울해서 몇 달에 걸쳐 만든 마법이었다.

상대가 텔레포트한 후 남는 마나 잔재를 그대로 가져와, 뒤따라 공간 이동하는 마법.

마법에 있어서는 극도로 까다로운 델 로안이 진심 어린 칭찬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상대의 마나를 사용하기 때문에, 크라우드 컨트롤 같은 이동 저해 마법을 무시한다.

즉, 사전에 대비하지 않고서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추적.

“이건!”

발레리아의 손 위에 출현한 것은, 작은 태양이었다.

불사조가 발레리아를 감싸듯 덮고 있었고, 불의 서에서는 업화가 터져 나왔다.

렘브란트는 어렴풋이 발레리아가 사용한 마법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8서클 최상위 화염 마법, 리틀 선(Little Sun).

그 유명한 헬파이어의 상위 마법.

“스승님의 몫이다! 이 개자식아!”

발레리아의 외침과 함께, 제국군 진영에 태양이 떨어졌다.

* * *

이안은 전율했다.

그것은 자연재해 같은 것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제국군 진영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낸 찬란한 불덩어리.

동시에, 대폭발이 일어났다.

쿠구구구구…….

천천히 원을 그리며 커지던 여파가, 한순간 연합군을 휩쓸고 지나갔다.

너 나 할 것 없이 양팔로 머리를 보호하고, 눈을 감았다.

뒤늦게 공기를 찢으며 터져 나온 폭음에 귀가 먹먹해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구름이 갈라지고, 지축이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이안은 압도적인 마나량에 혼절할 지경이었지만, 억지로 버텼다.

전선 너머, 제국군 진지 한복판에서 터진 폭발임에도 열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열풍에 델 것 같았는데, 저 가까이에 있는 이들은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미친.”

옆에 있던 파울의 중얼거림이 이안의 마음을 대변했다.

한 번뿐이었지만, 분명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위력이었다.

심지어 저 마법을 사용했을 적탑주, 발레리아가 무사할까 걱정될 만큼 말이다.

먼지구름이 전장을 뒤덮었고, 연합군은 그 광경을 멀거니 보고만 있었다.

“저게, 정녕 사람이 사용한 마법이란 말인가.”

“탑주 간의 싸움은 이 정도야?”

이안은 발레리아에 대한 존경과 함께,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저 발레리아의 스승이며, 9서클에 닿았던 델 로안은 어떤 경지에 다다른 걸까.

뒤늦게, 상공에서 무언가 출현했다.

불사조였다.

끼이익!

겨우 가시나 싶었던 열기가 다시 온몸을 뒤덮었다.

연합군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들었으나, 요하네스 레드라인이 그를 저지했다.

“아군이다! 무기 내려!”

그 명령에 연합군은 황급히 무기를 내렸다.

이윽고, 아래를 살피던 불사조가 천천히 내려왔다.

연합군들은 뒤로 물러서며 빈 공간을 만들었고, 불사조의 다리가 땅에 닿았다.

끼잉.

마치 아기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꼬리를 내렸다.

등에 있던 무언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이었다.

“적탑주님!”

“괜찮으십니까!”

선뜻 접근하기 꺼려지는 화기에도 아랑곳 않고, 적탑의 마법사들이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불사조는 발레리아를 걱정스레 쳐다보다가, 불의 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발레리아 로안의 상태는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로브의 반절은 불타올랐고, 아름다운 붉은색의 머리카락도 엉망이었다.

얼굴은 살짝 그을린 듯 검댕이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사제를!”

“상태부터 확인해라!”

“정신이 드십니까?”

발레리아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천천히 눈을 떴다.

연합군의 시선이 주목된 상태에서, 발레리아는 고개를 돌려 제국군 쪽을 바라보았다.

먼지구름이 사그라진 전장은, 거의 초토화 상태였다.

제국군은 거의 궤멸 상태에 가까웠다.

“적탑주님, 괜찮으십니까?”

이안은 걱정스레 발리레아를 내려다봤다.

발레리아는 만족스럽게 옅은 웃음을 지었다.

“후후, 스승님한테, 칭찬해 달라고 해야지…….”

기운이 다 빠진 듯한 말투에, 연합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발레리아 로안의 스승, 델 로안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었다.

기겁한 적탑의 마법사들이 거의 오열했다.

“도,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사제에에에! 사제 불러와아아아아!”

온갖 호들갑에, 발레리아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오해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한숨을 내쉬고, 없는 힘을 쥐어짜 내서 말했다.

“죽기는 누가 죽어. 나 안 죽거든?”

* * *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얼어붙었다.

풍압에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차갑고 날카로운 것이 목덜미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 목에는 지그문트 마이어의 이름 없는 검이 닿아 있었다.

지그문트는 금색 눈으로 클라우스를 직시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돌연 지그문트 마이어의 눈이 머리와 같은 금색으로 물든 것이 시발점이었다.

안 그래도 비상식적인 속도를 자랑하던 지그문트가, 일순간 사라졌다.

희미하게 남은 푸른 숨의 궤적으로, 공간 이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동체 시력으로도 잡아낼 수 없는 속도.

“……졌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 상태였다.

결판은 한순간이었고,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빼앗는 자의 롱소드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두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지그문트는 이름 없는 검을 서서히 클라우스의 목에서 떨어트렸다.

반격할 여지는 있었지만, 애당초 지그문트가 검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목이 잘렸겠군.’

클라우스는 서늘한 감각에 목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감각이 있었으나, 피가 묻어 나오진 않았다.

아니, 피가 흘러나오지 않을 정도로 조절해서 멈춘 것이다.

순간적으로 종이 한 장보다 더 얇은 거리를 조절한, 정교한 일격.

“어때? 할 만한 것 같냐?”

지그문트의 한마디에 서늘한 감각이 사라졌다.

애초에 지그문트는 단 한 번도 살기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저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이 지그문트 마이어라는 존재에 압도당했을 뿐이다.

클라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그럼 거짓부렁을 늘어놓으리?”

질문의 의도는 명료했다.

지그문트가 향하고 있는 곳은 팔베르크 제국의 렘센.

넘어서려는 거대한 벽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 요아힘 월베른이다.

그리고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종종 요아힘의 대련 상대가 된 적이 있다.

오래 전 델 로안이 클라우스를 요아힘에게 소개시켜 줬고, 요아힘이 꽤 주목한 덕이었다.

클라우스는 그 누구보다 요아힘 월베른의 힘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말할 수 있었다.

“이 실력이라면, 열 합 안에 죽으실 겁니다.”

지그문트는 클라우스보다 강했다.

검술 수준은 엇비슷한 정도지만, 다른 두 가지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력이라면 요아힘 월베른을 넘어설 수 없다.

이것은 클라우스가 소드 마스터로서 느낀 객관적인 평가였다.

“씁. 역시 그렇지?”

지그문트도 순순히 인정하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아힘 월베른과 델 로안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

인간이 결코 닿을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인간이라는 것과 팔베르크 제국 소속인 점 등.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법까지 써도 안 되려나.”

“8서클 마법의 위력은 여실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

“쯧, 알고 있다. 이놈아.”

클라우스는 지금 지그문트가 보여 준 힘이 절반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전력을 다하더라도, 지그문트 마이어의 승률은 채 1할이 안 됐다.

* * *

마계, 첫 번째 틈.

밤말을 듣는 쥐는 땅굴 속에 숨어 있었다.

그 품에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렘브란트 님푸스에게 귀가 잘린 엘프 남자아이였는데, 얼굴이 피범벅이었다.

밤말을 듣는 쥐는 남자아이의 입을 막은 손에 힘을 가했다.

“쉿.”

아래로 판 땅굴에, 위에는 제국군의 시체로 위장해 놓았다.

냄새를 지우는 오도레스 허브를 사용한 뒤, 피로 무취(無臭)를 덮었다.

땅굴 밖은 스산하리만치 조용했지만, 암살자인 밤말을 듣는 쥐는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서성거리며 시체들을 확인하고 있었다는 것을.

-죽였어. 내가. 죽었어. 전부. 돌아가. 어떻게?

엘프 남자아이는 거의 정신을 놓은 모습이었다.

어린 나이에 전쟁을 직접 목도하고, 수많은 죽음을 눈앞에서 겪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밤말을 듣는 쥐로 인해 겨우 목숨을 부지하긴 했으나.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오랜 세월 깎인 끝에 날카로워진 감은 불안한 최후를 예고했다.

적어도 언제까지 이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계 정벌에 나선 팔베르크 제국군은 전멸했다.

끝내 마족 수뇌부 중 하나를 쓰러트리긴 했으나.

‘어째서, 이 엘프가.’

첫 번째 틈의 주인, 조종하는 자 마누엘.

준귀족급 마족으로 추정되는 틈의 주인은 이 어린 엘프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밤말을 듣는 쥐의 주의를 끌었다.

전장에 나선 렘브란트 님푸스가 문제였다.

‘놈의 목적은 뭐란 말인가.’

렘브란트는 국가급 전력인 만큼,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전장에 렘브란트가 나서기 무섭게, 제국군이 공세로 돌아섰을 정도니까.

첫 번째 틈의 주인, 조종하는 자 마누엘 또한 렘브란트가 사로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렘브란트 님푸스는, 엘프 시종에게 그 마무리를 시켰다.

-죽여라.

아직도 그 낮은 목소리가 생생히 귓전에 맴돌았다.

렘브란트는 보란 듯이 엘프에게 마누엘을 죽이라고 시켰다.

마누엘은 렘브란트 님푸스에게 패배했고, 거의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렘브란트는 엘프에게 단검을 쥐여 주며 속삭였다.

-죽이지 않는다면, 죽이겠다.

엘프는 울면서 마누엘의 목을 찔렀다.

마구잡이식으로 찔러 넣은 검이 우연히도 경동맥을 꿰뚫었다.

엘프는 갑작스레 터져 나온 마누엘의 피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밤말을 듣는 쥐는 머리 위의 시체를 슬쩍 위로 들고, 주변을 살폈다.

‘일단, 여길 빠져나가는 게 먼저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의 깊게 눈을 굴리고 있는데, 위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주변을 수색하고 있던 영체 마족이 대뜸 머리를 내민 것이다.

눈이 마주쳤다.

‘……젠장.’

* * *

“너는 어떡할 거냐?”

“뭐 어떻게 합니까. 이제 죄인 신세인데. 떠돌아다녀야지요.”

“레온하트 왕국으로 오든지.”

“됐습니다. 이번 전쟁에 휘말리는 건 사양입니다.”

“또 수련이냐?”

“높은 경지를 보면 으레 그러고 싶어지는 법 아닙니까?”

클라우스는 우리와 작별을 고했다.

애초에 팔베르크 제국 소속이라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었다.

혹시 그사이에 라그힐이 회유에 성공했다면 조금 귀찮아졌을 텐데.

다행히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배은망덕한 쓰레기가 아니었다.

그놈은 팔베르크 제국 꼭대기에 따로 있었다.

“그럼, 무연을 찾아봐.”

“무연요? 서대륙 사람의 이름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서대륙에 흘러 들어온 동대륙의 검사다. 동대륙이 지금 지옥이나 다름없다더군.”

“지옥요? 끌리는군요. 리아만 데려가고 저는 안 데려가신 게 좀 천추의 한이었습니다.”

클라우스는 험난한 곳을 찾아다니는 괴랄한 성향이 있었다.

용의 산맥과 목오 사막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틈까지 직접 다녀온 놈이다.

무연이 생각나서 추천했는데, 생각보다 혹했던 모양이다.

동대륙도 만만치 않게 혼란스럽고, 건너가기도 꺼리겠지만.

이놈은 아마 그걸 즐길 거다.

“참고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우린 이만 가 본다.”

마리나와 리옐이 다시 여로에 올라탔다.

단 또한 클라우스를 경계하며 여로로 올랐다.

클라우스는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뭐.”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은사님.”

“너 이 자식…….”

클라우스는 마치 사지에 전사를 보내는 듯한 말투였다.

복받쳐 오는 감정에,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꿀밤 마렵네. 내가 죽으러 가냐? 죽을래?”

“꿀밤은 봐주십시오. 제가 애도 아니고.”

“애새끼지. 몇 살이나 먹었다고.”

“올해로 마흔 셋입니다만…….”

“머리에 피도 안 말랐군.”

“언제 마릅니까.”

“한 백 살?”

“평생 안 마르는 사람도 많겠군요.”

그래도 나를 알아본 점이 기특하니, 꿀밤은 참기로 했다.

여로로 올라서니, 클라우스는 또다시 할 말이 있다는 듯 나를 잡아 세웠다.

“뭐. 또.”

“황제께서, 음, 은사님을 아끼셨습니다. 진심으로.”

“너 진짜 죽을래?”

“아니요. 봐주세요.”

“간다. 방해하면 죽어.”

“살펴 가십시오.”

클라우스의 깍듯한 인사를 뒤로, 여로가 다시 떠올랐다.

단은 조금 분한 듯 클라우스를 내려다봤다.

“소드 마스터야, 인마. 그중에서도 센 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한 걸 어떻게 합니까.”

“지금 딱 하는 게, 목검 가지고 놀던 꼬맹이가 기사한테 지고 분해하는 거야.”

“도련님. 비겁하게 진실을 들이미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거 내 말버릇인데.”

* * *

“아마 라그힐……. 황제는 렘센 내부의 방비도 제대로 해 뒀을 거다.”

“그렇다면, 어떻게 침입하지요? 마법입니까?”

“인비지빌리티(Invisibility)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흑탑의 마법사가 있어서 논외지.”

“저 알 것 같아요. 정정당당하게 들어가자고 하실 거죠?”

“황성 진입하기도 전에 잔챙이들한테 힘 다 뺄 일 있어?”

“아, 아니네.”

나는 애들의 반지를 조금 조정해서 돌려줬다.

리옐은 반지를 보며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아빠, 뭐 한 거야?”

“위치 조정. 마이어 영지가 아니라, 전선으로 가야 할 것 같거든.”

전술상 트리옌 북부 전선이 밀리고 있을 거다.

웨스트리아 왕국에는 해상도시 퀸틴의 지원군이 합세했을 것이고.

레온하트 북부에는 국가급 전력이 둘이나 있다.

발레리아와 렘브란트가 부딪쳤다면 결판이 났더라도 한쪽이 정상이 아닐 터.

텔레포트(Teleport)가 불가능하다면, 레드라인 후작의 지원에도 시간이 걸릴 거다.

이 애들 정도면, 불리한 전세를 뒤집는 정도는 할 수 있다.

“세 방향으로 나눠서 들어갈 거야. 병력이 집중되면 우리 쪽이 불리하니까, 침투로 간다.”

“어떻게 갑니까?”

“나 혼자, 단 너 혼자, 리옐과 마리나. 이렇게.”

“나도 따로 혼자 심부름 할 수 있는데!”

“리엘 님, 그건 안 돼요.”

어떻게든 들어가기만 하면, 크라우드 컨트롤의 해제는 간단하다.

이후 요아힘 월베른을 최대한 피해서 황제와 독대할 생각이었다.

요컨대, 시선 분산이었다.

“너넨 들어가기 전에 텔레포트해야 돼.”

“하지만, 도련님께서는 남으실 거죠?”

“그래.”

단과 마리나, 리옐.

셋 다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충성심이라고 해야 할까, 얘들은 어쨌든 나를 각별히 따른다.

강아지 세 마리를 키우는 기분이 딱 이런 기분일 것이다.

“그 전에 너희들이 해 줄 일이 있긴 한데, 그건 좀 이따 얘기하자.”

나는 여로의 진행 방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끝이 보이지도 않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국가라고 불러도 좋을 크기의 수도.

멀리서도 화려한 황성이 보이는 팔베르크 제국의 중심부.

요아힘 월베른과 라그힐 팔베르크가 기다리고 있는 곳.

렘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