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불과 얼음 (1)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는 단 록벨런이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들고 있었다.
단의 도약력으로는 닿을 수 없는 높이였으나, 그 발밑에는 나무뿌리가 있었다.
리옐이 눈에 뒤덮여 있던 나무뿌리를 급성장시킨 것이었다.
“그 검 치우십시오!”
스스로 바닥을 때려 충격을 쌓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위치라면, 지그문트 마이어에게도 피해가 갈 터.
클라우스는 단이 충직한 기사라는 것을 이미 알아차렸다.
당연히 검의 힘을 폭발시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어깨 뒤에는 웬 페어리 하나가 앉아 있었다.
-질러!
그와 동시에, 반투명한 장막이 클라우스와 지그문트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리고 장막만큼이나 두터운 신뢰를 증명하듯, 단은 거리낌 없이 검을 휘둘렀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에서 오러와 뒤섞인 충격이 폭발했다.
‘하지만, 아이와 시녀는!’
클라우스는 순간적으로 리옐과 마리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리옐을 품에 안은 마리나는 어느새 여로에서 훌쩍 뛰어내리고 있었다.
공중에서 겨눈 석궁의 화살은 빗나간 듯 클라우스의 발치에 박혔다.
푹!
클라우스는 위력적인 단의 공격부터 회피하려 했다.
그 순간, 화살에서 나온 검은 기운이 팍 터져 나왔다.
끈적끈적한 기운은 마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거지처럼 클라우스의 발목을 묶었다.
‘이런.’
다리의 완력으로 끊어 낼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었다.
오러를 담은 검이라면 끊어 낼 수 있겠지만, 그래서야 늦는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에서 터져 나온 충격이 클라우스의 눈앞에 닿았다.
클라우스는 정면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클라우스를 지나간 충격이 신성 장막에 부딪쳤다.
주변 공기가 뒤흔들리며 고성 위에 쌓여 있던 눈 더미가 후두둑 쏟아졌다.
장막과 충격이 부딪치며 터져 나왔던 연기가 사그라졌다.
단은 조용히 여로 위를 바라봤다.
“꽤 흥미로운 연계군.”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옷자락 일부가 찢어지긴 했지만, 멀쩡한 모습이었다.
역시 쌓은 충격이 부족했던 게 틀림없었다.
단은 혀를 찼다.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단을 향해 명백한 적의를 드러냈다.
“방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단을 바라보던 클라우스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신성 장막 너머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지그문트 마이어가 짜증스럽게 눈을 떴다.
* * *
집중을 끊자마자 느껴진 것은 후텁지근한 열기였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는데, 어째 앞에는 신성이 장막을 쳐 놓은 상태였다.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익숙한 얼굴,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이었다.
아무래도 전투가 벌어진 듯, 검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어디 보자.’
단은 나무뿌리로 얽힌 기둥 위에 올라선 상태였다.
아무래도 리옐이 보조해 준 모양인데, 마리나와 리옐은 보이지 않았다.
마나를 퍼트려 확인해 보니, 여로 아래 지면에 있는 것 같았다.
요컨대, 이놈이 황제의 사주를 받아 우리를 습격한 것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곧장 아공간을 열려다가, 멈췄다.
굳이 검을 뽑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8서클에 적응할 겸, 시험 상대로 제격 아닌가.
“지그문트 마이어?”
“에라이, 시건방진 놈.”
신성 장벽이 유지되고 있다지만, 이미 상당한 충격을 받은 상태.
클라우스가 마음먹고 세게 나오면 찢어질 수도 있다.
근접전인 만큼 빠르게 마나 서클을 회전시켰다.
키이이잉…….
여덟 개의 서클이 동시에 회전을 시작했다.
아래를 빳빳하게 받치고 있던 여로가 내 몸을 휘감으며 로브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받침대를 잃은 나와 클라우스의 몸이 동시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플라이(Fly).
내 몸이 떠올랐다.
기본적으로 기사와 마법사의 싸움은, 거리에서 시작된다.
물론 지금의 나는 근접전으로 붙어도 괜찮긴 했으나.
8서클에 오른 만큼 검을 배제하고 싸워 볼 생각이었다.
사뿐하게 눈밭에 착지한 클라우스가 나를 올려다봤다.
“기사라고 들었는데.”
“글쎄.”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주변에 애들이 있다 보니, 메테오라이트 같은 건 못 쓴다.
단일 대상 마법이 있긴 해도, 아무래도 8서클 단일 대상 공격 마법은 효율이 안 좋다.
손가락을 까딱여 위치를 지정했다.
공간 수정(Modify Space).
그래비티(Gravity).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이 서 있던 장소가 내려앉았다.
땅이 움푹 파이듯 압축되고, 클라우스도 예상치 못한 공격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클라우스가 있는 공간의 중력을 순간적으로 높였다.
압사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과연 소드 마스터는 소드 마스터.
버티긴 하는 모양이었다.
‘아직 안 익숙한가.’
아예 눌러 버릴 셈이었는데, 한쪽 무릎만 꿇고 일어나는 모습이었다.
그사이에 애가 성장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내 몸이 여덟 번째 서클에 적응하기 전이라 이럴 확률이 높았다.
마나 컨트롤은 완벽했는데 마법이 제대로 나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익숙해질 때까지 하면 그만이지.’
나는 아래를 누르는 시늉을 해, 중력의 강도를 올렸다.
* * *
‘이 마법은, 설마?’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지그문트 마이어를 바라보았다.
기사 가문인 막시밀리안가에서 자라온 클라우스는 마법에 대해 잘 모른다.
그 어쭙잖은 지식으로도, 지그문트가 사용한 마법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의 은사인 델 로안이 종종 클라우스의 훈련을 도운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클라우스는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더 극한 상황에서 수련을 하고 싶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계를 데려가 달라는 거냐?
-리아, 그 아이에게 얼핏 들었습니다. 지옥에 다녀오셨다고.
-에라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아. 지옥 오고 가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느냐?
-그, 그렇습니까?
-베르제한테 출입국 수속 생략해 달라고 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빚을 진 게 된단 말이다.
델 로안은 지옥 대신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바로 일정한 공간의 중력을 늘려, 전신의 몸을 일시적으로 무겁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드래곤한테 소원 빌러 간 놈이 쓰던 수련법이다.
-이미 이 수련을 거쳐 간 사람이 있다고요?
-원숭이였어. 각설하고, 할 거냐?
클라우스는 그때 지옥을 봤다.
델 로안은 클라우스가 원하는 대로 정말 극한 상황을 만들어 줬다.
그 덕택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지만, 다시 겪고는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문제는 지그문트 마이어의 마법이 그와 비슷한 경향이 있었다는 것.
또 다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렘브란트 님푸스.
-무엇인가. 클라우스 막시밀리안.
-예전에 은사님께서 중력을 강화해서 공간을 만들어 준 적이 있는데 말이야.
-지금 그걸 나보고 해 달라는 건가?
-은사님은 바쁘신데 어떡하나.
-프레스(Press)가 아닌 것 같은데. 중력은 나도 어찌할 수 없다.
-뭐?
-나 이외에도 모든 탑주가 그리 말할걸. 그런 걸 할 수 있는 건 대공뿐이란 말이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진정으로 두려워 한 사람은 서대륙 내에서 딱 한 명.
“델 로안?”
“에라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지그문트는 인상을 구기고 중력을 추가했다.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결국 땅에 엎드리게 됐다.
* * *
“정말 은사님이 맞으십니까?”
“그래, 이놈아. 너도 흑역사 한 번 읊어 줘?”
“예?”
“어디 보자. 열네 살 땐가. 검 좀 다룬다고 기고만장해져선 리비아 영애한테 들이댔다가 양쪽 뺨 맞고 이틀 밤을 울었지.”
“그, 그걸 어떻게.”
“발레리아한테 체스 가르쳐 준답시고 했다가, 처참하게 발린 적도 있지. 그때 리아가 여덟 살이었던가.”
“어흑.”
발레리아도 그렇고, 클라우스도 그렇고.
어째 내 주변 인물들은 의심이 많았다.
하기야 내가 그렇게 가르치긴 했지만 말이다.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나는 짤막하게 설명했다.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해라. 좀 복잡해.”
“그렇군요. 안 믿을 수도 없겠습니다. 말투나, 분위기도 그렇고요. 그래서 그 정도 힘을?”
“다시 키운 거거든? 얼마나 빡셌는데.”
“이제 1년 정도 되지 않았습니까? 한데, 지금 경지가.”
“반신, 소드 마스터, 8서클.”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멍청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이상한 걸 듣기라도 한 듯 삐걱거리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됐고, 마저 싸우자.”
나는 이름 없는 검을 뽑았다.
다음에 시험할 건 8서클 마법과 검의 혼합이었다.
주변에 애들이 있어서 메테오라이트(Meteorite) 같은 대규모 마법은 못 쓰지만.
그래도 요아힘 월베른과 부딪치기 전에 조금이라도 힘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클라우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검을 잡았다.
“저는 은사님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네 뒤에 요아힘 월베른이 버티고 있는데, 몸 풀기는 해야지.”
“월베른 경 말씀이십니까……? 설마.”
“황제 잡으러 간다. 비킬 거면 비키고, 싸울 거면 싸워.”
소드 마스터라고 다 같은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다.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요하네스 레드라인과 더불어 상위라고 평가 받는다.
그래도 얘한테 고전한다면, 요아힘 월베른에게는 턱도 없었다.
“과연, 아직 힘에 익숙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그래.”
클라우스는 고민했다.
말하는 걸 들어 보니, 황제의 편은 아닌 모양인데.
그렇다고 나를 도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애초에 그런 놈이었다.
황제와도 나와도 연이 적지 않은 놈이니,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기 뭐할 것이다.
요아힘 월베른과 비슷하게 달관적인 태도를 보일 확률이 높았다.
“좋습니다. 죽이진 말아 주십시오.”
“안 죽어. 아마.”
내 검술 능력은 아마 소드 마스터 상위까지는 못 닿는다고 생각한다.
엘트렛 커큰과 겨뤘을 때 확실히 느낀 바 있다.
요하네스와 엘트렛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있었다.
그래서 검술도 마법에 맞춰 상승시킬 생각이었다.
마침 눈앞에는 상위 소드 마스터라는 좋은 기연이 있지 않은가.
“도련님.”
“괜찮아.”
단은 걱정 어린 얼굴이었지만, 이내 마리나와 리옐을 데리고 물러섰다.
나는 자세를 낮추고, 이름 없는 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클라우스는 흥미 어린 눈으로 내 검을 바라보았다.
“딴 데 보지 마라. 나 꽤 세졌거든.”
“은사님과 검은 정말 안 어울립니다만.”
“한 번 붙어 보면 알 거야.”
클라우스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래서, 나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마나 번(Mana Burn), 최대 출력.
* * *
레온하트 왕국 북부, 코스타 영지 북서쪽에서 제국군과 연합군이 정면충돌했다.
연합군은 수만에 달했으나, 제국군은 그 열 배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왔다.
날붙이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 비릿한 혈향과 끈적끈적한 피의 감촉.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전장에서, 파울 레드라인은 악전고투를 이어 나갔다.
콰앙!
부서진 검 조각이 흩어졌다.
제국군 측 기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 자루를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이빨로 만들어졌다는 검과 검을 부수는 검의 시너지는 상당했다.
부지불식간에 기사를 쓰러트린 파울은 다음 상대를 찾아 눈을 굴렸다.
그때, 파울의 사각에서 죽은 척하고 있던 제국군의 병사가 창을 찔렀다.
“파울 레드라인!”
파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가세한 것은, 동대륙의 기사, 무연이었다.
무연의 검이 창끝을 정확히 쳐 냈다.
가까스로 치명상을 면한 파울은 인상을 찡그린 채 죽은 척하던 병사를 처리했다.
“헬름, 누가 도우랬지?”
“도움을 받았다면 고맙다 해라.”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였다.”
“배에 구멍이 난 상태에서도 그렇게 말했을까.”
무연은 전쟁 용병 신분으로 참전했으나, 몇 번의 전투에서 곧장 눈에 띄어 선봉에 포함됐다.
불안정하지만 파괴적인 파울과 상극 같으면서도 묘하게 합이 잘 맞아, 서로 등을 맡겼다.
티격태격하지만 그사이에 꽤 두터운 신뢰가 쌓인 상태였다.
뿌우우우우!
그때, 후퇴를 알리는 긴 뿔피리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연합군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파울과 무연도 시선을 주고받고, 곧장 뒤로 빠졌다.
둘이 위치한 곳은 최전방 중에서도 선봉.
낙오는 죽음으로 직결되니, 머뭇거릴 틈은 없었다.
“커억!”
“끄아아아악!”
연합군은 물러섬 없이 싸웠으나, 제국군은 강력했다.
숫자 면에서도 크게 밀릴뿐더러, 기사의 수도 차이가 났다.
파울과 무연은 꽤 활약했으나, 수십 만의 병력이 부딪치는 전장에서는 미미한 정도였다.
‘여기서 후퇴 명령이라니, 뭐지?’
파울 레드라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완전한 공세는 아니었으나, 그가 보기에 전황은 비등비등한 수준이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가면을 뒤집어쓴 마법사들도 꽤 활약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요하네스 레드라인이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진짜배기 검을 부수는 검은 위력 면에서부터 달랐다.
검을 휘두르자 오러가 거의 쏘아져 나가듯 전방을 휩쓸었다.
요하네스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의 제국군이 쓸려 나갔다.
“후퇴!”
그러나 요하네스 또한 후퇴가 옳은 판단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연합군의 퇴로를 확보함과 동시에, 공세로 돌아선 제국군을 견제한다.
최소한 그 주위에 있는 병력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는 듯 보였다.
“스웜(Swamp)!”
파울과 무연을 추격하던 제국군의 발밑이 푹 가라앉았다.
돌연 발치가 늪으로 변해 빠져 버린 것이었다.
성벽 밖으로 나선 적탑의 마법사들이었다.
무연은 의외의 얼굴을 발견하고 반색했다.
“이안!”
“무연 님! 어서 물러서십시오! 옵니다!”
“온다니?”
“큭! 어서요!”
파울은 하늘 위를 올려다봤다.
낮게 드리운 먹구름 아래, 작은 점 하나가 보였다.
그것은 분명히 사람이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인물의 정체는, 흑탑주 렘브란트 님푸스.
그 앞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여러 개 형성되어 있었다.
우박과 같은 작은 얼음 덩어리가 발치로 툭툭 떨어졌다.
“미친.”
연합군에 후퇴 명령이 내려온 이유는 바로 한 인물.
흑탑주 렘브란트 님푸스가 가세했기 때문이었다.
시린 한기를 내뿜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마법진에서 빠져나왔다.
렘브란트 님푸스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7서클의 대규모 공격 마법, 블리자드(Blizard).
불꽃도 얼린다는 냉기의 폭풍이 전장 상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쿠구구구구구구…….
렘브란트 님푸스는 명령하듯 손을 내렸다.
그러자, 마법진 밖으로 빠져나온 얼음 덩어리가 전장에 떨어졌다.
제국군의 위치를 고려한 것인지, 노린 것은 연합군의 후방 부분.
콰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지축이 뒤흔들렸다.
순간적으로 폭발한 냉기에 피부가 시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파울이나 요하네스가 있는 위치와는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나.
“허.”
“저게, 마탑주.”
7서클 마법의 위력은 대단했다.
얼핏 보기에도 수천에 달하는 피해가 예상됐다.
순식간에 후방 부대의 일부가 와해된 것이었다.
발레리아 로안과 어느 정도 연이 있었으나, 대규모 공격 마법은 처음 목도한 파울이었다.
그렇기에 다소 충격을 받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에노드 수성전에서 지그문트의 종합 선물 세트를 목격한 바 있는 무연은 달랐다.
곧장 파울의 등을 내리쳤다.
쩌엉!
파울은 인상을 찡그리고 옆을 바라보았다.
감히 용병 주제에 귀족 자제의 등을 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헬름에게는 무례함 대신 다급함 섞인 걱정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니 있지 마라!”
“알고 있어!”
사기가 오른 제국군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무모한 성향의 파울이라도 부담스러운 수였다.
“빌어먹을!”
* * *
렘브란트 님푸스는 영창을 이어 나갔다.
팔베르크 제국에서는 그에게 순도 높은 마석을 대거 제공했다.
그 결과, 렘브란트는 가히 공성 병기 수준을 넘어선 위력을 낼 수 있었다.
연달아 사용하는 대규모 공격 마법의 파괴력은 어마어마했고, 연합군은 저항조차 못했다.
‘발레리아 로안은 이 전장에 없는 건가.’
그러나 마탑주를 보유한 것은 제국군 측뿐만이 아니었다.
연합군, 정확히는 레온하트 왕국에는 마탑주가 있다.
대마법사의 제자,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
첫 번째 작전에서 제국 측으로 끌어들였다면 전쟁의 승산이 비약적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서대륙에 남은 마탑주는 아주 적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들이 전쟁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유감이군.’
요하네스 레드라인은 선전했다.
실제로 그 손에 죽어 나간 제국군이 벌써 수천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전쟁에서 소드 마스터와 마탑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대인전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강한 소드 마스터라도 마탑주와 같은 위력을 낼 수는 없다.
같은 국가급 전력이더라도, 연합군 측에서는 요하네스를 상쇄할 전력이 없었다.
‘비록 델 로안은 어쩔 수 없었다지만…….’
렘브란트 님푸스는 델 로안을 살해한 장본인이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그 방법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이미 그의 약점을 쥐고 있었고, 렘브란트는 그것을 연구했을 뿐이다.
비록 그 연구도 수년에 걸치는 시간이 걸렸으나, 정당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됐다.
‘그 제자는.’
그래서 렘브란트는 델 로안 대신 발레리아에게 적의를 보였다.
성씨가 같다는 점에서 발레리아는 델 로안의 유지를 이어 나가고 있는 인물이었다.
레온하트에 갈 때마다 대놓고 적의를 드러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진실을 아는 것 같았다.
하여 이번 전쟁에서 렘브란트는 발레리아 로안을 죽이고자 했다.
‘없나.’
렘브란트는 무심하게 영창을 마쳤다.
수십 개의 마석을 깨트린 결과.
7서클 대규모 공격 마법에 해당하는 블리자드도 고속으로 영창할 수 있었다.
그래도 무영창은 무리였고, 델 로안과 같은 속도는 무리였지만 말이다.
“블리자드(Blizard).”
다시 한번, 냉기의 폭풍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노리는 것은 후퇴하고 있는 연합군의 후미.
요하네스 레드라인을 비롯한 강자가 다수 포진한, 연합군의 선봉이었다.
제국군 측도 그 여파에 휩쓸리겠지만, 이득이 더 크다면 렘브란트는 주저할 생각이 없었다.
쿠오오오오…….
렘브란트는 무심히 블리자드를 전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주변이 일렁이는 것을 목격했다.
“안녕!”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
붉은 로브를 나부끼며, 한 손에는 이글거리는 화염의 창을 들고 있다.
“이 개자식아!”
플레임 스피어(Flame Spear).
발레리아의 전매특허 마법인 불꽃의 창이 렘브란트를 향해 날아왔다.
렘브란트 님푸스는 블리자드 영창을 중단하고, 순식간에 새로운 마법을 캐스팅했다.
아이스 배리어(Ice Barrier).
치이이이익!
수증기가 터져 나오며, 서로의 마법이 상쇄됐다.
렘브란트는 발레리아 로안을 직시했다.
“발레리아 로안.”
“이름 부르지 마. 부정 타.”
“흠, 어렸을 때는 그래도 예의가 있었는데 말이야.”
“적에게 예의 갖출 정도로 고상하진 않아서. 유감이야.”
“죽으면 나불거리지 못할 입이니, 놀리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다.”
“동감이야. 실컷 나불거려. 너 오늘 죽을 테니까.”
발레리아는 으르렁거렸다.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라그힐은 발레리아를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아무리 렘브란트 님푸스라도 그 명령을 따를 여유는 없었다.
발레리아 로안은 비교적 최근에 7서클에 오른 만큼, 마탑주 중에서는 저평가 받지만, 렘브란트의 생각은 달랐다.
델 로안의 제자가 그렇게 만만할 리 없지 않은가.
‘방심하면 당한다.’
발레리아 로안은 실전에 강한 마법사다.
델 로안은 그녀를 두고 지옥에 떨어트려도 살아 돌아올 마법사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실제로 지옥에 떨어트려 봤더니, 살아 돌아온 일화는 꽤 유명했다.
펄럭.
둘은 동시에 로브 자락을 뒤로 들쳤다.
양쪽 모두 허리에는 마도서가 매달려 있었다.
둘은 마도서에 손을 올리고 비슷하게 입을 달싹였다.
화악.
발레리아 로안 주변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반대로 렘브란트의 로브 자락에서는 서리가 꼈다.
마법사와 마도서가 연결되며 지속되는 일종의 각성 상태.
“제국에 있을 때부터, 당신은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지.”
“우연이군. 나도 그랬는데 말이야.”
렘브란트와 발레리아는 서로를 향해 완드를 겨눴다.
특히 발레리아는 오늘만 기다렸다는 듯 상당히 호전적이었다.
델 로안이 렘브란트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일인데, 여태껏 지그문트의 움직임 때문에 어찌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기회가 온 것이다.
“서클 부스트(Circle Boost).”
“서클 부스트(Circle Boost).”
또다시 목소리가 겹쳤다.
하지만 렘브란트와는 달리 발레리아는 정면 승부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오래 전 델 로안이 죽으며 렘브란트 님푸스에게 걸었던 저주와 같은 마법.
발레리아 로안은 지그문트에게 그것을 활성화하는 방법을 배웠다.
무언가를 움켜쥐는 듯한 손동작과 함께, 발레리아가 중얼거렸다.
“지연된 죽음(Delayed Death) 활성화.”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