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인간의 한계
웨스트리아 왕국의 국왕, 볼프강 웨스트리아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수성전에서 이미 한 번 두각을 드러낸 바 있는 왕녀, 엘레너 웨스트리아.
그녀는 이번 전쟁에서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있었다.
모두 참신하고 효율적인 전술이었기에 귀족들의 존경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지그문트가 선물이랍시고 주고 간 수제 전술 교본 덕분이었다.
제목이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전술 교본, 응용편’인 점은 여전히 마음에 안 들었으나.
유려한 필기체로 쓰인 내용은 국가 교본으로 채택해도 될 정도로 깊고 방대했다.
‘위기라고 생각했건만, 아이들이 이토록 잘해 줄 줄이야.’
아이들.
엘레너뿐만 아니라, 왕자 프레드 웨스트리아까지 기이할 정도로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
멜릭이라는 마족에게 조종당한 불명예를 끌어안고 좌절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우였다.
오히려 탄력을 받은 듯 엘레너 웨스트리아와 다른 부분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특히 레온하트나 트리옌과의 교류에 있어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중이었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올 거라고 한 지원군, 퀸틴의 인어를 맞이한 것도 프레드였다.
‘이번 위기만 극복한다면, 웨스트리아의 미래가 밝구나.’
볼프강 웨스트리아의 생각과는 다르게, 프레드 웨스트리아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번 수성전 이후로 생생하게 보이는 노인의 환영 때문이었다.
-뭘 보느냐.
그는 스스로를 팔베르크 제국의 대마법사, 델 로안이라고 소개했다.
듣던 것과 달리 험상궂게 생겼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원래는 이렇게 생기진 않았다고 한다.
델 로안은 프레드 웨스트리아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했다.
그 덕에 팔베르크 제국의 첩자들을 모두 뿌리 뽑았다.
엘레너와 전술에 관해 토론한 적도 있는데, 일목요연하게 훈수를 두며 도와주기도 했다.
“아, 아닙니다.”
비록 처음에는 제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믿지 못하고 사제를 찾아가기도 했다.
나쁜 인물이 아니라는 걸 알았음에도 성격은 그리 좋은 편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허구한 날 훈수란 훈수는 다 뒀으며, 사소한 것에서 신랄하게 비판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 덕택에 프레드 웨스트리아는 마족에게 씐 왕자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었다.
-지금쯤 퀸틴군이 도착했을 거다. 문제는 테이럼 변경백인데.
델 로안의 환영은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전황을 척척 들어맞히곤 했다.
고민 없이 척척 예언과 같은 일을 해내는 델 로안이 드물게도 침음을 흘렸다.
프레드 웨스트리아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분명 엘트렛 경께서 상성상으로도 실력상으로도 우위에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델 로안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황제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테이럼을 파견했을 리 없었다.
뭔가 손을 썼을 것이 분명한데, 그것이 뭔지 예측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다.
-변수는 양쪽에 있으니, 승률은 절반일 게다.
* * *
웨스트리아 동남부 전선, 골짜기 아래.
엘트렛 커큰과 테이럼 변경백은 검을 절벽에 꽂아, 속도를 줄여 생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공간이었다.
그어어어어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뒤틀린 불사의 병사 수백이 땅바닥에 있었다.
아까와는 반대로, 테이럼이 아니라 엘트렛이 적진에 들어온 형국이었다.
하나 다행인 점이 있다면, 위에서부터 쏟아진 물세례로 생긴 물웅덩이와 습기였다.
물 이외의 약점이 없는 테이럼 변경백에게 대항할 최소한의 수단은 있었다.
휙!
그때, 테이럼 변경백이 탈출을 시도했다.
땅을 박차고 뛰어, 절벽을 디디고 올라간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엘트렛 커큰이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콰앙!
절벽을 방패로 내려치자, 테이럼이 디디고 있던 돌출부가 우르르 무너졌다.
자칫 물웅덩이에 떨어질 수도 있었기에, 테이럼은 안전하게 불사의 병사 위로 착지했다.
“결판은 봐야 하지 않겠는가. 테이럼 변경백.”
“아무래도 그냥 보내 주지는 않으려는 모양이오.”
“내 부하들을 학살하게 둘 수는 없어서 말이지.”
엘트렛은 듀얼링 실드를 치켜들었다.
죽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죽일 셈이었다.
테이럼은 엘트렛을 바라보다가, 검을 들었다.
“어느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죽는 건 당신일 것이오. 나는 죽지 않는 몸이니.”
“물에 닿으면 솜처럼 녹아내리는 몸으로 잘도 말하는군.”
“엘트렛 당신이 마법사나 정령사가 아닌 것은, 행운이지.”
“잡설이 길군.”
먼저 치고 나간 것은 엘트렛이었다.
소모전으로 가면 불리한 것은 엘트렛이었다.
골짜기 위에서도 밀리는 형국인 데다가, 상대의 재생 능력은 초월적이다.
빠르게 승부를 봐야 했다.
“이제 거리낄 것도 없으니.”
엘트렛 커큰은 두 다리를 벌리고, 땅을 단단히 디뎠다.
자세를 낮춘 뒤, 오른팔에 들린 듀얼링 실드를 옆으로 젖힌다.
“제대로 해 볼까.”
“좋소.”
테이럼 변경백 또한 자세를 바꿨다.
두 소드 마스터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리고 누가 빠르다 할 것 없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쾅!
짧은 순간에 수십 번의 공방이 오고 갔다.
테이럼 변경백은 불사라는 특성을 적극 활용했다.
치명상이더라도 절단되지 않을 정도의 상처는 감수하며, 과감한 공격을 노렸다.
테이럼이 이런 식으로 나오니, 엘트렛은 상대적으로 수비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비적이더라도, 엘트렛의 방패술은 압도적이었다.
‘공방일체.’
테이럼 변경백의 평가는 그랬다.
방어와 공격이 거의 하나가 되어 있는, 듀얼링 실드라는 무기를 완벽하게 활용한 움직임.
검을 놓고 방패를 들었기에 수비적일 거라는 오인을 종종 받는 엘트렛 커큰이었으나.
테이럼이 직접 부딪쳐 본 결과, 엘트렛은 오히려 공격적인 쪽에 가까웠다.
콰아아앙!
엘트렛의 방패 끝이 테이럼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가, 절벽을 때렸다.
약해진 지반이 무너지며, 위에서 바위가 떨어져 내렸다.
테이럼은 엘트럿의 발등에 검을 꽂으려 했다.
어차피 바위에 맞아 죽어도 되살아난다.
‘같이 맞아 죽는다면, 이기는 건 나다.’
그렇게 판단했으나, 엘트렛은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방패를 틀어, 테이럼을 절벽으로 밀어붙였다.
쾅!
온몸이 짓뭉개지는 듯한 충격.
폐에서 공기가 전부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피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승리를 확신하던 테이럼은 기묘한 부유감을 느꼈다.
엘트렛이 방패 끝을 삽처럼 사용해 테이럼을 통째로 들어낸 것이었다.
“큭!”
문제는 아까의 충격으로, 테이럼이 움직일 수 없었다는 것.
‘이런! 빌어먹을!’
바위가 테이럼을 쳐올리고 있는 방패와 정면충돌했다.
쿠우우우웅!
엘트렛은 땅을 단단히 디디고 서서 충격을 버텨 냈다.
땅을 디딘 발이 움푹 들어갔다.
돌가루와 먼지구름이 퍼져 나갔다.
부서진 바위가 양옆으로 떨어졌다.
엘트렛은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를 밀어냈다.
쿵!
바위를 치우고, 주변을 살폈다.
돌무더기 사이로, 테이럼 변경백의 옷가지가 보였다.
그것을 확인하려고 다가간 순간.
푹!
엘트렛 커큰의 등에 검이 박혔다.
거의 넝마가 된 테이럼 변경백이 그 뒤에 서 있었다.
옷가지를 미끼로 기습한 것이었다.
“……테이럼 변경백.”
“인생은 실전이오. 엘트렛 커큰.”
명예가 없는 승리더라도, 테이럼 변경백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불사의 몸으로도 불리한 형세를 뒤집으려면 이 수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엘트렛은 이를 악물었고 저주했다.
“목오께서 자네를 벌하실 거야.”
“오래 전에 죽은 신은 알 바 아니지.”
그때였다.
위에서 돌연, 엄청난 양의 물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 것이다.
마탑주라도 온 듯한 물의 양에, 테이럼이 아연실색했다.
“저게, 무슨!”
“지원군이, 제때 도착했나 보군.”
황급히 검을 뽑으려 했으나, 엘트렛의 몸을 관통한 검은 뽑히지 않았다.
엘트렛은 손이 잘릴 각오로 제 배를 뚫고 나온 검날을 붙잡고 있었다.
테이럼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려 했으나.
쿵!
엘트렛의 발이 테이럼의 발등을 단단히 찍어 버렸다.
이래서야 도망칠 수도 없었다.
테이럼은 기겁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해일과 같은 폭포가 두 소드 마스터를 덮쳤다.
* * *
팔베르크 제국은 드넓었고, 여로는 별 탈 없이 비행을 이어 나갔다.
쭉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체력 손실이 크다고 판단해, 단과 마리나는 교대로 사주를 경계했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명상에 들어간 지 몇 시간이 지났다.
“아빠, 괜찮을까?”
리옐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그문트는 평소와 달리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표정도 크게 일그러져 있는 것이, 종종 명상하던 때와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애초에 7서클, 탑주를 넘어서는 일이니 쉬울 거라 생각하진 않았으나, 뭐든 척척 해내는 지그문트가 고역을 치르니,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괴물.
반면 신성은 질렸다는 눈으로 지그문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심동체에 가깝기에, 지그문트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을 행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러로 육체를 보호하고, 신성으로 정신을 유지하며 여덟 번째 서클을 만든다.
일곱 번째 서클, 대서클과 다른 서클을 모두 회전시켜 형성 속도를 가속한다.
사실상 몸에 있는 세 가지 힘을 전부 응용하면서, 힘을 증가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경이.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인간의 계산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각각 계산 능력이 초월적으로 뛰어난 자아가 네 개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그문트 마이어는 조금 버거워 보일지언정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심지어 여덟 번째 서클은 한 치의 부족함 없이 완벽하게 형성되는 중이었다.
“잘은 몰라도, 잘되고 있는 건가 봐요.”
마리나는 신성의 말에서 핵심을 유추해 냈다.
리옐의 기괴한 설명을 듣다 보니, 해석과 유추하는 능력이 늘어난 것이다.
신성은 장하다는 듯 마리나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똑똑.
마리나는 뿌듯하면서도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그것을 본 리옐이 덩달아 머리를 쓰다듬자, 마리나의 몸이 베베 꼬였다.
여로가 향하는 방향을 지켜보던 단은 인상을 찡그렸다.
‘저건.’
렘센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증명하듯 종종 영지가 보이긴 했으나.
이번에는 뭔가 이상했다.
하얀 눈밭 위에 있는, 오래된 고성.
그 꼭대기에 누군가 서 있었다.
기이한 압도감에 단이 몸을 움츠렸다.
‘이건.’
레드라인 후작이나 지그문트 마이어에게서 느꼈던 압박감.
즉, 소드 마스터였다.
지그문트가 말하길, 글레엄 백작과 아인더는 남부에.
테이럼 변경백은 서부 웨스트리아에 있다고 했다.
지그문트는 그를 두고 이렇게 경고했다.
‘혹시 얘를 만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정말 최악이야. 죽을 수도 있다.’
단은 몸을 긴장시켰다.
고성에 위에 서 있던 소드 마스터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단의 양팔이 잘려 나갔다.
“허억!”
단은 헛숨을 내쉬며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들었다.
순간, 분명 양팔이 잘려 나간 것 같았다.
그러나 힘이 제대로 안 들어갈지언정, 팔은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어깨에 내려앉은 공포가 목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단 아저씨, 괴롭히지 마!”
용감하게 나선 리옐이 빽 소리를 쳤다.
그와 동시에 단을 질식사시킬 요량인 듯 옥죄이던 압박감이 풀어졌다.
고성 위의 소드 마스터는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마리나는 여로 위에 손을 올렸다.
지그문트가 간단한 명령을 입력해 놓았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도망칠까요?”
“아니요. 내려가야 합니다.”
“네? 하지만 저분은.”
“소드 마스터겠지요. 여로가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격추 당할 겁니다.”
단은 엘트렛 커큰이 돌을 던져 날아가는 새를 터트리는 것도 본 적 있다.
만약 던지는 것이 돌이 아니라 검이라면.
여로는 분명 잘려 나갈 것이고, 위에 타고 있던 이들이 위험할 것이다.
무엇보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집중이 깨질 가능성이 있었다.
차라리 내려가는 편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리나는 걱정 어린 얼굴이었지만, 단의 말에 납득했다.
“아래로.”
여로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눈 덮인 검은 고성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듯했다.
단에게 살기를 보낸 소드 마스터 이외에는 말이다.
여로가 아래로 내려가고, 단이 바닥에 내려갔다.
“단 님, 조심하셔야 돼요.”
“알고 있습니다.”
어느새 고성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온 소드 마스터는 흥미로운 눈으로 단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단이 들고 있는 클레이모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은 소드 마스터를 가만히 관찰했다.
짙은 눈썹과 깊은 눈, 입술은 고집스럽게 다물어져 있다.
턱선을 따라 멋들어지게 자란 수염까지, 지그문트가 말했던 것과 일치했다.
‘막시밀리안 가문의 소드 마스터.’
막시밀리안은 기사 가문으로 서대륙 내에서 유명세를 떨친 가문이었다.
레드라인도 이름이 높지만, 그건 지금의 가주, 요하네스 레드라인 후작 덕분이다.
반면, 막시밀리안은 유서 깊은 기사 가문이었다.
무려 3대에 걸쳐 소드 마스터를 배출한 검가(劍家).
그중에서도 희대의 천재라 불리며, 레드라인 후작보다 위라고 평가 받기도 하는 이 인물.
“클라우스 막시밀리안 공작.”
“공작위는 버린 지 오랜데, 빼 줬으면 하는군.”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검도 뽑지 않고 가만히 단의 검을 바라보았다.
단은 검을 든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클라우스가 단에게 다가왔다.
‘어?’
긴장하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검날이 잡혀 있었다.
클라우스는 단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 검날을 세심하게 살폈다.
적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무생물이 걸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큭!’
단은 뒤늦게 검을 쥔 손에 힘을 줬으나.
클라우스는 간단하게 검날의 면 부분을 검지와 엄지로 집고, 검을 빼앗아 버렸다.
놀란 단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클라우스를 바라보았다.
클라우스는 그 와중에도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군. 한 번 망가졌나 보지?”
“그걸 어떻게…….”
“그야 이것이 막시밀리안의 유산이니까.”
단도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목오 사막의 던전에서, 델 로안의 기억과 지그문트 마이어가 투덕거렸던 것이 떠올랐다.
-그 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막시밀리안의 유산’ 중 하나인데 말이야.
-시간 없어. 축약해서.
-겁나 좋은 검이라네. 차차 알게 되겠지.
단은 클라우스에게 말을 건네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검에 혹한 단은 선뜻 검을 받았으나, 만약 저 검이 주인이 있는 검이라면.
도리에 맞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주인이 있는 검인 줄 모르고 다뤄 왔습니다.”
“음?”
“검은 돌려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싸울 수 있도록 검 한 자루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멍한 눈으로 단을 바라보았다.
고개 숙인 단의 볼을 타고 비지땀이 흘렀다.
눈앞에서 검을 뺏긴 기사가 여기 있었다.
무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클라우스는 폭소했다.
“으하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어찌나 소리가 크면 지붕 위에 쌓여 있던 눈이 후두둑 떨어질 정도였다.
마리나와 리옐도 버티지 못하고 양손으로 두 귀를 꼭 막았다.
고막이 아팠지만, 단은 고개 숙인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한참 웃던 클라우스가 독려하듯 단의 등을 두드렸다.
“마음에 드는데!”
마리나는 선뜻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팔베르크 제국의 소드 마스터다.
귀족위를 버렸다고 해도, 분명한 팔베르크 제국 소속이었다.
클라우스는 씩 웃으며 단에게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돌려줬다.
“기사가 명예를 버린 시대인데 말이야. 자네에게는 명예가 있군. 이름이 뭔가?”
“지그문트 마이어 도련님의 기사, 단 록벨런이라고 합니다.”
“단 록벨런, 단 록벨런. 좋아. 기억했다.”
“검은, 가져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 검은 막시밀리안의 유산이나, 소유권은 막시밀리안가에 없다. 주인은 내가 아니야.”
단의 손으로 돌아간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가 옅게 울었다.
“이 아이도 자네를 좋아하지 않는가.”
“좋아한다니요? 이 검이 에고 소드라는 말씀이십니까?”
“글쎄. 높은 망치의 작품이니, 그럴 수도 있지! 흐하하하!”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호쾌하게 웃으며 여로 위를 올려다봤다.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던 리옐과 눈이 마주쳤다.
클라우스가 살짝 손을 흔들었지만, 리옐은 쏙 들어가 버렸다.
거의 무조건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리옐치고 드문 반응이었다.
“이런. 미움 받은 모양이야.”
“나쁜 아저씨!”
리옐은 얼굴을 반쯤 내밀고 클라우스를 질타했다.
클라우스가 단을 위협한 것을 느끼고, 적이라 판단한 것이다.
마리나가 급하게 리옐을 끌어안아 숨겼다.
클라우스는 귀엽다는 듯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사담이 길었군. 단 록벨런. 지그문트 마이어의 기사라 했지.”
“그렇습니다. 혹시…… 눈 감아 주실 수 있습니까?”
단은 염치 불구하고 클라우스에게 양해를 구했다.
지그문트는 클라우스를 두고 적이지만, 적이 아닐 수도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팔베르크 제국에 대한 소속감 자체가 옅기 때문에, 마주치거든 피해 보라고 했었다.
단 또한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이 나쁜 인물이라는 생각은 일절 들지 않았다.
클라우스는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마음 같아선 그냥 보내 주고 싶은데 말이야.”
“그렇다면.”
“팔베르크에 저당 잡힌 것이 있어서, 따라야 하는 입장이야.”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어느 순간부터 검을 들고 있었다.
검을 뽑았다는 것은 적대의 표시이며, 확연히 드러나기 마련인데.
단은 클라우스의 움직임을 눈으로 보고 있었음에도, 인식하지 못했다.
적잖이 당황한 단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어디 있지?”
“위에 계십니다.”
“내려오지 않을 셈인가?”
“내려오실 수 없는 상황입니다.”
“뭔가 사정이 있나 보군. 그래, 좋아. 그럼 단 자네가 내 상대를 하겠나?”
단은 이미 두 번이나 소드 마스터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었다.
더불어,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어트 한넬과 같이 균형을 중시하는 기사.
승산은 없었지만 적어도 버틸 자신은 있었다.
엘트렛 커큰 또한, 단이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부족하지만, 해 보겠습니다.”
“좋아. 기사는 등을 보이면 안 되지.”
* * *
“죽기엔 아까운 인잰데.”
“저는 안 죽습니다.”
“오, 어찌 아나?”
“아는 법이 있습니다.”
단은 클라우스의 검을 응시했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봤을 때와 같은 감상이었다.
검이라기보다는 정교한 예술품에 가까운 듯한데, 실용성을 중요시한 검.
본능적으로 같은 장인, 높은 망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비하게.”
친절하게 경고한 클라우스가 단에게 달려들었다.
단은 땅을 단단히 디디고 클라우스를 직시했다.
엘트렛 커큰과 지그문트 마이어.
비록 정식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단은 두 명의 소드 마스터를 스승으로 뒀다.
그렇기에, 소드 마스터의 검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끼긱.
클라우스의 검이 단의 검과 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클라우스는 손목을 틀어, 검로를 바꿨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는 충격을 흡수, 방출하는 아티팩트.
일부러 충격을 피한 것이다.
대신 검날을 긁듯이 내려가다가.
“어?”
단은 다시 한번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클라우스의 검이 단의 검을 휘감은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는 클라우스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이런!’
검을 쥐고 있는 것은 단이었으나, 검을 빼앗긴 듯한 느낌이었다.
묘한 방식으로 힘을 역이용했는데, 그것이 꼭 지그문트 마이어의 방식과 닮아 있었다.
‘휘둘리면 안 된다.’
검이 내려가는 순간, 완전히 무장해제 당하는 꼴.
단은 일단 거리를 두기 위해, 검을 튕겨 내려 했다.
그러나 클라우스의 검은 단의 검과 붙기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키이잉!
그 과정에서, 오러가 맞부딪쳤다.
당연하게도 단의 오러는 소드 마스터의 오러에 비해 떨어졌다.
오러가 맞부딪치는 과정에서, 크게 손해 보고 있는 것은 단 록벨런.
단은 차라리 검을 찍어 내려, 클라우스와 동시에 무장해제 되고자 했다.
그러자.
텅!
클라우스는 검날의 면 부분을 걷어차, 힘을 실었다.
내려가던 검이 충격에 도로 올라왔다.
소리는 컸지만 고작 발로 걷어찬 것이라 힘이 약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순식간에 단은 주도권을 잃었다.
‘무슨 힘이!’
그와 동시에, 검이 뱀처럼 클레이모어를 타고 올라갔다.
단은 초인적인 반사 신경을 발휘해, 검을 틀었다.
캉!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 손잡이 장식 부분이 부서졌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검 끝이 목으로 똑바로 날아왔을 것이었다.
정적인 싸움이었지만, 단은 식은땀을 흘렸다.
‘강하다.’
어트 한넬이나 테이럼 변경백과 같은 소드 마스터는 고평가 받지 못한다.
어느 한쪽으로도 특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아래에 있는 기사는 가볍게 씹어 먹겠지만.
소드 마스터끼리의 싸움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반면, 같은 균형적인 검술을 사용함에도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의 검은 달랐다.
‘균형 잡힌 검술이 완성형을 이룬다면.’
이도 저도 아닌 게 아니라, 만능이 된다.
클라우스는 거의 단을 가지고 놀다시피 하고 있었다.
간단한 공방에도 수많은 수 싸움이 오고 갔다.
그나마 지그문트의 온갖 악랄한 검로를 겪은 바 있는 단이었기에 전부 막아 낸 것이었다.
클라우스는 고개를 들고 여로를 바라보았다.
“재밌군. 지그문트 마이어는 더 강하겠지?”
“저 따위와 비교할 만한 분이 아닙니다.”
“좋아. 그자가 내려올 때까지, 버텨 보도록.”
클라우스의 눈이 달라졌다.
감정과 생기가 빠져나간 듯한, 어쩌면 암살자에 가까운 눈.
“정말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나?”
* * *
8서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기에 드래곤의 영역이라고도 불리는 경지다.
위로 올라갈수록 단계 간의 간극이 큰 만큼, 7서클과 8서클도 꽤 큰 차이가 있었다.
7서클이 자연재해를 따라 하는 정도라고 한다면, 8서클은 작은 종말을 일으키는 정도다.
내가 목오 사막에서 목오에게 사용했던, 기억에 담겨 있던 마법.
메테오라이트 (Meteorite)가 대표적인 8서클 마법 중 하나다.
‘렘센 일대를 쓸어 버릴 정도는 돼야, 요아힘 월베른에게 뭐라도 해 보지.’
이마저도 신성과 오러가 있었기에, 적게 잡은 것이다.
그 늙은이와 제대로 싸우려거든 9서클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홉 번째 서클을 만들기에는 시간도, 여력도 부족했다.
부족한 힘은 반신화로 어떻게든 해 볼 생각이었다.
‘일단 집중하자.’
전생에 여덟 번째 서클을 만들었을 때, 나는 노인이었다.
전형적인 마법사들과 같이 운동량은 극도로 적었고, 심장은 그다지 건강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여덟 번째 서클을 만들었을 때부터 심장에 조금씩 무리가 왔다.
애초에 연약한 인간의 심장이 여덟 개의 서클의 중심이 된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8서클의 경지에 한순간 올랐다가, 심장이 버티지 못해 죽은 경우가 있었다.
이미 죽은 녹탑주의 일화였다.
‘나도 죽을 수 있다.’
여태껏과 달리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상황이 여의치 않은 지금 만드는 것이라, 상당한 위험성을 동반하고 있다.
죽을 확률도 다분히 있었지만, 어떻게든 실력으로 확률을 줄여 볼 생각이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힘을 운용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우선, 오러.’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몰려왔다.
오러는 그 특성상 신체를 보호하는 데 쓸 요량이었다.
실제로 서클을 상승시키다가 심정지가 오는 일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미연에 그런 불상사를 방지하고, 바로 실전에 투입할 수 있도록 몸에 무리를 줄인다.
‘다음은 신성.’
신성은 내가 스스로 운용할 수 있도록 힘을 넘긴 상태였다.
그렇기에 마음 놓고 다룰 수 있었다.
오러보다는 굳기가 약하고, 포용력이 높은 힘.
육체만큼이나 중요한 정신을 보호한다.
실제로 대서클을 만들 때는, 드래곤이 광증에 걸리듯 미치는 경우도 있었다.
마법사 중 괴짜가 유독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정신을 깎아 먹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마나.’
첫 번째 서클, 두 번째 서클, 세 번째 서클.
서클이 제각각의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일곱 개의 서클을 모두 공회전시키는 건 꽤 부담이 가는 일이었다.
마법은 사용하지 않는데, 공연히 마나를 소모하는 느낌이었다.
‘서클 회전과 동시에 서클을 형성한다.’
발레리아를 비롯한 마탑주들이 들으면 뒷목 잡고 쓰러질 일이었다.
가만히 있는 서클 위에 채우기도 부담스러운 것이 여덟 번째 서클이다.
뒤틀리는 순간 일곱 번째 서클과 충돌하고, 아마 서클 붕괴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서클을 형성하고, 채우며, 동시에 회전시킨다.
불가능할 듯 보여도 이미 7서클을 만들 때 했던 일이었다.
‘집중.’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체내의 모든 힘을 운용하고 있기에, 정신적 피로가 순식간에 쌓였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이상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덟 번째 서클 형성을 시작했다.
‘스읍.’
순간적으로 머리가 울렁거렸다.
체내가 받아들인 적 없는 양의 마나가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신성과 오러로 보호하고 있어서 덜한 것이었다.
전생에 처음 8서클 형성을 시도했을 때는 기절해서 몇 달 동안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때에 비하면 나아.’
잡생각 할 겨를은 없었다.
집중하고 여덟 서클 형성을 이어 나갔다.
우웅.
여덟 번째 서클을 형성하면, 아래의 나머지 서클들이 짓눌리게 된다.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연에 서클 간의 간격을 촘촘하게 하면 그럴 일이 없으나.
그 누가 그것을 미리 알고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서클 형성을 촘촘하게 하겠는가.
내가 그랬다.
키이잉…….
뼈대를 그리 듯 골격부터 채워 놓는다.
그다음 살을 붙이는 느낌으로, 마나 서클을 만들 셈이었다.
부담은 최대한 줄이면서 공회전과 동시에 서클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아주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었다.
끼익.
일곱 번째 서클과 여덟 번째 서클을 맞물리게 하는 과정에서, 아주 작은 마찰이 있었다.
그 반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정신과 육체를 보호하고 있음에도,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어버릴 뻔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씁, 조질 뻔했네.’
정신을 잃었다면 말뿐인 게 아니라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8서클에 오르기 위해, 나는 꽤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줄 아래에는 죽음이 입을 벌리고 내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철컥.
그 이후로 아예 아무런 생각도 않고, 서클 형성에만 집중했다.
무념무상에 이르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끝에, 겨우 골격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 * *
단 록벨런은 네 번의 죽음을 경험했다.
첫 번째로 검이 눈가를 스쳤을 때는 운 좋게 살아남은 줄 알았다.
두 번째로 목 앞에서 검 끝이 멈췄을 때는, 리옐이나 마리나가 개입했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로 허리가 잘려 나갈 뻔한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 냈을 때는 긴가민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심장 앞에 있던 검을 회수하는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을 보고 확신했다.
“막아야지. 어찌 그러는가?”
“그러는 클라우스 경께선 어찌 저를 죽이지 않는 것입니까?”
단의 예상대로,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검을 거뒀다.
여로 위에 있던 마리나와 리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밀었다.
클라우스는 단을 정말 죽일 듯이 몰아붙였으나, 막상 죽음에 이르는 일격은 가하지 않았다.
죽이고자 했다면, 눈가에 검이 닿았을 때 죽었을 것이다.
불과 검을 섞은 지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말이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검을 부술 기세로 했다면, 유효타 한 번은 넣었을 텐데. 하면 죽고 싶은 건가? 자살을 선망하는 건 좋지 않아.”
“혼란스러워서 그렇습니다.”
단은 전투 의지를 잃어버렸다.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그런 단을 보며 혀를 찼다.
“나는 가문을 버린 사람이야. 제국에 묶여 있는 이유는 하나지.”
“그것이 무엇입니까?”
“대마법사 델 로안 대공.”
단은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전생이 바로 델 로안이다.
어떻게 엮여 있는지는 몰라도, 지그문트의 성질을 생각하면 원수 관계일 확률도 있었다.
섣불리 나섰다가 클라우스가 강압적으로 나오기라도 한다면, 위험해지는 건 여럿이었다.
“델 로안 대공과 어떤 관계이십니까?”
“은사에 가깝겠군. 정확히는 막시밀리안가의.”
“은사 말입니까?”
“그래. 그분 덕택에 막시밀리안가가 명맥을 유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이야.”
아주 의외로, 클라우스는 델 로안에게 호의적이었다.
단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애초에 델 로안, 지그문트 마이어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전생의 인연들은 대체로 그를 신뢰하거나 그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발레리아 로안이나 세계수가 그렇듯이 말이다.
‘한데, 팔베르크의 황제는 어째서?’
의문이 들었지만, 클라우스가 말을 이어 나가는 바람에 생각이 끊기고 말았다.
생각하느라 단은 제대로 듣지 못했으나, 델 로안의 죽음을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델 로안 대공을 살해한 것은 웨스트리아의 황탑주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진실을 알고 계시는 겁니까?”
“정확히는 몰라. 적어도 황탑주의 힘으로 대공을 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드는군.”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델 로안 대공의 힘을 직접 목도한 적이 있다.
요아힘 월베른과 한 차례 치고받고 싸울 때 참관한 것이었다.
그때도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소드 마스터였으나.
“여파만으로 죽을 뻔했지. 일흔여덟 번 정도.”
요아힘 월베른과 델 로안은 전쟁에 관련된 이념 문제로 짧게 충돌한 바 있다.
그 싸움의 여파는 남쪽의 레온하트 왕국에서도 여실히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다.
프라우드 산맥이 잘려 나가고 서대륙의 북부 일부가 유실되었다는 건 유명무실한 이야기다.
“고작 마탑주나 소드 마스터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강한 축에 속하는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이다.
그런 그가 여파만으로 죽을 뻔했다니, 단은 지그문트의 전생이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목오 사막에서 델 로안의 기억과 마주한 바 있었지만, 애초에 호의적이어서, 두렵다는 감각은 느끼지 못했다.
“델 로안 대공께서는 얼마나 강하셨습니까?”
“신밖에 못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셨지.”
“모순적이군요.”
“거의 신적인 존재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밖에.”
클라우스 막시밀리안은 툭툭 신발 위에 묻은 눈을 털어 냈다.
그리고 여로를 올려다봤다.
“개인적으로 조사를 진행했는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어.”
“흥미로운 사실요?”
“델 로안 대공을 살해한 것이 어쩌면 라그힐 팔베르크, 현 황제일 수도 있다는 것.”
단은 입을 다물었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마르고 닳도록 이를 갈고 있는 것이, 황제였다.
하지만 지그문트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클라우스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클라우스는 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네,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군.”
단은 입을 다물었다.
클라우스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지그문트도 경고한 바 있지 않는가.
클라우스의 기색이 바뀌었다.
“말하는 편이 좋을 거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러면 말이 좀 달라지는데. 자네, 사지가 잘리는 수가 있어.”
“차라리 그러겠습니다.”
“그편이 명예롭다는 건가. 필연적으로, 자네 주군의 문제겠군.”
클라우스는 단을 두고 훌쩍 위로 뛰었다.
여로에 사뿐히 착지한 클라우스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앉아 있는 지그문트를 내려다봤다.
마리나가 곧장 석궁을 겨눴으나, 클라우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자가 지그문트 마이어인가.”
“물러서세요!”
“호기롭군.”
클라우스와 마리나의 눈이 마주쳤다.
보통 사람은 기절하거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압박감.
그러나 마리나도 보통은 아니었다.
마녀의 후예이자, 어린 신의 대리인.
지지 않고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보통이 아닌데. 저 기사도 그렇고 말이야.”
“마지막 경고예요. 더 이상 접근하면 쏘겠습니다.”
“화살이 두렵지는 않아. 다만, 거기 어린 아가씨는 좀 무섭군.”
리옐은 드물게도 적의를 보이고 있었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취약한 상태라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었다.
클라우스는 감으로 리옐이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제 폐하는 어찌 이자를 두려워하는 거지?”
클라우스는 황제와 대면했다.
델 로안의 이름을 내세우며 한 명령은, 지그문트 마이어의 저지.
문제는 황제의 말 속에서 아주 미세하게 섞인 두려움에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두려워 한 인물은 이미 죽고 없었다.
“시험해 봐야겠군.”
마리나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클라우스는 지그문트 마이어의 심장을 노리고 검을 찔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