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복수귀
풍경이 바뀌었다.
밝은 빛 대신 어둠이 들어찬 좁은 방이었다.
특유의 습기나 서늘함으로 미루어 볼 때 지하인 듯싶었다.
-조심하세요. 스승님.
발레리아는 샌딩(Sending)을 통해 걱정 어린 한마디를 하고, 사라졌다.
국가급 전력 이송을 위해 네르갈로 텔레포트 한 것이었다.
라이트(Light)를 사용하자, 빛무리가 주위를 밝혔다.
“여기가, 할머니의 거처인가요?”
“생각보다 멀쩡하지?”
평범한 가옥의 지하라고 해도 믿을 수 있는, 그야말로 평범한 지하실이었다.
단은 확실히 경지를 끌어올린 만큼, 멀미에서 벗어난 모습이었다.
긴장한 듯 마리나와 리옐을 지키며 사주를 경계하고 있었다.
“뭐 함부로 만지지 마라. 귀찮아지니까.”
“귀찮아진다니요?”
“이를 테면 저기 걸린 목걸이, 저거는 건드린 순간 리모스의 저주에 걸린다.”
“마리나, 리모스의 저주가 뭡니까?”
“채울 수 없는 허기의 저주예요. 뭘 먹어도 굶주린 상태를 벗어날 수 없게 돼요.”
마녀가 교육을 제대로 시킨 모양이었다.
리모스의 저주는 말 그대로 끝없는 허기를 심는 저주였다.
배가 가득한 상태에서도 먹을 것을 탐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저 항아리는 아마 맹독 가스가 담겨 있을 거고, 저건 에코의 저주가 걸려 있는 귀걸이다.”
“멀쩡한 물건은 없습니까?”
“없어. 그러니까 여기에 사람이 안 들어왔지. 일단 지하를 벗어난다. 내 발자국을 따라와.”
풋프린트(Foorprint).
내가 발을 뗀 곳에서 마나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바닥에도 온갖 이상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유의할 필요가 있었다.
단과 마리나는 긴장한 채로 내 뒤를 따라왔다.
중심이 흐트러질 걸 염려했는지, 리옐은 평소와 달리 마리나 대신 단에게 업혀 있었다.
끼익, 끼익.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오래된 계단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계단마저도, 잘못 밟으면 독 구덩이로 떨어지는 극악무도한 함정이었다.
오히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야 안전한 것이었다.
이윽고 나는 1층으로 향하는 문 앞에 닿았다.
‘인기척.’
발소리가 규칙적인 걸 보면 훈련 받은 정규군일 확률이 높았다.
집 내부로 통하는 문이었으니, 1층은 어떻게든 점령한 모양이었다.
두런두런 말을 나누는 소리도 들려왔다.
“여기 배치됐을 때는 심심해 죽을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꿀보직이네.”
“전시니까. 웨스트리아는 무슨 생각으로 델 로안 대공을 암살한 건지.”
“황제 폐하께서 어렸을 적부터 대공을 신뢰하고 따랐다잖아.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지.”
“이렇게 될 걸 알았다면 웨스트리아에서 굳이 대공을 암살할 이유가 있었을 걸까?”
“델 로안 대공은 적이 많으신 분이었으니까. 그리고 안 들킬 거라고 상정했겠지. 암살이니.”
화제는 당연하게도 대전쟁이었다.
뜬금없이 내 얘기도 나왔는데, 라그힐 그놈이 구실로 나를 내세운 탓이었다.
바깥에 있는 이들이 이야기를 멈추는 것을 조용히 기다렸다.
신호를 보내자, 단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조용히 검을 뽑았다.
마리나는 팔찌에 장신구처럼 달아 놓은 석궁의 크기를 키웠다.
무향실(Anechoic Room).
소리 없는 손뼉과 함께, 일대의 소리가 지워졌다.
곧장 문을 열자, 마녀의 집 내부가 드러났다.
시노드 교구 늪에 있던 오두막이나, 망아의 숲에 새로 세운 오두막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빼곡하게 쌓인 헌 책들이 복도에 쌓여 있었다는 것 정도였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넷이었다.
‘가장 뒤에 보이는 놈부터.’
세 번째 놈의 옆에는 식물이 있어, 리옐이 제압하기 용이했다.
두 번째는 딱 마리나의 화살에 닿을 사정거리.
가장 앞에 있는 건 근접전에 능한 단에게 맡긴다.
블링크(Blink).
시야가 바뀌고, 나는 마지막 놈의 앞에서 나타났다.
기사로 보였는데, 무장은 했지만 역시 기습에 대비하진 못한 듯했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는 놈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점혈 당한 기사는 그 상태 그대로 몸이 굳었다.
‘저쪽도.’
단은 검 손잡이 끝으로 적의 머리를 내리쳤다.
답답한지 헬름을 벗은 상태였기에, 정확히 관자놀이에 적중했다.
기절한 병사의 몸이 허물어졌다.
리옐의 의지에 반응한 식물은 순식간에 몸을 키워, 옆에 있던 병사를 옭아맸다.
‘한 놈 더?’
마리나가 맡아야 했던 기사 옆에 병사 하나가 더 있었다.
밑에 떨어진 무언가를 줍고 있었는지, 허리를 숙이고 있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무향실 때문에 숨소리나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 사라져, 확인하지 못했다.
저주를 담은 화살 하나가 기사의 어깨에 박혔다.
우리를 확인한 병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검을 뽑았다.
‘저건.’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어깨에 화살이 박힌 기사가, 그를 제압한 것이다.
화살로 얼핏 실 같은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게 보였다.
신체의 자유를 빼앗아 제 뜻대로 조종하는 저주.
꼭두각시의 저주였다.
‘센스 좋은데?’
마리나가 조종한 기사는 능숙하게 병사를 기절시켰다.
그리고 제 머리를 벽에 내리쳐 본인도 기절했다.
마녀의 집 내부 진압은 아주 순조롭게 끝났다.
그놈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과 마리나, 심지어는 리옐도 꽤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돌연 모습을 드러낸 놈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발락 리빙데드?’
* * *
과거, 선언식 때 지그문트 마이어에게 붙잡힌 발락 리빙데드는 감옥에서 썩게 됐다.
마나 서클까지 전부 끊어진 데다가, 고문에 굴복해 정보까지 내주고 말았다.
억울해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지그문트 마이어를 생각하면 죽을 수도 없었다.
지그문트 마이어에게 복수를 해야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초에! 그놈의 아비만 없었더라면!’
라스 마이어만 없었다면 이길 수 있었던 싸움이었다.
승패에 굴복하지 못한 발락은 사형만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가치가 없어진 자신을 팔베르크에서 구할 거라는 생각도 안 들었다.
오히려 죽이면 죽였지.
예상대로, 렘브란트 님푸스가 찾아왔다.
“멍청한 놈, 네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렘브란트는 그에게 마석 하나과 쪽지를 건넸다.
쪽지 안에는 소환진이 그려져 있었다.
렘브란트 님푸스는 그대로 사라졌다.
발락 리빙데드는 그가 내민 동아줄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감옥 안에는 잉크가 없어, 피로 소환진을 그렸다.
마석을 깨트리자, 검은 마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세 번째 틈의 주인, 무덤을 파는 자, 오릭.
소환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기형적인 모습의 마족.
뻥 뚫린 눈이 발락 리빙데드를 직시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발락 리빙데드다.
발락은 마족이 소환됐음에도 겁먹지 않았다.
훗날 영혼이 지옥에 끌려가는 조건으로, 오릭과 계약을 했다.
며칠 후, 발락 리빙데드는 감옥 안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덜그럭, 덜그럭.
중범죄를 저지른 자는 죽어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한다.
발락 리빙데드는 다른 사형수의 시체와 함께 옮겨졌다.
레온하트의 병사는 수레에 쌓여 있던 시체를 구덩이에 쏟아 냈다.
그런데 수레 안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체 한 구가 있었다.
“어디 꼈나?”
발락 리빙데드의 사체였다.
간혹 시체가 입고 있는 옷이 수레 틈에 끼곤 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병사는 수레에 올라가 발락 리빙데드를 확인했다.
그리고 돌연 발락 리빙데드의 시체가 손을 들어 병사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어억!”
발락 리빙데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사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흐리멍덩한 눈으로 제 손을 살폈다.
이미 핏기가 사라진 차가운 손은 영락없이 시체의 그것이었다.
오릭과 계약한 대가로, 발락 리빙데드는 언데드가 됐다.
* * *
리치(Rich)가 된 후로, 발락 리빙데드는 기이할 정도로 차분해졌다.
그야 죽었으니 감정도 어느 정도 무뎌진 게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그문트와 마주한 발락 리빙데드는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굴욕적으로 딱밤을 맞았던 이마가 화끈거렸다.
무향실을 해제한 지그문트가 감탄했다.
“발락 리빙데드. 결국 본인이 언데드가 된 거야? 이야, 대단하네.”
“너, 너어어어! 지그문트 마이어! 네놈이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아!”
“내가? 내가 사령술 좀 알아도, 리치를 만들 정도는 아닌데.”
“이, 이, 개자식이이이!”
언데드가 되며, 발락 리빙데드는 끊어졌던 마나 서클을 되찾았다.
이곳에 지그문트 마이어가 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지만.
발락은 긴 시간 복수의 칼날을 갈았고, 지그문트를 죽일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나이트 오브 더 리빙 데드(Night of the Living Dead)!”
발락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대규모의 사체를 동시에 일으키는 사령술.
그러나 실내에서 일어나는 사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실내에 있던 기사와 병사는 모두 제압당했을 뿐,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하에는 사체 몇 구가 쌓여 있겠지만, 지그문트는 위협적이라 판단하지 않았다.
“오래 기다렸겠지만, 우리가 시간이 많진 않아서 말이야.”
지그문트는 발락에게 손을 뻗었다가,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얼핏 거대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무언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
집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지그문트는 재빨리 신호를 보냈다.
단이 창문을 깨자, 마리나는 리옐과 함께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지그문트와 단이 그 뒤를 따랐다.
우직!
동시에, 오래된 나무 기둥이 부러졌다.
집이 내려앉으며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집 밖으로 탈출하자, 프라우드 산맥 인근이라는 것이 확 체감됐다.
마녀의 집이 위치한 곳은 추운 평원 한가운데였다.
“오, 미친.”
“도, 도련님.”
단과 마리나는 마녀의 집 위에 내려앉은 것을 보고 질겁했다.
하얀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괴물이, 뻥 뚫린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집 밖으로 나온 발락 리빙데드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절망해라! 이곳이 네 묫자리니까!”
발락은 대마법사의 목걸이를 찾아 목오 사막을 헤맬 때, 목오의 사체만 찾은 것이 아니었다.
렘브란트에게 요청해 팔베르크로 옮겨 놨지만, 역량 부족으로 언데드로 만들지 못했던 사체.
하지만 언데드가 된 발락은 네크로맨서로서 한 단계 높은 경지에 다다랐다.
집념과 광기 덕분에, 살아 있을 적에는 언데드로 만들지 못했던 것을 언데드로 만들었다.
웬만하면 이죽댈 법한 지그문트 마이어조차 놀란 듯 그것을 멀거니 올려다봤다.
마녀의 집 위에 내려앉은 것은, 뼈만 남은 언데드 드래곤.
본 드래곤(Bone Dragon)이었다.
지그문트는 황망히 입을 열었다.
“이, 이건 너무…….”
“너무?”
“너무 멍청하잖아.”
* * *
드래곤의 뼈, 드래곤 본(Dragon Bone).
높은 망치도 다룬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최상급에 속하는 소재다.
단이 사용하는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나, 레드라인 후작의 부러지지 않는 검 등등.
명검이라고 불리는 검에는 빼놓지 않고 들어가는 재료이기도 했다.
이빨 하나만 해도 국보 취급 받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멍청하다니! 이 개자식이!”
발락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마 황제에게 어떻게든 비밀로 하고 연구했을 거다.
최고의 언데드를 만들겠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실제로 본 드래곤은 데스 나이트 같은 상위 언데드를 지나가던 개미 밟듯 죽일 수 있었다.
마녀의 집을 밟고 선 드래곤이 뼈밖에 남지 않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쿠오오오!
드래곤 피어(Dragon Fear)가 온몸을 짓눌렀다.
언데드는 생전의 강함에 따라 그 힘의 수준이 달라진다.
드래곤은 마법적 능력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종족이다.
드래곤 하트의 특성상, 언데드인 본 드래곤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육체적 능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어떻게 할까.’
드래곤 본이 희소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드래곤이라는 종족의 수와 수명.
용의 산맥에 사는 드래곤은 채 일백이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지상의 그 어떤 생물보다 장수하는 종족이었기에, 시신 자체가 얼마 없다.
두 번째로는, 그 시신의 처리 방법에 있었다.
‘벨수스한테 연락을 넣어?’
드래곤의 시신은 용의 산맥 측에서 회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시신을 함부로 사용하는 자는 용의 산맥 측에서 처벌할 수 있다.
중재자인 드래곤이 개입할 수 있도록 하게 되는 정당한 명분이 된다는 얘기였다.
즉 여기서 벨수스나 린시스를 부르면, 용의 산맥이 나서서 저걸 처리해 준다는 얘기였다.
비단 본 드래곤뿐만 아니라, 그 시신을 이용하고 훼손한 발락 리빙데드까지 말이다.
‘아니지. 용의 산맥이 움직인다면 라그힐이 알 수밖에 없어.’
애초에 내가 올 것을 상정하고 발락 리빙데드를 이곳에 배치해 둔 것이다.
그러나 확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확신했다면 이곳에 병력을 몰아넣었겠지.
하지만 린시스나 벨수스가 등장하는 순간, 라그힐에게 확신을 심어 주게 된다.
“단, 너는 애들 보호 위주로.”
“예. 명 받들겠습니다.”
“마리나, 언데드에게 저주는 잘 안 통한다.”
“리옐 님의 대리인으로써 힘을 사용하라는 말씀이시죠?”
“정확해. 리옐, 단한테 가호 내려 주고. 여기 식물들은 말 잘 안 들을 테니, 유의하고.”
“응!”
본 드래곤의 피어는 확실히 약했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애들도 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공간에서 이름 없는 검을 뽑았다.
발락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숨을 한계까지 깊게 들이쉬고, 뱉었다.
짙은 푸른색의 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마나 번(Mana Burn).
원래 고대 마법은 건드리기 껄끄러워서 그대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하도 쓰면서 체감하다 보니, 부족한 부분이 완벽하게 이해가 됐다.
즉, 마나 번 또한 다른 마법처럼 최대 효율로 술식을 바꿔 사용할 수 있었다.
신성으로 강화된 소드 마스터의 육체가 뒷받침되니, 초월적인 신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콱!
단이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땅에 비스듬히 꽂아 넣었다.
나는 클레이모어의 검면 부분을 발로 딛고, 찼다.
콰앙!
노리는 것은, 발락 리빙데드.
본 드래곤을 움직이도록 만든 술자였다.
발락도 당연히 예측했다는 듯, 사령술을 사용했다.
“어림없다!”
발락과 내 사이를 갈라놓듯 치솟은 것은, 살덩어리로 이루어진 장벽.
한데 뒤엉켜 꾸물거리는 살덩어리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피하지 않고 곧장 서클을 회전시켰다.
추방(Deport).
순간적으로 마나에 뒤덮인 살덩어리의 장벽이,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곧바로 드러난 것은 당황한 발락 리빙데드였다.
“어? 블링크(Blink)? 아닌데?”
추방은 일정거리 밖으로 다른 것을 추방하는 고유 마법이었다.
본인 혹은 접촉한 대상과 함께 이동하는 공간 이동 마법, 블링크(Blink)와는 달랐다.
텔레포트의 경우 전송 장치가 있다면 이동시키고자 하는 대상만 이동시키는 것도 가능했으나, 전송 장치가 없다면 그것도 요원한 일이었다.
발레리아가 마녀의 집으로 함께 이동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모르면 맞아야지.”
“이! 미친!”
이름 없는 검이 발락 리빙데드의 목을 꿰뚫었다.
* * *
지그문트 마이어는 예상대로 발락을 노렸다.
본 드래곤이 지그문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빠른 속도로 날아간 화살이 본 드래곤의 미간에 적중했다.
펑!
뼈를 관통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빛이 폭발했다.
마리나가 쏜 것은 저주가 아닌 리옐의 신성력을 담은 화살이었다.
언데드인만큼 신성력이 유효하게 작용했는지, 본 드래곤이 고개를 돌렸다.
두개골의 눈구멍이 단 일행을 정확히 내려다봤다.
뼈가 훤히 드러난 아가리가 벌어진다.
쿠오오오오!
아무리 언데드라지만 드래곤은 드래곤.
피어는 확연히 약했지만, 울음소리만으로 지축이 뒤흔들리는 듯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단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마녀의 집에서 떨어진 본 드래곤이 단 일행을 덮쳤다.
단 혼자서는 어떻게 해도 버틸 수 없는 위력.
그러나 그 뒤에는 어린 신과 그 대리인이 있었다.
“언니!”
“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리옐이 두 손으로 얼어붙은 초원을 짚었다.
반대로, 마리나는 드래곤이 떨어지는 위를 향해 팔을 뻗었다.
양 옆의 땅이 뒤집히듯 치솟으며, 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이 만들어졌다.
쿠우우웅!
쭉 뻗은 마리나의 양팔이 강한 충격을 받아 낸 듯 눌렸다.
마리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한계에 가까운 무게를 받아 낸 탓인지, 흙의 손에 쩌적 금이 갔다.
“단 님!”
“후읍!”
숨을 깊게 들이쉰 단이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전력으로 휘둘렀다.
지그문트가 단의 클레이모어를 받침대 삼아 뛴 것은, 충격을 쌓기 위해서였다.
이미 클레이모어에는 충분한 충격이 쌓인 상태.
거기에, 단은 엘트렛의 가르침을 기억했다.
-검의 힘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검의 힘만 활용하다 보면, 성장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좋음 마음가짐이지만, 살짝 틀리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검 또한 자네의 힘일세.
-잘 모르겠습니다.
단은 그 가르침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검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지그문트가 이름 없는 검을 쥐는 것을 볼 때마다 느꼈던 일체감.
웨스트리아에서 무연과 대화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나도 그것을 레드라인 후작에게서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검과 사람에게서 일체감이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동대륙에서는 그 감각을 두고 신검합일(身劍合一)이라 하지.
-어렵군요. 무슨 뜻입니까?
-네가 느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람과 검이 하나가 되는 경지.
비록 단은 그 경지에 완전히 다다르지 못했으나.
나아가고자 하여, 한 발자국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단의 오러가 검날을 휘감는 것과 동시에,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가 폭발했다.
콰아아아아앙!
* * *
-흐흐. 멍청한 건 네 쪽이구나.
목이 꿰뚫린 발락 리빙데드는 태연하게 지그문트를 바라보았다.
언데드, 이미 리치가 된 만큼 이 정도로는 타격도 없을 것이다.
목이 꿰뚫려 말이 안 나왔지만, 리치답게 말하는 데 목구멍은 필요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가까이 와 준다면 사용할 수 있는 사령술이 늘어난다.
‘잡았다.’
발락은 까맣게 물든 손으로 제 목을 관통한 검을 잡으려 했다.
급속도로 금속을 부식시키는 사령술, 러스트 핸드(Rust Hand).
오러를 두른 만큼 본인의 손도 멀쩡할 수 없겠지만.
이미 언데드가 되어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상관없었다.
기사인 지그문트의 무기를 제거한다면 확실한 이득이었다.
그런데.
-컥!
발락의 손은 이름 없는 검에 닿지 못했다.
가까이 갔을 뿐인데, 검날에서 뿜어 나오는 예기에 베인 것이다.
잡기는커녕 제 손만 잘릴 판이었기에, 발락은 서둘러 손을 뺐다.
“너, 라이프베슬 어디 있냐?”
지그문트는 그런 발락을 안타깝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검을 뽑았다.
리치는 라이프베슬이라는 심장을 따로 두고 있다.
그 심장을 부수지 않는다면, 육체를 아무리 공격하더라도 의미가 없다.
발락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 라이프베슬? 저기 있지!
발락이 가리킨 곳은, 단 쪽을 덮친 본 드래곤이었다.
드래곤 하트가 있어야 할 갈비뼈 안쪽에는 작은 결정 같은 것이 떠다니고 있었다.
라이프베슬이었다.
“넌 역시 멍청해. 알려 주라고 진짜 알려 주면 어떡하냐?”
안 알려 줬어도 찾았겠지만 말이다.
발락은 발작적으로 웃었다.
비록 숨 빠져나가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너무 고소한 나머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흐하하! 저것을 부수려면 본 드래곤부터 쓰러트려야 할 것이다!
약점이 눈앞에 있음에도 어찌하지 못하는 절망을 선사하고자 했다.
지그문트는 고개를 돌려 본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자욱한 연기가 가라앉았다.
-네 수하들도 전부 죽었을 거다! 멍청한 놈!
지그문트는 뭔 소리 하냐는 얼굴로 발락을 돌아보았다.
그 어깨 너머로 펼쳐진 광경에, 발락은 경악했다.
단의 오러 폭발에 휩쓸린 본 드래곤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 턱은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누가 죽어?”
소드 익스퍼트 상급.
단은 기어코 지그문트가 제시했던 조건을 만족시켰다.
하지만 그 힘은 명백히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지그문트 못지않은 꾸준한 영약 복용과, 재능을 앞당길 수준의 부단한 노력.
거기에 지그문트가 무구까지 제대로 착용시켜 준 결과.
단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뒤지지 않는 힘을 지니게 됐다.
-이, 이럴 수가. 드래곤 본이 저렇게 쉽게 부서지다니! 어떻게!
지그문트는 쯧쯧 혀를 찼다.
드래곤 본은 금속이 아니라 뼈다.
명검에 들어가는 최상급 소재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드래곤 본 그거, 제련 안 하면 그냥 뼈거든?”
특수한 방법으로 가공한다면 모를까.
드래곤의 육체적 능력은 단단한 비늘과 근육에서 나온다.
즉, 뼈로 이루어진 본 드래곤은 진짜 드래곤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약하다.
단과 마리나, 리옐이 힘을 합치면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기겁한 발락이 사령술로 본 드래곤을 지원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본 스피어(Bone Spear).
뼈의 창이 단을 노리고 쏘아져 나갔다.
그때, 누군가 발락의 팔목을 붙잡았다.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방향 틀렸다.”
그 순간, 발락은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사용한 마법의 주도권이, 손목을 타고 넘어가는 것 같았다.
지그문트는 발락의 팔목을 쥔 손에 힘을 줘, 방향을 틀었다.
본 드래곤의 심장부, 발락의 라이프베슬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뼈 창이 쏘아지는 방향도 틀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 머, 멈춰! 멈추란 말이다!
발락은 사령술을 중지하려 했지만, 이미 지그문트에게 주도권이 넘어간 후였다.
불현 듯 발락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이건!’
이 성격 나쁜 특기는, 분명 대마법사 델 로안의 고유 마법.
마법 장악(Magic Control)이었다.
그제야 대마법사 델 로안과 지그문트 마이어의 표정이 겹쳐 보였다.
-너, 너어어어! 설마!
지그문트의 정체를 알아차린 발락은 절규했다.
-델 로안!
속도를 더한 본 스피어가, 라이프베슬을 관통했다.
* * *
마이어 남작령.
라스 마이어는 어두운 얼굴로 서재에 앉아 있었다.
책상에 있는 것은 레드라인 저택에 두고 있던 검.
오래 전, 라스 마이어가 검귀라고 불렸을 적에 잡았던 검이었다.
요하네스 레드라인이 기어코 시종을 보내, 검을 돌려준 것이다.
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라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시종은 레드라인 후작이 손으로 직접 쓴 듯한 편지도 가지고 있었다.
라스 마이어는 편지 끝자락에 쓰여 있던 짤막한 내용을 기억했다.
‘네 신념을 지켜라.’
눈을 뜬 라스는 결심한 듯 검 손잡이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하얀 팔이 라스의 어깨를 스쳐 지나와 목을 감았다.
폭포처럼 쏟아진 금발의 머리카락이 목을 간질였다.
그 선명한 감촉에도 라스는 검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라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하지만 아이를 쓰다듬듯 부드러운 손길.
라스는 마른 입술을 달싹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테레제.”
라스의 아내이자 지그문트 마이어의 어머니.
테레제는 라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두운 서재에서 라스는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돌연,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아기 울음소리가 먹먹한 귀를 찔렀다.
으아아아앙! 으아아아앙!
라스 마이어는 지옥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었다.
스르륵 머리카락이 위로 올라갔다.
테레제는 고개를 들어 라스 마이어를 바라보았다.
버티기 어려웠다는 듯, 눈을 감은 라스가 테레제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규칙하게 호흡하던 라스는 결국 검 손잡이를 놓았다.
그를 끌어안고 있던 테레제도, 머리를 울리던 아이 울음소리도 사라졌다.
“후우.”
라스는 제대로 쉬지 못한 숨을 토해 냈다.
고작 수 초에 불과했으나, 라스에게는 억겁의 세월과 같이 느껴졌다.
라스는 복잡 미묘한 얼굴로 검을 내려다봤다.
* * *
밀러 자작은 요 근래에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대전쟁에 대한 우려는 컸으나, 그의 아들 시몬 밀러가 제대로 한 건 한 것이었다.
마치 전쟁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이 필요한 물자를 확보해 두기까지 했다.
대전쟁이 레온하트 왕국의 승리로 끝난다면, 큰돈은 물론 입지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마 지그문트, 그 친구와 친해진 덕분이겠지.’
최근 레온하트의 수호자라고 밝혀진 라스의 아들, 지그문트 마이어.
그가 아마 시몬 밀러를 밀어줬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엘비아와의 교역이나 선언식 소동 처리도 시몬이 맡았기 때문이다.
시몬 밀러는 현재 상단을 이끌고 엘비아로 갔다.
그동안 밀러 자작은 시몬의 뒤를 봐주거나, 업무를 도와주고 있었다.
상단 자체는 거의 시몬이 도맡아서 운영하고 있었기에, 그의 역할은 보조에 가까웠다.
“거기, 있는가?”
“예, 영주님. 부르셨습니까?”
“헤르타 숲에 오크가 출현했다는데.”
“맞습니다. 오고 가던 도중에 피해 사례가 몇 차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 마이어 영지로 보내는 서찰일세. 라스는 영지 내에 있을 테니, 전하게.”
“예. 알겠습니다.”
집사가 밖으로 나가고, 밀러 자작은 한동안 서류 처리에 매진했다.
밀러 상단의 규모가 대폭 커지면서, 이것저것 할 것이 많았다.
레온하트 왕실에서 진행하는 일에도 관여되었기에,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집중하던 밀러 자작은 문득 주변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상하군.’
밀러 영지는 비록 외곽에 불과했지만, 꽤 발달되어 있었다.
밀러 상단의 성장으로 외부와의 교류도 활발해져, 저녁에도 활발한 편이었다.
아무리 저택이 시가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웅성거리는 소리 정도는 들렸는데.
지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밖에 누구 있는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집사도 없는 듯했다.
전령에게 서찰만 넘기고 돌아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밀러 자작은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왜 아무도 대답이 없어?”
오늘따라 휑한 복도에는 정적만이 맴돌았다.
시종이 하나쯤은 지나갈 법도 했는데, 그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밀러 자작은 인상을 찡그리고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때, 간격 짧은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종 하나가 밀러 자작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밀러 자작님!”
머리카락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이마에 붙어 있었고, 두 눈은 겁을 집어먹은 듯 커져 있다.
더군다나 시종이 저택 복도를 달리는 것은 반쯤 금기였기에, 급한 일이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몬 밀러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푸확!
자신에게 손을 뻗었던 시종의 목을 꿰뚫고, 검 한 자루가 튀어나온 것이다.
검이 뽑히자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며, 시종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뒤에 있던 인물의 모습이 드러났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명확한 특징이 있다면, 오른팔이 없다는 것.
왼손으로는 피로 붉게 물든 검을 잡고 있었다.
“누구시오?”
“팔베르크 제국의 글레엄 백작.”
“……살인귀 글레엄?”
팔베르크의 소드 마스터, 외팔이 기사 글레엄 백작.
밀러 자작은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글레엄 백작의 등 뒤는 사방이 피로 젖어 있었다.
시종과 병사의 시체도 널브러져 있었다.
‘승산은 없다.’
상대는 소드 마스터다.
그것도 손속이 잔인하기로 유명한 글레엄 백작.
설령 밀러 자작에게 무기가 있다고 해도, 도망칠 방법은 없다.
글레엄 백작이 그를 죽이고자 한다면, 죽이는 것은 너무도 간단한 일일 것이 분명했다.
“나는 밀러 자작이오. 밀러 자작령에는 무슨 일이오?”
“내가 안 무섭나? 별명을 아는 걸 보면, 내 이름은 들어 본 것 같은데.”
“글레엄 백작의 명성은 익히 들었소. 하여,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소.”
“그런데?”
“하면, 이야기라도 나눠 보고 싶어서 말이오.”
“상인 출신이라더니, 깡도 말재주도 좋구먼.”
글레엄 백작은 마음에 들었다는 듯 씩 웃었다.
밀러 자작은 평정을 가장하고 글레엄 백작을 바라보았다.
“가능하다면,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겠소?”
“여기 왜 왔냐고? 음, 뭐였더라. 원래 마이어 영지로 가던 중이었지.”
“마이어 영지?”
“그래. 그 레온하트의 수호자 있잖아. 그거 잡으러 왔어.”
글레엄 백작은 단신으로 레온하트 아래까지 내려왔다.
흑탑주 렘브란트 님푸스가 레온하트 왕국 내에 설치해 둔 전송 장치 덕분이었다.
따로 네르갈에 설치해 둔 것은 발레리아에게 걸려 산산이 조각났다.
하여 선언식 때 다시 내려와, 다시 전송 장치를 설치해야 했다.
물론 델 로안의 것과 달리 겨우 한 명 텔레포트 시키는 조악한 마도구였으나.
그것만으로도 글레엄 백작이라는 국가급 전력을 침투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곳은 마이어 영지가 아니오.”
“알아. 여긴 심심해서 왔지.”
심심해서 벌인 일이라기에는 너무도 끔찍한 참상이었다.
굳이 사지를 잘라 죽인 이들도 더러 보였다.
저택 밖도 조용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학살이 일어났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아, 아! 맞다. 지그문트 마이어였지. 혹시 지그문트나, 마이어 영지에 대해 아는 거 있냐?”
“……없소. 마이어 영지와는 교류가 없었소.”
“내가 바보로 보이는 건가? 네가 마이어 남작과 벗이라는 것 정도는 들었는데.”
“사이가 틀어졌소. 남작이 혼자 중앙으로 진출했거든.”
“흐음, 그럼 아는 게 없다는 건가? 말하면 살려 줄 요량도 있는데. 꽤 마음에 들었거든.”
밀러 자작은 순간적으로 갈등에 사로잡혔다.
눈앞에 있는 사신이 돌연 삶에 대한 가능성을 내민 것이다.
심호흡을 한 밀러 자작은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모르오.”
“멋진데.”
글레엄은 밀러 자작을 칭찬함과 동시에, 그 목을 베었다.
* * *
콰앙!
본 드래곤이 쓰러졌다.
사령술은 유지되었지만, 관절부를 완전히 떨어트려 놓으니 복원을 못 했다.
네크로맨서가 있었다면 가능했겠지만, 발락 리빙데드는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멍청한 건지 솔직한 건지, 본 드래곤의 심장부에 있던 건 진짜 라이프베슬이었다.
본 드래곤은 술자의 공격을 공격이라 인지하지 못해서 피하지 않았다.
그 결과, 라이프베슬을 지키지도 않고 간단하게 내주고 말았다.
“후우, 생각보다 별것 아니긴 하군요.”
“그렇지? 외관만 보고 쫄지 마.”
그다음은 쉬웠다.
내가 합세하자 본 드래곤은 간단한 상대였다.
물론 최상위 언데드에 속하긴 했으나, 전력 자체가 너무 달랐다.
시간을 끌기 싫어서 개입했지만.
단과 마리나, 리옐 만으로도 본 드래곤은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체적인 구성이나 밸런스도 좋고, 개개인의 전력도 상당했다.
“이건 나중에 처리해야겠군.”
지금 당장 드래곤을 부르는 건 무리였다.
드래곤 정도의 존재가 온다면 요아힘이 알아차릴 것이 뻔했으니.
나중에 벨수스나 린시스에게 마녀의 집 인근에 드래곤의 유해가 있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도련님, 아무래도.”
“동선이 들킨 건 아니야. 만약 정확히 알았다면 고작 이런 놈 하나 두진 않았을 거다.”
아마 라그힐 팔베르크는 나를 상당히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행보를 보여 왔지만 말이다.
내 정체를 눈치챘을지는 미지수지만, 어쨌든 간에.
“아마 곳곳에 사람을 보냈을 거야.”
내 예상 경로에 인원을 배치한 것은 확실했다.
즉, 발락이 정기적으로 통신을 하고 있다면 들킬 가능성이 있는 셈.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나는 공중에 여로를 펼치고, 애들을 태웠다.
아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마이어 영지지만.
‘거긴 괜찮겠지?’
* * *
쿵!
마이어 영지, 망아의 숲 인근.
목이 잘린 오크의 몸이 허물어졌다.
땀으로 반쯤 절은 루이스 마이어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긴 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혼자서 오크 사냥에 성공한 것이었다.
“이 정도로는 형님 발끝에도 못 미치겠어.”
루이스 마이어는 한때 지그문트 마이어를 혐오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그문트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 줬기 때문이다.
차기 가주가 누구이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지그문트 도련님께 검술을 가르쳐 달라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형님은 영지에 잘 안 계시잖아. 계셔도 리옐이랑 보내느라 바쁘시고.”
“허허, 기특하시군요.”
루이스를 가만히 지켜보던 마이어가의 집사장, 윌리엄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과거, 루이스는 썩 성격이 좋은 도련님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스스로 무언가 깨달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가식을 버려두고, 돌연 지그문트의 뒤를 쫓겠다며 정진하고 있었다.
그 결과 검술에서도 상당한 성취를 이룩할 수 있었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던 루이스는 멀리서 사람을 발견했다.
“응? 윌리엄, 저기 사람 있다.”
“……정말이군요. 여기는 오크 때문에 잠시 출입을 금지한다 했을 텐데.”
“다친 것 같은데? 이봐, 괜찮나?”
“도련님!”
돌연, 윌리엄이 루이스 앞으로 난입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 남자의 검과, 윌리엄의 단검이 부딪쳤다.
하지만 단검은 완충제 역할을 했을 뿐, 남자의 검을 막지 못했다.
캉!
단검이 부서졌지만, 윌리엄은 노련하게 공격을 흘렸다.
공격에 실패하자, 남자는 뒤로 물러나 윌리엄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윌리엄은 어느새 새로운 단도를 꺼내 거꾸로 쥐고, 남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피 칠갑을 한 글레엄 백작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가 지그문트 마이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