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국의 위상
팔베르크 제국의 서부 전선.
테이럼 변경백은 웨스트리아 정벌군의 지휘권을 양도 받았다.
이유인즉슨 밤말을 듣는 쥐에게 전 지휘관이 암살당한 탓이었다.
리헨을 지키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으나, 황제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피해 규모는?”
“후방 부대의 피해는 전무합니다. 하지만, 정면충돌한 보병들의 피해가 상당합니다.”
드래곤의 감시가 종료된 시점에서, 테이럼 변경백은 웨스트리아의 동남부 전선을 급습했다.
문제는 벨수스 블랙이 드래곤 브레스로 만들어 낸 골짜기였다.
적의 눈앞에서 다리를 놓을 수도 없고, 설령 놓는다고 해도 건너가기가 불가능했다.
우회하려면 드높은 프라우드 산맥의 절벽과 골짜기 사이를 지나야 했다.
문제는 그 좁은 통로를 웨스트리아의 기사단, 왕국의 방패가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찌 패퇴한 것이지?”
이미 길에는 주둔지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왕국의 방패는 수성전에 특화된 기사단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팔베르크 제국군의 무력은 그 궤를 달리한다.
파견된 병사의 숫자만 수배에 달하고, 기사의 수도 훨씬 많다.
소드 마스터인 테이럼 변경백이 출정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겨야 정상이었다.
쪽수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검 없는 소드 마스터입니다.”
문제는 검 없는 소드 마스터, 엘트렛 커큰이었다.
왕국의 방패라는 기사단을 창설한 전신이자 방어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기사.
그가 웨스트리아의 동남부 전선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한, 결코 돌파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테이럼 변경백은 장기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달리 골짜기를 건널 방법은 없나?”
“전 지휘관께서 고려하셨던 건 프라우드 산맥이나 목오 사막으로 우회하는 방법입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시간도 오래 걸릴뿐더러, 피해만 낳을 확률이 높군.”
만약 웨스트리아에서 우회로에 정찰병을 풀어놓기만 했어도 문제가 됐다.
기습은 거의 불가능했고, 공격에 성공하더라도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테이럼 변경백은 인상을 찡그렸다.
‘암살자까지 보내다니. 더러운 놈들.’
유의해야 할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유효했다고 할 수 있는 수는 봉토 리헨을 습격했던 암살자들.
웨스트리아에서 고용된 것으로 추정됐는데, 실력이 상당해 놓치고 말았다.
아직도 기회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매사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상황이 꼬였군.”
“진군할 병력은 있습니다. 어찌할까요?”
“원군이 올 때까지 대기한다.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 * *
-꼭 가셔야 합니까?
-응! 아빠 지켜 줘야 돼!
-흑흑. 우리 리옐 님이 너무 장해.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눈물이 나오려고 하네.
-뚝!
엘비아는 엘프들의 주접으로 한창이었다.
오히려 리옐이 어른스럽게 요정족들을 달래고 있었다.
그사이에 요정족들을 얼마나 사로잡았는지, 거의 행렬이 이어졌다.
이마저도 추첨으로 뽑은 거라고 하니,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내게, 르네가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지그문트 님,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는지요?
-들었다. 성신이 직접 알려 주더군.
-그렇군요.
-네 몸이나 제대로 건사해라. 그래야 희망이 있으니까.
르네는 눈을 감은 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꺼풀 너머의 눈이 나를 직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르네라면 짓지 않을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 눈을 떴다.
에메랄드 색의 눈동자.
세계수였다.
-어머, 어떻게 알았담?
-느낌이 달라. 하이엘프는 차분하거든.
-나는 경박하다는 얘기야?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만.
세계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강림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분명 소란스러워질 것이 뻔했다.
조용히 리옐과 요정족을 지켜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계에서 개입한다는 이야기가 있더군.
-그래? 지금 마왕이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왼쪽이야, 오른쪽이야?
-둘 다. 라그힐이랑 손잡은 건 왼팔인 것 같고.
-오른팔……. 베르제는 당신이랑 친했지, 참. 불러오게?
-일단 퇴짜 놓긴 했는데, 지켜봐야지.
마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세계수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자발적으로 지상에 내려온 신이라지만, 바라처럼 조금 이기적이어도 될 텐데.
세계수는 지상을 위해서라면 희생을 주저할 성격이 아니었다.
-뭐, 당신이 알아서 해 주지 않겠어?
-네가 처음에 만났을 때 나보고 뭐라고 했더라. 한낱 인간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기억력 좋은 것도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니까. 뒤끝 하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야 하겠지만, 맹신하진 마라.
-당신을 믿어. 당신은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사람이니까.
-부담 말고 제대로 된 보상을 줘야지 힘을 내지 않겠냐?
-보상? 선입금해 줘?
세계수는 잠깐 고민했다.
정원지기를 통해 영초를 주긴 했으나, 이제 그것도 필요 없으니.
새롭게 줄 것이 뭐가 있나 생각하는 눈치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이야.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까.
세계수가 돌연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순간적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세계수의 성역, 하늘정원.
멱살을 잡은 인물도 르네가 아니라, 세계수로 바뀌어 있었다.
“어?”
설마 힘을 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세계수는 멱살을 잡은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까스로 균형은 잡았지만 상반신은 세계수 쪽으로 끌려 들어갔다.
입술에 말랑한 것이 닿았다.
‘어? 뭐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고, 눈을 감고 있는 세계수가 코앞에서 보였다.
머릿속에 의문이 들어차고, 뒤늦게 상황 판단이 됐다.
세계수가 팔의 힘을 풀고 나서야 나는 똑바로 설 수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세계수는 나를 올려다보며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보상 절반 선입금. 나머지 절반은 다 끝나고.
-너…….
내가 말을 마칠 틈도 없이, 풍경이 바뀌었다.
엘비아로 돌아온 것이다.
앞에는 내 멱살을 잡고 있는 르네가 있었다.
-어? 어머니와 싸우셨나요?
이번에는 연기하는 세계수가 아니라 확실히 르네였다.
싱그러운 풀 내음이 남은 입술을 매만졌다.
어느새 요정족들을 어르고 달랜 리옐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엘비아 한가운데 서 있는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한 방 먹었군.’
* * *
성역, 하늘 정원.
세계수를 모시는 은방울꽃의 드라이어드, 정원지기는 세계수를 다독였다.
쪼그려 앉은 세계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우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난 몰라! 히잉, 역시 이건 너무 대담했던 거 아닐까? 기습 키스라니.
-아닙니다. 요즘에는 적극적인 여자가 대세예요.
-……정말? 나한테 푹 빠졌을까?
-그럼요. 로안 님은 연애적인 측면에서 소극적이시잖아요.
-하지만 불안한걸. 경망스러운 여자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설마요, 정말 싫으셨다면 불을 지르든가 하셨겠지요.
-그, 그렇지? 저번에는 정말 지르려고 했으니까.
세계수는 두 손을 꼭 모으고 제 입술을 매만졌다.
지그문트의 입술은 생각보다 거칠었고, 따뜻했다.
앞에서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안 그래도 눈치 빠른 지그문트다.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이 들킬까 두려워 바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양손으로 감싼 세계수가 더듬더듬 물었다.
-어라. 그, 근데 이거 이상하다? 내가 더 빠진 것 같은데?
-아이고야.
* * *
트리옌과 레온하트는 팔베르크의 경고를 무시했다.
사실상 협박에 가까웠기에 정당한 권리를 주장한 것이지만.
팔베르크 제국이 이를 용납할 리 없었다.
예고했던 대로, 팔베르크는 레온하트와 트리옌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국과 세 왕국의 연합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전쟁의 서막이었다.
“제국군이 트리옌으로 남하하고 있습니다. 병력은 약 10만가량으로 추정됩니다.”
“10만? 예상보다 적군. 병력이 분산된 탓인가?”
레온하트 왕성에서는 회의가 한창이었다.
꽤 희망적인 관측도 나오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팔베르크 제국이 동시에 세 왕국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 탓이었다.
아무리 거대한 제국이더라도 병력을 셋으로 나눈다면 해볼 만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10만은 많은 수였지만, 기사의 비율이 아무리 높아도 못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보병으로 이루어진 선발대입니다. 진지 구축이 목적일 겁니다.”
“선발대라고?”
“팔베르크 제국은 수년 전부터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10만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웨스트리아, 트리옌, 레온하트. 세 국가에 동시에 전쟁을 선포했네. 더군다나 마계 원정까지 보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게 일부란 말인가?”
“그러니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요. 국경에 진지를 구축하고 본대를 투입할 겁니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희망적인 관측에 아주 제대로 초를 쳤다.
분위기가 무거워졌지만 지그문트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세 개 국가를 상대로 인해전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팔베르크 제국이다.
이 정도 병력 차가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핵심은 국가급 전력입니다.”
“소드 마스터와 탑주 말이군.”
“예. 제국은 네 명의 소드 마스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테이럼 변경백이 웨스트리아에 투입됐으니, 남은 건 셋이군요.”
팔베르크 제국이 보유한 소드 마스터는 넷.
그중 셋은 트리옌과 레온하트 왕국 공격에 배치될 확률이 농후했다.
“급습에 대비해 렘센 쪽에 배치할 확률은?”
“0에 수렴합니다.”
“이유도 말해 주실 수 있습니까?”
“불패의 기사가 버티고 있을 텐데, 소드 마스터 하나 더해서 뭐 합니까?”
“끙, 그렇군요. 다행인 건, 월베른 경이 전쟁에 나서지 않는다는 겁니까.”
팔베르크 제국의 수도 렘센에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 요아힘 월베른이 버티고 있었다.
요아힘 월베른은 적극적으로 전쟁에 나서진 않았지만, 렘센을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다.
즉 이와 같은 전시에 렘센을 공격하면, 요아힘 월베른이 나선다는 소리였다.
“어느 쪽에 둘을 둘 건가가 관건이군.”
“수가 부족한 쪽에 흑탑주를 두지 않겠는가?”
“렘브란트 님푸스라면 마계 원정에 투입됐습니다. 남하할 가능성은 적습니다.”
“차원을 넘어갔다면 텔레포트로 오갈 가능성도 없네요. 원정이 끝난 게 아니라면, 걱정할 것 없을 것 같아요.”
발레리아가 첨언했다.
루터 레온하트는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았다.
연합을 구축하긴 했지만, 병력 배치가 너무 까다로웠다.
“트리옌으로 지원 병력을 보내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아바마마 말씀이 옳습니다. 팔베르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까요.”
상식적인 판단.
그러나 지그문트는 그것을 부정했다.
“제 예상대로라면, 제국은 레온하트부터 점령하고자 할지도 모릅니다.”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하는 게 트리옌인데, 굳이 그것을 지나쳐 후방에 있는 레온하트를?”
“레온하트에는 변수가 많이 있으니까요. 저나, 레드라인 후작님이나, 발레리아 같은 국가급 전력부터 배제하려고 할 겁니다.”
“트리옌은 어트 한넬을 잃었지. 규모 자체는 그쪽이 우위겠다마는. 하면 레온하트를 지켜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다면 트리옌으로 선회하겠지요. 국가급 전력이 없다면 수적 우위로 밀어붙일 수 있으니.”
레드라인 후작이 인상을 찡그렸다.
레온하트를 지키면 트리옌을 친다.
트리옌을 지키면 레온하트를 친다.
“답이 없지 않은가?”
“있습니다.”
“있다고?”
“제국에 선택권을 주지 않으면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희가 먼저 칩시다. 팔베르크 제국.”
* * *
트리옌 왕국, 북부 국경.
서랜드 영지는 팔베르크 제국과 전쟁 선포로 긴장된 상태였다.
수도 하멜에서 파병된 병사들이 배치됐으며, 인근에는 주둔지까지 구축된 상태였다.
비록 국경에서 조금 거리가 있더라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다행인 것은 기사들이 동원된 철저한 검문으로, 내부는 안전하다는 점이었다.
성벽 인근으로 제국군이 온다면 높이 솟은 망루를 통해 미리 알고, 대피할 수 있을 것이다.
“멈추시오.”
하멜에서 오는 지원 병력과 물자 수송을 요청한 병사 말고는, 성문에 들어선 인물이 없었다.
그런데 웬 낭인 하나가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눈매, 짙게 드리운 다크서클.
용병과 비슷한 옷차림으로, 가벼운 경장을 걸쳤다.
망토를 둘러쓰고 있었는데, 앞섬까지 가리고 있어 양팔이 보이지 않았다.
경비를 맡은 기사 둘이 그를 정지시켰다.
“정지. 이름과 신분을 밝히시오.”
“팔베르크 제국의 글레엄 백작이다.”
“팔베르크 제국……. 잠깐, 글레엄?”
그것이 기사의 마지막 말이었다.
순식간에 목이 날아간 기사는, 눈을 부릅뜨고 제 몸을 바라보았다.
글레엄 백작은 왼손으로 검을 쥐고 있었다.
망토가 위로 나부끼며 상반신이 드러났다.
오른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맞은편에 있던 트리옌의 기사는 뒤늦게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적……!”
적습을 알리며 반격하려고 했던 기사 또한, 목이 잘려 나갔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그 정체는 팔베르크 제국에 있는 네 명의 소드 마스터 중 하나.
외팔이 기사, 글레엄 백작이었다.
“하아, 비릿해. 최고야.”
얼굴로 기사의 피가 후두둑 튀자, 글레엄 백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율했다.
수년 전 있었던 정복 전쟁 이후로 오랜만에 느끼는 희열이었다.
글레엄 백작은 팔베르크 제국 내에서도 소문이 좋지 않은 인물이었다.
살인을 즐기는 전쟁광.
적수의 심장을 씹어 먹었다든지, 웃으면서 사람을 죽였다는 건 유명한 일화였다.
“레온하트 왕국에 가고 싶었는데, 하필 트리옌이라니. 운도 지지리 없지.”
글레엄 백작은 라그힐 팔베르크에게 차마 이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라그힐은 글레엄의 힘을 높이 평가하여 이런저런 편의를 봐줬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도 숱한 살인을 저질러 온 글레엄 백작이 작위를 영위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또한 죽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글레엄 백작은 이상하리만치 라그힐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 타고난 성질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었다.
“계획에는 없었던 일이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글레엄 백작은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난전과 전쟁에 특화된 검술을 보인다.
하여 전술적으로 굉장한 전력으로 대우 받는 데도 불구하고, 모든 지휘관은 그를 꺼린다.
글레엄 백작은 통제가 불가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라그힐의 직접 명령 같은 예외가 있지만, 큰 틀만 지킬 뿐.
세부적인 사항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성향이 강했다.
자는데 깨운다고 시종의 목을 베거나, 명령을 무시하고 홀로 돌진하는 등이 대표적인 사례.
“크, 부하들의 수고를 덜어 준다. 이런 상관이 또 없어.”
글레엄 백작은 팔베르크 남부 국경에 배치되어 대기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글레엄은 마부를 죽이고, 그대로 국경을 넘어 트리옌에 발을 들였다.
국경선을 지키던 트리옌의 병사들은 이미 그에게 학살당한 후였다.
이제 남은 것은 평화로운 영지를 밀어 버리는 것.
댕! 댕!
적습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여기저기서 발소리가 교차해 들려왔다.
갑옷 부딪치는 소리, 사방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적의.
글레엄 백작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것들이었다.
곧 영지에 주둔하고 있던 트리옌의 기사와 병사들이 집결했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을 처리한 속도로 미루어 볼 때 실력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네가 뭔데?”
“나는 영주, 서랜드 백작이다. 너는 누구냐?”
“팔베르크 제국의 글레엄 백작이다.”
“글레엄? 설마…… 외팔이 기사 글레엄?”
“딩동댕. 상으로 죽음을 드리겠습니다.”
부지불식간에 달려든 글레엄이 빠르게 기사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기사들은 글레엄을 막으려 했지만, 검을 부딪치기도 전에 팔이나 목이 잘려 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후방에 있던 서랜드 백작 앞으로 달려든 글레엄이, 목을 노리고 검을 찔러 넣었다.
목을 관통할 기세로 찔렀던 검이, 바로 목 앞에서 멈췄다.
소드 마스터이기에 가능한 기예.
“겁먹었냐?”
히죽 웃는 글레엄 백작과 마주한 서랜드 백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앞을 막아서고 있던 다섯 명의 기사와 수십의 병사들이 모두 죽거나 무력화됐다.
심지어 이것은 채 1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이게, 국가급 전력.’
뒤에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은, 서랜드가 인질로 잡히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글레엄은 서랜드의 목에 검을 겨눈 채 입을 열었다.
“트리옌이 레온하트와 동맹을 맺었다지? 연합인가 뭔가로.”
“……그렇다.”
“그럼 혹시 너, 레온하트의 검귀를 알고 있나?”
“검귀? 처음 들어 보는데.”
“쯧, 그럼 됐다.”
“살려 주는 건가?”
“아니?”
글레엄이 서랜드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가, 바로 뽑아냈다.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쿵.
서랜드의 몸이 무너지고, 글레엄 백작은 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샐쭉 웃는 입가에서는 살인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병사들은 왜 그가 살인귀나 학살자와 같은 이름으로 불렸는지 알 수 있었다.
“몸 풀기 상대 좀 해 주라. 제일 마음에 드는 애 따악 한 명 선발해서, 안 아프게 죽여 줄게.”
* * *
위스크 백작령을 중심으로 형성된 팔베르크 제국군의 남부 주둔지.
온몸에 피 칠갑을 한 글레엄 백작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귀했다.
아군인 제국군조차도 그를 두려워하며 피했다.
그러나 그를 피하지 않는 인물도 있었다.
“글레엄, 어디 갔다 온 거지?”
“잠깐 마실 좀 다녀왔지.”
“황제 폐하의 명령을 잊은 건가? 너는 대기하라 했을 텐데.”
“아, 몸이 영 찌뿌둥해서 견딜 수가 있나.”
글레엄에게 핀잔을 주고 있는 것은, 나이깨나 있어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곧은 자세에서부터 글레엄과는 상반된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갑옷을 입은 중년인의 정체는 팔베르크 제국의 또 다른 소드 마스터.
황실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기사단장, 아인더였다.
그는 짙은 눈썹을 찡그리고 글레엄을 나무랐다.
“황제 폐하의 명은 절대적이다.”
“대기하라고는 안 했어. 여기로 가라고 했지. 거 노친네 말 많네.”
“경망스러운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목이 잘리는 수가 있으니.”
“폐하가 싸우지 말랬는데, 그쪽에서 먼저 검을 뽑으면 정당방위라고 우길 수는 있지.”
“쯧, 어디 다녀온 건지 말하라.”
“저어기, 서랜더? 서랜드? 영지 싹 쓸어 버리고 왔지. 영주성에 깃발도 꽂고 왔다고.”
“싹 쓸어 버렸다는 게, 민간인까지 학살했다는 말은 아니겠지?”
“응? 에이, 전쟁에 민간인이 어디 있어. 다 적이지.”
아인더는 한숨을 내쉬었다.
홀로 영지를 찬탈한 것은 꽤 나쁘지 않은 공적이긴 했다.
문제는, 글레엄이 지나간 자리가 피바다가 되어 있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는 것이었다.
그곳까지 나아가더라도 분명 병사들의 사기만 떨어트리는 꼴을 면치 못할게 뻔했다.
마법사나 정령사를 보내 청소를 시키든지 해야 할 문제였다.
“들어가라. 이번 한 번만 눈 감아 주지.”
“뭐? 훈장을 주면 줘야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닥치고 들어가라.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지 마.”
“후, 황제 폐하 봐서 봐준다. 너나 내게 명령하지 마.”
글레엄은 아인더에게 끝까지 으르렁대며, 위스크 저택으로 들어갔다.
시종들이 기절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인더는 알 바 아니었다.
그보다, 라그힐 팔베르크의 의중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폐하께서는 어떤 연유로 어트 한넬도 죽고 없는 트리옌에 소드 마스터를 둘씩이나 배치한 것이지?’
* * *
레온하트 왕국, 네르갈, 서풍의 최상층.
“아빠!”
“도련님, 오셨어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장시간 지속된 작전 회의에서 벗어난 나는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과 조우할 수 있었다.
리옐은 내가 데려다 놓았다지만, 단과 마리나는 각각 발레리아와 벨수스를 보냈다.
텔레포트로 하나하나 데려와도 됐지만, 효율을 생각한 것이었다.
더욱이 마리나 같은 경우에는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에잉, 늙으면 죽어야지.”
“할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저놈이 자꾸 나를 부려 먹으려 들지 않느냐.”
마이어 영지에 있던 마녀 또한 호출된 상태였다.
소드 마스터에 비해 무위는 떨어진다고 해도, 전술적 가치는 탑주와 엇비슷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꺼리는 만큼 직접 나설 수는 없기에, 적탑 소속 마법사 행세를 시킬 생각이었다.
“원래 바깥 공기도 쐬고 그래야 오래 사는 거야.”
“개뿔이. 너는 바깥 공기 그렇게 쐬고 다녀도 죽더만.”
“좀 억울하게 죽었지.”
“라그힐 놈한테 뒤통수 맞은 건 매한가지니, 협력할 생각이긴 하다만.”
“결국 도와줄 거면서 빼긴.”
“아이고, 내 신세야. 마리, 너는 왜 저런 놈한테 걸려서는.”
마녀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어쩔 셈이냐?”
“뭘?”
“막기만 한다고 끝날 전쟁이 아니지 않느냐.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알아. 몇 달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길어질수록 대규모 인명 피해가 나오겠지.”
애초에 흐름이 끝난다는 건, 이 전쟁이 종말로 치닫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소리다.
그것을 막기 위해선, 어떻게든 일이 커지기 전에 종전시키는 것이 제일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해 볼 생각이었다.
“글쎄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지.”
“네 손으로 끝장을 보겠다는 거냐?”
“그래.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잖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희생자가 나오면 그것을 제물로 마계의 병력까지 끌어올 것이다.
정말 그러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더 커지기 전에 막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렘센에 있던 두 소드 마스터가 남하한 상황.
연합과의 전쟁 선포로, 병력은 전부 외곽으로 빠져 있을 것이다.
요아힘 월베른이라는 커다란 벽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렘센은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이 확실했다.
“팔베르크 제국의 수도, 렘센으로 갈 거다.”
체스에서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체크메이트.
즉, 왕을 잡으면 이긴다.
후계자가 없는 라그힐 팔베르크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체크메이트를 위한 초석은, 체스가 시작되자마자 깔아야 한다.
“우리는 황제, 라그힐 팔베르크를 잡는다.”
* * *
웨스트리아 왕국, 동남부.
왼쪽으로는 프라우드 산맥의 가파른 절벽이.
오른쪽으로는 드래곤 브레스로 만들어진 깊은 골짜기가 있었다.
수성이 목적인 웨스트리아로써는 뜻밖의 호재였다.
“리에이트 교국에서, 지그문트 경이 블랙 드래곤과 함께 모습을 보였다지?”
“예. 그렇습니다. 묘사된 외관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프라우드의 악룡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역시, 의도적으로 갈라놓은 건가. 덕분에 할 만해졌어.”
처음에는 용의 산맥 측에서 감시를 선언해, 블랙 드래곤이 국경을 갈라놓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블랙 드래곤은 지그문트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아마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드래곤 브레스를 사용하게 하도록 했던 것 같았다.
왕국의 방패를 이끄는 검 없는 소드 마스터, 엘트렛 커큰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은 얼추 알 수 있었지만, 도대체 몇 수 앞을 먼저 봤단 말인가.
‘아군이어서 다행이군.’
아군으로 둔 입장에서는 든든하기 그지없었지만.
만에 하나 적이었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 뻔했다.
실제로 엘트렛 커큰은 그와 대련을 벌였을 때, 모골이 송연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이미 국가급 전력을 표방하고 있지만, 힘을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됐다.
“길을 끊는 작전은 어떻게 됐나?”
“실패했습니다. 팔베르크 제국 측에서도 마법사가 동원된 듯 보입니다.”
“쯧. 수월하게 가기는 글렀군.”
웨스트리아는 아예 길목을 끊을 생각이었다.
다리를 놓는 것만 저지한다면, 제국군이 국경을 넘는 건 요원한 일이 될 테니까.
험준한 프라우드 산맥을 넘거나 목오 사막을 지나올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 경우 오히려 웨스트리아가 공세로 나설 수 있게 된다.
“테이럼 변경백이 리헨에서 나왔다지?”
“예. 그렇습니다. 병력 차가 큽니다만.”
“수성이라면 가능할 것 같군. 지리적으로도 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해.”
팔베르크 제국의 병력은 웨스트리아의 몇 배에 달했다.
힘 한번 못 써 보고 밀릴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병력 차.
그러나 지형적으로 지나칠 정도로 유리하게 형성된 지금은, 버틸 만하게 됐다.
겨우 절벽과 골짜기 사이에 난 길은 정말 좁다랬다.
억지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병력을 갈아 넣는 꼴이다.
수성전에 일가견이 있는 왕국의 방패라면 충분히 막을 여력이 있었다.
그때, 천막을 열고 다급한 표정의 병사 하나가 들어왔다.
“단장님! 놈들이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가지.”
엘트렛 커큰은 헬름을 쓰고, 거대한 듀얼링 실드를 챙긴 뒤 천막 밖으로 나섰다.
망루 위로 올라가니, 좁다란 길을 가로질러 진군하고 있는 제국군이 보였다.
검은 갑옷 차림의 기사들이 선두에 섰는데, 방패조차 갖추지 않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지?”
“모르겠습니다.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려는 생각 아니겠습니까?”
“기사들을 앞세웠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테이럼 변경백은 글레엄 백작처럼 생각 없이 일을 벌이는 자가 아니었다.
마음 한편에서 고개를 드는 기시감을 지워 낸 엘트렛 커큰은 명령을 내렸다.
“방패와 창은 길목을 차단하고, 궁병들은 화살을 준비하라.”
“넵!”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일제 사격한다.”
엘트렛 커큰은 제국군을 주시했다.
이렇게 병력을 줄일 기회를 준다면, 기꺼이 환영이었다.
활시위를 겨누는 것이 분명 보였을 텐데, 제국군은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진군해 왔다.
이윽고 제국군의 선두가 활 사정거리 내로 들어왔다.
엘트렛 커큰이 손을 들자, 궁병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활대 휘어지는 소리와 함께, 짧은 정적이 흘렀다.
엘트렛이 들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렸다.
파바바바바바바박!
화살 비가 좁은 길에 모인 제국군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화살은 정확히 기사들에게 적중했고, 갑옷을 뚫고 박혔다.
몇몇 기사들이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골짜기 아래로 떨어졌다.
“교대!”
궁병들은 활시위를 매긴 다른 궁병과 자리를 바꿨다.
그리고 엘트렛 커큰은 믿을 수 없는 광경과 마주했다.
아래에 있던 왕국의 방패들도 눈에 띄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뭣이……!”
“사, 살아 있는 거야?”
“저게 가능해?”
선두에 있던 흑색 갑옷의 기사들은 온몸에 화살이 박혀 고슴도치 신세를 면치 못했다.
박힌 화살 중에는 투구를 정확히 관통한 것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기사들은 잠시 주춤 했을 뿐.
마치 타격이 없다는 듯 자세를 바로하고 움직이기까지 했다.
상식을 뒤트는 기이함에, 엘트렛은 저도 모르게 방패를 든 손에 힘을 줬다.
불사의 군대가 웨스트리아 왕국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 * *
레온하트 왕국 북부, 코스타 영지.
수성을 위해 배치된 레온하트 왕국군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네르갈에서 파견된 기사들은 물론이고, 적탑에서 보낸 수준급의 마법사들.
정규군에 전쟁 용병까지 더해진 상태였기에, 토지 내에 수용하기 버거울 정도로 많았다.
“저, 사라.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전쟁 용병으로 참여한 워베어 용병단의 단장, 하르만은 쩔쩔매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하르만의 딸, 사라의 완고한 고집 때문이었다.
사라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양 팔을 꼬고, 인상을 찡그렸다.
“아빠, 전 말씀 드렸어요. 그냥 용병단 끌고 가시라고. 저 혼자 참여할게요.”
“참전이라니, 말도 안 된다. 네가 검을 좀 썼다지만, 전쟁은 장난이 아니야.”
“저도 참을 만큼 참았어요. 아빠 때문에 지그문트와 사이가 틀어졌을 때도 참았다고요!”
“그, 그래. 그건 내가 잘못했다.”
“또! 산적단에 사람을 팔아넘기려고 하고!”
“그, 그것도 내가 잘못했지. 암.”
“근데 그게 우리를 구해 준 지그문트랑 그 일행이고!”
하르만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단원들조차 이건 아니라고 느꼈는지, 하르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태였다.
사라와 단원들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지만, 하필 은인을 팔아넘기려 했던 것이 문제였다.
“아무튼, 저는 남을 거예요. 아저씨들 끌고 가시려면, 저는 두고 가세요.”
“단장, 우리도 레온하트를 돕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는 팔베르크 제국이야. 정복 전쟁에서 백전무패를 기록한 그 팔베르크 제국!”
“이미 한 번 빚진 목숨이잖아요. 제발요, 아빠.”
“우리가 언제 승산 따졌다고 그럽니까? 의리를 못 지킬 바에 죽는 게 낫다고 봅니다.”
하르만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지그문트 마이어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하지만 딸과 가족 같은 단원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그가 팔베르크 제국에서 혼자 전쟁 용병으로 활약한 이력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팔베르크 제국군은 그 규모에서부터 연합군과 큰 차이를 보였다.
패배는 불 보듯 뻔한, 정해진 사항이나 다름없었다.
“단장, 이미 수당까지 받았잖수. 이미 발 빼긴 늦었어.”
“그렇다면, 사라 너라도.”
“됐거든요? 저도 싸울 수 있어요.”
용병단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옆에서 조용히 무장을 정비하던 무연이 고개를 들었다.
불길한 마음을 대변하듯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헬름 속에서 검은 눈이 조용히 빛났다.
한편, 코스타 영지의 성벽 위에 배치된 이안은 국경 너머를 확인하고 아연실색했다.
마법을 통해 국경 너머에 있는 팔베르크 제국군의 규모를 얼핏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온하트 왕국 측의 군대도 만만치 않게 많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저게 전부 사람이라고…….”
지평선 너머로 빼곡히 들어찬 제국군은, 얼핏 보기에도 과하게 많은 수준이었다.
최전선인 만큼, 코스타 영지로 검을 부수는 검, 레드라인 후작이 파견된다는 것은 들었다.
하지만 국가급 전력이 참전하더라도 정말 막아 낼 수 있을까 의심이 될 수밖에 없는 수였다.
그 병력 차는, 얼핏 보기에도 십수 배에 달했다.
* * *
나는 발레리아와 함께 적탑 복도를 걸었다.
리옐을 안아 든 마리나와 단, 마녀가 그 뒤를 바짝 쫓아왔다.
“스승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렘센으로 곧장 텔레포트하는 건 불가능해요.”
“라그힐이랑 렘브란트가 머저리는 아니니까.”
“네. 크라우드 컨트롤(Crowd Control)로 일대를 장악하고 있을 거예요.”
“렘센 내부에 사람 하나 침투시키긴 했는데, 장거리라 마법 장악(Magic Control)이 안 돼.”
“심연을 건너가는 건 어떨까요?”
“스물네 번째 틈? 린시스의 눈을 피해야 했을 테니, 연결도 끊었을 거다.”
직통으로는 불가능하더라도, 렘센으로 갈 방법은 많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중에서도 최적의 루트를 찾는 것이었다.
마녀가 대안을 제시했다.
“내 거처로 가려무나.”
“아, 거기가 있었지.”
팔베르크 제국에서 마녀에게 내준 거처.
확실히 팔베르크 제국 내부에 있기도 하고, 렘센과도 그리 멀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가 본 적이 없더라도, 발레리아를 통해서 텔레포트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존재했다.
“거기 습격당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놈 성격이면 아예 장악하고 있겠지. 마녀의 거처였던 만큼 뭐가 있는지 모르니까.”
“병력 대부분을 외부로 돌렸으니, 상대적으로 경계가 허술해졌을 거다. 돌파할 여지는 있어.”
“좋아. 그쪽으로 가지. 여로가 있으니 임기응변도 될 거야.”
“바로 준비할게요.”
나는 아공간을 열어 반지 세 개를 꺼냈다.
각각 마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아티팩트였다.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알아본 마녀가 눈을 빛냈다.
“그건 또 무어냐?”
“긴급 탈출용 반지. 마석을 부수면 마이어 영지로 텔레포트 되게 되어 있어.”
“위치 지정 텔레포트? 아, 네놈은 7서클 마법을 메모라이즈할 수도 있었지.”
부하들이 수련에 매진하는 동안, 나도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성에게 깨져 가며 반신화 시간을 늘렸고, 전쟁에 대한 준비도 했다.
이 반지는 그러다가 만들게 된 아티팩트였다.
나는 반지를 각각 단과 마리나, 리옐에게 줬다.
발레리아는 조금 아쉬워하며 허전한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힝, 제 건요?”
“넌 텔레포트 쓸 수 있잖아.”
애초에 이 셋은 나와 함께 제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나야 몸을 뺄 방법이 있지만, 저 셋은 내가 아니면 고립될 수밖에 없다.
부득이한 상황을 대비해 준비한 것이었다.
크라우드 컨트롤(Crowd Control)을 내가 장악하기만 하면 탈출할 수 있으리라.
“여차하면 마석 깨라. 객기 부리면 돌아와서 내 손에 죽는다.”
“알겠습니다.”
“네, 도련님.”
“응!”
발레리아는 이미 텔레포트를 위한 마법진을 그려 둔 상태였다.
지체할 것 없이 우리는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마녀만 혼자 마법진 밖에 있었는데, 그녀는 따로 움직일 예정이었다.
“마리, 꼭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네, 할머니. 너무 걱정 마세요. 도련님께서 함께 가시잖아요.”
“그래. 그래.”
마녀도 많이 성질이 누그러졌다.
마리나와 짧은 포옹을 한 뒤, 다시 물러섰다.
발레리아는 마녀와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기에, 마녀의 집 장악을 도울 수 없다고 경고했다.
“분명 무장 병력을 배치해 뒀을 거예요. 조심하세요. 스승님.”
“걱정도 팔자다. 내가 어디서 죽을 위인이냐?”
“한 번 죽었잖아요.”
“비겁하게 진실을 들이밀다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단과 마리나가 픽 웃었다.
이 정도면 대충 준비는 마친 것 같았다.
“가자. 마녀의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