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12/134)

3

개전

웨스트리아 왕국.

엘트렛 커큰은 레온하트의 수호자, 지그문트 마이어에게 한 기사의 지도를 부탁 받았다.

이미 레온하트의 검술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바 있는 단 록벨런이었다.

처음에 엘트렛은 지도 편달을 거부했다.

이유인즉슨 웨스트리아 왕국의 현 상황 때문이었다.

팔베르크 제국이 드래곤에 의해 움직이지 못하고 있더라도, 선전포고까지 마친 전시였다.

국경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다른 국가의 기사를 가르칠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마음에 안 들면 내치라 했지.’

하지만 지그문트의 언변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어차피 레온하트와 웨스트리아는 동맹을 구축한 상태였기에,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그 나이에 그 정도 무력을 가진 인물이, 그토록 신뢰하는 기사가 어떤 사람인지.

단 록벨런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평범한 괴물이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는지.”

대련해 본 결과, 지그문트와 마찬가지로 실전 경험이 많은 케이스였다.

자신보다 강한 기사와 거듭해서 겨룬 흔적이 느껴졌다.

엘트렛 커큰조차 쉽게 무너트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왜 지그문트 본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겼는지도 알 수 있었다.

검이라는 공격 무기에 어울리지 않게 수비에 특화된, 지키는 검술을 구사하는 기사.

‘부족함은 없는데.’

탁월하다면 탁월했지, 결코 부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엘트렛의 휘하 왕국의 방패에도 이만한 기사는 없었다.

잠재력과 나이대까지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원석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단 록벨런은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하긴, 옆에 궤를 달리하는 괴물이 있으니.’

지그문트 마이어의 나이를 알게 된 엘트렛은 그가 유희 중인 드래곤이라고 생각했다.

소드 마스터 중 특출나게 강하다는 레온하트의 검을 부수는 검, 레드라인 후작도.

심지어는 불패의 기사, 요아힘 월베른조차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 나이.

여태껏 그 나이에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것은 파울 레드라인이었다.

그런데 지그문트 마이어는 그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비교 대상이 잘못되긴 했다만, 내려다보는 것보단 올려다보는 편이 좋긴 한가.’

그때, 엘트렛의 발치에서 불쑥 손이 올라왔다.

땀으로 머리카락이 착 가라앉은 단 록벨런이 거친 숨을 내쉬며 올라왔다.

웨스트리아 왕국, 동남부 국경.

벨수스 블랙의 드래곤 브레스로 만들어진 거대한 골짜기 앞.

단 록벨런은 그 골짜기를 기어서 올라온 것이었다.

그것도 무게를 추가하기 위해, 어깨에는 쇳덩어리까지 지고 있었다.

“흐억! 헉, 헉.”

겨우겨우 올라온 단 록벨런은 대자로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엘트렛은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드래곤 브레스로 만들어진 골짜기는 생각 이상으로 깊었다.

떨어지면 즉사는 확정이었는데, 그 각도 또한 절벽에 가까웠다.

꼼수를 쓰진 않았는지, 파르르 떨리는 단의 손가락 끝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재능도 있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도 강해.’

그럼에도 단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엘트렛이 단에게 절벽을 오르게 한 이유는 둘.

의지력을 보는 동시에, 호흡의 중요성을 깨닫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절벽을 기어오르는 동안 힘이 풀려 떨어지면,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았다.

지구력과 힘도 요구되었지만, 당연히 호흡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검을 잡거라.”

엘트렛은 단의 검,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쥐여 줬다.

단은 오묘한 표정으로 클레이모어를 잡았다.

“오러를 운용해 보거라.”

기다렸다는 듯, 단은 심호흡을 하고 집중했다.

클레이모어의 위로 오러가 피어올랐다.

처음 봤을 때보다 확실히 안정된 모습.

그리고 오러에 특질이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빠르군.’

오러는 모두 엇비슷해 보이지만, 각각 특성이 있다.

마법사가 유독 잘 다루는 마법이 있는 것처럼, 기사도 마찬가지다.

비록 그 특성이 기사로써 상당한 성취를 이뤄야 나타나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아직 단의 오러는 완성되지 않았으나, 특질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그문트의 오러는 정교하며, 레드라인 후작의 같은 경우 강렬하다.

그리고 단의 오러는.

‘견고하다.’

엘트렛 커큰이 추구하는 바와 비슷한 오러였다.

그것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엘트렛의 입꼬리가 호를 그렸다.

하지만 아직 물어볼 것이 남아 있었다.

“단 록벨런.”

“예. 커큰 경.”

“자네는 어째서 검을 쥐는가?”

기사는 제각각의 이유로 검을 잡는다.

하지만 이렇게 지키기 위한 검을 쥐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은 입을 열었다.

“몇 달 전에, 리옐 님과 함께 산책을 나간 적이 있습니다.”

엘트렛은 리옐을 알고 있었다.

웨스트리아 왕국에도 한 번 온 적 있는, 귀여운 꼬마 아이.

지그문트의 딸이라는 말을 얼핏 들은 바 있었다.

“우연찮게 적과 조우했고, 저는 무력하게 부상을 입었습니다.”

“하여, 지키지 못했나?”

“다행히 무사하셨지요. 도련님께서 오셨기에.”

단은 눈을 감았다.

“주인께 지켜지는 기사라니. 꼴사납지 않습니까.”

“자네가 약한 것이 아니라, 마이어 경이 강한 것이라네.”

“저는 몇 번이고 도련님께서 홀로 분투하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분투했다면, 단이 낄 만한 싸움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은 특출난 기사지만, 지그문트 마이어는 거의 신화를 쓰고 있었으니.

“이제는 그러기 싫습니다.”

“좋군. 마음에 들어.”

지그문트에게서 느껴졌던 신뢰와 자신감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진심으로, 이런 기사를 수하로 둔 지그문트가 조금 부러웠다.

인복까지 있다니,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 아닌가.

엘트렛 커큰은 기분 좋은 얼굴로 단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력으로 따라와 보게. 끌어 올려 줄 터이니.”

* * *

네르갈로 귀환한 벨수스는 심각한 얼굴로 적탑에 발을 들였다.

최상층에서 발레리아 로안과 마주하고, 흠칫 놀랐다.

책상에 엎어져 있었는데, 적탑의 로브는 곳곳이 그을려 있었다.

발레리아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너 왜 죽을상이야?”

“닥쳐. 머리 아프니까.”

“대부님이랑 대련이라도 했어?”

“아니. 잠시 연옥 좀 다녀오느라.”

“연옥? 불의 서?”

“응. 그것도 있고, 다른 일도 하나 처리하느라.”

“다른 일? 연옥까지 가서 할 일이 있어?”

“비밀. 그래서, 넌 왜 호출 당한 거야? 교국에서 한 일이 문제됐어?”

“그건 아니고.”

벨수스는 잠시 망설였다.

라그힐 팔베르크에 관한 화제는 되도록 꺼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발레리아의 컨디션 또한 제 상태는 아닌 듯 보였다.

지옥에 다녀오고 멀쩡한 인간이 어디 있겠냐마는, 괜히 성질만 돋울 것 같았다.

“혹시 대부님 어디 계신지 알아?”

“스승님? 요새 레드라인 저택에 계실 텐데.”

“응? 거긴 또 왜?”

“레드라인 후작님이랑 대련하신다더라. 검으로.”

“이해가 안 가네. 오러랑 마나를 어떻게 동시에 쓰시는 거야?”

“오러를 단전으로 옮겼다던데?”

“나눈 거구나. 그래도, 균형 유지가 돼?”

방대한 지식을 가진 둘이지만, 지그문트가 한 일은 상식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몸속에 폭탄을 심어 놓고 다니는 것과 같았는데,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신성이 완충제 비슷한 역할을 해 준다고 해도, 긴장을 놓을 수 없을 텐데.

심지어 그 둘을 각각 인간의 한계라는 영역까지 올려놓았다.

“대부님, 사람 맞지?”

“이젠 아니지 않아?”

* * *

“미친놈.”

레드라인가의 연무장.

한구석에 선 파울 레드라인은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지그문트 마이어와 검을 맞대 보니, 그런 감상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파울은 지그문트가 건넨 지도를 따라 여행하며, 수많은 경험을 갖췄다.

기사로서 눈에 띄게 성장해, 연이은 패배의 굴욕도 되갚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지그문트 마이어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드 마스터라니. 아버지와 같은 경지잖아.’

고작 1년 사이에, 자신을 추월한 것도 모자라 한참을 앞서가 버렸다.

한 번의 대련으로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어떤 부분에서도 떨어지지 않는 완성도를 보였다.

그 증거로, 지그문트는 레드라인 후작과 호각으로 검을 부딪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봐줄 요량이었던 듯한 레드라인 후작도 어느새 진지한 표정이 됐다.

부웅!

치열한 공방전 끝에, 레드라인 후작이 승부수를 던졌다.

익숙하지만, 지그문트와 파울의 것과는 완성도 측면에서 확실히 차이를 보이는 움직임.

검을 부수는 검이 지그문트의 이름 없는 검을 강타했다.

콰앙!

검을 부수는 검은 이름 그대로 무기 파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검술이다.

파울의 검술은 아직 미흡하여, 제대로 된 힘을 이끌어 내지 못했더라도.

소드 마스터인 레드라인 후작의 검은 그렇지 않았다.

단 한 합 만에 검이 부서진 기사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검도 좋군.’

지그문트의 검은 멀쩡했다.

대신 힘 적으로 크게 밀렸는지, 팔이 밀려 나가고 말았다.

레드라인 후작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지그문트도 만만치는 않았다.

퍽!

넘어지듯 뒤로 물러나며, 턱을 노리고 발차기를 날린 것이다.

하지만 역시 레드라인 후작은 노련했다.

예상이라도 한 듯한 손으로 발을 막고, 검을 찔렀다.

검 끝이 지그문트의 목 앞에서 멈췄다.

“졌습니다.”

지그문트가 패배를 선언하자마자, 레드라인 후작은 손을 뻗었다.

뒤로 넘어가던 지그문트가 그 손을 잡고 바로 섰다.

“수고했네.”

“역시 대단하시군요. 못 당해 내겠습니다.”

“자네야말로. 나와 대련했을 때도 내심 꽤 놀랐는데 말이야.”

“그랬습니까?”

“그래. 얼마나 지났다고 이 정도라니. 내 아들놈도 비약적으로 성장하긴 했지만.”

“파울 상처 입겠습니다.”

“자극이 되겠지. 이제는 자네보고 내 제자 하라고도 못 하겠어. 으하하!”

레드라인 후작은 기분이 좋았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인재가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 든든했다.

한편으로는 라스와 경쟁심이 들기도 해, 파울을 혹독하게 훈련시킬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때, 시종이 연무장 내부로 들어왔다.

“후작님, 지그문트 님, 벨수스 님께서 찾으십니다.”

“벨수스가? 흠, 그래. 대련도 끝난 참이니, 바로 간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파울도 동행하게 됐다.

벨수스는 응접실에 앉아 있었는데, 꽤 심각한 얼굴이었다.

레드라인 후작이 착석하고, 지그문트와 파울도 자리에 앉았다.

레드라인 후작은 파베스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고 내심 긴장했다.

하지만 이름 있는 귀족답게, 그것을 티내지는 않았다.

“벨수스, 무슨 일인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문제?”

가라앉은 목소리에, 지그문트가 반문했다.

벨수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1주일 앞당겨졌습니다.”

“뭐가?”

“전쟁입니다.”

* * *

팔베르크 제국의 수도, 렘센.

왕성 앞은 전쟁에 자원하기 위해 모인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황제, 라그힐 팔베르크가 마계에 전쟁을 선포한 탓이었다.

드래곤이 마족에게 속아 팔베르크 제국을 감시하게 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거기에 더하여, 옥스가 이끄는 기사단을 몰살시켰다는 것이 이유였다.

비록 지금은 드래곤의 감시 아래에 있기에 전쟁에 나설 수 없었지만.

정의감을 지닌 수많은 기사와 병사, 그리고 마법사들이 전쟁에 자원했다.

‘옥스의 평판은 좋았으니.’

렘브란트 님푸스는 황제의 수를 복기하며 소리 없이 감탄했다.

옥스는 비록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으나, 꽤 이름 있는 기사 중 하나였다.

오랜 기간 팔베르크 제국에 충성하며, 여러 전쟁에서 활약한 백전노장.

거기에 뛰어난 인품까지 겸비하고 있으니 평판이 안 좋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마족에 대한 전쟁이었기에 대의 사기 또한 챙길 수 있었다.

“렘브란트 경.”

“무슨 일이냐?”

흑탑주 렘브란트 님푸스 또한 핵심 전력 중 하나였다.

이런 전쟁에 있어서 탑주급 마법사의 유무는 성패를 가를 정도로 중요했다.

당연히 빼고 가선 안 될 인물이었으나, 지휘를 맡은 귀족은 조금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렘브란트 님푸스가 의외의 인물을 전쟁에 추가로 데려오길 희망했기 때문이다.

“그 엘프를 꼭 데려가야겠습니까?”

“시종을 동반하는 것에 문제라도 있나?”

렘브란트가 마계와의 전쟁에 데려가고자 한 것은 엘프 남자 아이.

시종으로 보였는데, 요정족 매매가 불법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렘브란트 님푸스의 지위가 지위다 보니, 차마 말을 못 하고 있었다.

“이 아이는 공격 마법도 사용할 수 있다. 필시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병사들이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을 겁니다.”

“왜? 이것이 엘프라서?”

“그렇습니다. 그 뾰족한 귀를 보면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지요.”

렘브란트는 시종 역을 하는 엘프를 내려다보았다.

약 1년 전, 태초의 숲 인근 여관에서 구입한 노예였다.

렘브란트는 엘프의 뾰족한 귀에 손을 얹었다.

“그렇군. 귀가 문제란 말이지.”

“예. 그렇습…….”

귀족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돌연 렘브란트의 손이 빛나더니, 무언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기 때문이다.

바닥으로 떨어진 것은 엘프의 귀 끝자락이었다.

엘프는 주저앉듯 쪼그려 앉아, 양 귀를 부여잡은 채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악! 내 귀! 귀가아아아! 아아아악!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고통에 들어찬 절규.

귀를 붙잡은 손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귀족은 렘브란트의 잔인한 손속에 아연실색했다.

렘브란트는 인상을 찡그렸다.

“사일런스(Silence).”

순간 귀를 파고들던 비명이 사라졌다.

엘프는 여전히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아랑곳 않고 엘프의 손목을 잡아챘다.

피로 범벅이 되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뭉툭하게 잘려 나간 귀가 드러났다.

인간의 것처럼 보이도록, 마법으로 깔끔하게 잘라 낸 것이다.

“이제 문제없겠지?”

“네, 네. 문제, 없습니다.”

귀족은 차마 뭐라 말하지 못했다.

그냥 렘브란트 님푸스가 남색을 즐기기라도 하나 유추할 뿐이었다.

동행시켜도 된다는 확언을 듣고 나서야, 렘브란트는 엘프와 함께 어디론가 텔레포트했다.

귀족은 렘브란트가 있었던 자리를 황당한 눈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 중에 이상한 사람이 많다고 하더니, 흑탑주도 예외는 아니구먼. 다음 안건은?”

“사제 충원에 대한 안건인데…….”

젊은이들 틈에서,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눈이 있었다.

그의 얼굴에 있는 화상 자국을 본 이들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밤말을 듣는 쥐가 조용히 인파 사이로 스며들었다.

* * *

한동안 롭의 팔 역할을 하던 실험체 1호는 지그문트에게 되돌아갔다.

지그문트가 1호를 데려간 곳은 레온하트 왕성이었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실험체 1호는 사방에서 시선을 느꼈다.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와 셋째 왕자 루터, 그리고 레드라인 후작이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것이 아그나라는 것인가?”

“생각보다 귀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루터 왕자님께서는 취향이 독특하시군요.”

실험체 1호는 지그문트를 올려다봤다.

지그문트는 실험체 1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제가 키우는 놈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변종이지요.”

“불사의 괴물이라 했던가.”

“정확히는 그 잔재입니다. 머리카락이나 손톱쯤으로 생각하면 되겠군요.”

“한데, 아까는 불사의 괴물이 죽었다 하지 않았던가?”

“독립된 개체로써 존재를 유지하고 있을 수도 있고, 퀸틴 바다 아래에서 반쪽이 재생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멀쩡한지는,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실험체 1호는 지그문트의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인물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썩 나쁘진 않았다.

지그문트는 대뜸 실험체 1호의 일부를 잘라 냈다.

아그나는 절단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에 스스럼없이 자른 것이다.

“자, 이렇게 잘라 내더라도.”

실험체 1호는 곧바로 잘린 신체 일부를 재생시켰다.

절단 부위와 엉겨 붙더니, 곧장 상처 하나 없이 수복되는 모습.

아그나를 직접 본 적 없는 이들은 짧은 감탄을 흘렸다.

실험체 1호는 괜히 우쭐해져서, 꾸물꾸물 이상한 포즈를 취했다.

루터 레온하트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처럼 재생합니다. 불완전한 불사성을 띠고 있는 것이지요. 트롤보다 뛰어날 겁니다.”

“이런 것을 인간에게 이식하여, 불사의 병사를 양성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트리옌에서 한 번, 리에이트 교국에서도 두 번 목격됐습니다.”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다 하셨는데, 하면 기사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 아닙니까?”

“명확한 약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측컨대, 불사의 군대는 남하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소수더라도 상당한 전력일 텐데, 어떤 이유로요?”

지그문트는 손가락으로 톡톡 실험체 1호의 머리를 두드렸다.

짧게 생각에 잠겼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유야 많습니다. 아군에게 보이기도 꺼림칙한 힘이기도 하고…….”

지그문트는 조목조목 근거를 댔다.

그리고 거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짚어 냈다.

듣고 있는 셋의 머리가 나쁜 편도 아니었기에,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쟁이 처음인 루터 레온하트는 감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면 어떻게 합니까?”

“제 예상대로 움직인다면, 지원이 없더라도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 예상이 빗나가 함락 당하기라도 한다면 위험할 텐데요.”

“그 경우에도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전략 회의가 이어졌다.

지그문트는 팔베르크 제국의 움직임을 예측하면, 루터가 반론하는 식이었다.

물론 지그문트는 모든 경우의 수를 가정하고 있었고, 반론도 간단하게 받아냈다.

파서벌과 요하네스도 머리가 비상하다는 평을 받고 있으나, 차마 대화에 끼기가 어려웠다.

지그문트의 정보력은 한 국가의 첩보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방대했다.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조목조목 경로를 예측하니, 의문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서, 국가급 전력의 배분이 중요하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아마 그것으로 전쟁의 성패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 * *

“오랜만이구나. 벨수스.”

“간만에 보네. 할멈.”

“이놈의 버르장머리는 여전하구나. 에잉, 델에게는 그리 잘하는 놈이.”

“대부님은 예외지. 죽을 일 있어?”

마이어 영지, 망아의 숲.

벨수스 블랙은 마녀의 오두막을 찾았다.

오랜만에 벨수스와 만난 후닌은 제자리라는 양 벨수스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벨수스도 제지하거나 하지 않았는데, 어렸을 적 후닌과 놀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린시스 그 녀석은 어찌 지내느냐?”

“어머니야 늘 정정하시지. 세상에서 가장 쓰잘머리 없는 게 드래곤 수명 걱정이야.”

“끌끌. 그건 그렇구나. 오늘내일하는 늙은이가 괜한 걱정을 했어.”

“앵간 하면 죽지 마. 어머니는 사람한테도 정을 잘 주니까.”

“그건 너도 빼다 박았지 않느냐. 하여, 무슨 일이더냐?”

벨수스는 마녀의 옆을 흘겨보았다.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마리나가 몸살이라도 걸린 듯 끙끙 앓고 있었다.

“대부님이 경과 좀 보고 오라던데.”

“사실 나는 내 손녀를 전쟁 같은 것에 몰아세우고 싶진 않다.”

“강하게 키울 줄 알았는데. 의외네.”

“이미 충분히 강하게 컸다고 생각한다. 그놈을 따라다녔으니.”

“그건 부정할 수 없네.”

마리나는 분명한 마녀의 후예지만, 저주에 대해 부족한 부분이 많다.

입문한 지 얼마 안 됐다는 걸 감안하면 탁월한 재능을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목전까지 다가온 전쟁은 실전이었다.

어쭙잖은 실력이라면 끼지 않는 편이 낫다.

하여 마녀에게 저주에 대해 배우고자 마이어 영지를 찾은 것이다.

“이 아이에게는 한(恨)이 없어.”

“그래도 마녀의 혈통 아닌가?”

“지나칠 정도로 부족함 없이 컸다. 윌리엄 놈이 생각보다 괜찮게 키운 듯 허이.”

“그렇다고 억지로 만들 수도 없잖아.”

“꼭 한이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만. 단기간에 원념을 키우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거든.”

“어린 신의 대리인이라 들었는데. 그 부분을 상승시키는 쪽이 좋지 않겠어?”

“델이 이쪽부터라 했으니, 필시 뭔가 생각이 있겠지.”

마녀는 조금 서툰 손길로 마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환으로 덜덜 떨리는 손에서 짙은 애정이 느껴졌다.

“흐름의 끝이 도래했다지?”

“그걸 어떻게……. 참, 할멈 점성술에도 일가견이 있었지?”

“끌끌. 그래도 마녀니까 말이야. 이렇게 굵직한 것은 보일 수밖에 없지.”

“할멈이라면 그 정도 천기는 괜찮겠네. 그래. 에인션트 님도 말씀하셨다니까, 확실해.”

“흐름이 더 늘어날 가능성은?”

“없었어.”

“과거형이라는 말은, 생겼다는 거구나.”

성신 리에이트와, 에인션트 드래곤 마날루스, 마지막 마녀의 예언이 정확히 일치했다.

이는 거의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라고 미루어 봐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예언을 뒤바꿀 수 있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델……. 아니, 지그문트 마이어.”

“정확해.”

“그놈도 참 전도 다난하단 말이야. 세계의 명운을 짊어진 걸 알긴 아려나 모르겠어.”

“대부님이라면 질색하실 텐데.”

“그렇겠지. 끌끌.”

“대부님에 대한 건 예언할 수 없어?”

“무리다. 아마 성신이나 마신을 데려와도 그놈 앞날은 못 볼걸?”

“왜?”

“전생이었다면 모를까. 그놈은 이제 그냥 단순한 변수가 아니거든.”

“대부님이 변수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 단순한 변수가 아니라는 건 무슨 소리야?”

“죽었음에도 죽지 않았으며, 변수면서 변수가 아니고, 인간이자 신이기도 한…….”

모순적이지만, 모두 사실이었다.

마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고했다.

“세상의 흐름을 홀로 뒤엎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

* * *

팔베르크 제국, 황성.

라그힐 팔베르크는 황좌에 앉아 있었다.

요아힘 월베른을 비롯한 팔베르크의 중앙 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이윽고, 린시스 화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린시스?”

“로안 대공과 친분이 있었다는 화이트 드래곤 아닌가.”

“악마에게 속았다지?”

“린시스 님께서는 잘못이 없으시다.”

귀족들의 웅성거림에, 린시스는 말없이 피어를 흘렸다.

드래곤 피어에 억눌린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물론 요아힘이나 라그힐처럼 멀쩡한 이들도 있었다.

린시스는 라그힐의 앞으로 걸어갔다.

‘아, 젠장.’

아그나와 페러시트를 이용한, 불사의 병사로 어떻게든 트집을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페러시트는 어디까지나 마계의 생물일 뿐이었다.

마족과 연관되어 있지 않더라도 공수할 방법은 있었다.

렘브란트 님푸스가 페러시트를 잡아오는 것을 보임으로, 그 또한 무산되어 버렸다.

이제는 정말 꼼짝 없이 감시를 풀어야 할 상황이었다.

‘규율을 어길 수도 없고.’

린시스는 드래곤이다.

그것도 에인션트 드래곤 마날루스의 직속 후계자.

이미 여러 일로 논란거리도 많았기에, 여기에서까지 일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걸리는 점은 이 전쟁이 흐름의 끝을 알리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린시스.

-나도 알아.

모습을 숨기고 있던 파베스가 린시스를 독촉했다.

린시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라그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라그힐의 깊은 눈동자는 린시스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델 로안과 아주 짜증 나게도 닮아 있었다.

“용의 산맥을 대표하여, 화이트 드래곤 린시스가 고한다.”

청아한 목소리가 황성에 울려 퍼졌다.

모든 귀족들이 긴장했다.

만약 황제가 마족과 손을 잡았다면, 팔베르크 제국은 멸망이었다.

“이 시간부로, 팔베르크 제국에 대한 감시를 해제하겠다. 이상.”

델 로안의 장례식 이후로 쭉 지속되던 드래곤의 감시가 풀렸다.

말인즉슨 침략 행위로 규정되어 금지되었던 타 국가에 대한 공격도 허용된다는 소리였다.

린시스는 뭔가 말을 이어 나가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파베스가 린시스에게 무언의 경고를 날렸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린시스 화이트는 한숨을 내쉬며 용의 산맥으로 텔레포트 했다.

이윽고 파베스 블루 또한 린시스를 따라 텔레포트 했다.

요아힘 월베른은 파베스가 모습을 감추고 있는 곳을 잠깐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라그힐 팔베르크가 입을 열었다.

“웨스트리아 왕국을 향한 선전포고는 아직 유효하다.”

당연히 첫 번째 목표는, 이미 선전포고를 마친 웨스트리아 왕국.

하지만 라그힐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전하거라. 정당한 근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두 국가, 레온하트 왕국과 트리옌 왕국에게 경고한다.”

연합은 이미 꽤 유명한 말이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지그문트 마이어가 리에이트 교국의 내전에 개입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리에이트 교국은 정당한 사유가 없다면 절대 선공을 가하지 않기에, 불확실했다.

하여 라그힐 팔베르크는 다른 두 국가에게 경고를 보냈다.

“웨스트리아를 향한 원조를 즉각 중단하라. 만일 원군을 보낸다면, 팔베르크 제국을 향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이겠다.”

세 왕국의 연합은 팔베르크라는 거대한 제국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에 대해 팔베르크 제국은, 무력으로 눌러 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실제로 팔베르크 제국은 그럴 만한 무력이 있었다.

델 로안이 살아 있을 적에는 최소한의 희생으로 서대륙을 정복하고자 했지만, 그가 죽은 후로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지금 당장 트리옌과 레온하트에게 사절을 파견하라.”

* * *

“아빠다!”

나를 보자마자 오도도 뛰어온 리옐이 품에 안겼다.

르네가 쓴웃음을 지으며 리옐의 뒤를 따라왔다.

못 본 사이에 머리카락이 조금 길었다.

새싹은 여전히 푸르렀는데, 이 부분에서는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어이구, 뭘 그리 먹었냐? 무거워졌네.”

“에헤헤.”

리옐은 잠시 엘비아에 있었는데, 이는 세계수에게 지도를 받기 위해서였다.

아주 지극정성으로 보살핌을 받았는지, 다행히 얼굴은 밝았다.

르네의 뒤에는 요정족들이 입는 전통 드레스를 들고 있는 엘프들이 있었다.

-리옐 님께 아름다운 옷을!

-장신구를!

온갖 치장품부터, 귀엽게 생긴 리본이나 팔찌, 드레스까지.

전부 리옐을 위한 수공예품인 듯했다.

“리옐 님께서 좀처럼 옷을 갈아입지를 않으셔서.”

“르네 언니가 클린(Clean) 쓰면 그만이라고 그랬으면서!”

“그래도 저렇게들 원하시는데, 한 번 정도는 갈아입어 주시지.”

“아빠가 사 준 게 좋아!”

리옐은 지금 입고 있는 하얀 드레스가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르네는 나와 리옐을 두 번째로 높은 나무로 안내했다.

장로의 회의실이 있는 예의 그곳이었다.

“상석에 앉아 주세요.”

“말솜씨가 늘었는걸.”

“시프는 꽤 좋은 선생님이거든요.”

자리에 앉자마자, 리옐은 제자리라는 듯 내 무릎으로 올라왔다.

부러운 듯한 눈길을 보내며, 엘프 장로들이 자리에 착석했다.

르네는 내 맞은편 끝자락에 자리했다.

꽤 중요한 안건인 만큼 앉기로 한 모양이었다.

-장로분들을 배려해 요정족의 언어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상관없어.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팔베르크 제국으로부터 사절이 파견됐다고요.

-맞다. 웨스트리아 왕국을 향한 원조를 끊으라더군.

-웨스트리아가 점령당하면 거리낌 없이 남하할 수 있는 상황이라 이거네요.

엘비아는 레온하트 왕국과 동맹국이었으나, 요정족들은 처음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동맹이라고 해도 상징적인 쪽이 강했고, 전쟁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대부분.

그러나 불사의 괴물과 팔베르크 제국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태도를 바꿨다.

제각각 바라에 대한 존경심이 다른 인어들과 달리, 요정족들은 세계수를 어머니로 여겼다.

물론 세계수가 바라처럼 관망하는 대신 직접 나서 요정족에게 애정을 보여 주기도 했으니.

-너희는 연합이 아니다. 레온하트 왕국에 쳐들어오는 게 아니라면, 굳이 참전할 필요가 없어.

-엘비아는 이미 팔베르크 제국을 적으로 규정한 상태입니다.

르네는 결연하게 선언했다.

어쩌면 리에이트 교국보다 더 폐쇄적이던 엘비아였기에,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불사의 괴물이 아마 발화점이 된 모양이었다.

또한, 성신이 언급한 ‘흐름의 단절’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이엘프인 르네라면 세계수에게 이번 전쟁의 중요성에 대해 들었을 테니.

-요정족이 꽤 강력한 전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요정족은 마나의 축복을 받은 종족이다.

비록 녹탑주가 수명을 다해 죽으며 녹탑은 폐쇄됐지만.

일전에 퀸틴에서 흥미로운 방식으로 7서클 마법을 완성한 적이 있다.

드라이어드의 정령술이나 페어리의 축복도 감안하면, 소수지만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전력.

거기에 하이엘프, 르네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이들은 움직여선 안 된다.

-하지만, 세계수가 무방비해지게 둘 수는 없어.

세계수는 현재 홀로 서대륙을 지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전쟁이 벌어진다면 서대륙은 극도로 불안정해질 텐데, 세계수를 혼자 둘 수는 없었다.

서대륙 지탱에 힘을 쓸수록 현실에서 쓸 수 있는 힘도 적어질 테니.

호위할 인원이 필요했다.

‘응?’

그런데 르네와 요정족 장로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감탄하듯 입을 오므린 채, 살짝 커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뭐, 왜.

-생각보다 어머니를 생각해 주시는군.

-다시 봤어. 아주 나쁜 놈은 아니었군.

-아빠, 애처가야?

르네가 눈을 떴다.

눈동자는 에메랄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즉, 르네가 아니라 세계수가 강림한 상태였다.

세계수는 장난기 서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들아, 이 이를 아버지라 부르려무나.

-세, 세계수 님?

-너 미쳤냐?

-어머. 싫어?

-빨리 안 돌아가?

세계수는 쿡쿡 웃으며 강림을 풀었다.

르네의 눈동자가 원래 색으로 돌아오고, 다시 눈을 감았다.

고작 장난하려고 강림까지 하다니, 힘이 돌아오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좀 젊은 축에 속하는 엘프 장로, 마이에브가 주저하다가 나를 봤다.

-아버지?

-미친. 꺼져.

* * *

“정녕 팔베르크의 황제가 그리 전하라 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트리옌 왕국.

제프 트리옌 국왕은 차가운 눈으로 팔베르크 제국의 사절을 내려다보았다.

헨드릭 왕세자와 지그문트 마이어에게, 이미 팔베르크의 만행에 대해선 들은 바 있다.

왕가 전체에게 맹독과 같은 페러시트를 심어 넣은 것은 다름 아닌 팔베르크였다.

아마 지그문트가 아니었다면 헨드릭을 제외한 왕가 전원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사절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제프 트리옌을 올려다봤다.

“더불어, 황제 폐하께는 존칭을 사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프 트리옌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힘이 있다고 한들 이렇게까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한낱 사절이 국왕을 상대로 이토록 당당하게 굴다니.

아무리 소드 마스터 어트 한넬의 사망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지만.

“순 무뢰배나 다름없구나.”

레온하트 왕국과의 깊은 교류 끝에, 트리옌 왕국은 연합에 발을 들였다.

웨스트리아가 점령당하면 팔베르크 제국이 서대륙 정복 전쟁을 펼칠 것이다.

그 말은 반신반의하고 있었으나, 파서벌 레온하트의 설득이 너무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 지그문트 마이어에게는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기도 했다.

사절이 인상을 찡그렸다.

“델 로안 대공을 살해한 배후입니다. 그걸 알고도 웨스트리아를 감싸시겠다는 겁니까?”

“지금 짐을 추궁하는 겐가? 단단히 미쳐 돌아가는군. 자네, 혹시 목숨이 두 개인가?”

“저는 팔베르크 제국을 대신하여 이 자리에 온 몸이라는 것을 알아 두시길 바랍니다.”

“그럼 대답해 주지. 웨스트리아에서는 이미 증거에 대한 반박을 제시했다. 필시 팔베르크에게도 보냈을 터인데,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무시한 것이지.”

황탑주의 정확한 소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대신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이 웨스트리아 왕국을 찾았다.

그녀는 고대 마법, 터치 오브 트루스(Touch of Truth)를 사용해 왕가를 추궁했다.

델 로안 암살 사주를 한 적이 있느냐고.

발레리아 또한 델 로안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기에, 합당한 일이었다.

대답은 부정이었고, 발레리아는 그것이 진실이라 확인했다.

심지어 마탑주의 지위를 걸고 공문서까지 만들어 배포했다.

그러나 팔베르크에서 이 문서를 받아들이길 거부한 것이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당장 이자를 끌고 가거라.”

“이러고도 트리옌 왕국이 무사할 것 같습니까?”

“그 말, 그대로 돌려주마. 비록 짐이 아직 회복이 다 된 것이 아니나, 한 나라의 왕이니라. 무엄한 놈.”

이윽고 트리옌의 왕실 기사들이 달려와, 사절을 끌고 갔다.

사절은 큰 소리로 떵떵거렸지만, 아무래도 힘이 없다 보니 맥없이 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등에 업은 팔베르크 제국 말고는 아무런 힘도 없는, 그냥 귀족일 뿐이었다.

옆에 있던 헨드릭 왕세자가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괜찮으시겠습니까?”

“각오한 일이다. 알고 병력을 모은 것 아니더냐.”

“그 말씀은…….”

“개전(開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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