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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끈한 데이트
리에이트 교국의 내전이 끝났다.
앞으로 몇 달간은 전쟁이 지속될 거라는 예측이 많았는데, 허무하리만치 빠른 종전이었다.
단 한 명, 지그문트 마이어라는 인물의 개입으로 전쟁이 끝난 것이다.
리에이트의 일시적 강림으로, 대사제의 만행 또한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크리에 교구에 자리 잡은 성자군은 리에이트 교국을 빠르게 안정화시키기 시작했다.
지그문트는 말론에게 지원에 대한 확약을 받은 후, 레온하트로 귀환했다.
“흠? 늘 자네를 따르던 시종들은 어디로 갔나?”
직접 서풍을 찾은 레드라인 후작은 의아한 눈치였다.
단과 마리나, 심지어는 리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그문트는 눈을 깜빡였다.
“잠깐 훈련 좀 보냈습니다.”
“훈련?”
지그문트는 단과 마리나, 리옐을 각각 텔레포트로 이동시켜 뒀다.
단은 웨스트리아 왕국의 검 없는 소드 마스터, 엘트렛 커큰에게.
마리나는 마이어 영지, 망아의 숲으로 돌아간 마녀에게.
그리고 리옐은 엘비아에 있는 세계수에게 보낸 상태였다.
“곧 전쟁이 벌어질 테니까요.”
“대비인가.”
“그렇습니다.”
단과 마리나는 전쟁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일 정도로 특출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지그문트가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힘이었다.
짧은 시간 안에 효율적인 단련을 시키기 위해, 부탁을 해 놓은 상태였다.
단에게는 끔찍한 맛이 나는 각종 영약까지 쥐여 줬다.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네.”
“뭡니까?”
“벨수스 말일세. 혹시, 드래곤 아닌가?”
“맞습니다. 안목이 좋으시군요.”
레드라인 후작은 눈을 깜빡였다.
너무 시원하게 긍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정확히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유명한 이야기 아닌가. 팔베르크 제국의 황제와, 대마법사의 제자, 그리고 블랙 드래곤.”
“발레리아와 친분이 있다는 부분에서 유추하신 것 같군요. 예리하십니다.”
“하면, 현재 레온하트 왕국에는 블랙 드래곤이 있다고 봐도 좋은 건가?”
“아니요. 드래곤은 규율에 묶인 상태라, 명분이 없으면 참전할 수 없을 겁니다.”
블랙 드래곤은 크나큰 전력이었기에, 일말의 기대를 품은 레드라인 후작이었다.
그러나 지그문트의 부정으로 기대는 간단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거 아쉽군.”
“본인한테 물어보면 될 텐데요.”
“유희 중인 것 아닌가? 들키면 곤란할 텐데.”
“유희는 아닐 겁니다. 들키면 뭐, 발설 금지 계약 정도는 걸릴 수 있겠지만요.”
“근데 자네 뭐 하는 건가?”
“체스요.”
“혼자?”
지그문트는 기이하게도 혼자 체스를 두고 있었다.
상대는 없었는데, 말은 전부 움직여진 상태였다.
체스에 지식이 있는 레드라인 후작이 보기에도, 생각할 여지가 많은 대국이었다.
“아니요. 상대는 있습니다.”
“상대? 상대가 누구인가?”
“라그힐 팔베르크요.”
* * *
팔베르크 제국, 황성.
턱을 괴고 앉은 라그힐 팔베르크는 체스판 위의 비숍을 넘어트렸다.
상대 비숍이 자신 진영의 비숍을 잡아 버린 것이다.
애초에 버림 패였지만, 생각보다 더 빠르게 잡히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다.
“짜증 나는군.”
라그힐은 신경질적으로 체스판을 두드렸다.
옆에 가만히 서 있던 렘브란트 님푸스는 내심 놀랐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습관처럼 종종 혼자 체스를 두곤 했다.
그 수 싸움은 늘 놀라울 정도로 치열했는데, 라그힐은 눈 깜빡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렇게 감정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꼭 대공과 마주 앉은 기분이구나.”
라그힐 팔베르크는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대마법사, 델 로안 대공의 환영이 얼핏 보였다.
델 로안은 고민 없이 툭툭 수를 던지고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승부수에 가까웠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언제든지 패배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
“황제 폐하, 즐거워 보이십니다.”
“응?”
렘브란트의 말에, 라그힐은 제 얼굴을 더듬었다.
호를 그리며 올라간 입꼬리는 명백히 옅은 미소에 가까웠다.
언젠가를 기점으로, 라그힐은 거의 모든 일에 흥미를 잃었다.
비록 발레리아 로안의 경우처럼 관심을 쏟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것에 대해 느끼는 희로애락이 지극히 옅어졌다.
그런데.
“그런가. 즐거운 거였나.”
발레리아 로안을 이기게 된 뒤로, 델 로안 말고는 그와 머리로 겨룰 만한 인물이 없었다.
델 로안이 죽은 후로, 그 어떤 것에서도 이런 고양감은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린시스에게 페러시트에 관한 것이 걸려, 제국이 무너질 뻔했을 때조차도.
라그힐은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시선을 들었다.
맞은편에는 어느새 델 로안 대신, 가면을 쓴 금발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지그문트 마이어.’
체스판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그문트 마이어가 라그힐을 바라보았다.
라그힐은 장고 끝에, 체스 말을 잡았다.
체스 말 옮기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렘브란트 님푸스, 전하거라.”
“예.”
“마계에 전쟁을 선포하겠다.”
* * *
로안 아카데미 원장실.
발레리아는 서류에 얼굴을 파묻은 상태였다.
아카데미에 다니기 위해 네르갈로 올라왔던 학생들을 귀가 시키는 듯했다.
원장을 맡고 있는 만큼 발레리아는 그 학생들의 사정을 일일이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벨수스는?”
“린시스 님 호출로 불려 갔어요.”
“그래? 너 일 있냐?”
“이것만 처리하면 될 것 같아요.”
“그럼 나랑 어디 좀 다녀오자.”
분명 다 죽어 가던 발레리아가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였다.
눈은 분명 나를 보고 있는데, 손으로는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쟤도 이제 무의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영역에 다다른 것 같았다.
“데이트인가요?”
“장소는 썩 로맨틱하지 않다만. 여유 나면.”
“좋아요!”
말로는 데이트지만, 사실상 나들이에 가깝다.
팔베르크 제국에 있을 당시 발레리아는 종종 내게 데이트를 가자고 졸랐다.
아마 애가 말뜻을 잘못 이해한 듯싶었는데, 린시스가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정정했지만, 어쩐지 발레리아는 데이트라는 말을 고집해서 사용했다.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어디 가는데요?”
“베르제 대공 기억하냐? 너 어렸을 때 한 번 봤는데.”
“아, 베르제 아저씨요? 그야 기억하죠. 어렸을 때 저한테 파이어(Fire) 가르쳐 주셨는데.”
“그놈 좀 만나고 와야겠다. 사정 안 되면 대리인이라도.”
“설마, 마계에 가실 거예요?”
“그래.”
팔베르크 제국은 응원 세력으로 마계를 불렀다.
연합 소속의 전군을 합쳐도 병력으로는 밀리지 않는 팔베르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계에 손을 뻗었다는 것은 필시 이유가 있을 터.
알아볼 겸, 자꾸 마족이 기어 나오는 것에 대한 주의도 줄 생각이었다.
“아, 화이트웨일 항구 인근에서 여로도 회수했다고 하셨죠?”
“원래는 단 데려가서 지옥 훈련을 시키려 했는데 말이다.”
지옥 훈련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발레리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 그대로 지옥에서 하는 훈련으로, 발레리아는 이미 통과한 바 있다.
안 좋은 추억으로 남은 모양이었지만 덕분에 불에 대한 적응력이 상당 수준 높아졌다.
발레리아가 최연소로 탑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내 가르침과 전폭적인 지원도 있었지만, 발레리아의 천재성과 노력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설마, 그 기사분 소드 익스퍼트 중급 아니에요? 지금 거기 가면 죽을 텐데.”
“실질적인 실력은 상급이야. 아마 계기만 있으면 최상급까지 올릴 수 있을 거다.”
“그 정도면 가능하려나? 솔직히 그거 훈련이 아니잖아요. 생존이지.”
“생존 훈련이라고 하는 편이 맞긴 하지. 너는 안 시킬 테니까 걱정 마.”
“그거 하느니 용의 산맥에서 혹한기 훈련하는 편이 나아요.”
“그건 네가 생태계 파괴했다고 민원 들어와서, 이제 못 해.”
발레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옥 훈련이 목적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안심한 모양이었다.
7서클인 지금은 비교적 간단하게 통과할 수 있을 텐데, 꽤 트라우마였던 것 같다.
“정규 루트로 갈 거야.”
“문은요?”
“너 일하는 동안 내가 만들 거다.”
“저야 좋긴 한데, 따라가는 이유는요?”
“불의 서.”
“아하, 여로도 있으니 편하게 가겠네요. 좋아요.”
발레리아는 쉽게 수긍했다.
불의 서는 마도서, 즉 책이다.
불에 상극인 종이임에도 불구하고, 불을 먹는 특이한 성질이 있었다.
특히 불의 서가 극상으로 취급하는 게 지옥불이었다.
지옥불을 먹은 불의 서는 일시적으로 그 성능이 크게 올라간다.
전쟁을 대비한다는 목적도 있고, 다른 목적도 있었다.
“재료가 없어.”
“아, 문 열 재료요? 혹시 그거 요구하시려고 저 데려가는 거 아니죠?”
“설마, 사제 간의 즐거운 데이트지.”
“스승님이 이런 말씀을 할 분이 아니신데. 하여튼, 적탑에서 가져다 쓰세요.”
발레리아는 제 로브에 달려 있던 브로치를 떼어 내밀었다.
붉은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정교한 장식품이었는데, 린시스가 생일 선물로 줬던 것이다.
마음에 들었는지 로브 고정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적탑의 마법사라면 다 알아볼 거다.
“그거 보여 주면 알아서 내줄 거예요.”
“실험실에 문 만들어 두마. 일 마치고 바로 와.”
“네. 알겠어요.”
* * *
적탑, 실험실.
마족이나 마계에 관련된 의식을 치를 때는 피나 제물을 바쳐야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차원 이동의 영역이었고, 충분한 지식과 재료만 있다면 가능하다.
재료에 제법 귀한 것들, 이를 테면 고농축 마석 가루나 마기 결정 따위가 껴 있는 게 문제다.
발품 팔아서 구할 수는 있겠지만, 마계에 갈 생각을 안 했기에 따로 구해 놓질 않았다.
원래는 벨수스에게 요청하려 했는데, 적탑 내에 재고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마계도 오랜만이구먼.”
어두운 방에는 완성도 높은 마법진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저번에는 마계 언저리, 그러니까 틈에만 다녀온 바 있다.
애초에 다른 구역인 만큼, 그 차이는 변두리 시골과 수도 정도였다.
인간이 마계에 가는 건 매우 드문 일이지만, 베르제가 눈치껏 보호를 해 줄 거다.
애초에 여로에 위장 기능도 달려 있으니 큰 걱정은 없기도 했다.
“스승님?”
노크 소리.
발레리아가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오라 손짓하자 냉큼 발을 들인다.
“일은?”
“다 끝났어요. 며칠 가실 거예요?”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으니 최대한 빨리 돌아올 거다.”
“그럼 직통으로 가겠네요. 잡것들 들러붙을 텐데.”
“문제없어. 신성이 있으니까.”
“그게 오히려 문제가 될 것 같기도 한데요.”
발레리아는 마법진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마법진 안쪽으로 들어왔다.
여로가 나풀거리며 나와 발레리아의 몸을 감쌌다.
나는 필요 없지만, 괜히 힘 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자, 가자. 지옥으로.”
* * *
나와 발레리아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연을 걸었다.
심연은 마계와 지상의 경계선이었다.
반드시 통과할 필요가 있었는데, 원래와는 달리 오감이 제대로 있는 상태였다.
여로가 심연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심연 끝의 공간을 조정하신 거죠? 틈이 아니라, 바로 마계로 이동되도록.”
“그래. 8서클 정도였다면 단박에 이동했겠지만, 아직 조악한 7서클인지라.”
“저도 7서클인데요……?”
“조악한 7서클 녀석.”
“인간 중에 7서클 위로 올라간 마법사는 스승님밖에 없거든요?”
“네가 아홉 살 때 장래 희망이 대마법사였다. 이놈아, 꿈은 어따 팔아먹었냐?”
“언제 제가 안 올라간대요? 언젠간 따라잡을 거거든요?”
“어이구, 꿈도 크셔.”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며 심연을 걸었다.
리에이트 교국에서 있었던 일이나, 로안 아카데미의 설립 계기 같은 것들이었다.
통로가 심연의 길이를 대폭 단축시켰기에, 금방 끝자락에 다다를 수 있었다.
발레리아는 허리에 매달린 불의 서에 손을 올렸다.
긴장했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쫄긴 왜 쫄아?”
“저번에 갔을 때, 케르베로스가 다짜고짜 달려든 기억이 있어서요.”
“아, 삼돌이? 걔 귀엽잖아.”
“안 귀엽거든요? 무섭거든요? 저 그 이후로 개에 트라우마 생겼거든요?”
“괜찮아. 베르제의 거처로 이동하는 건 아니니까. 삼돌이가 마중도 안 나올 거야.”
심연 끝자락은 검고 짙은 안개가 낀 벽과 같았다.
저 벽을 넘어가면 바로 마계였다.
발레리아의 실력이면 마법을 통해 제 몸을 마기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 테니, 문제없다.
마기는 사람을 순식간에 중독사시키는 유독성 물질이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신성이었다.
-신성.
-부름?
-우리 저기 가도 안 들키는 거 맞냐?
-괜찮.
-어떻게 알아?
-직감!
당당하게도 말한다.
하지만 아주 근거 없는 말도 아닐 것이다.
내가 무슨 리에이트의 성자도 아니고.
마신과 크게 연관이 없는, 지상의 반신일 뿐이니까.
“가자.”
“네. 하압.”
여로 덕분에 숨을 참을 필요는 없는데.
발레리아는 잠수하듯 숨을 참았다.
이윽고 나와 발레리아는 심연의 끝을 통과했다.
그리고 마계의 정경이 드러났다.
“오, 마곈데.”
그야말로 마계다운 풍경이었다.
불타오르기라도 한 듯, 검은 풀로 뒤덮인 초원이었다.
조금 기괴하게도, 중하급으로 보이는 마족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뭐를 그리 구경하는지, 환호성을 지르며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이리 좀 와 보려무나.”
“네.”
“레서 폴리모프(Lesser Polymoph).”
발레리아의 양 머리 옆에서 산양과 같은 뿔이 생겨났다.
폴리모프는 일종의 종족 변경이었다.
발레리아가 마족으로 태어났다면, 저런 모습을 띄었다는 거다.
레서(Lesser), 즉 저위 마법이었기에 형상이 많이 바뀌진 않았지만 말이다.
발레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윽.”
“왜?”
“날개 났어요. 로브에 눌려서, 좀 불편하네요.”
“환상 마법으로 바꿔 주랴?”
“아니요. 들키면 대참사잖아요.”
발레리아는 늘 걸치고 있던 적탑의 로브를 벗어, 아공간에 수납했다.
과연 등에 검은색 날개가 자라난 모습이었다.
편의성을 위해 마법으로 크기를 줄인 뒤, 나한테도 같은 마법을 사용했다.
“스승님께서는…… 음.”
“왜?”
“마족 같으시네요.”
“그러냐? 동대륙인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내 경우에는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여로는 귀족급 마족이 흔히 입는 전투 정장처럼 몸을 감쌌다.
하얀 귀족용 장갑과 유사한 숨결과, 팔목으로 언뜻 요르문간드가 보였다.
머리에 뿔과 등의 날개까지 제대로 났으니, 영락없는 마족이긴 했다.
“가 보자.”
“스승님이시라면 무시하고 갈 길 가실 줄 알았는데요.”
“뭐 하는지 궁금하잖냐. 확인만 하고 오지, 뭐. 이제부터는 마계어 쓰고.”
나는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턱을 15도 정도 위로 들었다.
뒷짐까지 지고 깔보는 듯한 눈을 하니, 영락없이 콧대 높은 마족이었다.
-스승님은 마족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럼 내가 마족이랑 친구를 먹었겠냐? 마왕성 가 봐. 거의 이러고 다녀.
우리는 하급 마족이 우글우글 몰려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대뜸 앞을 막고 있는 놈을 걷어찼다.
-억!
-뭐야!
-비켜.
마계에 왔으니 마계의 법을 따라야 한다.
마계의 귀족들은 대체로 안하 무인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무엇보다 힘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었다.
준귀족도, 귀족도, 심지어는 마왕도 힘으로 결정되는 곳이 마계다.
다시 말해서 귀족은 권력을 등에 업은 깡패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헉, 씹. 귀족이 왜 여기 있어?
-야, 눈 마주치지 마. 목 날아간다.
격을 드러낸 것도 아닌데, 구경꾼들은 알아서 갈라졌다.
나는 오만한 걸음걸이로 맨 앞 열로 나섰고, 발레리아가 뒤를 따랐다.
쾅!
두 명의 마족이 서로에게 크로스 카운터펀치를 날리고 있었다.
무슨 망치로 벽을 내리친 듯한 소리가 나며, 두 마족의 고개가 반대로 꺾였다.
적어도 구경꾼들보단 상위 마족 같았는데, 그래 봐야 중급 좀 안 될 것 같았다.
-이봐.
-예? 저 말입니까요?
-그래. 지금 뭐 하는 거지?
-지배자 결정전입니다요.
-지배자 결정전? 이곳 주인은?
-몰렉요? 한참 전에 지상 갔다가 뒈졌습니다.
-몰렉?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었다.
시노드 교구에서 리에이트에게 눌려 죽은 마족의 이름 아닌가.
분명 몰렉이 스스로를 소개할 때, 어딘가의 지배자라고 하긴 했는데.
-여기가 절규하는 초원인가?
-그렇습니다. 남작령에 해당하는 곳이지요.
-남작령이라. 준귀족이면 나쁘지 않은 작위인데. 왜 어중이떠중이들이 싸우고 있는 거지?
몰렉만 해도 혼자서 도시 하나 정도는 간단하게 멸망시킬 수 있는 괴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투덕거리고 있는 놈들은 암만 봐도 단 선에서 정리될 만한 놈들이었다.
아무리 말세라지만 지배자 결정전에 어울리는 놈들은 아니었다.
-이번에 준귀족급 마족이 지옥에 소집된 탓일 겁니다. 예.
-준귀족들이 지옥에 불려 갔어? 왜?
-그야 모르지요.
-그럼 준귀족 되면 지옥에 편하게 갈 수 있겠네?
-그렇지요? 근데 나으리께서는 왜 안 가셨습니까요?
-질문을 해? 너 간 크다?
-닥치겠습니다요.
이윽고 결판이 났다.
녹색 피부의 마족이 붉은 피부의 마족에게 체인 라이트닝을 갈긴 것이 결정타였다.
육탄전인 줄 알았더니, 비장의 수랍시고 마법을 숨겨 둔 모양이었다.
-네가 자초한 운명이다!
-크아아아아악!
콜 라이트닝(Call Lightning)으로 마무리.
노릇노릇하게 익은 상대가 풀썩 쓰러졌다.
죽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승리한 마족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망치를 주워 들었다.
아마 무기를 들고 싸우다가, 육탄전으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내가! 절규하는 초원의 지배자다!
망치를 높이 쳐 든 마족이 선언했다.
드물게도 육탄전과 마법을 둘 다 사용할 수 있는 마족이었다.
-이의 있다.
-뭐? 웬 놈이냐?
-스승님?
마침 나도 둘 다 자신 있었다.
목을 뚜둑뚜둑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마족은 내 복장을 보고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네놈은 뭐냐.
-아직 도전할 기회 있지 않나?
-이미 선언이 끝났다. 도전은 나중에 적법한 절차를 걸쳐서…….
-뭔 개소리야? 지역 내에 도전자 없다고 확정된 다음에 한 선언이 유효한 거잖아.
-이놈이……!
녹색 마족은 내 전신을 살폈다.
신성을 받아들이며 체격이 꽤 좋아지긴 했다만.
울끈불끈한 마족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몸.
무기는 없고, 달리 강점도 없어 보인다.
-네놈, 혹시 드레서냐?
-모르지. 그럴 수도 있고.
드레서.
귀족처럼 꾸며 입고 허세를 부리는 마족을 일컫는 말이다.
내 힘은 신성에 의해 완벽하게 감춰진 상태였기에, 긴가민가한 눈치였다.
녹색 마족이 턱짓하자, 구경하던 마족이 쓰러진 마족을 치웠다.
-좋다. 자웅을 겨뤄 보자.
녹색 마족은 망치를 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 말고.
-……뭐?
-쟤가 싸울 거다.
-네? 저요?
내가 가리킨 방향에는, 얌전히 구경하던 발레리아가 있었다.
구경꾼들은 환호했고, 발레리아가 엉거주춤 앞으로 나왔다.
-난 무조건 누나 편이야!
-예쁜 언니 화이팅!
-나는 작위가 있는 몸이라, 초원은 얘가 먹을 거다.
-나를 물로 보는구나. 그렇게 여리여리한 것이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녹색 마족은 허리를 숙이고 발레리아를 유심히 살폈다.
얼굴을 보더니, 마음에 들었다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꽤나 반반하게 생겼구나. 내게 지면 내 첩이 되거라.
-오, 죽겠는데?
-뭐?
-아니다.
발레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별 의욕 없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그것도 나를 흘긋 보더니 냉큼 지워 버렸지만 말이다.
-좋다. 겨뤄 보자. 이 몸의 이름은 가랄! 절규하는 초원의 지배자가 될 몸이다!
-리아.
-리아라! 퍽 귀여운 이름이구나! 크하하하!
웃어 젖히는 것과 동시에, 돌연 표정을 바꾼 가랄이 망치를 휘둘렀다.
지배자 결정전은 서로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즉, 따로 칼을 던지거나 종석을 치는 등 시작 신호가 없다.
여기서 기습을 가해 승리하더라도, 승리한 것이었다.
부웅!
그러나 가랄의 망치는 허공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발레리아도 결정전의 룰을 알고 있었던 만큼, 블링크(Blink)를 외우고 있었다.
-뭣이! 내 멸망의 망치를 피해!
-아티팩트도, 하물며 마도구도 아닌 그냥 망친데 좀 이름이 거창하네.
-어디냐!
발레리아는 하늘에 있었다.
블링크와 동시에 플라이(Fly)로 몸을 띄운 것.
근접전을 펼치는 상대에게 아주 유효하면서 간단한 수였다.
-스승님, 이거 죽여요, 말아요?
-맘대로 해라.
-네.
-저년이!
발레리아가 허공을 움켜쥐었다.
꽤 감정이 실렸는지, 평소보다 더 크고 활활 타오르는 불의 창이 나타났다.
발레리아 로안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마법, 플레임 스피어(Flame Spear).
-어, 미친.
가랄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발레리아는 불의 창을 힘껏 던졌다.
플레임 스피어가 상대를 불사를 기세로 쇄도해 왔다.
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마족인지라, 다급히 마나 실드를 펼쳤다.
카앙!
물론 5서클에 해당하는 고유 마법을 마나 실드로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잠시 창의 속도를 늦추긴 했지만, 방어막은 산산이 조각나 흩어지고 말았다.
가랄도 애초에 막을 생각이 없었는지, 속도를 늦추고 옆으로 몸을 던졌다.
‘피한다. 괜찮은 생각이지만.’
하나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다면, 플레임 스피어에 자동 추적 기능이 달려 있다는 거였다.
공중에서 선회한 불의 창이 가랄을 꿰뚫었다.
-으허어어억! 끄아아아!
가랄은 약한 마족 중에 제일 센 놈이었다.
반면, 발레리아는 정말 준귀족급 마족과 겨뤄도 꿇리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지옥 훈련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마족을 학살하고 다녔으니까.
-도전자 있니?
발레리아는 차가운 눈으로 구경꾼들을 내려다보았다.
구도상 어쩔 수 없겠지만, 일부 마족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젠장! 뭐지? 이 가슴의 고동은?
-너 심장 없잖아.
-헉헉. 지배당하고 싶다!
-사랑해요! 밟아 주세요!
마계에서는 힘을 가진 자가 곧 선망의 대상이라지만, 아무리 봐도 조금 이상한 성향이 끼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절규하는 초원의 지배자가 결정됐다.
* * *
절규하는 초원의 중심부, 몰렉의 성.
발레리아는 심드렁한 눈으로 성 내부를 둘러보았다.
어둡고 음침한 건축 양식은 지상의 것과 큰 차이를 보였다.
그렇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그로테스크한 것은 아니었다.
심미안이 있다면 충분히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인테리어였다.
발레리아가 절규하는 초원의 지배자가 되면서, 이 성의 소유권도 양도 받았다.
하지만 목적은 이 지역을 지배하는 것도, 이 성도 아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절규하는 초원의 지배자시여.
홀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살덩어리.
얼핏 보면 슬라임의 한 종류 같기도 했지만, 액체가 아니었다.
샌딩과 비슷한 형식으로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이터(Gater)라는 이름의, 마계에 서식하는 몬스터였다.
일종의 사역마로, 강한 힘을 지닌 마족이라면 하나쯤 지니고 있는 전령이었다.
-지옥으로부터 준귀족급 마족의 소집 회의가 열렸습니다.
-날짜는?
-내일 정오입니다.
-지금 가겠다. 준비하도록.
발레리아의 말에, 게이터가 턱을 쩍쩍 돌려 가며 입을 풀었다.
그리고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동반 1인까지 동행 가능합니다. 연결된 공간은 지옥, 지옥 입구입니다.
게이터는 곧장 입을 쩍 벌리기 시작했다.
발목에도 채 못 미치던 살덩어리가 쭉 늘어났다.
입이 벌어지며, 저택의 정문과 흡사한 크기의 문이 나타났다.
본체인 살덩어리는 문의 외곽 벽 역할을 했다.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겠어.
-하긴, 고생고생하면서 가는 것보단 이게 편하겠죠.
-지옥 내부로는 텔레포트가 불가능하니까. 어쩔 수 없지.
-제가 외곽에 안 가 본 건 스승님께서 내부로 곧장 보내신 탓이거든요?
-그래. 내 잘못이다. 들어가자꾸나.
입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영 께름칙했지만, 게이터의 입은 내장 기관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게이터의 입 너머는 한 쌍이 되는 다른 게이터의 입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마 이 게이터와 쌍을 이루는 게이터는 지옥 입구에서 대기 중일 것이다.
-반대쪽에서도 문을 열었습니다. 들어가시지요.
게이터의 입 속 문이 열렸다.
나와 발레리아는 별로 주저하지 않고 문을 통과했다.
발레리아는 이미 지옥 훈련 당시 게이터를 통과한 경험이 있었다.
-우와, 지옥이다.
-처음 온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내부는 어느 정도 알지만요. 밖에서 본 건 처음이거든요.
지옥은 마계의 수도 격으로, 마계에서 가장 깊은 장소였다.
용암 바다에 뻥 뚫린 구멍 아래 형성된 지역으로, 그 크기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우리는 그 외곽에서 나왔는데, 게이터는 우리가 확실히 빠져나오자마자 입을 닫았다.
-내일 전령이 찾아올 겁니다. 그 전까지는 지옥 내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셔도 됩니다.
-그래. 수고했다.
나는 아공간에서 만드라고라를 꺼냈다.
밖으로 튀어나온 만드라고라에서 괴성이 들리기 전에, 대뜸 게이터에게 던져 넣었다.
여담으로 게이터가 가장 사랑하는 간식이 바로 만드라고라다.
게이터는 언제 입을 닫았냐는 듯 쩍 입을 벌렸다.
텁.
이번에는 문 대신 제대로 입 속이 보였다.
간식을 우물거리던 게이터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마 반대쪽의 게이터도 포만감을 느낄 거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모시겠습니다.
-오냐. 쓸 만한 이야기는 없냐?
-심연의 틈으로 유배됐던 마누엘 남작이 지옥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거 남작이었냐? 그래, 다음에 보자.
게이터는 눈을 감아 인사를 하고, 꾸물꾸물 물러났다.
나와 발레리아는 잠시 지옥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용암 폭포 아래에 국가 크기의 도시가 있었다.
층과 같이 중간중간에도 거주 구역으로 보이는 곳이 있었다.
날개가 있는 마족이 종종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너 날개 났지? 날 수 있냐?
-날개 있는데 플라이(Fly) 쓰면 이상하게 볼까요?
-아마도. 찾아가기도 귀찮으니까, 그냥 배 타자.
지옥에는 퀸틴과 비슷하게 수로가 이곳저곳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물 대신 용암이 끓고 있다는 것은 조금 다른 점이었지만 말이다.
끝없이 흐르는 질척한 용암을 따라, 작은 나무 배 한 척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배 위에 있는 것은 상위 언데드 리퍼(Reaper)와 비슷하게 생긴, 뱃사공 카론이었다.
-두 분이십니까?
-베르제 대공의 저택에 가고자 하는데.
-타시지요.
나와 발레리아는 배에 올라탔다.
배가 기울어질 듯 흔들렸지만, 카론은 능숙하게 노를 이용해 중심을 맞췄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카론은 유유자적 노를 젓기 시작했다.
용암 위인 만큼 열기가 상당했는데, 발레리아는 마법으로 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내 경우는 전 원소 저항(Resist All Element)을 미리 발동시켜 둔 상태였다.
카론이 염려됐는지, 발레리아가 개인 공간(Private Space)을 사용했다.
“여전히 경계는 허술하네요.”
“누가 지상에서 마계로 침입할 거라고 생각하겠어. 반대면 몰라도.”
“하긴, 그건 그렇죠.”
“아무튼, 네가 갈 곳을 알려 주마.”
“네? 저도 같이 베르제 아저씨네 가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 너는 따로 할 일이 있어.”
“데이트라며! 스승님이 날 속였어!”
“시끄럽고, 연옥 좀 다녀와라.”
“연옥요?”
* * *
지옥 깊은 곳, 베르제 대공의 저택.
저택이라기보다는 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크기의 건물이었다.
유구한 시간 동안 대공의 자리를 지켰던 베르제답게, 건물에서도 위엄이 느껴졌다.
굳게 닫힌 정문에는 웬일인지 저택의 집사장이 정자세로 서 있었다.
전생에 본 적 있는 얼굴이었는데, 하반신은 염소의 그것과 같았다.
-이보게, 베르제 대공 있는가?
-처음 뵙는 분이시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지식을 나누는 벗.
베르제가 내게 따로 알려 준 일종의 암호였다.
경계하듯 딱딱하던 집사장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
-이젠 아니지만, 오랜만이야. 그래서 베르제는?
-출타 중이십니다.
-이 시국에? 뭔 생각이람. 어디 간다고 말은 없었고?
-없으셨습니다. 마누엘 님께서도 저택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누엘?
-알고 계신가 보군요. 곧 정기 통신이 있을 겁니다. 같이하시겠습니까?
-그러지.
나는 집사장을 따라 저택 부지로 들어섰다.
정원 크기도 더럽게 넓었는데, 일반적인 식물은 없었다.
지옥이라면 지옥다웠는데, 자이언트 네펜데스 따위도 버젓이 있었다.
정원사가 잡아먹히고 있었는데, 집사장은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건너 건너 돌아가셨다 들었습니다.
-죽음이랑 좀 노닥거리긴 했지.
-베르제 대공께서도 부인하셨지요. 그 독종이 죽었겠냐며.
-나를 잘 아는 건지, 그냥 욕하는 건지 모르겠군.
-글쎄요. 껄껄.
-삼돌이는 어디 갔냐?
-지금 하인들이 산책시키는 중입니다.
-하인들을 먹이로 준 게 아니고?
집사장과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택에 도착했다.
실내로 들어가고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마침내 내가 자주 베르제와 마주했던 응접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선객이 있었는데, 집사장이 미리 말했던 마누엘이었다.
-불완전한 신? 당신이 어떻게 마계에.
-친구 좀 보러 왔는데, 없다길래.
-허, 경비대 눈은 어찌 피하셨습니까?
-첫 번째 틈이랑 마계 사이에 있는 놈들? 나 직통으로 왔는데.
-리에이트 교국으로 가셨다 들었습니다만.
-거기 일이야 처리하고 왔지. 그걸 어떻게 아냐?
-얼핏 들었습니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군요.
집사장은 차를 권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집사장이 물러나자, 응접실에는 나와 마누엘만 남았다.
-왜 그리 안절부절못해? 똥 마려운 강아지도 아니고.
-인간 시절에 신 옆에 있어 보셨습니까? 긴장이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래? 신들이 뭐 별거라고. 편하게 있어.
응접실에는 유독 거대한 검은색 수정구가 하나 있었다.
마계용 장거리 통신구였는데, 베르제가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통신구가 깜빡이자, 마누엘은 내 눈치를 보며 통신을 연결했다.
키잉.
짧은 빛이 점멸했다.
마나가 불안정할 때 나오는 증상인데.
이윽고 베르제 대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놈은 그대로군.’
조금 오래된 형식의 정장 차림의 늙은 귀족이었다.
머리의 뿔과, 등의 날개만 아니었다면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인간과 유사한 모습이었다.
폴리모프한 모습이었는데, 베르제 대공은 인간의 형상과 가까운 마족의 모습을 선호했다.
정장에 살짝 찢어진 부분이 있는 걸 보면 전투라도 치른 모양이었다.
그저 점잖은 노귀족 같아 보이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의외의 손님이 있구나.
마왕의 오른팔, 본신을 드러낸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하게 강한 괴물.
전생의 나와 견줄 정도로 마법적 지식에 해박한, 마계의 유일한 대마법사.
베르제 대공이 바로 그라는 것을.
-오랜만이구나. 베르제.
-신수가 훤하구나. 델.
-젊은 게 좋긴 하더군. 오래 사는 자네는 모를 일이야.
-하긴. 자네는 고작 몇백 년 살고 죽는 인간이었으니까.
-몇백 년도 오래 산 거거든? 보통 백 년도 못 살거든?
오랜만에 본 탓인지, 베르제는 퍽 기쁜 듯 보였다.
옆에 있던 마누엘은 가만히 눈치를 봤다.
나는 마누엘을 툭툭 쳤다.
-그리고 이놈 보내서 한 제안, 제정신이냐?
-당연히 마누엘을 시험한 것이지. 해서, 어떤가?
-뭐를?
-본론부터 꺼내길 좋아하는 자네잖나. 본론부터 꺼내려고.
-얼씨구. 뭔데?
베르제는 내가 찾아올 걸 알았다는 듯, 간단명료하고 충격적인 제안을 던졌다.
-내 휘하의 군대를 자네가 만든 연합에 끼워 주지 않겠느냔 말이야.
-미쳤냐?
-단칼에 거절하다니. 의외인걸.
-의외고 자시고, 대외적으로 너와 손잡으면 명분 부분에서 너무 손해를 보잖아.
-당연히, 공식적인 연합군 내에 들어가진 않을 거다. 뜻을 같이하자는 거지.
-내 뜻이 뭔 줄 알고?
-팔베르크 제국. 막는 것이 벅찰 텐데.
베르제는 정확히 맥을 짚었다.
트리옌에서, 그리고 리에이트 교국에서 불사의 병사가 여러 번 목격됐다.
아마 팔베르크 제국에서는 양성까지 마쳤을 확률이 높았다.
일반 군대의 규모도 상당한 수준인데, 거기에 죽지 않는 군대까지 갖췄다.
더하여 마계의 손까지 빌렸으니, 그 전력은 서대륙을 쓸어 버리고도 남는 수준.
-지상의 병력은 어떻게 하지 못하지만, 마계의 군세들이 올라가는 건 막을 수 있거든.
-내전을 벌이겠다고?
-마계에서는 내전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는 거 알잖나. 나만 해도 수천 번은 겪었어.
-자네에게 돌아오는 득이 없을 텐데.
-아니. 있지. 제국과 손잡은 것이 내 적이니.
-그렇다고 나와 손잡을 이유가 없잖아. 혼자 패면 되는데. 정에 휩쓸린 판단은 아닐 거고.
-있다네. 내가 정 생각해서 이럴 마족으로 보이는가?
-그건 아니지만, 그럼 원하는 게 뭔데?
베르제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지상에 강림하고자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