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가문의 대마법사 14권
글쓰냐 퓨전 판타지 장편소설
목차
하루 (2)
화끈한 데이트
개전
제국의 위상
복수귀
검귀
죽지 않는 소드 마스터
인간의 한계
불과 얼음 (1)
1
하루 (2)
“에잉, 늙은이 불러와서 한다는 게 이거였나?”
“마리나는 아직 너 정도 능력 없잖아.”
“크게 될 거야. 피가 섞였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강해진 것 같거든.”
“그 얘긴 나중에 하고, 시간 아까우니까 빨리 끝내자.”
“그러지. 오랜만에 전장에 서니 골이 시려서, 원.”
마녀는 허리를 두드리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일족을 몰살시킨 마녀 사냥꾼을 하나하나 찾아내 역으로 사냥한 것이 마지막 마녀다.
팔베르크 제국이 위험인물로 분류하고 제거하려 한 이유가 있었다.
비록 시노드 교구에서는 부상을 입고 쫓기는 신세였기에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마이어 영지로 들어오며 꽤 휴식을 취했고, 지금은 컨디션을 회복한 상태였다.
“생각보다 잘 걷네.”
“자네 손녀 덕분이지. 끌끌.”
리옐의 치료로, 다시 걸을 수 없게 된 줄 알았던 다리도 회복한 상태였다.
마리나의 할머니라는 이유로, 리옐이 성심성의껏 치료해 준 모양이었다.
메두사의 저주를 응용, 상처 부위를 일시적으로 경화(硬化)시키기까지 해 멀쩡해 보였다.
아직 지팡이를 짚고 있는 걸 보면 재활이 필요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걷는 것 정도는 자력으로 가능한 모양이었다.
“지그문트 님, 정말 괜찮겠지요?”
“괜찮다니까. 못 믿겠으면 말고.”
“자칫 크리에 교구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칠까 싶어서.”
하긴, 말론은 걱정될 만도 했다.
성배를 쥔 채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보기 그랬는지, 마녀가 첨언했다.
“아가야, 이 할미가 현역은 아니다만, 그 정도는 조절할 수 있단다.”
“믿겠습니다. 마녀님.”
말론은 이미 마녀를 신뢰할 만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개인적으로 시간을 들여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리에이트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 결과 마녀는 사이한 힘을 사용하지만, 악한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요안을 구한 것으로 어떻게든 신뢰를 얻기도 했으니 다행이었다.
“너희 둘은 준비되었느냐?”
“언제든지.”
“후우, 저도 됐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자꾸나.”
곧 주둔하고 있던 대신전 측 군대가 앞으로 나섰다.
동시에, 나는 텔레포트를 사용했다.
* * *
원래 리에이트 교국의 내전은 성립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유인즉슨, 성기사와 사제의 힘이 신성력을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리에이트가 한쪽에 대의가 있다고 판단하면, 다른 쪽의 신성력을 거두어 갈 터.
필연적으로 신성력 없는 성기사와 사제들이 있는 쪽이 패배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신전 측은 신성력을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성배를 부패하게 만든 대사제조차 그랬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최초의 제단.’
리에이트는 제물을 받지 않는다.
불사의 괴물, 이그룬타처럼 힘이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물이나 신자들의 지지가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여 제물을 바칠 때도 거의 형식상인 경우가 많았다.
음식을 바치고, 그 음식은 추후에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는 형식이었다.
‘성유물이 된 것이 문제지만.’
제단은 리에이트가 직접 내린 성배 다음으로 강한 힘을 지닌 성유물이었다.
최초의 사제, 그러니까 교국이 설립되었을 때부터 사용하던 물건이다.
유구한 역사와 같은, 막대한 양의 신성력이 저장되어 있는 일종의 저장고.
대사제는 이것을 사용하여 자신의 아래에 있는 신도들에게 신성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대신전 신자들의 신성력은 엄밀히 말하면, 대사제가 내린 리에이트의 신성력.’
리에이트가 직접 내린 것이 아니기에, 회수하려면 상당히 큰 개입을 요구했다.
못 할 건 없지만, 추후에 일어날 일을 대비해 개입은 자제하고 있다고 한다.
즉, 제단이 대신전 측에 있을 때 리에이트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었다.
“그래서 훔치러 온 거고.”
나는 대신전을 올려다봤다.
텔레포트는 한 번 갔던 장소거나, 시야 내의 장소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지 않아도, 텔레포트 할 수 있을 때가 있다.
“오셨군요. 주군.”
“그래.”
바로 매개체가 있는 경우였다.
발레리아가 불사의 괴물을 봉인할 때 내가 매개가 되었던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롭은 특수한 마법진을 몸에 이식 받았다.
하여, 나는 롭이 있는 곳으로 텔레포트 할 수 있었다.
“음? 누구십니까? 용무가 없다면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과연 대신전이라 그런지, 성기사들이 문지기처럼 앞을 지키고 있었다.
전시라 출입이 금지되어 있겠지만, 귀족처럼 보이니 정중하게 대하는 모습이었다.
리에이트 교국에는 달리 귀족이라 부를 만한 인물이 없지만.
대사제가 권력을 잡으며 그와 비슷한 기득권층이 생겼으니, 눈치를 보는 모양이다.
“용무 있는데.”
“제가 전달하겠습니다. 성함과 용무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단 훔치러 왔다.”
“응? 뭐라고요?”
롭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순식간에 튀어 나간 롭이 왼쪽에 있는 성기사의 어깨를 짚고 뒤로 넘어갔다.
나는 오른쪽에 있는 놈을 점혈해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롭은 뒤에서 조르기를 걸어, 성기사를 기절시켰다.
“클래식하군.”
“그세 실력이 느셨군요.”
“육체 쪽도 꽤 셀걸?”
“역시 제 주군이십니다.”
“알아.”
“호위를 맡겠습니다. 자잘한 건 신경 쓰지 마시지요.”
나는 대신전 내부로 들어섰다.
전생에 방문했던 것과 상당히 달랐는데, 일단 규모부터 왕성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컸다.
공예품이나 미술품을 비롯한 화려한 사치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종까지 보였다.
아마 견습 사제들을 제 종처럼 부리는 모양이었는데, 리에이트가 복창 터질 만도 했다.
“처음 뵙는 분이군요. 현재 대신전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대사제 조지고 제단 가지러 왔다니까.”
손을 움켜쥐었다.
무력화(Neutrailze).
시야 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동작을 멈췄다.
어정쩡하게 움직이던 사람이 넘어질 뻔했지만, 롭이 눈치 좋게 받아 줬다.
무력화는 최근 심심해서 만들어 본 고유 마법이었다.
홀드(Hold)와 바인드(Bind)를 섞은 자동 점혈이라고 보면 된다.
“내, 내 몸이!”
“쉿.”
점혈과 같은 원리지만 오러가 아닌 마나를 써서 다른 건지, 목소리를 못 막았다.
물론 이에 대한 대비책도 준비되어 있었다.
손뼉을 쳤다.
무향실(Anechoic Room).
일대의 소리가 지워지며 돌연 정적이 내려앉았다.
롭과 신호를 주고받았다.
-위치는?
-저쪽입니다.
-15분 내로 처리한다. 가자.
* * *
크리에 교구 정면에서는 묘한 대치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노인, 마녀는 지팡이를 짚은 채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고, 성자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대신전 측도 선두에 선 칠흑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돌연 상황이 바뀌었다.
“흐억!”
“블랙 드래곤!”
전장에 블랙 드래곤, 벨수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검을 똑바로 쥔 칠흑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대사제의 말이 맞다면, 저것은 어디까지나 위협용.
드래곤 피어(Dragon Fear)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칠흑은 침착하게 성기사들과 사제들의 동요를 막았다.
“물러서지 마라! 저 드래곤은 크리에 교구를 공격했을 때도 사상자를 내지 않았다!”
산맥의 규율에 대해 얼핏 들었기에 침착할 수 있었다.
애초에 상정하고 있던 상황이다.
사제들이 뒤늦게 기도를 외웠다.
따뜻한 신성력이 군대를 감싸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제야 블랙 드래곤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벨수스에게는 적의가 일절 없었다.
화악!
거대한 날개가 펼쳐지고, 벨수스가 하늘을 날아올랐다.
몇몇 겁 많은 병사들이 주춤 물러섰지만, 대부분 드래곤을 주시할 뿐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칠흑을 믿고 있었다.
나선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기에, 그에 대한 신뢰는 대단했다.
“선공만 가하지 않으면, 이쪽을 공격할 구실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벨수스는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갈 뿐이었다.
병사들이 안심하기도 잠시.
벨수스가 향하는 방향을 본 칠흑은 당황했다.
“교구?”
벨수스는 곧장 크리에 교구로 향했다.
하지만, 저번에도 깃발만 날려 버렸을 정도로 간단한 의사 표현을 보였다.
도시에 대한 공격은 살상 행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 여파에 민간인이 말려들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성자가 그런 과격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어, 어.”
“칠흑 님, 저거?”
크리에 교구 상공에 도달한 벨수스 블랙이 숨을 토해 냈다.
매캐한 유황 냄새와 함께, 화기가 폭발했다.
드래곤 브레스(Dragon Breath).
이번에는 빗겨 맞춘 것이 아니라, 아주 정통으로 날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멀리서도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건물이 무너진 여파인지 지면이 흔들렸다.
기겁한 병사들이 칠흑 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바보 같은 일을!”
설마 했던 무력 돌파.
기겁한 칠흑이 군대의 방향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벨수스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또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어느새 거무죽죽하게 물들어 있는 땅이 발을 잡은 것이다.
“내 발, 발이!”
“으윽! 사제!”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칠흑은 전장 멀리 있는 노파를 쳐다보았다.
거무죽죽한 땅은 노파의 지팡이 끝에서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어떻게 성자 측에 저주를 사용하는 인물이 있는지 의문이었다.
“당황하지 마라. 사제는 땅에 축복을.”
“축복요? 알겠습니다.”
칠흑의 대처는 지극히 냉정했다.
마녀도 꽤 인상적이었는지, 끌끌 웃을 정도였다.
다행히 성자와 그 군대는 움직이는 기색이 없었기에, 간단하게 축복을 내릴 수 있었다.
“병력을 반으로 나눈다. 후방 부대는 크리에 교구로, 나머지는 가짜 성자군을 막는다.”
“하지만, 병력을 분산하는 건…….”
“본대에는 내가 남겠다. 어서.”
만약 드래곤 때문에 크리에 교구로 몰려간다면, 성자군 측이 성문 앞으로 전진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윽고 대신전 측 군대 절반이 크리에 교구로 회군했다.
일사불란하게 군대가 나뉘는 와중에도 대치 상태를 이어 나갔지만.
칠흑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움직이지 않는다?’
성자 측은 일절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드래곤도 보지 않고, 그저 가만히 칠흑의 군대를 볼 뿐이었다.
‘한 명 정도는, 시선이 쏠릴 법한데.’
드래곤의 움직임에 동요하거나, 그 모습을 잠깐이라도 보는 인물은 없었다.
당황한 칠흑은 제 몸에 손을 얹고, 기도문을 외웠다.
그러자, 귀를 울리던 굉음이 뚝 멎었다.
“속았다! 모두, 해주해라!”
“예?”
“투영의 저주다! 어서!”
그제야 스스로 저주를 해주한 사제들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드래곤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분명 존재는 했지만, 언제부턴가 저주가 보여 준 환영이었다.
이 정도로 정교한 저주를 할 수 있는 건.
“마지막 마녀!”
저 노파가 그저 평범한 저주술사나 네크로맨서가 아닌, 마녀라는 것을 뜻했다.
군대 단위로 환상을 보여 줘서인지 비교적 간단하게 해주 됐긴 했지만 말이다.
‘드래곤으로 시선을 끌고, 동시에 두 가지 저주를 걸었다.’
다른 저주로 발을 묶어, 지면에 신성력을 소모하도록 했다.
결코 성자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영악한 술수였다.
마녀는 칠흑을 보며 끌끌 웃었다.
“아, 맞다. 저것들이 눈치채면, 지그문트가 뭐라 말하라 했는데.”
“그거 혹시…… 아닙니까?”
“맞아, 그랬지. 끌끌끌!”
마녀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아마 저주의 영향인 것 같았다.
마녀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힝, 속았지?”
* * *
대사제 에녹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안위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가장 믿음직한 수하인 칠흑을 전장으로 보냈을 때는 더욱 그랬다.
대신전은 백에 이르는 성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전장에 나간 성기사들과 비슷한 수였다.
거기에 더하여 성자군이 크리에 교구에 도착한 뒤로는 지하 예배당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는 칠흑 휘하의 집행자들을 처리한 롭에 의해 경각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기는 안전하겠지?”
“성기사가 다섯 씩 조를 나눠 순찰하고 있습니다. 쥐새끼 한 마리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그래. 이 제단이 얼마나 중요한 성유물인지 알 거라 믿는다.”
“예, 성하. 성하께서도 제단을 보호하기 위해 친히 이곳에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해. 이제 나가 봐. 문 잘 지키고.”
성기사는 왕을 대하듯 뒷걸음질로 예배실을 나갔다.
개조된 지하 예배당은 일종의 방공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대신전에서 예배당으로 통하는 문은 하나뿐이었다.
그 문마저 숨겨져 있기에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문을 찾아 들어오더라도 성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스물은 대신전 바깥을, 스물은 대신전 내부를.
무려 나머지 육십의 성기사들이 예배당을 지키고 있었다.
‘지그문트 마이언지 뭔지도, 여긴 못 들어올 거다.’
크리에 교구에 숨어들어, 대신전에 잠입해, 백에 달하는 성기사의 눈을 피해 이곳까지 온다.
소드 마스터를 암살했다는 전설적인 암살자도 불가능할 법한 일이었다.
정면 돌파를 하자면 군세를 데려와야 했는데, 성자군은 대신전 측에 비해 너무 적었다.
즉, 실질적으로 이곳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했다.
‘돈을 얼마나 들였는데!’
내전임에도 불구하고, 대사제는 용병까지 고용해서 대신전에 배치했다.
부정부패로 모은 돈으로 고용한 그들은 방패막이처럼 쓸 요량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준비한 것이라, 쓸 일이 없었으면 했다.
애초에 예의 고블린은 칠흑이 쫓아냈으니 큰 걱정이 없으리라.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들어오려 한단 말인가.
대사제는 인상을 찡그렸다.
무시할 수는 없는 게, 혹시 전장의 상황이 변했을 수도 있었다.
“들어오너라.”
“오냐.”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난생 처음으로 보는 금발의 청년.
하지만 대사제는 그의 인상착의를 보자마자 정체를 알아차렸다.
“지그문트 마이어?”
“그래. 나다.”
“네, 네놈이 이곳에 어찌 들어왔단 말이냐!”
“걸어서 들어왔는데.”
“웃기지 마라!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침입자다!”
“말을 못 알아듣네.”
대사제는 그제야 지그문트의 뒤를 볼 수 있었다.
이쪽으로 손을 뻗은 채, 돌처럼 굳은 성기사가 있었다.
설마 모든 병력을 정면 돌파로 뚫어 냈단 말인가.
지그문트는 목을 뚝뚝 꺾었다.
“그게 제단이냐?”
“……내가 이대로 죽을 성싶으냐!”
대사제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예배당 양쪽 벽이 허물어지며 무언가 튀어나왔다.
온몸을 갑옷으로 무장한, 덩치 큰 기사였다.
칠흑의 성기사와 완전히 똑같은 모양새.
“흐하하하! 이건 예상 못 했을 거다!”
“이게 뭔데?”
지그문트는 멀거니 병사를 바라보았다.
역시 병사의 정체를 모르는 듯했다.
대사제는 제단 뒤에 숨으며 명령을 내렸다.
“칠흑, 저자를 죽여라!”
“칠흑? 그건 전장에 있을 텐데.”
지그문트는 허공에서 이름 없는 검을 뽑았다.
제단 뒤에 숨은 대사제는 승리를 확신한 상태였다.
칠흑은 팔베르크 제국에서 성유물을 대가로 제공한 지원 병력이었다.
그 힘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으로, 리에이트 교국에서는 당할 자가 없었다.
서걱!
그리고 칠흑의 목이 잘렸다.
칠흑의 등 뒤에는 어느새 지그문트 마이어가 서 있었다.
푸른 숨을 내뱉은 지그문트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쿵!
칠흑의 몸이 무너졌다.
당황한 대사제는 멀거니 지그문트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저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도 아니라, 그 이상.
소드 마스터란 말인가.
“나, 나는 리에이트 교국의 대사제다! 성신님의 천벌이 두렵지도 않느냐!”
“그 성신이 시켜서 너 족치러 온 거다. 이놈아.”
“뭣이! 네놈이 감히 리에이트 님을 능멸해!”
“안 믿어도 돼.”
그때, 뒤에 있던 칠흑이 몸을 일으켰다.
그 정체는 페러시트와 아그나가 융합되어 만들어진 불사의 병사.
하여 칠흑은 죽지 않았고, 목이 없는 채로도 움직일 수 있었다.
다행히 지그문트는 눈치챈 기색이 아니었다.
대사제가 시간을 버는 동안, 칠흑이 검을 휘둘렀다.
캉!
돌연 아래에서 나타난 롭에 의해, 회심의 일격이 막혔다.
지그문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움켜쥐었다.
칠흑의 주위로 관의 모양을 한 마나의 선이 그려졌다.
이윽고, 물이 그 마나의 선에 가득 채워졌다.
치이이이익!
불사의 병사는 어쨌든 물에 상성인 불사자를 근간에 두고 있다.
하여 이런 식으로 물에 담가 버리면 무력화될 수밖에 없었다.
일일이 불사자를 분해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만들어 낸 고유 마법.
수장(Water Burial).
“어, 어떻게 알았지?”
“네 시선, 그림자, 기척, 소리. 너, 실전 경험은 전혀 없구나?”
“뭐라고?”
“자, 천벌 받을 시간이다.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리에이트를 직접 볼 기회를 주마.”
“무슨 소리를…….”
“신에게 쪼인트 까이겠군. 축하한다. 추방(Deport).”
* * *
“마녀님.”
“그놈이 일을 마쳤나 보구나. 이리도 시간이 걸리다니. 확실히 전성기는 아닌 모양이야.”
말론이 들고 있던 성배가 제 색을 되찾았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말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성배를 사용하더라도 무용지물이었다.
리에이트의 힘을 사용할 만한 악(惡)이 없는 것이 이유였다.
성배는 리에이트가 지상에 개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나 그 개입에는 명분이 필요했다.
“내가 나설 때로구나.”
그리고 그 명분을 만드는 것이, 마녀의 역할이었다.
지팡이에 손을 얹은 마녀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같은 편인 성자군이 무심코 주춤 뒷걸음질 칠 정도였다.
주위를 집어 삼킬 듯한 짙디짙은 원념이 마녀의 주위에 들어찼다.
말론은 불안한 눈으로 마녀를 바라보았다.
“걱정 말거라. 죽지는 않으니.”
뭉킁뭉클 피어오르던 원념들이, 폭발하듯 어두운 하늘로 치솟았다.
시노드 교구에서 마녀가 보였던 저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족히 수천은 될 법한 원념들이 공중을 떠돌기 시작했다.
사이한 광경에 성자군은 긴장했다.
“저주 받은 땅(Cursed Land).”
투영과 속박의 저주 외에도, 마녀의 노림수는 하나 더 있었다.
일대를 장악해, 원념들이 활동하기 적합한 조건으로 바꾼 것이다.
그와 동시에 허공을 선회하던 원념들이 칠흑과 그 군세를 덮쳤다.
마치 허공에서 검은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고음과 함께, 원념들이 성기사와 병사의 몸을 관통했다.
일반 병사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성기사와 사제들은 기도문을 외웠다.
신성력으로 막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몸속에서 느껴지는 건 충만한 따뜻함 대신 공허함이었다.
“어?”
지그문트 마이어가 제단을 무력화시킴에 따라, 부여됐던 신성력이 사라진 것이다.
리에이트는 이미 신성력을 거둬 갔기에, 성기사와 사제는 지금 일반인과 다르지 않았다.
원념이 허망한 얼굴의 성기사와 사제들을 관통했다.
“성자님!”
“기다리십시오.”
마녀가 그들에게 걸고 있는 것은 명백한 저주였다.
마리나가 일전에 사용한 적 있는, 외톨이의 저주.
오감을 지워 버려 상대를 영구히 무력화시키는 끔찍한 저주였다.
“아, 아아…….”
이윽고 대신전 측 군세를 모두 관통한 원념이, 마녀에게 되돌아왔다.
수천에 달하는 원념이 한곳으로 집결하는 것은 매우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다.
새삼스럽게 마지막 마녀의 힘을 체감한 이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이고, 삭신이야. 그놈한테는 빚이 있으니 뭐라 하지도 못하고……. 말론.”
“예. 마녀님.”
“내 할 일은 마쳤다. 이제 네 차례니라.”
“제 차례라는 말은 어폐가 있는 듯합니다.”
무릎을 꿇고 앉은 말론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앞에는 대사제의 추방으로 되돌아온 성배가 있었다.
“리에이트 님, 부디 무지한 자들을 구원하소서.”
다시 한번, 하늘이 열렸다.
* * *
팔베르크 제국, 황성, 응접실.
라그힐 팔베르크는 짜증스러운 표정의 린시스 화이트를 앞에 두고 있었다.
린시스는 그토록 좋아하는 술도 입에 대지 않은 채 라그힐을 주시했다.
“하여, 결국 못 찾으신 모양이군요.”
“용의주도하구나. 설마 관련된 이들을 전부 살인 멸구할 줄은 몰랐는데.”
“억울하게 돌아가신 대공이 저주라도 내리신 거 아니겠습니까.”
“네 뻔뻔함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하여, 찾으셨습니까?”
린시스는 신경질적으로 백은발의 머리카락을 흩어 놓았다.
그리고 라그힐을 노려보며 씹어 뱉듯이 대꾸했다.
“못 찾았다. 이 썩을 놈아.”
“그렇다면 규율대로 하셔야겠군요.”
반면 라그힐은 아주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린시스는 화를 삭이듯 선황제의 그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래곤의 규율은 어찌 알았니?”
“대공께서 오래 전에 일러 주셨지요. 설마 남으실 생각이십니까?”
“쯧. 아니, 일단 산맥을 대표하고 있는 몸. 규율대로 해야겠지.”
“하면 그리 알겠습니다.”
라그힐 팔베르크는 1주일 전, 린시스를 불러 의견을 전달했다.
마치 부당한 판결에 항소하듯 무고를 주장한 것이다.
산맥의 규율에 의하면, 뚜렷한 증거가 없을 때 상대가 할 수 있는 적법한 항의였다.
이에 대해 드래곤은 증거를 하나 더 제시해야 하는데, 린시스는 그것을 찾지 못했다.
라그힐 팔베르크의 뒤처리가 너무 완벽했기 때문이다.
“고작 1주일로 뭐 달라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용의 산맥에서 팔베르크 제국을 주시할 거란다.”
“드래곤이 뒤에 있다면 든든하고 좋지요.”
라그힐의 무고 주장이 성립했기에, 린시스는 감시를 원래보다 일찍 풀어야 했다.
당초 얘기했던 한 달이 아닌, 3주 안에 감시를 풀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지금.
용의 산맥에서 팔베르크 제국을 감시하며, 그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는 건 2주.
‘2주 내로 대전쟁이 시작되겠구나.’
라그힐 팔베르크는 꿍꿍이 모를 눈으로 여유롭게 린시스를 관찰하고 있었다.
린시스는 에인션트 드래곤, 마날루스에게 전해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겼다.
앞으로 몇 년 안에 흐름은 끝을 맞이한다.
즉, 천기에 의해 정해진 운명이 끝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아마 이번 전쟁으로, 서대륙은 멸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