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108/134)

8

1주일

드래곤 피어(Dragon Fear).

생물의 정점이라는 드래곤에게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압박감이 몸을 짓눌렀다.

연설을 위해 대신전 밖으로 나왔던 대사제는 인상을 찡그리고 공중을 올려다봤다.

새까만 블랙 드래곤의 입속에는 화기가 모여들고 있었다.

용의 숨결, 드래곤 브레스의 전조와 같은 현상.

‘환상 마법 따위가 아니다. 진짜 드래곤!’

필시 아르티나 교구에 나타났다는, 지그문트 마이어가 타고 온 블랙 드래곤일 터.

드래곤 발아래 있던 병사들은 혼란에 빠져 흩어지고 있었다.

그 존재만으로 감히 반항할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 과연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대사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규율의 일부를 알고 있었다.

‘드래곤은 자기 방어 이외의 목적으로 선공을 가할 수 없다.’

정확한 규율은 아니었지만, 대강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벨수스는 지그문트에게 개입하기 어렵다고 강조한 적 있다.

편의를 봐줄 수 있지만, 그 힘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용의 산맥에서 대량 살상을 용인할 리 없다.

‘무력시위, 위협용이 분명하다.’

대사제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성자 측에 머리 깨나 굴러가는 놈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병력이 집결한 틈을 노려 무력을 보여 줌으로 혼란을 야기한 것이다.

아마 대사제 휘하 병력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것이 목적일 터.

‘블러핑에 동요해선 안 된다.’

드래곤에게 이목이 집중된 상태지만, 대사제 또한 병력 앞에 모습을 드러낸 상태다.

여기서 겁을 집어먹고 물러선다면 적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꼴이다.

대사제는 의연하게 서서 드래곤을 올려다봤다.

공포에 질린다는 것은, 리에이트를 믿지 못한다는 반증.

드래곤 브레스는 쏘지도 못할 텐데, 겁을 먹을 필요도 없다.

“모두 자리를……!”

대사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벨수스의 입에서 드래곤 브레스가 뿜어 나왔다.

폭발한 화기는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 대신전 꼭대기에 적중했다.

드래곤 브레스를 쏠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 만큼, 대사제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꼴사납게도 주춤 물러나,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보호했다.

‘어, 어떻게!’

드래곤 브레스는 분명 대신전의 꼭대기 부분에 직격했다.

즉 이것은 대사제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공격이라고 볼 수 있었다.

패가 드러나지 않은 만큼 리에이트 교국을 공격할 명분이 없었을 터인데.

후욱.

화기가 사그라지고, 벨수스는 이빨 사이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입을 다물었다.

드래곤 브레스가 불태운 것은, 대신전 꼭대기.

정확히는 대사제의 명령으로 여신상보다 위에 걸렸던 깃발이었다.

깃발을 태웠다는 건, 리에이트교가 아니라 대신전을 향한 선전포고라는 뜻이었다.

대사제를 흘긋 내려다본 벨수스는, 나타났던 것처럼 텔레포트를 사용해 모습을 감췄다.

대사제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설마, 용의 산맥이…… 대신전을 적으로 삼았다고?’

* * *

“용의 산맥이 대신전을 적으로 삼았다고 생각하겠지. 앞에 설마도 덧붙일 거고.”

아르티나 교구 남부 숲지.

인기척 없는 공터에서 모습을 드러낸 벨수스가 아가리를 벌렸다.

입속에서 나온 것은,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왼손에 낀 하얀 장갑, 숨결에서는 마나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양치질 좀 해라.”

“잘하고 있습니다. 억울해요.”

“클린(Clean)으로 입 청소 하는 게 양치질이냐?”

“향기 관련 마법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벨수스는 내가 나오자마자 인간 모습으로 폴리모프 했다.

나는 아주 간단한 트릭을 기반으로 대사제에게 심리전을 걸었다.

“이래도 되나 모르겠습니다.”

“네가 뭘 했다고.”

실제로 벨수스가 한 건 없었다.

크리에 교구 상공으로 텔레포트 하고, 아가리를 벌린 것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벨수스의 입속에 숨어 있던 내가 숨결을 사용해, 드래곤 브레스를 쏜 것.

“그것들이 멋대로 착각한 거지. 네가 브레스를 쏜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너무 고의성이 다분한 함정이잖습니까.”

“규율에 걸리는 점은 없다. 너도 알 텐데.”

“대부님 말씀이 옳습니다만. 끙, 영 찝찝해서요.”

“돌아가서 혼날 것 같으면 내 이름 대고 둘러대.”

숨결의 반동으로 저린 손목을 털었다.

노림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대사제는 머리 좀 아플 거다.

만약 몰렉 같은 패를 감추고 있다면 드러내 전력을 보강해야 하나 고민할 거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용의 산맥을 적으로 돌렸다니, 승산이 없을 거라 생각할 확률이 높았다.

아마 자존심을 굽히고 항복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고려해 볼 터.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뭐 특별한 건 없고, 살살 조여야지.”

* * *

크리에 교구의 한 술집.

블랙 드래곤의 브레스 이후로 하루가 지났다.

크리에 교구는 아무래도 분위기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드래곤이 직접 나서서 국기를 불태웠다는 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드래곤 피어를 직접 체감한 이들은 감히 그 생물과 대적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드래곤이랑 싸우는 거 아니냐?”

“대사제님께서 설마 우리를 사지로 몰겠어?”

“가짜 성자군이 아르티나 교구까지 장악했다잖아.”

“드래곤도 그쪽 편이야?”

병사들 사이에서 단연 이슈는 크리에 교구에 출현했던 블랙 드래곤이었다.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국기를 불태우고 사라진 것은 분명 경고의 의미였다.

‘가짜 성자군’과의 전투라면 모르겠지만, 드래곤과의 전투는 두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아르티나의 순백도 뚫렸다는데, 정말 이길 수 있을까?”

“드래곤이 정말 가짜 성자군 편이면, 못 이기지.”

“그쪽은 교리에 따르는 것도 아니라, 정말 죽을 수도.”

그들이 알기로 가짜 성자 말론은 악마에 홀렸다.

그러나 성자를 표방하는 만큼 리에이트 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불살(不殺), 소문에 의하면 아르티나 교구에서도 사상자는 적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마음 한편에서는 조금 안심하고 있는 경향도 있었다.

전쟁이라고는 하나, 죽음과 거리가 있는 전쟁.

하지만 드래곤의 등장으로 그 전제가 달라졌다.

“무섭다.”

“……그러게.”

술잔을 든 병사의 손이 덜덜 떨렸다.

드래곤 피어를 직접 마주한 병사는 생전 처음으로 가까이서 죽음을 느꼈다.

어떻게든 살아 볼 궁리를 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못 해 보고 무력하게 죽을 것이 뻔했다.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쾅!

그때, 두 병사의 옆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남자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술집에 있던 모두가 큰 소리에 놀라 남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에녹이라는 이름의 대사제 휘하 성기사였다.

30대 중반에 소드 익스퍼트 중급에 올라 대신전으로 들어간 엘리트.

적어도 크리에 교구의 대부분은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더는 못 들어주겠군. 그래서 지금 크리에 교구를 두고 도망치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에, 에녹 님. 그것이 아니고 만약에…….”

“닥쳐라. 같잖은 변명을 하다니. 리에이트 님께서 너를 벌하실 것이다.”

에녹은 무의식적으로 검 자루에 손을 올렸다.

대신전의 성기사들 중 일부는 살생을 저지른다.

대표적인 예가 대사제의 최측근인 칠흑이었는데, 그 휘하에 있는 성기사들은 다 그랬다.

‘우리는 희생하는 자들이다.’

칠흑은 그렇게 말했다.

리에이트를 대신하여 기꺼이 손을 더럽힌다.

설령 그것이 리에이트의 교리에 반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장시간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받은 에녹은, 배신자 척살에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자제하라 하셨지.’

대사제는 드래곤 브레스로 병력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고 했다.

에녹이 느끼기에는 지나친 자비였으나, 대사제는 그런 사람이었다.

에녹은 검 자루를 쥔 손에서 가까스로 힘을 풀었다.

술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술맛만 버렸군. 너희 둘, 조심해라.”

에녹은 휑하니 술집을 나가 버렸다.

이미 해는 다 저물었고, 어둠이 드리운 밤이었다.

드래곤이 나타났던 여파인지, 유독 한적한 감이 있었다.

에녹은 인기척 하나 없는 거리를 걸었다.

“후우…….”

오러를 이용해 취기를 없애고 나니, 시야가 또렷해졌다.

대신전 위, 국기가 있던 자리에는 여신상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다행히 달이 밝아 그다지 어둡지는 않았다.

걸음을 멈춘 에녹은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라.”

술집에 나온 뒤로 쭉 그의 뒤를 밟은 인기척이 하나.

오러로 취기를 없앨 때, 기감이 순간적으로 올라가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두 병사 때문에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이 정도로 기척이 없다는 건 숙련된 암살자라는 뜻이다.

스륵.

예상과는 조금 다른 장소에서,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적때기 비슷한 것을 뒤집어썼는데, 키가 많이 작은 편이었다.

‘멍청한 놈.’

당연한 말이지만, 암살자는 암살을 해야 한다.

전면전에서 비교적 취약하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전투를 하는 것이다.

가장 취약할 때를 노려, 급습으로 단숨에 숨통을 끊어야 비로소 승산이 있다.

적어도 기사를 암살할 때는 그랬다.

하지만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취했다고 생각한 거군.’

에녹은 검을 뽑아 들었다.

신성력과 오러가 뒤섞인 검날이 찬란하게 빛났다.

사람이나 죽이고 다니는 암살자는 에녹에게 있어 갱생이 안 되는 악이었다.

“리에이트 님, 용서하소서.”

암살자는 사람을 죽이는 직업이다.

그렇다고 하나, 기사인 에녹에게 있어서는 오러도 못 쓰는 일반인이었다.

신체 능력도, 검술도 압도적인 차이를 보였다.

“포기한 건가?”

“포기라니요.”

생각지도 못한 답이 돌아왔다.

상당히 갈라진 목소리였다.

노인 같았는데, 묘하게 힘이 있기도 했다.

“급습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모습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그 오만이 너를 죽인 것이다.”

달빛 아래, 주름진 초록색 피부가 얼핏 드러났다.

그 정체를 깨달은 에녹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고블린? 어떻게 몬스터가 말을?’

고블린, 롭은 자글자글한 눈으로 에녹을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한 에녹은 헛숨을 삼켰다.

암살자를 정면에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롭은 특유의 감정이 빠져나간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생물이 아닌, 일거리를 상대하는 듯했다.

“이 늙은이는 단 한 번도, 오만한 적이 없습니다.”

롭은 거의 땅바닥에 달라붙듯이 자세를 낮췄다.

눈동자는 에녹을 주시하고 있었고, 손에는 어느새 무기가 들려 있었다.

고블린이라기보다, 사냥을 준비하는 맹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건.’

에녹은 순간적으로 주춤 물러섰다.

다른 몬스터도 아니라 고블린이다.

전투 훈련을 받지 않은 성인 남성도, 무기만 있다면 일대일로 이길 수 있는 몬스터.

오러를 다루지 못하는 용병들도 가볍게 사냥하는, 약하디약한 몬스터가 바로 고블린이다.

분명 에녹에게 있어서는 지나가는 쥐새끼나 다름없는 존재여야 하는데, 에녹은 명료한 공포를 느꼈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 워낙 대단하셔서 말입니다.”

* * *

“저는 가끔 신성력이 오락가락한데, 왜 그럴까요?”

“마리나 님께서는 신의 대리인이니까요.”

“네. 그건 알고 있는데요……?”

“으음, 잠시 생각 좀 정리하겠습니다. 말재주가 없어서.”

“천천히 하세요.”

아르티나 교구 중앙 신전.

말론은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마리나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리에이트에게 들었지만 새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신의 대리인을 시녀로 두고 있을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신을 딸로 두고 있을 줄은 더더욱 예상치 못했다.

마리나의 무릎에 앉은 리옐은 배를 베고 고롱고롱 잠들어 있었다.

“설명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리옐 님께서 깨시진 않을까 하여.”

“괜찮아요. 마차 안에서도 잘만 주무신답니다.”

“신의 대리인은 이름 그대로 신의 의견을 대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말론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리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샤라라, 뾰로롱 같은 괴상한 설명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결국 말론이 쉽게 풀어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말론은 선반 위에 세워진 촛대를 가리켰다.

“리옐 님께서 저기 계신 촛대를 원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촛대를 원하신다. 알겠어요.”

“리옐 님께는 촛대라는 목적이 생겼습니다. 명백한 리옐 님의 의지로요.”

“그렇겠죠?”

“마리나 님께서는 저 촛대를 손에 넣는데, 좀 더 힘을 수월하게, 많이 빌릴 수 있을 겁니다.”

신의 대리인은 신의 의견을 대신하여 움직일 때, 더 강한 힘을 쓸 수 있다.

그들이 다른 무엇도 아닌 ‘대리인’이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하지만 마리나의 의문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리옐 님께 어떤 의지가 없다면요? 가령 지금처럼 주무시고 계신다든지.”

“빌릴 수 있는 힘의 총량이 줄어들 뿐입니다.”

“그럼 목적이 광범위하다면요? 가령 자기 방어라든지.”

“좋은 질문입니다. 신의 목적, 의지는 분명할수록 강해집니다. 가령…….”

말론은 이런저런 것들을 마리나에게 가르쳤다.

마리나는 그 어떤 대리인보다 가까이서 신을 모시고 있다.

신과의 상성은 압도적이라고 할 정도로 높으나, 문제는 신의 역량이었다.

리옐은 어린 만큼 부족하고, 대리인에게 조언이나 교육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세계수와 르네를 통해 어느 정도 보완하긴 했으나, 짧은 기간이었던 만큼 갈 길이 멀었다.

몇 시간 후.

“수고하셨어요.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아니요. 저도 다른 신의 대리인분과 이야기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대뜸 대리인이 되어서 놀랐는데, 다 그럴 줄은 몰랐어요.”

“하하, 신께서 정해 주시는 거니까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네. 그럼 이만 실례할게요.”

해질녘까지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리옐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마리나와 말론이 최대한 조용히 대화를 나눴으나, 그런 것치고도 잘 자는 경향이 있었다.

애초에 잠이 많기도 한 리옐이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마리나는 잠든 리옐을 업고 여관으로 돌아갔다.

“도련님, 계세요?”

조용히 방문이 열리고, 단이 얼굴을 내밀었다.

단은 방 안쪽을 흘긋 보고 제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지그문트가 때때로 자고 있을 때 보내는 일종의 신호였다.

마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어두운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정말 주무시네. 이 시간에 주무시는 건 드문데.’

지그문트는 신기할 정도로 잠을 안 자는 사람이었다.

신성이 나타나고 특히 그랬는데, 이렇게 일찍 자는 경우는 극도로 드물었다.

침대에 누운 지그문트는 무슨 꿈이라도 꾸는 듯, 인상을 찡그린 채 잠들어 있었다.

리옐을 조심스럽게 옆에 눕히니, 똑같은 방향으로 누운 리옐도 덩달아 인상을 찡그린다.

“큭.”

“후후.”

소리 죽여 웃은 단과 마리나는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나란히 잠든 부녀는 다시 한번 동시에 인상을 찡그렸다.

* * *

나는 리옐과 함께 성역에 있었다.

정확히는 성역이 아니라, 리에이트가 몽계에 임의로 만든 공간이었다.

평범한 공터 같았는데, 주위에는 형형색색의 이파리를 가진 거목들이 즐비했다.

아마 천계에 있는 숲의 형상을 본떠 만든 것 같았다.

-그러니까, 간섭이 가능한 상태지만 가급적 자제하라는 거랍니다.

-흐암.

-흐암.

-……델, 리옐. 둘 다 집중 안 할래요?

리에이트는 팔짱을 끼고 우리를 노려보았다.

리옐은 내 무릎에 앉아 있었는데, 어련히 졸린지 꾸벅꾸벅 눈이 감기고 있었다.

몽계에서도 졸릴 수 있다는 건 새로운 사실이었다.

-다 아는 걸 두 번 들으니까 그렇지.

-리옐이 델, 당신을 따라 하잖아요.

-얘는 진짜 지루한 거야.

-아빠가 대신 들으면 안 돼……?

대체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다.

아마 리옐에게 전하고자 한 것 같은데, 정작 리옐은 어렵다고 못 알아들었다.

리옐은 영민한 편이었지만, 자신이 흥미 없는 것을 공부하는 건 썩 좋아하진 않았다.

-그래. 리옐은 당신이 알려 주면 그만이겠죠.

-때가 되면 스스로 알 것을.

-중요한 건 델, 당신이에요. 이거 알려 주려고 부른 겁니다.

-내가 알아야 될 것도 있나?

-신위에 오르면서 제한이 어느 정도 풀렸거든요.

천기(天機)라는 것이 있다.

제약이나 간섭 등에 관련 된 일종의 법칙인데, 당연하게도 알려져선 안 되는 종류의 것이다.

격이 낮거나 힘이 부족한 자들에게는 일종의 제한이 걸려 있어, 이것을 들으면 죽는다.

특별히 제한이 풀리는 경우도 있는데, 총 세 가지로 분류된다.

르네나 말론처럼, 신과 직접적인 연결점을 가지거나, 드래곤처럼 격 자체가 높은 존재거나.

혹은.

-당신은 변수예요. 알고 있죠?

변수가 되거나, 연관되면 된다.

변수로 불리는 인물의 대표적인 예로는 내가 있었다.

-세계에는 바꿀 수 없는 흐름이 있습니다. 흔히들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알아.

-변수란 한없이 미약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흐름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존재.

-그것도 알아. 서론이 왜 이리 길어?

-모르시는 분들께서도 계시니까요.

-리옐 자는데. 얘는 어떻게 몽계에서 자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계속해.

리에이트는 꽤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신은 흐름, 운명을 떠받치는 일종의 기둥이다.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제약이 생긴다.

때때로 변수와 같은 일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제한이 있다.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겠네.

-맞아요. 당신은 정말 이례적이고, 기괴할 정도로 이질적인 존재입니다.

-칭찬인지, 욕인지, 원.

신과 변수는 상극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신은 흐름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변수는 그렇지 않다.

신은 큰 흐름을 바꿀 수 없으나, 변수는 흐름을 바꿀 수 있다.

신은 불사에 가까운 삶을 살지만, 변수는 그 누구보다 죽음을 가까이 둬야 한다.

그런데 나는, 변수이자 신이다.

-변수 쪽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한 번 흐름에서 벗어난 인물이 다시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죠.

-신은 흐름에 포함되어야 한다며.

-그렇죠. 그래서 이상한 거예요. 당신은 흐름에 들어와 있으면서, 벗어나 있어요.

-뜨거운 아이스커피 같은 건가?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한데, 정확하네요.

리에이트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변수는 흐름을 바꿀 수 있지만, 그 힘이 턱없이 부족하다.

하여 작은 흐름을 바꾼다고 한들, 큰 흐름 자체는 결국 같아진다.

죽음을 어떻게 한 번 속이더라도 결국 죽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당신은 변수이자 신이기도 해요. 한없이 불완전하지만 그 모순을 견딜 정도로 완전하고.

-거참 더럽게 어렵네, 하고자 하는 말이 뭐야.

리에이트는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두 손으로 허벅지 사이에서 졸고 있는 리옐의 귀를 막았다.

-흐름의 끝이 다가왔습니다.

* * *

드래곤 브레스 사건 이후로 1주일이 지났다.

대사제는 그 시간까지도 항복을 하지 않았다.

경우의 수는 두 가지다.

드래곤 브레스에 트릭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거나,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뻗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없었다.

“준비는 끝났습니까?”

“예. 성자님.”

아르티나 교구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성자군은 진군 준비를 마쳤다.

대사제의 편을 들던 성기사들도 대부분 회유가 끝난 상태였다.

그중에는 아르티나 교구를 지키던 주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순백도 있었다.

리처드가 내게 다가왔다.

“정말 마차를 타지 않으실 겁니까?”

“너네 마차 안 탄다며.”

조금 미련해 보이긴 했지만, 성자군은 모두 보병이었다.

사제들과 보급병은 물론이고, 참모진이라 할 수 있는 성자도 걸어서 이동했다.

리에이트 아래에서 싸울 때는 모두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란다.

“근데 우리만 딸랑 마차 타고 가면 좀 그렇잖아.”

“손님, 아니 증원 병력이니 이해할 겁니다.”

“외적인 이미지는 생각보다 중요한 거야. 벨수스.”

내 부름에, 벨수스가 폴리모프를 풀었다.

아르티나 교구 서부 외곽에 블랙 드래곤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결해 있던 성자군은 미리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놀랐는지 웅성거렸다.

“우린 이거 타고 간다. 나름 연출이 필요하거든.”

“……알겠습니다.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당연하지. 너네나 잘해.”

내 뒤에 있던 단과 마리나, 리옐의 몸이 떠올랐다.

벨수스가 플라이(Fly)를 사용해 띄운 것이다.

셋은 익숙한 듯 벨수스의 머리 위에 자리를 잡았다.

말론이 내게 다가왔다.

격식 차리지 않아도 된다기에, 말을 놓은 상태였다.

“지그문트 님.”

“왜?”

“정말 말씀하셨던 것이 가능한 겁니까?”

“가능하다니까. 의심하지 마.”

먼저 크리에 교구에 파견된 롭이 일을 꽤 잘하고 있었다.

1주일 사이에 기사단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수의 성기사가 실종됐다.

거기에 대사제의 측근에 가깝던 쓰레기도 몇 잡아들였다.

“아마 대사제도 마음이 좀 딸랑딸랑한 상태일 거다.”

항복은 물론이고 도주까지 고려해 봤을 거다.

그러라고 1주일이라는 넉넉한 시간을 준 것이니까.

며칠 간격으로 벨수스가 크리에 교구 상공을 한 바퀴 돌기도 했다.

대사제가 언변이 꽤 되는 모양이지만, 이미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거다.

대의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모았어도, 그 많은 수의 사람들을 통제하지 못하면 답이 없다.

“말론, 이야기했던 건 전부 기억하지? 허락은?”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리에이트 님께서도 허락하셨습니다.”

“좋아. 크리에 교구까지 진군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며칠이라고?”

“하루. 하루라고 하셨습니다.”

“정확해. 우리는 하루 안에 크리에 교구를 장악할 거다.”

* * *

크리에 교구에는 교리를 저버리고 생명을 베는 성기사들이 있었다.

스스로를 리에이트의 심판자라고 칭했으나, 실제로는 사람 죽이는 성기사라고 불렸다.

모두 칠흑의 성기사 휘하의 성기사들이었는데, 그들은 1주일 사이에 모두 종적을 감췄다.

집단 탈주라기에는 간격이 있었으며, 제거 당했다기에는 전투의 흔적이 없었다.

소드 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실력자들인 만큼, 쉽게 당했을 리도 없는데.

모두 의문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천벌이다.”

대사제의 만행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것은 교리를 어긴 자에게 리에이트께서 내린 천벌일 것이라고.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과 드래곤의 선전포고가 겹쳤다.

대신전을 향한 불신은 커졌고, 반감을 가진 집회가 나타나기도 했다.

“뚫린 입이라고 망발을 지껄이는군. 뭐라 했지? 천벌?”

“그래! 머지않아 리에이트 님께서 너를 벌하실 거다! 무뢰배가 기사를 표방하고 있으니……!”

“신을 대신하여 심판하는 우리를 모독하는 것은, 곧 신에 대한 모독이다.”

사람 죽이는 성기사 하나가 대신전 앞에서 한 평민의 왼쪽 팔을 베는 사건이 일어났다.

예의 천벌로 매우 예민해진 상태였기에 대사제의 말을 잊고 일을 저지른 것이다.

신전 측에서는 이를 벌한다고 공고가 내려왔으나, 사람들이 그 말을 믿을 턱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어? 저기, 저 사람.”

“무슨 피가!”

사람들은 대신전 앞에 묶여 있는 사람 죽이는 성기사를 보고 기겁했다.

정확히 평민을 베었던 그 위치에 묶여 있었는데, 똑같이 왼쪽 팔이 잘려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대신전의 평판은 바닥을 쳤고, 반감을 가진 집회가 창궐하게 됐다.

“무엇이라고?”

“고블린. 거적때기를 뒤집어 쓴 고블린이 한 짓이었습니다.”

“고블린? 어이가 없군. 지금 기사가 되어서 고블린에게 패배했다는 말인가?”

“대사제님, 놈은 강했습니다. 보통 고블린이 아니라…….”

왼팔을 잘린 성기사는 변명도 하지 못하고 칠흑의 성기사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

대사제는 인상을 찡그린 채 고민에 빠졌다.

한낱 고블린에 의해 수십에 달하는 성기사가 죽었다니.

원인 규명을 하고 진상을 밝혀도 망신이었다.

“더 이상의 피해는 납득할 수 없다. 칠흑.”

“예. 성하.”

“고블린은 크리에 교구 내부에 있다. 잡아 오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 * *

암살자는 어둠에 스며들어 움직인다.

달 아래, 거적을 뒤집어쓰고 부랑자 행세를 하던 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는 직위를 앞세운 무뢰배라고도 불리는, 사람 죽이는 성기사들이었다.

지그문트는 1주일간 사람 죽이는 성기사들을 처리한 뒤 후퇴하라 명령했다.

‘과연. 이런 노림수셨나.’

드래곤 브레스와 내전이라는 불안감과, 억눌려 있던 불만을 터트리기 위한 기폭제.

롭은 그 역할을 다 하기 위해서 성기사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리에이트의 부탁대로, 살생은 하지 않았다.

모두 제압하여 크리에 교구 밖에 억압해 둔 상태였다.

추후 크리에 교구 장악을 마친 뒤,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벌할 예정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오늘은 딱 1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롭이 사냥하고 있는 ‘사람 죽이는 성기사’들은 모두 칠흑 휘하의 인물들.

마지막 남은 인물이 어디에 숨어 있을 거라 예상했건만, 뜻밖에도 밖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자포자기한 것인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지.

고주망태가 되어 길거리에 뻗어 있는 상태였다.

‘확실히 잠들었다.’

굳이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민심을 흔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제압하기 곤란한 상황이라면 기꺼이 포기하고 후퇴했겠지만, 이렇다면 포기할 이유가 없다.

스스로 에녹이라 밝힌 성기사처럼 자신을 알아챈 기색도 전혀 없었다.

말 그대로 완벽한 무방비 상태.

‘신중.’

함정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허술하긴 했으나, 신중해서 나쁠 건 없었다.

적진 한복판에서 움직일 때는 늘 유념해야 하는 사실이었다.

롭은 지붕 위에 선 정물처럼 가만히 성기사를 관찰했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도 성기사는 깰 기색이 없었다.

잠에 든 것이 확실한 듯 심장 박동은 느렸고, 때때로 뒤척이기도 했다.

끼릭.

롭은 허리에서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의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마비 독으로, 복용한다면 기사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물건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지그문트가 제조한 것이니 그 성능은 확실했다.

저 상태라면 제압하는 건 손쉬운 일이다.

툭.

가볍게 땅으로 내려온 롭은 성기사에게 조용히 걸어갔다.

성기사는 여전히 잠든 채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은 롭은 벌어진 입으로 독을 흘려 넣었다.

아마 몇 초 지나지 않아 약효가 돌 것이다.

혀까지 마비될 테니 소리를 지르는 것을 막지 않아도 된다.

“찾았다.”

불현 듯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롭이 동작을 멈췄다.

기척은 일절 없었을 터.

1시간 동안 관찰까지 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롭은 적의가 없다는 듯 양팔을 들고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네가 그 고블린이구나.”

어둠 속에 있는 것은 칠흑의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공격 사정거리 내에 들어와 있었으나, 롭은 움직일 수 없었다.

칠흑의 성기사는 얼핏 느끼기에도 강하다.

전면전은커녕, 기습을 가해도 죽일 수 있을지 미지수인 상대였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하나뿐.

‘후퇴.’

칠흑의 성기사가 움직이기 전에, 발로 땅을 찼다.

기사라는 족속들은 대체로 암살자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

근접전이라면 반사 신경으로 따라와 불리한 것이 사실이나, 아예 거리를 벌리면 그만이다.

특히 저렇게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다면 더욱 그랬다.

‘포기.’

상대는 하나였으나 롭은 냉정하게 역량 차이를 깨달았다.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임무도 아니었기에, 지그문트도 목숨을 우선시하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예상 외로 공격이 날아들었다.

퍽!

롭은 재빠르게 아래에 있던 성기사를 들어 공격을 막았다.

성기사를 꿰뚫은 것은 검은색의 창.

창에 맞은 성기사는 마비에도 불구하고 경련을 일으키더니, 온몸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사령술? 저주?’

적어도 성기사가 사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잠시 롭이 방어를 위해 멈춘 틈을 타, 칠흑이 달려들었다.

예상치도 못한 속도에, 롭은 성기사를 앞으로 던져 버렸다.

서걱!

롭의 왼팔이 날아갔다.

칠흑이 인질로 잡힌 성기사와 함께 롭의 어깨를 베어 버린 것이다.

의도성이 다분한 공격임에도, 롭은 대처할 수 없었다.

“다음은 목이다.”

“그거 무섭군요.”

롭은 표정 변화조차 없이, 공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칠흑도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하늘을 날던 왼팔이 도로 철썩 붙은 것이다.

“……무슨. 괴물이.”

“틀린 말은 아니지요. 저는 몬스터니까요.”

롭은 왼팔을 휙휙 저었다.

붙자마자 멀쩡하게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성자나 대사제가 와도 저 속도의 회복은 불가능했다.

롭의 비밀은 이미 왼팔이 없다는 데 있었다.

“1호. 버틸 수 있습니까?”

“크어어.”

롭의 왼팔을 대체하고 있는 것은, 아그나, 실험체 1호.

제 모습을 롭의 왼팔로 변형하여 붙어 있는 상태였다.

불사의 괴물은 죽었지만 실험체 1호의 불사성은 그대로였다.

그 회복력은 괴랄할 정도로 상승한 상태였는데, 이는 지그문트가 실험체 1호를 아공간에 보관한 탓이었다.

“키메라인가. 추잡한 놈이.”

“끌끌. 뭔들 어떠렵니까.”

롭은 자세를 낮추기 무섭게 칠흑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다.

이 정도로 거리를 좁힌 상태에서 도주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한 방 먹인 후에 틈을 노려 후퇴하거나, 아예 정면 돌파할 생각이었다.

칠흑이 검을 쥐기 무섭게, 롭이 왼팔을 내밀었다.

화악!

롭의 왼손 손바닥의 면적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칠흑의 성기사와 롭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은 것이다.

시야를 차단하고 기습을 가할 요량이 분명했지만.

“함께 베면 그만.”

칠흑은 당황하지 않고 검을 그었다.

아그나는 신체를 변형 및 강화할 수 있으나, 오러를 품은 검을 막진 못했다.

그대로 잘려 나가며, 손바닥 너머가 드러났다.

칠흑의 성기사는 눈을 부릅떴다.

“……큭!”

그곳에는 롭이 없었다.

그대로 실험체 1호를 쭉 늘려, 뒤로 물러난 것이다.

뒤늦게 속았다는 걸 깨달은 칠흑은 실험체 1호를 잡으려 했다.

왼팔로 위장한 실험체 1호를 신체의 일부라고 판단한 것이다.

캉!

어느새 발밑에 설치되어 있던 트랩이 불쑥 튀어나왔다.

앞으로 한 걸음 내딛은 순간, 땅에서 창 한 자루가 튀어나온 것이다.

칠흑은 동물과 같은 반사 신경으로 뒤로 물러서 창을 피했다.

만약 피하지 않았다면 정확히 목을 꿰뚫었을 것이다.

거의 동시에, 실험체 1호가 멀리 도망친 롭 쪽으로 빠르게 줄어들었다.

잠깐 사이에 벌어진 상당한 거리 차.

“……놓쳤군.”

* * *

성자, 말론은 내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이유인즉슨 상대 또한 자신과 같은 리에이트의 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신실하나 동시에 무지하여 대사제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시노드 교구에서처럼 마족을 상대한다면 모를까, 그들에게는 어떤 죄도 없었다.

“성자님.”

말론은 무력감을 통감하고 있었다.

성기사나 사제를 회유하기도 했지만, 이는 거의 리에이트가 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결국 말론이 할 수 있는 일은 일반 사제와 같은 치료 정도가 전부였다.

리에이트는 말론이 잘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상자가 생긴 것은 사실이었다.

죽음의 무게가 말론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성자님.”

“아, 요안 경. 어찌 부르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괜찮으십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말론과 리처드, 요안을 비롯한 이들이 선두에 선 상태였다.

수없이 많은 성기사와 사제,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저토록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말론은 다리가 떨릴 지경이었다.

성자가 되기 전까지, 말론은 그냥 평범한 견습 사제에 불과했다.

오히려 모자라다는 평가를 들었으며, 이런 일에 휘말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리에이트 님, 부디 저희에게 승리를.’

리에이트는 지그문트 마이어가 왔으니, 승리할 거라 자신을 했다.

하지만 늘 일이라는 것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

말론은 가슴 한편에 있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기도를 했다.

머지않아 숲길이 끝나고, 개간된 산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 절벽처럼 가파른 토지에, 새하얀 건축물들이 보였다.

성자군이 크리에 교구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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