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106/134)

6

보물 고블린

“지그문트 마이어? 요정족의 은인?”

“아직 애 아닌가!”

답답한 가면을 벗자, 중앙 귀족들이 술렁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코스타 공작의 독촉으로 가면을 벗은 것 같았으나, 애초에 더는 쓸 생각이 없었다.

내가 신분을 숨겼던 이유는 약했기 때문이다.

팔베르크 제국의 계획을 방해하고 그 이후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힘을 되찾았았기에, 굳이 정체를 숨길 필요도 없었다.

암살 기도를 하려면 암국의 왕 정도는 데려와야 하는데, 걔는 제국과 적대 관계다.

‘기만을 해 볼까 싶긴 했지만.’

처음에는 가짜 레온하트의 수호자를 앞세울 생각이었다.

내가 괜히 파울 레드라인을 강하게 만들어 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요아힘 월베른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위험 요소는 적다.

흑탑주 렘브란트 님푸스가 덤비더라도 지금은 족칠 자신이 있다.

“……정말 상상도 못 한 정체로군.”

어지간히 놀랐는지, 밀러 자작 같은 경우에는 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입을 떡 벌린 채, 직각으로 굽힌 왼쪽 팔 끝을 위쪽으로 향하고, 다른 팔은 아래로 굽혔다.

겨우 입을 다문 밀러 자작이 옆을 바라보았다.

“라스, 자네는 알고 있었나?”

“아니.”

라스 마이어도 이번 건 조금 당황했는지, 눈살을 찡그리고 있었다.

하긴 라스 마이어에게는 언질 한 번 주지 않았다.

방임주의를 표방하는 라스가 태도를 바꿀까 우려됐기 때문이다.

“이제 우려할 일은 없으시겠군요. 코스타 공작님.”

“큼, 계속 얘기해 보게나.”

내가 파울 레드라인을 이긴 것으로 잠깐 돋보인 귀족 자제의 입장이었다면 모를까.

요정족의 은인으로, 엘비아와의 동맹까지 성사시킨 주역이었다.

시프 레온하트의 수가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이로써 신분 증명은 완료됐고, 코스타 공작은 명분을 잃었다.

“하나, 팔베르크 제국이 정복 전쟁을 시작할 거라는 근거가 있나?”

“팔베르크 제국은 웨스트리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남향에 집중하기 위해서지요.”

“비약 아닌가? 대마법사 델 로안 대공의 죽음이라는 명분이 있었을 텐데.”

“건국제 때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팔베르크 제국은 배후에 그들이 있다는 것을 철저히 숨겼다.

하지만 범인을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비교적 증거를 찾아내기 수월했다.

건국제 때 게오르크 비옌트의 움직임을 비롯해, 선언식에서의 마탑 습격 사건.

발락 리빙데드라는 인물이 팔베르크 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인 신분이라는 것.

더하여, 발레리아가 나 없는 동안 잡아들인 첩자들에게서 받은 정보까지.

전부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마치고, 자료를 모아 놓은 서류까지 배포했다.

팔베르크 제국이 내 죽음을 웨스트리아의 책임으로 전가할 때 썼던 방법이었다.

‘물론 그쪽은 날조고, 내 쪽은 사실이다만.’

코스타 공작을 비롯한 중앙 귀족들은 차분히 서류에 집중했다.

꽤 잘 정리해 뒀기에, 서대륙 정세에 밝다면 대략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팔베르크 제국의 움직임이 결코 심상치 않다는 것을.

첩보전이야 간혹 있는 일이지만, 건국제와 선언식의 일은 아니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몇몇 귀족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 하지만 팔베르크 제국은 용의 산맥에게 움직임을 제한 당한 상태 아닌가?”

“마족과 연루됐다는 명분으로요. 용의 규율에 의하면 그 제한은 한 달 내로 풀립니다.”

“한 달? 한 달 내로 전쟁이 시작된다는 얘긴가?”

“그렇지요. 아마 몇 달 내로 웨스트리아를 장악한 후, 트리옌을 칠 겁니다.”

“레온하트는 그 뒤에 있지 않은가.”

“트리옌까지 장악한다면, 다음은 어딜까요?”

팔베르크 제국의 목적은 트리옌 왕국이 아니다.

트리옌 왕국이 위치한 서대륙 중앙을 장악하는 것이다.

중앙을 공략한다면, 원하는 대로 팔을 뻗칠 수 있다.

“허.”

“하지만, 팔베르크 제국이. 지금 와서?”

“무서운 속도로 규모가 커지긴 했지만.”

“대마법사의 죽음으로 성장세가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내실을 다지는 기간이 아니었던 건가.”

귀족들은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마을 옆에서 잠 자던 드래곤이 일어나, 브레스로 근처를 쓸어 버리는 꼴이다.

레온하트도 얼마 전에 대청소라는 변동이 있었기에 이를 신경 쓸 틈이 별로 없었으리라.

“팔베르크 제국은 확실히 강대합니다. 그 영토는 드넓고, 병력은 막강합니다.”

비단 마족의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팔베르크 제국은 열강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오래 전부터 수많은 전쟁을 거쳐 왔던 만큼 기사들의 수준도 높았다.

이번 정복 전쟁 준비에 시간을 들인 만큼 병력의 질적 향상도 상당할 것이다.

“까놓고 말해서, 팔베르크 제국과 레온하트 왕국이 부딪치면, 승산은 0에 수렴합니다.”

제아무리 레온하트 왕국의 충신이더라도.

심지어 국왕과 레드라인 후작조차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레온하트 왕국에는 적탑주와 레드라인 후작이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팔베르크 제국과의 수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팔베르크 제국에는 소드 마스터가 넷이나 있다.

“하여, 코스타 공작님의 말씀대로 팔베르크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엘비아 측의 의사는…….”

“팔베르크 제국이 원하는 것은 서대륙 정복입니다. 신성불가침 구역이었던 태초의 숲도 예외는 아니었겠지요.”

이는 거의 기정사실에 가까웠다.

팔베르크 제국은 몇 차례 신을 제 손 안에 두고자 했다.

목오 사막에서 발락을 이용해 목오를 언데드로 만들었고, 불사의 신자들을 교묘하게 조종해 이그룬타를 깨웠다.

또한, 선언식 당시 발락 리빙데드는 세계수의 씨앗이 담긴 탄생을 노리고 적탑을 습격했다.

즉, 놈들은 신, 세계수의 대체제를 찾고 있었다.

“웨스트리아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치고, 트리옌은 어찌 설득할 셈인가?”

“트리옌 왕가에서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소. 적극적으로 연합에 협조하기로 약조하였지.”

가만히 듣고 있던 파서벌 레온하트가 첨언했다.

파서벌 레온하트와 레드라인 후작도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었다.

트리옌 왕가와 접촉은 완료됐고, 이미 연합 자체는 구축이 거의 완료된 상태였다.

남은 건 이를 공적으로 드러내는 일뿐이었다.

“웨스트리아, 트리옌, 레온하트? 엘비아와 세 왕국이 동맹을 맺는단 말인가?”

“아니요. 그래도 팔베르크 제국을 견제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팔베르크 제국은 감히 뭐라 단정 지을 수 없을 정도로 강대했다.

갑작스레 세를 불리긴 했으나, 주변 국가를 거의 아무런 피해도 없이 흡수했으니 말이다.

전생에 오냐오냐 하면서 퍼 먹여 줬더니 이딴 참사가 나 버리고 말았다.

더군다나, 가장 문제인 것은 팔베르크 제국과 손을 잡은 마족군이었다.

‘아마 웨스트리아를 장악하려는 이유도.’

배후에서 거슬리는 위치에 있다는 것도 있지만, 웨스트리아를 장악한 뒤, 마족군을 지상에 끌어오려는 요량도 있을 것이다.

땅에 사는 신들의 죽음으로, 지나치게 불안정한 상태가 된 서대륙의 서쪽이니까.

“이게 끝이 아니란 말인가? 어디 아주 리에이트 교국까지 끌어들일 셈인가?”

“혜안이 있으시군요. 정확합니다. 그것이 최소한의 전제 조건이지요.”

“뭐?”

“한 달 안에, 리에이트 교국의 내전을 끝내야 합니다.”

* * *

리에이트 교국, 아르티나 교구 전선.

성기사 리처드는 한 성기사와 검을 마주하고 있었다.

새하얀 전신 갑옷으로 무장한 데다가 검 자루까지 하얗다 하여, 순백의 성기사.

그는 대신전 소속 성기사로, 그에게는 까마득한 선배이기도 했다.

“불쌍하고 무지한 자로다. 악마의 속삭임에 넘어가 신께 검을 겨누다니.”

“리에이트께 선택 받은 성자님을 악마라고 몰아세우다니, 대사제도 영 진부하군요.”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대사제님을 언급하다니, 죽음으로 속죄해야겠구나.”

“교리를 잊으신 것 같군요. 저희는 리에이트의 검, 독단으로 생명을 짓밟아선 안 됩니다.”

“마족과 그 수하들을 예외로 두고 있다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지.”

리에이트가 들었다면 뒷목을 잡았을 법한 대화였다.

리처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말마따나 불쌍하고 무지하군요.”

“하면 어째서 나는 신성력을 쓸 수 있는 건가? 이단이었다면 리에이트께서 거두셨을 것을.”

“대신전의 제단 덕분이지요. 대사제가 억지로 잡아 두고 있다는데.”

“더 이상의 모함은 듣지 않겠다.”

“그럽시다. 미노타우로스 귀에 교리 읽어 주는 기분이군요.”

시노드 교구에서의 사건 이후, 리처드는 성자가 된 말론과 함께 전선으로 나섰다.

처음에는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 절망해야 했다.

대사제가 토벌군이라고 보낸 성기사단에게 다 죽을 뻔했으니까.

수도 격인 크리에 교구에서, 대사제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력을 상당했다.

시노드 교구의 일부 병력이 말론을 따르긴 했지만, 그 전력 차는 압도적이었다.

리처드의 뒤로 다른 성기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백이여, 그대는 속고 있네.”

“……자네가 어찌 그쪽에 서 있는 것이지?”

“리에이트의 종이 리에이트의 편에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그것도 옛날 이야기였다.

말론은 대사제가 파견한 전력을 흡수했다.

대사제에게 속아 넘어갔을 뿐이라며, 말론은 그들에게 리에이트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리에이트의 목소리를 들은 이들은, 모두 말론의 편으로 돌아섰다.

“마귀의 혓바닥에 놀아난 것이로구나. 그리 의지가 약해서야.”

“구원 받은 것이지. 자네라도 2 대 1은 힘들 걸세.”

“타락한 자들에게 질 생각은 없다.”

성기사들은 대의 아래 신성력을 사용할 때 가장 강해진다.

신성력과 섞인 오러가 검날 위로 은은하게 빛났다.

* * *

아르티나 교구 후방, 임시 천막.

“성자님께서는?”

“저기. 기도하고 계셔.”

두 신자들은 기도하고 있는 말론을 바라보았다.

말론은 종종 리에이트에게 기도를 올리곤 했다.

아르티나 교구까지 전진하긴 했지만, 아직 크리에 교구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대로 내전이 지속되면, 고통 받은 이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대사제의 손에 리에이트 교국을 넘겨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리에이트 님. 부디 길을 알려 주시옵소서.

리에이트는 이럴 때마다 신탁의 형식으로 대책을 제시해 주곤 한다.

이 신탁은 매우 어려운 수수께끼와 같을 때가 많았다.

하늘에 사는 신이라도, 지상에 개입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때가 많았고, 신탁 덕분에 살아남은 적도 몇 번 있었다.

다시 한번 난관에 부딪친 말론은 리에이트에게 기도를 드렸다.

근엄하고 자상하며,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론. 이제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예? 포기하란 말씀이십니까?

리에이트가 여태껏 이렇게 말을 한 적은 한 차례도 없었다.

목을 불태우며 하얀 양이 있는 곳으로 향하라든지, 해석하기도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평소와 다르게 가볍고 발랄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 내전의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다는 거란다.

* * *

리처드는 지친 몸을 이끌고 천막으로 돌아왔다.

강행군을 시작한 지도 몇 달이 지났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연속된 전투는 그를 강하게도 만들었지만, 동시에 힘들게도 만들었다.

사제가 다수 포함된 만큼 다치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심적인 피로감이 누적된 것이다.

“자네, 괜찮나?”

“아, 요안 님.”

리처드에게 다가온 것은 고위 집행자 요안이었다.

팔베르크 제국에 파견됐던 요안은 용의 산맥에 일을 공식적으로 넘기고 귀국했다.

요안은 크리에 교구 출신이지만 리에이트 교국의 현황을 잘 알고 있었다.

트리옌을 거쳐 시노드 교구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성자 쪽에 합류, 뜻을 함께했다.

요안은 저만치 있던 의자 두 개를 끌어와 권유했다.

리처드가 의자에 앉자, 요안은 그와 마주 앉았다.

“집행자들 중에 자네 같은 얼굴을 한 이들이 종종 있거든.”

“집행자님들요?”

“그래. 우린 하는 일 때문에 항상 마족에게 노려지고 있어서 말이야.”

마족을 베는 검이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마족은 호시탐탐 집행자들을 노리기도 했다.

하멜에서 트리옌의 병사들을 조종해 그들을 기만한 마족이 단적인 예다.

“그렇기에 좀처럼 방심할 수 없지. 몇 날 며칠을 전투로 지새운 적도 있고.”

“그렇군요. 철인과 같은 분들인 줄 알았는데.”

“우리도 다 똑같아. 마족을 좀 더 효과적으로 베는 방법을 알고 있을 뿐이지.”

애초에 집행자들은 언제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험한 임무를 행하고 있었다.

마족은 어디에 있을지 모르기에,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술을 마실 때도 최소한의 전력은 금주를 해야만 했다.

“힘들 거야. 아무리 사제들이라고 한들 정신적인 피로감은 풀어내지 못하니.”

“제가 약한 소리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약한 소리 좀 하면 어떻다고 그러나.”

“말론, 아니, 성자님께서는 더 막중한 책임감을 양 어깨에 지고 계실 겁니다.”

“그렇겠지. 이중에 그 누구도 전쟁을 즐기지 않아. 대의를 위해 마지못해 움직이는 거지.”

대사제는 교국민들을 기만하고 있다.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클레이먼과 같은 자를 주교로 내세운다.

병력을 양성하고 제 권력을 단단하게 만드는 행실은, 이미 사제라기보다 폭군에 가까웠다.

말론의 목표가 대사제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성자는 리에이트의 뜻을 대변하는 대리인.

대사제를 끌어내리는 것은 곧 리에이트의 뜻이었다.

“누군가 해야 하는 일 아닌가.”

“그렇지요. 하지만, 좀 더 전력이 강했다면.”

“치열할수록 오래 싸워야 하니. 자네 마음 이해하네.”

“힘 조절을 실패하여 사람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리에이트의 교리 아래 있는 모든 신자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이 전쟁에서 죽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심하더라도 전투가 불가능하도록 제압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전쟁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을 리가.”

“대사제의 말에 속고 있었을 뿐,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고의가 아니지 않는가. 리에이트 님께서도 이해하실 걸세.”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이 전쟁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또 말처럼 쉽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요안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검을 손질했다.

그 말대로, 내전은 치열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병력은 부족하지만 압도적인 신성력을 기반으로 조금씩 전진하고 있는 성자 측.

오래 전부터 형성된 병력을 기반으로 성자 측을 막아서고 있는 대사제 측.

어떻게든 아르티나 교구까지 전진했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발목을 붙잡혔다.

대신전이 있는 크리에 교구에 가까이 갈수록, 병력의 수가 많아졌다.

“뚫어 낼 수 있을까요?”

“순백을 잡아 낸다면 어떻게든.”

“그분, 강하시더군요.”

“혼자서 전황을 뒤집을 수도 있을 정도의 기사지. 내 벗이라 잘 알아.”

“잘 상상이 안 가는군요. 한 사람이 그럴 수 있다는 게.”

“소드 마스터들이 그 단적인 예지.”

소드 마스터란 한 국가에 한두 명도 없는 희귀한 존재다.

순백의 성기사는 소드 마스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재목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소질 있는 기사였다.

리처드와 여러 성기사의 협공을 혼자 받아 낸 것도 모자라 피해를 최소화하고 후퇴까지 했다.

둘이 골똘히 대처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돌연 천막 문이 열렸다.

“형님, 요안 님.”

“말론?”

“성자님.”

천막으로 들어온 것은 말론이었다.

갑작스러운 성자의 등장에, 리처드와 요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처드는 한눈에 말론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사명과 책임감으로 표정이 시종일관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굴에도 혈색이 돌았으며 은은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 * *

네르갈의 최고급 여관, 서풍.

귀빈실에는 편지가 말 그대로 산처럼 쌓여 있었다.

단과 마리나는 질렸다는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정말 많이도 왔군요.”

“원래 마이어가로 보내지 않나요?”

“어떻게 여기에 묵고 계시다는 걸 알아낸 모양입니다.”

“하긴, 서풍에만 묵으셨으니까요.”

“리옐 아가씨, 이제 나오시지요.”

편지 봉투 사이로 새싹 하나가 살랑거렸다.

리옐이 편지 봉투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불륜을 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말 불건전하게 들리는군요.”

“도련님이라면 무시하실 거예요. 이리 오세요.”

리옐은 편지지를 뚫고 마리나의 품으로 갔다.

마리나는 익숙하게 리옐을 안아 들었다.

수북하게 쌓인 편지는 대다수가 약혼 제의였다.

지그문트 마이어는 공식적인 약혼자도 아내도 없었다.

그럼에도 외모와 능력 때문에 종종 이런 편지가 오곤 했다.

그런데 레온하트의 수호자라는 것을 밝히자, 몸값이 순식간에 올라간 것이다.

“심지어 이것도 줄어든 겁니다.”

“네? 원래는 더 많았어요?”

“적탑주님께서 다녀가셨습니다. 그때도 이만큼 있었는데, 전부 태워 버리시더군요.”

“근데 또 이만큼 온 거라고요? 하루 사이에?”

“그렇습니다.”

“허어.”

지그문트는 레온하트의 수호자라는 신분으로 꽤 일을 벌였다.

그 업적만 놓고 봐도 영웅이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였다.

물론 그것도 단편전인 부분일 뿐, 실제로 한 일은 두 배가량 많았다.

“지금이니까 이 정도지. 곧 트리옌이나 웨스트리아에서도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기가 전부인가요. 돌아다닌 곳이 얼만데. 전국에서 오지 않을까 예측해요.”

“엄마…… 라이벌이 너무 많아…….”

리옐이 이상한 걱정을 하는 동안, 단은 익숙한 듯 아공간 주머니를 열었다.

마리나가 척척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번엔 어디일까요?”

“교국으로 가실 거라 귀띔해 주셨습니다.”

“저희 도련님 참 가만히 못 계세요.”

“아무래도 직접 해야 성질이 풀리는 분이시니까요.”

둘은 지그문트가 오래 레온하트 왕국에 머무르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 이런 귀찮은 일을 만들어 놓고 가만히 있을 성향은 더욱 아니었다.

다만 의아했던 건, 리에이트 교국이 한창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라는 것이다.

“한 달 내로 전쟁이 벌어진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한 달 내로 용무를 끝마치고 오신다는 거겠지요.”

“내전 일로 가는 건데, 전쟁이 그렇게 금방 끝나는 거였던가.”

“지금 도련님이라면 가능하실지도 모릅니다.”

단은 언젠가 질문한 적 있다.

시노드 교구에서 출현했던 준귀족급 마족, 몰렉과 다시 승부하면 어떻게 되냐고.

지그문트 마이어는 자기객관화가 지나치게 잘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상대와 자신이 겨루면 승률을 정확하게 계산해 내곤 했다.

여태까지는 고블린과 드래곤 정도가 아니라면, 대부분 99%를 넘는 경우는 없었다.

1%의 변수는 언제든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100퍼센트. 전과 같은 상황이라면 일방적으로 때려잡을 수 있어.

몰렉은 이미 지그문트의 상대가 아니었다.

설령 부패한 성배의 힘을 빌어 완전히 현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단은 교구 전체를 뒤덮었던 마족을 떠올렸다.

‘내가 그것을 잡을 수 있을까.’

턱도 없다.

버티는 것이라면 모를까, 결코 치명상에 이르는 공격까지는 불가능하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사용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워지기는커녕, 까마득한 곳으로 가셨구나.’

검 몇 번 휘둘렀다고 팔을 덜덜 떨던 지그문트는 이미 없었다.

옆에 서는 것도 이제는 불가능했다.

하다못해 뒤에 서서 조금이나마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족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했다.

“아빠가 괜한 걱정하지 말랬는데.”

이미 단과 마리나는 전쟁에서도 활약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

에노드 방어전에서 보였던 활약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둘의 옆에 있는 건 지그문트 마이어.

양쪽 모두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도련님께선 어디 계신가요?”

* * *

“오랜만이야.”

“오랜만입니다. 지그문트 님.”

밤말을 듣는 쥐는 내가 건넨 악수를 기꺼이 받았다.

옆에는 롭이 있었는데, 암국의 규율을 생각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암국의 인물이 아니라면, 절대 제 옆을 내어주는 경우가 없을 테니.

롭이 꽤 적절한 타이밍에 쥐와 조우한 모양이었다.

“롭, 너도.”

“주군. 1호는, 어떻습니까?”

“아공간에서 꿈틀대는 중이지. 조금 위험하니까,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자리를, 피해 드릴까요?”

“서풍이라는 여관 최상층에 리옐이 있다. 얼굴이나 보고 와.”

복리후생에 익숙해졌는지, 롭은 별말 없이 모습을 감췄다.

단과도 안면식이 있으니, 아마 경계를 사진 않을 것이다.

몬스터인 만큼 레온하트 한복판에서 모습을 보이면 곤란하겠지만.

운 없게 레드라인 후작과 길바닥에서 만나는 게 아니라면, 들키지 않을 것이다.

“재밌는 수하를 두셨군요.”

“그렇지? 암살자로서 어떤가?”

“지부장급입니다. 그것도 상당히 경험이 많은 전투형.”

“이것저것 했으니까.”

밤말을 듣는 쥐에게 있어서는 극찬이었다.

암국은 다른 암살자들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특히 몬스터, 그것도 고블린인 롭인 것을 감안한다면 거의 찬사에 가까웠다.

“두 번이나 제 목숨을 살려 주시는군요.”

“그럼 은혜 좀 갚으라 이 말이다.”

“열심히 제국 견제 중입니다만. 끌끌.”

“개뿔. 그건 암국의 은원이잖아.”

원래 농담은커녕 경계하는 모습만 가득했는데, 이 정도면 꽤 친해진 모양이었다.

암살자와 친해진다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만.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는 프로니까.

“그래서, 저를 부르셨다는 건.”

“재밌는 정보가 있는데, 금액만 맞으면 제공할까 해서.”

“그거참.”

세상의 모든 정보를 지니고 있다는 암국에 정보 제공이라니, 암국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코웃음을 칠 일이지만, 나는 이미 암국에게 ‘암국이 모르는 정보’를 몇 번 제공한 적이 있었다.

“흥미롭군요. 무엇입니까?”

“잘 들어. 앞으로 며칠 내에…….”

* * *

흔히 천사라고 알려진 천족과, 악마라고 알려진 마족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서로 상극에 해당하는 신을 모시고 있었기에, 태생적으로 서로를 경멸했다.

그 골은 세계의 상처보다 깊었지만, 천족과 마족은 부딪칠 수 없었다.

리에이트가 천계와 마계를 갈라놓은 탓이었다.

“그거 혹시…….”

“리에이트는 손짓 한 번으로 하늘과 땅을 갈라놓았다. 그 문장이지.”

기어코 두 종족의 갈등을 종식시키는 듯했으나, 문제가 발생했다.

천계와 마계 사이에 예기치 못하게 공간이 생긴 것이다.

그것이 지상이었다.

지상은 두 종족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전장이었다.

신성력이나 마기가 들어차 있지도 않고, 신의 개입 또한 없다.

양측이 신경 쓸 것 없이 전력으로 부딪칠 수 있는, 평등한 조건의 전쟁터.

“2차 성마대전 날 뻔했는데, 다행히 중재 당했어.”

“리에이트가 전쟁을 중지시킨 것입니까?”

“이번엔 마신. 사실 성신과 마신은 썩 사이가 나쁘지 않거든.”

하여 성신과 마신은 일종의 제한을 걸었다.

천계와 마계는 양측 모두 지상에 관여하지 않기로.

전쟁의 중재를 위해서 지상을 일종의 불가침영역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제한에는 문제가 있었다.

“만약 천족이든 마족이든, 한 놈이 지상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처벌할까?”

“그야, 자발적으로 잡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상대 진영이.”

“그러면 또 다른 천족이나 마족이 지상에 들어가는 꼴이잖아. 구실이 될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군요.”

심판자의 역할을 맡는 것은 천족의 편도 마족의 편도 아닌, 제3자여야 한다.

지상에 상주하며 침입자를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

지상에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종족.

드래곤이었다.

“말인즉슨, 드래곤들은 중립. 심판자 역할이라는 거지.”

“어째서 그 오만한 종족이 그런 역할을 수행하기로 한 것인지요?”

“좋은 질문인데. 첫 번째 에인션트 드래곤은 지상을 사랑했거든.”

천계와 마계에 약간의 제한을 추가로 거는 것이 조건이었다.

모든 드래곤은 첫 번째 에인션트 드래곤을 따라 자진하여 규율에 얽매였다.

그 규율은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었으며, 이것을 어긴 드래곤은 자체적으로 처리했다.

대표적인 예가 린시스의 남편이자 벨수스의 아버지인 광룡 카닉스였다.

심판자의 역할을 맡은 드래곤에게는 언제나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규율이 있었다.

“들어선 안 될 비밀을 듣는 기분이군요.”

“이 정도는 괜찮아. 자,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웨스트리아에서 마족군이 침입한 것이지.”

“드래곤이 나섰다고 들었습니다만.”

“아니. 그건 내가 한 거야. 언젠가 드래곤이 나섰겠지만.”

에노드 함락에 시간을 오래 끌면, 드래곤이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현 에인션트 드래곤의 상태가 영 안 좋긴 하지만, 그 정도 마기를 뿌렸으니.

심지어 웨스트리아 왕국은 용의 산맥에서 멀지도 않다.

“마족군은 드래곤이라는 심판자가 도착하면 어떻게 하려 했을까?”

“도주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도주를 전제로 지상에 오는 놈들은 떨거지들이고, 걔네는 군대를 끌고 왔잖아.”

“그 말씀은…….”

“둘 중에 하나겠지.”

나는 두 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본대가 용의 산맥 전체를 상대할 전력이었다. 혹은 드래곤을 억제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

“용의 산맥 전체를 상대할 전력요?”

“드래곤 한두 마리라면 모를까. 아마 후자일 확률이 높지.”

“마족군에게 드래곤을 억제할 방법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마 마족군에게 웨스트리아 함락을 사주한 라그힐……. 황제가 고안했을 확률이 높지.”

밤말을 듣는 쥐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내 말뜻을 대충 알아들은 것이다.

“드래곤의 도움 없이, 제국군과 마족군을 상대해야 할 수도 있다.”

“허, 제국과 마족군이 손을 잡았다면, 정말 대참사가 날 수도 있겠군요.”

“여기서 암국의 역할이 중요해.”

“저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여태까지 서론이었거든. 일단…….”

* * *

이른 새벽.

서풍으로 돌아가자마자, 마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단과 마리나를 볼 수 있었다.

마부는 따로 고용하지 않은 듯했고, 마차는 왕실에서 준비한 고급품이었다.

“리옐은?”

“마차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우리 마차 안 타고 갈 거야. 꺼내 와.”

“네? 그럼 어쩌시려고요? 텔레포트입니까?”

“대규모 텔레포트는 힘들고, 날아가려고.”

마차에 오른 마리나가 잠든 리옐을 안아 들고 내렸다.

단은 그제야 내 옆에 있는 청년을 확인했다.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적탑에서 오신 분이십니까?”

“벨수스. 인사해.”

“안녕하십니까. 벨수스라고 합니다.”

“벨수스……? 혹시, 그 블랙 드래곤?”

“정확해. 기억력 좋은데.”

단은 벨수스를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를 향해 브레스를 쐈던 드래곤이기도 하니까.

벨수스는 간단하게 목례를 해 보였다.

“폐를 끼쳤다고 들었습니다. 제 잘못을 부디 용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똑바로 안 해?”

“살려 주세요. 용서해 주시면 꼭 보답하겠습니다.”

마리나와 단은 서로 마주봤다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벨수스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딱밤 때문에 저러시는 걸까요?”

“대부님의 훈계는 단순한 고통과 조금 다른 영역입니다.”

“말이 많다.”

“시정하겠습니다.”

벨수스는 얌전히 입을 닫았다.

잘못한 일이 있다 보니, 전적으로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리옐을 본 벨수스는 눈썹을 까딱이며 감탄했다.

“세계수의 후계자?”

“내 딸인데.”

“대부님, 저희 어머니와는 한때의 불장난이셨습니까?”

“숨결 시험용으로 드래곤 브레스 마주 쏜 걸 그렇게 표현하지 말아 줄래?”

“저는 인간에 대한 편견이 적은 편입니다. 리아나 대부님 같은 예외를 봐 와서.”

“더 지껄이면 피곤해지니까 입 다물어. 30분 동안.”

용서 받았다고 곧바로 까불던 벨수스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름대로 친근감의 표시겠지만, 농담 코드가 나랑은 안 맞는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단이 살짝 손을 들었다.

“저, 도련님.”

“왜?”

“혹시 이번에도 텔레포트로 갑니까?”

“아니. 이거 타고 갈 건데?”

* * *

아르티나 교구.

순백의 성기사는 아르티나의 주교와 독대하고 있었다.

클레이먼과 반대로 깡마른 몸과 공포에 질린 눈을 가진 노인이었다.

아르티나 주교는 왕좌와 같은 화려한 의자에 앉아 몸을 한껏 움츠렸다.

“그놈들이 또 쳐들어오면 어쩔 거냔 말이야!”

“걱정 마십시오, 주교님. 제가 막아설 것입니다.”

“후퇴한 주제에! 도망친 주제에! 이 패배자가!”

순백의 성기사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르티나 교구뿐만이 아니라, 리에이트 내의 교구 대부분은 이런 상황이었다.

주교라는 직책을 맡은 인물은 사제도 아니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발탁됐다.

대사제는 리에이트의 뜻이라고 했으나, 순백의 성기사는 혼란스러웠다.

‘정녕 리에이트께서 이자를 주교로 세우라 했단 말인가.’

문득 리처드와 성기사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속고 있는 것은 순백의 성기사 본인일지도 모른다.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문 순백은 그것을 부정했다.

‘대사제님의 말씀은 곧 리에이트 님의 말씀. 이를 의심하는 것은 이단의 마음가짐이다.’

순백의 성기사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스스로 흔들리는 것은 상대, 성자를 표방하고 있는 악마가 바라는 바였다.

흔들리는 호흡을 가까스로 가다듬었다.

그동안 아르티나 주교는 온갖 물건들을 순백의 성기사에게 집어 던졌다.

마구잡이로 던진 물건들은 대부분 갑옷에 튕겨 나갔다.

촛대 하나가 헬름을 벗은 머리에 직격했다.

퍽!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순백의 성기사가 시선을 들었다.

아르티나 주교는 발작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꺼져! 죽여야 할 것은 적이다! 마귀 휘하에 있는 놈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말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순백의 성기사는 순순히 주교 앞에서 물러났다.

한 번 고개를 내민 의심의 새싹은, 좀처럼 부러지지 않았다.

* * *

아르티나 교구, 동문.

리처드와 요안은 다시 한번 전장에 섰다.

둘뿐만 아니라, 성자 말론 휘하에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이 동문에 집결했다.

당연하게도, 순백의 성기사가 그들을 막아섰다.

교리에 의해 의도적인 살인이 일어나지 않는, 모의전 형식을 띠는 전쟁.

그러나 그 무게만큼은 진짜 전쟁과 같았다.

요안이 앞으로 나섰다.

“마지막으로 제안하겠네. 항복할 생각 없는가?”

“아르티나 교구를 지키는 것이 대사제님께서 내려 주신 내 임무. 나는 수행할 뿐이다.”

“말이 안 통하는군. 자네의 우직함은 좋아한다만.”

“요안, 마귀를 베는 검을 어찌 신에게 향하는가.”

요안은 강하다.

집행자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마족의 머리를 베는 역할을 맡은 고위 집행자.

상황 판단은 냉철하고, 검은 날카로우며, 의지는 굳건하다.

하지만, 기사로서의 역량은 순백의 성기사가 한 수 위였다.

“자네는 강하네. 하여 힘을 조절할 자신이 없어. 어느 한 쪽이 죽을 수도 있네.”

“리에이트께서 곁에 있는데 죽음이 두려울 리가.”

“친우를 베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쩔 수 없는가.”

두 성기사가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눴다.

그와 동시에, 각 성기사의 뒤에 있던 병사들이 무기를 들었다.

집행자와 순백이 부딪치는 것이 전투의 효시였다.

긴장이 이어지고 있는 순간.

“어?”

아르티나 교구 측 성기사 하나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시선은 먼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기사가 그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쿠구구구구……!

심상치 않은 떨림에, 전쟁을 앞두고 있던 이들이 하나둘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먼 동쪽 하늘, 그러니까 요안의 후방 하늘에서 무언가 급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리처드에 이어 대치하고 있던 순백의 성기사마저 그것을 멍하니 쳐다봤다.

요안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리고 그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드래곤?”

빠른 속도로 전장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건, 밤하늘처럼 새까만 색의 드래곤.

거리가 멀어 검은 점과 같이 보이던 몸체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콰아아아아아!

단순히 머리 위를 날았을 뿐인데, 압도적인 강풍에 병사들이 넘어졌다.

요안과 순백의 성기사는 버텼지만,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드래곤 피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 크기와 존재감에 압도된 것이다.

쿵.

블랙 드래곤, 벨수스가 전장 중앙에 착지했다.

머리를 아래로 내리자, 그 위에 타고 있던 사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요안도 리처드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금발에,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검은 로브를 두른 청년.

지그문트 마이어가 벨수스의 머리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불현 듯 요안과 리처드의 머릿속에, 말론이 전한 신탁이 떠올랐다.

-황금색의 보물 고블린이 알아서 굴러 들어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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