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지그문트 마이어
레온하트 왕국.
이안은 로안 아카데미에 발을 들였다.
어쩐지 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는, 늠름한 델 로안의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돌연 행선지를 레온하트 왕국으로 잡은 무연과 함께 웨스트리아를 떠나려 했다.
그런데 돌연 텔레포트를 통해 등장한 발레리아가 그들을 붙잡았다.
-너희 어디 가니? 레온하트? 내가 보내 줄게.
그리고 대뜸 둘을 레온하트 왕국으로 보내 버렸다.
애초에 행선지가 레온하트 왕국이었기에, 기간이 단축되었을 뿐이지만.
텔레포트를 처음 겪는 무연으로서는 조금 얼떨떨했던 모양이다.
무연은 용병 길드로 갔으며, 이안은 발레리아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아카데미로 왔다.
간단한 일이었는데, 어떤 선생에게 깜빡한 서류를 전하라는 것이었다.
“어머, 이안 선배님?”
“아, 오랜만이야.”
이안은 아카데미에서 꽤 유명했다.
역서클이라는, 서클이 거꾸로 형성된 특이 케이스.
이론만 괜찮은 열등생이었으나 지그문트의 가르침을 받고 단숨에 치고 올라온 케이스다.
학생 신분으로 적탑 수습 마법사의 자리에 올랐다.
조기 졸업 후, 대뜸 적탑주의 직속 명령까지 받았으니 유명할 만도 했다.
애초에 성품도 좋기도 했고.
“누구신데?”
“왜, 가면의 마법 연구회.”
“아.”
유명해진 계기는 단연 가면의 마법 연구회의 업적 때문이었다.
지그문트의 특강을 들은 100인가량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연구회.
1, 2 서클의 마법사들이 많은 아카데미 내에서도 단연 고서클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학생들 수준이었기에 기껏해야 3서클에 그쳤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3서클 마법사는 마탑의 수습 마법사의 평균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저도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괜찮지만, 잠깐 일이 있어서.”
“일요?”
“벨수스라는 분이 어디 계신지 알고 있니?”
“어? 벨수스 강사님 아세요?”
“모르는데. 일 때문에.”
애초에 이안은 로안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 벨수스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 없다.
즉 초청 강사나 새롭게 들어온 인물이라는 뜻인데.
적어도 적탑 소속의 마법사가 아카데미로 영입된 케이스는 아니었다.
“저기 계셔요.”
“어디?”
“저기, 조각상 위에요.”
이안은 손으로 태양을 가리며 조각상 위를 올려다봤다.
반짝이는 태양 아래, 한 인물이 조각상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멋들어진 인상의 미남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열중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로브 차림이었다.
“휴.”
한숨을 내쉰 벨수스는 팔뚝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슥 훔쳤다.
아래에서 구경하던 여학생들이 자지러지는 함성을 질렀다.
돈 깨나 있는 귀족가 출신들은 기록구를 들고 촬영까지 하고 있었다.
이안은 주춤주춤 그에게 다가갔다.
“벨수스 님 되십니까?”
“누구냐?”
“학원장님이 전달하라고 하신 서류를 가지고 왔습니다!”
“리아가? 잠깐만 기다려.”
벨수스는 델 로안의 조각상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페더 폴(Feather Fall) 같은 마법을 쓴 기색은 없었는데, 사뿐하게 착지한다.
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넘기는데, 한두 번 해 본 허세가 아닌 것 같았다.
문제는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은 아주 환장을 하고 있었다는 것.
‘뭐지. 이 사람은……?’
이안은 얼떨떨하게 서류를 들고 기다렸다.
한 여학생이 벨수스에게 달라붙었다.
“선생님, 좋아해요. 저랑…….”
“쉿, 잠깐 기다리렴. 아기 고양이. 얘기 중이잖니.”
“어흑!”
벨수스는 아주 능숙하게 여학생을 떼어 내고, 이안에게 다가갔다.
정중하게 인사를 했는데, 팔베르크 제국식 예법인 듯했다.
그리고 살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벨수스라고 한다. 반갑다.”
“이안입니다. 반갑습니다.”
“이게…… 학원장님께서 보냈다는 그건가?”
“아, 예. 여기 있습니다.”
벨수스는 유려한 손놀림으로 이안에게서 서류를 가져갔다.
아주 허세가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고 서류를 읽던 벨수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벨수스 선생님?”
“올 것이 왔구나.”
“서, 설마 잘리시는 건 아니죠?”
“무얼. 때가 된 것이지.”
“안 돼요! 선생님 없으면 저희 벨사모는 어떻게 살라고!”
“급하게 갈 곳이 생겼다. 다음에 보자꾸나. 아기 고양이들. 아디다디도디스.”
“선생니이이이임!”
* * *
벨수스는 로안 아카데미 복도를 걸었다.
거의 안면식만 있던 한 마법사와 문득 눈이 마주쳤다.
풍채가 좋은 50대 후반의 여자 마법사였다.
푸근한 인상으로 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많은 선생이기도 했다.
“어머, 벨수스 선생님. 어디 가세요?”
“아, 레이디. 잠시 학원장님의 호출이 있으셔서 말입니다.”
“호호호, 말뿐이라도 고맙네요. 레이디라니.”
“아름다운 레이디십니다. 정말요.”
벨수스는 실제로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드래곤은 대체로 미형인 만큼, 외적인 요소는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대상의 속내를 중요시 여기는데, 그런 면에서 벨수스에게 아름다움은 조금 달랐다.
“어머머, 왜 인기가 많으신지 알겠네요.”
“곤란할 따름이지요.”
“따로 마음에 두고 있으신 분이라도?”
“마음 같지 않더라고요.”
“이런 멋진 분을 두고, 복에 겨우신 분이네요.”
벨수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한 편의 그림 같아, 선생은 눈을 깜빡였다.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제가 너무 오래 잡아 뒀네요.”
“아닙니다. 또 뵙겠습니다, 레이디.”
선생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벨수스는 원장실로 향했다.
문 앞에 섰을 때부터, 알 수 있었다.
여기를 넘어가면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후우, 하아. 용생 참.”
심호흡을 한 벨수스가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었다.
동시에, 익숙하다면 아주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발레리아 로안이 벽 한쪽에 붙어 손을 들고 서 있었다.
벨수스를 발견한 발레리아가 알은체했다.
“아, 야. 너.”
“씁.”
원장의 자리에서 들려온 소리에, 발레리아는 입을 닫았다.
벨수스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앞으로 걸어갔다.
“서.”
“넵.”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예.”
“읊어 봐라.”
목소리는 달랐으나, 분명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델 로안이었다.
벨수스는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감히 대부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드래곤 브레스를 뿜었습니다.”
“대부는 누가 대부야. 숨질래?”
벨수스는 차마 말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드래곤인 만큼, 비록 외관은 달라졌을지언정 그것이 델 로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델 로안은 벨수스에게 있어서 대부이자, 스승이자 은인이었다.
또한, 어렸을 적부터 린시스는 벨수스에게 확실히 교육한 바 있다.
‘아군으로 두면 성신, 적군으로 두면 마신.’
냉정한 성격으로 보이는 델 로안이지만, 의외로 의리를 챙기는 편이다.
실제로 세계수나 린시스는 그에게 호의를 베풀고 수십 배를 돌려받았다고 한다.
팔베르크 제국을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라그힐. 그 미친 새끼가 진짜 돌았지.’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라그힐 팔베르크가 뒤통수를 쳤다고 한다.
가볍게 넘어갈 수준이 아니라, 아예 죽였단다.
근데 또 무서운 것은 델 로안이 죽음을 초월하고 되살아나 버렸다는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모든 힘을 잃긴 했으나.
‘이게 잃으신 거라고? 미친 거 아니야?’
무심코 학생들에게 배운 속어까지 나올 정도로, 지그문트는 괴랄한 상태였다.
지그문트가 힘을 숨기지 않았기에, 벨수스는 그 힘들을 거의 느낄 수 있었다.
일곱 개의 마나 서클, 소드 마스터급의 오러.
그리고, 신성.
‘난 뒈졌다.’
린시스는 가끔 말했다.
마법의 신이 있다면 델 로안이 될 거라고.
물론 술에 취해 한 우스갯소리였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아주 틀린 소리도 아니었다.
비론 완전하지는 못하다고는 하나, 진짜 신이 되어 버렸으니.
‘전성기 때보다야 한참 모자라긴 하시다만.’
절대 싸워서 이길 수준은 아니었다.
애초에 델 로안의 가장 두려운 점은 힘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마나 컨트롤 능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두뇌.
꼼수를 써서 죽음을 초월할 정도로, 델 로안의 방식은 기상천외했다.
힘의 총량 자체는 현재 벨수스의 전력과 엇비슷한 수준이지만, 싸운다면 절대 못 이긴다.
“왜 말이 없어. 그게 다야?”
“멍청하게 팔베르크 제국에서 페러시트를 묻히고 와선 의식을 지배당한 것도 모자라 주무시고 계신 어머님께 폐를 끼치고 대부님의 길을 방해하여 직접 원상태로 돌려놓는 수고로움까지 들게 하는 용의 산맥 태동할 만한 잘못에 몸 둘 바를 모르겠으니 그냥 빨리 끝내 주시면 안 될까요.”
“또?”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여 용의 산맥이 괘씸한 라그힐 팔베르크가 지배하고 있는 팔베르크 제국을 초토화시킬 근거를 제공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하나 더 있잖아.”
인간의 몸에서 이렇게 땀이 많이 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벨수스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침묵했다.
고개 숙인 채 눈동자가 쉴 새 없이 굴러갔다.
결국 체념한 벨수스는 고개를 들었다.
“……뭐죠?”
동시에, 뒤통수에서 강렬한 통증이 일었다.
아무리 폴리모프 했다지만, 벨수스는 드래곤이다.
인간이 맨손으로 한 공격은 추호도 아프게 느껴지지 않아야 정상인데, 발레리아의 드롭킥 때처럼, 더럽게 강렬한 고통이 엄습해 왔다.
쾅!
벨수스는 지면과 아주 진한 키스를 나눠야 했다.
순간적으로 날아갈 뻔했던 의식이 되돌아왔다.
고개를 든 벨수스는 지그문트 마이어를 올려다봤다.
폴리모프한 골드 드래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미형에 가까운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특유의 양아치스러움으로, 델 로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기 고양이, 레이디 이 지랄.”
“아.”
“후딱 튀어와야지. 유희에 빠져선.”
“저 그래도, 속죄한다고 대부님 조각상도 닦고 있었는데.”
발레리아가 조금이라도 속죄하라고 시킨 일이었다.
벨수스는 정말 마법 한 번 안 쓰고 손수 조각상을 닦았다.
동시에 적탑과 아카데미에 녹아들면서 말이다.
“큭큭.”
“넌 제대로 안 서?”
“저, 근데 스승님. 저는 무슨 죈가요?”
“멋대로 속죄시킨 죄.”
“억울하다…….”
지그문트는 손가락을 까딱이자, 벨수스는 허겁지겁 일어났다.
헬파이어로 지진 철판 위에서 절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지그문트의 눈치를 보던 발레리아가 벨수스에게 윙크 했다.
‘아, 속죄 때문에?’
예의 조각상을 닦게 시킨 일 때문에 넘어갈 요량인 것 같았다.
벨수스는 발레리아에게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감사를 느꼈다.
그에게 제대로 벌을 받느니, 단순 노동이 수억 배 나았다.
“그래서, 린시스가 뭐라고 전하라고 했다고?”
“네. 팔베르크 제국 감시 기간이 곧 끝난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남았는데.”
지그문트는 교묘하게 상황을 이용해서, 용의 산맥이 제국을 감시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팔베르크 제국이 함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없게 됐다.
반대로 말하면, 감시가 풀리자마자 제국은 전쟁에 돌입할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벨수스는 머뭇거리다가, 토해 내듯이 말했다.
“한 달입니다.”
* * *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요하네스.”
“그럼. 좋고말고.”
레드라인 후작은 옅은 웃음을 띠며 잔을 기울였다.
긴 여행을 떠났던 아들, 파울 레드라인이 돌아왔다.
여행을 떠나기 전과 비교해 보면, 말이 되나 싶을 정도로 성장했다.
검술적인 측면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확실히 성숙해졌다.
술만 보면 군침을 흘리는 건 여전했으나, 그것보다 힘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해졌다.
‘지그문트에게 탄력을 받았겠지.’
지그문트 마이어라는 존재가 파울에게는 크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다고, 지그문트의 성장 속도는 파울을 크게 웃돌았다.
천재성만 믿고 망나니처럼 살던 파울은 노력한 지그문트에게 크게 데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큰 충격과 자극을 받고 손에서 검을 놓지 않게 되었다.
“내 아들은 날 꼭 닮았어. 자네 아들이 자네를 닮은 것처럼.”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은 라스 마이어였다.
라스는 부쩍 네르갈로 올라와 머무는 기간이 길어졌다.
엘비아와의 협정 당시, 중앙 귀족들은 라스 마이어를 네르갈로 끌어들였다.
발단은 그의 아들이자 요정족의 은인이기도 한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라스를 통해 지그문트의 의견을 조종해, 유리하게 협정을 이끌 계획이었다.
하지만 라스는 중앙 귀족들의 권유를 거부하고, 지그문트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거절했다.
“난 방임주의다.”
“으하하하! 그래. 자네가 그 말을 했을 때 그것들 얼굴을 봤어야 하는데.”
“엘비아 때 말인가?”
“그래. 흐흐. 좀 더 적당한 이야기를 내놓지 그랬나.”
“굳이.”
“하긴, 평생 검만 잡은 사람인데. 덕분에 저도 모르게 맥이긴 했다만.”
요하네스의 눈이 벽면에 전시된 검으로 향했다.
검귀라 불리던 시절, 라스가 사용하던 검이었다.
비록 지금은 검을 놓고, 요하네스에게 맡기긴 했으나.
“미련 좀 버리지 그래.”
“자네 사정은 안다만은, 불패의 기사께 제자로 들어오라는 소리까지 들었지 않은가.”
“그게 아니라, 자네가 대련에서 한 번도 나를 이기지 못 했으니 아쉬웠던 거겠지.”
“뭐?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이겼거든?”
“그래. 마지막 대련은 내가 져 줬던 것 같기도 하고.”
“져 주긴. 에라, 이 사람.”
요하네스의 안색이 밝아졌다.
도통 농담은커녕 말수도 상당히 줄어든 라스였다.
항상 걱정을 했는데, 지그문트가 화제로 나올 때면 미미하게 밝아지는 경향이 있었다.
“예의 식객은?”
“벨수스 말인가? 생각보다 잘 지낸다네.”
“성이 없는 걸 보면, 평민 출신인가?”
“아니. 생긴 걸로 보나 예법으로 보나 귀족일 터. 다만, 출신지는 모르겠군.”
“마법사가 왜 신세를 지는지.”
“사정이 있겠지. 뭔들 어떤가! 아들이 데려온 두 번째 친군데!”
호탕한 레드라인 후작과, 유쾌하기 그지없는 시종들이다.
벨수스는 이에 감화된 면이 많았다.
드래곤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연기적인 측면이 강했다고는 하나, 본성 자체가 그리 진지하지 않은 성격인 것도 있었다.
“자네 아들은 뭐 하나?”
“나는 방임주의라니까.”
“저번에 영지 내려왔다며. 엇갈려서 만나지 못했다고 아쉬워 해 놓고는.”
“내가 언제. 손녀딸을 보지 못한 것은 좀 걸린다만.”
“리옐 그 아이는 지나치게 귀엽긴 하더군. 며늘아기는?”
“손녀 말로는 있는 것 같더군. 어디 꽁꽁 숨겨 논 모양이지만.”
“허, 고 놈 능력도 좋아. 하긴 인물이 잘났으니…….”
후작은 지그문트의 아내가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유추하고 있었다.
거하게 헛다리짚은 것이었지만, 레드라인 후작 입장에서는 오해할 만도 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로 활동하는 지그문트는 발레리아와 친밀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나이 차이야 있다만은.’
발레리아가 워낙 어리게 보여서 그렇지, 실제로는 20대 후반이다.
이제 스무 살이 된 지그문트와는 꽤 차이가 있긴 했다.
문제는 요하네스가 상당히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뭐, 그 정도라면 문제가 없을지도.’
오히려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닐 수 없었다.
발레리아 로안도 지그문트 못지않은, 희대의 천재인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딸이 있었다면 열심히 라스를 설득해 봤겠지만.
‘어떻게든 손자와 정략 결혼시키는 수밖에.’
요하네스는 있지도 않은 파울의 아들과 리옐을 엮을 계획을 세웠다.
지그문트가 들었다면 결투 신청을 했을 소리지만, 요하네스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라스와 사돈 관계가 되면서, 지그문트와 발레리아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것이다.
미래를 상상한 요하네스는 흡족한 웃음을 머금었다.
“요하네스.”
“흠?”
“저거. 왜 저러나?”
창문을 빤히 바라보는 라스에, 요하네스가 눈을 돌렸다.
파울 레드라인이 비장한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 * *
레드라인 저택 정문.
경비병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무기를 고쳐 잡았다.
레온하트 왕국의 수도, 네르갈에 위치한 만큼 저택 앞에는 사람이 꽤 돌아다닌다.
애초에 레온하트에서, 레드라인 후작을 건드릴 만큼 간 큰 놈은 없다.
후작이 자리를 비울 때도 있으나,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경비병은 사실상 문지기에 가까웠다.
‘그래도 일은 일이니까.’
그때였다.
멀리서 세 명의 인물이 곧장 저택을 향해 접근했다.
선두에 선 금발의 청년은 분명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지그문트를 호위하듯 양옆에 선 남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나는, 붉은 로브를 깊게 눌러쓴 적탑주, 발레리아 로안.
다른 하나는.
‘벨수스……?’
레드라인가의 식객이자 적탑의 마법사이기도 한, 벨수스였다.
손수건으로 코를 잡고 있었는데, 코피라도 난 모양이었다.
‘어, 어어? 뭐야? 저 셋이 왜 같이 와?’
지그문트 일행이 걸어왔다.
최연소 탑주와, 폴리모프한 드래곤.
거기에 전직 대마법사에, 현직 반신 겸 소드 마스터 겸 탑주급 마법사까지 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압박감에, 경비병이 몸을 움츠렸다.
* * *
“산맥의 규율에 어긋나진 않는 건가?”
“저야 대부님께 빚을 졌으니까요.”
“그래? 아, 나 딸 생겼다.”
“얘 말고요?”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레드라인가 저택의 복도를 걸었다.
허락 받을 필요도 없었던 것이, 레드라인 후작이 우리에게는 정문을 열어 두라고 했단다.
발레리아야 워낙 믿음직했고, 벨수스도 성격상 잘 어울렸다고 하니.
호탕한 성격의 요하네스 레드라인다웠다.
응접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파울 레드라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 지그문트 마이어.”
“어허.”
“씁.”
내게 뭐라 말하기도 전에, 벨수스와 발레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으르렁거리던 파울은 움찔 뒤로 물러나며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야 아무리 파울이 나이대 치고 강하더라도, 탑주와 드래곤이다.
상대는커녕 말 그대로 삭제될 가능성이 높았다.
“괜찮아. 뭔데?”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고 있나? 연무장으로 따라와라.”
“해치울까요?”
“아니. 뭐, 얼마나 걸린다고.”
파울 레드라인은 괜히 천재가 아니었다.
비록 내 육성 코스를 밟았다고는 하나, 믿기 어려운 속도로 성장했다.
아마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완벽히 활용한 단과 엇비슷할 것이다.
물론 지금 내 상대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소드 마스터보단 무조건 위인 상태니.’
순수하게 검과 오러만 사용한다면 레드라인 후작에게 밀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지닌 힘은 검과 오러가 끝이 아니었다.
일곱 개의 서클로 마나 번(Mana Burn) 출력만 높여도, 소드 마스터 수준은 웃돈다.
반신화에 아우나,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으니까.
힘의 단계가 전체적으로 하나씩만 올라도, 체감이 상당하다.
‘전성기보다는 못하다만.’
이 정도면 그래도 반 정도는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생전 안 쓰던 아티팩트까지 전부 되찾았으니까.
그렇다고는 하나, 아티팩트나 마나를 쓸 생각은 없다.
파울은 검으로 충분했다.
잠깐 기강 다지고 가려는데, 복도 끝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지그문트.”
“오랜만에 뵙습니다. 레드라인 후작님.”
“벨수스에, 적탑주님까지 계시는군.”
파울 레드라인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영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물러서, 인사를 했다.
“아버지, 무슨 일이십니까?”
“귀한 손님이 왔는데, 다짜고짜 결투 신청부터 하면 되겠느냐.”
“……시정하겠습니다.”
“물러가거라.”
허무하게도, 파울의 복수전은 불발로 끝났다.
파울은 이를 갈며 뒤로 물러났다.
요하네스 뒤로 라스 마이어가 보였다.
“왔으면 말이라도 해 주지 그랬느냐.”
“어디 계신 줄 알고요.”
“리옐은?”
“서풍에 있습니다.”
“다녀오마.”
라스는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택 밖을 향해 걸어가 버렸다.
뒤에 있던 시녀, 힐데가 허둥지둥 그 뒤를 따르며 꾸벅 인사를 건넸다.
발레리아와 벨수스는 조금 아쉽다는 눈치였다.
요하네스는 어이없다는 듯 라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런 친구가 아닌데.”
“제 딸이 좀 귀엽긴 합니다.”
“그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네만, 여기서 이야기할 게 아니군. 식사는 했나?”
“오기 전에 마쳤습니다.”
“그럼 응접실로 가지.”
레드라인 후작은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발레리아와 벨수스는 당연하다는 듯 동행했다.
내가 발레리아와 함께 왔으면, 수호자로서 왔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레드라인 후작은 벨수스가 동행하는 것이 조금 의아한 눈치였지만, 말리진 않았다.
“자, 앉게.”
응접실.
잠깐 담소를 나누고 있으니 시녀가 차를 내왔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어찌 만난 겐가?”
“누구 말입니까?”
“무연 말일세. 어제 찾아왔거든.”
“아, 우연히 만났습니다.”
“세상에 우연이 어딨나. 전부 필연인 것을.”
“그렇습니까?”
“내가 예전에 자네에게 줬던 내단도 그자에게 받은 것이니.”
“그렇군요. 대략 예상했습니다.”
레드라인 후작이 만났다는 동대륙의 검사는 무연이었던 모양이다.
시기적으로 대충 맞아떨어져서 유추하고 있던 사실이다.
이안을 만났다는 건, 무연이 레온하트 왕국을 거쳐 갔다는 거니까.
“그래서, 무슨 일인가?”
“서론은 줄이겠습니다. 팔베르크 제국이 정복 전쟁을 시작할 겁니다. 그를 대비하여 연합을 조직해 뒀습니다. 레온하트를 중심으로, 웨스트리아, 엘비아, 트리옌까지. 아직 퀸틴과 리에이트 교국은 확답이 없지만 조력 정도는 얻어 낼 수 있을 겁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시던 레드라인 후작은 입을 벌린 채 굳었다.
입에 머금었던 차가 주르륵 찻잔 안에 떨어졌다.
딸의 출생에 엮인 비밀을 듣기라도 한 듯한 반응이었다.
“전쟁까지 한 달 남았습니다. 이 사실을 공표할 생각입니다.”
“잠깐……. 기다리게. 내 머리로도 다 못 따라가겠는데. 이 사실을 공표하겠다고?”
“예.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준비를 해야만 할 시기입니다.”
“신뢰성은? 나야 자네를 믿지만, 중앙 귀족들이 그 말을 믿겠는가?”
“방법이 있습니다.”
레드라인 후작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 * *
어두운 밤, 팔베르크 제국 서부, 봉토(封土) 리헨.
웨스트리아 왕국과의 대치 상황에서, 서부 끝자락에 위치한 리헨은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용의 감시하에 발목이 묶여 있는 병력은 대부분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상태였다.
프라우드의 광룡이 직접적인 경고를 함으로, 사실상 전쟁은 소강상태에 가까웠다.
캉!
밤말을 듣는 쥐는 정확히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쳐 낸 뒤, 뒤로 훌쩍 물러났다.
거의 반동을 이용해 튕겨 나간 것과 같았는데, 그만큼 상대는 강했다.
쥐를 상대하고 있는 중년인의 주위에는 한때 부하였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밤말을 듣는 쥐는 중년인을 주시했다.
‘강하다.’
중년인의 정체는 팔베르크 제국의 소드 마스터, 테이럼 변경백이었다.
기습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주는 데 실패했다.
도리어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은 암국 쪽이었다.
밤말을 듣는 쥐와 함께 움직였던 암살자 중 절반가량이 죽었다.
“얼마 전부터 병사들이 의문사하여 이상하게 여겼는데, 쥐새끼가 숨어들었을 줄이야.”
테이럼 변경백은 갑옷으로 무장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업무를 보고 있던 그대로 정장 차림이었고, 가진 것이라곤 주운 검 한 자루뿐이었다.
심지어 암살자들이 사용하는 직검이라 일반적인 롱소드와 규격이 차이 났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는 소드 마스터, 처음 쓰는 무기임에도 능숙하게 적을 베어 죽였다.
“하나, 나를 건드리다니, 정녕 겁을 상실한 것인가?”
실책이었다.
밤말을 듣는 쥐는 치밀한 계산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예상대로였다면, 테이럼 변경백 기습 작전은 성공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테이럼은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침착하게 응수해 왔다.
“질문에 답한다면 자비를 베풀 용의가 있다. 누가 보낸 것이냐?”
밤말을 듣는 쥐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를 죽일 확신은커녕 상처 입힐 자신도 없었다.
그 정도로, 전면전에서 테이럼 변경백과 쥐는 큰 격차가 있었다.
암국 측은 다수의 정예 암살자를 붙였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소드 마스터라는 존재에게 있어서 적의 숫자는 중요치 않았다.
“대답하지 않겠다 이건가. 뭐 좋다.”
테이럼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양 무릎이 살짝 구부러지고, 검 끝이 밤말을 듣는 쥐를 향했다.
오한이 온몸을 뒤덮었다.
한 마리 야수와 같은 눈동자가 빛났다.
이미 부하들은 전부 물리고, 남은 것은 밤말을 듣는 쥐 혼자뿐이었다.
‘죽는다.’
테이럼 변경백은 추적에도 능한 소드 마스터였다.
도망치기에는 거리가 너무 좁았다.
기습을 실패했을 때, 목이 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몸을 던져 쥐를 구한 부하들 덕분에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운도 여기까지였던 모양이었다.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지부장급 암살자 하나만 더 있다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암국의 왕이 돕는다면 전면전에서 처리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리헨에 파견된 것은 밤말을 듣는 쥐와 그 부하들 뿐.
도움을 바랄 수는 없었다.
‘팔 한 짝 정도는 받아 갈 생각으로 임해야겠군.’
그 어떤 사람보다 죽음과 가깝게 지내 왔다.
이제 와서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다.
-가급적 죽지 마라.
임무에 나서기 전, 암국의 왕이 덧붙인 한마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죽음을 불사해야 하는 것이 암살자건만, 암국의 왕은 나지막이 그 한마디를 덧붙였다.
‘송구합니다.’
테이럼 변경백은 눈 깜짝할 새 쥐의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마음속으로 마지막 인사를 마친 밤말을 듣는 쥐는, 자세를 낮췄다.
두 사람의 검이 서로를 찌르기 직전.
팍!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땅을 차고 뒤로 물러났다.
둘 사이를 갈라놓듯, 지면에 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어느 쪽을 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투척술이었다.
튕겨 내려 했다면 서로에게 죽었을 것이다.
‘누구지?’
테이럼 변경백과 밤말을 듣는 쥐는 위를 올려다봤다.
검이 날아오기 전까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상당한 수준의 암살자가 분명했다.
‘저건.’
건물의 지붕 위에 기묘한 자세로 걸터앉아 있는 그림자.
달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헝겊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림자는 가볍게 지붕에서 내려와, 지면에 착지했다.
테이럼 변경백과 밤말을 듣는 쥐는 그림자 쪽을 향해 몸을 약간 틀었다.
기묘한 삼각 구도가 완성됐다.
“밤말을 듣는 쥐, 되십니까?”
다 쉬어 공기가 섞인 듯한 거친 목소리였다.
테이럼 변경백의 눈치를 살핀 밤말을 듣는 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자라면, 적어도 암국과 연관된 인물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모시러 왔습니다. 주군께서, 찾으십니다.”
“주군?”
“팔은 괜찮은지, 안부 전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밤말을 듣는 쥐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마녀가 건 썩은 살갗의 저주로 인해 검게 변했던 팔뚝은 이제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해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마녀의 저주를 간단하게 치료해 준 사람은, 그의 담당 의뢰인.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휘하에 암살자도 두고 있었던 건가?’
그 아래에 뛰어난 기사와, 특이한 시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암살자가 있다는 것은 암국에서도 알아채지 못한 정보였다.
암살자는 건물의 그림자에서 달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밤말을 듣는 쥐였지만, 이번만큼은 놀라 잠깐 주춤했다.
헝겊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주름진 녹색 피부와, 입술 사이로 언뜻 보이는 엄니.
테이럼 변경백이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렸다.
“고블린?”
* * *
레온하트 왕성은 웨스트리아와 관련된 안건으로 한창 떠들썩했다.
루터 레온하트가 귀환하며 가져온 소식은 웨스트리아 왕국의 동맹 제안이었다.
이미 웨스트리아 측의 제안은 끝났고, 남은 것은 레온하트 왕국의 최종 승인이었다.
중앙 귀족들 중 대부분은, 아니 거의 전부는 이에 반발심을 가졌다.
그도 그럴 것이, 웨스트리아 왕국은 팔베르크 제국과 적대 상태였다.
비록 드래곤의 개입으로 팔베르크 제국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고는 하나.
“다른 나라도 아니고, 팔베르크 제국이오! 레온하트 왕국이 뒤집힐 거란 말이오!”
“코스타 공작님 마음은 백 번 이해합니다만, 아직 승인된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를…….”
“이야기를 듣고 말 것도 없소. 얼토당토않는 소리요.”
밀러 자작은 코스타 공작을 만류했지만, 흥분한 코스타 공작은 그 말을 끊어 버렸다.
신분 차이가 너무 컸기에, 밀러 자작은 답답한 얼굴로 입을 닫는 수밖에 없었다.
밀러 자작은 라스와 비슷하게 능력으로 중앙에 진출했으나, 아직 기를 못 펴고 있었다.
“국왕 폐하 들어오십니다!”
화가 가시지 않는지, 열변을 토하려던 코스타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문이 열리고 레온하트 왕국의 국왕, 파서벌 레온하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내에 있던 모든 귀족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고 일어나시오.”
레온하트 대청소 이후로, 확실히 왕권이 강해진 모습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코스타 공작은 흠칫 놀랐다.
파서벌 레온하트의 좌측에 선 레드라인 후작은 그러려니 했다.
국왕의 최측근이자 소드 마스터이기도 한 요하네스 레드라인은 종종 저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의외인 인물도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무도회도 아닌데, 저런 가면을 쓰고 있을 법한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레온하트 대청소 이후로 정계에는 간섭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는데, 어찌 또 중요한 안건이 터지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코스타 공작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적어도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나타나면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대체로 벌어진 일을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수습하는 식이긴 했지만 말이다.
“웨스트리아 왕국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들었을 테고, 짐이 어찌하여 이 일을 추진한 것인지 궁금할 것이오.”
이제 막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루터 레온하트다.
지금 혼자 웨스트리아로 가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감안하면, 필시 국왕의 원조가 있었다.
모습을 보인 걸로 보아, 레온하트의 수호자도 관련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겠소. 레온하트 왕국은 웨스트리아뿐만 아니라 트리옌과의 동맹을 맺어 연합을 구축할 것이오.”
갑작스럽게 터진 폭탄선언에,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엘비아와의 동맹을 맺은 지 얼마나 됐다고, 두 왕국을 더 끌어들인단 말인가.
머리가 빨리 돌아간 밀러 자작을 시작으로, 그 말뜻을 이해한 귀족들이 눈을 크게 떴다.
엘비아까지 포함하여 네 개 국가의 연합이다.
코스타 공작은 수호자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
“말하시오. 코스타 공작.”
“혹, 팔베르크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연합 전선울 구축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코스타 공작은 비록 섣부른 경향이 있더라도, 머리가 꽤 빨리 돌아가는 편이다.
굳건한 레드라인 후작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충신이기도 했다.
국왕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 귀족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잠깐 얼어붙었다.
그리고 혼란이 찾아왔다.
“저, 전쟁?”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전쟁이라니!”
“폐하! 아니 되옵니다!”
“동맹이, 전선을 구축한다는 뜻이었다는 건가.”
파서벌의 눈짓에, 레드라인 후작이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하시오. 어전이오.”
드높은 강자의 말 한마디에, 귀족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여전히 서로 눈치를 보거나 시선을 교환하긴 했지만 말이다.
파서벌의 손짓에,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앞으로 나섰다.
“정해진 수순이었습니다. 일정이 조금 일찍 당겨진 것뿐이지요.”
“무슨 뜻인가?”
“팔베르크 제국은 서대륙 정복 전쟁에 나설 겁니다.”
한 달 후에 팔베르크 제국의 고삐가 풀릴 것이다.
그 사실을 안 지그문트는 더 이상 숨기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한 달은 매우 촉박한 시간이었다.
“건국제와 선언식 때 일어난 사건의 배후에도 제국이 있음이 판명됐습니다.”
“잠깐, 말씀 중에 미안하지만, 한마디만 해도 괜찮겠소?”
“말씀하시지요.”
코스타 공작이 끼어들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기꺼이 이를 용인했다.
“수호자 경께서 충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소. 하나, 전쟁을 종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오.”
“코스타 공작, 망발을 삼가시오.”
“레드라인 후작. 이런 상황에서 확실히 해 둘 수 있는 건 확실히 해 둬야 할 것 아니오.”
수호자는 레드라인 후작에게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코스타 공작님.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혹, 가면을 벗고 정체를 밝혀 주실 수 있겠소?”
분명 이 전선 구축에는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관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 신분을 밝히라고 하는 것도 아주 부당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지 않았다면 수호자 개인이 위험했겠지만.
적어도 코스타 공작에게 있어서는 레온하트 왕국이 먼저였다.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전쟁이라니. 말도 안 된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가면을 벗지 않을 것이다.
코스타 공작은 그것을 빌미로 역설을 펼칠 생각이었다.
웨스트리아가 무너지든 말든, 그에게 중요한 것은 레온하트였다.
하지만,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좋습니다. 그리하지요.”
“그래. 밝힐 수 없겠지. 혹시 걸리는 점이라도……. 뭐?”
“가면을 쓴 자는 믿을 수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주 흔쾌히 받아들인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제 가면 위에 손을 올렸다.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가면을 벗은 지그문트 마이어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레온하트의 수호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