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04/134)

4

검 없는 소드 마스터

며칠 후, 웨스트리아 왕국에서는 합동 장례가 열렸다.

세 자루의 창 작전과 왕국의 방패 중 전사한 이들이 더러 있었다.

전투의 규모를 감안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적은 피해였지만, 기쁜 일은 아니었다.

잠시 묵념한 단은 옆에 있던 지휘관을 흘겨보았다.

세 자루의 창 작전에서 단과 무연이 속했던, 두 번째 창의 지휘관이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지휘관은 큰 부상을 입어,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그래도 그 난장판 속에서 용케 시체를 찾았군요.”

“기이한 일이지. 전장은 거의 초토화됐음에도 불구하고, 시신은 모두 멀쩡했다더군.”

“어찌 그런 일이. 우연입니까?”

“아니. 드래곤의 배려일 것이다. 마나의 축복을 받은 종족이라면,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니.”

단은 그리핀에 거의 실려 가듯 전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얼핏, 지그문트가 전장을 초토화시키는 광경을 목도했다.

고작 한 단계 올랐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한계라고 여겨지는 만큼, 6서클과 7서클의 차이는 천지 차이였다.

애당초 지그문트는 마법을 보조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말이다.

‘정말, 드래곤이라고 믿는구나.’

아무렇지 않게 드래곤 브레스를 사용하는 지그문트다.

하지만 그것은 아티팩트의 힘이었고, 지금의 것은 본인의 마법.

탑주의 힘은 잘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보니 그 강함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걸어 다니는 전쟁 병기, 자연재해 정도로 분류되는 것이 당연했다.

“탑주급 마법사라면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흠, 자네는 마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대단한 마법사님을 한 분 알고 있습니다만.”

“왕실 마법사들이 말하길, 제아무리 탑주라고 한들 이런 일을 벌이는 건 불가능해.”

“그렇습니까?”

“7서클의 고위 마법은 이렇게 남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더군.”

옆에 있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군다나 대규모 공격 마법이 시체가 있는 영역만 피해 가는 건 얼토당토않는 소리입니다. 마법사 수천 명이 달려들어 마나 컨트롤에 집중해도 안 될 겁니다.”

“그건 잘 가늠이 안 가는데.”

“흐음, 기사님들로 따지자면, 과일……. 이를테면 복숭아의 정중앙을 반으로 잘랐다고 칩시다.”

“그건 쉬운 일이잖는가.”

“거기서 중앙에 있는 씨앗만 멀쩡하게 남기는 겁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단과 지휘관은 말을 잃었다.

이안이 얼토당토않는 소리라고 할 만도 했다.

어찌 중간에 있는 씨앗을 자르지 않고, 그 너머를 잘라 낸단 말인가.

이것도 비유일 뿐, 이안도 7서클이 아니기에 두루뭉술하게 설명한 감이 있었다.

그때, 꽃을 바치고 돌아온 무연이 일행에 합류했다.

“괜찮나?”

“고향에서는 추모할 여유도 없었다. 보내 줄 시간을 가진다는 건 좋군.”

“용병은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거나, 넘기는 경향이 있으니.”

“그런 거다. 이런 장례 문화는 생소하다만.”

광장에 세워진 추모비 앞에는 많은 왕국민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미 웨스트리아 왕족들과 귀족들은 다녀간 상태였다.

희생이 있었기에 큰 피해가 없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자는, 적어도 이곳엔 없었다.

“울적하군.”

“약속대로, 술이라도 한잔하시지요.”

“그게 좋겠군.”

* * *

주점.

늦게나마 생환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세 자루의 창 작전의 생존자들이 모였다.

단과 무연, 두 번째 창의 지휘관과 몇몇 기사들이 전부였다.

짧은 애도로 시작한 술자리의 분위기는 머지않아 무르익었다.

드물게 자유 시간을 사적으로 활용한 단은, 이미 꽤 취한 상태였다.

진한 알코올 향을 내뱉은 단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후우, 우리 도련님께서 정말,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잘 알겠다. 그 말만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요. 우리 도련님께서! 세상도 구하고! 다 했다고요!”

“그래. 그래.”

대부분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그 말을 의식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바로 옆에서 묵묵하게 앉아 있는 무연이었다.

헬름을 쓰고 있었기에 애먼 술잔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보니 취하지도 않았고, 좀 더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크하하하! 동화 속에도 안 나올 법한 인물이군!”

“아! 진짜란 말입니다! 근데 아무도 안 알아주고, 제가 속상해서 그럽니다.”

“검을 잡기 무섭게 레드 캡을 사냥하고, 그다음 달에는 워베어를 손으로 때려잡았다고?”

“바아로 그으렇습니다! 대단하지 않으십니까?”

단은 나름대로 지그문트의 업적을 축소했다.

하나하나 열거하면 밤을 지새워도 모자랐기 때문이다.

초반부만 조금 말했을 뿐인데, 기사들은 그마저도 믿지 못했다.

“오러 연공에 걸리는 시간이 몇 년인데.”

“하물며 다른 몬스터도 아니고 워베어잖아. 미숙한 기사들은 그거 못 이긴다고.”

“맞습니다. 아, 이 자식도 옛날에 워베어 토벌 갔다가, 한 방 맞고 세 바퀴 굴러선…….”

“아! 그거 말하지 말랬지!”

“푸하하하하!”

무연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단과 함께 그리핀에 실려 복귀할 때, 그 또한 얼핏 지그문트를 봤다.

신성을 다른 곳에 보냈기에, 그 힘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리옐에게서 느꼈던 신성력과는 조금 다른, 순수한 힘.

무연은 지그문트 마이어에게서 그것을 강하게 느꼈다.

‘모르겠군.’

무연은 한순간이지만 지그문트 마이어야말로 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신성력 특유의 성스러운 감각이 전혀 없었다.

단순히 강한 인간이라기에는 또 지나치게 강했다.

직접 물어볼까 싶었지만, 이미 지그문트는 무연이 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대답을 회피하거나, 아예 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레온하트 왕국이라 했지.’

* * *

그다음 날 아침.

숙취로 고생하던 단이 지그문트의 영약을 먹고 유체 이탈을 경험하고 있을 무렵.

마리나는 바쁘게 리옐의 복장을 점검하고 있었다.

오시아드에서 구매한 어린이용 드레스를 입은 리옐은 고귀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허윽, 사랑스러워라.”

“아빠가 보기에도 그럴까?”

“그럼요. 이 귀여운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다니. 막심한 손해예요.”

“히히, 언니도야!”

“어머, 감사합니다.”

마리나는 평소와 같은 시녀복 차림이었다.

러셀과의 전투에서 여기저기 훼손됐는데, 지그문트가 하루 만에 고쳐 놨다.

못 하는 것이 드문 지그문트라지만, 설마 바느질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충격이었던 점은 시녀인 마리나보다 능숙하게 해냈다는 것이다.

인형이 저주에서 쓰이는 촉매인 만큼, 종종 만들 일이 있었다고 한다.

지그문트가 인식 방해(Disturb Realization)를 부여해 둔 가면을 건넸다.

“자, 여기 가면도 챙겨 두세요.”

“응! 어. 단 아저씨다.”

“으어어어어…….”

마리나는 뒤를 돌아봤다가 흠칫 놀랐다.

자칫하면 반사적으로 저주를 걸 뻔했다.

“깜짝아, 좀비인 줄 알았어요.”

“아안녕하십니까. 리이옐 아가씨, 마아리나.”

“술 냄새! 단 아저씨, 왜 그래?”

“혀어가 조금 마비됐습니다. 바아알음이 잘 안 되는군요.”

몰골은 마리나 말마따나 거의 좀비 상태였지만, 복장 자체는 말끔했다.

왕가 측에서 주문 제작해서 보낸 정장 차림이었는데, 체격이 좋아 잘 어울렸다.

안색이 창백한 것이야 가면으로 가리면 그만이었다.

“기어코 그걸 드셨군요.”

“모오옴에는 좋은 것 같스읍니다만, 부자악용이.”

지그문트의 영약이 다 그렇듯이, 그 맛은 끔찍했다.

단의 표현을 빌리자면, 열에 아홉은 먹고 죽을 맛이라고 한다.

그나마 일시적으로 미각을 마비시키는 독초를 통해 그것을 막은 것이었다.

단은 울상이 되면서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그문트가 손수 준비한 것이기도 했고, 실제로 영약의 효과는 상당히 좋았기 때문이다.

“모두 준비 마치셨습니까?”

“아, 루터 왕자님.”

루터 레온하트도 아공간 주머니에 챙겨 두고 있던 정장 차림이었다.

레온하트 왕가에서 사용하는 것을 그대로 가져왔기에, 단연 눈에 띄었다.

오랜 기간 별궁에서 생활했기에, 도움 없이도 깔끔히 복장을 갖추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지그문트 마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자.”

* * *

마차 안.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싶었다.

최고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푹신한 쿠션에 몸을 묻었다.

옆에는 리옐을 무릎에 앉혀 둔 마리나가, 맞은편에는 말끔한 복장의 루터 레온하트와 단이 있었다.

“저는 평생 이런 마차 탈 일은 없을 줄 알았어요.”

“평생 이런 마차 탈 일 많을 텐데. 적응해.”

어쨌든 에노드는 왕도다.

우리가 머물고 있던 여관도 왕성과 그리 멀진 않았다.

굳이 마차를 탈 만한 거리는 아니었으나, 왕가에서는 화려한 마차를 준비했다.

내 신분과, 루터의 체면 문제도 있으니 배려해 준 것 같았다.

“이번 건 연회보다 회담에 가깝다. 축하연은 취소됐거든.”

“사기 고취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요.”

“이른 경향이 있다는 거지. 우리도 언제까지 웨스트리아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

생각 외의 일이 연달아 벌어지는 바람에,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을 지체했다.

그래도 웨스트리아를 확실히 끌어들인 것은 큰 수확이다.

팔베르크 제국을 견제할 수 있는 요충지에 위치한 것도 사실이고.

레온하트 왕국을 징검다리 삼아, 엘비아와도 연이 생겼다.

세계수의 서쪽 안정화가 한결 편해졌을 것이다.

“웨스트리아에서는 엘레너를 대표로 세웠다지?”

“그렇습니다. 아마 수호자님과의 연도 있고, 이번 전투에서 능력을 증명한 덕분 같군요.”

“생판 모르는 놈보다는 신뢰가 가는군. 좋아. 진행 상황은?”

“밥상을 차려 주신 것도 모자라 떠먹여 주시기까지 하니, 제가 할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루터 레온하트의 표현은 아주 정확했다.

틈으로 들어가 국왕, 볼프강을 구했을 때 이미 국왕의 마음은 샀다.

내 전력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당연히 마음이 갔을 것이다.

그 이후로 전장에 나온 것도 유효했다.

‘일부러 퍼포먼스를 벌인 보람이 있군.’

원래는 마족군을 빨리 치워 버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연합에 웨스트리아가 들어온다면, 곧 우리 쪽 전력이 손실을 입는 셈이니.

어쩌다 보니, 퍼포먼스로 추후에 나올 온건파 귀족들의 반대를 미리 묵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웨스트리아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나선 감이 있었다.

“남동부 국경에 포진된 병력이 있었다면 피해가 감소됐을 텐데.”

“웨스트리아의 소드 마스터도 거기에 계시지요? 어떤 분이십니까?”

“왜 내가 당연히 안다는 듯이 물어보냐?”

루터 레온하트는 흠칫했다.

인상을 찡그리고 살짝 고개를 기울인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왜 알고 계실 것 같지?”

“왕자님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도련님은 뭐든지 알고 계실 것 같죠.”

“아빠 똑똑해!”

기다렸다는 듯 추임새가 달라붙는다.

내가 누차 말했듯이, 나도 모르는 건 있다.

이를테면 오러 같은 건 내게 있어서 미지의 영역이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깨달은 것도 있고, 이론도 연구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모르십니까?”

“알지. 모르기에는 너무 영향력 있는 인물이니.”

“이름과 간단한 이야기 정도는 들었습니다만.”

“좀 특이하지, 방패를 든 소드 마스터는.”

웨스트리아의 소드 마스터, 엘트렛 커큰.

아마 알려진 소드 마스터 중 최고령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전의 전투에서 활약한 왕국의 방패를 이끄는 기사단장을 맡고 있기도 했다.

웨스트리아는 남동부 국경에 배치된 엘트렛만 믿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이 관심을 보였다.

“방패를 든 소드 마스터라면, 검과 방패를 함께 사용하시는 겁니까?”

“아니. 소드 마스터라는 칭호에도 불구하고, 아예 검을 안 들고 있어. 특이하지.”

“……소드 마스터가 검을 안 들고 있다고요?”

“그래. 그래서 검 없는 소드 마스터라고도 하지.”

“방패 또한 병기의 일종이나, 기사가 검을 들지 않는다니. 선뜻 이해되진 않습니다.”

“올라온 김에 회담에 참여했다고 하니, 직접 보면 알아.”

* * *

웨스트리아 왕성, 국왕의 집무실.

남동부 국경에서 병력을 이끌고 올라온 엘트렛 커큰은 국왕과 대면하고 있었다.

엘레너의 증원 요청으로 올라온 것이었으나, 생각보다 전투가 빠르게 끝나 버렸다.

이 소식은 에노드에 도착하기 전에 엘트렛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병력 보충도 필요했고, 급하게 올라오느라 챙기지 못한 물자도 지원 받아야 했다.

거기에 회담에 참석하는 등의 이유로 회군하지 않고 올라왔다.

쿵.

확연히 큰 덩치의 엘트렛은 갑옷으로 완전 무장한 상태였다.

거대한 방패를 내려놓은 뒤, 헬름을 벗었다.

헬름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은, 그야말로 백전노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엘트렛은 국왕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신, 엘트렛 커큰.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드시오. 엘트렛 경.”

“폐하를 보필하지 못한 불충한 신하가 어찌 뻔뻔하게 고개를 든단 말입니까.”

“엘트렛 경은 남동부 국경을 수호하고 있었잖소.”

“하오나.”

“고개를 드시오.”

엘트렛은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는 걱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국왕은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황탑주가 실종된 지금, 웨스트리아의 기둥과도 같은 것이 엘트렛이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충의라는 것을 알기에 볼프강은 든든함을 느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와 조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확실히, 하였지.”

“외람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만, 어떤 자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렵지 않다.”

엘트렛 커큰은 변경백이라는 작위를 지닌 중앙 귀족이기도 하다.

당연히 레온하트 왕국과 좋은 쪽으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귀족인 동시에, 현재 왕국 최고의 전력을 담당하는 기사이기도 했다.

새로운 강자, 특히 레온하트의 수호자처럼 전력이 미지수인 이는 주의하고 있었다.

국왕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애초에 그에 대해 설명해 줄 요량이었다.

설명을 들은 엘트렛은 곰곰이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과연. 커다란 뱀을 부린다는 이야기는 들은 대로군요.”

“마탑 정도의 크기라 하길래 부풀려진 줄 알았건만, 축소된 경향이 강했지.”

“크기는 정확히 가늠이 안 됩니다만, 이야기로 전해지는 요르문간드와 비슷한 느낌이군요.”

“종말의 뱀 말인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소.”

실제로 요르문간드가 맞았지만, 볼프강이 그걸 알 턱이 없었다.

애초에 요르문간드는 오래 전 죽은 괴물이라 알려져 있었다.

“그것보다, 산 자르기라고 하셨습니까.”

“목격한 기사가 그렇게 말하더군. 유사한 경향이 많다고.”

“……불패의 기사께는 제자가 없을진대.”

“따라 한 것이 아니겠소?”

“불가능합니다.”

엘트렛은 단언했다.

비록 검을 사용하지 않는다고는 하나, 엘트렛은 소드 마스터다.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강하다고 분류되는 레드라인 후작과 호적수로 여겨질 정도로 강했다.

그렇기에 확실히 단언할 수 있었다.

“불패의 기사께서 사용하는 검술은, 극(極)입니다.”

“유일무이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시니.”

“완전한 것은, 따라 할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탑주가 용을 쓴다고 한들, 대마법사의 마법을 재현조차 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황탑주의 이야기였다.

실종되기 전, 대마법사 델 로안의 마법에 깊이 매료된 황탑주는 그것을 따라 해 보려 했다.

실제로 황탑주는 마법을 따로 배우지 않고 독학하여 익힐 정도의 천재성을 보였다.

하여, 축소된 재현 정도는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단 9서클 마법이 아니더라도, 델 로안은 기상천외한 마법을 많이 선보였으니까.

황탑주는 수년을 연구하며 이를 재현해 보려고 노력했다.

결국에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폐하. 저는 대마법사가 될 인재가 아닌가 봅니다.

실의에 빠진 황탑주의 말이 떠올랐다.

반대로, 레온하트의 수호자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오를 인재라는 말이 되기도 했다.

엘트렛은 국왕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가능하다면.”

* * *

왕성 정문.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단연 시선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가면무도회도 아닌데, 루터를 제외한 이들은 전부 가면을 쓰고 있었으니.

설령 바보라도 레온하트의 수호자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가?”

“아니. 왜소한 쪽이라더군.”

“체격은 있는데, 강한 기사처럼 보이진 않는데.”

“검은 안 들고 있군.”

청력이 예민한 것은 확실히 이점인 것 같았다.

단과 마리나, 리옐의 이야기는 물론 루터에 대한 대화까지 종종 들려왔다.

대체로 나를 주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마법은 드래곤의 도움이라고 넘어갔으나, 검술 퍼포먼스만으로도 임팩트 있긴 했던 것 같다.

일부러 산 자르기를 따라 한 것이니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마침 깔끔한 차림의 시종이 붙었다.

아직 회담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있었다.

일부러 여유롭게 일정을 잡은 것 같았다.

하루 정도 할애할 시간이 있었기에,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흠.”

“평민 출신은 아닌가 본데.”

“기사와 시녀를 두고 있으니.”

“게스트인 줄 알았는데, 훈장 수여 예정이라더군.”

“저 아이는……?”

우리의 행동은 하나하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특히 왕성 정도로 오면, 걸음걸이에서부터 품격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루터 레온하트야 왕자인 만큼 부족한 부분이 없었고.

품위로 따지고 들면 나도 어디서 꿀리진 않는다.

‘가르친 보람이 있군.’

단과 마리나는 나와 함께 왕성에 동행한 적이 몇 번 있다.

그만큼 예법도 가르쳐 뒀는데, 확실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리옐까지도 의젓하게 굴고 있었다.

애초에 리옐은 내게 응석을 부려서 그렇지,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다.

‘첫 인상은 중요하지.’

바랐든, 바라지 않았든, 입장할 때부터 이미 평가는 시작됐다.

레온하트 왕국을 대표하고 있었기에, 어쨌든 품위는 유지해야 했다.

적어도 좋은 인상을 남기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영약의 부작용으로 단의 움직임이 아주 살짝 뻣뻣했으나, 티 날 정도는 아니었다.

“쉬고 계시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불러 주십시오.”

우리는 귀빈실에서 잠깐 쉴 수 있었다.

긴장했었는지, 마리나는 문이 닫히기 무섭게 폭 한숨을 토해 냈다.

곧장 다시 문이 열리는 바람에 흠칫 놀랐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님, 따로 드릴 이야기가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그래.”

나는 시종을 따라 방 밖으로 나갔다.

웨스트리아 왕성의 구조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시종은 나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님이십니다.”

“들라.”

응접실 내부로 들어서니, 예상외의 인물을 조우할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앉아 있는 국왕, 볼프강 웨스트리아.

그리고 그 뒤에 선 단보다 더 덩치가 큰, 늙은 귀족이 하나.

검 없는 소드 마스터, 엘트렛 커큰이었다.

* * *

웨스트리아 왕성 내부 연회장은 아직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가 있었다.

조금 시간이 남았기에, 단상 아래 귀족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품위와 격식을 지키고 있었기에 마냥 소란스럽지만은 않았다.

머지않아 종이 울리며 수여식의 시작을 알렸다.

순식간에 연회장 내부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볼프강 웨스트리아 국왕 폐하 드십니다!”

홀 중앙, 왕실 근위 기사들이 양쪽으로 도열한 길.

웨스트리아 왕국의 국왕, 볼프강 웨스트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가드 백작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어렴풋이 왕관의 중앙에 박힌 보석이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왕좌에 앉은 볼프강의 짤막한 연설 이후로, 우측에 있는 보좌관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훈장 수여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전투에서 희생된 전사자들의 이름이 먼저 나열됐다.

세 자루의 창 작전에 투입된 기사들을 비롯해, 성벽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이름도 있었다.

이후로는 생존한 웨스트리아의 기사들 이름이 불렸다.

간단한 수상 사유와 함께, 국왕이 직접 메달을 달아 주는 식이었다.

개중에는 두 번째 창의 지휘관이었던 이도 있었다.

“헬름이란 용병은?”

“훈장을 거부하고 떠났습니다.”

“생략하라고 전해라.”

간략하게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훈장 수여식은 꽤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이들이 주시하고 있던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레온하트의 수호자와 그 일행.”

당연하다는 듯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넷.

귀족과 기사, 시녀와 아이라는 특이한 조합이었다.

훈장을 수여 받는 자는 수여식에 게스트를 초대할 수 있다.

하지만 저들은 모두 훈장을 수여 받을 예정이었다.

‘기이하군.’

그냥 가면만 쓰고 있었는데, 뚜렷한 특징을 잡기 어려웠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탐색하고 있었다.

놀가드 백작의 옆에서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귀족이 동석한 자제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버지,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조직입니까?”

“하나라더구나. 나머지는 수하라 하고.”

“그럼 필연적으로, 저자가 수호자겠군요.”

레온하트의 수호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품위가 느껴졌다.

그냥 가만히 있는 데도 불구하고, 자세부터 다르다.

오랫동안 격식이 몸에 배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몇몇 귀족들이 저도 모르게 경탄할 정도로,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 유려했다.

“그를 눈 여겨 보는 것도 좋다만, 수하들의 행동거지도 주시하거라.”

“수하들요?”

“그래. 아랫사람의 행동거지를 보면, 윗사람의 품성도 알 수 있거든.”

실제로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귀족 자제가 알아보긴 어려운 경향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정계에 머무르다 보면 알 수 있다.

‘젊은 축에 속하는 것 같은데. 전부 여유롭다.’

레온하트의 수호자와 그 일행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걸음걸이부터 시작해서 모든 부분에 흠 잡을 데가 없었다.

그 뒤를 따르는 수하들은 살짝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도 수호자가 너무 완벽했기에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진 것이다.

‘……아이 쪽은, 영애인가?’

눈길을 끈 것은 단언컨대 리옐이었다.

인식 방해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앙증맞음이 절로 느껴질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격식도 제대로 갖추고 있어서, 신기할 따름이었다.

훈장 수여 이유를 짤막하게 읊은 뒤, 볼프강은 직접 수호자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다른 수여자처럼 잠깐 사담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국왕은 모두 들으라는 듯 뚜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상과 다소 거리가 있는 자리에 앉아 있던 놀가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레온하트의 수호자여,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소.”

“예. 폐하.”

“친선 결투를 치를 생각이 있소?”

* * *

애초에 국왕이 따로 나를 불러 제안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마 내 전력을 확인시킬 겸 파악할 요량인 듯했다.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결투였다.

“친선 결투……?”

예정에도 없던 행사에, 귀족들은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부분 당황했을지언정, 자리가 자리인 만큼 숨기는 모습이었다.

국왕의 제안은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그와 비슷한 강자라는 뜻이니까.

인식 방해를 제외하더라도, 어느 정도 나이대는 분간할 수 있을 터.

“상대가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검 없는 소드 마스터, 엘트렛 커큰 후작이오.”

엘트렛 커큰은 웨스트리아 왕국의 현재 최고 전력인, 검 없는 소드 마스터다.

모른 척 물어보긴 했지만, 사실 상대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엘트렛 커큰이니 미리 알린 것이리라.

나는 고개를 숙여 동의를 표했다.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루터 레온하트 왕자여, 회담을 잠깐 뒤로 미뤄도 괜찮겠소?”

“배려 감사드립니다, 폐하. 진행하여도 지장 없습니다.”

루터도 국왕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친선 결투는 확정됐다.

* * *

이미 계획된 일이었던 만큼, 결투 준비는 척척 진행됐다.

의외였던 것은 따로 장소를 이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회장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려나 했더니, 왕실 마법사들이 나섰다.

표준 규격의 결투장과 같은 크기의 단상에 수십 겹에 이르는 보호 마법을 부여했다.

아마 황탑 소속이었다가 왕실로 넘어온 이들인 것 같았다.

‘저거라면 확실히 버틸지도 모르지.’

애초에 친선 결투인 만큼, 오러 사용은 금지된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는 단순히 오러 수준이 높다고 도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육체적으로 인간의 한계에 달하는 능력을 지닌, 인간 병기.

소드 마스터 하나로 국력이 평가될 만큼, 그 존재의 강함은 이루 말할 수준이 아니었다.

전쟁에서는 탑주보다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다수와의 전투가 불리하기 때문이다.

일 대 일, 이런 결투에 있어서는 그 어떤 탑주도 소드 마스터를 이기지 못한다.

“검 좀 빌리마.”

“어찌 이름 없는 검을 쓰지 않으시고요.”

“그거 좀 이상해져서, 오러 없이 못 쓰게 됐거든.”

현재 이름 없는 검은 원래 검날을 두르고 있던 검집을 부순 상태다.

원래는 단순히 특이하고 단단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원래 이름 없는 검에는 오러를 증폭, 정제하는 힘이 있었다.

그 덕분에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로도 엄두가 안 나던 산 자르기도 따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검이 오러를 머금지 않으면 얇은 얼음 같다는 것.

강도를 감안하면 아마 갑옷에 부딪치자마자 깨질 것이다.

“혹시 모르지만, 저쪽에서 이상한 검 줄 수도 있으니까.”

“도련님께선 클레이모어를 사용한 적이 없으시잖습니까.”

“이론은 알아. 너 하는 것도 몇 번 봤고.”

“클레이모어 검술을 언제……?”

“1년 전에, 마이어 저택에서 조금.”

나는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잡았다.

검을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 없는 검을 얻었다.

쭉 써 온 만큼, 좋은 검이 손에 익은 감이 있었다.

“괜찮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높은 망치의 작품이다.

명인의 피가 흐르는 드워프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대장장이.

단순히 좋은 검이라는 것을 넘어서, 소위 말하는 명검이었다.

단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애지중지하는 것이다.

“왜 익숙하시지……?”

“아빠가 아저씨보다 백만 배 멋진데!”

“저런, 그렇게 사실을 말씀하시면 상처 받으셔요.”

“따흑.”

고개를 돌리니, 반대쪽에서 엘트렛 커큰이 무장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장에서의 퍼포먼스를 전해 들었는지, 일말의 방심도 없는 모습이었다.

일 대 일 전투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는다.

순수한 검술과 육체 능력만으로 싸우는 것이 친선 결투.

실력 차가 많이 난다면, 적극적인 공세를 통해 수 초 만에 승부가 나기도 한다.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검 없는 소드 마스터다.

그는 철옹성이나 난공불락이라고 불리는 단보다 더 수비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상대의 틈을 파고드는 것을 선호하는 나와는 꽤 상성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얼마나 강할까. 궁금한데.’

헬름을 쓰기 전, 엘트렛 커큰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백전노장이라는 것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전쟁에 참여한 경험도 수차례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건, 자기만의 전투를 만들어 냈다는 것.

‘독특해.’

그 옆에는 정말 무식한 크기의 방패가 놓여 있었다.

화이트웨일 항구 인근에서 조우했던, 녹림왕 유수의 검보다 그 크기가 컸다.

딱 제 몸과 비슷한 크기로 보였는데, 두께를 보아 더럽게 무거울 것 같았다.

힘 센 사람 몇 명이 달라붙어도 겨우 드는 것이 벅찰 법한 철 덩어리였다.

웨스트리아에게 무력을 확인 받는 것도 이유였지만, 개인적으로 싸워 보고 싶기도 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님, 준비되셨습니까?”

“언제든지.”

나는 최대한 방어구를 줄여 빠르고 효율적인 움직임을 만든다.

반면 엘트렛은 움직이기도 버거워 보이는, 무거운 중갑옷으로 완전 무장했다.

내가 공격적인 검술을 선호하는 반면, 저쪽은 완전 수비적이다.

애초에 검조차 쓰지 않는다.

“친선 결투인 만큼, 따로 입회인은 두지 않겠습니다. 양측 모두 오러 사용은 금지입니다.”

나는 단상으로 나섰다.

따로 소개는 없었는데, 유흥거리라기보다 친선 목적이기에 배려해 준 모양이었다.

오러 사용 금지라는 건 반대로, 다른 것들은 사용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물론 오러와 더불어 마나에 신성까지 있을 줄 몰라서 한 말일 테니.

가급적이면 검술만 사용할 생각이었다.

‘마침 잘됐어. 순수한 기사로서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는데.’

소드 마스터 중 가장 고평가 받는 것은, 레온하트의 레드라인 후작이다.

검을 부수는 검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 요아힘 월베른 다음으로 기사들의 예찬을 받는다.

물론 이는 유추일 뿐이지만, 마냥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철컥, 쿵.

내 맞은편에 선 엘트렛이 방패를 땅에 내려놓았다.

중갑옷으로 무장한 덩치와 거대한 방패가 어우러져, 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혔다.

엘트렛 커큰 또한 소드 마스터 중 고평가 받는 인물 중 하나였다.

기사임에도 검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막연히 혐오하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소리다.

“웨스트리아 왕국의 전통에 따라, 종석이 떨어지는 것을 신호로 결투의 시작을 알리겠다.”

왕좌에 앉은 볼프강 웨스트리아가 작은 돌을 들어 올렸다.

링스톤이라고도 불리는 종석(鐘石)은 무언가에 부딪치면 종과 같은 소리를 내는 암석이었다.

목오 사막에서 종종 발견되는 것인데, 웨스트리아에도 있긴 한 모양이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여, 결투에 응해 주어 고맙네.”

“한 수 배울 기회를 마다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커큰 경.”

“내 비록 늙긴 했으나, 아직 이빨 빠진 호랑이는 아니라네. 부디 최선을 다해 주게나.”

“백전노장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실력에 오만해지지 않은 부분만으로도 마음에 드는군.”

엘트렛은 방패를 들어 올렸다.

설치하여 투사 무기를 받아 내기 위한, 파비스 방패가 떠올랐다.

그 크기와 두께, 무게는 절대 들고 싸울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저게 무슨 괴력인지.’

무거운 물건을 들 때면, 그 사람이 힘을 줬다는 걸 얼핏 느낄 수 있다.

저항감과 힘을 준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트렛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마치 원래 자신의 신체 일부라는 것처럼 다루는 모습이었다.

“그럼, 종석을 떨어트리겠다.”

국왕이 종석을 올려 둔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바닥이 뒤집어지며, 종석이 떨어졌다.

청량한 종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 * *

단의 예상대로, 먼저 치고 나온 것은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종석이 울리자마자 곧장 땅을 박차고 엘트렛에게 달려들었다.

마나 번(Mana Burn)을 비롯한 신체 강화는 일절 없었다.

‘빠르다.’

그럼에도, 지그문트 마이어는 빨랐다.

신성을 받아들이고 격이 상승하는 과정에서, 그 육체 능력 또한 인간의 것을 벗어났다.

집중하지 않았더라면 순간적으로 위치를 놓쳤을 정도였다.

어쩐지 지그문트 마이어의 기척은 거의 없었다.

‘만약 틈이 있다면.’

지그문트의 검은 그 어떤 기사보다 더 정교하다.

그 정교함을 무기로 틈을 파고드는 변칙적인 검술은 지나칠 정도로 까다로웠다.

처음 그 검을 받아 내는 기사라면, 허를 찔려 패배할 수밖에 없다.

단이 이토록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그문트의 대련에 어울린 덕분이었다.

‘승부는 한순간에!’

단은 지그문트 마이어가 소드 마스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못해도 같은 수준이라면, 검술적인 측면에서 지그문트가 밀릴 가능성은 극도로 적었다.

그만큼 완성된 검술을 구사하는 것이 지그문트였다.

소리 없이 엘트렛에게 쇄도해 간 지그문트는.

“어?”

엘트렛을 지나쳤다.

검을 땅에 박아, 그 마찰력으로 속도를 순식간에 줄인다.

동시에, 방향을 틀었다.

‘아, 저런 방법을.’

상대는 완전 무장한 데다가, 정면을 방어하고 있다.

정면을 방어하고 있는 만큼, 방패로 인해 시야는 차단되었다.

그렇기에 일부러 기척을 죽이고 뒤로 이동한 것이다.

‘설령 알아차린다고 해도.’

저 무거운 방패를 뒤로 돌리는 건 분명 시간이 걸린다.

지그문트라면, 그 찰나의 순간에 결착을 낼 정도의 공격을 계산해 뒀을 것이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를 휘둘렀다.

쩌엉!

예상했던 것과 다른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단은 온몸을 뒤덮은 닭살에, 오한을 느꼈다.

‘무슨, 사람이 저렇단 말인가.’

엘트렛은 방패를 무려 한 손으로 들어, 팔꿈치로 뒤를 내리찍는 듯한 움직임을 취했다.

굼떠 보이는, 아니 굼뜰 수밖에 없는 장비로 무장한 엘트렛 커큰이다.

그런데 그 속도는 동물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빨랐다.

무게에 속도가 더해지니, 방패 끝은 가공할 정도의 파괴력을 지니게 됐고.

“후우.”

도리어 피해를 입은 건 지그문트였다.

저 무식할 정도의 방패와 클레이모어가 부딪친 것이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는 그 정도에 부서지지 않았으나, 반동은 고스란히 지그문트의 팔을 때렸다.

아마 적지 않은 충격이 왔을 것이 분명했다.

“빠르군.”

지그문트는 뒤로 물러서 거리를 벌렸다.

뒤를 돌아본 엘트렛은, 방패를 옆으로 쳐들었다.

철컹.

사각형 모양이었던 방패 끝에서, 삼각형의 날이 튀어나왔다.

바스타드 소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넓적하긴 했으나, 분명 칼날이었다.

엘트렛 커큰의 방패는, 방어구이자 검이다.

위 아래로 날이 달려 육각형을 이루는, 듀얼링 실드.

“자, 제대로 해 볼까.”

* * *

과연 소드 마스터는 만만히 볼만 한 전력이 아니었다.

애초에, 어트 한넬의 경우가 지나치게 특이했던 거다.

어트 한넬은 성장 가능성은 높지만, 전력 자체는 소드 마스터 중 저평가 받았다.

전체적인 밸런스가 좋긴 했으나, 어느 하나 뛰어난 점이 없었다.

그러니 단이 그를 상대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단도 나름 많이 강해지긴 했다만.’

근 1년 사이, 기사로서 믿을 수 없는 성장세를 보인 단이다.

내가 더 빠르긴 했다만 그건 인생 2회 차인 데다가, 영약 보정을 받은 것이다.

단은 비록 오러 수준은 오르지 않았으나, 그 검술 수준은 눈부신 성장을 보였다.

내가 소드 마스터에 올라서며 수준 차이가 많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오러만 제외한다면 단은 내 검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그래도, 이건 좀.’

엘트렛 커큰은 그런 단의 완전한 상위 호환이었다.

최근 단이 방어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도한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같았다.

묵직한 철 덩어리를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감각까지 말이다.

나는 조용히 엘트렛을 관찰했다.

‘방패는 오른팔에.’

왼손으로 오른팔을 지지하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무기를 든 손은 오른쪽이다.

상대적으로 방어가 허술할 수밖에 없는 왼쪽을 노려야 한다는 뜻.

하지만 그마저도 온몸을 무장한 갑옷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어지간한 기사는 오러가 있어도 뚫어 내기 어려울 정도로 최고급품 같았다.

헬름의 눈가리개 사이를 노리거나, 관절부를 잘 틀어서 쑤셔 넣는다면.

“오지 않을 텐가, 그럼.”

돌연 엘트렛이 양 다리를 구부리고 자세를 낮췄다.

헬름 속에서 숨을 들이쉬는 듯한 소리가 명료하게 들려왔다.

무게 중심이 앞으로 기운다.

“내가 가지.”

중갑옷에, 저 정도 크기의 듀얼링 실드.

아무리 육체적으로 단련된 기사라고 할지언정, 무장만으로도 버거운 무게다.

바스타드 소드를 쓰던 유수를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여로를 통해 블링크(Blnk)를 한 것을 제외하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쾅!

엘트렛 커큰은 달랐다.

땅을 박차고 내게 달려들었는데, 워베어의 육탄 돌격을 보는 듯했다.

저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폭발력과 속도.

오러가 없으니 어색할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높이 쳐든 듀얼링 실드가 내 머리 위로 찍혔다.

“워우씨.”

소드 마스터다.

반동을 이용한 공격이더라도, 사람을 뭉개 버리기 전에 멈추긴 할 것이다.

하다못해 죽지 않을 정도로 힘 조절을 했겠지만.

무게가 무게다 보니, 느껴지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콰앙!

땅을 박차고 뒤로 피함과 동시에, 듀얼링 실드의 날 부분이 단상을 내려찍었다.

분명 보호 마법이 몇 중으로 걸려 있었을 텐데, 내리찍은 부분이 움푹 파이며, 돌 조각이 튀었다.

‘미친, 오러 없는 거 맞아?’

보호 마법을 완력만으로 다 부순 것도 모자라, 속도까지 뛰어나다.

공격이 빗나갔음에도, 엘트렛은 내려찍은 듀얼링 실드를 옆으로 쭉 빗겨 내렸다.

오른팔 팔뚝을 잡은 왼손으로 힘의 방향을 바꾼다.

크고 묵직한 공격에서 쉽게 이어지기 어려운, 연격.

‘아,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유수나 단처럼, 움직임은 최소화한 전투 스타일을 보일 줄 알았다.

폭발적인 속도까지야 어찌 대처했다지만, 기술적인 측면까지 완성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약점 하나 정도는 있을 법했는데.

다행인 점은, 이에 대응할 만한 검술이 있다는 것.

압도적인 파괴력이 섞인 공격으로 방어를 대신할 수 있는, 같은 소드 마스터의 기술.

검을 부수는 검.

* * *

‘수준급. 강도 높은 훈련에 더하여 실전으로 다져진 천재.’

엘트렛 커큰은 지그문트의 한 수를 받아 내고, 그렇게 평가했다.

곧장 달려들기에 겁 없이 방심했다고 생각했는데, 퇴로도 착실히 확보해 뒀다.

애초에 허를 찌르는 수가 마음에 들었다.

거의 갑옷을 입지 않아 의아했는데, 회피와 속도에 비중을 둔 기사였다.

‘오러 없이 싸워 본 경험이 있는 건가?’

순간적으로 노렸던 곳은, 갑옷의 관절 부위.

힘의 방향을 트는 동시에 그렇게 정교한 공격을 가할 줄 몰랐다.

시야가 좁다는 것을 노리고 기척을 죽여 달려든 것도 꽤 감탄스러웠다.

거의 반사적으로 막아 내긴 했지만, 감이 조금만 떨어졌어도 일격을 허용했을 것이다.

‘재는 건가.’

한 번의 반격으로, 신중하게 엘트렛을 주시하는 지그문트였다.

섣불리 들어오지 않는 점은 현명하다.

비무장 상태에 가까운 지그문트는 접근전에서 불리하다.

계속 거리를 벌리고 공격을 시도하며, 치고 빠지는 편이 현명하다.

‘하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친선 결투인 만큼 오러 수준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검술에 있어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볼 수 있다.

특히 신경 쓰이는 것은, 요아힘 월베른의 산 자르기를 따라 했다는 것.

비록 위력은 턱없이 부족할지언정, 확인하고 싶은 일이었다.

“오지 않을 텐가. 그럼, 내가 가지.”

대체로 엘트렛의 외관을 본 이들은, 속도에 당황한다.

방패를 앞세운, 폭발적인 힘이 실린 돌진.

단순히 방어보단 공방 일체를 추구하는 엘트렛의 전매특허였다.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한 번쯤은 이에 당황한다.

그러나.

콰앙!

지그문트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엘트렛을 끝까지 보고 있었다.

힘을 가해 듀얼링 실드를 내려찍을 때, 가볍게 뒤로 물러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다.

정확히 자로 잰 듯한 반응 속도와 거리.

마치 엘트렛의 움직임을 계산한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엘트렛의 연격이 이어졌다.

칼날이 방패 위아래에 달렸다는 것을 이용한 공격.

오러 없이 사용하기에는 조금 부담이 가는 기술이었지만, 좀 더 캐내고 싶었다.

지그문트는 엘트렛의 뒤로 이동한데다가 거리까지 벌린 뒤라, 뒤는 단상 밖에 가까운 상태.

여기서 피하려면 장외 처리가 될 것이다.

‘보여라!’

지그문트는 결국 클레이모어를 쥐었다.

그냥 받아 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힘과 무게를 동시에 지닌 엘트렛의 일격을 받아 내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설령 받아 낸다고 해도 그대로 밀어붙여 장외로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쩌엉!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일격.

분명 오러를 배제했지만, 엘트렛은 그 검을 목격한 적 있었다.

‘검을 부수는 검?’

레온하트 왕국의 소드 마스터, 요하네스 레드라인의 검.

심지어 그 완성도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오러가 없으니 무기 파괴는 어렵다고 판단한 건지.

힘의 방향을 그대로 역이용해, 방패를 위로 올리도록 만든 것이다.

‘이런…….’

방패 밑으로, 자세를 낮추고 파고든 지그문트가 보였다.

가면 너머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검을 부수는 검으로는!’

힘을 중시한 무기 파괴술은 섬세함과 조금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야수적인 맹공에 가깝기에, 몇 번은 버텨 낼 수 있었다.

괜히 갑옷으로 무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자세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클레이모어는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 엘트렛의 손목을 붙잡는다.

방패를 내려 제 몸을 공격하는 것을 방어하는 동시에 밀착한다.

가로로 세운 검이 눈가리개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어떻게?’

그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와중에 손목을 잡아 공격을 막는 과감한 판단도 인상적인데, 한 손으로 클레이모어를 찔러 올려, 눈가리개의 얇은 틈을 파고들었다.

가만히 서 있는 상대에게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정교한 검술이었다.

‘불패의 기사도, 검을 부수는 검의 제자도 아니었나!’

헬름의 눈가리개를 관통한 검 끝이 엘트렛의 눈동자를 향해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동시에, 엘트렛이 움직였다.

* * *

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애초에 루터와 엘레너는 거의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필요한 것은 공식 석상에서의 확인 절차였으니, 회담이라고 부르기도 뭐했다.

온건파 귀족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프레드가 나서서 전부 조용히 시켰다.

“역시 도련님이세요.”

“아빠 짱!”

나와 엘트렛의 친선 결투도 한몫했다.

비록 검에 조예가 없는 귀족들이 보기엔 공방 몇 차례 주고받은 것이 전부였겠지만.

엘트렛 커큰이 어떤 사람인가.

웨스트리아 왕국의 최고 전력이라고 불리는 소드 마스터다.

비록 조금 허무하게 끝난 감이 있다지만, 내 증명은 충분히 했다.

전장에서 내 퍼포먼스를 직접 목격하지 못한 귀족들은 반신반의하고 있었으니까.

“이보게.”

“아, 엘트렛 커큰 경.”

나를 불러 세운 것은 엘트렛 커큰이었다.

헬름을 벗고 얼굴을 드러낸 상태였는데, 퍽 중후한 멋이 있었다.

내가 얘를 마지막으로 봤던 게, 전생에 팔베르크 제국에 행사가 있었을 때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레드라인 후작 정도 나이의 기사였다.

그사이 상처도 늘었고, 주름살도 자글자글한 노인이 됐다.

“흠, 좋은 결투였네.”

“저야말로, 한 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아니. 이 늙은이가 배웠지.”

결투 결과는 무승부였다.

내 검이 눈가리개를 파고들기 직전, 엘트렛이 검날을 손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괴물 같은 반응 속도였다.

아마 거기서 힘을 줬다면.

‘엘트렛이 실명하거나, 내 검이 부러졌겠지.’

오러가 없다는 전제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오러가 담긴 검이었으면, 부러트리긴커녕 손만 다쳤겠지.

하지만 오러가 없었기에, 검날을 쳐 저지할 수도 있었다.

둘 다 그것을 깨닫고 멈췄기에 결착이 난 것이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부탁해도 괜찮겠나?”

“저야 얼마든지요.”

“그렇군. 예의 회담에는 참석할 생각이겠지?”

“할 생각입니다. 아직 모를 일이지만요.”

“그럼, 이제 어찌할 건가?”

“레온하트로 돌아가야겠지요.”

루터 레온하트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

게다가, 마나 가로채기가 사라져 통신구 연결도 됐다.

발레리아와 연결된 통신구에서는 거의 불이 붙을 지경이었다.

“조심하게.”

“어째서요?”

“팔베르크 제국이 이 일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남동부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이 일부 회군했다.

애초에 마족군의 뒤에 팔베르크 제국도 연관되어 있을 확률이 높긴 했지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텔레포트할 거라.”

“아, 깜짝이야. 너 뭐야.”

“모시러 왔답니다.”

누가 이야기에 끼어들기에 뒤를 보니, 발레리아가 있었다.

정식 입궁 절차를 거쳤는지, 다른 이들은 주목할지언정 이상하게 보진 않았다.

“적탑주님, 수호자와 친하신가 보군요.”

“뭐, 다른 사람보다 신뢰하고 있습니다.”

발레리아는 예의 업무 모드였다.

만만하게 여겨질 법한 성격이다 보니, 애초에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 레온하트 왕국의 대다수는 얘를 이런 성격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발레리아에게 샌딩(Sending)을 보냈다.

-너 왜 왔어.

-통신 안 받으셔서요. 왜 안 받아.

-회담 중이었으니까. 이놈아.

-린시스 님께 연락이 왔어요. 벨수스를 통한 전언이었지만요.

-린시스가? 뭐라는데?

-곧 팔베르크 제국에 대한 감시를 해제해야 한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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