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종합 선물 세트
왕국의 방패들은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성벽을 향해 몰려들던 몬스터들이 갑자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후퇴하는 건 아니었고, 어디론가 병력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덕분에 열세에 몰렸던 왕국의 방패들은 잠깐이지만 재정비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저것들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글러터를 잡으러 간 창들을 잡으려는 것 같습니다!”
“밀어붙여! 조금이라도 수를 줄인다!”
“하지만! 창들은……!”
기사들은 차마 말을 마치지 못했다.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저 지옥에서 싸우고 있다.
빛기둥의 위치가 상당히 깊숙한 것을 감안할 때, 생존 가능성은 희박했다.
차라리 저들을 버리고 전열을 재정비한 뒤, 방어선을 구축하는 편이 이치에 맞았다.
“더 앞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가뜩이나 병력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위의 지원도 끊겼는데……!”
그들의 목표는 전선을 사수하는 것이지, 마족군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저 많은 몬스터들을 전부 밀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남동부에 포진된 병력을 비롯한 증원이 올 때까지 버틴다.
그것이 엘레너 웨스트리아가 전제로 깔고 들어간 전략이었다.
끼익.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남문이 개방됐다.
증원일 거라는 생각에 화색이 된 방패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누구지?”
하지만 성문에서 나온 것은 그들이 기대하던, 무장한 병력이 아니었다.
단 한 명, 금발의 청년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왕국의 방패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기사라기에는 어려 보였고, 병사라기에는 무기도 없다.
애초에 웨스트리아 출신의 사람조차 아닌 것으로 보였다.
검은 로브를 두르고 있었는데, 생긴 걸로 보아 고생 한번 안 해 본 귀족 자제 같았다.
“멈춰라!”
뒤에서 지휘하던 왕국의 방패가 청년을 멈춰 세웠다.
청년은 얌전히 멈춰서 그를 올려다봤다.
“이곳은 전선이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지령 전달인가?”
“비켜 봐.”
“뭐?”
“비켜 보라고.”
왕국의 방패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청년을 내려다봤다.
청년은 말없이 검을 뽑았다.
허공에서 검을 뽑는 듯한 모습에, 왕국의 방패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마법사인가……? 아니, 검? 기사?”
“둘 다.”
금발의 청년은 기어코 왕국의 방패 하나를 지나쳐 전선 앞으로 나섰다.
방패는 버티려고 했지만, 청년이 옆으로 슥 밀자 주춤 밀려나 버렸다.
“어?”
“비켜 보라니까. 거참, 말 안 듣네.”
청년, 지그문트 마이어는 이름 없는 검을 바닥에 내리쳤다.
이름 없는 검을 감싸고 있던 검집이 부서졌다.
캉……!
그리고 드러난 것은 아주 얇은 검.
옆에 있던 왕국의 방패는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사람이.’
전장 전체를 압도하는 듯한 압박감이었다.
뒤를 보던 마족군들이 흠칫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그문트 마이어의 눈이 금색으로 물들었다.
불완전한 신이 전장에 발을 들였다.
* * *
“적진으로 들어간 창의 구조 작전을 실시해야 합니다.”
“왕녀님, 병력 손실만 야기할 뿐입니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애초에 무리한 투입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도 우리여야 합니다.”
“최선이었습니다. 다수의 병력은 발만 잡을 뿐이었습니다.”
남부 성벽 뒤.
엘레너는 참모진과 대립하고 있었다.
글러터를 죽이기 위해서 보낸 세 자루의 창 작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때, 건물 내부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마주한 이들은 모두 깜짝 놀라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국왕, 볼프강 웨스트리아가 무사히 귀환한 것이다.
왕실 마법사들의 확인을 받은 후 볼프강은 갑옷을 입고 전선으로 향했다.
지그문트에게 이미 전쟁이 발발했을 거라는 사실을 들었던 덕분이다.
남부 벽에서 진을 치고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엘레너도 함께였다.
공로를 치하하는 등 짤막한 인사를 나눈 뒤, 급한 대로 엘레너가 입을 열었다.
“우선 상황 보고드립니다.”
얼떨결에 전선 지휘를 맡고 있던 엘레너가 대표로 상황을 축약해 보고했다.
남동부 국경에 배치된 전력이 북상할 때까지 버틸 요량이었다.
병력 배치와 민간인 대피는 이미 완료된 상태.
문제는 독립적으로 실행한 작전, 세 자루의 창이었다.
엘레너는 참모진 측 귀족을 바라보았다.
“다수의 병력을 보내고 싶었지만, 불가능하다고 하시더군요.”
“숫자로 밀어붙일 수 있는 수준의 돌파 작전이 아니었습니다. 정예로 이루어진 소수가 차라리 생환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성벽에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또한 상당한 위험 부담을 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만.”
볼프강이 말을 끊자, 참모와 엘레너는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볼프강 웨스트리아는 부드러운 눈으로 엘레너를 바라보았다.
“잘해 주었다. 엘레너.”
“가, 감사합니다.”
평소 표현이 적은 국왕이기에 엘레너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프레드 웨스트리아에게 밀려왔기에,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짐은 황탑주로 위장하고 있던 마족에게 속아, 틈이라는 곳에 갇혀 있었소.”
“틈?”
귀족들은 박식한 왕실 마법사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러나 왕실 마법사들도 모르는 눈치였다.
틈이라는 공간은 잘 알려진 곳이 아니었다.
“운 좋게 조우한 젊은이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올 수 있었지.”
“젊은이라 하시면……?”
“짐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 거기에 선뜻 도움까지 주겠다더군.”
참모진은 당황했다.
젊은이라면 필시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다는 뜻일 텐데.
그 한 사람이 도움을 줘 봤자, 이 전쟁에서 얼마나 영향을 끼치겠는가.
하지만 엘레너의 반응은 달랐다.
“그분께서 도움을 주겠다고 하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조건을 몇 가지 걸긴 했으나, 합리적인 제안이더구나.”
마족군이 물밀 듯이 들이닥치고 있던 상황.
엘레너가 품고 있던 희망은 남동부에서 올라오고 있는 병력이 아니었다.
바로 레온하트의 수호자, 지그문트 마이어를 통해 드래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그분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듣기로는 방금 틈에서 빠져나와, 전장으로 향했다던데.”
“전장요? 어째서, 드래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이겠지. 직접 보자꾸나.”
국왕은 직접 엘레너와 함께 남부 성벽으로 향했다.
꼭 높은 성벽 위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아래쪽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구멍이 나 있었다.
국왕은 전장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왕국의 방패들이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금발의 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먼 뒷모습이라 확실치는 않았지만, 특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레온하트의 수호자였다.
허공에서 검을 뽑아 든 수호자, 지그문트는 푸른 숨을 뱉어 냈다.
“저게…… 사람?”
수백 미터 떨어진 성벽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검을 뽑는 순간, 저 한 사람의 존재감이 지나칠 정도로 강해졌다.
압박감에 가슴이 답답했고 숨이 막혔다.
전장은 일절 눈에 들어오지 않고, 수호자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지그문트는 일시적으로 반신화한 상태였다.
슥.
지그문트 마이어가 검을 가로로 그었다.
퀸틴 이후로, 지그문트는 검에 대해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는 자존심을 앞세워 배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미 레드라인 후작의 검을 보고 많은 것을 배운 바 있다.
지그문트가 목격한 가장 완성도 있는 검은, 단언컨대 요아힘 월베른의 검이었다.
검의 극의에 달한,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검술.
‘선?’
엘레너는 지그문트 마이어의 검로를 따라 무언가 생겼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고 긴 선이었다.
지그문트는 이제 막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만큼, 요아힘의 검을 따라 할 수 없었다.
요아힘 월베른의 검과는 조금 다른 방법이었지만.
규모와 위력이 다소 부족할지언정 비슷하게 재현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반신화와 더불어, 아우나(Aunar)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했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다.
서걱!
괴랄한 폭음이 아니었다.
귓전에 뚜렷하게 들려온 것은, 무언가를 자르는 소리.
몬스터들은 죽음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저 선에 따라 몸이 잘리는 것을 보며 우수수 쓰러져 나갔다.
지그문트는 지친 기색조차 없었다.
쿵! 쿵! 쿵!
몬스터들의 사체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에, 엘레너 웨스트리아는 전율했다.
에노드의 병력으로는 버티는 것이 고작인 수의 몬스터였다.
그런데 단 한 번의 검으로, 왕국의 방패를 몰아붙이던 마족군의 최전선이 소멸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의 무력은 이미 유명했다.
추정 나이가 젊은 것으로 감안할 때, 과장된 경향이 적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오히려 축소된 감이 강했다.
“허.”
왕가의 곁이라는 것도 잊고, 둘을 호위하던 기사가 넋을 놓았다.
드래곤의 증원을 부르지 않을 만도 했다.
가히 인간을 벗어난 수준의 일격이었다.
검으로 한 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
기사가 중얼거렸다.
“산 자르기……?”
“산 자르기라니요?”
“불패의 기사, 요아힘 월베른 경의 검을 칭하는 말입니다.”
“지금 수호자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는 말씀이신가요?”
“그, 그건 아닙니다만 유사한 경향이 많았습니다.”
더듬더듬 말하는 기사에, 엘레너는 레온하트의 수호자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좋은 사람이지만, 조금 오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보인 행동과 지식은 결코 오만이라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 정도면 겸손한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볼프강 웨스트리아도 예상외의 압도적인 모습에, 잠깐 말을 잃었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엘레너를 내려다봤다.
“엘레너, 일전에 레온하트와의 동맹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기억하느냐?”
“예. 폐하.”
볼프강 웨스트리아가 사라지기 전.
엘레너는 볼프강에게 레온하트와의 동맹에 대해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셋째 왕자 루터 레온하트와 대화를 나눈 직후였다.
그때 당시, 볼프강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레온하트와 손을 잡는 것이 큰 메리트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설마 레온하트 왕국이 저런 수를 감춰 두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최근 동향이 심상치 않긴 했다만.”
지그문트가 의도한 대로, 어느 정도 퍼포먼스적인 면모가 있었다.
애매한 웨스트리아 왕국의 입장을 확실히 이쪽으로 돌리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퍼포먼스는 매우 유효했다.
“레온하트와의 동맹을 추진할 것이다. 엘레너. 네가 맡도록 해라.”
* * *
머리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피가 시야를 가렸다.
단 록벨런은 팔뚝으로 눈가를 닦았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거세게 두방망이질 쳤다.
오러를 한계까지 끌어 사용한 탓이었다.
일격을 허용한 왼쪽 옆구리에선 화끈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먹먹한 귀로 옅은 폭음과 몬스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관자놀이에서 맥박이 뛰었다.
목구멍은 칼로 찢어 놓은 듯 아렸으나, 호흡을 깊게 들이마셔야 했다.
힘이 풀린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고 땅을 디딘다.
한참 전부터 신체는 한계에 달한 상태였다.
지금은 오로지 정신력만으로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괜찮으십니까?”
“설마.”
단과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무연도 비슷한 상태였다.
몇 번이고 클레이모어의 힘을 끌어다 쓴 단이었다.
자연스럽게 무연이 앞으로 나서는 일이 많았는데, 그만큼 부상도 많았다.
지금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불안한 모습이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모르겠군.”
“곧 도련님께서 오실 겁니다.”
“지그문트 마이어가? 이 전장을 뚫고?”
“제가 모시는 분께서는 정말 강하시거든요.”
“너는 그를 지나칠 정도로 신뢰하는군.”
“그럴 만한 분이십니다.”
“온다.”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둘은 다시 검을 들어야 했다.
두 번째 창은 거의 전멸했고, 남은 건 둘뿐이었다.
반격하는 자의 클레이모어도 쓸 수 없는 지금, 돌파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지그문트 마이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믿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붕!
하늘 위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무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질색했다.
단과 무연이 가장 까다로워하는 몬스터는 단언컨대 비행하는 종류였다.
검을 사용하는 둘의 특성상 공격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틈을 노리다가 급습하고, 다시 날아올라 거리를 벌린다.
“큭!”
“무연!”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도끼를 든 언데드, 드라우그가 무연을 급습했다.
갑옷을 입지 않은 무연이기에 공격 하나가 치명상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완전 무장을 한 단이 무연을 돕기 위해 몸을 날렸다.
캉!
드라우그의 도끼가 단의 갑옷에 박혔다.
한 번이라고는 하나 소드 마스터의 일격도 견뎌 낸 명품이다.
도끼는 갑옷 표면에 박히긴 했으나, 그것을 뚫어 내진 못했다.
단이 클레이모어를 휘둘렀다.
쩍!
언데드, 드라우그는 단의 클레이모어에 맞고 뒤로 날아갔다.
문제는 단이 일시적으로 무방비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기회를 노리던 만티코어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단에게 당해 쓰러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놈이었다.
까악!
동시에 하늘에서 새와 비슷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둘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무연은 다급히 검을 들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런데, 하늘에서 고속으로 하강한 몬스터는 단과 무연이 아닌 만티코어를 덮쳤다.
키에에에엑!
하늘에서 내려온 몬스터는 독수리 같은 발톱으로 만티코어의 안면을 공격했다.
불의의 일격에 만티코어는 발버둥을 쳤다.
파란 날개와 칼날처럼 날카로운 부리.
청조였다.
“단 아저씨!”
익숙한 목소리에, 단은 고개를 돌렸다.
독수리와 사자를 반씩 섞어 놓은 듯한 영물.
그리핀을 탄 리옐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 *
“좋은데.”
나는 이름 없는 검을 내려다봤다.
내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때 결정적 단서가 됐던, 이름 없는 검의 본신.
한없이 나약하고 얇으면서, 그 어떤 검보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검.
퀸틴 이후로, 신성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검집을 부수고 있었다.
시험 삼아 사용해 본 것인데,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뛰어난 검사에게는 나뭇가지도 검이라고 했던가.’
옛 동대륙의 격언 중 꽤 기억에 남는 말이었다.
도구가 아니라, 그 도구를 쓰는 자가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 격언은 틀렸다.
‘그냥 검을 쓰면 될걸, 굳이 나뭇가지를 검처럼 쓸 필요 있나.’
격언에 나온 뛰어난 검사가 다른 뛰어난 검사와 겨룬다고 생각해 보자.
한쪽은 나뭇가지, 한쪽은 명검을 들었다.
명검을 든 쪽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서, 자신의 힘을 보강시킬 만한 도구를 괄시하는 건 오만이다.
요아힘 월베른이나 전생의 나 정도 됐다면 또 모르겠으나.
‘마음에 들어.’
그런 부분에서, 이름 없는 검은 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다.
오러를 머금는 것으로 아우나(Aunar)의 효율을 증폭시켜 준다.
그 덕분에 이론으로만 연구하던, ‘산 자르기 따라잡기’도 성공했다.
요아힘 월베른의 일격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긴 했어도, 이 정도면 성공이다.
따라 할 엄두도 안 났는데, 반신화와 이름 없는 검 덕분에 얼추 비슷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럼 퍼포먼스는 됐고.’
여기까지는 웨스트리아를 위한 퍼포먼스였다.
검을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아무래도 검은 일대일에 최적화된 무기다.
마법이라는 공성 병기가 있는데, 굳이 검을 사용할 이유는 없었다.
스릉.
이름 없는 검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나는 대마법사다.
지금까지는 검을 보조하는 식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그것이 효율면에서도, 힘을 적당히 감추기에도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나 서클을 7개 정도 보유한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나 정도 더 만들면 여유롭게 할 수 있겠지만.’
딱 탑주급의 마나 서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었다.
7서클과 8서클은 거의 천지 차이였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면 초반에 비해 많은 진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마침 마법 마렵던 참이었는데. 잘됐어.”
정말 오랫동안 억눌러 왔다.
검을 주로 사용한 것은 검을 수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한 번쯤은 마법을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특히 이런 대규모 전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다.
키이이잉…….
서클 부스트(Circle Boost)의 효과로, 일곱 개의 마나 서클이 맹렬한 회전을 시작했다.
나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마법을 준비했다.
아무래도 지금 사용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지만.
그것보다, 마음껏 원하는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더 즐거웠다.
나중에 웨스트리아 측에서 추궁할 수도 있지만, 드래곤이 했다고 변명하면 그만이다.
‘단은…….’
날개를 크게 움직이며 남문 쪽으로 향하는 두 마리의 새가 보였다.
그리핀과 청조, 리옐이었다.
돌아가는 걸 보아 전장에 있던 단을 구출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더욱 거리낄 것도 없다.
왕국의 방패 쪽까지 여파가 닿지 않게 조심하면 그만이다.
생존자가 더 없다는 것도 이미 체크했고.
서비스 삼아 온전한 사체만 피하면 될 것이다.
“일단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는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몬스터들이 주춤 물러섰다.
여태껏 신성이 힘을 감춰 주고 있었는데, 마리나에게 보낸 탓에 다 드러난 모양이었다.
갈무리할 수도 있었지만, 여기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마 저것들에겐 내가 드래곤처럼 보일 것이다.
나는 저 귀여운 놈들을 위해 준비한 종합 선물 세트를 꺼내 들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 * *
목 뒤가 서늘해지는 감각에, 러셀은 반사적으로 가시를 쐈다.
노리는 것은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된 둘.
마리나와 신성이었다.
-어허.
신성은 러셀을 꾸짖듯 한 번 노려보았다.
가시가 공중에서 정지하며, 두 동강 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신성 앞에 있던 하만이 두 무릎을 꿇었다.
오베이어는 당황했지만, 하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감격한 듯한 얼굴로 신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오래도록 기다려 왔습니다. 잠시나마 당신을 의심한 나약한 저를 용서하소서.
-갸륵.
-또한, 부디 사악한 존재로부터 저희를 구원하소서.
-확인.
신성은 지그문트 마이어의 힘이었다.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신성에게 있어 1순위는 지그문트였다.
하지만 여태껏 목오를 기다려 온 사제들은 신성의 눈에 밟힐 수밖에 없었다.
이를 눈치챈 지그문트는 마리나를 구할 겸, 목오의 사제들에게 개입하는 것을 허락했다.
대신 신성은 성벽으로 가기 전, 지그문트 마이어와 단단히 약속을 해야 했다.
최대한 직접 개입은 피하겠다고.
-혼냄.
신은 신자의 기도를 명분 삼아 개입을 줄일 수 있다.
그런데도 신성이 직접 힘을 행사하는 건 지그문트가 어느 정도 손실을 감수한 일이다.
신성은 지그문트에게 감사를 느끼는 한편, 최대한 빠르게 러셀을 끝장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시간을 끌며 신성이 힘을 더 소모할수록, 지그문트의 힘을 빼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신성은 지그문트가 으레 그렇게 하듯 손목과 목을 풀었다.
-각오.
러셀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가 마주하고 있는 상대는 다른 무엇도 아닌 신의 힘, 신성.
아직 신의 대리인으로써 미숙한 편인 마리나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도망쳐야 한다.’
맞서 싸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손가락만 닿아도 소멸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이상하게도 신성은 도망칠 거면 도망쳐 보라는 듯 러셀에게 턱을 까딱였다.
러셀은 전장 틈으로 들어가 숨을 요량으로, 아래를 확인했다.
쿵.
러셀은 돌연 거대한 납덩어리가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고, 공포가 머리를 잠식했다.
아주 멀리, 작은 존재가 분명히 눈에 들어왔다.
금발의 청년은 분명 황탑에서 자신이 미로로 보냈던 불완전한 신.
지그문트 마이어였다.
‘어, 어떻게?’
다섯 번째 틈의 주인 메이저와 첫 번째 틈의 주인, 마누엘이 미로를 지키고 있을 터였다.
이리 빠른 속도로 미로를 탈출한 것도 모자라, 전장에 나서기까지 했다.
더욱 두려운 점은, 전장 전체가 그에게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힘을 숨기고 있었구나!’
신성을 잠시 외근 보낸 지그문트는 온전한 힘을 드러낸 상태였다.
탑주급의 마나와 소드 마스터급의 오러뿐만 아니라, 중위에 해당하는 격이 드러났다.
러셀은 강한 만큼 그 격의 차이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저 정도 힘을 지닌 존재라 할지라도 혼자서 저 정도 병력을…….’
러셀이 상황 판단을 끝내기도 전에,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규모 공격 마법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마나 메이즈 현상이었다.
어느 정도 마법에 대해 지식이 있는 러셀이었기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쿠구구구구…….
살을 찢을 듯한 한기와 함께,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얼음이었다.
불꽃을 얼린다는 냉기의 폭풍, 7서클 대규모 공격 마법 블리자드(Blizard).
-저게, 뭐야……?
러셀은 허망한 얼굴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불완전한 신, 지그문트 마이어가 캐스팅한 마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낮게 깔린 먹구름에서 간헐적으로 빛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제네시스 라이트닝(Genesis Lightning).
‘말도 안 돼. 7서클 마법을 더블 캐스팅 했다고?’
그 어떤 마법사가 들어도 헛소리로 치부할 법한 일이 그의 눈앞에서 발생했다.
그런데, 돌연 땅울림과 함께 성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지진과 함께 전장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떨어지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자연적인 지진이 아니었다.
지진을 일으키는 7서클 대규모 공격 마법, 어스퀘이크(Earthquake).
두 눈으로 7서클 마법을 트리플 캐스팅한 것을 목격한 러셀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 씨발.…
* * *
나는 기지개를 켰다.
발밑으로 초토화된 전장의 풍경이 보였다.
몬스터가 너무 많아 바퀴벌레 떼를 보는 것 같아 징그러웠는데, 이 정도면 비교적 깔끔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허리에 달려 있던 마도서, 그리무아르가 사족을 넣었다.
“미친놈.”
“책 쪼가리. 말이 너무 심하다.”
잠깐 빈혈이라도 온 것처럼, 어지러움과 함께 탈력감이 동반됐다.
마나를 죄다 쏟아부어, 보조 마법 몇 번 쓸 정도만 남긴 상태.
위력은 확실하지만 그만큼 마나 소모도 장난 없었다.
“이제 좀 시야가 트이는군.”
마계의 몬스터는 체내에 마기를 품고 있다.
비록 소량에 불과할지라도, 몬스터가 죽으며 흘러나온 마기는 일대를 오염시킨다.
즉 선발대는 남부 들판을 마계와 비슷한 환경으로 조성하기 위한 자폭 부대였다.
황탑주의 부재에 더해 전력이 분산되기까지 한 웨스트리아였기에, 이에 털릴 뻔한 것이다.
‘일단. 마계화는 막았고.’
원래 이토록 마나 소비만 크고 화려한 마법은 선호하지 않는다.
마나로 남부 들판 전역을 뒤엎어, 마계화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상처의 조각이 박힌 왕관만 찾으면 된다.
마침 러셀이 열어 놓은 큼직한 포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가.’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가 포탈 밖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에 당황한 건지, 두리번거리다가 기겁하며 포탈 속으로 후퇴했다.
나왔으면 뒈졌을 텐데, 눈치 빠른 소대가리였다.
왕관이 올려진 제단은 비교적 멀쩡했다.
블리자드의 여파로 얼어 있긴 했으나, 어쨌든 그 덕분에 부서지는 것은 면한 모양이었다.
멜트 다운(Melt Down).
열기로 얼음을 녹인 뒤, 왕관을 집어 들었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만큼, 왕관은 웨스트리아 왕가에 돌려줄 생각이었다.
문제는 왕관 중앙에 박힌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보석, 상처의 조각이었다.
‘이걸 고작 포탈의 동력으로 쓰다니. 멍청한 놈들.’
전생의 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을 만큼 귀한 물건이었다.
특히 이 정도 크기를 자랑하는 건 정말이지 드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챙기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에라이. 아까워라.’
나는 왕관에서 추출한 상처의 조각을 움켜쥐었다.
아까워도 어쩔 수 없었다.
리옐을 통해, 메어리 남매가 만들어 낸 몽계의 내가 경고한 ‘본대’.
멜릭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일대의 마계화를 저지했다고는 하나, 위험할 수 있었다.
특히 마나를 상당히 소모한 지금은 더욱 그랬다.
파삭.
상처의 조각이 바스러졌다.
* * *
종합 선물 세트에서 살아남은 마족군의 잔당은 순식간에 토벌됐다.
마찬가지로, 성벽 위에서 한바탕 난동을 피우던 러셀도 토벌이 완료됐다.
하만의 기도에 응답한 신성에게 연타를 맞은 끝에 소멸 당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나고, 우리는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다.
조만간 왕가에서 부를 테니, 치료도 하고 여러모로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했다.
침대 머리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은 마리나는 영 어색한 눈치로 나를 흘겨보았다.
“저기, 도련님.”
“왜?”
“언제까지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어야 하나요?”
“기다려 봐.”
머지않아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것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리옐이었다.
양손으로 작은 그릇을 들고 있었는데,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가 담겨 있었다.
마리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리옐을 바라보았다.
“리옐 님?”
“언니, 식사 시간이야!”
“무려 리옐 수제다.”
리옐은 기세등등하게 마리나에게 다가갔다.
저 수프는 무려 여관의 협조를 받아 리옐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비록 맛은 의문스러울지언정 그 정성만큼은 확실히 보였다.
침대 옆에 있던 작은 의자를 타고 올라간 리옐은 수프를 떠서 후후 불었다.
“자. 아, 해.”
“네, 네? 저요?”
“그래. 빨리, 아!”
“……아.”
“옳지. 착해.”
리옐은 기어코 마리나의 입속에 수프를 쏙 넣어 주고야 말았다.
흡족한 표정이 된 리옐이 마리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수프를 우물거리던 마리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리옐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리나를 살폈다.
머리 위의 새싹이 초조한 듯 흔들렸다.
“맛없어?”
“아니요. 너무 맛있어요. 과분해서요.”
“다행이다!”
신난 리옐은 바로 다음 수저를 준비했다.
시녀인 만큼 극진한 대접이 곤혹스러웠는지, 마리나는 울상이 됐다.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리옐이 의욕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저렇게 됐다.
“도련님,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받아들이렴. 복리후생 차원이니까.”
리옐과 장시간 접촉하는 것은 신성력 회복에 도움이 된다.
더하여, 보상의 의미도 있었다.
세상에 그 어떤 신자도 신이 직접 떠먹여 주는 수프를 맛볼 기회는 없다.
리옐은 마리나에게 수프 한 입을 더 먹여 주며, 내 쪽에 흥미를 보였다.
“아빠, 아빠는 뭐 만들어? 수프?”
“아니. 단의 복리후생.”
플라스크 안에 담긴 보라색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옆에서는 고급 영약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만드라고라가 있었다.
비명을 지르려는 것을 사일런스(Silence)로 봉쇄해 놓은 상태였다.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은, 내가 보기에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점도가 기이할 정도로 높았으며, 시시각각 색깔이 변했으니까.
안색이 창백해진 마리나가 나지막이 질문했다.
“그거, 먹는 용도는 아니죠?”
“먹는 용도지. 내가 먹는 건 아니지만.”
몸에 좋을수록 입에 쓰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인즉슨, 이건 몸에 정말 많이 좋다는 얘기였다.
단은 무연과 함께 잠시 외출한 상태였다.
누구 병문안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 * *
“심려 끼쳐 드려 송구하옵니다. 아바마마.”
“아니, 됐다. 마족이 왕성 내부에 있을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
웨스트리아 왕성.
멜릭에게 세뇌 당했던 왕자, 프레드 웨스트리아는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꿈속에서 벌어졌던 메어리 남매와 멜릭 간의 전투를 기억 했기에 진상을 파악한 것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생각을 고쳐먹었고, 엘레너와 같은 강경파로 돌아섰다.
국왕 볼프강 웨스트리아는 프레드를 걱정했다.
“누님께서 현명하게 대처해 다행입니다.”
“그렇지. 하마터면 웨스트리아가 무너질 뻔했으니.”
여러 부분에서 엘레너 웨스트리아의 공로가 컸다.
국왕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직접 나서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보여 줬다.
뭐니 뭐니 해도, 레온하트의 수호자라는 인물을 불러들인 것 또한 엘레너였다.
실제로는 지그문트가 자발적으로 찾아온 것이었으나,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수호자의 수하라고 알려진 기사와 시녀 또한 큰 공로를 세웠다.
“국왕 폐하, 엘레너 웨스트리아 왕녀님이십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엘레너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격식 있는 예복 차림이었는데, 이는 루터 레온하트와의 회담 때문이었다.
일이 잘 풀렸는지 안색이 밝은 한편, 프레드가 걱정되는 듯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프레드와 엘레너의 사이는 나쁜 편이 아니었다.
다만 팔베르크 제국과의 분쟁에서 의견 차이를 보여 충돌 했을 뿐이었다.
“아바마마, 프레드.”
“누님.”
“이야기는 잘 끝났더냐?”
엘레너는 레온하트 왕국과 동맹에서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는 국왕이 직접 엘레너를 밀어준 덕분이었다.
마족군 뒤에 팔베르크 제국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국왕이다.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서 갈등하던 국왕에게는 결정을 내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적지 않은 희생이 있었던 전투였던 만큼, 더욱 그랬다.
“다행히, 양보를 많이 해 주셨습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와 함께 에노드로 방문한 셋째 왕자, 루터의 제안은 합리적이었다.
국왕을 비롯한 왕가의 인물들뿐만 아니라 온건파의 귀족들도 솔깃할 만한 수준이었다.
현재 매우 불리한 입장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웨스트리아의 심정을 이용할 만도 했다.
더군다나 수호자의 활약으로, 빚까지 떠안은 상태였다.
어느 정도 불공정한 제안을 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루터 레온하트는 그러지 않았다.
“이래서야 추진할 수밖에 없겠군.”
“레온하트의 수호자. 그 한 사람만으로, 이유는 충분하다고 사료됩니다.”
“아무리 지상에 개입을 적게 한다고 하나, 드래곤이니.”
“하물며 팔베르크 제국이 마족과 연관이 있다면.”
“리에이트 교국의 성자와도 친분이 있다 들었다.”
레온하트의 수호자.
지그문트 마이어는 포섭해야만 하는 인물이었다.
볼프강이 틈에서 수호자의 정체를 확인했음에도 함구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가면을 쓰지 않고 움직인 것도 모자라, 수하까지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냈다.
아마 볼프강이 말하지 않더라도 조만간 제 정체를 드러낼 요량인 듯싶었다.
* * *
팔베르크 제국, 응접실.
기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인물이 앉아 있었다.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쪽은 황제, 라그힐 팔베르크였다.
맞은편에는 린시스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교양이 느껴지는 우아한 동작으로 찻잔을 기울였다.
기이하게도, 그 앞에는 티 포트 대신 술병이 있었다.
“라그힐, 뭐 할 말 없니?”
“웨스트리아에 마족군이 대거 나타났다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들었지. 기묘한 일이더구나. 하필 제국과 대립하고 있던 웨스트리아라니.”
“월베른 경께선 서쪽이 불안정하다고 하시더군요. 그와 관련된 것 아니겠습니까.”
린시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라그힐은 시종일관 여유롭기 그지없는 태도를 보였다.
“영 진척이 없으신가 보군요.”
“잘도 감췄더구나.”
“숨길 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무고하니 말입니다.”
“그 능구렁이 같은 점. 델의 안 좋은 점만 쏙쏙 골라서 닮았어.”
린시스의 떠보기에도 불구하고, 라그힐은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델 로안의 장례식 이후로 꽤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린시스 화이트는 마족과의 거래를 황제가 지시했다는 걸 밝혀내지 못했다.
모든 정황은 철저하게 아페 백작의 독단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꾸며져 있었다.
애당초에 일이 틀어지면 모든 걸 뒤집어씌울 요량이었을 것이다.
“아페 백작의 친지는 전부 사형에 처했습니다. 무엇을 더 원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적어도 관련 없는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바란 적은 한 번도 없단다.”
“악마 숭배자의 친지가 무고하다고 표현하시다니요. 사적인 자리가 아니었다면 문제가 됐을 겁니다.”
“얄밉게 말하는 점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린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린시스는 델 로안이 황제, 라그힐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부러 계속 언급함으로써 심기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라그힐은 아주 조금의 동요조차 없었다.
마침 시종 하나가 라그힐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라그힐은 회중시계를 확인한 뒤,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지만, 즐거운 담소는 여기까지 해야겠군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린시스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라그힐은 그런 린시스를 두고 주저 없이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린시스의 앞으로 푸른 머리카락의 청년이 나타났다.
블루 드래곤, 파베스였다.
파베스는 마법으로 여러 겹의 보호막을 두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들락거릴 셈이냐, 린시스.”
“저거 발뺌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소용없는 일이다.”
“알고 있어.”
파베스는 잠깐 린시스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그 인간을 위해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나는 규율대로 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다면, 조만간 제국을 지켜볼 명분이 사라진다는 것도 알겠군.”
“큰 전쟁이 벌어질 거야. 많은 사람이 죽어 갈 거고.”
“흠, 서대륙이 불안정한 건 사실이지만,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규율을 어기지 말도록.”
파베스는 그 말을 끝으로 모습을 감췄다.
한숨을 내쉰 린시스는 찻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비워 냈다.
술이 유독 썼다.